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는 노래도 있고 애국가 가사에도 들어있지만 법적으로 나라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나라 최고훈장 명칭이 무궁화 대훈장, 국기의 깃봉은 무궁화 봉우리 모양 등 국화(國花)가 무궁화임을 전제하는 규정들은 다수 존재하는데도 나라꽃으로 지정받지 못한 이유를 자료를 통해 알아봤다.
무궁화를 국화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측 주장은 무궁화는 1000년 이상을 우리 겨레와 함께한 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혼의 꽃이라고 말살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애국가 가사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들어가 있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무궁화의 수호·보급을 위해 헌신하는 등 무궁화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역사성이 있는 꽃이다. 국화로 지정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내부적으로 국민의 단합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법제화를 찬성한다.
무궁화를 국화로 법제화하는데 반대하는 논거는 무궁화는 황해도 이북에서 잘 자라지 않는 지역적 제한성이 있어 남북통일 후에 말썽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무궁화는 교잡이 쉬워 국내에 도입된 무궁화의 품종이 다종다양한 관계로 어떤 품종을 국화로 해야 할지 법제화가 쉽지 않다. 인도 원산의 외래종이며 병충해에 취약하고 개화 기간이 7~9월로 짧다는 등의 이유가 열거되어 있다.
외국의 입법례를 보더라도 헌법·법령·관습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국기·국가(國歌)의 경우와 달리, 연방법으로 장미를 법제화한 미국 외의 대다수 국가가 국화에 관한 법령상의 근거 없이 관습에 따르고 있다는 점도 법제화를 서두르지 않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미 대다수 국민들이 무궁화가 나라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수한 품종을 정해서 국화로 인정하면 될 것이다. 무궁화를 대대적으로 피우는 금강 자연휴양림에 있는 무궁화동산에 가보면 놀랄 만큼 무궁화가 싱싱하게 잘 피어있다. 무궁화 가꾸기 팻말을 읽어보니 무궁화는 햇볕과 거름을 좋아해서 일반 나무보다 50% 정도 비료나 거름을 많이 줘야 한다는 재배법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와 가지고르기를 자주 하여 꽃눈이 많이 생기게 하고 무궁화는 새싹이 나올 때 진딧물이 많이 생기므로 디프테렉스나 메타시록스 등 살충제 1000배액(물 1000cc에 살충제 1cc)을 골고루 뿌려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즙은 무좀, 설사, 눈병, 생리 불순, 위장병 등의 여러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무궁화의 성분 분석이 없는 상태다. 그만큼 무궁화에 대한 국화로서의 대접이 소홀하다. 무궁화 뿌리나 줄기, 나아가 잎이나 꽃의 성분을 분석하여 효용 가치를 더 발견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우리가 모르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무궁화가 국화가 된다면 무궁화 가꾸는 방법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어 어릴 적부터 교육하면 될 일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무궁화강산을 만들고 외국인을 초청한다면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여름철 폭염으로 낮 시간대 활동이 어려워지자 저녁에 외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여름날 낭만을 즐기며 더위를 쫓을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바로 ‘백인제가옥 야간 개방’이다.
서울시는 인제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백인제가옥을 매입해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백인제가옥은 북촌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한옥으로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안옥윤 역)의 집으로 나와 더 유명해진 북촌의 대표 한옥이기도 하다. 8월 말까지 주말 야간 개장을 한다. 근대 상류층 한옥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행사로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백인제가옥은 2460㎡ 대지 위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개인이 살았다고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했던 주택의 특징을 해설사를 따라가며 눈으로 확인했다.
백인제가옥은 무료관람이라 아무나 와서 볼 수 있지만, 해설프로그램을 예약한 사람에 한해서 해설사와 함께 실내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내부까지 둘러보려면 서울시공공예약시스템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연결해 이동이 자유롭게 했다. 또한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많이 사용하고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둔 것은 건축 당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안채의 일부가 당시 우리나라 한옥에선 볼 수 없던 2층으로 지어졌는데, 온돌을 사용할 수 없는 2층 방에서는 정치적 목적의 모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화 '암살'과 오버랩 되면서 갖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가장 좋았던 건 별당채다. 해설사와 함께 누각 마루에 앉으니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북촌의 까만 지붕 위로 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탁 트인 마루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시원한 마루에 앉아 동네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북촌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까지 둘러보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안방, 건넌방은 물론 다락에도 올라가 보고 좁은 일본식 복도를 걸어보며 사랑채에 놓여있는 백인제 가족의 사진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지니 한옥은 더욱 고풍스러웠다. 조명이 켜진 한옥은 카메라를 들지 않곤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한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마당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살’에 나왔던 사랑채 마루 소파는 인증샷 장소로 가장 인기였다.
여름날 백인제가옥을 보려면 야간을 추천한다. 정해진 경로 없이 한옥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청중은 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서 박수쳤고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제2인생을 준비하는 은퇴자를 비롯해 교사, 시인, 사진작가 등 모인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도 참 다양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들 앞에 선 강연자는 이동순(李東洵·68)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라는데 옛 대중가요에 심취해 살다 보니 ‘대중음악 연구가’라는 이름표도 늘 따라다닌다.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로맨스그레이 이동순 대표는 강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노래를 직접 들려주며 이해를 돕는다.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일깨우며 살고 있는 이동순 대표의 이야기를 동년기자가 직접 들어봤다.
6월 말 만난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로 풀어보는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야기경영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미래유산과 서울시가 후원한 이 강좌는 서울미래유산(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현재 문화재 등록이 안 된 서울의 근현대 유·무형 유산) 중 하나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이어 역사를 이해하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가수의 인생 스토리는 물론이고 서울의 옛 거리도 슬라이드 사진으로 더해졌다. 이동순 대표가 맛깔나는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청중도 따라 부르면서 시간여행을 하듯 추억 속으로 함께 잠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대중가요 사랑과 전파에 쏟는 열정은 국보급이다. 이동순 대표는 대구 계명문화대학교 평생교육원의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며 힐링하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센터 이름을 지었다. 주 활동무대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지만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대중가요 연구가이기에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모시기 바쁘다. 지금까지 공연을 겸한 강연을 500회 넘게 한 것 같다고.
대중가요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동순 대표는 대학 졸업 무렵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를 쓰는 문인이자 학자로서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를 엮어 ‘백석시전집’(1987)을 발간했으며 ‘백석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인의 삶 외에 특이한 이력 하나가 바로 ‘대중가요 연구가’라는 타이틀이다. 대중가요에 심취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동순 대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산달을 얼마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답니다. 피란도 못 가고 경북 김천 선산 가까이에 있는 초가에서 저를 낳으시곤 10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딸자식 둘은 계모 설움 안 받게 해 달라, 포대에 싸여 윗목에 누워 있는 어린 핏덩이는 곧 나를 따라올 테니 걱정 안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유년 시절이 되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유난히 설움과 눈물이 많았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수성 또한 섬세하고 예민했다. 이 시절의 성격이 시인이 되는 데 일조한 것 같다고 이동순 대표는 회고했다.
“전매청 창고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놓고 ‘정오의 희망음악’이라는 방송을 듣곤 하셨어요. 이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그리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같은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어요.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도 저런 목소리였을 거야’라며 상상하곤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빈 종이와 연필을 찾아 미친 듯이 가사를 옮겨 쓰기도 했다. 가사를 적으면 노래가 외워지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이 그를 대중가요에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반 가득한 친구 집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등하교를 같이하던 길목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 방에는 탐나는 예쁜 전축과 함께 음반이 가득했다. 혼자 몸으로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구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전축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 음반이 가득 꽂힌 방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 온종일 노래를 들으며 대학노트 두 권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 가사를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친구 집에서 기록했던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한 480곡쯤 될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 대중가요 연구의 밑천이 되었어요. 가요 평론가로 가요 해설가로 또 노래를 부를 때도 당시 기억을 다 써먹고 있습니다.(웃음)”
학창 시절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잘 부르기까지 하니 섭외 1순위가 당연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등 어디서든 칭찬받는 것이 좋아 능청스럽게 무대에 선 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치 남자 기생이 된 거 같았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임이 노래 부르게 하고 술 한 잔씩 따라주곤 했거든요. 그야말로 노래 사역을 한 셈이었어요.”
꿈을 포기하고 대중가요에 빠져들다
이동순 대표의 젊은 날 꿈은 방송인이었다. 대학 시절 방송반 활동을 쭉 했기에 당연히 기자나 라디오 PD쯤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시험 신원조회에서 친척의 부역 기록이 발견됐다. 연좌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방송인의 꿈은 펼치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누구보다 빨리 국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고서와 음반도 사 모을 수 있었다. 천직처럼 느꼈던 대중가요 연구는 1980년대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살펴보니 일제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이 대부분 가사를 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사가 굉장히 품위가 있고 훌륭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중가요를 ‘뽕짝’ 혹은 ‘딴따라’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모멸적이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딴따라는 두드리고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요.”
당시 대중음악가들이 자해의식, 피해의식 등 상처가 많았다고 이동순 대표는 진단한다.
“대중음악가가 술집에서 서양음악을 하는 작곡가나 성악가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서양음악 가들은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음악계에 반상계급 의식이 존재했는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중가요 연구에 심취하다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를 ‘문화적 번지를 잃어버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음악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양음악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가요’야말로 민족 예술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도구인데 ‘왜 이렇게 천대를 받나!’ 하는 생각에 1981년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요에 대한 에세이, 신문 칼럼, 논문을 수시로 썼다. 2001년 월간조선에 1년여 기고했던 옛 가요 관련 에세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요 연구가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갈 즈음, 대구MBC에서 연락이 왔다. 옛 가요를 중심으로 한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원래 방송인이 꿈이었으니까요.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행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방송을 함께할 작가를 구해주기로 했으나 옛 노래에 대해 잘 아는 작가가 없었다. 결국 원고 준비에서부터 내레이션, 노래 선곡까지 이동순 대표 혼자 도맡아야 했다. 1인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주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방송을 했어요. 나들이 갔다가 길이 막힐 때 라디오를 트는 황금시간대였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죠.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송 진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잖아요.”
자부심도 대단했다. 5년 동안 이어온 방송 진행으로 가요 연구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은 전국에서 강연 초청이 물밀듯이 들어와 정신없다고. 청중에게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아코디언도 배웠다.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생겨나 색소폰, 장구는 물론 판소리할 때 쓰는 소리북과 거문고 등도 익혔다.
“삶이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질 수 있는 악기가 늘어나니까 아주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걸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강연 반, 공연 반 이렇게 합니다.(웃음)”
악기를 배우고 보니 재능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산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아가 치매 노인들에게 옛 노래를 들려주곤 한다고.
“요양원 직원들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치매 노인들을 미리 홀에 모아 앉혀놓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목석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노인들을 위해 연주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10분, 20분이 지나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의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낄 때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떠돌이 유랑가수로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다
노래방 가사책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노래방 가사책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생일대의 결투가 있다. 바로 김지하 시인과의 대중가요 부르기 대결이다. 김지하 시인은 가왕(歌王) 조용필도 꺾은 문단계 노래 지존으로 불렸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댔다. 보다 못한 김지하의 후배가 “청주 시골뜨기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놀리자, 김지하는 “그런 놈은 우리가 꺾어야지” 하면서 대결을 신청했다. 배심원도 배석할 정도로 큰 대결이었다.
“같은 노래도 안 되고 상대방이 부른 노래도 부를 수 없고 별별 규칙을 다 만들어 노래 대결을 했습니다. 밤 9시에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도 안 끝났어요. 김지하 씨가 ‘아이고,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처음 보네.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시는 안 할란다!’ 하면서 항복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인 김성동 소설가가 이 일화를 이동순 대표가 1987년에 출간한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발문에 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대결은 이동순 대표가 대중음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이동순 대표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고 잘 부르지만 특히 고운봉의 ‘명동 부르스’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부른다. 자신의 음색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는 역시 이화자의 ‘어머님 전상서’, 백련설의 ‘어머님 사랑’, 현인의 ‘비나리는 고모령’ 등이다. 어머니와 관련한 노래나 글자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학자의 길을 걷지 않고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함경도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악사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옛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떠돌이 유랑 가수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 옛 노래를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대중가요 연구가. 이동순 대표의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모습 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중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이 숨겨져 있다.
자고 나면 줄줄이 올라오는 다른 동년기자들의 글이 쌓여 가도록 생각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동년기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글쓰기’에 대한 기본기를 다지고 싶었다. 무조건 해보자는 결단으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 물론 기사를 쓰는 형식과는 다르겠지만, 기본 글쓰기가 능수능란해지면 기사에서도 ‘요것 봐라?’하는 재치를 가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2막 글쓰기’라는 강의 부제에 걸맞게 50대부터 80대까지의 학생이 모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총 8주 과정으로, 장르나 주제에 관계없이 글을 메일로 전송하면 선생님의 첨삭 출력물을 수업 전에 받아볼 수 있다. 30여 명 수강생 중에 보통 10명 정도의 작품은 선생님이 직접 읽고 학생들은 경청한다. 그러고 나서 토론을 하는데, 이때 나오는 이야깃거리가 아주 풍성하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자란 유년기를 풀어낸 글, 울음 끝에 웃음을 주는 글, 자신의 일터가 고스란히 담긴 글 등 각양각색이다. 그중에서도 수십 년 전 첫사랑 얘기는 단골 메뉴다. 조각보 같은 학생들의 재주에 감탄이 이어진다. 그 틈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맛에 다음 시간이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필 폭염기와 수강 기간이 겹쳐 힘들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대전에서 KTX를 타고 다닌다는 유치원 원장님은 술떡을 한 상자 해 오셨다. 그다음 주는 다른 수강생이 달걀을 삶아 왔고, 누군가는 찰떡을 가져오는 등 수업 내내 간식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학생들의 인정과 열정 덕에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는 가는 더위마저 퍽 아쉬웠다.
글쓰기를 배우려면 책으로 독학할 수도 있고, 강연을 찾아갈 수도 있다. 또, 이런 수업을 통해 자신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느낌을 나누며 전문가에게 조언을 얻는 방법도 있다. 내 글의 민낯을 보이는 과정이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토론과 개별 첨삭은 우등생이 되기 위한 오답노트 같기도 하다. 달고 쓰게 공부한 노트가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글 좀 쓴다는 속 빈 격려라도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수업 내내 기록이 꼼꼼해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우선 펜을 잡아 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글쓰기 수업이었다. 하루 한 시간 무조건 써보는 작은 습관이 중요함을 인정하게 됐다. 처음엔 잡지 기사를 잘 써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더 큰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바라고 원해서 한 일인 만큼, 글쓰기가 나에게 인색함 없는 행복을 한없이 안겨 주리라 생각한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뮤지컬 한 편을 봤다. 제목은 신중현의 ‘미인’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음악계의 거장 신중현의 작품을 실컷 들을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신중현의 ‘미인’ 그 음악이 탄생하게 된 이야기를 그린 걸까? 아니면 젊은 시절 너무나 좋아했던 수많은 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을 말하려는 걸까?
여고 시절 친한 친구와 듀엣으로 펄시스터즈의 히트곡을 연습해 친구들 앞에서 불러보는 등 한때 가수의 꿈을 키운 적도 있다. 그때 신나게 불렀던 곡이 펄시스터즈나 김추자의 노래였는데 거의 신중현의 작품이다. 그의 음악을 좋아했고 따라 부르며 연습했던 시절이 새삼 그립다.
뮤지컬 ‘미인’에서 당시 명곡을 다시 듣게 되니 철없이 순수했던 시절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부풀었다. 대체로 뮤지컬이나 연극, 오페라를 보러 갈 때면 미리 인터넷으로 작품의 내용이나 정보를 검색했지만, 이날은 신중현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으로 내용을 알아보지 않고 갔다.
아트센터 로비의 포토존에 ‘신중현은 우리 대중음악 역사의 설계자이며 존재 자체로 우리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역사이고 대중음악 태동의 순간이 그의 노래와 삶에 담겨있다’고 씌어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유행했던 ‘늦기 전에(김추자 노래)’, ‘커피 한잔(펄시스터즈)’, ‘님아’, ‘꽃잎’, ‘봄비’, ‘빗속의 여인’, ‘미인’, ‘아름다운 강산’ 등 주옥같은 노래의 설명이 있었다.
막이 오르고 공연이 시작됐는데, 무대의 배경이 1930년대 일제 강점기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대했던 나의 젊은 시절이 무대가 아니라 조금 실망스러웠다. 알고 보니 1930년대 일본에 대항해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중현의 명곡을 넣어 뮤지컬로 탄생시킨 것이었다.
무대는 경성의 화려한 밤을 밝히는 ‘하륜관’으로 꾸며졌다. 이곳에서 무성영화 변사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강호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형 강산, 강산의 친구 두치, 강호와 음악을 같이 이해하며 친해진 일본인 마사오, 그리고 아름다운 시인이자 가수인 병연이 주인공이다. 강호는 형들이 무언가 자기를 빼놓고 일을 벌이려는 걸 알고 친구 마사오에게 이야기했다가 형이 잡혀가게 만든다. 형과 친구들은 독립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친구로 알았던 마사오는 일본 경찰로 냉혈한이다. 이후 사건이 전개되면서 상황에 들어맞는 신중현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후랏빠 시스터즈라는 듀엣 가수가 ‘커피 한잔’을 신나게 불렀고 많은 노래가 귓전을 울렸다.
이 뮤지컬은 독립투사의 이야기에 신중현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미리 검색해서 배경을 알고 봤으면 더 이해가 빨랐을 텐데, 기대했던 내 젊은 날이 무대가 아니라 좀 아쉬웠다. 그래도 주옥같은 신중현의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어 반갑고 즐거웠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가족은 60년 전 납북된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됐다. 여태껏 한 번도 시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셨다면 지금 아마 100세는 넘기셨을 텐데. 살아계실 거라는 기대를 뒤로하고 5년 전 향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시어머니 기일에 맞춰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에 만났다. 당시로써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하고 결혼한 신식 커플이었다. 시어머니는 조선말 높은 벼슬에 재력까지 겸비한 외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음악대학에서 공부하셨다. 많은 여성이 한글 한 자 못 깨우치고 까막눈으로 살던 시절, 만석꾼의 막내 외손녀였던 시어머니는 몸종 하나 데리고 오빠가 유학 중인 동경으로 쫓아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어느 전철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시아버지,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 결국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한 당찬 개화기 신여성이었다. 소문난 잉꼬부부로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며 현명한 사랑을 하셨다. 외출해 나갔다가도 식성이 다른 탓에 서로 좋아하는 식당에서 각자 먹고 다시 만났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분 다 개성 강하고 깨어있던 연인이자 부부였다.
이쯤해서 시아버지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봐도 보기 드물다 싶을 정도로 미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 시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하지만, 시어머니 친구들 증언에 의하면 유명한 꽃미남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신혼 초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미남 사는 집으로 소문이 났었단다. 지나가던 이대생들이 열린 대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았다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3남 1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가 싶었더니 한국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원래 시아버지가 아닌 시어머니가 인민군에게 잡혀 당시 서울 국립도서관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찾아가셨다가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공무원 계급 납치 작전으로 시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아버님은 당시 통계청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당시 시어머니 나이 서른여섯.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 땅의 전형적인 양반가 부인이었던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 남편을 빼앗겨 혼자되시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4남매를 혼자 키우고 교육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살아생전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시어머니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은 아버지를 닮아 인물 좋고 똑똑한 자식들이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시아버지를 만나면 ‘당신 없어도 내가 이렇게 애들을 잘 키웠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도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납북자 가족은 심적인 고통 이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신원조회를 당해야 했다. 특히 1970년대 언론계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남편은 해외 출장 때마다 출국 절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혹시라도 외국 출장에서 납북된 아버지와 연락을 할까 봐서 정부 당국에서 의심을 했다.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자유화되기 전이라 일반인의 해외 방문 힘든 마당에 납북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님은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나라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의심까지 해야 하냐?”며 무척 억울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속속 낭보가 전해진다. 815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전사자 유해 송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국내외적인 훈풍과 함께 납북 피해 가족에 대한 정부로부터 합당한 위로나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은근히 기대해 본다.
올해는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1018년, 즉 고려 현종 9년에 중앙관제와 함께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했었다. 당시 전국을 5도 양계(서해도·교주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북계·동계)로 편제하면서 강남도(금강이남의 전북)와 해양도(전남, 광주)를 합쳐 전라도라 명했다. 해당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할 때 나주목(牧)이 된 이래 조선 말까지 900년 남짓한 기간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광주도 그때까지는 나주에 딸린 군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난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 씨의 고향이니 고려 2대 임금 혜종의 외가인 셈이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군의 2차 침입 때는 왕이 나주로 피난을 가며 열흘 남짓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런 '천년 목사 고을'이기에 나주를 첫 답사지로 정하고 나주읍성(사적 제337호)을 가장 먼저 찾아봤다. 아쉽게도 성벽 대부분이 훼철되어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동·서·남·북 4개소에 있던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된 상태다. 읍성의 중심인 목사가 집무하던 관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관아문 정수루(正綏樓)만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과 목사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金鶴軒)이 오롯하다.
나주목 객사와 금성관
객사(客舍)란 고려~조선시대 때 매월 초하루와 보름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신 공간이기도 하다.
나주 객사의 정청은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정문에서부터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3개 문을 거쳐 들어간다. 현재는 금성관 좌우로 날개처럼 이어진 건물인 동익헌과 서익헌 그리고 중삼문과 정문인 망화루가 복원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금성관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나주목사 이 유인이 정문 망화루와 함께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목사 김개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이후 고종 때 다시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파괴됐는데, 1963년과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익헌과 서익헌은 2004~2008년에 복원하였는데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다. 전라도 관찰사 이행(1403~1404년 재임)이 벽오헌(碧梧軒)이라 이름지어 정청과는 별도의 현판을 달았다. 동익헌에서는 요즘 각종 공연이나 발표회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공덕비와 비석군
나주 객사 담장 안쪽 한편으로는 수십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다. 역대 목사(牧使)나 관찰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다.
방방곡곡 면(面) 단위에만 가도 공덕비 한두 개는 서 있으니 천년 목사 고을 나주에 세운 비석들이 만만치는 않을 터.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석이나 귀부의 생김생김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칭송받는 사람의 이름이 낯익어 반가운(?) 비석도 제법 보인다.
나주 금성관은 아직 부분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며, 추가적인 복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료입장이며, 30분 남짓이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다. 수시로 전통공연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니 나주 탐방 시 가장 먼저 들려 볼 것을 권한다. 금성관 앞으로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거리로 서울까지 알려진 맛집들이 즐비하다.
파릇파릇 돋아나 꽃보다 더 예뻤던 새순들이 아스라한 연두색으로 빛나더니 어느덧 짙은 초록으로 무르익어갑니다. 5월 인적이 드문 신록의 숲에서 산객 혼자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호젓한 오솔길을 걷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귀한 꽃 한 송이 만나길 빌었습니다. 복주머니란 한 송이 만나는 큰 운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오복(五福)을 내리는 다섯 송이도 아니고, 만복을 기원하는 열 송이, 수십 송이도 아닌 단 한 송이의 개불알꽃이면 족할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바람에 하늘이 답한 것일까. 일당백(一當百) 기상으로, 저 홀로 핀 단 한 송이 복주머니란을 만났습니다. 한참 동안 만났습니다. 산그늘에 잠겼던 복주머니란에 석양빛이 들어올 때까지 홀로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숲이 아직은 건강하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참 오래가더군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야생의 꽃 한 송이에 무에 그리 호들갑을 떨까 의아하겠지만, 복주머니란의 매력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우선 화려함이 국내에서 자생하는 그 어떤 야생화에 비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유난스럽습니다. 나무가 아닌 풀꽃인데도 큰 것은 50cm에 이를 만큼 키가 껑충한 데다 꽃 색도 붉어 초록의 풀밭 사이에 한 송이만 피어 있어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긋나기로 달리는 3~5개의 타원형 잎도 너비 6~8㎝에 길이가 10~20㎝로 시원스럽습니다. 특히 홍자색 꽃은 곁꽃잎 2개과 입술꽃잎(순판·脣瓣) 1개로 이뤄진 독특한 형태인데, 주머니 또는 항아리 모양의 크기 4~6cm의 입술꽃잎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기 그 이름이 달라집니다. 우선 학명 중 속명 시프리페디움(Cypripedium)은 ‘비너스’를 의미하는 시프리스(cypris)와 ‘슬리퍼’라는 뜻의 페딜론(pedilon)의 합성어인데, 항아리 모양의 입술꽃잎이 마치 미의 여신 비너스가 신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신발처럼 생겼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영어 이름도 ‘숙녀의 슬리퍼’(Lady´s slipper)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진 입술꽃잎을 보고 굳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아하 맞다’ 하고 고개를 끄떡일 만한 다른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로 개불알꽃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 현대적 식물분류학에 따라 처음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에 올라 있는 명칭입니다. 이외에도 요강꽃, 까치오줌통, 오종개꽃, 작란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식물명을 정하는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는 1996년 입술꽃잎의 모양이 전통 복주머니를 닮은 데 착안해 복주머니란으로 통일했습니다. 이에 단번에 식물의 특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옛 이름을 민망하거나 망측하다고 해서 ‘우아한 이름’으로 바꾸는 게 과연 옳은지 생각해볼 일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Where is it?
각종 도감에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야생에서 자생하는 복주머니란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색이나 모양이 화려하고 예쁜 탓에 보이는 대로 남획당해 자생지가 파괴되고 있다는 뜻인데 결국 2012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 즉 특별한 보호관리 대상으로 지정됐다. 때문에 다소 거북하긴 해도 만개한 꽃의 특성을 가장 설명하는 개불알꽃이니 요강꽃이니 하는 원래 이름을 복주머니란이라고 바꿔 부른 뒤 ‘복’에 환장한 손을 타는 수난을 겪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옛날, 이름이 예쁘면 저승사자가 일찍 데려간다는 속설이 있어 귀한 집 자손일수록 개똥이니 쇠똥이니 하는 천한 이름을 붙였는데, 일례로 고종 황제도 아기 때는 ‘개똥이’로 불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볕이 좋은 5월 중순 태백산과 지리산, 소백산, 보현산 등 한라산을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 중턱쯤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강원도 태백의 두문동재~금대봉~분주령~대덕산 코스가 운이 좋으면 그런대로 자연 상태의 복주머니란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생지로 꼽힌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돈암동과 이후 이사하여 오랫동안 살고 있는 정릉을 지나는 길로 아리랑 고개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2차선 도로로 좁은 길이었는데 4차선 넓은 길로 확장되면서 아주 깔끔하고 시원한 길이 되었다.
4차선으로 넓히면서부터 심은 벚꽃나무가 아직은 그리 크지 않아서 꽃잎이 풍성하진 않지만 봄이 되면 돈암동 초입부터 1.5킬로미터에 이르는 아리랑 고개에 벚꽃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나다니며 본 벚꽃축제는 좀 안타까울 만큼 꽃잎이 빈약해서 웃음이 났지만, 시간이 갈 수록 든든하고 멋진 벚꽃나무가 되어 언젠가는 어느 곳의 벚꽃보다 풍성한 예쁜 꽃으로 명실공히 아리랑 고개 벚꽃축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리랑 고개 중간쯤에는 예전부터 환갑잔치하는 장소로 유명한 신흥사라는 곳도 있었지만 지금은 개발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필자는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그 근처에 있는 보현사라는 절 옆의 독서실에 자주 공부하러 다니기도 해서 친밀하게 느껴지는 동네이다.
아리랑고개라는 명칭을 갖게 된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는데 1935년 일제 강점기 때 그곳에 있던 고급요정의 이름으로 민요 아리랑의 곡명을 사용했다는 것과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영화인 아리랑을 촬영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민족영화인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 선생의 항일정신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일제 강점기에 국가를 찾겠다는 구국일념으로 보아 아리랑고개의 유래로 더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영화 아리랑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감옥생활을 한 나운규 선생이 25세 때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아 만들었으며 민족의 아픔과 굽히지 않는 항일정신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26년 10월에 종로의 단성사에서 흑백 무성영화로 개봉되었으며 구성진 변사의 설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는데 영화를 통해서 민족혼을 불살랐던 아리랑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는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내용 중에서 오빠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며 부르는 아리랑이 하이라이트라 하는데 바로 그 장면을 촬영한 장소가 이 아리랑 고개라 한다.
영화 아리랑의 극적인 장면을 촬영한 배경인 이곳을 1997년 영화의 거리로 지정하였다.
그 거리를 걸으면 인도 바닥에 설치된 동판을 볼 수 있다. 10미터 간격으로 박혀있는 네모난 동판은 세어보진 않았어도 166개나 된다는데 헐리우드처럼 손도장이나 발 도장 같은 게 아니라 방화 (국산영화)와 외화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어느 것은 영화배우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밟다가 깜짝 놀라며 좀 미안해진 경험도 있으며 ‘서편제’나 ‘미워도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한국영화 포스터와 ‘벤허’ ‘죠스‘같은 외국영화의 포스터가 동판으로 박혀있다.
테마공원으로 ‘나운규 소공원’도 있고 아리랑 고개 정점에는 아리랑 시네마극장과 정보도서관이 있어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거리로 동네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인기 좋은 거리가 되었다.
스카이웨이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한 아리랑 고개는 조금 심하게 경사가 진 도로이다.
필자는 기어를 조작해야하는 수동 차를 운전하고 있어서 경사진 그곳의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면 뒤로 미끄러질까봐 항상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그래도 수십 년을 지나다닌 아리랑 고개 이거리가 필자에겐 친숙하기도 하고 역사적인 배경도 있는 곳이라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동네이다.
모르고 지나다닐 때보다 거리의 명칭에 대한 유래를 알고 나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앞으로 아리랑 고개가 봄이면 벚꽃도 더욱 탐스럽게 피어나고 사계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