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빠져들면 출구 찾기 힘들다는 배우 금보라를 돌직구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만났다.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금보라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며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또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그간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 주면서 그녀와 그는 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자취가 ‘센 언니’처럼 보이겠지만 금보라는 도시락 싸주는 엄마, 현모양처로 살고 있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에서 ‘명품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금보라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고서는 설레었다. 거침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쏟아 낼지 궁금해서였다. 나와는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달간 같이 방송을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에 분명 깜짝 놀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금보라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눈이 반짝거리면서 폭탄발언을 와장창 쏟아 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미친 거 아닙니까?” 라고 핏대를 세우더니 “우리 집 앞에 사드를 설치하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안보에 무책임 할 수 있나?”하고 광분한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연예인이 예민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 자칫 구설수에 올라 상당히 곤란을 겪을 수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 성격에 이봉규가 ‘보수 꼴통’이라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이야기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나 금보라야!”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다.
사람들이 답답해서 할 말이 많아도 토론하기를 꺼리는 세월호에 관해서도 거침이 없다. “세월호 침몰은 부도덕한 기업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 왜 대통령을 욕하냐?”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다. 금보라는 충청남도 당진이 고향이라 같은 충청도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되는 걸 바랄 줄 알고 그에 관해 물었더니, “반기문 절대 안 찍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벌써 자기가 대통령이 된 줄 알고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요즘 괜찮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와 같아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인생스토리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필자도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인생스토리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표로 연결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분석이 날카롭게 꽂힌다. 정치평론가 누구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예언하지 않는데 금보라가 말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와 닿는 대로 평가하기에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그게 선거 결과로 그대로 반영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정현 대표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는 금보라가 처음 맞추었을 것 같다.
필자가 진행하는 TV조선의 에 게스트로 초대해서 본격 정치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조만간 금보라가 정치토크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봉박두! 기대해도 좋을 듯!
두 번째 남편, 먼저 자빠뜨린 남자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의 남편과는 정말로 행복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금방 “아니지! 지금은 행복하니까 죽으면 아깝지”라고 번복한다. 지금의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는데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하고는 안 되겠다”하고 지레 겁먹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래서 이판사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에 반해서일까 그와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과 만난 지 8개월 만에 금보라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단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통통하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만 경상도 ‘상남자’에다 배려심이 많다”며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한다. 결혼 전에 남편과 데이트 할 때 그녀가 밥값과 술값은 도맡아 냈을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금보라처럼 예쁘고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스타인데 금상첨화로 매너까지 좋다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늪이거든~”이라고 또 자랑 질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단다. “인간 금보라를 제대로 알려면 사계절은 지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녀가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직접 싸 준다니 믿기 어렵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지쳐도 도시락은 꼭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싸 준다니 이봉규가 금보라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남편에게 잘 해 줘서 내가 없으면 불편하게 만들어 내 소중함을 어필하자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같이 방송 할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예쁘고 거친 여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녀도 “이혼 후 아이들 문제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운동회를 갔는데 ‘아빠와 달리기’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재혼 전이라서 아빠가 없었었기에 참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한 학부모가 대신 아빠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해 주최 측에 ‘부모와 달리기’로 바꿔 달라고 항의했다. 결국 그날 엄마와 뛴 사람은 우리 아들뿐이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한다. 금보라는 아들과 열심히 뛰었지만 아빠들과 뛰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가 위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못 뛰어서 졌다”고 속상해 했지만 “자기 혼자 아빠 없이 엄마와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깔끔한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배우 처지에 아빠와 달리기 경기에 엄마가 뛰게 해달라고 우겨서 참가했으니 그녀도 참 어지간하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남편이 데리고 온 25세의 딸이 있는데 최근에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명품 신발을 사와 속상했다. 아직 명품을 살 나이는 아니라는 평범한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13년 동안 자기 딴에는 정성껏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고백이다. 소리 지르면서 야단치면 폭발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분하게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말에 반품을 하는지 지켜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응징을 할거라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추후에 반품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의 금보라에 대한 평가는 “가방끈은 짧아도 똑똑하고 아는 건 많지 않아도 현명한 여자다.” 남편의 평가대로 그녀는 현명하게 장문의 카톡으로 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을 지면으로 그대로 옮긴다.
어제 일은 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 잠까지 설치는구나. 나름 딸내미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솔직히 약간은 쇼크라고 할까?
여하튼 속상하고 화도 났다.
어떻게 네 나이에 그런 쇼핑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명품 신발이 신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 살면서 네 말대로 없는 게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넌 다른 네 또래보다 많은 걸 가졌고 넘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돈을 많이 번다 해도 사치와 허영에 들떠서 생각 없이 명품만 쫓는 한심한 여자로밖에 난 생각이 안 들었다.
...(중략)...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언제까지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살아가려면 절제도 배우고 참을 줄 알고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너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내 지적이 틀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서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옳다면 이것만은 알아 두길 바란다.
명품 신고 입고 든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빛난다는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글 속에 절절히 묻어난다. ‘계모는 이래도 계모고 저래도 계모’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다는 금보라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극동빌딩 6층의 ‘M바’대표에게 직원들 빨리 퇴근시키라고 야단치면서도 뒤로는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슬며시 건네는 금보라의 마음 씀씀이로 볼 때 딸에 대한 꾸짖음도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보석이건 나를 빛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이 나를 빛나게 해줬다”고 하니 금보라의 딸에 대한 꾸짖음과 사랑은 정당해 보인다.
“마누라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자신감은 그녀의 일상에 배어 있을 것 같다. 외모만큼 섹시한 금보라의 일상을 염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증조할아버님 때부터 우리 집은 장남 집안이 되었다. 증조할아버님은 본래 차남인데, 형님이 큰댁에 양자로 가는 바람에 졸지에 장남이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님도 증조할아버님과 똑같이 형님이 큰댁에 양자로 가게 되어 장남이 되고 말았다. 시아버님은 5형제의 장남이고, 남편도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기다가 아들은 외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5대째 장남인 집안이 되었다.
종부의 자리
시아버님의 형제들과 그분들에게서 태어난 자손들까지 모두들 우리 집으로 다 모인다. 시집와보니 처음에는, 기본이 27명이었다. 사촌 시동생들이 차츰 결혼들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니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님이 장남이 되어서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할아버님이 물려받고, 또 시아버님이 물려받았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이 물려받고 내리내리 하다보니까 우리는 8분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사와 명절이 돌아 올 때면 두 달 전부터 걱정되고, 끝나고 나면 한 달씩 앓아누웠다. 막내로 자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있다가 얼떨결에 종부가 되어버린 필자는 종부의 자리가 겁이 났다. 종부의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닌데, 자격도 없이 덜컥 앉아버렸으니, 몸 고생과 마음고생이 자심하다. 작은 종부자리도 이렇게 어려운데, 대종가집의 종부는 얼마나 어려울까! 가늠조차 안 된다.
2대에 걸친 개혁 단행
새 할머님도 어머님도 모두, 2대에 걸쳐서 집안을 위해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셨다.
새할머님은 제사를 하나로 통합 하셨고, 어머님은 제사를 아예 없애고, 시아버님의 묘를 ‘아내의 권한’으로 폐장 하셨다.
할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님이 재혼을 하는 바람에 새 할머님이 계시는데, 그 제사를 평생 모두 받들었다. 돌아가실 때는, 후손들을 위해서 ‘바쁜 세상에 젊은 사람들이 일해야지, 어떻게 제삿날 일일이 다 모일 수 있겠느냐, 시대에 맞게 고쳐가면서 살아야 한다’시며 제사를 모두 모아 합쳐서 할아버님 제삿날에 합동으로, 일 년에 딱 한번만 제사 받들라고 유언하셨다.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 덕분에 손부인 필자가 좀 편해졌다.
어머님도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윤달을 택해서 남편의 묘를 ‘폐장’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성당에 납골을 하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천주교 신자이시다. 시누이들도 모두 천주교 신자인데, 어머님의 납골 관리는 딸들에게 맡기셨고, 고향에 있는 산소들은 맏아들인 우리에게 맡겨졌다. 전부터 우리가 관리해 오던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또, 몇 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쯤에는, 제사를 아예 없앴다.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도 있고 하니까, 각각들 개인적으로 집에서 제사를 따로 지내고, 우리 집에서 모두 모이는 건 이제 그만 하자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윗대 조부모님들 제사는 집에서 지내지 말고, 그 대신 성묘 가서 간단하게 지내라고 평소에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제사도 폐하고, 조상 묘가 있는 남편 고향에, 일 년에 두 번, 한식 때와 추석 때에 성묘만 다녀온다.
개혁에 대한 갈등
이제는 우리 차례다. 새 할머님이나 어머님처럼, 세상 떠나기 전에 집안의 마지막 남은 폐단을, 개혁하고 떠나야 할 사명이 남편과 내게 있다. 그것은 남은 조상들의 묘를 윤달마다 하나씩 폐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요즘 갈등하는 문제가 바로 ‘조상의 산소 폐장’이다.
조상의 묘를 폐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집안의 어른들이 동의해 주어야 하고, 형제들과 사촌들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 동의라는 것이 본시 한 사람의 동의도 얻어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이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동기감응’이라는 말이다. 조상과의 동기감응으로 인한 ‘후손 발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화장’을 하면 ‘동기감응’은 없다.‘무해무득’ 즉,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뜻이니 ‘후손 발복’ 자체를 바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납골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도록 놔 주어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붙잡고, 후손에게 물려줄 산천을 훼손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머님도 조상들의 산소 폐장을 유언하셨고, 필자도 어머님과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2017년에 윤달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남편과 필자가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폐장은 언제고간에 꼭 해야 할 일이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잘 모른다. 멀리서 바라봐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아름다운 산천이 군데군데 후벼 파헤쳐져 흉측하기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산을 깎아서 모두 산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이 땅이 자꾸만 훼손되고 자원이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산천이 모두 산소로 뒤덮이고 말 것만 같다. 후손에게 물려 줄 것이 없다는 건 후손의 미래가 어려워진다는 것과 같다. 이 땅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져야 한다. 죽은 사람은 깨끗이 퇴장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손들은 조상의 훌륭한 일들을 기억하고, 배워서 훌륭한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고, 또 다음세대에 알리고 가르치고 하는 일들을 이어가면서 한 집안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가면 족하다고 본다.
친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아버지가 유난히 주사가 심하고 권위주의적이라 우리 형제들은 멀리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아버지가 재혼하셨으니 큰 짐을 던 셈이다. 20년을 같이 사시다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새 어미니가 혼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당연히 집안 행사 때마다 찾아 갔었지만 보통 때 일부러 찾아 가자니 마땅치 않았다. 우리가 가면 이것저것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하니 움직여야 하는데 폐를 끼치는 것 같고 막상 만나봐야 서먹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본 것도 아니고 해서 기른 정도 없다. 아버지가 재혼할 무렵 우리도 바로 결혼해서 나왔기 때문에 같이 지낸 기간도 없다. 그래서 얼굴 뵙자고 일부러 간 일은 없다.
어쩌다 전화를 해도 바로 연락이 안 되었다. 집 전화는 부재중인 경우가 많고 미사 중에는 전화를 받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성당에 다니시느라 늘 바쁘다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우리도 바쁘고 사실 친어머니처럼 정이 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같이 보기는 하지만,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어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한데도 막상 친어머니 생각에 그런 호칭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 내 입장이 아닌 애들 입장으로 본 촌수이다.
새 어머니가 이번에 고령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무릎 관절 수술을 받았다. 가족 밴드로 연락은 받았지만, 바쁘다 보니 병문안도 못 갔다. 보름 간이나 입원했다는데 못 간 것이다. 사실 친어머니 같았으면 당연히 갔다. 새 어머니이다 보니 등한 시 된 것이다. 그것이 못내 걸렸었는데 마침 조카 손주 돌잔치를 한다고 해서 모였다가 생각나서 새 어머니 병문안을 제의한 것이다. 서울대 병원에서 동네 병원으로 옮겨 거리도 가깝고 면회 시간제한도 없어 편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침 운동 삼아 복도를 왔다갔다 하시다가 우리와 마주 친 것이다. 회복 단계라서 통증도 별로 없고 3~4개월 지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술비도 좀 드리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처지가 나보다 훨씬 나으니 그런 부담까지 안을 필요는 없다.
무릎 외에는 건강한 편이다. 고령이지만 우리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르니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특별한 인연이 되었으니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잘 모실 뾰족한 방법이 마땅치 않다. 내가 차라도 있으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닐 수 있겠지만, 여건이 안 되니 마음만 있다.
어쨌든 병문안을 못가서 찜찜하던 일이 이번 일로 덜게 되니 홀가분했다. 몸은 아픈데 찾아 줄 사람이 없을 때 외로웠을 것이다. 자식들이라고 멀쩡하게 있는데 오지 않으니 원망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더위가 좀 식으면 남한산성 불당리 계곡의 닭죽집에라도 모실 생각이다. 생전에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다.
심리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 앨리스 밀러가 쓴 "사랑의 매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아이가 억누를 수밖에 없던 흥분과 분노, 고통을 어른들은 모른다. 아이는 미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그것을 받아드리는 복종의 길을 택한다.
시간이 지나 어렸을 때 왜 맞았냐고 물어보면 "제가 잘못 했을 거예요 어릴 때 제가 장난이 심했거든요" 왜? 이렇게 되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애정 어린 관심 대신 학대와 무시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당연히 자기 잘못의 결과라고 받아드리는 데만 익숙해지고 자신의 감정이입 능력을 잃어버린다. 즉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겪는 비극의 본질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중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알게 된지가 30년이 훌쩍 넘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다. 이상한 것은 그 집의 남편이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8살 아래 아내한테는 우리가 옆에서 듣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욕을 얻어먹는다. 반말은 당연하고 아내가 기분이 나쁘면 남편에게 " 너, 임마" 이런 수준이다. 우리 앞에서도 공공연히 남편을 구박하여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별로 잘못 하는 것도 없는데 남편이 말만하면 우리 앞에서도 말꼬리 잡고 행패 수준의 말을 한다. 남편이 어떻게 참고 사는지 의아했지만 젊은 아내와 사니까 사랑스러워 저런 욕도 애교로 듣나 보다 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남편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지독히 매를 맞았다 했다. 스스로 죽으려고 목에 낫을 갖다 댄 적도 있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죽어지내는 것이 몸에 밴 습성이 된 것이다. 아내도 첨엔 시집 와서 박봉의 남편에 시동생 여럿 건사하느라 투정을 부렸단다. 점차 투정의 강도가 높아져도 욕설과 매에 길들어진 남편은 이걸 사랑으로 믿어 왔다. 이 책에서 "코란에 여성의 할례라는 잔인한 관습을 인정하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 의식이 계속되는 것은 할례를 당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경험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을 딸과 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
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10살 무렵에 클리토리스를 제거당한 여성이 무수히 많으며 또 그들 중 다수는 이러한 관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재혼한 남자가 의붓딸을 상습 성폭행했다. 아니 어머니가 왜 막아서지 못했는가? 어머니의 말에 맥이 빠졌다. "나도 그 남자가 무서웠어요.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 폭력에 길들여지면 저항력을 상실해버린다. 이 책에서 히틀러, 스탈린도 어린 시절 폭력으로 자라 이중인격자가 되었다고 했다. 스탈린은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의 외동아들이었는데 매일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아버지 손에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었다. 그가 억눌렸던 극단적인 공포는 어른이 된 후 편집증, 곧 모든 사람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망상으로 나타나 1930년 수백 만 명이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처형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 고통 받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하다. 때리고 학대하는 것이 너무 상습화 되어 있어 때리는 자도 맞는 아이도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매 맞는 아이가 많다. 매 맞은 아이가 자라서 또 매를 든다. 아무런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게 문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랄 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술만 먹고 오면 우릴 때렸다. 난 자식을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정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다. 당대에 매의 뿌리를 끊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위대하다고 느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남편을 잃은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두 딸과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던 그때 집 안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빈정거림을 참아가며 모았던 그 그림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 다시 찾아온 인생의 위기에서 그림은 또다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판교에서 만난 하효순(河孝順·66)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녀 나이 41세였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녀 곁에는 아이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생활력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고향인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뜻에 따라 상경해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 제의가 들어왔다. 막연히 꿈꿔왔던 큰 회사의 비서 자리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던 인천제철은 인천시청 근처. 자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곳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지인의 친구였고,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됐다. 그리고 결혼했고 아이 셋을 얻었다.
빈정거림 속에서 수집한 그림들
느닷없는 남편의 죽음. 하늘이 무너졌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았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니 돕겠다는 다른 이들의 선의도 악의로 느껴졌어요. 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건 딱 하나 제대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 바르게 키우겠다는 결심이었죠.”
생계는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를 도우며 유지했다. 오직 아이들의 공부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유일한 그녀의 버팀목이 된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했어요. 남편과 백화점에 가면 늘 들르던 곳이 있는데 맨 위층이었어요. 그곳에 갤러리와 분재 매장이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분재를, 저는 그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한 점씩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림을 산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화랑이냐는 핀잔은 양반이었다. 어떤 친구는 돌았냐고도 했다.
동향 사람이라 더 애착이 갔던 박생광(朴生光·1904~1985) 화백의 작품은 할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밖에 배정례(裵貞禮·1916~2006),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문봉선(文鳳宣·1961~ ) 화백 등 내로라하는 작가의 그림들로 집안을 채워나갔다. 남편을 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삶의 낙은 갤러리를 찾는 것이었다. 갤러리 직원들은 그녀를 ‘청담동 지영이 엄마’로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였다.
“문봉선 화백은 그가 대학원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작품에 관해 묻자 수줍어하던 문 화백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그 이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더 살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상 다시 돌려드려야 했어요. 그때도 절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은 단지 작품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작가와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큰딸 한마디에 정신 번쩍, 생계현장 속으로
어느 날 “엄마 우리 괜찮아?”라는 큰딸의 질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는 꺼져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 7년째, 아이의 지적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광명의 프랜차이즈 피자 매장이었다. 젊은이들과 계속 만날 수 있고, 일찍 끝날 수 있는 일을 찾다 발견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죠. 잘 돼야만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왕복 34km 거리를 출근했어요. 시장도 직접 다니고, 주방에서 설거지도 도맡아 했죠. 그 매장을 시작하면서, 본사 회장에게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죠. 덕분에 빚도 갚고 세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떵떵거릴 수 있게 됐다. 첫째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모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둘째 딸은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11년째 비서로 근무 중이다. 막내아들은 국내 은행을 다니다 뉴욕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미국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짧게 보낸 두 번째 결혼과 맞닥뜨린 지옥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쯤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재혼이다. 54세가 됐을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큰애 결혼시키고, 막내 군대 보내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가고, 밥 한 끼 함께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고요. 자식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친구들의 소개가 있었어요.”
차관까지 지낸 관료 출신에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았다. 둘 다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는 결심도 했고, 집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10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식도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고 남겨진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었다.
“지옥 같았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어요. 계속해서 숨고만 싶었고, 실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숨어 있었죠. 건강도 순식간에 악화됐고요.”
그래서 미국 뉴욕에 있던 아들에게로 갔다.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림이었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 작은 화랑들이 많아요. 그곳에 출근도장 찍듯 매일 가서 종일 그림만 보고 살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는 아들이 함께 관광지에 갔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2년을 더 그렇게 살았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큰 소리도 못내고 그렇게.
고희(古稀)에 개인전 통해 인생 되돌아볼 터
집 안에만 머물다 인생의 활기를 찾은 계기는 두 권의 책이었다. 부산의 친구가 선물한 컬러링북과 며느리가 가져다준 흔한 잡지 한 권.
무채색의 컬러링북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다 보니 그림은 소유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색을 입히고,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지금 그림 인생의 원천이 된 갤러리 겸 커뮤니티인 ‘아트담’이다.
“살면서 4B연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어요. 그냥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졸랐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한 명 가르친다는 기분으로 가르쳐 달라고. 그 이후로 2년 가까이 한 번도 결석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둥이 된 그림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관계들과 자신감, 재발견한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무작정 피하려는 삶,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건강도 되찾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몇 잔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인사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케치하러 이곳저곳 다니고, 마음을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손주들한테도 피자 할머니가 아닌 화가 할머니로 설 수 있어 더 좋고. 앞으론 손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효순씨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개인전이다. 개인전은 아마추어에서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위치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단순한 전시 이상의 무엇이다. 그동안 아트담 회원들과 함께했던 두 번의 그룹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 나이 일흔 살을 기념해 그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지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리다 보면 그 결과물들을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생기겠죠. 나이가 많더라도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내보인 자신의 작품의 제목은 ‘내 인생의 오후’였다. 그림 속에서는 곧 황혼을 앞둔 슬픔보다는 행복한 오후의 한순간이 느껴졌다. 이미 전해들은 인생의 굴곡이나 어려움이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늙는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불필요하게 의식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면 해요. 밝은 면만 보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아름다워져 있을 겁니다.”
상속을 둘러싸고 형제 사이가 나빠지거나 친척간의 왕래가 끊기는 경우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마찬가지. 그런 슬픈 사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잡음이 생기기 쉬운 포인트를 일본에선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일본 시니어 월간지 의 기사를 발췌해 보았다. 가족 모두가 모인 정초는 상속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홍수미 suming72@gmail.com
“우리 형제들은 사이가 좋으니까 걱정 없어”, “다툴 만큼 재산은 없으니까”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로 상속의 상황이 되면 자신만 손해보고 싶지 않다. 받을 수 있다면 1엔이라도 더 많이 받는 게 사람의 심리. 그렇기 때문에 먼저 상속은 다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라고 기타무라 쇼고(사회보험 노무사, 행정서사) 는 말한다.
실제로 일본 가정재판소에서 상속에 관한 조정과 재판을 한 사람은 늘어나고 있고, 그 내역을 보면 상속 재산이 5000만엔 이하로 다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속이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상속의 수속에는 먼저 누가 상속인(상속을 받는 사람)으로 상속할 재산은 어느 정도 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지는 실제 자식들도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예금액 등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일람표로 만들어 형제 모두가 그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시모이리사 마유미 사법 서사)
상속할 재산의 비율은 민법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준.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하고서 나누는 방법을 바꿔도 괜찮다.
법정상속분에서는 나누는 방법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경우에 쓸 수 있도록 ‘특별수익’(예를 들어 부모가 살아계신 동안에 집과 맨션의 보증금을 지불한 경우, 그 금액을 상속분에서 빼는 등), ‘기여분’(예를 들어 부모의 일을 무보수로 도운 경우, 그 몫을 더 많이 상속하는 등)이라는 제도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어느 정도 인정받을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다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나눌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꼭 부모 등 재산을 남기는 피상속인이 건강할 때 해 두는 게 최선이다. 상속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확실하게 형제 모두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될까라고 신경이 쓰인다. 말 꺼내기가 힘들지 모르겠지만 누가 입을 떼지 않으면 이야기에 진전이 없다.”(기타무라 쇼고)
또한 부채 유산이 있어서 상속을 포기하는 경우는 3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아무런 수속을 밟지 않고 3개월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부채 유산도 상속받아야 한다. 주의하자.
1.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부동산 유산이 있을때'
‘재산은 없다’ 혹은 ‘집과 토지만 있으니 상속으로 다툴 걱정은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상속에서 가장 많이 잡음이 생기는 재산이 부동산이다.
“돈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지만, 부동산 그 자체로는 나눌 수 없다. 나눌 수 없는 재산을 상속하는 사람 전원이 불만 없도록 나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로 다투는 것이다”라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동산과 균등의 가치가 있는 재산이 따로 있는 경우는 부동산을 받는 사람, 그밖의 재산을 받는 사람 식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독자들의 고민 상담처럼 부동산밖에 없는 경우는 골치아프다.
또한 부모가 유언장을 남기는 등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돌아가시면 남은 부동산은 상속인(상속할 권리가 있다고 법률로 인정받은 사람) 전원의 공동 소유가 되고, 처분할 때에도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는 등 이것 역시 번거롭다.
“토지를 그냥 계속 공동 소유하게 되면 돈은 생기지 않는데도 세금만 내게 된다”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동산 유산은 이게 골치
① 공동소유가 되는 게 흔하다
유산 분할이 처리될 때까지 피상속인(재산을 양보하는 사람) 명의 그대로의 부동산은 상속인 전원이 소유주인 공동소유가 된다. 공동소유의 부동산은 다른 공유자 동의가 없는 한 빌려 주는 것도 파는 것도 할 수 없다. 그 토지에 세워진 집의 개수와 철거 등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② 지방의 토지는 매각하기 힘들다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지방 등에서 인구 감소가 급속하게 진행돼 빈집이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을 상속해도 누구도 살려고 하지 않으니 매각하려고 생각해도 지역에 따라서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팔려면 엄청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지도.” (기타무라)
③ 농지는 전매 허가가 필요하다
상속하는 부동산이 택지가 아니라 논과 밭 등 농지라면 이게 또 골칫덩어리! 농업은 이어받지 않을 생각이니 거기에 집을 지을꺼라고 생각해도 농지 이외에 전용하기 위해서는 수속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경우도 있다. “농지는 농업위원회 등의 허가 없이는 매매도 할 수 없다.”(시모이리사)
④ 지가는 변동하기 쉽다
“일본인은 부동산 신앙이 강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평당 지가도 뚝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기타무라) 안이하게 생각해 부동산을 상속하면 손해를 볼 가능성도. “이 토지는 000만엔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등 부동산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⑴ 부동산은 가능하면 단독소유로
⑵ 상속인이 다 모였을 때 부모의 의향을 들어 둘 것
⑶ 거주 목적이 아니면 부모님 집은 매각해 현금화할 것
“부동산이 있는 가정의 경우, 장래에 그 토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산을 남긴 부모와 상속하는 자식 모두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둬야 한다. 누가 부동산을 이어 받을 것인지, 그 경우 받지 않는 형제에게는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상속할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경우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처분해도 좋다고 본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부동산 처분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준비하자.”(기타무라)
2.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부모님 돌보기를 혼자서'
상속을 받는 사람(상속인), 상속을 받는 재산의 비율(법정상속분)은 분명하게 민법에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법정상속분’대로 나누는 식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모의 간호와 간병이 얽혀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매일처럼 부모집에 다니면서 부모를 모셨다. 형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자신과 동등하게 상속한다니 납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모 등 피상속인을 간병한 경우 기여분이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가능하면 간병에 들어간 돈, 사용한 시간 등을 기록해 두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답답한 심정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은 “부모의 간병은 자식들 전원이 나눠 부담하는 것”이라고 기타무라는 조언한다.
“간병이라는 게 형제들 중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모든 걸 짊어지기 쉬운데, 그렇지만 예를 들어 장남 가족이 간병한다고 하면 그 외의 형제들이 매월 1만엔씩 모아서 형 가족에게 전달하는 등 분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가 돌아가신 뒤 ‘나만 손해를 본다’, ‘다른 형제는 부모를 모시지 않았는데 똑같이 유산을 요구하는 건 맞지 않다’라는 기분이 생기게 된다.”
또한 상속에서는 며느리, 딸의 남편, 친척 등 상속하는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이 참견해서 다투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간병은 실제로 며느리가 했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가족이지만 상속에 있어서는 제3자라는 미묘한 입장이다. 원래 며느리와 시어머니, 며느리와 시누이라는 관계는 어려운 데다가 상속에 관해 며느리가 참견하기 시작하면 잘 정리될 일도 정리되지 않게 된다.
“유산분할 협의는 상속 권리가 있는 혈연자들만이 하는 것으로 하자.”(기타무라)
(유산분할 협의란? 유언장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 유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정한다. 이 이야기를 유산분할 협의라고 한다. 상속인의 누군가가 행방불명이 됐거나 인지증(치매)에 걸린 경우에도 제외는 안 된다. 제외하면 그 유산분할협의는 무효가 된다.)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나눠 정하지 못하는 경우는 가정재판소에서 조정을, 그래도 안 되면 재판하게 된다.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1) 생전부터 부모 돌보기, 간병은 자식들 모두가 분담
(2)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유산분할 협의는 상속인만으로
3.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가족 관계가 복잡 & 독거'
이혼을 해 아이를 양육받지 않았던 경우,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 내연 관계의 상대방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경우 등 가족관계가 복잡한 경우도 상속으로 자주 잡음이 생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상속인인 자식들이 다른 엄마와 다른 아버지의 형제가 있는 걸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그런 형제를 상속인으로부터 제외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유산분할협의에 참가시키거나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인정하게끔 할 필요가 있다.”(시모이리사)
예를 들어 남편이 죽은 경우 그 재산의 상속권은 부인만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에게도 있다.
“아이가 없는 부부로 재산을 모두 배우자에게 남기고 싶은 경우는 유언장을 써 두자. 부모의 유산을 상속하는 경우에는 유류분(遺留分)이라고 해서 예를 들어 유언장이 있어도 상속인이 최저한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 있다. 하지만 형제의 재산 상속에는 유류분이 없기에 100퍼센트 유언장대로 유산을 나눌 수가 있다.”(기타무라)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1) 배우자가 아이가 없는 경우
아이가 없는 경우 부모와 형제에게 상속의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생활을 부모와 형제에게 의존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부부의 재산은 부부가 쌓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 “남편(아내)의 재산은 아내(남편)에게 남기고 싶다”고 한다면 유언으로 분명하게 그 취지를 기재해 두자.
(2) 가족관계가 복잡한 경우
예를 들어 모친이 전남편 사이의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 모친의 재혼 상대자인 현 남편이 사망해도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
남편이 “데리고 온 아이도 실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넘겨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양자 관계를 할지 유언이 필요하게 된다. 유언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문제가 생기기 어려운 건 법률 전문가인 공증인이 만드는 공정증서유언. 비용은 10만엔 정도(재산액과 상속인의 숫자 등에 따라 다르다)로 전문가가 만들기 때문에 안심. 병원과 시설 등에 공증인을 불러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 집, 토지 이외에 어떤 재산이 있는지?
△ 부모 의향을 들어 두자
△ 상속인이 누구이고 몇 명 있는지?
△ 빚은 없는지?
△ 부모의 간병 등 상속인 한 사람에게 부담이 몰려 있지 않은지?
※기사 중 법률적인 내용은 일본 현지의 법률을 근거로 한 것이므로 국내법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일본 통신원 이태문 gounsege@gmail.com
시는 울림이어야 하고, 잠언 혹은 금언은 공감을 얻어야만 시대를 뛰어넘어 빛나는 법이다. 수많은 위인과 명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명언을 남겼지만, 시바타 도요(柴田トヨ) 할머니의 이 한마디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다’는 참으로 깊은 울림이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11년 6월 26일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쌀가게를 하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시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10세 무렵 아버지의 가산 탕진으로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었고, 이후 전통 여관과 요리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는 결혼과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그리고 33세에 평생을 함께할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를 만나 재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알뜰살뜰 그리고 정직하게 생계를 꾸렸고,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우쓰노미야(宇都宮)시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했다.
이처럼 글 쓰는 일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이 살아오던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취미였던 일본 전통무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크게 낙담했고, 그런 모습을 본 60세를 넘긴 외아들의 권유로 92세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산케이신문’ 1면 최상단에 위치한 ‘아침의 시’ 코너의 단골 투고자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신가와 가즈에(新川和江)는 그녀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가운데 2009년 10월, 99세의 나이에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를 자비 출판했다. 그 후 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내용을 추가하고 양장판으로 재출판해 2012년 8월 시점에 160만 부를 돌파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할머니는 일본의 유명 샹송 가수 구보 도아코(久保東亞子)가 대표 시 ‘약해지지 마’에 곡을 붙여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NHK 라디오 제1방송 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아 지금의 내가 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10년 12월 31일에는 NHK TV의 휴먼 다큐멘터리 이 특별 방영됐으며, 2011년 9월엔 만 100세를 맞이한 기념으로 두 번째 시집 (아스카신샤)가 출판됐다. 그해 10월 10일 NHK TV에서 가 방송돼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그해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 열도가 큰 충격과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명력이 녹아들어 있는 할머니의 시는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시바타 할머니는 2013년 1월 20일 0시 50분께 우쓰노미야시 자택 부근에 있는 사설 요양원에서 향년 10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어머니께서 정말 평화롭게 고통 없이 가셨다”며 “100세 때까지 계속 시를 쓰셨고 원기는 있으셨지만, 지난 반년간은 걸을 때 부축을 받아야 했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숨진 그해 늦깎이 시인의 인생을 그린 영화 가 제작돼 개봉됐다. 국내에서는 세상을 등지기 직전 가 번역 출판됐으며, 대만과 미국 등 해외에서도 속속 번역본이 소개돼 한 시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인류의 희망 전도사로 자리 잡았다.
92세에 시작해 100세까지 시와 함께하며, 지난 100년간의 삶을 잔잔하게 들려준 할머니는 초고령사회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의 길을 새롭게 일구어나갔다는 의미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향기로운 결실을 맺은 인생의 황금기가 100세이며,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운 것도 바로 100세였다.
독자들은 세계 최고령 시인이자 인생의 선배인 시바타 할머니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용기의 메시지를 통해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할머니 시인의 오래 묵어 우러난 인생철학이자 삶의 구수한 맛일 것이다.
비록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것은 기본이 충만할 때다.
스위스의 전 지역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아! 너무 좋다’,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온 덕분일까? 스위스 사람들은 여행객들에게 한결같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보드라운 속살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와 상대를 배려한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른에서 만난 아인슈타인
필자는 알프스를 기대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안시(Annecy)에서 국경을 벗어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는 하늘 높이 분수가 솟구치고 있다. 롤렉스 간판들, 거리의 꽃시계 등이 시계의 나라임을 다시 인식시켜 준다. 주마간산으로 도심을 돌아보고 베른(Bern)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었다.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다. 기차역 주변 말고는 인적도 뜸해 번잡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숙소에서 준 대중교통 프리 티켓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작은 소읍의 풍치를 걸어 다니면서 보면 된다. 베른은 스위스 최초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 시가지의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긴 아케이드가 이어진다. 베른 도시가 생성됐던 12세기 후반에 지어지기 시작해 16세기 중반에 완성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에는 저장고 형태의 반 지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엇비슷한 건물 형태에 잠시 길을 잃을라치면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시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시계탑은 감옥탑 이전에 베른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 매시 정각 4분 전, 곰들과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는 시간. 그 즈음이면 관광객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탑 아래로 버스들이 오간다.
그것 말고도 자꾸만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어진 인형과 석조물이 아우러진 작은 분수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곰 형상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뉘데크 다리 건너편에는 곰 공원도 있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미공원 가는 길목이라서 으레 발길을 멈추지만, 왠지 어설프기만 한 곰 공원에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 외 스위스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대성당(높이 100m)과 국회의사당 등이 포인트다.
욕심 없이 베른 시가지를 배회하다가 한 유명한 인물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을 텐데 왜 베른에서는 거대한 아인슈타인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과 베른은 어떤 연계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을 다녔고 베른에 온 것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력은 어느 곳에서나 많이 나오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흥미로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자.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동창으로 상대성 이론 논문 작성을 거들었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가 결혼해 살았던 아파트는 구 시가지에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에서 더 자세하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했던 마지막 사랑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하는 ‘샌님’이라는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인슈타인의 간통이었다. 이혼 위자료는 아직 타지도 않은 노벨상의 상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혼 후, 달랑 넉 달 만에 내연의 관계였던 사촌 엘자 뢰벤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바람기는 재혼 후에도 잠들지 않아 평생 비서와 유부녀, 소련의 여성 스파이 등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 더불어 그는 아이들도 살갑게 돌보지 않았다. 밀레바와 혼전에 얻었던 딸은 출생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혼 후에는 두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둘째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던 일을 평생 용서하지 않아 두서없는 원망의 편지들을 보내곤 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히틀러 집권 3주 전에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에서도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유명인들의 ‘가십(gossip)은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베른에서 기차로 툰(Thun)호수 - 스피에츠(Spiez) -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융프라우 요흐((Jungfrau Joch, 3454m)까지 오르려면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시작점은 인터라켄의 동역(Ost)이다. 동역에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까지 올라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면 북벽 아이거 바로 밑 동네인 클라이네 샤이덱(Kl Scheidegg, 2061m)에 멈춘다. 이곳은 융프라우 정상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 1034m)로 가는 열차가 두 갈래로 나뉘는 환승역이다. 만년설을 가득 덮고 있는 위풍당당한 아이거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길 따라 1~2시간 정도 트레킹을 즐긴다. 가까스로 오르내리는 산악열차와 넓은 초지에 펼쳐지는 야생화, 햇살과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산 그림자, 그림 같은 집들, 작은 호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 등. 그 아름다움의 매력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이 마을을 비껴 융프라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설치한 톱니바퀴 레일은 총 9.3㎞.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도의 압트식(Abt-System)으로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열차를 내려서는 그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레스토랑도 있고,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판매도 하고 한 조각 선물도 준다. 얼음궁전(Ice Palace)을 관람한 후 통로를 따라 나가면 900m 두께의 눈밭, 플래토(Plateau)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스핑크스 전망대(3571m)가 있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 산이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때문에 온전한 풍치를 보는 일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결국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그린델발트 마을을 에둘러 봤으니 충분히 행복한 여정이다.
◇007 촬영지, 쉴트호른의 길목 마을, ‘뮈렌’ 아름다워
융프라우보다 느낌이 더 좋은 곳은 쉴트호른(Schilthorn, 2970m)이다. 라우터브루넨(806m)을 기점으로 찾아가야 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을 가진 라우터브루넨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247m의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비롯해 70여 개의 폭포가 연이어 높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1779년, 이곳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은 폭포 앞에서 괴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시인 바이런(1788∼1824)도 이 폭포에 시를 남겼다.
폭포를 지나 마을 농장 길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쉴트호른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다. 5~6번 정도 정차와 운행이 반복된다. 특히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비탈을 등지고 사는 뮈렌(Murren, 1650m)이라는 마을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고산 마을, 거칠고 척박한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도 화사한 꽃 화분으로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사람들. 이 마을에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이 높은 곳에서 뭐 먹고 살지?’ 하는 한국식 사고가 부끄러워지는 마을이다.
쉴트호른 전망대는 융프라우하고는 다르다. 터널이 아닌 시원한 야외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융프라우 요흐를 비롯해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 3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이곳은 유명한 시리즈 영화인 007 촬영장소로 활용되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재미도 준다. 전망대의 식당(피츠 글로리아, Piz Gloria)’은 야외 풍경을 보면서 즐기라고 뱅글뱅글 움직이고 있다. ‘007 제6탄-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식사한 곳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파스타를 먹는다. 분명코 융프라우만 보고 왔다면 반쪽 여행만 하게 되는 꼴이 될 것이다.
◇귀족, 부자들이 만든 휴양도시, 생 모리츠
한국 여행객 대부분이 융프라우 다음으로 가는 곳은 루체른(Luzern)이다. 필자는 루체른을 거쳐 생 모리츠(ST.Moriz)로 향한다. 스위스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열차 여행이다. ‘Express’라는 이름으로 열차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빼어난 명품 열차가 베르니나(Bernina) 익스프레스다. 베르니나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오래된 산악 열차다.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열차 코스가 있다. 투시스(Thusis) ~ 생 모리츠(61.6㎞, 알불라 라인), 생 모리츠 ~ 티라노(Tirano)(60.6㎞, 베르니나 라인)를 합친, 122㎞ 구간이다.
이 열차 구간에 생 모리츠가 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쪽 끝 부분인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의 엥가딘(Engadin)산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일조량이 많다. 365일 중 320일이 맑은 마을. 그래서인지 생 모리츠에 도착하면 ‘그 맑음’에 눈이 부시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명사(코코샤넬 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스위스가 관광산업을 시작했을 때 돈 많은 영국 귀족들이 유서 깊은 호텔을 세웠고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들인 곳도 바로 생 모리츠다. 봅슬레이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엔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생 모리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은 고산을 기대어 터전을 잡았고 그 중간에 호수가 있다.
가파른 언덕이 있는 도르프(Dorf)와 온천이 모여 있는 바트(Bad),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도르프란 독일어로 ‘마을’, 바트는 ‘온천’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운 호텔과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류머티즘이나 심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 근처에는 리조트도 들어서 있다. 그저 휴양도시라서 오래된 문화유적도 없다. 긴 역사의 흔적도 없다. 마을에 짙게 내린 가을 풍치와 산정의 겨울 풍치를 보면서 호숫가를 에돌아보면 된다. 흰 설국이 된다면 더 멋질 것이며, 이 도시는 엄청나게 북적거릴 것이다. 생 모리츠를 벗어나면서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너무 아쉬워서 베르군(Bergun, Bravuogn) 역에 내려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또 취리히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마이엔펠트(Maienfeld)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이 마을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곳. 이 마을에는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조용한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 와이너리가 유난히 많은 이 마을의 호텔 바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동네사람들만 왁자하게 떠들던 그날 밤, 여행객의 상념은 깊어간다. 왜 스위스를 떠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단지 고국 떠난 여행객의 짙은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라.
교통편 한국에서는 취리히 공항을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수시로 연결된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른까지는 1시간 단위로 열차가 오간다. 각 여행지 선택은 다음 일정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생 모리츠는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고, 베른, 제네바는 프랑스와 통한다.
현지 교통 정보 스위스는 철도가 발달된 도시.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스위스 카드 구입하기 스위스 패스는 아주 유용하다. 카드마다 특전이 다르므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좋다. 패스를 이용하면 열차는 물론 포스트버스 등 대중교통 대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카 할인, 박물관 무료 등 혜택이 많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면 날짜에 맞는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또 스위스 철도는 유레일패스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할인 적용이 다르다. 열차 시간표는 홈페이지(www.rhb.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행 시간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정확하다.
대표 음식들 퐁뒤(Fondue)가 있다. 기본적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18세기 초 알프스의 사냥꾼들이 사냥 중 모닥불에 치즈를 녹여 마른 빵을 부드럽게 적셔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초콜릿이 유명하니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다.
숙박정보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환율이 높다. 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호스텔을 이용하면 된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을 가려면 으레 라우터브루넨을 경유해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마을의 밸리 호스텔(Valley Hostel)은 편하게 잘 되어 있다. 생 모리츠는 휴양지라서 숙박 가격이 비싼 편. 유스호스텔을 이용하면 아주 좋다. 스태프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화폐단위 유로 대신 스위스 프랑을 쓴다.
언어문제 스위스 인들은 노인층까지도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관광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다.
유의할 점 여행 떠나기 전, 융프라우에 대한 정보는 많이 복잡할 수 있다. 미리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현지에 가면 관광체계가 잘되어 있다. 역에 가서 목적지만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표를 끊어준다. 한국에서는 할인 티켓을 프린트해 가는 게 좋다. 또 여행 중 농장의 철조망을 유의해야 한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감전의 우려가 있다.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