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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고전 영화① 몰락한 귀족 집안 이야기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부와 명예를 누려왔던 안조가(家)는 백작 지위는 물론, 빚에 몰려 저택마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파리 유학을 다녀온 화가 아버지 타다히코(타키자와 오사무), 이혼당해 집으로 온 맏딸 아키코(아이조메 유메코), 피아노나 두드리는 방관자 아들 마사히코(모리 마사유키) 모두 과거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보다 못한 차녀 아츠코(하라 세츠코)는 지난 시절과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무도회를 열자고 한다. 빚을 지게 획책했던 교활한 사업가 신카와 류자부로(시미즈 마사오)가 안조 집안을 삼키려는 걸 간파한 아츠코는 집안 운전사였던 건실한 사업가 토야마(간다 다카시)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조가의 무도회’(1947)는 몰락한 귀족 저택에서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라는 연극적 설정 하에, 전후 일본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는 영화다. 신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 간 갈등, 그리고 이들이 무너지고 반성하고 개안하는 과정을 통해 답을 구한다. 아츠코의 밝은 얼굴 위로 엔딩 자막을 흘리는 데서 답은 분명해지지만, 좋았던 시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에게도 일말의 측은함을 싣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카와를 믿으며, 그의 딸 요코(츠시마 케이코)와 아들이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녀 치요(무라타 치에코)의 애정 어린 호소를 무시하던 아들은 신카와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요코를 강간하려 든다. “마음은 아직 귀족”이라고 외치는 장녀는 자신을 사랑해온, 그리고 자신도 사랑하는 토야마를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물의 성격과 내면은 그들 방에 걸린 서양화로도 읽을 수 있다. 아버지 방에는 조르주 루오 의 ‘늙은 왕’이, 하녀를 농락하는 아들 방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 있는 식이다. 안주, 패배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장녀. 군수 물자로 부를 축적한 기회주의 사업가 신카와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떠오른 건실한 토야마. 마지막까지 충심을 바치려는 집사장. 새로운 시대를 건강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유일한 인물 아츠코의 고군분투로 모든 인물과 관계가 바로 잡힌다. 심지어 아츠코는 홀아비인 아버지와 오래 정분을 나눠온 게이샤를 무도회에 초대해, 결혼 발표를 하게 만든다.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비아냥거리던 가운데 갈등이 봉합되는 대단원은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무라이 장수의 갑옷이 쓰러지는 것으로 상징된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영향 받은 신도 가네토의 오리지널 각본에 기초한 ‘안조가의 무도회’는 194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위 선정 작이자, '키네마 준보 올타임 베스트 일본영화 100'에 꼽힌 일본 흑백 고전이다. 이러한 평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2015년 세상을 떠난 배우 하라 세츠코(原節子)다. 하라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거장 영화에 출연하며 1940~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를 대표했던 전설적 여배우다. 26년간 107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하라 세츠코는 미모와 연기력이 여전했던 42세가 되던 해 돌연 은퇴한다. 그레타 가르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죄송합니다"라며 영화 산업, 언론, 팬으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1963년, 자신의 영화 스승 오즈 야스지로 장례식장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이후 카마쿠라시에서 친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는데 2015년, 사망 뉴스가 뒤늦게 전해졌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출연작 이미지와 완벽한 자기 관리 덕분에 하라 세츠코는 '영원한 성처녀'로 불리었다. 2000년 ‘키네마 순보’가 선정한 '20세기 영화 스타-일본 편'에서 여배우 부문 1위로 선정될 만큼, 현대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사랑받았다. 자서전 ‘이대로의 삶의 방식으로’에서 밝혔듯, 나이 든 일본인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전전(前戰)의 가치관, 즉 남편을 잃고도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의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는가 하면, 심신이 밝고 건강한 딸과 어머니를 모두 연기할 수 있었고, 기품 넘치는 기모노 차림과 단정한 신여성 차림도 잘 어울리는 정결한 미모로 인기를 얻었던 하라 세츠코. 그녀의 미모와 기품, 연기력을 꽃피운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다. ‘만춘‘과 ’맥추‘에서는 결혼을 마다하는 노처녀 마음을 섬세하게 연기했고, 오즈 야스지로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동경이야기‘에서는 남편을 잃고도 시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젊고 아름다운 직장인 며느리로 분했다. 하라 세츠코의 이미지를 순종적이면서도 현명하고 건강하고 밝고 기품 있는 여성으로 그려낸 이 세 작품은 하라 세츠코의 극 중 이름을 딴 '노리코 삼부작'으로 불린다. 가족과 효, 결혼이 주제였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하라 세츠코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부드럽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쾌활하면서도 의지 강한 여성상을 구축했다. ‘안조가의 무도회’ 역시 이러한 여성상을 십분 발휘한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염문설이 있기도 했던 오즈 야스지로 사망 이후 영화계에서 사라진 하라 세츠코. 1963년, 60세 생일에 암으로 사망한 오즈 야스지로 역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 2018-07-0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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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에 참석하다
- 순창군과 국민연금공단이 함께 손을 잡고 국민연금제도 30주 기념 노후준비 특별행사를 했다. ‘신중년,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주제로 지난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3박 4일간 신중년 60명이 행사에 참여했다. 신중년이란 요즘 새롭게 등장하는 용어로 노후를 준비하는 세대인 50세에서 64세까지를 말한다. 이번 행사는 특히 곧 노후를 맞이해야 하는 신중년들에게 글쓰기를 통해 자신감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도 있다. 서울과 부산에서 출발하는 두 대의 버스에 신중년 60명이 승차해서 순창군 건강장수연구소에서 만났다. 첫째 날은 황숙주 군수의 순창이 발효와 장수의 고장임을 소개하고 이곳에 특화된 건강장수연구소를 개설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뒤이어 국민연금공단의 노후준비지원실 우제광실장이 노후준비지원법 제9조에 의거 지정된 국민연금공단이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되기 위해 국민연금공단이 노력하고 있는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변용도 강사의 사진취미가 돈과 건강을 안겨주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다음에 79세의 도보 여행가 황안나 선생이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주제로 글쓰기 강의를 했는데 메모를 많이 하고 남의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써보라고 한다. 이계호 전 충남대학교 교수의 건강강좌가 있었다. 붉은색 기름기 있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라고 한다. 소변 색깔을 보고 물 보충을 제때 해주고 웃음이 건강면역력에 좋으니 많이 웃으라고 충고한다. 음식으로 청국장이 좋은데 청국장의 발효균은 끓여도 죽지 않고 살아서 장에 들어가 활동하는 아주 좋은 유익균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연금공단의 조현섭 차장을 포함한 노후준비 전문가와 교육생 3명이 함께하는 맞춤형 4대 영역 노후준비에 대한 집중 질의응답은 큰 호응을 불러왔다. 개인별 심층 체크리스틀 미리 작성토록 하고 이를 사전에 전문가가 집중적으로 분석해서 자료를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진행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군더더기 없는 개인별 노후준비 맞춤 진단이 되었다. 공단의 정태욱, 권우실 담당과장이 진행한 자신의 콘텐츠 갖기와 노년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콜라보 강의는 많은 공감을 불러왔다. 일과 후에는 각자 알아서 글쓰기를 하도록 했다. 마지막 날 자신이 쓴 글을 제출하고 이를 모아서 책으로 편집하여 발간한다니 잠시도 글쓰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글의 제목도 장르도 없다. 분량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보라는 것뿐이다. 도저히 못쓰겠으면 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만, 모두가 엎드려 코를 박고 글을 쓴다. 순창고추장을 직접 만들어보고 떡메로 떡을 쳐서 인절미를 만들어 먹는 체험도 했다. 순창이 자랑하는 강천산의 휴양지를 맨발로 걸으며 동료들과 정을 나눈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27일 밤에는 우리나라와 독일과의 월드컵 경기를 강의장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무엇보다 승리해서 기쁨을 만끽했다.
- 2018-07-0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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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의 장수 비결
- 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 유머러스한 제목에 궁금증을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는 저마다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수많은 서랍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창문을 막 넘으려는 100세 노인의 앙상한 다리를 비추고, 제 할 일로 부산한 4명의 배우가 등장하며 시끌벅적하게 막이 올랐다. 길고 긴 100년의 숨 가쁜 세월과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5명의 배우가 시대를 나눠 주인공 알란을 연기했다. 조실부모하고 배움도 짧지만 알란은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각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는 등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혁혁하게 등장한다. 작품 속 알란은 세상 피곤한 인생 수레를 탄 듯 고단한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지만, 매 순간 지혜의 기근을 겪지 않는 인물이다.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월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따끈하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에, 제아무리 장수시대라 하더라도 숱한 고비를 겪은 그가 100세를 누린 비결이 궁금해졌다. 1905년 출생해 2005년까지, 100세를 맞이한 이 현명하고 바쁜 개구쟁이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은 어느 귀퉁이에 숨어 있는 것일까?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어머니가 남긴 이 말을 평생 빼지 않는 반지처럼 간직한 것이 알란의 장수 비결 일등 공신으로 보인다. 웬만한 일에는 불평불만 않고 순응하는 삶이랄까? 명심보감에도 ‘세상 만물이 순리로 찾아오거든 거부하지 말고, 세상 만물이 가버렸으면 아쉬워 뒤좇지 말라’고 나와 있다.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을 보니 어쩜 알란의 어머니도 공자를 공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생각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뭐든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비를 막겠다고 술잔에 우산을 씌우는 게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알란은 자신에게 벌어진 수많은 날벼락 같은 일들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스르르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노년기 알란은 “누울 수 있는 침대, 술 한 잔, 식사 한 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100세 노인이 녹여낸 수수한 인생 철학이다. 듣고 보니 그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그 외에 더 필요한 게 있을까? 먹을 것과 잘 곳, 거기에 좋은 벗까지 있다면 인생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욕심을 내지 않으니 조바심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 장수한 알란에게 너무 많은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가버리고 홀로 남았지만 나는 어디론가 다시 떠난다.” 100세 알란의 발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도전정신은 여전히 퍼덕인다. 일하는 노인이 장수한다는 건 평범한 이야기지만 마음에 든다. 평생 일하며 도전해온 삶 또한 알란의 장수 비결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정치적인 이유로 거세를 당했지만 사랑까지 끊어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만다와의 결혼 덕분에 거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 나이 때문에 사랑에 뒷걸음질 치는 것은 알란답지 않다. 격동의 세월을 사느라 만나지 못했던 사랑을 이제야 품은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이든 잔잔한 사랑이든 사랑은 꽃그늘이다. 나이를 셈하지 않고 사랑을 꿰찬 것도 그만의 장수 비법인 듯하다.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남기고 간 땀 냄새 끄트머리엔 알란이 달려있었다. 이런저런 방법과 통찰로 건강한 100세를 기록한 알란이 결국 마음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우리는 모두 자라나고 또 늙어 가는 법이지. 어렸을 때는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 유쾌한 알란은 “백 살이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야”라며 밑줄까지 그어준다. 마치 “아직도 사과는 다 익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 2018-07-0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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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일장 구경은 장터 국밥을 먹어야
- 어떤 사람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나 전철을 타보는 것을 담았다. ‘참 쉬운 버킷리스트구나’ 했는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제 그렇게 해본 일이 없다. 업무상 전철로 왕십리에서 문산까지는 자주 다녔다. 그런데 반대편으로 왕십리에서 용문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막연히 '용문에 가봐야지' 했는데 아는 선배가 용문 오일장 구경을 가자고 전화를 해왔다. 시골 출신의 시니어세대는 오일장에 대한 추억들이 있다. 어릴 적 오일장은 명절처럼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었다. 북적거리는 장터를 돌아다녀보면 어린 내 눈에는 희한하고 없는 것이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나무꾼이 지게에 장작을 잔뜩 지고 오기도 하고 소나무 솔잎을 긁어모은 '갈비'라는 땔감도 팔려나왔다. 떨어진 고무신을 때우는 기계가 있었다. 넓적한 고무판에서 가위로 떨어진 구멍만큼 알맞은 크기로 때울 고무를 잘랐다. 여기에 고무풀을 바른 후 뜨겁게 달구어진 무쇠기계 인두로 꾹 눌러 열처리를 몇 분간 해준다. 마치 고무신이 용접되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때워졌다. 때운 흔적은 남아있지만 떨어진 옷에 헝겊을 덧 되어 꿰어 입던 시절이니 아무도 이런 고무신을 보고 흉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5일장에는 강아지나 닭, 오리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농사를 지은 콩이며 고추도 가용 돈이 필요한 농부가 손수 들고 나왔다. 산에서 뜯어온 산나물도 있었고 알록달록 화려하지만 한번만 신으면 금방 구멍이 나는 목양말도 있었다. 당기면 늘어난다는 고무줄 장수도 긴 고무줄을 장대에 걸기도하고 허리에 차기도 하면서 시장을 빙빙 돌며 팔았다. 오일장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는 뻥튀기가 압권이다. 사람들 놀라지 말라고 뻥튀기 장수가 미리 ‘뻥이요’하고 외치면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귀를 막았다. 곧이어 뻥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하늘로 치솟으며 한 바가지였던 강냉이가 열 바가지도 넘게 부풀어 오른다. 아이들이 한 줌씩 공짜로 집어가게 하는 인심도 있었다. 시장 한 구석에는 가마솥에 흰 수증기를 연신 내뿜으며 금방 말아내는 국밥집도 명물이었다. 용문 오일장에도 국밥집이 유명하다고 소문이 났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빈자리만 나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합석해야 한다. 무청 시래기에 선지와 돼지고기를 넣었다. 값도 저렴한 오 천 원이다. 먹어보니 맛이 있고 더 달라니 듬뿍 더 갖다 준다. 우연히 합석한 등산객이 말하길 장터국밥을 먹기 위해 오일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살기가 어렵다고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들은 오일장을 가봐야 한다. 모두 해봐야 2만~3만 원에 불과한 물건을 펴 놓고 줄기차게 팔리길 기다리는 가난한 서민의 얼굴에서 삶의 용기를 얻는다.
- 2018-06-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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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세 이상 주축으로 한반도 평화 만들기 ‘은빛순례단’
- SNS를 통해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시절, 사회에서 한몫 제대로 하던 시니어들이 뭉쳐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고 했다. 앉아서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대와 이념, 종교를 떠나서 터놓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이 모였다. 열정만큼은 청춘인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축인, 이름하여 ‘한반도평화만들기 1000인 은빛순례단(이하 은빛순례단)’이다. 갈등을 넘어서 마주 보다 “걸으면서 세상과 나누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자.” 이런 의견이 모인 것은 작년 9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있었던 연찬 모임에서였다. 남북에 불어온 훈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이 땅을 물려받을 미래 세대를 위해 뭔가해보자며 의견을 모은 것이 ‘은빛순례단’을 탄생시켰다. 지난 3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성대하게 출발 행사를 치르고 난 뒤 은빛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국립 현충원 참배였다.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은 엄숙한 장소이면서도 정치 대립이 극명한 곳이다. 소위 내 편의 영령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은빛순례단으로 발을 떼면서 난생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민주당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 그가 박정희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하면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이부영 이사장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서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뿐이라 생각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인해 마음속 무엇인가가 씻겨나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 현재의 과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일생 지켜왔던 자기 원칙을 깨기란 쉽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은빛순례단의 운영단장을 맡고 있는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도 현충원 방문이 꽤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임정요인(臨政要人) 묘역에서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역 말고도 신돌석 의병장, 홍범도, 김규식 등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지킨 분들 또한 잠들어 있는 곳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새해 어떤 정당인이 누구의 묘소에 참배했는지 그 사실에만 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부정적 시각으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인정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은빛순례단의 생각이다. 이후 은빛순례단은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4·19 기념탑을 참배하고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등 비교적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 충북 음성, 옥천, 영동 등지에서 걷기 순례와 연찬, 방문 순례를 했다. 5월에는 전남 일대를 돌며 평화의 소중함을 알렸다. 도법 스님과 느리게 함께 걷는다 인천 지역에서 은빛순례단 걷기 모임이 있던 날, 도법 스님과 수지행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으며 개항의 역사를 비롯해 한국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역사 탐방으로 꾸며졌다. 60세 이상을 은빛, 이하를 금빛이라 칭하는 은빛순례단.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신구 세대가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걷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은빛순례단은 3·1운동 100주년인 내년까지 연찬 모임, 방문 순례, 걷기 모임 등을 통해 세상과 경계 없이 나누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이날 모임에는 도법 스님 외에도 이삼열(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손이덕수(디자인 아티스트) 부부, 정세일(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 씨 등 은빛순례를 함께하고자 하는 50여 명이 동참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든 것은 20여 년 전. 지리산 댐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시절이었다. 2004년에는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탁발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깨달음과 가르침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과 마주했다. 수지행은 도법 스님을 도와 일정을 짜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수지행이 일정을 짜주면 도법 스님은 따져 묻지 않고 순례길에 응했다. 매일같이 10km를 걷는 강행군을 계속해온 순례의 달인들이다. 인천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궁금해 도법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길에서만 사시냐?”고 말이다. 도법 스님은 “나는 할 줄 아는 게 걷는 것밖에 없다”며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을 하다 “순례, 즉 걸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순례는 꼭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있는 활동도 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경청 순례’라고 했다. “우선 각 종교계를 먼저 만나고 있어요. 천주교 주교회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은빛순례단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종교계가 우리 사회 통합에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단체들도 만나볼 생각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마음을 잇고 벽을 허물어 넘어설 것인가가 화두이자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연찬 순례다. 대중을 상대로 평화의 한반도로 만들려면 과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현장을 찾아가는 걷기 순례를 한다. 걷게 되더라도 많이 걷지는 않는다. 시니어가 주축이다 보니 걷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있다고. 매일 8km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으나 좀 더 시니어 세대의 상황에 맞게 계획을 바꿨다. 도대체 왜 걸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걷지 않고 편히 쉬면 그만 아니냐? 걷는 행위를 거스를 수 없는 순례길. 다리도 성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길 위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장수시대인 만큼 환갑을 넘겼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안주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도법 스님은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해 뭔가 할 일이 없는 세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할 게 많은 시대인데 그것을 못 찾고 있는 것이죠.” 은빛순례단 중심에서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이부영 이사장에게서 들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불안이 고조되니 자녀들 입에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부영 이사장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뭘 한다고 설치고는 다녔는데 결국 내 손자, 손녀들한테 전쟁 불안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이구나.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헛살았나? 하는 자괴심이 컸다더군요.” 이부영 이사장은 남은 세월이라도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순례가 시니어에게 더욱 적합한 사회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고 했다. 세대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다 도법 스님 눈에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포착됐다. 은빛순례단이 출범식을 하던 날, 태극기와 함께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한쪽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과 적개심을 표출하던 모습.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이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모든 종교와 이 편과 저 편이 벽을 넘어서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리는 날 후손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개심을 표출했죠. 독립선언을 했던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 반목하는 모습, 이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려면 누군가가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바로 어른들이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든 다 만날 겁니다.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도법 스님은 사회를 좀 더 종합적으로 균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새의 날개 이야기를 했다. “흔히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온몸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아요. 대한민국이라는 새도 온몸으로 날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좌우 갈등만 있었는데 지금은 세대 갈등도 있습니다. 어른과 젊은이들 사이가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죠. 모든 관계가 소중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그런 마음들이 깨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삶의 모든 과정을 평화롭게 다뤄갈 수 있는 실력과 방법, 정화의 체질화, 문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이 돼야 한다. 평화운동은 통일이 돼도 지속돼야 한다. 일상의 평화. 결국 은빛순례단이 미래 세대를 위해 다지고 싶어 하는 기본이란 일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평화가 아닐까.
- 2018-06-2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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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기② 전남 나주 향교(鄕校)
-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지방에 세운 향교는 국가가 유교 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켰다. 교육의 기능 외에도 지방 단위 유교적 행사를 치르는 문화기능을 담당했다. 또,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 시험을 통과하여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하는 정치기능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나주 향교(사적 제483호)는 나주읍성의 서쪽 성문 밖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가 있어 동네 이름이 교동(校洞)인데 전국에 향교가 있는 많은 곳 또한 교동(校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을 크기로 따지면 나주 향교가 성균관 다음으로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大聖殿)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할 만큼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처음 지어져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와 달리 나주 향교는 앞에 사당을 두고 뒤에 강당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교육의 기능을 하지 않으나 정기적인 제향을 올리거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성왕(文聖王)으로 부르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四聖)과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주돈이, 정이, 장재 등 송조육현(宋朝六賢)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함께 모셔 정기적인 향사(享祀)를 올린다. 나주 향교의 주춧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이는 검박한 유교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꾸밈이다. 특히 연꽃이 불교적인 무늬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전에는 사찰이었거나 근처의 절집 주춧돌을 가져와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향교 돌담 밖으로는 여러 개의 비석을 모아 놓았다. 관아에 있는 비석들은 대부분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이곳 향교에는 학문을 펼치는데 애써주심에 감사한다는 흥학불망비(興學不忘碑)들이다. 전국 군(郡) 단위로 대부분 향교를 보유하고 있으나 나주 향교 대성전은 서울의 문묘와 전북 장수향교, 강원도 강릉향교 등과 함께 웅장한 규모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대성전 벽에 바른 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왔다고 할 만큼 자부심을 갖는 곳이다. 그밖에도 근처에는 나주읍성 4대 성문중 서쪽 문인 서성문(사적 제337호)이 있다. 관아는 남아 있지 않으나 목사(牧師)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등이 있어 시간을 내어 둘러볼 만하다.
- 2018-06-1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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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방법, 재능기부
- 늘 고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특히 제2 인생을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은 무엇일까? 장수 시대에 접어들면 하릴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고통도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된다. 인생에 주어진 노후를 아무렇게 보낼 수 없다. 요즘 신조어,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의미처럼 남은 세월을 멋지게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유다. 얼마 전 아내가 여고 동창을 만났다. 정기적으로 네 명이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동창 한 명이 직접 만들어준 윗도리 티셔츠와 간편 바지를 선물로 받아왔다. 다른 세 사람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만들어주었다. 선물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곁들였다고 전한다. “밤늦게까지 옷을 만들면서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마음이 기쁘니 옷을 만드는 일이 즐거워졌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솜씨가 있어서 기쁨이 되었다. 일종의 재능 기부다. 그 동창은 바느질과 옷을 만드는 일에 소질이 있다. 아예 재봉틀을 사서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집안 살림을 하고 여유가 있을 때면 그 곳에서 옷 재단과 재봉질을 하면서 바쁘게 보낸다. 가끔 이웃에게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어 준다. 정성으로 만들고 솜씨가 있어 만든 소품이 작품에 가깝다. 받는 이웃은 모두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고마워한다. 인생 2막에서 가치 있는 일 중 하나가 경험을 살린 재능기부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소일도 하면서 남을 기쁘게 하는 일로 전환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수 있다.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주어진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의 후반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보자. 지금 당장 자기의 재능을 찾아 다듬어 보자. 첫술에 배부르지는 않다. 시간이 걸려도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시작이 반이다.
- 2018-06-0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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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철 더위 막으려면 시큼함 즐겨요
- 라면에 넣는 스프는 모두 맵다. 매워야 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기침엔 오미자차를 마시고 땀이 많이 날 때도 설사를 할 때도 오미자차나 매실차를 마신다. 약한 신맛이 몸의 진액이 새어나가는 것을 수렴하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허열이 날 때는 약한 짠맛이 들어간 콩국이나 죽염수를 마시면 열이 내려 땀이 덜 나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렇듯 맛은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의학에서는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이나 후끈한 맛, 짠맛을 오미(5가지 맛)라 한다. 약초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맛을 머금고 있다. 야산 뽕나무의 오디는 새콤하고 단맛이 진하지만, 재배한 뽕나무의 오디는 맹맹하다. 야산에서 자란 작은 돌배는 시큼하지만, 재배로 키운 배는 그 맛이 싱겁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퉁퉁마디, 칠면초 등 염생식물은 염도가 높은 바닷물에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염도를 높여 짠맛이 난다. 즉 약초의 오미는 자연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맛인데, 이것이 약효로 나타난다. 한의학에서는 오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번 호에서는 오미 중 신맛에 대해 설명하겠다. 신맛에는 강한 신맛과 약한 신맛이 있다. 강한 신맛은 막힌 것을 뚫어주고 약한 신맛은 몸의 진액이 새어나가는 것을 수렴한다. 강한 신맛은 끝 맛이 달지 않고 침도 은은하게 고이지 않는다. 그래서 식초를 예로부터 고주(苦酒)라 불렀다. 강한 신맛은 목을 마르게 하고 물을 찾게 만든다. 염산이나 황산이 옷에 떨어지면 옷이 녹아버리듯, 음식이나 약초의 강한 신맛도 강산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녹여버리고 뚫어버리는 성질을 갖는다. 음식을 먹고 체하면 보통 매실 엑기스나 산사나무 열매, 식초 등 강한 신맛이 나는 것을 먹는다. 또 연탄가스 중독으로 심장과 정신을 연결하는 통로가 막혀 의식을 잃었을 때도 식초나 신 김칫국 등 강한 신맛이 나는 음식을 먹는다. 막힌 것을 뚫어 의식을 찾게 하기 위해서다. 육류나 자장면을 먹을 때 식초가 빠지지 않는 것은 신맛으로 소화를 도우려는 것이다. 몸에 멍울이 만져질 때도 식초를 먹어서 녹인다. 고깃집 메뉴를 봐도 늘 콜라, 사이다 등 탄산음료가 있다. 역시 고기를 소화시키는 강한 신맛의 효과 때문이다. 팥은 강한 신맛이 난다. 팥에 강한 신맛이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의학에서의 강한 신맛, 약한 신맛은 화학적인 pH와는 다른 개념이다. 강한 신맛은 pH가 낮고, 약한 신맛은 pH가 높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팥은 시큼한 맛이 강하지 않지만 강한 신맛에 해당한다. 현미식초는 강한 신맛인데, 100배 희석해도 강한 신맛이다. 현미식초를 희석하면 강한 신맛의 작용이 약해질 뿐, 절대 약한 신맛으로 변하지 않는다. 약한 신맛은 끝 맛이 달고 침이 은은하게 나와야 한다. 청매실은 강한 신맛이지만, 오래 묵힌 황매실은 약한 신맛이다. 먹어보면 끝 맛과 입에서 침이 나오는 정도가 다르다. 그리고 하나의 약재가 강한 신맛과 약한 신맛의 작용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일반 식초는 강한 신맛이 대부분이지만, 약한 신맛이 나는 것도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침이 잘 나오지 않으면 강한 신맛이고, 침이 잘 나오면 약한 신맛이다. 팥은 강한 신맛이 난다. 그래서 붕어빵, 찹쌀떡, 호빵 등에 들어간 팥은 밀가루를 먹고 체하는 것을 방지해준다. 강한 신맛이 나는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뼈와 이가 녹아버릴 수도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보약을 먹을 때 식초를 먹지 말라 조언한다. 청매실, 산사나무 열매, 모과, 석류 등 강한 신맛이 나는 과일을 많이 먹으면 뼈와 이가 손상될 수 있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식초, 탄산음료 등을 많이 마시면 뼈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강한 신맛이 나는 음식은 대부분 발효시켜 먹는다. 풋과일(매실·살구·석류 등)이나 식초는 강한 신맛이 난다. 그러나 발효시키거나 오래 묵히면 강한 신맛의 부작용이 약해져 약한 신맛으로 변하기도 한다. 약한 신맛은 끝 맛이 달고 입에 침이 고인다. 오미자, 산수유, 유자차, 괭이밥, 흑초를 먹으면 약간 시큼한 맛에 몸이 움츠러들면서 피부 구멍이 닫힌다. 전신 피부가 긴장하면서 힘이 들어가고 심하면 닭살이 돋기도 한다. 약한 신맛 때문이다. 약한 신맛은 기침, 땀, 설사, 단백뇨, 냉 등 몸의 진액이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아준다. 기운이 떨어져 설사를 하거나 땀이 많이 나면 오미자차나 황매실차, 괭이밥 등을 먹어주면 좋다. 기침에 오미자와 배를 쓰는 것은 약한 신맛으로 기침이 나오는 것을 수렴하기 위해서다. 춘곤증에 괭이밥, 돌나물 등 새콤한 봄나물을 먹는 것은 기운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다. 여름에 더위를 먹어 땀을 너무 많이 흘릴 때는 약간 시큼한 과일(오미자, 복숭아, 포도, 묽은 매실)을 먹고 땀과 기운을 수렴한다. 남자에게 좋다고 알려진 산수유도 약간 시큼한 맛인데 정액이 새나가지 않도록 수렴한다. 전통 식초는 대부분 강한 신맛이지만, 발사믹식초나 흑초, 홍초는 끝 맛이 단 약한 신맛이다. 그래서 이런 식초가 장수에 좋다고 한다. 같은 식초라도 오래 묵히면 끝 맛이 달달해진다. ‘동의보감’에는 “약에 넣을 때는 2~3년 묵은 쌀 식초가 좋은데, 이는 곡기가 완전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의학에서는 허실 개념이 중요하다. 약한 신맛은 허약한 사람, 허약한 질병에 맞다. 기운이 너무 좋거나 몸 여기저기가 잘 뭉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다. 더 뭉치게 하기 때문이다. 기침에 좋다는 오미자도 감기 초기에는 좋지 않다. 기침으로 나가야 할 나쁜 것들마저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기운이 너무 좋거나 잘 뭉치는 사람은 강한 신맛이 나는 음식이 좋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
- 2018-05-2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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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의 역습
- 대한항공 사태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이번엔 한진家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불법고용한 정황이 포착돼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이민특수조사대가 대한항공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딸은 미국인, 가사도우미는 필리핀인. 국제적 항공사답다. 세간의 숱한 조롱과 성토가 난무하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묵묵부답하고 있는 대한항공 총수의 의연함 또한 ‘재벌(?)답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지난 5월 12일 서울역 광장에서‘조양호 일가 퇴진’ 2번째 촛불집회를 가졌다. 세종문화회관 앞 첫 촛불집회에 이은 8일 만에 가진 ‘을(乙)의 역습(逆襲)’인 셈이다. 사실 ‘갑(甲)의 횡포(橫暴)’는 예전부터 비일비재했다. 적폐(積弊)였다. 그런데도 이를 묵과 하고 감내했던 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나 하나만 참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방임주의가 자초한 부메랑 효과였다. 그런데 SNS 시대가 뿌리를 내리면서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를 녹음하는 일은 예전보다 더 쉬워졌고,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는 훗날 근거로 남아 법적 다툼에서 증거 채택의 분수령을 이룬다. 특히, 을을 만만하게 보던 갑의 어긋난 윤리관이 표적이 되면서 변모 또한 요구받고 있다. ‘대한항공 사태’가 4년 전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다시금 발화한 이유는 해(年)가 바뀌어도 마음은 새해처럼 바뀌지 않는 인간성의 고질적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흔히 호출되는 ‘경주 최 부자 집 부의 비밀’에 따르면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가 돋보인다. 이어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와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역시 자그마치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이나 존경받는 부자로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초석이기에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빈부의 격차가 빈자(貧者)를 부자(富者) 앞에서 고개 숙이게 했다. 이에 부자는 거들먹거리며 ‘역시 사람은 잘 살고 봐야 해!’라며 더욱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빈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반격(反擊)의 비수(匕首)를 부자는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이른바 ‘을의 역습’이다. 이를 방관하거나 무시할 경우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을이 갑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나도 언젠가는 너를 능가할 거야!’라며 속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칼을 새파랗게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삼십육계(三十六計)를 보면 ‘이일대로(以逸待勞)’가 등장한다. 이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이다. 즉, 적군보다 먼저 싸움터에 당도하여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아군의 전력을 비축한 뒤에 먼 길을 오느라 힘들어진 적이 쉴 틈도 없이 공격하여 승리를 취하는 전략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자 역시 전장(戰場)의 장수(將帥)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삼십육계’는 경영의 바이블(bible)로 통하고 있다. 재벌의 총수, 즉 장수(將帥)는 사방이 적이므로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춰선 안 된다. ‘이일대로’의 반격으로 전세를 만회하는 승부수의 소지(所持) 역시 장수의 기본 전술이다. 더불어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도 탄탄한 방어벽을 구축했어야 옳았다. 재벌 회장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이미 뛰어넘었다. 따라서 ‘사방 백 리’가 아니라 최소한 자사(自社)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 예컨대 불만을 가진 직원의 아우성을 막았어야 했다. 밀수 혐의에 이어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고용이라는 추문까지 겹치면서 그 모양새가 가관이다. 결론적으로 을의 역습과 ‘삼십육계’까지 간과한 때문에 지금 대한항공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내홍까지 겪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이 자식 교육을 올바로 못한 데 따른 자업자득(自業自得)이긴 하더라도.
- 2018-05-1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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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나다
-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필자가 자란 곳은 경남 진해다. 요즘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과거 진해시에서 마산시, 창원시와 함께 창원시로 합병되어 진해구가 되었다. 군복무를 해군이나 해병대에서 하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진해는 군항도시이자 아주 오래된 계획도시, 그리고 벚꽃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이른 봄만 되면 필자는 진해의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표고 653m, 봉우리 높이 10m, 둘레 50m의 크기로 우뚝 솟은 시루바위는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그 바위가 있는 웅산의 이름을 따라 웅산암(곰메바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루봉은 옆의 천자봉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천자봉은 중국의 천자 진나라 황제가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잠시 쉬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근대에는 명성황후가 세자를 책봉하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웅산신당’을 두어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빌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가끔 시루봉(바위)과 천자봉을 혼동해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 어느 봄날이었다. 혼자 산에 올라 시루바위를 보고는 10m 위가 한없이 궁금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니 길도 험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절벽뿐이어서 바위를 잡고 조심조심 기울기가 약 110도 정도 되는 비탈진 암반을 올라갔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맑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가 보인다 할 정도로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이어서 혹시 대마도가 보이나 둘러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었다. 잠시 진해만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올라올 때와는 길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물어 소리쳐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요즘처럼 핸드폰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순간 “아! 여기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왕 굶어 죽게 되었으니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 올라오던 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더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자 하면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사진 곳이라 위에서 보니 밑의 바위는 안 보이고 하늘 위에 그냥 솟아 있는 것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아 현기증이 일었다. 포기하려다가 다시 탈출을 위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솟은 바위를 양손으로 잡고 발을 내리니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잘못해서 양손에 힘이 빠지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경사진 곳을 딛고 올라왔으니 철봉하듯 몸을 움직이면 발이 바위 어디엔가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더니 예상대로 발이 바위 끝에 닿았다. 바위를 오를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내려왔다. 그때 필자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진해 시루바위 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해병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웅산. 해군이나 해병으로 입대하면 최소 한 번쯤은 오르는 산이다. 웅산의 시루바위 그리고 그 옆에 웅장한 모습의 천자봉이 있는 진해는 나를 키워준 자랑스러운 고향이다. 초등학교 교가가 생각난다. “ 높이 솟은 천자봉 병풍을 삼아 굽이치는 푸른 물결 앞에 맑았네. (중략) 문화의 밝은 빛을 갈고 닦아서 누리를 비취어줄 등불이 되자.”
- 2018-05-04 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