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의료재단은 상생하는 사회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노인, 청소년 등 맞춤현 사회공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올해는 글로벌 사회공헌 활동을 비롯해 봉사활동을 통해 총 3100여명의 고령 지역 주민들이 혜택을 받았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한방 의료봉사활동을 종합하면 그 수혜인원은 4만3000여명. 잠실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최대 수용인원이 2만5000여명임을 감안하면, 잠실구장 약 2개를 채울 수 있는 인원이 자생의료재단의 치료를 받았다는 의미다.
또한 자생의료재단은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과 아동들이 학업에 정진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대표적인 공헌활동은 ‘자생 희망드림 장학사업’이다. 2014년부터 전국 지역 저소득가정 중고생 가운데 구청, 학교 등의 추천을 받은 장학생들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37명이 선발돼 총 3700만원의 장학금이 전달된다.
더불어 한의학 세계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한 ‘자생 글로벌 장학사업’과 경제 사정이 어려운 예비 한의사를 지원하는 ‘자생 꿈키움 장학사업’을 통해서도 총 5명의 대학생에게 약 4000만 원의 등록금이 지원됐다. 올해 총 7700만 원 규모의 장학금 지원을 통해 청소년들의 미래를 응원하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금전적인 지원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물품도 전달했다.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 임직원, 봉사자들은 ‘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를 통해 매년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이 사용할 1000장의 연탄을 직접 전달하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김장철을 맞아 저소득가정,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 400여 가구에게 총 1500kg의 김장김치를 마련해 제공한 바 있다.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에게 위생용품을 제공하는 ‘자생 엔젤박스 나눔 사업’의 경우, 120명분의 1년치 여성용품을 전달했다.
특히 올해 자생의료재단은 3ㆍ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독립유공자 유족지원사업을 전개하는 데 힘썼다. 이는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의 선친인 독립운동가 청파 신현표 선생이 강조했던 ‘긍휼지심(矜恤之心)’의 정신을 잇고자 함이기도 하다.
2월부터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의원과 협력해 독립유공자 및 후손 100명의 척추•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와 함께 매년마다 독립유공자의 자녀•손자녀 고교생 100명을 선정해 총 3년간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자생의료재단은 국내 최대 공익 한방의료재단으로서 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분이 건강을 되찾고 꿈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공헌 활동 범위를 더욱 넓혀나가겠다”고 말했다.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자생의료재단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처와 함께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27일 서울시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 국가보훈처 박삼득 처장 등을 비롯한 양 기관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번 장학사업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지원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몸 바친 선열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마련됐다.
자생의료재단이 마련한 장학금의 규모는 총 3억 원으로, 올해부터 2021년까지 3년간 매년 100명의 고교생에게 1인당 100만 원씩 지원할 예정이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자녀 및 손자녀 고교생 중 소득수준, 학년 등을 고려해 지원 대상을 선발한다. 특히 장학생 중 국내 한의대 입학생의 경우 입학금과 1년 치 등록금을 재단에서 추가로 지원할 계획이다.
이번 장학사업은 자생의료재단의 독립유공자 유족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자생의료재단은 올해 2월부터 재단 사회공헌기금 3억 원을 투입해,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의원에서 독립유공자 및 후손 100명의 척추·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지원을 실시해왔다. 지난 7월에는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이 독립유공자유족회에 사재로 기탁한 1억 원이 독립유공자 후손·유가족 13명의 학업과 생계지원금으로 전달됐다.
신준식 명예이사장은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시점이라 생각한다”며 “이번 장학사업을 통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더욱 자부심을 느끼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길” 바랐다. 아울러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예우하는 분위기가 사회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생의료재단은 향후 독립운동 관련 지원사업 전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먼저 떠난 제자 N 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N 군, 그간 잘 있었나. 자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 전 자네 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던 때였구먼. 그리 서둘러 떠날 줄 알았으면 고급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 걸 후회가 되네. 이젠 먼 세상에 있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겠으나 위로와 후회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네.
제임스 힐턴의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제자들이 학교를 떠나도 칩스 선생에겐 앳된 제자들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제자들의 생장점은 멈추고 영원히 학창 시절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네. 그렇듯이 친애하는 제자 N 군 자네도 팔팔한 청년 시절 모습으로 내 기억에 살아 있네.
자네를 처음 본 것은 밀양 낙동강변 유천 소풍 때였네. 선글라스를 쓰고 풀밭에 누워 있던 모습이 마치 알랭 들롱의 현신 같았네. 우리 과에도 저런 멋진 청년이 있나 싶었지. 그 도도하고 거만하기조차 한 자네가 가장 친애하는 제자로 남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네. 그날 자네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지. 내게 자꾸 권하던 막걸리 덕분에 경부선 열차 추돌사고를 면한 기억이 나나? 수십 명의 인명 사고가 난 바로 그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자네가 권해서 마신 술 때문에 결국 다음 열차를 타고 말았지.
“선생님 한잔 드시고 강물처럼 흘러가입시더.”
그 절묘한 표현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신 술 덕분에 결국 기차를 놓치고, 사고를 면했지.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자네는 인정도 많고 풍류를 아는 멋진 학생이었네. 넉넉지 않은 향토장학금으로 동기들,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인정을 베풀었지. 덕분에 등록금까지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들었네. 아마 대구대 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자네의 밥 한 끼, 술 한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살아 있는 산타요, 후원자였지.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지. 학과 행사에 빠지면 학점 제한까지 있었건만 자네는 그날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그리고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지.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었네.
자네 덕분에 나는 공부하는 학자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네. 1982년 여름부터 거창 산골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 자네가 소개해준 거창 할머니 집에 머물며 많은 글들을 썼지.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대부분 고향이 그곳이네. 선생님 영양보충 해준다며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그 까만 봉다리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네. 그 속엔 늘 소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지. 거창에서 위천까지 수십 리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내가 건국대로 옮긴 후에도 매년 여름마다 거창을 찾아가곤 했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그럴 때마다 자네는 잊지 않고 극진히 대해주었지.
“선생님 내가 돈 벌어 별장 하나 마련하겠슴더. 그때까지 기다려주이소.”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휠체어를 탄 불구의 몸으로 사업에 정진했지. 장애인이 된 뒤에도 까만 봉다리는 계속 배달되었고.
한번은 내가 머무는 방을 훤하게 도배까지 해놓았더군. 자네의 세심한 배려 지금도 감동이네. 서울 올라갈 때는 창고에 묻어둔 양파며, 밤, 홍당무 등 귀한 농산물을 차 안에 하나 가득 실어주곤 했지. 40년간 여름마다 거창을 빠지지 않고 간 것은 결국 자네의 훈훈한 인정과 추억 때문이었네.
어느 날 한밤중에 자네 전화를 받고 나도 울었네. 우연히 MRI 사진을 찍다가 학창 시절 교통사고 때 생긴 어깨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었지.
그것이 신경을 짓눌러 평생 불구의 몸이 된 것이고. 그 사실을 전하며 통곡하던 자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 그 뼛조각 하나가 자네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인생이 그런 건가보네. 그러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지.
사업 실패도 무슨 보증을 잘못 서서라고 들었네. 결국 사람 좋아하고 쉽게 믿는 자네의 성품 탓이었네. 사업이 망하자 자네는 주변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혼자만의 고립된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지. 그렇게 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통과 절망의 세월, 자네는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냈네.
그리 많던 친구들, 믿었던 친구들 다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지. 그런 게 현실이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삭막한 인간관계. 그 배신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나 역시 부끄럽고 죄스럽네. 방문은 고사하고 자네가 좋아하던 책 한 권, 시디 한 장도 못 보내준 게 한스럽네.
그렇게 신병과 외로움을 초인적으로 버티다가 육십 고개에 들어서자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불구의 몸이 된 그때부터 30여 년의 세월, 홀몸으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섬에 갇힌 4년의 세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그 세월을 홀로 쓸쓸히 지키다가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부고 소식도 이미 땅속에 묻힌 지 반년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됐으니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작년에 공원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해 소주 한잔 나누지도 못했네.
그저 자네가 묻혀 있을 만한 무덤가에서 “문식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불러본 게 전부였네.
내 목소리 들었는가.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면 반대로 신제자(臣弟子)도 일체일 것이네. 스승보다 먼저 떠난 제자는 불효자인 셈이지. 은사인 내가 이리 살아 있는데 먼저 세상을 하직하다니 어찌 그리 무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천하의 불효막심한 제자가 됐지만 자네는 40년간 교단생활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였네. 자네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들고 오던 까만 봉다리, 그 모습으로 자네를 영원히 기억하겠네.
칩스 선생은 많은 제자를 세계대전에서 잃었지. 하지만 그는 기억 속에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믿었네. 자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은 것이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네도 살아 있는 셈이지. 영면을 비네.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잔 합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네. 안녕.
김영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군사관학교 전임강사,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말글학회·겨레어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이대로 일만 하다 죽을 순 없다고 기를 쓰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서 놀러다니는 거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아직은 일을 해야 할 형편인데도 내가 번 돈 다 쓰고 죽겠다고 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죽는 날이다. 언제 죽을지 예상하고 돈을 펑펑 쓰다가 막상 오래 살게 되면 어쩔 것인가. 생각지도 않은 암 같은 큰 병에 걸려 병원비에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돈 때문에 말년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이 본다.
이미 종영된 방송이지만 ‘그 여자 그 남자'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부간의 불화를 본인들이 해결 못해 방송사에 의뢰하면 전문가들이 개입해 원인을 찾고 함께 해결을 모색해나가는 줄거리다. 불화의 여러 원인 중 돈 문제가 적지 않다. 아니 돈을 벌어오지 못해 파생되는 문제가 많다. 자식 우윳값을 친정 부모에게 빌리러 가는 아내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남편은 담배를 사서 피운다. 막노동은 몸이 약해서 못하겠단다. 이 일은 이래서 어렵고 저 일은 저래서 못한다는 핑계를 댈 궁리만 한다. 화목한 가정의 중심에는 돈 벌어오는 사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 있다. 이분이 자기 아들에게 쓴 편지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마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중략) 사내의 한 생애가 뭣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김훈은 돈과 밥은 같은 것이라 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을 제대로 못 느끼는 남자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관이 어떻고 우리 가문이 어떻고 하기 전에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 죽는 날까지 벌어와야 한다. 직접 근로소득을 하지 못하면 벌어놓은 예금에서 이자가 나오게 하든 건물에서 월세가 나오게 하든 여하튼 돈이 있어야 한다. 해외여행하다 낮선 곳에서 객사하지 말고 돈 벌다 가족 품에서 죽어야 한다.
전 국민이 일하지 않고 노숙이나 하고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면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국가는 무소유주의자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돈 버는 사람의 세금으로 유지된다. 돈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른다. 부자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할 수 있는 게 많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입고 싶은 것 입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번 돈이라고 나를 위해서만 쓰지 말자. 장학금도 내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도 하며 살자. 방문 꽁꽁 닫아걸고 혼자 소고기 구워 먹는 삶은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
자녀를 대한민국 상위 0.1%로 키우려는 부모의 욕망을 그린 JTBC 드라마 ‘SKY 캐슬’. 우리 교육 현실과 맞닿은 드라마 속 이야기에 비난과 공감의 목소리가 공존했다. 이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소연과 가수에서 국제변호사가 된 이소은의 아버지 이규천(李圭天·66)이다. ‘SKY 캐슬’ 엄마들도 탐낼 만한 두 딸의 행보에 자녀교육 방법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는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를 통해 넌지시 그 대답을 남겼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 농림 부문 R&D 전문관리 기관장 등을 지냈던 이규천은 전문 분야의 정책서 등은 써왔지만 자녀교육에 관한 책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는 2017년 SBS ‘영재발굴단’에 둘째 소은과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중장년 세대의 자녀뻘이라면 익히 알 만한 이소은은 가수로 활동하다가 로스쿨 진학 후 현재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법원 뉴욕 지부에서 부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부모의 남다른 교육 덕분”이라 답한 것이 화제가 되며 자연스럽게 이규천 내외에게도 관심이 쏠린 것이다.
“방송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우리 부부가 교육 철학으로 꼽은 ‘방목’에 대해 쓰자는 거였죠. 사실 방목은 아이들이 다 자라고 돌이켜보니 그랬다는 거지, 애초에 정해둔 교육 방식은 아니었어요. 계획과 목표를 잡으면 결국 판에 박은 듯 아이를 키우게 되거든요. 아내와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아이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자’는 마음은 통했던 것 같아요.”
부모 수업의 스승은 자녀다
집필 결심 후 ‘아빠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초고를 완성할 무렵, 그는 깨달았다. 아직도 자신은 아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만 키운 게 아니더라고요. 애들도 날 키웠고, 함께 성장한 거죠. 자식은 다섯 살, 열 살, 스무 살, 결혼해 엄마가 돼도 그때마다 새로운 문제를 안고 나타나요. 아빠로서도 처음 겪는 것이 많으니 함께 고민하고 공부할 수밖에요. 그렇게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부모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성숙해지죠. 서서히 변화하고, 천천히 아빠가 되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부모 수업에서 스승은 자녀이더군요.”
그렇게 바뀐 제목이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이다. 책이 나오기 전 ‘금수저 집안이다’, ‘부모가 무관심한 거다’ 등등 오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게 된다. 그는 금수저도 아니고, 무심한 아빠는 더욱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줄리아드 음대 나왔다고 하면 다들 우리가 부자인 줄 알아요. 자랑처럼 들릴까봐 우려스럽지만, 큰딸이 고등학교와 대학은 자기 노력으로 장학금 받아 다녀서 저는 돈으로 해준 게 별로 없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울 때였고요. 근데 만약 금전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했다면 더 크게 성공했을까요? 글쎄요. 오히려 그런 결핍이 딸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봐요. 아이들에게 ‘고생도 선택해서 하면 행운’이라는 말을 했어요. 피아노 안 치면 고생 안 해도 되지만, 하고 싶으면 힘들어도 매일 연습할 수밖에 없잖아요. 자기가 선택한 진로니까 어려워도 잘 이겨낸 거죠. 우리 부부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보다는 ‘어떻게 도울까?’를 고민했고요.”
방목을 위한 믿음과 절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규천은 ‘자녀를 키운다’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기 결대로 잘 자라기 위해 필요한 교육 방식은 ‘방목’이었다.
“자녀를 방목하는 게 쉽지 않아요. 자꾸 간섭하고 싶거든요. 그때마다 저는 ‘아이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질문을 해봐요. 가령 아이가 실패했을 때 화를 내기보다는 상황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둬야 해요. 자신의 실패가 부모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죠. 또 실수를 했을 때 아이도 자기 잘못을 대부분 인지합니다. 그런 상황에 구태여 잔소리를 더하는 건 의미 없을 뿐더러, 결국 부모의 답답한 마음을 푸는 행위밖에 안 되더라고요.”
방목은 이상적인 교육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해보려면 실천이 어려운 것이 문제다. 그는 지켜보고만 있는 일이 쉽지는 않다며 ‘믿음’과 ‘절제’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도 애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다그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러나 참는 거예요. 절제는 믿음 없이는 어려워요.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오더군요. 절대 조급해하면 안 돼요. 기다리느냐 못 기다리느냐는 결국 아이에 대한 부모의 믿음에 있습니다.”
근래 조손가정이 늘며 부모와 자식 간에 손주 육아로 인한 갈등도 생겨났다. 이 또한 자녀들의 교육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클린턴, 힐러리 부부가 손주가 생기고 아침마다 외우는 말이 있대요. 바로 ‘개입하지 말자’예요. 간섭하기 시작하면 나와 자식의 관계는 틀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지금껏 부모·자식으로 잘 지내왔는데 손주 녀석 때문에 사이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잖아요. 저도 딸이 조언을 구하면 ‘아빠라면 이렇게 하겠는데? 한번 잘 생각해봐’ 하는 정도에서 그쳐요.”
아빠의 인생 궤적을 함께한 아이들
책에서도 그는 자녀교육에 관해 특별한 묘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대신 가족의 일화와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을 통해 자기 삶의 궤적을 더듬었고, 그 속에 녹아든 자신의 교육 철학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방법적으로 풀려니 막상 쓸 말이 없더라고요. 가만 보면 제 인생 대부분을 딸들과 함께했잖아요. 이런저런 경험 속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아이들과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는지 보여주면 간접적으로 우리 가정의 교육 방식을 들려줄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는 책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행운아’라며 ‘딸들이 백세시대를 밥벌이만 위해 살면서 지루하게 보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썼다. 이미 딸들은 행운아의 반열에 오른 듯한데, 정작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을까?
“요즘 매일 오전에 카페에서 독서를 즐기는데, 사고의 폭이 점점 넓어지는 걸 느껴요. 정치학, 행정학을 전공했으니 나와 가족을 넘어 사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더라고요. 열심히 책 읽고 공부하면서 뭔가 해답을 얻으면 그때 책 한 권 더 써봐도 괜찮겠다 싶어요. 75세쯤 그러려고 하는데, 앞으로 10년은 그 즐거움으로 살아가지 않을까요?”
자생의료재단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장학금 1900만 원을 전달했다.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9일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자생한방병원에서 제5회 ‘자생 희망드림 장학금’ 전달식을 개최했다고 10일 밝혔다. ‘자생 희망드림 장학금’ 사업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키워가는 청소년들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는 자생의료재단의 사회공헌활동이다.
이날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각 지역 구청과 학교 등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중∙고등학생 19명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했다. 장학생들에게 전달된 장학금은 총 1900만 원이다. 이 장학금은 자생의료재단과 강남∙잠실∙목동∙부천∙대전∙일산∙안산 등 7개 자생한방병원 봉사단의 출연금, 자생 희망드림 자선 바자회의 수익금으로 마련됐다. 자생의료재단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8550만 원의 장학금을 청소년들에게 전달했다.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청소년들이 걱정 없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며, 희망드림 장학금으로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라며 “자생의료재단은 공익의료재단으로서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직업이 산악인인지 가수인지 모르겠다며 웃는 남자. 1990년 ‘난 바람 넌 눈물’의 작사·작곡자이면서 노래까지 불러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지만 마치 그 노래의 가사처럼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가수, 신현대(62)를 마주했다. 대중의 시선 밖에 있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가수다. 그리고 산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산악인으로 살고 있다.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으로서 음악의 본질을 되물으며, 자연인이자 자유인으로서 살고 있는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백미현과 듀엣으로 부른 히트곡 ‘난 바람 넌 눈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지금은 산악인이자 산을 노래하며 포크의 부활을 꿈꾸는 가수 신현대. 1956년생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자 그는 “요즘 동안이 너무 많아서 별 의미 없다”며 웃었다. 동안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걸까. 아니다. 공연장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에는 나이를 뛰어넘는, 시간의 무게를 털고 훨훨 날아가는 힘이 느껴졌다.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의 산이 있는 것
“방송국에 가면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산악인인지 가수인지.(웃음)”
일찍이 알프스 마테호른,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 그리고 히말라야 초오유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한 그는 요즘도 매년 때가 되면 히말라야를 향해 떠나는 영락없는 산악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름만 되면 무전여행을 하느라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그의 핏속에는 유랑인의 감성이 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산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 기술만을 가르치는 작금의 등산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북한산을 탄 사람들 중에 ‘종주하면 5~6시간 걸리는데 난
3시간에 갔어’라며 자랑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건 산을 다니는 게 아니에요. 북한산 코스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코스들을 다 올라야 하는 건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북한산의 일부분만 본 거지 속살을 본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산악인은 산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야 해요. 나만의 산이 존재하는 거죠.”
산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사계의 모습이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산에 갈 때면 항상 식물도감을 가져간다고 한다. 산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서다.
8300m 산 위에서 여는 콘서트 ‘노트콘’
산을 사랑하는 만큼 신현대는 산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산과 음악을 함께 다룬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업은 우리나라의 산 노래를 정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산 노래들을 보면 일본 군가에 개사만 해서 붙인 곡들이 많아요. 산 노래를 정리한 사람도 거의 없었죠. ‘설악가’만 봐도 각 대학 산악회, 일반 산악회가 부르는 멜로디가 달라요. 그래서 일본 군가는 다 빼고, 내가 만든 ‘선인봉’ 등 산 노래를 집대성하고 있어요. CD 3장짜리 전집으로 제작 중인데 돈이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 모금을 해서 제작하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도 안 되는 산 노래를 왜 만드냐고 한단다. 그러나 그는 에베레스트(8848m)를 갈 때도 8300m 높이까지 기타를 갖고 간 사람이다. 산이 높으면 숨이 차서 노래를 못하는데도 그는 고소 체질이라서 고산지대에서도 노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을 타기 위해 몸도 타고난 것일까. 그렇게 산과 노래를 함께 아우르는 그이기에 산 노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호흡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매년 2월에 노트콘(노래하는 산 트레킹 콘서트)을 하고 있는데 내년 2월에도 에베레스트 트레킹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년에도 안나푸르나 갔다 와서 사진전과 콘서트를 했고 수익은 현지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으로 사용했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글을 쓰면 그걸로 가사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예쁜 얘기’만 해야 했던 방송이 부담돼
그는 “음악도 등산과 같다”고 강조한다. 꾸준히,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할 업으로 삼아야 진정한 가수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는 히트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가수였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방송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음악 활동이 멈춘 적은 없기 때문이다.
“방송을 가면 예쁜 얘기만 해야 해서 싫었어요. 왠지 불편하고 거기에 무대공포증까지 있다 보니 방송이 체질에 안 맞더군요. 대신 콘서트는 계속했습니다.”
요즘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얼마나 단련된 가수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후배이자 현재 제7대 국립국악원장인 왕기석 명창에게 배운 소리로 공연 전 단가와 가곡으로 목을 푸는 그는 과거에는 마당 세실에서 하루에 2회씩 30일 연속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룰라의 히트곡 ‘비밀은 없어’를 작사·작곡한 박선민, 김광석의 노래로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원작자인 블루스의 대가 김목경과는 공연장에서 인연을 맺어 지금도 함께하는 동료다.
“미디어에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타를 만들려는 지금의 세태가 어린아이들의 꿈을 죄다 연예인으로 만들고 있어요. 왜 그리도 부추기는지 모르겠어요. 연예인이 아니어도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음악에서 받은 것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
사단법인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명가의 품격’이라는 이름의 시리즈 공연을 하고 있다.
6월부터 이치현, 김목경, 백영규, 추가열 등 소위 대가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들이 학동 엠팟홀에서 릴레이로 진행하는 이 공연은 대한민국 가요의 역사와 지난 세월의 다양한 면모를 관록의 힘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예전에도 싱어송라이터협회 같은 모임이 있긴 했어요. 그러나 몇 번 해산되었다가 사단법인으로선 이곳이 처음이죠. 등록 회원은 350명 정도 됩니다.”
그가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를 맡게 된 이유는 ‘산에서 받아먹은 건 산으로 돌려줘야 하고 음악에서 받아먹은 것은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는 엠팟홀과 MOU 형태로 계약을 맺고 싱어송라이터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매해 헌정 콘서트를 진행하는데 올해가 5회째이며 헌정 가수는 조동진으로 결정됐다.
“어린 친구들은 연예인이 돼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음악을 하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노래하던 시절에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된 경우가 많았어요. 누군가는 다 똑같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오래 노래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좋아서 노래를 시작한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갑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
사실 ‘난 바람 넌 눈물’은 완성하기까지 5~6년이 필요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것보다는 상대방 가슴에 있는 종을 울려주는 일’이라는 신현대의 지론. 그런 그가 사람들 가슴속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노래를 굉장히 잘할 때가 있고 못할 때가 있어요. 속에서 솟아오르지 않을 때는 공연을 해도 할 노래가 없어요. 하기가 싫은 거지.”
그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자연인’이었다. ‘자연인 신현대’는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제주의 둘레길이 유명해지니까 산에 별것 다 만들고… 그런 길들을 보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모기만 늘어났으니…. 얼마 전 광화문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는 노래인 ‘산양의 노래’를 불렀어요. 거기서 백기완 선생을 만났죠. 오랜만에 봬서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는데, 후배가 그걸 보고선 ‘형, 좌파야?’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야 임마, 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실파다. 파가 어디 있어 임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찍은 거지’ 했어요.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인 거지요. 있는 그대로가 좋은 거지,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해선 안 되죠.”
자유로운 삶이 보상해주는 즐거움
“일을 벌일 때는 ‘내가 지명도가 더 높으면 일하는 게 편했을 텐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무 때고 술을 먹을 수 있고 누가 알아보는 것도 아니어서 편해요. 그걸 고맙게 생각해요.”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미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먹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지금처럼 살다가 떠날 때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면 된다는 그의 말에는 무위자연의 인생관이 담겨 있었다.
“후배 아버지 한 분이 기억나는데, 그분이 정말 멋있었어요. 술을 좋아하셨는데, 임종 세 시간 전에 아들에게 위스키 한 잔을 달라고 하셨답니다. 아들이 갖다 주니 그걸 마신 후 돌아가셨대요. 그 술맛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술맛은 낙원의 맛이 아니었을까. 그가 추구하는 낭만과 자유처럼, 신현대의 삶은 제3자의 눈에는 너무도 달콤하게 보였다.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훨훨 나는 듯한 그 자연스러움이.
도시락의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게 한다. 저학년 때는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로 나누어 등교했지만 고학년(4학년 이상)은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를 했다.
지금은 어느 곳을 가도 음식점이 많아 끼니를 건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젊었을 때는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나 직장을 다녔다. 일반인이 매일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다.
시간이 촉박하거나 도시락 준비가 어려울 때를 은근히 바란 적도 있다. 어머니가 점심 값을 주시면 비싼 것은 아니어도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사는 학생들은 계란말이, 소시지, 소고기장조림 등 맛있는 반찬을 싸오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김치, 장아찌 등의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맛있는 반찬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점심시간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시락 챙기기는 직장생활을 할 때도 계속되었다. 그래도 직원들과 도시락을 펴놓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 즐거웠다. 직원들 중 한두 명씩은 도시락 싸오기가 귀찮았는지 점심시간 되면 밖에 나가 먹고 들어오거나 배달을 시켜 먹기도 했다.
그러나 배달 음식은 금세 싫어졌다. 점심시간만 되면 ‘오늘은 뭘 먹지?’ 하고 고민을 했지만 선택은 전날과 동일했다. 심지어 밖에 나가서 메뉴를 찾다가 그냥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하고 식사 후 차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시 도시락을 싸오자는 의견이 나와 다시 도시락을 부활시켰다.
귀가해서 “어머니, 내일부터는 도시락 싸주셔요” 하자 어머니는 “그동안 도시락 안 싸가서 편했는데 나는 언제나 이 신세 면하고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어보냐?” 하셨다. 결혼을 빨리 하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어머니 내일은 빈 도시락 하나 더 넣어주셔요.” 어머니는 느닷없는 아들의 요구에 궁금하셨는지 “아니, 빈 도시락은 뭘 하려고?” 하고 물었다. 필자가 “며느리가 해주는 밥 드시고 싶다고 하니 도시락에 좀 싸오려고 합니다” 하자 “야 웃기지 마라. 네 주제에 여자가 있기나 하냐?” 하셨다.
사실은 대학 축제 때 만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아가씨가 있었다. 당시 필자는 공부 열심히 했다. 과에서 1등을 하고 탄 장학금으로 함께 덕적도를 다녀왔다. 그 당시 필자의 집은 작은 신발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아가씨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고 싶다고 해서 밥할 사람 데리고 왔습니다.”
“야 이 녀석아, 미리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 아가씨는 대담하게 미싱사에게 재봉틀을 사용하겠다 양해를 구하고 가져온 천을 가위로 잘라 5분 만에 예쁜 앞치마를 만들어 입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당황하셨고 공장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이집 큰아들이 며느릿감 데리고 왔다며?” 모두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다들 부엌으로 몰려왔다.
그러고는 다들 한마디씩 했다. “예쁘네”, “일도 거침없이 잘하네”, “잘 데려왔네” 등등 다들 칭찬을 한마디씩 하셨다. 어머니도 싱글벙글하셨다. 그날 예비 며느리가 준비한 메뉴는 두부 된장찌개였다. 그리고 때 이른 저녁 밥상 위에 예쁜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김영철(59) 바인그룹 대표는 가방에 MP3를 네댓 개씩 갖고 다닌다. MP3마다 영역별로 다운받은 강의 파일이 담겨 있다. 산책할 때도, 러닝머신에서도, 심지어 출장 갈 때도 늘 강의를 듣는다. “리더의 에너지는 공부에서 나온다. 공부는 가장 확실한 자기충전 방법이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나눠줄 것은 에너지다. 내가 매일 공부하는 이유다.”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유도선수 출신. 무릎 연골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동화책과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1995년 교육전문기업 ‘동화세상 에듀코’를 창업한다. 동화세상 에듀코는 유아에서 성인까지 온·오프라인 교육을 망라, 티칭과 코칭을 아우르는 교육전문기업이다. 2017년 에듀코를 모체로 교육·유학·여행·외식·무역·건설 등을 계열사로 아우르는 바인(vine)그룹으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포도송이처럼 선한 열매를 알차게 맺자는 의미에서의 새 출발 선포다.
신설동에 소재한 바인그룹 사옥은 마치 자기계발 실행의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대표 집무실엔 실행 플랜 게시판과 2095년까지의 미래비전 백년달력이 걸려 있다. 직원 화장실엔 벽마다 눈 돌릴 틈 없이 명언이 빼곡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가 건네는 명함엔 ‘나 김영철은 한평생 끊임없이 수양해 자신을 누리며 남들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명선언이 담겨 있다. 명함 타이틀도 바인그룹이 아니라 바인벤처다. 스타트업 벤처의 유연하면서도 맹렬한 야생정신을 배우겠다는 자기다짐의 의미다.
사옥 분위기뿐 아니라 김영철 대표도 마치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제 저자들보다도 실행을 더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그 덕을 실제 체험했고요. 자꾸 드러내서 가시화해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솔선하고 직원에게도 권합니다. 유도선수인 제가 사회에 나와 영업의 고수가 되고, 또 경영자로 변신할 때 사회에서 받은 강의, 교육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교수, 강사란 말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90도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 교육에는 예산의 한도를 정해놓지 않고 좋은 프로그램은 아낌없이 받도록 한다. 권장을 넘어 아예 의무화해 놓았다. 아이디어 창조, 마인드, 스피치, 리더십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교육, 지닉스 교육을 받는다. 지닉스는 Genie(잠재력)+Explore(탐험·여행)의 합성어로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기존 교육에 매번 새로운 교육이 더해지니 교육비 예산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직원의 성장판을 열려면 회사 예산의 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직원을 이용해 회사 성과를 올리기보다, 회사를 이용해 직원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에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게 학력, 경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인재철학이다. 그는 “사과 씨 안엔 사과가 없지만 사과가 되지 않느냐”며 잠재력을 읽고 육성하는 게 바로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잠재력이야말로 학력, 경력보다 확실한 인생 전공이기에 그것을 읽어주고 그것을 살펴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계발을 잘하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서 학교 다니는 것도 사치였어요. 유도를 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책 공부 말고 사람 공부도 큰 것 같아요. 동네 어른들께 어깨너머로 배운 예의범절, 더불어정신 등이 인생의 큰 공부더라고요. 남들은 흘려듣는 이야기도 저는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귀담아들었어요. 유도하면 장학생 된다고 해서 유도 시작하고, 유도 국가대표 선수되려면 술, 여자,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실천했고요. 그것도 자기계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가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 늘 책, 이론 공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정신 자세, 세상 공부, 즉 더불어정신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더 큰 성과는 옆 사람,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계발이 성공 처세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라고 말한다. 박수 받는 것 못지않게 박수 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직원들과 비인기종목 외국선수팀 응원을 굳이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계발이고 참교육이다.
유도와 경영,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게 서로 통하는지요.
“유도를 하며 몸으로 익힌 정신력,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 후배를 챙기고 선배와 스승님을 모시는 진심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통하더군요. 그 외에 두려우면 피하기보다 부딪친다는 실행력,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성 등 몸으로 배운 것이 영업,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도를 하다 다치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출판사 영업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성과를 내서 시쳇말로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뭐였습니까.
“운동선수가 가진 승부근성과 체력이 도움이 됐어요. 좌절되니까 영업을 통해서라도 승부를 내겠다.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렸지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유도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라서 제 잠재능력을 잘 몰랐는데,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영업뿐 아니라 조직관리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됐어요.”
선수를 그만둘 무렵 90kg에 육박했던 몸무게가 60kg대로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체력과 승부근성으로 넘길 수 있었다는 회고다. 영업사원 초기엔 거절당하면 상처도 많이 받았단다. 그냥 안 사면 되는데 모욕을 주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영업사원의 근성이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없지 않은가. 때로는 덩치 좋아 보이는 그에게 시비조로 싸움을 거는 남자 고객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한판 붙더라도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 흠씬 두드려 맞고… 분한 눈물을 삼켰지만 그때 성질이 많이 순화됐다는 회고다. 그는 늘 현장정신을 강조한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두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 아버지의 궤도를 그대로 밟아 유도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큰아들 김광섭 상무 역시 현장 경험을 거쳤다. 작은아들은 대학 때 아프리카에서 6개월 봉사를 하도록 했단다. 현장에서의 쓴맛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위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서다.
35세의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요. 23년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위기의 격랑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몸을 다쳐 유도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위기도, 역경도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상황이든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제 평생 취미는 결심입니다. 창업을 하면서 결심했어요. ‘정상에 도전할 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겠다,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문제 삼지 않겠다, 나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 안 한다’라고요. 내 안의 잠재력을 작동시키려면 강렬한 의식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해요. 나는 매일매일 결심해요. 고민하면 걱정이 생기지만 결심하면 꿈이 커집니다. 문제는 작아지고요.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초긍정으로 하면 그것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습관이 운명이라고 하는데요. 운을 부르는 좋은 습관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운동과 신문 스크랩입니다. 사람은 배신당할 때 제일 상처가 깊다고 하는데요. 정작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신해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이런 증세가 올 리가 없는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후회하지요.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해 배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습관을 생활 1순위로 놓고 있습니다. 평일 아침에는 달리기나 수영, 주말엔 가족과 등산 등을 규칙적으로 하려 해요. 그 외에 조간신문 6개 정도를 통독하고 직접 스크랩합니다. 한 달이면 얼추 스크랩 한 권이 채워집니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읽어보라 권하지요.”
정말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이시네요. ‘하면 된다’ 산업화 세대의 구호이지만 요즘 신세대는 ‘되면 한다’ 주의 아닙니까.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 학력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믿어주면 서로 통하게 돼 있어요. 그들도 신임한다는 것 다 알더군요. 다만 7대 3의 법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7은 잘해주고 3은 요구하고 지적해야 해요.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자만심을 갖게 돼요. 반면에 지적만 해대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고요. 인재 육성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자애보다는 신념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녀교육에도 적용됩니다.”
김 대표는 “한국 사람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정해줄 때 능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 직원 4500명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이 번호로 하루에 200통의 문자가 온단다. 그중 제일 기쁜 내용은 “내 꿈을 이룰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바뀌었다”며 ‘비포 앤 애프터’의 성장기다. 직원들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다시 읽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도 기업이 매년 성장했습니다. 또 영역을 확장, 바인그룹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어떤 포부를 갖고 계십니까.
“창업할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한 맺힌 성공, 돈 많이 벌어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습니다. 이후 기업의 가치관을 생각하게 됐어요. 성장을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직원성장, 고객성장을 통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백년기업으로요.”
김영철 대표는 앞으로 바인그룹은 엄청난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며 3년 후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직원들의 잠재력을 믿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리더가 팔로워를, 어른이 젊은이를 어마어마한 만남으로 서로 생각해 환대하고 대우할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1960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부상으로 유도의 꿈을 접고 출판사 영업사원을 했다. 1995년 교육전문기업 ㈜ 동화세상에듀코를 설립했고 2017년 10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바인그룹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성장을 핵심가치로 둔 인재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중앙회 선정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상’ 수상,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