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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열 번 할 것 같은 영원한 철부지 소녀, 배우 이상아
- 그녀는 철없고 순진하다. 세 번의 이혼과 파산 등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고생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10대에 이미 화려한 스타로 누릴 대로 누리다가 편안하게 그대로 곱게 중년이 되어버린 여자처럼 보인다. 40대가 되면 누구나 얼굴이 책임지고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고 말하는데 이상아의 얼굴은 반칙이다.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그녀와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박규민 CF 여왕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스타 이상아도 별수 없게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어버렸겠지 하며 큰 기대를 안 한 채 그녀를 만나러 일산의 MBC 드라마세트장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방영하고 있는 MBC 드라마 에서 이상아는 50대 사모님 역으로 나오고 TV조선의 에서는 사춘기 딸과 전쟁을 벌이는 철부지 엄마의 이미지로 비춰지기에 천하의 이상아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가 없겠지 지레 판단하고 덤덤하게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의 섣부른 상상은 1초도 안 돼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먹만큼 작은 얼굴은 설탕처럼 하얗고 거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망울은 보석처럼 빛이 나서 한량 이봉규도 어쩔 수 없이 덜컹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고 말았다. 참고로 나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한량으로 자부하기에 이상아처럼 전형적인 예쁜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효진, 박소담, 김고은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내 아내도 전형적인 예쁜 얼굴이 아닌 묘한 매력이 있는 외모의 소유자다. 그런 미적 가치관을 가진 이봉규도 이상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불행했던 결혼생활 사람들이 왜 이상아가 예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아마 美의 보편적인 상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상아는 세 번의 이혼, 파산, 술장사까지 해야만 했던,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찌든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아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TV 화면이나 사진을 보면 늙어진 모습이 그대로 나와서 거짓말을 못합니다”라는 그녀의 평가가 희한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TV로 볼 때는 그녀가 이토록 밝고 예쁜지 몰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 이후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어두운 모습을 상상했는데 오늘 만난 이상아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을 발표할 때 16시간 동안이나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최순실을 이겼잖아요!”라며 깔깔대고 웃는다.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인데도 이상아의 세 번째 이혼 소식은 온 국민의 화제였다. 최순실 뉴스를 이긴 것이 대단하다고 이상아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젠 아픔을 충분히 극복했고 이혼하길 잘했다는 자평일지도. 하여간 이상아는 철없고 순진하다. 독설가의 이미지가 강한 이봉규를 만나기로 해서일까? 그녀의 표정이 처음에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 저 인간이 나의 불행한 과거 얘기를 독하게 물고 뜯으려 하겠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30분 정도 흐른 뒤부터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의 이혼 얘기는 물론이고 아팠던 과거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술술 풀어내놓았다. 그녀는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두 자매를 부양해야 했던 삶이 버거워 현실도피 차원에서 했던 첫 결혼에 실패했고 이후 두 번의 이혼을 더 겪으면서 공황장애에 빠진 것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심지어 딸과도 자주 싸울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방송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연애는 생각도 못한 채 고독한 생활은 연장선상에 있다. 또 다른 사랑, 아직 버겁다 한번은 점을 봤는데 “결혼을 열 번도 더 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 점쟁이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 남자 만나기가 겁이 나기도 하지만, 딸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딸은 엄마에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엄마를 뺐길 것 같아 불안해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세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는 더 이상 상처를 안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짝을 만나면 또다시 외톨이가 될까봐 겁을 내는 딸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이해하면서도 이 정도에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라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00세 시대에 아직 창창한데 이렇게 아름다울 때 빨리 평생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나마나한 빤한 조언을 하면서 “소개팅 시켜줄 테니 어떤 남자가 좋은지 말해보라”고 미끼를 던졌더니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금방 문다. “나는 전형적인 B형 여자인데 B형 남자가 잘 맞는다. 불꽃 튀게 싸워도 빨리 풀어지고 뒤끝이 없어서 좋다”고 포문을 열더니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연하의 남자가 좋다”고 털어놓는다. 미끼를 금방 물 정도로 다루기가 정말 쉬운 순진한 여자다. 순진하기에 그동안 남자들에게 많이 당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혼도 세 번이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 직하다. 열두 살 띠동갑 연하의 아내와 행복한 재혼생활을 즐기는 이봉규가 목소리를 높여 또 충고했다. “나처럼 나이 많은 남자와 살면 내 마누라처럼 행복해진다”고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녀는 “탤런트 길용우씨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친구 소개시켜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길용우 선배는 나보다 무려 열일곱 살이나 많은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라며 질색을 했다. 내친김에 더 집요하게 물었다. “연하의 남자라면 연예인 중에 어떤 스타일의 남자가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배우 강하늘이 젊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면서 “야비한 역할도 어울리고 청순한 이미지도 있는 다중 인격적인 매력이 있다”고 답한다. 잽싸게 강하늘의 나이를 검색한 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알려주니까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세 번이나 이혼하고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이상아는 영원히 철부지 소녀로 늙을 것 같다.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포인트다. 그래서 아직도 이토록 예쁜 얼굴을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부지라서 나이를 먹지 않고 어려 보여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다고 한다. 선후배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연예계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대선배인 이상아를 어려워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많단다. 털털하고 철없는 이상아도 참고 참다가 어떨 때는 학번이나 나이를 들먹이며 교통정리를 한 적도 있다. 어려 보이고 철이 없어서 사회생활에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은데 딸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딸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다가도 갑자기 싸우고 또 속상해하면서 펑펑 울기도 한다. 딸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한번은 방송 에서 딸 서진이가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더 잘됐을 거 같았다”고 충격 고백을 했다. 이상아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태어난 걸로도 감사한 줄 알아라. 그냥 ‘아빠가 그 아빠가 아니었으면’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 방송에서 이상아와 딸의 관계에 대해 역술가에게 물었더니 “둘이 절대 안 맞는다. 창과 방패다. 누군가 하나는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모녀가 계속 충돌하는 이유는, 이상아 입에서 칼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 부분이 이상아의 복을 차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역술가는 딸 서진의 사주에 대해서도 독하게 평가했다. “엄마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남자 부분이 겹친다. 세상 어떤 남자가 와도 만족을 못한다”는 직설적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은 “미래의 내 남편 직업은 무엇이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역술가의 평가와 달리 인생 육십을 산 한량 이봉규가 볼 때는 철부지 엄마와 당돌한 딸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기에 티격태격 싸우면서 같이 울고 웃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아닐까? 딸은 커가면서 엄마 이상아의 아픔까지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자존감이 없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상아의 자조적인 자기진단이다. 내성적이면서도 철없고 순진한 여인 이상아가 지금까지는 남자 복이 없었지만, 세 번의 이혼을 통해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았기에 앞으로 아름답고 예쁘지만 약하고 철없는 이 여인을 완전히 감싸줄 푸근하고 강한 남자가 곧 나타나서 그녀의 남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행복을 차용하는 날이 100세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녀는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 노란색과 인연도 깊다. 탤런트 면접시험 때도, 첫 CF(마요네즈 광고) 때도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상아의 집은 노란색 벽지로 덮였다. 노란색은 희망, 기분 좋음, 즐거움,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연예인의 특성과 아주 잘 맞는다. 이제부터 하는 일과 사랑 찾기 게임에서도 노란색의 의미가 잘 발휘될 것으로 믿는다.
- 2017-03-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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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절함을 노래한 시, 두 번째
-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는 심원(沈園)이란 명소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 때 부자였던 심씨 소유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정원인데, 이 정원 입구에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조형물이 서 있다. 가서 살펴보면 ‘단운(斷雲)’이란 행서체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부부간의 정을 뜻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은 바로 중국 남송시대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애절한 사랑의 일화가 서려 있다. 육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당완(唐婉)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로 지내다가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성장하자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육유의 나이 20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육유가 과거시험에 자꾸 낙방하자 며느리 탓이라 여기게 된다. 자식도 못 낳고,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런 상황들이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급기야 둘을 강제로 떼놓는다. 모친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한 육유는 이혼을 가장하고 인근에 당완을 숨기고는 몰래 만나는 행각을 이어가지만 곧 들통이 나고, 결국 모친이 정해준 왕씨 성의 여인과 재혼을 한다. 어쩔 수 없게 된 당완도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조사정이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육유가 27세 되던 봄이었다. 육유는 심원에 놀러왔다가, 같은 날 봄나들이를 온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남편 조사정은 사정을 물었고, 당완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사정은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한 뒤 육유를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육유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이 라는 시를 벽에 써두고 떠난다. 이듬해 이 정원에 다시 놀러온 당완은 이 시를 보고 같은 제목의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완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는 큰 상처를 지닌 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심원을 찾아와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이 75세 되던 해 지은 라는 시다. 城上斜陽畵角哀(성상사양화각애) 성곽에 노을이 지니 들리는 뿔피리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심원비복구지대) 심원은 옛날의 연못과 누대로 돌아갈 수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상심교하춘파록) 서로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의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증시경홍조영래) 그때 놀란 기러기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몽단향소사십년) 꿈도 없어지고 향도 사라진 40년… 沈園柳老不吹綿(심원유로불취면) 심원의 버들도 늙어 버들 솜도 날리지 않는구나. 比身行作稽山土(차신행작계산토) 이 몸도 곧 죽어 회계산(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유조유종일현연) 그녀의 남은 옛 자취 찾으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3-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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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생활과 수명은 어떤 관계일까?
- 결혼생활은 사람의 수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근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신으로 혼자 산다면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행복할까? 나아가 이혼 후 다른 배우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면 짜릿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 이혼과 재혼은 여명(餘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 있고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살다가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독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별이든 이혼이든 혼자 살다가 다른 배우자를 찾아서 재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독신을 고집하며 계속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삶이 행복한 삶이었느냐 불행한 삶이었느냐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논외로 치고 이 중 누가 가장 오래 살았을까? 궁금한 사실에 대한 통계자료가 있다. 1921년 스탠포드대학의 심리학 교수 루이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무려 80년 동안(터먼 박사의 후배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의 결혼과 이혼에 관련한 수명을 분석하였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달랐다고 한다. 결혼과 수명 사이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남자의 경우, 결혼하고 부부가 계속 같이 산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다음으로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사람이 오래 살았고 맨 마지막이 이혼 후 독신으로 계속 산 사람이었다.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해로한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이혼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독신으로 계속 산 여자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산 사람과 비슷했다.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그 뒤를 이었고 가장 수명이 짧은 여성은 이혼 후 재혼한 여성이었다. 결혼 후 혼자가 된 홀아비는 일찍 죽지만 이혼하였거나 과부로 살아가는 여자는 오히려 재혼한 여자보다 오래 살았다는 통계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집는 통계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건강보조제를 먹는 것처럼 효과가 있다면 남녀에게 공평해야 할 텐데 남자에게는 적용되고 여자에게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의학적인 면만으로 살펴보면 긴급한 사항이 닥칠 때 대신 119를 불러주고 아플 때 옆에서 간호해주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환자가 되어 말을 제대로 못할 때 의료진에게 병의 진행 상태를 대신 말해줄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배우자는 스트레스 완충 역할을 한다. 직장에서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나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 기타 사건사고가 생겼을 때도 배우자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공동으로 해결책을 강구하는 정신적 원군이 되는 것은 분명 결혼생활이 수명 연장에 좋은 점이다.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불편할까? 서로 지향하는 인생관이 달라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고 바가지만 긁는 배우자라면 오히려 결혼생활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수명이 단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갓 결혼한 부부라면 남자는 원래 이런 동물인가? 여자는 본래 이런 성격인가? 하며 자신을 상대에게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 더구나 젊을 때는 유연성이 높아 자신을 변화시키는 범위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화성남자와 금성여자가 결혼해도 잘 맞추고 산다. 하지만 이미 부부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 남편 전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의 행동이 몸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재혼한 지금의 상대와 비교를 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강하게 반발한다. 재혼이란 평탄한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양육 문제나 재산분할 문제로 시끄러울 확률이 높다. 방송에서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보면 재혼 후 새롭게 구성된 가족 내에서 성폭력도 일어나고 계모나 계부의 방임이나 유기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발생한다. 결국 행복하려고 한 재혼이 파멸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실제 이웃이나 친척, 친구들을 봐도 행복을 찾아 단행한 이혼이 해피엔드로 끝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한쪽은 행복해도 다른 한쪽은 이혼한 것을 후회한다. 여자 혼자서 또는 남자 혼자서 살아가기가 뚜렷한 독신주의의 인생관이 있다 해도 녹녹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 결혼이나 재혼을 적극 권장하지만 재혼한 부부가 또다시 갈라설 확률은 높고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이혼을 하고 팔자를 고치면 노다지를 캘 것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다. 선배들이 살아온 삶의 추적같은 통계자료를 보면서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 2017-03-1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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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성 문제와 외도
- 노년의 성(性)은 입에 올리기 망측한 것이 아니라 100세 시대에 다 함께 고민할 과제가 됐다. 부부간의 사별이나 이혼과 같이 홀로된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쪽은 성적 욕구가 있는데 한쪽은 성적 욕구가 아예 없는 노년의 성 문제가 있다. A씨는 나와 같이 일하는데 올해 70세다. 돈도 있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하다. A씨의 말을 빌리면 성적 욕구가 아직도 왕성하다고 한다. 하지만 A씨의 아내는 66세로 건강한 편이지만 당뇨가 있다. 또 성적 욕구도 없어 남편과의 잠자리를 기피한단다. 그동안 A씨는 자위행위도 하고 가끔씩 외도를 하면서 성적 욕구를 혼자 해소해왔다. 그러던 중 A씨는 우연한 기회에 어린 시절 한동네에서 자란 B씨를 만나게 됐다. 처녀 시절 동네 오빠인 A씨를 좋아했던 B씨는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다. B씨는 남편이 남겨준 부동산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술도 함께 마셨고 급기야는 잠자리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A씨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만남은 주로 주말에 이루어졌다. 토요일 오전에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고 모텔에서 1박을 한 후 일요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 속초, 강릉까지 가기도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A씨의 아내가 둘 사이를 눈치 챘다. 전화로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A씨의 아내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성적 욕구가 강한 남편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직접적으로 B씨를 입에 올려 말하지는 않지만 주말만 되면 일주일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바람도 쐴 겸 밖에 나가서 놀다 오라고 등을 떠민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주말은 A씨와 B씨가 자연스럽게 데이트하는 날로 정해졌다. 두 사람의 성 궁합은 천생연분이라 할 정도로 잘 맞는다고 한다. 남녀가 만나면 데이트 비용이 든다. 서로 경제력이 있어서 데이트 비용 때문에 얼굴 붉히는 일은 없다고 한다. A씨는 “내가 가정을 버린 것도 아니고 월급을 아내에게 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용돈 범위 내에서 적절하게 쓰니까 아내도 다 이해한다”고 말한다. A씨의 경우처럼 남편은 성적 욕구가 있는데 아내가 이를 기피하면서 각방을 쓰는 부부가 주변에 제법 있다. 이를 두고 남자들은 “아내가 문을 닫았다”라는 은어(隱語)로 표현한다. 반대로 여자라서 입에 올리기 민망해해서 그렇지 남편이 잠자리를 기피하는 바람에 아내가 불만인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나이 든 사람이 재혼을 하면 망측하다면서 뒤에서 흉을 보기도 했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이 들어 재혼하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재산 문제와 자녀들의 반대로 법적으로는 부부의 연을 맺지 않고 연인처럼 즐기며 사는 커플도 많다. 노년의 남녀가 만날 때,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대화라도 하려고 만난다고 그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는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음이 가야 몸도 간다”는 말이 있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부부라면 정감 있는 말로 사랑을 속삭이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살아온 지금의 노년 세대들은 살가운 말이나 다정한 행동을 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잘 모른다. 이런 태도가 부부관계를 일찍 끝내버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부부가 한쪽의 성적 욕구를 받아주지 못한다면 먼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치료가 불가능할 경우 다른 방법들을 찾아봐야 한다. A씨와 B씨의 관계를 욕하며 무조건 돌을 던질 일은 아니다.
- 2017-03-0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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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유혹을 이긴다
- 중년은 인생의 황금기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기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금전 때문에 미뤘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 전문가로 우뚝 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서기도 한다. 중년이 만족스러워 중년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의 절정기여서 유혹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누가 기반을 잡지 못한 청년 혹은 활력이 떨어지는 노인을 유혹하겠는가? 성공한 사람은 권력, 명예, 재물, 이성의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이성의 유혹이다. 가정 파괴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외도는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이성과 깊은 관계에 빠지는 것이다. 중년에 이성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뭘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 이제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며 허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유혹은 이러한 틈새를 타고 시작된다. 외도를 해도 평생 들키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대가를 치른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부모님의 이혼으로 학창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안 올랐고 외톨이처럼 우울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 알게 됐다.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뒤 재혼을 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는 상당 기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첫째, 유혹에 빠질 환경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다. 은밀한 만남은 피해야 한다. 유혹을 받을 경우가 생기면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게 현명한 일이다. 둘째,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지만 반드시 그 값을 치른다. 조금만 즐겨보자고 시작한 관계는 결국 인생을 망친다. 마약환자, 도박중독자도 다 그렇게 시작한다.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빠져보고 그만두자는 생각은 위험하다. 순간의 유혹에 빠질 때는 달콤하지만 그 결과는 가혹하다.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절세미인 황진이의 유혹을 견딘 서경덕은 얼마나 대단한가. 셋째,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나태해질 때야말로 유혹에 빠지기 쉽다. 다윗 왕이 부하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륜에 빠진 것도 전쟁터가 아닌 한가하게 낮잠 잘 때 발생했다. 넷째,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최고의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느껴져도 살다 보면 단점이 발견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상형을 택한 사람은 그래서 대부분 후회한다.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인생 한 사람만 죽도록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 최고의 이상형과 사랑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필자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같이 살기로 약속했으니 그럴 기회가 없지만 말이다. 중년에 어렵게 얻은 가치들을 외도로 날려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순간의 유혹들이 있어도 그때마다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유혹을 이겨낸 인생이야말로 멋진 인생이다. 자만심이나 공허감을 극복하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우리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또 좀 더 성숙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 2017-03-0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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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소나무 사이 농촌계몽운동의 기억이 살아있는 곳 '심훈기념관'
- 눈 녹지 않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났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의 그림자는 쓸쓸하고 차가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끼 낀 옛 유적을 찾아가는 기분. 굽이치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 만난 심훈기념관(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에는 소설 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 그리고 작가 심훈이 옛이야기를 나누 듯 서 있다. , 로 대표되는 심훈(1901~1936)은 한국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문학가로만 말하기에는 다재다능했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인으로 각인돼 있지만 영화인이었고,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일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과 계몽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지표 같은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3월 5일 투옥됐다가 8개월 만인 11월 6일 석방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밀항을 선택해 지인의 집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1923년 다시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 등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며 수학했다. 영화인, 소설가, 시인으로서의 삶 귀국 후 연극과 영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영화였다. 1924년 첫 부인 이해영과 이혼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에도 영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조일제가 번안한 소설 이 영화화됐을 때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도 도전했으며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다음 해에 일본에서 제대로 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심훈은 영화 원작 집필·각색·감독에 제작까지 도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심훈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영화가 됐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해 2년 후 무용수였던 안정옥과 재혼했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이직하지만 사상 문제에 부딪혀 퇴사하고 말았다. 소설에 마지막 힘을 쏟다 영화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성공적 데뷔를 한 후에는 신문 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갖고 매진했지만 검열 장벽에 막혀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과 가 연재 도중 중단됐다. 같은 해 저항시 또한 검열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심훈이 세상을 뜬 후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1933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 1934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이 연재됐고 1935년 심훈의 대표작인 장편소설이자 유작인 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됐다. 1936년에는 단편소설 (신동아)를 발표했다. 뜻밖의 관심, 시에 담다 심훈은 저항시인이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작품세계는 꼭 그렇지 않다. 그가 쓴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에 아파하는 마음, 동성애, 스포츠를 다룬 작품도 눈에 띈다. ‘오오, 조선의 자매여’는 1931년 4월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뛰어든 홍옥임과 김용주의 이야기를 접하고 쓴 시다. 결핍과 금지, 검열의 시대에 동성애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여성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의 유작시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호외 뒷면에 쓴 시로 손기정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우승을 접한 감격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1929년에 쓰인 ‘야구’ 또한 흥미롭다.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라 그런가 야구장의 함성이, 홈런의 짜릿함이 시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192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야구를 보고 느끼고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를 계기로 심훈의 종손 심천보씨는 심훈 80주기였던 작년 9월 16일 한화 이글스 홈경기 시구에 나선 바 있다. 심훈기념관과 집필 장소인 필경사 심훈기념관 이야기를 하면서 유작 소설인 를 빼놓을 수 없다. 심훈기념관 옆에는 가 집필된 곳으로 알려진 필경사와 심훈의 묘가 나란히 있다. 기념관 일대는 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은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이다. 당시 심재영은 청년들과 함께 당진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심훈기념관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농우회’ 회원의 실제 주인공들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들이 하나하나 전시돼 있다. 심훈은 1932년 서울에서 가족의 터전인 당진으로 내려와 를 집필하고 난 뒤 1936년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다. >>관람 정보 개관시간 10:00~17:00 입장료 무료 문의전화 041-360-6883 휴관일 매주 월요일 주소 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 ✽자가용 이용 바람
- 2017-03-06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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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으로 살까? PART4] 결혼 2막, 농민운동가 김준기의 삶의 기준 "험난한 여정 속 아내는 인생의 큰 선물"
- 사별한 김준기(79)씨는 15세 차이 나는 아내와 1995년 재혼했다. 현재 결혼생활 22년,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아직 신혼이나 다름없다. 김준기씨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고단한 농촌계몽운동, 야학, 4-H연구회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내와의 일상에 대해 묻자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해진다. 재혼한 부부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만큼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1월의 찬바람 속에서도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김준기씨의 얼굴에선 온기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많이 망설였어요. 겁도 나고. 남의 시선도 두렵고. 그런데 살아보니 내 신발같이 내 발에 잘 맞는 느낌이에요. 살수록 새록새록 감사하기도 하고요. 이 사람 못 만났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몰라요. 사실 혼자가 되면 기댈 데가 없어요.” 전 부인과 사별한 뒤 3년도 안 돼 재혼한다고 하니 그의 재혼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다. 나이 차이도 많을 뿐더러 다 큰 자식들(2남 2녀)의 얼굴 보기도 민망했다. 그러나 김준기씨는 재혼을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첫 번째 아내가 세상과 이별한 후 혼자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데 사실 그럴 처지가 못 됐어요. 자식들을 위해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필요한데 미안해서 지금의 아내한테 선뜻 결혼하자는 말을 못 하겠습디다. 제가 그렇게 어쩌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결혼해서 어머니 모시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어요.” 자식들도 늦게 만난 사랑인 만큼 더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한길을 걸어가는 이들 부부를 응원해줬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내게 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부부의 금실은 자랑할 만하다.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니 말 다했다. 싸우기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가끔 서로 놀랄 만큼 같은 생각을 하는 ‘짝’이다. 둘 사이에 끊이지 않는 것은 대화다. 이들 부부가 황혼에 인연을 맺고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김씨는 ‘결핍의 생활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황혼재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베풂을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이라며 “수십 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체면 때문에 재혼을 망설이는 이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며 “인생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좋은 사람 있으면 결단을 내리라”고 귀띔했다. 서로에게 너무 큰 기대 하지 말아야 재혼 후 재산 문제로 자녀와 갈등을 겪거나, 서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인한 갈등으로 상담을 받는 재혼 부부들이 많다고 들었다. 실제로 초혼에서 받지 못한 애정과 돌봄을 재혼 남편에게 바라고, 전통적인 아내의 의무만을 강조하면서 많은 갈등이 생긴다고 한다. 그는 “서로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기보다는 여생을 함께 보낼 좋은 말벗이나 몸이 아플 때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반자라고 생각해야 결혼생활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혼생활이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다는 전제하에 우려되는 점은 없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가니 걱정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아내 혼자 남는데 그럴 때 자식들이 등지고 왕래도 안 하게 되는 상황이 될 것 같아서요. 우리 자식들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다른 재혼 가정들을 보면 많이들 그런다고 합니다. 실제로 장례식장에 가보면 미망인이 혼자 떨어져 있고 자식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그는 대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잠시 울컥했다. “어렵게 늦게 만났으니 하루를 살아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 아내의 잔소리는 사랑의 불꽃이 되어 다 태워진 뒤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향기로운 명언으로 쏙 박힙디다.” 질곡의 인생길을 아내는 묵묵히 따라왔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는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농민가’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래를 전국적으로 보급한 이가 바로 김준기씨. 그는 “농민가는 원래 서울대 농대 다니던 시절에 ‘농사단’의 단가로 만들었어요. 가사는 나와 동기인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과 후배 이용화(언론인) 등 농사단 멤버들의 의견을 모아 만든 공동 창작이고, 곡은 구전되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10대에는 너무 가난했고, 20대에는 농촌계몽활동을 했고, 30대에는 농민운동을, 40대에는 지역운동을, 50대에는 통일운동을, 60대에는 정치운동을 한 셈입니다. 이제 70대에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해요. ‘一農공동체사회연구소’를 만들어 지역공동체운동과 지방 주민자치교육 그리고 협동조합 네트워크 등 11개 학교 4-H 조직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사람농사꾼으로서 사람농사를 짓는 것이 평생 업이었던 그는 서울대 농대 재학 당시 전국대학 4-H연구회연합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후 가톨릭 농민회를 주도하면서 상계동 농장을 운영, 1975년부터 신구대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며 성남YMCA, 시민대학을 만들었다. 그러나 1986년 그는 해직을 강요받고 강사로 활동하게 된다. 1989년에는 임수경과 서경원의 평양방문 사건이 공교롭게도 그와 연관이 됐는데, 그가 속해 있던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에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난한 성명서가 문제가 되는 바람에 결국 안기부로 끌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때가 1991년. 이후 사면·복권이 되고 나중에는 명예회복이 됐지만 평생을 농민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걸어온 그의 여정은 험난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묵묵히 내조를 해온 헌신적인 아내가있었기에 그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닌, 진짜 잘하는 아내가 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농사꾼 김씨에게 자식농사는 어땠냐고 물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마음처럼 안 되는 자식들과 갈등하는 것은 다른 집들과 똑같아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도 ‘행복’이라는 선물이더라고요. 아내는 마음이 고운 사람입니다. 제 뜻을 잘 따라준 아내에게 항상 고맙죠.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움이 앞섭니다. 각자가 사회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 2017-01-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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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돌보기 이렇게 했다] ④ 나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
- IMF 금융위기의 여파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 20년 직장생활에서 밀려난 것 하나만으로도 충격이 큰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벗는 김에 다 벗어버리자 생각했다. 아내의 이혼 요구에 응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됐다. 아내가 이혼 때 들이민 재산 분할 제안서를 보니 나는 빈손이었다. 단칸 전세 얻을 돈 정도밖에 없었다. 아내의 내역서는 그럴싸했다. 혼자 벌었어도 안살림을 한 사람의 공로가 절반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으니 당연히 아내 몫으로 절반을 줘야 했다. 나머지 재산에서 아들딸 결혼비용을 또 떼어야 했다. 나중에 필자가 더 어려워지면 그 몫도 없어질지 모르고 재혼을 한다든지 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내게는 퇴직금과 약간의 주식이 있었고 내 재산으로 분류돼 있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그렇게 빈털터리 홀아비 인생이 시작됐다. 막막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정신력이 강했다. 체력도 좋은 편이었다. 아직 젊으니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 했다. 가진 돈이 없으니 사업을 할 수도 없었다. 재취업을 하자니 또다시 남 밑에 들어가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여생은 나를 위해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다행히 현직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던 외국 바이어들에게 안부를 전하니 도와주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소량 주문은 받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가격에 관리비까지 얹으면 가격경쟁력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하니 관리비도 절감되고 오히려 소량 주문이 더 취급하기 적당했다. 때마침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특수를 타고 주문이 폭주했고, 꽤 큰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집도 사고 평생 노후 걱정은 할 필요 없을 만큼 금융자산도 모았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필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혹자는 사업을 하다가 망했고 혹자는 사기를 당해 주저앉았다. 그 여파로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선택한 것이 댄스스포츠였다. 그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취미로 해왔는데 혼자가 된 뒤로는 더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자는 평소 건강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댄스스포츠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줬다. 댄스스포츠 덕분에 보람 있고 즐거웠던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금을 들여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이다. 덕분에 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생겼고 댄스계에서 유명해졌다. 입문에서 선수생활까지 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후회 없을 만큼 만끽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필자에게 접근한 여성도 몇 있었다.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사랑이 필요한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필자에게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또 너무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며 한가하게 테이트나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거절당할 것도 같아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승산 없는 연애질에 정신적, 시간적 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이 으뜸이다. 집은 있으니 해결되었고, 사고 싶은 옷을 보면 내 마음대로 산다. 두 가지는 해결되었으니 당연히 먹는 것을 중요시한다. 필자는 ‘내 몸은 보배이고 음식은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풍요로움을 위해 독서도 자주 하고 영화도 많이 본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예 피한다. 사회적 건강을 위해 여러 사람과 어울린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피부과에 가서 얼굴의 점도 빼고 맑은 피부 톤을 위해 레이저 시술도 받았다. 나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산다.
- 2016-12-0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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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에이징] 주름을 인생처럼 쫙쫙 폅시다
- 노화는 인간에게는 일종의 숙명이다. 우리 몸의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데, 시니어의 입장에서 얼굴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얼굴의 노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특히 팔자주름이나 볼살처짐과 같은 피부의 변화는 첫 번째 경계 대상으로 꼽힌다. 요즈음 ‘강남 사모님’들 사이에선 노화로 늘어진 피부를 되살려주는 ‘실 리프팅’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개원가에서 다양한 학술활동에 앞장서온 대한미용성형레이저의학회 김상섭(金詳燮·43) 총무이사(청담미(美)의원 원장)를 통해 실 리프팅에 대해 알아봤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A사장은 다른 기업과의 미팅자리를 촬영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회사로서는 좋은 기회여서 기분 좋은 자리였는데, 사진 속 사람들 중에 유독 자신만 인상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거울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내 표정이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어요. 단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을 뿐인데 말이죠. 얼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나이인데, 평소에 그렇게 남들을 노려보며 살았나 싶었죠”라고 말했다. A사장처럼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시니어들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남성들은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얼굴의 변화를 갑자기 느끼기 일쑤다. 특히 최근에는 시니어들 사이에서도 ‘꽃중년’ 또는 ‘동안’이라는 단어들이 쓰이면서 외모를 중시 여기는 풍조가 번지고 있어 시니어들도 ‘관리’를 강요받기 시작했다. 팔자주름이 팔자를 바꾼다? 얼굴의 노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잘 알려진 대로 팔자주름의 등장이다. 여기에 볼이 ‘불독’처럼 처지기 시작하면 인상은 더 험악해진다. 이는 남성이나 여성 모두 마찬가진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첫 번째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피부가 처지는 이유에 대해 김 이사는 “당연히 노화”라고 이야기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중력에 의한 것은 부가적인 부분이고 가장 큰 원인은 노화에 의해 피부 속 콜라겐이나 히알루론산 성분이 부족해지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러한 결체조직 성분들을 보충해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리프팅이 시도되는 것이죠.” 김상섭 이사는 피부가 처진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고 설명한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절개형 거상술이 있죠. 말 그대로 처진 만큼 잘라낸 뒤 들어올리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수술은 환자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처짐이 심한 경우에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죠. 절개해서 조직을 떼어낸다고 해서 효과를 평생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절개형 방식도 2년 후부터는 효과가 반감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실 리프팅이나 리프팅 장비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실 리프팅에서 말하는 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실이 맞다. 가는 실을 피부 아래에 삽입해서 부족한 탄력을 보완하고 처지지 않도록 당겨주는 효과를 얻는 방식이다. 성형외과에서는 탄력 효과, 당김 효과라고 표현한다. 이외에 사용되는 리프팅 장비는 고주파 혹은 초음파를 활용해, 피하조직에 열을 전달한 다음 피부조직과 단백질이 응고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환자 입장에서 시술은 간편하지만 드라마틱한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실 리프팅은 시술 방식에 따라, 실의 종류에 따라 방식이 좀 달라집니다. 시술 방식은 부유형과 고정형으로 나뉘는데, 부유형은 실들을 피부 밑에 고정하지 않고 삽입만 시켜 탄력을 보완하는 효과를 얻는 방식이고, 고정형은 미세한 가시 같은 돌기가 있는 실을 써서 피부조직을 위로 당겨 고정하는 방식이죠. 또 녹는 실을 쓰느냐 고정형 실을 쓰느냐에 따라 적용 방식이 다소 달라집니다.” 처음 실 리프팅이 고안된 것은 15년 전 러시아 의사에 의해서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됐다. 여기에 녹는 실을 쓰는 아이디어는 한국의 피부과 의사들에 의해 고안됐다. 한의사들이 활용하는 금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임상적으로 대중화한 지는 6년 정도 됐고, 한국 의사들에 의해 일본 등 각국에 전파되고 있다. 김 이사도 이 초기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실에 따라 효과 지속 달라 실 리프팅 시술에 소요되는 시간은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부유형 방식은 금방 끝나지만 고정형 시술은 시간이 다소 더 걸린다. 실의 종류나 시술 부위에 따라 달라지지만 많게는 100개 이상의 실이 피부 밑에 자리 잡게 된다. 안타깝게도 실 리프팅 역시 영구적인 대안은 되지 못한다. 실 리프팅이 얻는 탄력 효과는 실이라는 물리적 특성과 피하조직에 실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가 아물면서 발생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아물기 때문이다. 당김 효과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탄력 효과는 녹는 실의 경우는 1년 이상, 안 녹는 실의 경우는 10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김 효과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효과가 떨어진다. 안 녹는 실이 좀 더 오래가지만 두 가지 방식 모두 6개월 이후부터는 효과가 감소된다. “실 리프팅으로 지속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방문하시는 게 좋습니다. 녹는 실은 지속 기간이 다소 떨어져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때문에 시술에 부담을 느끼시는 환자들에게 추천하고 있습니다. 거부감이 없으신 경우에는 녹지 않는 실을 쓰기도 하고요. 남자 환자들의 경우에는 시술 자체에 부담을 느껴 장비를 활용한 리프팅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작용은 크지 않다. 실 리프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은 대부분 감염에 의한 염증이다. 간혹 녹지 않는 실의 길이가 잘못 계산돼 실 끝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그나마 대형 사고라고 볼 수 있는 케이스다. 의학적으로는 ‘간단한’ 시술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시술 후 아물면서 붓기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주 정도라고 김 이사는 설명한다. 실 리프팅 비용은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는 실의 종류에 따라, 부위의 범위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 시중의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 받는 비용은 녹는 실의 경우 30~150만원, 안 녹는 실은 80~250만원 수준이다. 간혹 금실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10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정기적인 재시술 비용은 훨씬 낮아진다. 장비를 활용한 리프팅은 40~2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성형외과나 피부과에서는 이러한 리프팅과 함께 눈가주름이나 미간주름 등을 보완하기 위해 필러를 동시에 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 리프팅’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환자가 원하는 것은 ‘동안(童顔)’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김상섭 원장은 “몇 가지 간단한 수술만으로 젊어진 외모에 만족하시는 환자를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재혼에 성공하시거나 사업이 잘 풀린다는 얘기를 들으면 인상이 사회생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 시술 환자 미니 인터뷰 [청담동 안세정씨(47)] “시술만큼 본인의 관리도 중요해요” 평범한 가정주부인 안세정씨는 실 리프팅의 효과를 톡톡히 본 예찬론자 중 한 명이다. 그녀가 처음 실 리프팅 시술을 받은 건 30대 후반 무렵. 강남에서 실 리프팅은 ‘아는 사람만 아는’ 시술이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접하게 됐다고 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다.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죠. 피부에 그것도 얼굴 피부 밑에 무언가를 넣는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주변에서 추천하는 바람에 용기를 냈는데 지금은 잘했다 싶어요.” 시술을 하고 나서 자리 잡을 때까지는 통증이 좀 있었다고 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통증이 사라졌는데, 붓기가 빠지고 나서 피부 밑에 이게 실인가 싶은 약간의 이물감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노화를 느끼기에는 이른 나이인 30대 후반에 실 리프팅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극적인 변화를 느끼진 못했어요. 주변의 평가도 그랬고요. 하지만 꾸준히 재시술을 받으면서 리프팅된 상태를 유지하니까 동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제 입으로 이야기하긴 부끄럽지만요(웃음).” 이제는 실 리프팅을 받는 사람이 늘면서 주변 지인들도 수술 후 효과를 보기도 하는데, 나이든 사람이 시술하는 경우 ‘극적인’ 변화를 본 적도 많았다고 한다. 안씨의 경우 첫 시술을 받고 2년 후 재시술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총 5회 재시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는 것 같긴 해요.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해요. 저도 그렇고 주변 사례를 보면 재시술 주기는 본인의 피부관리가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평소에 운동이나 피부관리, 식사조절 등을 잘하시는 분들은 3년이 지나서 재시술하시는 분도 봤거든요. 반대로 특별한 관리를 안 하시는 분들은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더라고요.” 의학적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재시술이 진행될수록 효과가 더 커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안씨는 여자라면 리프팅의 필요성에 대해 모두들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서 팔자주름이나 눈가주름 등을 신경 쓰거든요. 만약 고민이 되신다면 실 리프팅을 강하게 추천하고 싶어요. 다른 시술에 비해 비용 대비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술이라 조금 불편할 순 있어요. 하지만 젊어 보인다면 약간의 불편함은 참을 수 있잖아요(웃음).”
- 2016-10-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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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 시집보낸 퇴계에서 인간애를 느끼다
- 어느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수업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는 철학자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외국의 철학자를 들먹이고 아주 드물게 퇴계 이황선생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선조보다 외국의 누구를 알아야 지식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퇴계는 조선시대 성라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너무 깊고 높아 배우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문보다도 그의 인간미에 반하여 그를 존경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년년 생이라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고향집 하녀 학덕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손자며느리가 듣고는 유모로 보내달라고 퇴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엄하게 나무랍니다. “남의 자식을 죽이면서 제 자식을 살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그리고는 증손자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내고 또 증손자가 병이 있음을 듣고 괴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손자에게 보냈습니다. 왕자도 유모의 젖을 먹고 양반이 유모를 들이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젖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증손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취한 행동은 위대합니다. 결국 이 아기는 증조부인 퇴계를 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둘째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자식도 없이 한평생 과부로 살아야할 며느리가 큰 걱정입니다. 여필종부, 부창부수, 삼종지도 의 봉건적인 조선시대에 여인의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재혼금지라는 제도가 강하게 된 이유가 과부가 재혼하면서 배속에든 아이가 전 남편의 자식인지 지금 남편의 자식인지가 아리송한 일이 생기자 1477년에 ‘과부제가급지법’(1896년 감오경장 때 폐지) 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사대부 출신이라 해도 과부로서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라면 관직이 철저히 봉쇄되었습니다. 반면 과부로서 평생 수절하고 정절을 지키면 국가유공자에게 포상하듯 기념비를 하사하고 수절한 과부의 희생을 그 가문과 후손에게 혜택으로 보상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퇴계는 며느리의 인간다운 삶을 고려하여 사돈을 불러서 둘째며느리를 데려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통념을 깬 것입니다. 며느리의 재가는 가문의 큰 수치이지만 퇴계는 가문보다는 며느리의 삶을 걱정하고 결행 했습니다. 사돈도 퇴계의 뜻을 이해하고 은밀하게 그녀를 재혼시켰다고 합니다. 퇴계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어느 기와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퇴계는 주인집에서 차려준 밥상이 고기보다 채식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에 맞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침 식사 후 주인이 예법대로 버선을 선물하였는데 버선의 크기가 자신의 발 치수에 정확함을 알고 이 집의 안주인이 자신의 며느리였었음을 눈치를 챘지만 서로의 체면을 생각하여 모른척했다고 합니다. 주인집을 멀리 떠나와 퇴계가 뒤돌아보니 자신의 둘째며느리가 담 모퉁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배웅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재가 사실이 알려지면 퇴계 선생과 그 가문이 받아야 할 치욕은 이만저만 한 게 아닙니다. 지금 까지도 퇴계 후손들은 며느리의 재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리지 않는 유교문화의 조선사회에서 그가 어렵게 택한 결행은 인간 사랑이고 가족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신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를 가까이 닮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내가 한발만 더 내 디디면 손에 잡힐 듯한 우리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퇴계의 삶에서 나는 따뜻한 사람의 정을 느끼고 그를 존경합니다.
- 2016-10-04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