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일본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홍역을 치렀다. 서일본 지역에 그야말로 물 폭탄이 쏟아져 한바탕 난리더니 초대형 태풍으로 오사카공항이 물에 잠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홋카이도에 진도 7의 강진이 몰아쳐 삼중고를 겪고 있다.
이런 때에 일본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안전하겠냐는 눈초리를 뒤로 하고 올해 두 번째 초저가 여행을 감행했다. 나가사키 근방에 있는 운젠지옥이 목적지였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다. 제아무리 인간이 준비하고 대비를 철저하게 한다 할지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운젠지옥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1991년, 50만 년 동안 활동해온 거대한 화산이 폭발해 마을을 집어삼켰다. 2500채 가옥이 소실되고 마을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버렸다. 화산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마을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운젠을 인기 있는 온천 여행지로 만들어 놓았다.
운젠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인천에서 나가사키까지 1시간, 나가사키공항에서 운젠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 아사햐야에서 갈아타야 했다. 나가사키 공항에서 아사하야 터미널까지 1시간, 아사하야에서 운젠까지 1시간 30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는데 운젠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넘었다.
버스가 굽이굽이 산길을 돌다가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기사에게 운젠지옥을 순례하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냐고 물으려는데, 입에서는 그저 ‘지코쿠(지옥)’라는 외마디만 나왔다. 두 손으로 뽀글뽀글 물이 끓는 형상을 만들어 보이며 지코쿠를 외치자 기사는 웃으면서 그곳 일대 어디서 내려도 된다고 했다. 부리나케 짐을 챙겨 내리면서 ‘지옥’, ‘지옥’을 거듭 외치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웃음이 났다.
운젠지옥은 냄새로 먼저 다가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진한 유황내가 진동했다. 땅 밑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와 열기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차도건 인도건 틈이 있는 모든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젠지옥으로 가는 길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근 주차장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운젠지옥 순례를 시작하였다. 30여 개의 화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슉슉’ 발밑에서 물이 솟는 소리가 마치 압력솥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와보면 이곳에 왜 지옥온천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금방 이해가 간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고통으로 가득 찬 지옥엘 간다고 말할 때 떠오르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펄펄 끓는 물과 땅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달걀이 썩는 것과 같은 진한 유황냄새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너무나 비슷해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이곳을 진짜 지옥으로 만든 건 약 350년 전 있었던 종교탄압이다.
에도시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펄펄 끓는 물에 산 채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여 서서히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운젠지옥이라 불렸다는 설도 전하는데, 야트막한 동산 위에 30여 명의 신자순교비가 있다. 지금까지 들었던 지옥의 소리가 그들의 비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운젠지옥을 걷는 내내 유황 냄새가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깊게 들이마시면 폐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니 유황내를 깊이 받아들이는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이라 걷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척박한 땅에도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었다. 운젠지옥 주변은 가스와 지열 때문에 억새나 철쭉, 적송 등 악조건을 견디면 살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식물들이 힘겹게 뿌리 내린 그 땅에서 새들이 울고 사람들도 산책을 즐겼다.
산책 후에 어여쁜 고양이와 눈맞춤을 하며 지열로 삶은 달걀과 운젠의 명물인 레몬사이다를 마셨다. 운젠지옥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일지 몰라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삶의 터전이다.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화산 폭발이라는 대재앙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바마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산길을 돌아가면서 인간은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운제지옥이 내게 들려준 값진 교훈이다.
때로 선거나 시험은 도전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얼마 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아홉 번의 출마 만에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그랬다. 범인들은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지치지 않는 도전은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갖는다. 숫자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 5년 차 변호사가 된 한 사내가 있다. 경력만 보면 막 커리어를 쌓아가는 푸릇한 젊음이 연상되지만, 이미 초로의 몸이 됐다. 대신 그의 가슴에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흉터와 사법고시 14전 15기라는 숫자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오세범(吳世範·63) 변호사의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선 맹수처럼 그를 둘러싼 카메라와 마이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4년을 꼬박 도운 세월호 가족의 가슴을 후벼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인을 제공한 방송사의 요청에 의한 조사였다. 결과도 대중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 낳은 참사입니다.”
오세범 변호사는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 세월호 보도영상 사용 논란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MBC로부터 긴급 진상조사위원회 참여를 부탁받았고, 조사에 참여후 위원회와 함께 언론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누구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애썼죠. 제작 과정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회적 공감대와 상식 부족이 만들어낸 사건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제작진의 관심이 쏠려 제대로 점검이 안 된 문제도 있었죠. 외부에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조사 결과를 이해해주셨죠.”
변호사 오세범 그리고 세월호
변호사 오세범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운명처럼 인연을 맺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경험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몸속에 박혀 있는 그것이 사회에서 진주 같은 존재로 변화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것이 2014년 2월이에요. 2011년 11월 사법고시 합격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두 달도 안 돼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온 국민이 보는 TV로 생중계됐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오 변호사는 그 길로 변호사를 대변하는 두 단체,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모두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법률지원 창구가 일원화되면서 만들어진 대한변협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법률상담지원단 중앙지원팀장까지 맡았다.
“아시는 것처럼 부당한 여러 원인 때문에 유가족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야 했어요. 그래서 상주 역할부터 당직까지 반별로 움직였는데, 이에 맞춰 변호사들도 반별로 담당이 정해졌죠. 전 2학년 1반을 맡아 특히 1반 가족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어요. 반별 스케줄에 맞춰 저도 정기적으로 안산으로 달려갔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과도 두루 친해졌어요. 4년을 함께 지냈으니까요.”
2학년 1반에서는 세월호 인양과 함께 뒤늦게 가족에게 돌아온 조은화 양을 비롯해 학생 1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오 변호사는 의지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부당한 압력을 막는 법적 우산이 되고자 집회 참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로 종료시키려 했던 2016년엔 다른 민변의 변호사들과 함께 릴레이 단식에도 나섰다.
옥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애초에 그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그는 학자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외치던 독재정권 타도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4학년이 됐을 때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들이 사라졌더라고요. 상당수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거죠. 독재 말 상황에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도피임을 깨달았어요. 그제야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유신타도와 헌법 개정을 외친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징역 2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적잖은 형량과 옥살이는 그를 기죽게 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4월 19일이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누구인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고함이 전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죠. 목소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저도 외치기 시작했어요. 유신헌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말이죠.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혐의로 형량을 2년 더 받았어요.”
다행히 형량 4년을 모두 채울 필요는 없었다. 2년 4개월 만인 1979년,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하지만 자유의 몸으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이번엔 ‘YMCA 위장결혼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집회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절, 사전신고 없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결혼식으로 위장해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저는 갓 출소한 막내여서 유인물을 만들고 나르는 잡일만 맡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1년 만에 다시 형 집행정지를 받았어요. 중간에 잠깐 쉬고 총 3년하고 넉 달을 옥살이한 셈이죠.”
평범하게 끝나지 않은 평범한 삶
그 과정에서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학생운동과 연행, 조사 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상물정 몰라 그런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짜 세상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갓 출소한 27세 청년은 학교에서도 제적당해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남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기로 맘먹었다. 다행히 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게 고압가스와 열관리 자격증을 따고 제약회사 보일러실 담당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그 시기 사회는 또 다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운동이었다. 큰 파도는 그렇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노조 총무부장을 맡게 됐죠. 노조활동을 반대하던 사 측에서는 제가 이력서에 서울대학교 중퇴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해고됐어요. 복직소송에선 졌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게 됐어요. 법조인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김칠준 변호사와의 인연은 의뢰인과 인권변호사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원에 자리 잡은 김칠준 변호사 사무소에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다산인권센터와 법무법인 다산이 시작된 곳이다.
“노조와 관련한 5~6건의 소송 당사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송사와 관련한 경험이 생기더라고요. 그 경험이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당시엔 노동 상담에 관심 있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 관련 사건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인근에 있던 삼성전자나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같은 큰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상이었죠.”
1993년, 그는 장명국 발행인과의 인연으로 내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한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주관리경영을 원칙으로 창간한 언론사다. 그는 이사 겸 업무 기획실장으로 신문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4년간 일했다.
“말이 기획실장이지 잡다한 사무를 도맡아 하는 총무 같은 역할이었죠.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신문사라는 곳이 내 생활이 없는 곳이잖아요. 밤낮없이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꽤 고생이었나봐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지금 그랬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보람 있는 직업 중에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제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어요.”
안정된 삶 뒤로 하고 책상 앞으로
변호사가 되는 일은 평범한 결심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몸이 좀 불었으니 아침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남편이 고시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아내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응원해줬다. 서울대학교 시절 농활에서 만난 1년 후배인 아내는 당분간 생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봐온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데 평균 5년 정도 걸리니, 나도 그 정도면 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 대학 입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끝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7년에 도전한 지 3년만인 2000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번번이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예요. 2차 시험 결과가 매년 12월에 발표되는데 바로 석 달 후에 다시 1차 시험이 진행되거든요. 2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다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이 지나자 고비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도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법무법인 다산에 들어가서 민사 사무장을 하면서 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엔 붙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는데, 붙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나중엔 법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대와 육사에 합격해서 부담을 덜게 되면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도전했죠.”
그리고 2011년 겨울, 드디어 사법고시 53회 시험에서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증을 받는다. 첫 도전을 한 지 15년 만이었다. 2차 시험만 8번을 봤다. 매스컴도 주목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제가 제일 좋아했어요.(웃음)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취업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만큼 좋아하지는 않더라고요. 이틀을 잠을 못 잤어요. 하루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루는 너무 좋아서요.”
‘안전한 삶’ 위한 법조인 되고파
변호사가 된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많은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민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었을까.
“제가 꿈꿨던 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생명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사고에 무관심하고 사람이 죽어도 위자료 주고 끝내는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대한변협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집단재난 현장지원 변호사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변호사도 우왕좌왕하기 쉬우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고양터미널 화재나 오룡호 침몰같은 재난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결과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민변의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으로 생활 단위,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운영을 투명화하고 마을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민, 특히 시니어 세대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50플러스재단을 통해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관련 민·형사 사례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하라고 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자회의 감사를 맡았어요. 입주자 커뮤니티의 활약에 따라 입주자들의 삶과 안전까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실패했을 때 지고 견뎌야 할 짐도 무겁다. 자칫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주위 평가를 의식하며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도전하기 전에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런 주관적 열망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아내였죠. 그리고 도전 가능한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 점검하면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게 돼요.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점검후 실천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마음속에 어떤 열망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는지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기상청 기상레이더센터에 따르면 낙뢰 발생 횟수는 총 62만 9411건으로, 연평균 12만 5882건에 달했다. 주로 장마철인 7~8월에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낙뢰가 집중되는데, 매년 낙뢰로 추정되는 화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국민안전처 집계 결과, 해당 기간에 총 354건, 연평균 약 71건의 낙뢰 피해 사고가 발생했으며, 7~8월 낙뢰 피해 건수는 전체의 56%(197건)를 차지한다고 한다.
특히 충남 동북부는 우리나라에서 낙뢰가 가장 많이 발생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소방본부에 따르면 2012년부터 현재까지 낙뢰와 관련된 화재는 모두 60건으로, 3억 6000여 만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월별로는 8월이 27건, 7월이 19건 등으로 여름철에 전체의 82%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낙뢰와 예기치 못한 전기안전사고로 인해 재산과 인명피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2008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을 개정해 ‘낙뢰’ 피해를 국가재난계획에 포함했고, 2010년부터는 낙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서지보호기(SPD)를 적용하도록 전기설비기술기준에 제도적으로 보완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아울러 KS규격 SPD를 적용을 법제화하였지만 낙뢰 피해는 크게 줄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낙뢰 피해를 방지하는 낙뢰 및 서지보호기를 전문적으로 개발, 제조하여 낙뢰 피해 예방에 근본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는 ㈜한국서지연구소(대표 김선호)는 KS표준을 뛰어넘는 고성능 제품으로 시장에서 획기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업체다.
한국서지연구소는 SPD 전문 제조사로 낙뢰보호전문기업이다. 2007년 자체개발한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기존 SPD보다 낙뢰에 따른 서지전압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했다. 낙뢰로 인한 전기안전사고로 재산과 인명피해의 증가에 대한 대응 방안을 연구하기 위하여 1997년 낙뢰서지연구소를 개소하고 연구활동을 시작하여, 2005년 11월에 한국서지연구소를 설립하여 낙뢰·서지 보호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여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고성능 서지보호기를 연구 개발 및 생산하는 업체로서 수처리시스템, 상하수도시스템, 풍력·수력·화력 발전, 감시제어설비, 보안설비 등 환경, 에너지시스템 원격제어와 PLC를 사용하는 모든 설비를 보호하는 SPD 전문기업이기도 하다.
김선호 대표는 “1980년 KT에 입사한 후 24년간 전송, 교환기 및 선로분야에 근무하면서 입사 당시부터 낙뢰 피해로 인한 불편을 보면서 지냈다”면서 “그 당시 장거리 전송을 담당했던 나선반송장치가 낙뢰를 한 번 맞으면 망가져, 모든 통신이 마비돼 이를 복구하는 데 무척 힘들었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피해가 계속 반복되고 늘어나고 있어 낙뢰 피해 방지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김선호 대표는 이러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낙뢰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예방은 해보고자 1997년 ‘낙뢰서지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실을 집 지하실에 자비를 털어 만들어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한국서지연구소는 세계 최초로 CCTV용 서지보호기를 전원부와 통신부 그리고 영상부 모두를 일체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내부에 각 선로의 전위차를 해소하는 모듈을 내장하여 피보호체로 인입되는 모든 선로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초고성능 서지보호기 ‘Super SPD’와 EMP방호 장비 등을 개발 낙뢰보호기술 분야에서는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다. Super SPD는 전원이나 신호에 대한 감쇄를 전혀 주지 않으면서도 서지제거 능력이 40~80dB에 달하여, 낙뢰나 기타 서지에 의한 충격에도 전압 변동 폭을 획기적으로 낮춰 전자기기를 보호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서지보호기업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방호수준이며 이는 객관적인 공인시험성적서의 수치로도 잘 나타나 있다.
기존의 보호기에 6000V가 유입되면 1500V 정도의 전압이 남아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지만, Super SPD는 50V 이하의 보호성능과 미군 MIL규격의 50kV의 EMP에 대하여 불과 100mA 수준의 노이즈만을 남겨 적의 EMP 공격에도 완벽하게 보호하는 우수한 보호성능을 자랑한다.
한국서지연구소는 2009년 정부로부터 세계일류상품인증을 취득했고 70여 품목의 주력제품에 대해 UL인증을 취득한 바 있다.
김선호 대표는 “2007년 9월 법인전환을 계기로 전원용과 통신용 주력제품에 대한 UL과 CE 등 국제규격 인증을 취득했다”며 “2008년 3월에는 벤처인증을 취득하고, 2008년 8월에는 NET인증을 취득했으며 이어 12월 NET인증기술을 활용한 56개 신제품에 대하여 중기청의 성능인증을 획득했다”고 밝혔다.
2009년 3월, 56개 성능인증 제품에 대하여 우수조달 제품에 선정된 바 있고, 2009년 6월에는 IEEE 고위 임원이자 미국 SPGS사 조지 지글러 회장이 내방하여 8일간의 자세하고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1250만 달러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또 그해 12월에는 세계일류상품인증을 획득했다.
세계 최초로 서지보호소자(GCA)를 독자 개발해 지난 2008년 ‘GCA를 사용한 서지전압 억제기술’이 지식경제부 신기술(NET) 인증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UL인증 취득과 현재는 수출국가별로 미국, 일본, 역국,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캐나다, 멕시코는 물론 EU에 국제특허 등록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전기 품질 개선 및 전기안전 원천기술인 ‘누전차단기 Trip방지 기술’ 과 EMP방호를 위한 PCI Protector에 관련한 120여 건의 지적재산권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진출이 이뤄지면서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제2009-312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서지연구소 고성능 SPD는 주로 거듭되는 낙뢰 피해로 애로를 경험한 공사업체를 위주로 관공서 및 공공기관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주로 수자원공사, 국방부, 한전, 도로공사, 경찰청, 산림청 등에서 많이 이용하고 있다. 고성능 서지보호기를 설치한 후에 피해가 거의 없어진 효과를 보았기에 한 번 설치했던 경험이 있는 곳은 한국서지연구소 보호기를 계속 찾고 있다.
2011년에는 낙뢰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대전 세동마을에 낙뢰보호기를 무상으로 설치한 사례가 있다. 2008년경부터 대전 유성구 세동마을에 대규모 낙뢰피해가 발생해 거의 모든 가정의 전기제품이 고장 나는 등 피해를 겪었고 이후에도 수시로 피해가 발생해 주민들이 낙뢰가 발생할 때마다 전기제품 플러그를 전부 뽑는 등 큰 불편을 겪어왔는데 이 같은 주민 불편사항을 듣고 한국서지연구소에서 무상 지원을 제의하여 지원하였다. 지원규모는 약 9800만 원 상당으로 세동2통 마을 모든 가정인 74가구에 약 2주일 동안 낙뢰방지기를 설치하며 심야보일러나 지하관정을 사용하는 가정엔 추가 장비를 설치하였고, 같은 해 대전 원앙초등학교에도 낙뢰 피해가 커 학생들의 학습에 지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2300여만 원 상당의 서지보호기를 무상으로 설치함으로써 이후 낙뢰 피해를 근절한 사례도 있다.
지금껏 낙뢰 피해 예방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한 한국서지연구소 김선호 대표는 “향후 새로이 개발한 반도체 Chip을 활용한 ‘서지보호를 겸하는 EMP보호장치’ 신제품을 양산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을 개척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적성국가의 핵EMP공격에 대한 방호뿐 아니라 불손세력의 EMP를 활용한 테러에 대한 방호에 기여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11월 15일 수요일 오전 일산 킨텍스 전시장에서 대한민국 안전산업 박람회 개막식이 있었다. 이번 행사에선 안전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안전의식 향상을 목적으로 김부겸 장관이 나서서 12개 해외 정부 대표단과 32개 바이어, 그리고 참가 기업이 만나는 '비즈니스 교류회'를 개최했다. 행정안전부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국내 안전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안전 분야 기술 제품의 판매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안전산업 박람회에 다녀온 날 경북 포항에서는 진도 5.4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이 큰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도 우리나라는 안전하다고만 생각했다. 아직 인명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도로가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해 충격을 줬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잘 대피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오늘 다녀온 안전산업 제품들을 떠올려보았다.
개막식 행사로 환경, 안전을 염원하는 무용 퍼포먼스가 있었고 내외 귀빈의 입장과 함께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을 통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소중한 약속, 반드시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행자부 김부겸 장관과 김재철 기상청장,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의 격려사가 있었고 많은 해외 귀빈과 기상청장, 환경장관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번 전시회 비즈니스 교류회를 통해 우리 기술의 안전산업 제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6일까지 연매출 1억 달러 이상의 글로벌 바이어가 참여하는 수출상담회장을 운영해 홍보와 수출 상담이 이루어지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보관도 운영된다. 특히 이번 박람회는 기상기후박람회와 국제 도로교통박람회와 함께 열려 안전산업 관련 여러 기업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었다. 방재, 화재, 보안, 치안, 산업, 생활, 드론산업 등 7개 안전 분야별 전시관, 수출상담회와 안전체험 마을 등의 체험 행사와 UN-ISDR 콘퍼런스 등 총 34개의 콘퍼런스로 구성되었다.
개막식이 끝난 후 큰 전시장을 가득 채운 우리나라 안전산업 기업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견학온 어린이들은 안전체험관 방문에서 드론의 신기함과 VR 등을 즐겁게 체험했다. 세부 프로그램으로 38개사 50여 종 체험이 있었는데 지진체험, 화재진압체험, 심폐소생술체험 등 흥미롭고 다양한 부스가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 기업에선 자동차 브레이크 밑으로 물건이 굴러가 브레이크 조작을 방해해 사고가 나는 상황을 막아주는 제품을 선보였는데 통역관과 함께 온 아랍 기업인들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설명을 듣는 모습이 뿌듯했다.
필자는 VR 기기를 착용하고 산업 현장에 들어가 안전점검체험도 해보았고 가장 재미있었던 건 미래 ICT를 통한 응급구조를 해보는 4D 앰뷸런스 탑승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구조단이 되어 헬기를 타고 날아다니며 재난당한 사람을 찾아가 구조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프로그램으로 정확하게 구조활동을 하는 것이 신기했고 꼭 필요한 장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 홍채인식 등 우리나라 기업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안전산업 제품이 너무 많았다. 이번 박람회는 전문성뿐 아니라 일반 관람객도 전시 제품의 관람과 부스 체험을 통해 안전의식을 높이고 안전산업에 대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국내 최대 규모로 열린 제3회 안전산업 박람회를 통해 많은 사람이 안전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안전산업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본다.
작년에 이어 사상 두번째 규모5.4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사상 처음 수능시험이 연기되고 수백 차례 여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나라도 지진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난방송’이 날마다 화면을 가드 채운다. 시민의 관심을 끌기 좋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족하다. 지난 해 재난대비 실전훈련에 몇 차례 참가하였다.
작년 이맘 때 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안전체험이 열렸다. 체험행사는 화재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하였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실습으로 진행하였다. 안전체험의 무엇보다 인명의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화재진압이 우선이었으나 인명을 중시하도록 훈련방법이 확 바뀌었다. 안전한 대피가 먼저다.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가정을 체험하였다. “지진이야!” 구호를 외치고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하였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이 언론을 통하여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고령자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였다.
소화기체험도 확 변하였다. 과거에는 소화기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을 하였다.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우는 대목에서 비상을 실감하였다. 교육자는 “벽면 쪽 손을 이용하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화재현장에서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cm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소화기를 인화물의 밑 부분에 분사하여야 소화효과가 있다.
태풍은 다른 재해보다 재해예보에 귀를 기울이고 미리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km 태풍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였다. 위험한 곳에서 멀리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하여 체험하였다. 버스의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 하였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에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하여야 한다. 제일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하여야 한다. 다음에 비상 탈출하여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하여 1~2km 떨어진 이웃 역으로 탈출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여 최후로 선택하여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하기 쉬운 시니어들의 많은 참여가 요망된다. 즐기면서 익히는 2시간의 안전체험을 마련해 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 및 친절과 성의를 다하여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소방관에게 감사한다.
관악구 응급처치 안전교육에도 참가하였다. 관악 안전지킴이는 안전 위해요인을 조기에 발견하고 사전에 안전사고를 예방하고자 생활 주변 위해요소를 발굴․신고하고 주민 관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악산, 도림천 등에 대해 지역 안전지도를 제작하였다. 응급상황 시 행동요령 등 이론 강의를 마치고 오후에는 응급처치 실습을 하였다. 체력이 엄청 요구된 것을 실감하였다.
서울 안전체험 한마당이 여의도공원 문화의 광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재난, 교통, 화재, 신변, 생활 및 어울림 등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안전교육 체험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소화기를 뿌려보고, 비상탈출 훈련을 하면서 무서워하지 않고 거뜬히 마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였다. 어린이가 즐기면서 체험하는 이 행사가 성인이 되어서도 안전을 실천하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원전 사고에 대한 영화로는 처음이었다. 영화는 허구로 만든 것이지만, 일본 후쿠오카 원전 사고, 우리나라 동남부 지진, 원전에 대한 안전 우려 등을 모두 버무려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 일으킨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이다. 정부 및 공기업 관료주의에 대해서도 따가운 비유가 최근 정세와도 맞아 떨어진다.
연가시를 만들었던 박정우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김남길(재혁 역), 김영애(어머니 석여사 역), 문정희(정혜 역), 정진영(발전소장 역), 김명민(대통령 역), 이경영(총리 역) 등이 출연했다.
40년 된 노후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발전소장은 문제를 노출시킨다는 죄목으로 한직으로 발령 난다. 재혁은 발전소가 싫다고 했다. 차라리 원양 어선을 타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지진이 나고 그 여파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다. 대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외국인들은 자국민들을 한국을 떠나 대피시킨다. 인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대피하지만, 정보를 숨기고 대처가 미흡하다. 2차 폭발로 이어지면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몰고 갈 만큼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재혁을 포함한 자원봉사자들이 결사대로 들어가 방수 작업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재혁이 나서 천장을 폭발시켜야 한다. 문제는 폭파와 함께 수장되는 것이다. 재혁의 위대한 희생으로 사고는 수습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큰 재난이 터지면 컨트롤 타워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책임 회피, 매뉴얼 부재, 덮고 보자는 관례 등으로 쉬쉬하다가 문제를 키우거나 수습 불능 사태가 되는 것이다. 총리가 대통령에게 가는 보고서를 중간 차단한다. 실세들이 대통령을 둘러 싸 제대로 된 형세 판단을 못하게 하거나 아예 정보를 차단하는 사례를 보여줬다. 발전소 내부에서도 그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경제성이 우선이었다. 진실은 묻히고 임기 동안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모리배들이 득세한다.
재난이 나면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아비규환이 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일본의 지진 대처와 비교해 본다. 마구 소리 지르고 멱살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면들을 보면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물론 가족애가 불성실하고 미흡한 공권력에 대항하다 보니 절규를 불러 온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시설, 발전소 폭발 장면, 폐허가 된 주변 동네, 꽉 막힌 고속도로와 피난 행렬 등 볼만한 장면들이 많다. 전 국민이 교육적인 차원에서라도 봐야 할 영화이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내난영화 '해운대'를 능가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천만관객이 기대되는 영화이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이 주축인 원자력 발전소 밀집국이다. 언제라도 원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일단 사고가 터지면 그 여파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할 정도로 크다. 나라가 작다 보니 피할 곳도 없다. 원자력 발전소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더니 무시무시한 위험과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 이웃을 위해 희생한다는 희망도 있었다.
일본 홋카이도 어느 온천 마을에 있는 주민에게 늘 지진 위험이 있는데 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우리가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도 없고, 온천이라는 관광 수입원을 놓칠 수 없기에 그냥 살아간다는 말이 기억난다.
일본은 재해가 많은 국가다. 여기에 집값 폭락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복구비용은 250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진에 대한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는 일본 전역을 강타했다. 이와 맞물려 우리나라 공항에서 가까운 인천 지역 빌딩에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는 바람에 가격 상승세가 일어나기도 했다. 1999년 몽골을 여행하던 중 관료로부터 일본이 지진 등 비상시에, 몽골로 이주해올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한 적도 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본 문화는 이러한 자연재해 속에서 발달해왔다. 화산이 있어 온천문화가 생겨났고 지진이나 태풍, 대설에 대응하기 위해 건축물이 진화하면서 일본은 재난 대비 선진국이 되었다.
우리나라 내진설계율은 35% 정도에 불과해
예측하기 어려운 재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내진설계는 2005년 이후 건축허가를 받은 3층 이상의 주택에 대해 규정했고 이번 경주 지진으로 2층 이상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현재 초고층 아파트 등 일반 고층 건물은 진도 7 정도에 견디도록 설계된 원자력발전소 기준에 맞춰져 있다. 기존 건축물을 내진 보강할 경우는 건폐율, 용적률, 대지 안의 공지, 높이 기준 등을 완화할 수 있도록 하여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내진설계가 적용된 건축물은 약 35%에 불과하다. 앞으로 내진설계가 강화되면 공사비가 더 들어 분양가는 올라갈 전망이다. 내진 성능을 0.5 높일 때 분양가는 3~5% 더 상승한다고 한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을 때, 내진 설비를 특별 기준 이상으로 갖추는 건설업체는 드물다. 시장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원전의 경우, 내진설계 기준을 6.5에서 7.0으로 높이는 데 1000억원이 더 든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준을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지 예측이 어렵다. 우리나라 동쪽은 원전 밀집 지역이다. 이제는 원전의 안전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원전을 줄이면 전기 부족을 해결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 부담이 되고 또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고압선 문제는 지역 주민들의 불편사항으로 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전기를 아껴 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경 문제와 재난에 대한 대비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인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가 아닌 우리 후손들을 위해 준비하고 생각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다음 문제들을 풀어보세요
❶ 내진설계가 잘된 지역은 어디일까?
❷지진이 발생할 경우 고층이 안전할까, 저층이 안전할까?
❸우리나라에서 아픔과 교훈을 남긴 건축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 해설과 답
❶비교적 새롭게 조성된 도시인 세종(50.8%)과 울산(41%), 경남(40.8%)은 내진설계율이 높다. 하지만 이미 대도시로 조성된 지 오래된 부산(25.8%), 대구(27.2%), 서울(27.2%) 등의 내진설계율은 낮다.
❷지진에 따른 건축물 구조 안전성은 저층 건물보다 고층건물이 뛰어나다. 다만 저층은 외부 피난이 수월하다는 점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❸(1) 1970년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공사 자재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튼튼하게 유지될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을 넣을 정도로 부실공사를 행했다. 그 결과 준공 4개월 만에 아파트 한 동이 무너지고 말았다.
(2)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1년 후인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3) 예전에는 한강 둑이 무너진 적이 종종 있었다. 서울 상습 침수지역에서 다세대주택 저층이나 단독주택, 또 반지하에서 세를 살던 사람들은 물난리를 겪었다. 그때 그 지역에서 물나리를 겪은 사람들은 지금도 저층이나 저지대를 기피한다.
(4) 1980년대 말, 당시 정부는 아파트 200만 호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연간 주택 공급물량은 50만 가구인데 일시에 네 배가 넘는 많은 아파트를 지었기에 원자재가 부족했다. 그 결과 바닷모래를 사용하기도 해서 새 아파트에 금이 가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1991년 부동산시장은 안정됐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필자는 올 한 해 서울 시정 모니터로 활동 중이다. 무슨 큰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서울시에서 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여러 방면의 일을 알 수 있어 유익하다. 가끔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재미있다.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가 되어 공공기관을 방문해 직원들의 방문객 대하는 태도를 점검하기도 하고 택시기사들의 불편사항과 서울시에 바라는 점을 모니터하기도 한다.
오늘은 광나루 안전체험관에서 안전체험하는 과제가 있었다. 화재 대피나 태풍,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대처 방법을 체험해본다고 해서 재빨리 신청했다. 남의 나라 일인 줄로만 알았던 지진이 요즘 들어 우리나라에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어 불안하고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광나루 안전체험관은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어 찾기도 쉬웠다. 오늘 시정 모니터 체험단은 20명이다. 오후 3시에 시작해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도착해보니 안전체험관 안은 유치원 꼬마들과 다른 동에서 온 단체 체험객들로 시끌시끌했다.
광나루 안전체험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재난 안전체험관이라 한다. 시민 스스로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을 배우는 공간으로 지진, 태풍, 소화전, 건물탈출, 응급처치 등 다양한 안전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친절하게 안내해준 소방관을 따라 처음 체험한 건 화재 상황이었다. 이 체험은 실제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심장이 약하거나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필자는 두렵긴 했지만 체험이니 무슨 일이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도전했다.
화재 대피 땐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려야 하며, 벽을 짚고 몸을 낮춘 상태로 대피해야 하고, 1층으로 가는 게 좋은데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베란다나 창문 쪽으로 가서 구조 요청을 해야 한다. 손잡이가 뜨거우면 문을 열면 안 된다는 등 여러 가지 주의사항도 들었다. 소방관의 자상한 안내가 있었음에도 화재 대피 체험은 정말 무서웠다. 건물 복도에 켜 있는 비상구 유도등 표시만 보일 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줄지어 걸어야 했다. 어느 구간에서는 인체에는 해가 없다지만 공포스러운 하얀 연기를 뚫고 지나야 했다. 실제로 불이 나면 하얀 연기가 아닌 검은 연기가 난다고 했다.
필자가 폐쇄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체험에 참여한 게 후회가 될 정도로 5분 남짓한 시간이 몹시 두려웠으며 숨이 막혔다. 깜깜한 곳에서 대피처를 찾아 움직이는데 실제라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되었다. 화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드디어 화재 공간을 벗어나 대피 훈련을 했다. 건물탈출 체험으로, 불이 나서 건물이 고립되었을 때 완강기 등 피난기구를 사용해보는 체험이었다. 겨드랑이에 완강기를 채우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영화 에서 배우 전지현이 완강기를 허리에 차고 건물을 멋지게 뛰어내리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해보는 체험이 재미있었다. 건물마다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다는데 평소엔 관심이 없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앞으로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풍 체험에서는 초속 30m의 바람을 맞았다. 필자의 몸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매우 강력한 바람이어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태풍이 불면 무조건 건물 안으로 피해야 한다.
드디어 지진 체험도 했다. 진도 7의 체험이었는데 이곳은 가구들을 고정시켜놓았지만 실제라면 냉장고가 이리저리 돌아다닐 정도라 한다. 정말 흔들림이 대단해 식탁의 다리를 꽉 붙잡고 있어야 했다. 지진을 감지하면 먼저 지진이 났다고 소리쳐 알리고 식탁 밑이나 머리를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진이 일어나는 시간은 길어야 2분 정도이고 짧으면 10~20초라고 한다. 지진이 멈추면 가스밸브나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운동장 같은 넓은 장소로 대피해야 한다.
불이 났을 때 각 건물에 비치되어 있는 소화기 사용법도 체험했다. 이렇게 재난체험을 해 보았지만 실제 상황이 되면 배운 대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체험을 해봤으니 덜 당황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무료로 안전체험을 해볼 수 있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참여해 재난 상황에 대비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상 최대 규모 5.8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수백 차례의 여진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우리를 여전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때맞춰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동작구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2016 안전체험이 열렸다.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10월 4일 10시 서울소방재난본부 김종섭 행정주임 소방관의 안내로 실내 체험 실습에 참여했다. 이날의 체험 행사는 화재시 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했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 실습이 진행됐으며 무엇보다 인명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훈련 방법이 확 바뀌었다.
실감난 지진대피 체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 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 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 가정까지 체험했다. “지진이야!” 하고 구호를 외친 뒤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했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은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제대로 대피할 수 있을지 많은 염려가 됐다.
소화기 체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화기를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체험에서는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웠다. 비상상황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훈련이었다.
김 소방관은 “벽면 쪽 손을 이용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재 현장에서는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센티미터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소화기는 인화물 밑 부분에 분사해야 소화 효과가 있다.
태풍, 안전벨트, 지하철 화재 관련 체험
태풍은 재해 예보에 귀를 잘 기울이고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킬로미터의 태풍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풍은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했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 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해야 한다.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한 뒤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해 1~2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역으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므로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해야
안전체험은 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인들의 참여 방법도 강구해봐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들은 재난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대피요령에 대한 교육이 더 절실해 보인다. 즐기면서 익힐 수 있는 안전체험을 마련해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친절과 성의를 다해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김종섭 소방관과 직원에게 감사드린다.
남과 북이 갈라진 대한민국에 방위 훈련이 있었다. 제402차 민방위의 날이다. 정부가 전쟁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조성하여 그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지난 8월 24일, 정확하게 오후 2시 귀가 터질듯한 데시벨로 사이렌이 울렸다. 정부는 조직적인 방호 태세를 구성하여 실제적인 훈련으로 체험을 하면서 민간적인 방위 활동 연습을 실시했다. 적의 침공이나 비상상황에서도 나라의 안녕질서를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제일 먼저 공습경보에 따른 발령으로 주민이동 및 차량 이동이 통제된다. 국민 모두는 정부의 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방위적 활동에 적극적인 자세로 돌입해야만 한다. 다음으로는 경계경보가 울리면 사람들과 차량들은 전면 통제가 된다. 약 20분이 지난 후에야 경보 해제 발령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불시에 적들의 무력침공이나 주요 시설 등이 공습을 당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모든 국민들은 사태에 대응한 준비 태세에 돌입하고 경계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 수단이다.
필자는 그날, 자동차 운행 중에 있었다. 정신없이 터져오는 소리에 눈알이 빠질 만큼 깜짝 놀랐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즉시 갓길에 차를 정차했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었다. 라디오를 켰다. 그때 예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필자의 학창시절에는 학교에서도 실습을 했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학생들은 지하 대피소 같은 곳으로 삽시간에 달려나가 몰려다니던 생각이 떠올랐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쾨쾨한 곳에서 몇 분간은 쪼그리고 앉아 꼼짝도 못하는 것이다. 친구와 소곤소곤 수다를 떨던 추억이 스쳐갔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젊은 시절의 만감이 교차해 수줍은 웃음을 지어봤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는 미사일과 핵무기를 비롯하여 어마어마한 현대적 무기에 의한 공격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도화된 과학적 기술에 의하여 첨단 학적인 발달이 이루어져왔다. 각종 무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이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도 그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 군사적인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일 것이다.
민방위 훈련은 전 세계에 문명의 발달에 따라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되면서 비롯된 활동이라고 한다. 또한 정부는 이러한 고도의 전쟁 피해를 최대한 최소화시켜야만 한다. 전쟁에 대응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방호구조활동으로 그 전면적인 민방위 훈련을 통하여 나라의 참사에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엘리트 계층 및 식당 종업원의 탈 북으로 인한 김정은의 보복 테러 지시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4차 핵 실험에 이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도 국가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거기에 따른 도발 위협도 국민불안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에 따른 대책으로 어떤 비상상황에도 시민의 생명은 확보되어야만 하고, 국민의 안전보호는 최우선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슬픈 현실에 처해져 있는 대한민국은 늘 방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민 방위 활동은 꾸준한 노력과 실습이 반복되어야만 할 것같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체험 식 대피훈련을 실시 함으로라도, 그 유사시에 나름대로 작은 성과나마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시행되는 훈련을 맞이하며, 아픈 조국의 현실이 가슴으로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