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필례 선생님은 예뻤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던 정 선생님은 학교 행사 때면 도맡아 풍금을 치곤 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1958년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의 첫 담임교사였습니다. 약간 탁한 듯한 목소리,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왔지만 남들보다 크고 둥근 얼굴, 운동장에서 풍금을 치러 나갈 때 조금은 멋쩍어하던 표정, 바람에 하늘거리던 개나리색 원피스가 생각납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고교 생물교사였던 아버지가 당신의 저서 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지만 한 학년 동안 아이를 가르쳐준 데 대한 사은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뭔가 더 있었는데 내 기억에는 그 이상한 책만 남아 있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신문지로 싼 물건을 주셨습니다. 소중하게 집에 들고 가다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호호 손을 불어가며 풀어보니 연필 지우개 공책 등 학용품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정필례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간 직후 담임이 되신 우문자 선생님과 정 선생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학생 인수인계를 한 셈인데, 정 선생님은 “애가 수가 좁아”라고 말했고, 우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계단 밑에 서 있던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정 선생님의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가 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괜히 아무에게도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궁금해 하다가 어떻게 해선지 수줍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13년 3월에 쓴 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선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억 속의 창고를 뒤지니 이 일이 맨 먼저 떠오릅니다. 정필례 선생님, 지금 어디 계시나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면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인데 살아 계신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이용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전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아마도 기억 속의 선생님을 온전히 그대로 보전하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나 선물까지 받으면 일생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정필례 선생님은 이름도 참 소박하고 수수합니다. 필례 길녀 탄실이 언년이...이런 우리나라 고유한 이름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이름입니다.
정 선생님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의 악몽과 대비됩니다. 그때 만난 담임교사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유독 저를 못 살게 괴롭혔습니다. 남들 앞에서 일부러 본보기로 혼내고, 걸핏하면 아버지의 초등학교 때와 나를 비교하곤 해서 학교에 가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뒤 무슨 선물을 받았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서울에 가 있는 고종사촌 누나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었나? 반짝반짝 은가루가 빛나고 사슴이 끄는 썰매와 산타할아버지 그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동화책이고 꿈의 나라였습니다. 그 뒤 자라면서 많은 연하장을 받았지만 그때의 감동과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서예 선생님으로부터 환갑 기념으로 대형 벼루를 선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몸소 디자인한 벼루에 뛰어난 전각 솜씨로 ‘硯田無荒 筆耕有年(연전무황 필경유년)’, 벼루밭에 흉년이 없고 붓농사가 늘 풍년이기를 바란다는 글을 새겨주어 저를 감동케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게 뭔가? 한자를 풀이하면 膳은 반찬을 말하는 것이니 본뜻은 ‘잘 갖추어진 요리’라고 합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문 시대에 잘 갖추어진 요리는 최상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설이지만 이 명절에 사람들이 보내는 선물에는 역시 먹을거리가 가장 많습니다. 함께 먹고 어울려 나누어 먹는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사회를 따뜻하고 훈훈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물이 사람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고(잠언 18:16), 폭넓게 친구를 사귀게 하며(잠언 19:6), 맹렬한 분노도 멈추게 한다고 돼 있습니다(잠언 21:14). 이런 선물에는 나름대로 일정한 조건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에는 조건이 없다고 말하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선물이나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선물에도 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신의 분신인 자식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고, 스승에게는 자신을 뛰어넘을 제자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어서 그런 걸까요? 사랑은 내리사랑만이 더 진하고 선물도 내리사랑만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스승도 선물을 받기는 합니다. 동양에서는 처음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속수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를 묶은 것으로,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입니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이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고,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어렵게 대학에 다니다가 몇 백 달러인지 아주 적은 돈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 가 고학을 한 끝에 지휘자로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준 장학금이나 대학 알선, 아르바이트 자리 주선 등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선의이며 감동적인 선물이었답니다.
그래서 고마운 분들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했을 때 “Pass it on”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에게서 받은 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로 갚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패스 온’을 실천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패스 온’을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패스 온’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마친 학생들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고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바로 ‘패스 온’의 선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생각하면 반성부터 하게 됩니다. 자식들에게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해본 적이 없고 가끔 책이나 사주었는데, 언제부턴지 책 선물이란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한 일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설 명절이 가깝고 학생들의 한 학년이 끝나가는 졸업과 종업의 시기입니다. 선물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검해볼 시기이기도 합니다. 오고가는 선물 속에서 주고받는 정과 마음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197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노신사가 신문에 난 부음을 보고 빈소가 마련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였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신세를 많이 지었다며 이를 잊지 못하여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우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일제 말기에 선친은 종로 2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수리하겠다고 아버지 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모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사연을 들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철원이며 배재학당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하며 이승만 박사를 돕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49년 이철원 박사가 아버지에게 급한 연락을 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는데 입고 갈 양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바로 양복과 모자를 해주었다. 그는 얼마 후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지금은 자신도 은퇴를 하였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 형 결혼식의 주례를 이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유신체제하라 긴 주례사를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 형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세대가 있기에 우리 세대가 있다
요즘 나는 이철원 박사의 아들 이준일 교수(전 중앙대 정경대학장)와 우리 둘 다 회원으로 있는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매달 만나 선친들의 우정을 회고하며 2대에 걸친 세교(世交)를 이어가고 있다.
선친 이야기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194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태어나지 않아 이등 황국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군대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고 나중에는 고위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만 한살이라 어머니 등에 업혀 고생을 모르고 피난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시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내가 태어난 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러니 나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4·19와 5·16을 목격했고 그 후 오랜 권위주의 정부 후에 온 1987년 민주화,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등을 국내외에서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변화된 국제적 위상을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그사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되었다.
4·19 총성과 시민들의 울부짖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육성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데 6학년 때 수업 도중 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현재의 종로 구청자리)에서 멀지 않은 세종로에서 총성이 울려 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는데, 그의 차량이 떠나는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종로 2가에 나가보니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라디오는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육성 성명을 보도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 집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고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개한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들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 대문에 걸었다. 지금은 병원에서 출산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해산하고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래서 어느 집에 애경사가 있는 지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또 집집마다 한자로 된 문패를 걸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바로 앞집 사람의 성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문 안인 종로 2가 YMCA 뒷동네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생가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 245번지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주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건물만 남아 있으나 지금은 개조하여 음식점이 되었다.
내 유년 시절의 종로 2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YMCA 자리는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YMCA 건너편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었다. 종로 1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을유문화사 서점이 있었고 안국동방향으로 돌아서는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1936년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구비한 이 건물은 규모는 다르지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장안의 명물(landmark)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화신백화점은 1987년 종로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다른 유서 깊은 외국 도시와는 달리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려한 자연 경관은 무분별하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지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이런 철거 위주의 도시 계획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없어진 옛날 집 주소와 화신백화점을 생각하며 나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고교 시절인 1966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주최 세계 청소년토론대회(World Youth Forum)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된다. 지금은 조기 유학들을 많이 가지만 그 당시는 고등학생이 미국에 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3개월 여간 뉴욕 지역의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그 집 아들들과 함께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 대한 연설도 하고 또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학생들과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지금은 서울이 글로벌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도 없는 후진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
또 그 당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전화는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항공우편 중에서도 저렴한 봉함엽서(aerogramme)에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 세대에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을 꼽으라면 나는 통신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SNS, 무료 국제전화까지 가능하지 않은가.
만 28세였던 1977년 나는 코리아헤럴드 파리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뜻밖의 인사 발령이었다. 대개 지사장이나 특파원하면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의외와 예외가 있다. 나는 이때 프랑스에 2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체험하며 프랑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 후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두 차례 8년을 더 근무하면서 도합 1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며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도 받고 프랑스에 대한 책도 출간하게 된다.
프랑스 지사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를 겸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다. 자고 있는데 중앙청에서 전화가 왔다. 긴급 중대 발표가 있으니 빨리 기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부리나케 중앙청으로 향했다.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소문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평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울먹이면서 대통령 시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우두망찰할 사이도 없이 전화로 송고를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했다. 고인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평소 박 대통령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께서 이제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해 나는 외신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정국관련 보도는 마치 암호를 읽는 것과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 언론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1984년 초 연합통신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공보관으로 나가 달라는 공직 제의를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기회다. 그 당시 나는 미국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장학금도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주저하는 나에게 내가 자문한 선배들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라고들 권유했다. 사농공상 문화의 잔재 때문일까. 그 당시 해외공보관 중에는 많은 전직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 이후 공무원이 된 나는 자카르타, 파리, 제네바, 오타와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행하며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특혜 받은 인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적을 해외에서 지켜봤다. 19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정부 방어에 종사하던 나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그 이후 나의 공보관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때는 파리에서 서울에 파견되어 외신 홍보 지원을 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프랑스 TV와의 회견에서 나는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축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파리에 대사관 공사 겸 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고 한국문화원을 찾았고 월드컵이 생중계되는 파리 시청 광장에는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러 몰려들었다. 우리 가족도 여기에 합류했다.
지난 9월 나는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 상호 교류의 해’ 개막행사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색채로 조명된 에펠 탑 앞에서 열광하는 파리 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 개막행사를 한 사요극장은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를 통과시킨 곳이다.
2007년 이후 나는 한림대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를 공직 시절에 하던 ‘한국 알리기’의 연장으로 생각하며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특히 흐뭇한 것은 이제 한국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올 만큼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간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안으로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나 밖에서는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태어난 나는 이 여정에 국내외에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 손우현 (孫又鉉)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1948년 서울 출생. 서울고, 한국외대 불어과, 파리 외교전략대학원(CEDS) 졸.
코리아헤럴드 기자, 파리지사장, 연합통신 기자, 주 인도네시아, 프랑스, 제네바,
캐나다 공보관.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정부간행물제작소장,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역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장’ 수훈.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그날 무너진 것은 국가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쩡하던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을 맞아 21년 전 그날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1994년 10월 21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 전역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을 약간 지난 시각,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의 중간지점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 다리를 지나던 여러 대의 차량도 함께 추락했다. 떨어져 내린 차량에는 등교 중인 학생과 출근 중인 직장인 등이 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남아 있는 자료화면 속 현장의 모습은 처참하다. 내려앉은 교량 위로 찌그러진 버스와 승용차가 널려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끊어진 부분에는 철근이 흉측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위로 눈물처럼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던, 아니 거짓말이길 바랐던 뉴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이후 가장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리가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성장일변도 대한민국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최준영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팀장은 “정말이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무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무전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의심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해왔지만 이번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근무자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24명은 16번 시내버스 승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이 포함돼 있었다. 하필이면 아침 등굣길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범인은 대한민국... 안전 불감증이 부른 최악의 참사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개통됐다. 그 이전에 세워진 한강 다리와 달리 교량의 기능 외에 미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첫 사례였다. 교량의 조형미를 높이려고 당시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트러스식 공법’으로 설계됐다. 시원한 경관, 입체교차로, 날렵한 곡선미는 당시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개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성수대교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는 새로운 공법에 대한 충분한 기술력이 없었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사실도 적발됐다.
붕괴 원인은 부실 용접과 설계였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0㎜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두께도 8mm밖에 되지 않았다. 부식된 철제 구조물을 보수하지 않고 녹슨 부분만 페인트로 감추는 등 관리 부실도 드러났다. 안전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종합적으로 쌓여 빚어진 참사였다.
정부는 성수대교 안전에 무관심했다. 성수대교의 통행허용 한도는 32.4톤이었지만 40톤을 넘는 과적차량들이 제재조치 없이 지나다녔다. 1993년 동부간선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폭증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의 하루 통행량은 8만 대 정도였지만, 붕괴 당시 하루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안전관리 국가적 전환 약속, 21년 지났지만
국민적 분노가 거세지자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사흘 뒤인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뤄진 조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해 교량 건설과 안전관리 관련자들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정부는 건축물 안전에 대한 국가적 전환을 약속하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한강 다리에 대한 일제점검을 실시해 당산철교, 광진교, 한남대교, 양화대교 등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했다. 제도적으로도 시설물안전 특별법이 제정됐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시설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약속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대형 안전사고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의 경계심도 쉽게 희석됐다. 같은 달 충주호 유람선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뒤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안전사고가 이어졌다.
희미해지는 국민적 관심, 유족 아픔은 ‘진행형’
어느덧 21년이 지났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은 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몇몇 유족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사고와 관련한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유족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같이 전했다. “달라진 게 있나요?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나겠죠. 그리고 호들갑을 떨고 잊힐 겁니다. 연결해서 보면 사고는 그냥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희생자의 유지를 이어 세상에 등불을 밝힌 이들도 있다.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승영씨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려고 희생자 보상금 전액(2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승영장학회’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업 초기에는 원금을 운용한 이자수익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지만 금리가 낮아지면서 원금을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집사(승영장학회 사무국장)는 “이대로라면 약 10~15년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장학회 출신을 주축으로 기금을 만들어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는 붕괴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만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옆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이겠다는 취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자가 위령비를 찾았던 날에도 21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위령비 부근을 오가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
21년 동안 108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기부한 기업인이 있다. 1994년 8월에 창립해 국가유공자들의 복지 증진과 한미 우호 증진을 기업 목표로 삼고 유통, 서비스, 판매 사업을 하고 있는 상훈유통의 이현옥(李鉉玉·77) 회장이 주인공이다.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이뤄진 그의 기부는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2014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보훈 관련 단체에서는 ‘기부천사’라고 불리는 이 회장의 삶과 실천을 통해 돈 쓰는 철학을 짚어본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배려 그 자체다. 돈이 있는 사람만이 나누는 건 아니다. 각자 자신만의 ‘달란트(재능)’를 필요로 하는 타인이나 단체에 선물하는 ‘재능기부’도 확산되고 있다. 일회성 봉사나 한시적인 거창한 후원보다는 소박한 실천적 나눔으로 사회 곳곳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기부이다. 나눔과 기부가 ‘있는 사람들’만의 문화가 아님을 알려주는 일이다.
연매출 300억~400억 원의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이현옥 회장은 첫 대면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따뜻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곧 자신의 따뜻함을 남과 함께 나누고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어 기부에 ‘중독된’ 대표적인 경영자다. 보훈처 퇴직 후 상훈유통을 설립한 다음 해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국가유공자와 보훈단체에 성금을 기탁한 이 회장이 낸 돈의 액수는 108억 원. 10억 원이 부(富)의 대표적 기준이 된 사회에서 이 회장은 그 열 배가 넘는 돈을 자신의 주머니 속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 막대한 기부금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25년이 된 30평짜리 작은 빌라에 살고 있다.
국가 은혜 갚으려고 국민으로서 기부한다
이 회장은 베트남전에 하사로 참전했던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격렬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함과 죽어나가는 전우들, 그리고 국가가 없는 삶의 비참함을 깨달은 이 회장은 국가 보훈을 위한 기부를 반드시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복귀한 이후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 생활을 한 그는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 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1사 1촌 농촌사랑운동의 일환으로 자회사인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의 기부 대상은 당연하다는 듯 보훈 단체들이었다. 국가유공자단체와 보훈병원에서부터 광복회, 전몰군경 유족회, 미망인회, 월남전참전자회, 상이군경 복지회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천안함 관련 단체 등등 그는 보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을 향해 아낌없이 돈을 냈다. 국가유공자들의 자녀들에게 지급하는 나라사랑 큰나무 장학금도 운영하고 있다. “부국의 원천은 강병이요, 강병의 뿌리는 보훈에 있다”라고 누누이 말하는 그다운 일이다. 그는 보훈이야말로 국민의 도리요, 의무이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동참하자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거창한 기부가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의 기부로 행복을 누리자”
“덕을 베풀고 나누다 보니까 행복해지더군요. 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고요.”
이 회장은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일을 실천하며 살자”고 말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했던 전형적인 기부중독자들과 똑같은 말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곧 행복’이며 ‘그래서 자신은 기부를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기부라는 행복을 깨달은 사람이라지만 25년 동안 검소한 빌라에 살면서 10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낸 건, 정말 그게 가능할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돈을 기부에 쓸 수 있었던 것은 회사를 세운 후 21년 동안 매년 수익금의 50%를 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을 들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수익금의 50%를 기부금으로 낸다니,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그러나 이 회장은 그러한 아버지를 자식들이 이해해주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자식들에게 가업을 이어주지 않고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했다.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가업 승계 문제는 전적으로 자식들 본인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넘겨 줄 수 없습니다. 회사에는 좋은 경영 성과를 내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기업을 존속할 수 있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맞는 작은 실천이 큰 힘
인터뷰 내내 말을 아꼈던 이 회장은 기부의 보람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수다쟁이가 됐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것들이라도 모이면 큰 힘을 낸다는 말인데, 제 기부 철학을 그대로 표현한 문구인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많은 이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나눔에 동참한다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회장이 기부를 통해 꿈꾸는 미래기도 했다.
베푸는 일은 자기의 위치에서 적당한 규모로 하는 것이 좋다.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유태인의 속담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에너지를 선물 받게 되죠. 우리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자고 늘 다짐해요. 나누지 않는 사람은 이 기쁨을 모를 겁니다. 직접 기부를 해보고 기부가 어려운 게 아니라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이 얼마나 소중한가를요.”
불교에는 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빈손으로 가는 삶일까?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이들은 결국 온 누리에 이름을 남긴다.
◇ 백선행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돈 쓰기
조선 말기 평양에 16세에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먹는 년’이라고 친정으로 쫓겨나는 설움 속에 ‘백과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녀의 나이 7세에 아버지를, 16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결국 ‘쌍과부’ 상태로 어머니와 지내게 됐지만, 26세 되던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홀로 남은 딸이 걱정돼 현금 1000여 냥과 150냥짜리 집을 남겨놨는데, 그마저도 사촌오빠에게 빼앗겼다. 빈털터리가 된 백과부는 주위 이웃들에게 닥치는 대로 일감을 달라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남들이 먹다 버린 복숭아씨를 파는 일까지 그야말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이러니 사람들이 ‘악바리 백과부, 지독한 백과부’라 부를 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열심히 일하고, 남의 궂은일까지 먼저 달려가 일손을 돕는 백과부를 좋아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모두 도와줄 정도. 한 번은 그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들은 탐관오리 평양부윤이 재산을 바칠 것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상소를 올려 감옥에서 풀려난 적도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은 돈으로 땅을 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대여해 소작료를 받아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렸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뛰어나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돌산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 시멘트 업자에게 100배가 넘는 가격에 되팔기도 했다. 이는 당시 32만원으로, 현재 32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렇게 부자가 된 백과부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 환갑을 맞아 고향인 대동군 고평면에 커다란 다리를 놓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크게 칭송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 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없었던 ‘백과부’는 그때부터 ‘백선행(白善行)’이라 불렸다.
이후 백선행은 ‘선행’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어머니와 자신의 한풀이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평양에 있는 모든 학교가 그녀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
1933년 5월, 그녀가 8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평양이 울었다 할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백선행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300개가 넘는 화환과 만장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고, 장례식에는 1만여 인파가 운집해 애도했다.
과부라는 외로운 삶과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에 기부한 여인 백선행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돈 쓰기를 실천한 여인이었다.
◇ 이종순(94)씨 사랑과 이름을 남긴 10억
지난 5월, 구순을 넘긴 여인이 휠체어를 타고 서울 노원구의 삼육대학교 교정에 들어선다. 장학금을 기부하기 위해서다. 액수는 무려 9억원. 2012년 1억원을 기부한 것까지 더하면 합이 10억원이다.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의 이종순씨였다. 평생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벌어온 돈을 선뜻 내놓는 90대 여인의 목소리는 환희로 가득찼다.
“평생 꿈꿨던 소원을 이제야 이뤘습니다. 이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를 위해 써 주세요.”
그녀는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생각으로 아끼고 아껴 재산을 모았다. 6·25 중에도 화장품, 군복 장사 등 안 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였다. 평생 고생하며 모은 돈으로 사들였던 오피스텔을 처분해 기부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삼육대는 그녀의 뜻을 기려 기존의 보건복지교육관을 ‘이종순기념홀’로 명명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 ‘이종순’이라는 이름을 묘비 아닌 다른 곳에 남긴 셈이다.
◇ 故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명예 이사장 검소한 회장님이 남긴 450억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해 남긴 남성이 플라스틱 통을 꺼낸다.
“주인양반, 짜장면 남긴 것 좀 싸가겠소.”
주변에서 음식을 먹던 사람들은 혀를 차며 안타깝게 쳐다본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게 뻔하다. 음식을 싸가는 남성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 플라스틱 통에 담는 손길이 능숙하다.
그 남성은 ‘도와줘야 할 대상’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아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그는 ‘회장님’이다. 태성고무화학의 전 회장이자 신양문화재단의 명예 이사장 고 정석규의 이야기다. 그는 1967년 태성고무화학을 설립해 회사를 업계 최고로 키운 거부임에도 평소 검소한 생활로 주위에 귀감이 돼 왔다.
지난 5월 21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정석규 명예이사장은 생전에 모교인 서울대에 450억원을 기부했다. 1987년에 시작한 그의 기부활동으로 장학금 혜택을 받은 서울대 학생만 해도 820명. 그 액수도 25억 6200만원이나 된다. 여기에 인문대와 사회대, 공대 등 3곳에 그의 아호인 ‘신양’을 딴 신양학술정보관도 지어져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정 이사장의 기부활동에 대해 그의 일상생활이다.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밭에 풍성하게 뿌리면 고루 수확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평생 신조로 사신 분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그를 다 낡아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는 이사장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추모와 감사가 계속됐다.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계단 덕분에 현재 꿈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의 삶처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등의 내용이다. 정 명예 이사장이 베푼 것은 돈이지만, 남은 것은 그의 삶의 철학과 품격이었다.
◇ 故 김경수씨 못 배운 한, 한풀이 1억원을 남기다
지난 1월, 그 추웠던 겨울의 한가운데, 꽁꽁 언 마음까지 녹이는 훈훈한 이야기가 제주대학교에서 들렸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의 고 김경수(81·여)씨가 평생 농사일을 하며 모은 1억 원을 불우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기탁한 것이다.
김씨는 어린 시절 제주 4·3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마저 어머니 따라 떠난 뒤 그는 어린 여동생과 힘겹게 살았다. 불우한 환경은 그녀에게 배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한은 평생 그녀를 괴롭게 했다.
배움에 대한 한을 그녀는 봉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이 불우한 환경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생 모은 돈을 기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선행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주변 정리를 하는 가운데 자녀들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었던 것. 결국 그녀는 대학발전기금 기탁식 11일 후인 1월 16일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평생을 6남매 뒷바라지해오면서 언젠가는 당신께서 겪으신 인생의 한과 설움을 사회봉사로 풀어보려는 생각을 가지시고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오랫동안 준비해오셨습니다. 이 돈은 평생 한여름 뙤약볕에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면서 몸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일해 모은 쌈짓돈입니다. 의연하신 의지로 단호한 결정을 내려주신 어머니께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행복하고 자랑스럽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녀의 자녀들이 대학발전기금을 기탁하면서 낭독한 ‘장학금 기부자 자녀들이 드리는 글’은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격동의 세월을 살며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것이 한이었지만, 그녀는 돈과 함께 희망을 남겼다. 한은 스스로 거두어 갔다.
명지대 바둑학과는 처음부터 독립된 학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체육학과 내의 바둑지도학 전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립된 학과나 다름없었으며 곧바로 바둑학과로 독립하였다.
이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에 대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바둑계에서도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과연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현 교수는 신입생 선발요강과 학과과정을 정하고 신입생을 뽑아 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교수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을 별 무리 없이 잘 처리해나가 교수라는 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가능한 한 외국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고 이를 위해 외국유학생의 장학금 상한선이 등록금의 70%이던 것을 100%로 상향조정하도록 했다.
2001년에는 과 주도로 명지대학교에서 제1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제2회 대회는 2년 후 해외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둑학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2003년 4월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동년 6월에는 한국바둑학회가 창립되어 필자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마침 그 해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 예카테리나 궁전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으로 제47회 유럽바둑대회가 7월 19일부터 8월 1일까지 그곳에서 열렸다. 한국바둑학회는 제 2회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를 그곳에서 7월 26~27일 양일간 개최하였다.
필자는 한국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집사람과 함께 참가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바둑대회가 진행되던 약 2주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그 근교는 물론 모스크바까지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귀국길에 우리 일행은 바둑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바둑클럽이 있는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그들과 교류전을 가지는 한편 관광도 즐기는 바둑관광여행을 했다.
먼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하이델베르크와 낭만가도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 인터라켄과 융프라우를 관광한 후 다시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의 빈과 잘츠부르크, 체코의 프라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갔다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우리 일행은 이상기온으로 인한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파리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쳐 로렐라이를 구경하고 라인크루즈를 타기도 하며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말단 공무원을 하시면서 노상 일본사람들과 다투시는 바람에 진급을 하지 못하고 만년 주사노릇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바둑에 열심이셨던 이유는 다른 다툼에서는 편파적으로 일본사람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라도 바둑의 승부에는 깨끗이 승복하기 때문에 바둑으로 일본사람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조남철 국수의 자서전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여하튼 할아버지의 기력은 5급(현 아마 초단) 정도로 당시에는 군(郡)에서 1, 2위를 다투는 고수였다고 한다. 바둑을 두실 때에는 할머니께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무리 부르셔도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국을 몇 번씩 다시 덥히다가 하도 화가 나셔서 빗자루로 대야 밑바닥을 두드리며 불이야! 하고 소리치자 바둑판만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시는 바람에 손발을 다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도 바둑이 당시로는 무척 세셔서 3급(현 아마 3단) 정도였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두 점 치수로 종종 바둑을 두시는 바람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과는 상당히 친밀한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필자를 데리고 나가시면서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시는 분은 조남철 국수이지만 장국원이라는 분도 만만치 않다는 것, 세계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시는 분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계신 오청원(우 칭위엔)이라는 분으로 살아 있는 기성으로 존경받고 계시다는 등, 국내외 바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도착한 곳은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시던 명동의 송원기원이었다. 그곳에서 조 국수를 비롯하여 몇몇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 후 바둑을 구경하며 담소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셔서 바둑에 대한 기초를 설명해 주셨다. 마침 당시 학교에서도 공책에 바둑판을 그리고 ○, Ⅹ로 바둑을 두는 것이 유행이어서 이때부터 바둑이 늘기 시작해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7급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한일대학생 바둑대회 대표로 활약했고 최근까지도 각종 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강1급 최훈 군을 비롯하여 과 정원 40명 중 약 10명 가까이가 1, 2급의 강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때쯤은 필자도 약한 1급 정도는 되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서도 4명 정도가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실력도 비슷했다. 이들과 자주 만나 바둑을 둔 덕분에 기력이 점점 더 늘게 되어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은 보통 1급(현 아마 5단)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80년에 열린 제1회 대한토목학회 바둑대회 A조에서 준우승, 그 다음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전국 토목공학과 교수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