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으로 생활한 지 40년이 넘다 보니 크리스마스 하면 교회 성탄절 행사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성탄절에 맞는 성찬식은 의미가 있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어서 즐겁게 보냈다. 어릴 적에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 받는 즐거움도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 준 일도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들 말고 필자에게는 크리스마스에 얽힌 또 다른 추억이 있다. 20대 때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다. 논문 준비로 부심하던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충격에 아버님이 그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더니 겹친 악재였다. 만사 제쳐두고 친구 집에 가서 빈소를 지키면서 밤을 새웠다. 크리스마스인 다음 날 새벽에 발인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다른 일이 있어 지방의 장지까지는 동행하지 못했다. 올 것이라고 믿고 연락한 친구에게 고마웠다. 그 후로 그 친구와 더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친구에게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날짜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아내의 불평을 뒤로 하고 가족과 세운 모든 크리스마스 계획을 포기하고 성내 아산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영안실에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밤늦게 취해 혼자 병원 앞 다리를 건너왔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어려울 때 같이할 수 있어야 친구다. 즐거운 날에 슬픔을 같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는 필자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고 부담을 느끼지 않고 연락을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와의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 친구는 그 뒤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같이 여행도 가고 깊은 속도 털어놓는 관계가 되었다. 친구가 있는 근처에 가서 연락하면 만사 제쳐놓고 나온다. 친구의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인간관계는 주는 만큼 받는다. 풍파 많은 세상이다.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등질 때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런 친구가 세 명만 있으면 세상살이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추석은 가족이 모여 수확의 풍족함에 대해 자연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날이다. 가족이 모이면 으레 가족 대소사가 화젯거리가 된다. 그중 묘지도 단골 주제다.
묘지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조상과 후손을 연결시켜 줌으로써 그 사회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전승시켜 사회의 지속성과 사회적 통합, 연대를 담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묘지는 우리 가족제도를 구성하고 뒷받침하는 근간이자 뿌리다. 우리 사회가 서구 사회에 비해 비교적 높은 사회적 점성(粘性)과 유대를 유지하는 것도 이러한 묘지제도의 순기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묘지가 가지는 이러한 순기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면 묘지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가족들을 보다 쉽게 모이게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예전의 분묘(산소)처럼 이 산저 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후손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더더욱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후손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 뿐 아니라 묘지를 돌볼 후손들도 나이가 많아 일일이 찾아가 벌초하고 때맞추어 성묘하고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결론하여 자연장지를 조성해 한 곳에 모아 쉽게 찾아가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옛것만 고수하다가는 전통 그 자체는 물론 거기에 담긴 소중한 문화자산의 가치 자체가 멸실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묘지는 조상이나 부모뿐 아니라 자신과 자녀들의 사후를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이는 곧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묘지를 어떻게 마련하고 구성할 것이냐는 가족들이 모일 때 협의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건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대 구성이나 가족 구성, 우리 사회의 유동성을 고려하면 단연 묘지를 모아야 한다. 매장이든 화장한 후 봉안당에 모시든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가족들이 찾아뵙기가 수월치 않다. 가족묘원이든, 종중묘원이든 일단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래야 할 이유는 많다. 우선 예전처럼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이고 그것도 일인가족, 부부가족 등 비전형적 가구들이 폭증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1.2 내외다. 남녀 둘이 결혼해 겨우 1.2명의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다. 아들로 내려가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남자계승은 확률적으로도 3대를 넘기기 쉽지 않다.
여자가 계승한다 해도 4~5대를 넘기기는 쉽지 않다. 결국 3~5대만 지나면 묘지를 돌볼 후손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후손들로부터 그나마 절이라도 받으려면 조상 묘를 모아야 하고 부모나 자신도 그런 가족묘원에 사후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선산이나 시골, 고향에 가족이나 종중 묘원을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집 가까운 곳의 봉안당이나 자연장지 등에 선대부터 자신, 자녀들이 들어갈 묘원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또 고려할 게 매장할 것이냐, 화장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다. 굳이 시대변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화장이 대세다. 매장이냐 화장이냐는 가치, 선호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의 문제다. 비교적 적은 인구가 전국에 널리 골고루 퍼져 살던 시대에는 매장이 대세였다. 가까운 곳에 매장 분묘를 구하기도 쉬웠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인구가 도시에 모여 살기에 도시 근교에 매장할 땅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이젠 매장보다는 화장이 대세가 된 것이다. 거기다 화장이 가지는 장점도 많다. 보다 신속하게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는 방법이고 비용도 저렴하며 위생적이다.
화장한다 해도 화장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도 중요하다. 예전엔 주로 분묘 형태의 봉안묘를 만들어 모시는 분들이 많았으나 이젠 이것도 자연장이 대세다.
자연장(自然葬)은 말 그대로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며 고인을 신속히 자연으로 되돌리는 장법이다. 선산에 30~40평의 가족 자연장지를 만들어 나무와 꽃, 잔디를 심고 조상을 모시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상 묘들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음은 물론, 자신과 자녀들의 묘지도 마련된다. 서양의 녹림장(Greenwood Burial)과 우리의 전통 매장을 적절하게 조합한 장법이다.
가족묘원을 조성하는 게 어려워 보이지만 맘만 먹으면 의외로 간단하다. 선산이나 고향에 전답이 있다면, 모퉁이에 30~40평 정도를 할애해 잔디와 나무를 심으면 된다. 가족 공원을 꾸민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저기 있는 산소를 파묘해 화장한 다음 옮겨와 나무 밑이나 잔디밭에 묻으면 그만이다.
일례로 전통 대가였던 경주최씨 문중은 인덕원이란 종중묘원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후손들이 명절이나 제사에 찾아와 종중묘원에서 제를 올리고 성묘를 한다. 일부 후손들은 종중묘원으로 소풍을 오기도 한다. 사시사철 풍광도 즐기고 후손들에게 예를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어 놀고 어른들은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며 조상을 추억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원 같은 가족, 종중묘원을 조성해 놓으면 향후 묘지 걱정도 없게 되고 후손들이 더 자주 찾게 되며 묘원에서 가족이나 다른 일가도 만나게 돼 가족 간, 친족 간 우애도 돈독해진다. 요즘은 아파트 시대라 작은 공간에 가족 이외의 친족을 초대하기는 쉽지 않다.
가족 묘원을 만들면 낮에 묘원에서 약속해 같이 식사하고 헤어지면 된다. 요즘 라이프스타일에도 딱 맞는 게 바로 가족, 종중 묘원이다. 잔디를 심고 온갖 꽃나무로 추모목(追慕木)을 심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가족자연장지가 여의치 않다면 집단화된 자연장 묘원, 이를테면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하늘숲추모공원 같은 곳에 자연장 해도 된다.
묘지는 단순히 고인을 처리하는 장소가 아니다. 묘지는 시대변화에 맞추어 당대인의 생활상과 가치를 담아내고 상징적으로 극화시켜 사회 구성원의 연대를 강화해주는 문화적 제도다. 현재를 사는 후손들이 선대를 방문해 소통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가족묘지,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모이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모두가 관련되는 공통주제로 가족 간 끈끈함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소재이자 기회이다.
△ 강동구(姜東求)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
(재)한국장례문화진흥원 이사, 서울대 사회학과 졸, 동국대 대학원 졸(행정학박사)전 동국대 불교대학원 생사의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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