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국가안보가 우려되는 시점에 있다. 국민의 철저한 안보관이 어느 때보다 강조된다. 지난 6월 15일 문산 자유시장이 제공하는 ‘DMZ 무료관광’을 다녀왔다. 임진각까지는 가끔 갔었지만, DMZ 안을 둘러본 것은 처음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누구나 자기 돈 들이지 않고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다소의 위험이 따르더라도 좋아한다는 의미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종종 활용하는 ‘1+1’ 판매도 마찬가지다. 딱히 이런 유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경기도 파주시와 문산 자유시장이 함께 시행하는 ‘DMZ 무료관광’ 이벤트도 문산 자유시장에서 1만원 이상 거래한 고객에게만 덤으로 주는 혜택이다.
DMZ 무료관광은 문산 자유시장으로 출발하여 DMZ 지역 안에 있는 주요 지역을 45인승 관광버스로 순회한 후 다시 문산 자유시장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안보관광이다. 45인승 자리는 꽉 찼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든 분들이었고 외국인도 서너 명 참가했다. 임진각-도라산역-도라전망대-제3땅굴-해방촌을 3시간 내외로 돌아봤다. 문산 자유시장은 재래시장인데 파주시의 지원을 받아 문산 자유시장 상인연합회에서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이 행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문산 자유시장은 이전의 낡은 건물을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시장으로 경의.중앙선 전철의 종착역인 문산역 근처에 있다. 전철역에서 내려 5분 거리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경로우대카드를 갖고 있는 사람은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다녀올 수 있고 재래 전통시장에서 추억의 먹거리를 싼값에 즐길 수 있다. 그날 필자와 함께했던 일행은 점심으로 시장에서 육개장을 먹었는데 1인에 6000원이었고 맛이 뛰어났다.
DMZ 무료관광은 하루에 두 번 열린다. 문산 시장에서 12시 30분과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한다. 월요일과 공휴일은 운행하지 않으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정상 운행한다. 시장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물건을 살 경우 거래 영수증에 확인 도장을 받아 이 영수증을 신축 중인 시장 주차장 앞쪽에서 접수하고 있는 상인연합회 관리 직원에게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된다. 신분증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한다. DMZ 출입에는 군 관계자의 검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음식을 먹기 전, 미리 신분증을 제시하고 예약하면 관광버스 좌석을 확보할 수 있다. 좌석은 정원제라서 음식을 먹은 후 버스를 타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시간 날 때 친구들과 함께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고, 전통시장에서 추억의 먹거리도 즐기고, 관람이 쉽지 않은 DMZ에서 전 세계 유일 분단국가의 아픔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당연히 재래시장 활성화에 작은 보탬을 주는 일도 의미 있을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는 진짜 남매를 알아채는 방법 한 가지가 있다. 원활한 관계를 위한 친절한 안부는 없고 퉁명스럽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어간다면 100%다. 멋진 추억여행이 있다기에 만난 김미혜(42)씨와 김대흥(40)씨는 완벽한 남매 자체였다. 화창한 봄, 꽃향기 살짝 풍기던 어느 날. 인사인 듯 인사 아닌 인사 같은(?) 직설 화법 쏘며 대화를 이어가는 남매. 이들이 만나 두서없이 나누는 이야기는 역시나 여행. 부모님과 함께여서 행복했다는 여행 이야기였다.
해군 출신 부자, 여행에 추억 더하기
“아버지! 저랑 같이 술 마시고 좀 돌아다녀요. 입원하고 나면 한 달간은 못 마시니까 여행이나 함께 하시죠?”
퇴역 군인 아버지와 배우 아들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해군에서 복무 중 잠수를 많이 한 탓에 생긴 염증으로 아버지 김성준씨가 고막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아들 대흥씨의 꿀맛 같은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술이나 마시게 여행을 가자니.
“동해안 해군 부대를 쭉 둘러보고 오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아버지는 해군 퇴역 군인이시고 저 또한 해군으로 제대했거든요.”
군복을 벗고 다시 그곳으로 가면 어떤 느낌일까? 군부대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근처라도 닿게 되면 그 또한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원도 봉평에서 메밀전병 사 먹은 것을 시작으로 정동진, 통일전망대까지 쭉 훑고 올라갔다. 아버지 김성준씨가 수술을 바로 앞둔 2012년 3월 중순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여행
여행의 행선지가 동해안으로 정해진 이유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흥씨가 찾아낸 빛바랜 아버지 사진. 발견 당시 기분은 소름끼칠 만큼 신기했다고 대흥씨는 말한다.
“해군에 들어가 얼마 안 됐을 때인 일병 시절, 배 위에서 사진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사진을 뽑고 난 뒤 집에서 앨범 정리를 하다가 아버지 젊을 때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와 아버지가 찍은 사진 배경이 똑같은 거예요. 위치까지도요. 소름이 끼쳐서 ‘아버지 이거 뭐예요?’ 그랬더니 ‘그 배, 내가 미국에서 끌고 온 배야’라고 그때서야 말씀하셨어요. 시간을 초월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곳에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언젠가 그 배에 가서 꼭 한번 같이 사진 찍자고 약속했어요.”
“늙은이들끼리 한번 늙은이 보러 갑시다”
여행에서 바라던 최고의 장면은 퇴역 함정과의 해후였다.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의 ‘강릉통일공원’에는 아버지와 김대흥씨의 군 시절을 함께했던 같은 기종의 구축함이 전시돼 있다. 배와 만난 시대와 그 이유는 달랐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오랜 친구임에 분명했다.
“둘 다 군 생활을 마치고 여행 가서 퇴역 배에 다시 올라탄 거잖아요. 다 고물로 만난 거죠. 배는 고물, 아버지는 퇴역 군인, 나는 제대 군인. 이 셋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말이다. 이 무심, 무뚝뚝, 무정한 부자는 정말 꼭 같은 장소에서 사진 한번 찍자는 말을 제대로 지키고야 말았다. 단둘이 간 여행에서, 단둘이 찍은 사진이 ‘바로 그 위치’란 곳에서 찍은 단 한 장(!)뿐이란다.
“남자들이 다 그렇죠 뭐(웃음). 만나면 술 먹고. 여행으로 서로 더 돈독해진다거나 그런 거 없어요. 낮에는 운전해야 하니까 술은 못 마시고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젊으셔서 술 정말 잘 드셨어요. 수술 앞두고 어머니가 술 못 드시게 하시니까 제가 아버지에게 술 실컷 마실 기회(?)를 드린 것이죠. 그러고 딱 돌아오자마자 입원하고 수술하셨어요.”
여행 가서 정치 얘기는 금물
“술 먹고 아버지랑 싸우지 말걸 그랬어요.”
술이 부르는 여러 가지 사건 중 하나가 싸움. 대흥씨도 아버지랑 여행하던 중 다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배에 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시작해 천안함 사건으로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더니 결국 정치 얘기로 가고야 말았다. 해서는 안 될 대화였다고 회상했다.
“당연히 군인으로 한평생을 산 아버지와 저는 분명한 이견이 있었어요. 여행 가서 아버지랑 얼굴 붉힐 줄이야(웃음). 지금은 싸운 것도 웃기지만 좋은 추억이 더 쌓여서 괜찮아요. 이 여행을 계기로 영화 시나리오도 썼고요.”
여행 뒤 김대흥씨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을 주제로 한 작품 를 집필했고 2014년 제주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가작’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솔직히 엄마와 딸은 들어본 적 있어도 다 큰 아들과 나이 든 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아버지와 싸웠던 것도 시나리오에 녹였죠. 단 정치로 싸우는 거 말고 다른 것으로 상상해 썼어요.”
아버지와 단둘이 또 여행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대흥씨.
“아버지랑 함께 군함에 올랐던 것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가 정말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부모와의 여행은 좋지만 늘 고민되는 일
그러면서도 부모님과의 여행이 쉬워졌다거나 편해졌다고 선뜻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히 쉽지 않아요. 부모님과의 여행은 아무리 자주 여행을 함께한다 하더라도 늘 대단한 각오가 필요해요. 그게 쉽다고 말하면 정말 제가 이상한 사람이죠. 가기 전에 항상 고민해요. 이 돈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가서 맞출 것도 많고요. 그래도 갔다 오면 잘 다녀왔다 생각하게 됩니다.”
김대흥씨는 시시때때로 사진을 찍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의 시간을 기록한다. 여행은 부모와 가족 모두를 사진에 담기에 아주 적당한 장치 같은 것이다.
“지금 제 핸드폰에도 부모님 사진이 있거든요. 미혜 누나 결혼식 때도 북촌길을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요. 요즘 보면 대부분 부모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많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욱더 부모님과의 여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누나가 여행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을 거예요. 누나는 엄마랑 대만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말 잘 놀다 왔더라고요.”
둘째 누나 김미혜씨의 꽃보다 엄마 ‘대만 편’
이제 그럼 김대흥씨 누나의 여행 이야기에 빠져볼까? 김대흥씨는 삼남매 중 막내. 둘째 누나 김미혜씨가 여행에 조예가 깊다고 귀띔해줬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은 전문가 수준이라고. 현재 IT업계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미혜씨는 전직 여행작가다. 거짓말 약간 보태 국내외 구석구석 안 가본 지역과 나라가 없을 정도다. 지금도 호시탐탐 여행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혜씨는 가방에서 앨범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엄마와 대만 여행 갔을 때 사진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념도 될 것 같고요.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어요.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엄마랑 여행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여행지에서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늘 엄마가 생각나더라고요.”
김미혜씨 가족은 제주 출신이다.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살았고 종착지는 부모님이 나고 자란 제주가 됐다. 제주에 살고 있는 부모님. 물리적인 거리가 다소 걸림돌이 되지만 엄마와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곳에 갈까 찾아보고 고민한다. 그렇게 떠난 첫 외국 여행지는 대만. 이유가 있었다.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을 재밌게 보셨나봐요(웃음). 일본이나 중국 2박 3일로 갈 수 있는 곳을 추천해드렸는데 갑자기 대만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혈액 투석하는 어머니를 위한 맞춤 일정
미혜씨는 고민 끝에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대만을 자주 다녔고 여행 일정도 짤 수 있었지만 패키지여행을 선택한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어르신이랑 여행을 할 때는 식사와 동선이 문제거든요. 젊으면 모르겠는데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게 힘들어요. 무엇보다 식사를 특히 잘 맞춰주잖아요. 현지식과 한식을 고루 섞어주니까. 자유여행의 경우 자식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걸 눈앞에서 보시니까 부담스러워하시더라고요. 패키지는 여행 전에 돈을 미리 지불하잖아요.”
혹시나 패키지여행의 일정이 빡빡하고 버스 이동이 많아서 어머니가 재미없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매 순간 즐기고 따라다니셨다고 했다. 그리고 패키지를 선택한 이유가 또 있다. 어머니의 건강이 문제였다. 어머니 이경숙씨는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한다. 그래서 멀리 가고 싶어도 2박 3일이 넘는 여행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월·수·금 중 하루 투석이 끝난 오후 시간에 여행을 떠나요. 제주도에서 투석하거나 서울에서 할 때도 있어요. 만약 엄마가 속초나 이런 곳에서 여행을 하시게 되면 며칠을 자야 하니까 제가 미리 그 근처 병원을 알아보고 시설이 어떤지 확인하고 예약해요. 그런데 항상 하는 일이라(웃음). 대만 갈 때는 아주 많이 기대하셨고 다녀와서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고 말씀하세요.”
여행남매, 지금도 여전히 여행 계획 짜는 중
작년 미혜씨는 엄마와의 홍콩여행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 몸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어머니의 투석은 여행을 참 힘들게 하지만 해결하고 넘어야 할 일. 그럼에도 미혜씨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짧게라도 여행을 꾸준히 다닐 것”이라고 말한다. 오는 10월 아버지 김성준씨의 고희(古稀)를 기념해 김미혜, 대흥 남매는 온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 여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부모님이다. 아이들은 더 좋은 곳에 많이 갈 것이기 때문에 일정 대부분은 부모님 위주로 짤 계획이다.
김대흥씨는 자신과 누나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했다. 부모와의 여행이 불편하다는 편견을 좀 깨주고 싶었다고.
“여행 가고 싶은데 불편해서 못 간다구요? 어머니 투석 챙기는 누나 보세요. 그래도 누나는 하루라도 젊을 때 엄마랑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거든요. 게다가 저희 부모님은 제주에 사시잖아요.”
돈이 꼭 있어야만, 그리고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게 부모와의 여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터뷰 말미, 호기심이 발동해 질문 하나를 던졌다.
“누나와 동생, 단둘이 여행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이구동성으로 단호히 대답했다.
“없죠(웃음).”
짙푸른 동해 바다. 저 멀고 깊은 곳으로 눈길이 따라가면 하늘이 시작된다. 바람과 파도소리도 경계가 흐려져 귓가에는 하나의 소리로 들릴 뿐이다. 구름 아래 뻗은 손가락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주황색 빛이 몸을 감싸 내린다. 그곳에 서 있는 기분? 이게 바로 축복 아닐까.
산과 바다, 하늘이 이어진 예술가의 놀이터
멀리 바다에서 시야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 청록색 소나무 숲길과 다양한 형상을 한 조각상이 자유로이 서 있다. 한적한 해안도로 옆, 예술가의 숨길과 손길이 쉼 없이 스쳐지나가는 하슬라아트월드(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발길이 머무는 순간 관람객이 아닌 설치된 미술작품의 한 소재로서 존중받는 곳이다. ‘하슬라’는 고구려·신라시대에 사용됐던 강릉의 옛 지명으로 ‘해와 밝음’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여기에 ‘아트월드’를 붙여 ‘강릉에 세워진 예술가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강릉 출신 미술가 박신정·최옥영 부부의 예술가적 기질이 이 공간을 채웠다. 박신정 대표는 하슬라아트월드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에 작품 전시를 다니면서 예술품뿐만 아니라 전시 장소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받아왔다”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화합하는 곳을 꿈꿨다”고 공간 건립 배경을 설명했다. 2003년 조각공원을 시작으로 2009년 뮤지엄 호텔(24개 객실), 2010년 현대미술관, 2011년 피노키오 박물관과 마리오네트 미술관을 순차 개관했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연간 약 15만 명이 찾는 강릉의 관광 명소다. 최근 SBS 드라마 와 영화 촬영 장소로 이용됐고, MBC 드라마 의 주요 무대가 됐다.
하슬라아트월드의 크고 작은 모든 공간이 예술가들의 작업 현장이자 방문객의 관람 장소다. 이곳은 뭐든 다중적인 감각과 의미가 부여돼 있다. 호텔일 수도, 전시실일 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 이곳의 특징. 보는 사람에 따라 자유로이 생각하고 상상을 즐기는 곳이다. 작가들은 이곳에 상주하면서 작품 활동도 한다. 취재를 갔던 4월 초에는 마침 최옥영 대표가 전시에 필요한 작품을 손보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최 대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온몸에 먼지가 잔뜩’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최 대표는 “자연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과 인연이 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면서 “예술가라 타협도 잘 못하고 부족하지만 생긴 대로 오랫동안 이곳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고래 뱃속을 걷는 피노키오처럼
하슬라아트월드는 정해진 방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관,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 미술관 순으로 관람한다. 현대미술관은 호텔 건물 로비에서부터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지상에서 지하로, 다시 지상으로 오르내리며 작품 감상을 하는 구조다. 동해의 파란빛과 자연광, 목조 마루, 겉치레 없는 시멘트벽을 배경으로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건물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어딘가 ‘툭’ 하고 놓아둔 느낌에 시선이 간다. 감각적이고 기발함이 돋보이는 회화와 조각 작품 200여 점도 전시되고 있다.
손자·손녀의 감성자극 미술 공간이 현대미술관 다음에 이어지는 피노키오 박물관이다. 특히 박물관으로 향하는 통로가 매우 인상적이다.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큰 원형 통로 내부를 플라스틱 비닐로 촘촘하게 감싸놓았고, 형형색색 움직이는 조명을 설치했다. 마치 고래 뱃속을 여행하는 피노키오가 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각거리는 비닐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조명이 마블링되듯 섞여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곳이다.
피노키오 박물관에는 피노키오 관련 작품 500여 점이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작품과 전시 성격을 바꾸고 있다고. 이곳에는 꽃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와 유럽에서 들여온 각양각색의 피노키오를 만날 수 있다. 디즈니 만화영화 피노키오 관람은 덤이다.
마리오네트 미술관에서는 센서로 움직이는 하슬라아트월드의 특허품 ‘마리봇’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가까이 오면 팔과 다리를 흔들어 몸을 움직인다.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가지고 온 특별한 마리오네트가 관람객을 맞는다.
편견 없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것
실내 관람을 마치면 조각공원 산책을 한다. 호텔 안 매표소 쪽으로 다시 돌아가 실내 계단을 이용해 조각공원 입구로 간다. 반드시 편한 신발을 준비하라. 빨리 다녀도 최소 30분이고 나지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솔향 가득한 소나무 정원을 지나 무심히 서 있는 조각들을 보며 걷다 잠시 뒤를 돌아보시라. 자연이 내려준 예술작품(?)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동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바다카페와 전망대, 아이들의 체험학습장과 소똥박물관 등이 있다. 자연 속 나 자신이 작품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 하슬라아트월드 안에 있다.
하슬라아트월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작품의 제목, 작가 이름 그리고 거울이다. 심지어 거울은 화장실에도 없다. 시멘트벽도 골조 외에 별다른 장치가 없다. 이 모든 것에는 편견 없이 작품을 바라보고 집중해달라는 대표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단, 예약제로 진행되는 도슨트 시간에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에 관한 설명이 듣고 싶다면 도슨트 설명을 들어보시라.
지난달에 백두대간 선자령으로 겨울산행을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동안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길이었다. 스틱을 사용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출발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멀리 강릉과 동해가 다 내려다보이는 새봉 전망대를 지나 풍력발전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선자령(1,257m)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선경(仙境) 같았다.
내려올 때는 눈이 수북이 쌓인 활엽수 숲속을 지나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양떼목장을 지나 원점회귀했다. 그날 일기예보는 영하 15도의 추위라고 했는데 선자령은 눈가루가 하얗게 섞인 칼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다. 혹한에 멋진 설경 담아오겠다고 배터리도 두 개나 가지고 갔는데 추위에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 중에 카메라 보온덮개를 준비한 사람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손가락은 꽁꽁 얼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스키 장갑만 믿고 핫팩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떼목장에 양은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가득
내려오는 코스는 숲속을 지나서 양떼목장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양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드넓은 목장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았다. 끝없이 이어서 걷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흰색뿐이었다. 다양한 원색의 등산복들은 마치 설원에 핀 꽃들 같았다. 일행과 함께 하산하는 중이었지만, 잠시 멈춰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 눈 쌓인 목장을 바라보면서 쓸쓸하다는 생각보다는 순백의 아름다움과 함께 텅 빈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겨울에도 다시 갈 것 같다.
고단함 끝에 얻어지는 것들
겨울산행은 아이젠과 롱 스패츠를 착용해도 위험하고 눈 속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더 약해질 체력을 생각하며 일주일간 망설이면서 고민을 했다. 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강행하려는 마음은 아직도 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다. 그리고 힘든 산행을 마친 후에는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맑아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평소에도 운동을 지나칠 정도로 하곤 한다. 이번 등반 중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을 다섯 시간씩 맞아가며 고생했지만 바람이 적은 골짜기에 수북이 쌓인 눈 속에 누웠을 때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이 마냥 좋았다. 두 볼은 얼음사과같이 되었지만 드넓은 설원을 걷는 내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자령에서의 멋진 경험으로 올 한 해도 혹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상황을 잊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힘들었던 것만큼 깨달은 것도 많았던 겨울산행이었다.
* 겨울산행 tip
보온 유지는 필수. 두꺼운 겉옷 하나보다는 얇은 옷 여러 겹을 입는 것이 보온에 더 좋다.
스틱, 아이젠, 스패츠, 핫팩, 보온병은 필수. 카메라와 배터리 보온 커버도 준비할 것.
선자령처럼 눈과 바람이 심한 곳에서는 스키용 고글이 좋다.
일기예보를 100%로 믿지 말고 대비하는 것이 안전하다.
필자는 외국 여행은 많이 한 편이지만 정작 국내 여행은 별로 가 본 곳이 없다. 물론 부산 같은 대도시는 업무상 몇 번 가봤지만,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출장이었다. 가족과 함께 피서 차 동해안이나 서해안 해변에 놀러가 본 적은 있다. 그러나 혼자의 여행이 아니라 먹고 마신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순천만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벼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해안과 석양, 철새들의 군무를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기 때문에 먹는 즐거움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순천으로 여행지를 정한 것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벌써 몇 번씩 갔다 왔다고 했다. 그러니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정보가 없이 순천에 도착하다 보니 순천만 국가정원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마침 9월30일부터 10월16일까지 17일 동안 ‘순천만국가정원산업디자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입장료로 8천원을 받았다. 볼거리가 많고 넓어서 하마터면 이곳이 순천만의 전부인 줄 알고 그냥 갈 뻔 했다. 가을을 맞아 국화꽃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꽃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볼거리는 ‘꿈의 다리’를 건너 각 나라 국별 정원들이었다. 호수 정원 안에 있는 동산도 빙빙 돌아 걸어올라 갔다 올 수 있게 해 놓았다. 뉴스나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는 장면이다. 점심으로 행사장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짱뚱어탕을 먹었다. 걱정했던 냄새는 없었고 추어탕과 비슷한 맛이었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8천원을 받았다. 여기서 순천만 습지까지 다시 8천원을 내면 스카이큐브라는 무인전동차로 습지까지 갈 수 있다.
순천만 습지 입구에 도착하자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갈대밭에 들어 섰다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걸었다. 가족단위, 연인들의 발길이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가는 바람에 걸음이 빠른 필자는 여러 사람을 헤치고 가야 했다. 갈대는 억새와 달리 볼품은 없는 식물이다. 다만, 염분이 많은 갯벌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다. 군집하여 있으니 볼만 한 것이다. 1m 정도 아래에 짱뚱어와 게가 많이 보였다. 갈대를 꺾어 쿡쿡 찔러보는 사람들도 있고 호기 있는 사람은 바지를 걷어 부치고 내려서려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회차로가 있어 절반 쯤은 거기서 돌아서는 것 같았다. 계속 앞으로 가니 용산전망대 표지가 나왔다. 뉴스 사진을 기억해 보니 높은 곳에 올라가 찍은 것으로 앞에 보이는 산 위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올라갔다 오려면 한 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갈대 밭 뒤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었다. 오르막이라 노약자들은 무리일 것 같았다. 중간마다 전망대가 있다. 백미는 역시 용산 전망대로 순천만의 바다 쪽이 다 보였다. 과연 툭터진 시야도 좋았지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었다. 기대했던 철새 떼는 보지 못했다. 겨울철에나 볼 수 있단다. 단풍도 아직 철이 이르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고 나니 만보기가 3만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걷기로 단련된 체력이라 거뜬히 소화하기는 했으나 보통 사람들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동 전망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스처 간 사람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1동 13층에 있는 정동 전망대이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인왕산과 백악산이 펼쳐 보인다. 가까이 서울 신청사가 우람하게 서 있고 빌딩 숲 속에 옛 고궁인 덕수궁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변에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정동 전망대에서는 커피를 비롯한 각종 음료를 주변 반값에 즐길 수 있다. 서울 시청역에서 나와 덕수궁 쪽 출구로 나오면 대한문이 보이고 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진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며 옛 왕궁을 둘러 볼 수도 있고 빌딩 숲 속의 허파와 같은 정원에서 힐링 할 수도 있다.
역사 유물이 늘어서 있고
덕수궁 주변으로 1897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일제하에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이 등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고. 1926년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성공회 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처를 걸어보면서 이 역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보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은 대한제국시 근대적 사법기관인 평리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재판을 받거나 고문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가볍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게 된다.
황제가 살던 왕궁
그리고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수궁에는 역사의 수례 바퀴를 돌려 대한제국의 그 시대로 돌아갈 듯 착각에 빠진다. 그 굴곡의 역사가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했고 1919년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왼쪽 옆으로 정관헌이 보이는데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덕수궁내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 앞으로 덕수궁 석어당은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축물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바로 앞쪽에 웅장한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요한 으뜸 전각이기도 하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중명전이 있는데 왕실도서관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장소이기도 하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 덕혜옹주를 낳아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장소도 여기에 있다. 최근 덕혜옹주가 영화로 만들어져 관심을 받고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곳,
정동 전망대는 이 역사의 숨결이 잠들고 있는 현장을 차 한 잔 하면서 바라볼 수 있다. 필자는 시내를 나오는 길이면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 빌딩 숲 속에 황제가 집무를 보던 집무실이 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덕수궁을 바라보며 필자 또한 한 시대의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커피 향기를 맡으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어 있는가?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에 있는 시도, 신도,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삼형제섬’으로도 불린다. 강화도 마니산 궁도연습장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해서 시도(矢島)다. 모도(茅島)는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이름이 바뀌었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고향이 영종도인 필자는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시도 해안일주 트레킹을 하기로 약속하고 지난 4일 이른 새벽에 서둘러 서울에서 출발해 영종도 삼목선착장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현충일 황금연휴로 선착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요 차산차해(車山車海)다. 주차장을 찾아 두어 바퀴 돌다가 대책이 없어 운서역 근처 아파트로 돌아와 주차하고 다시 버스로 이동했다.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불과 10여 분을 가니 신도가 나타났다. 일단 신도에서 하선해 마을버스를 타니 요금은 현금이 아니면 안 되며 큰돈을 내도 거스름돈은 없으니 알아서 요금을 내라고 시큰둥하게 말하는 버스 기사님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10여 분 남짓 달리니 신도와 시도를 잇는 연도교가 나왔다. 우리는 시도 초입에서 내려 해안트레킹을 시작하였다. 한참 썰물 때라 거북이 등처럼 불쑥 드러난 갯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갯고랑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잡고 있었다.
1.4㎞에 달하는 해당화 꽃길로 들어서니 운 좋게도 붉은 해당화 꽃이 만발해 반겨준다. 해당화가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우리는 어릴 적에 그것을 명감이라고 불렀다. 빨갛게 익어가는 명감을 따서 입에 넣고 성큼 깨물면 달콤한 물이 나오는데, 단물의 유혹에 빠져 정신없이 따먹다가 단물 뒤에 숨겨진 깔깔한 이물질이 목에 걸려 캑캑거리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 마당 가에 서서 탁 트인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올망졸망한 무인도가 그림처럼 떠 있어 운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바닷가 모래사장을 신나게 내달리다 보면 모래장술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해당화꽃잎 사이로 빨갛게 익은 명감이 유혹한다. 그 시절엔 해당화 꽃은 모두가 붉은색인 줄로만 알았다. 흰색 꽃잎도 더러 피어 있는 것을 이곳 해당화길에 와서야 알게 됐다.
해당화 꽃길을 지나고 나니 시도염전이 나타났다. 두부모처럼 물을 잡아놓은 염전을 지나 한참 돌아가니 드디어 수기해수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매력적인 작고 아담한 수기해수욕장은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고 소나무 숲과 연결된 모래밭에는 군데군데 가족 단위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분주하게 황금연휴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모처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갯고랑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놀고 있었고 청춘 연인들은 다정하게 갯벌체험을 하면서 행복을 키워가고 있었다.
언젠가? 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우리도 올여름이 가기 전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보자는 약속을 하면서 드라마 '풀하우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날리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강화도 마니산이 지척에 보이는 수기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한적한 바닷가 전망 좋은 바위 밑에 자리 잡고 점심으로 버너에 라면 3개와 만두를 무려 15개나 넣고 끓였다. 해안을 따라 울퉁불퉁 험하기 그지없는 돌 밭길을 마냥 걸었으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던 차에 행복한 성찬(盛饌)은 우리 모두의 배를 호강시켜주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다시 해안을 따라 걸어가니 절벽 위 전망대로 올라가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어찌 이곳을 그냥 지나칠쏘냐? 가파른 절벽 길을 로프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탁 트인 전망, 강화도 마니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절벽이 가파르다고 해 박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가도깨비 전설이 있다. 해안에 가가도깨비가 살고 있었는데, '가, 가' 소리를 세 번 들을 때까지 도망가지 않으면 가가도깨비에게 잡혀간다는 전설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 주변에 오기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해안트레킹을 시작할 때는 썰물이라 괜찮았는데, 섬을 반쯤 돌았을 때는 밀물이 시작돼 쏜살같이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서둘렀음에도 출발했던 선착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바닷물은 거의 해안을 점령해 버렸다. 어찌해야 하나? 더는 해안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소리 지른다. 한데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고 가는 재미도 꽤나 좋았다. 기묘한 바위를 배경으로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가이 절경이었다. 우리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바위를 건너뛰고 기어오르면서도 그 멋진 풍경을히찍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바닷물로 곧장 빠져 카메라 장비 모두를 망쳐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 멋진 풍경에 매료돼 강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전망 좋은 어느 바위 틈바귀에서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자태를 드러낸 메꽃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험로에 큰 위로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6시간의 강행군으로 트레킹을 마치고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오니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온몸은 파김치가 됐으나 고진감래 끝에 완벽하게 섬일주를 마쳤다.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동네 어귀의 상점에 앉아 시원한 캔 맥주 한 캔으로 갈증을 달랬다. 여행은 밋밋하기보다는 스릴 넘치는 고생이 동반돼야 더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도 뒷담화가 이어진다.
갈매기가 춤추는 돌아오는 뱃전에 앉아 잠시 전의 멋진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가 보니 비록 몸은 고단했어도 달콤한 행복이 솜사탕처럼 밀려온다.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갑자기 북적이는 인파속으로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붉은 색으로 장식한 가게와 벽화들, 붉은색 물결이 마치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하는 걸까? 중국인들이 홍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지 벽화거리 인근에 청일 조계지 계단이 나타났다. 조계지(租界地)란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는데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많은 청국과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곳을 거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배다리이다.
계단위에서 내려다보는 왼쪽이 일본, 오른쪽이 청나라의 조계지라고 하는데, 이 계단을 경계로 좌측엔 청국이 우측엔 일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계단 위쪽 가운데에 공자의 동상이 서있었다. 그 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차이나타운 중심부를 지나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짜장면과 짬뽕으로 허기를 배를 달래고 월미도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월미도 입구 월미전통정원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특히 초입의 양진당은 각종 한국전통체험을 하기 딱 좋았다. 쾌적하고 멋들어진 정원에서 쉴 새 없이 눌러대는 카메라셔터, 월미산 올라가는 발길을 잡는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지난 50여년간의 일반인 출입차단으로 훼손되지 않은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걷다보면 향긋한 나무향기와 새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드디어 월미산 정상에 오르니 인천포구는 물론이고 인천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포구에는 군함이 아닌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고 올망졸망한 바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 오르자 인천대교가 코앞에 보이고 바다건너 영종도의 고층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종도는 필자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인천과 영종도의 간극이 이렇게나 좁혀졌을까?
긴 호흡을 하고 인천대교 너머 아스라이 가물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긴박했던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렸다.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국군이 후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6월29일 전쟁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치밀한 작전계획과 작전 당일까지 상륙작전 가능한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면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므로 서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는 점이다.
월미산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촬영을 마치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리도 아프고 피로감도 몰려왔지만 기분은 꽤나 괜찮았다. 50여년 만에 추억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해서 행복했고, 특히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인천상륙작전지를 답사했다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지하탄약저장고는 이제는 효소 발효음식 저장고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월의 긴 간극을 월미산은 오늘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5월의 산은 온통 연두색 이파리들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하얀 이팝나무 꽃 무리가 섞여 마치 파스텔화 같다. 온통 생명으로 가득한 5월은 말 그대로 ‘계절의 여왕’답다.
경북 상주보를 지나 긴 교량을 타고 넘으니 상주자전거박물관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잠시 그곳에 들러 자전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휴식을 취한 다음 구미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주위로 길게 펼쳐진 평야에서는 일손 바쁜 농부들의 바쁜 일상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엊그제 비가 온 덕분에 찰랑찰랑 물 잡힌 논에서 농사 준비에 바쁜 그들의 옆을 지나칠 적에는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가슴을 적셔왔지만 어린 시절, 이맘때쯤이면 농촌 들녘을 장악했던 ‘송아지 찾는 어미 소의 헤설픈 울음소리’는 간데없고 트랙터의 굉음만이 가득해 마음이 허전했다.
서울에는 이틀 연속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곳만은 햇살이 싱그러웠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 우리의 자전거길만이 햇살이 비추니 이만한 행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본래 계획은 칠곡군이었다. 칠곡군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점프해 3일 차의 힘든 여정을 대비하기로 했는데, 구미시 구미보에 도착해 전망대를 구경하면서 잠시 쉬다가 아뿔싸, 너무 오랫동안 지체한 것이 화근이었다. 발 뻗은 김에 누워버린다더니 노곤한 몸으로 더는 못 가겠다는 회원들의 아우성에 다시 중지를 모아 오늘은 여기까지 라이딩을 마치기로 했다.
구미보에서 차를 불러 타고 부산 을숙도를 향하는 중에 을숙도를 불과 30여 분 남겨두고 고속도로에 장사진을 친 차량 행렬을 만났다. 할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해 경남 김해시에서 묵어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애초에 부산에 가면 자갈치시장에 들러 꼼장어 구이나 붕장어 회에 소주 한잔은 꼭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일정이 차질을 빚어 부산은 가지도 못한 것이다. 더구나 김해시에서 장어집을 찾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비록 늦은 저녁이나 세 분 회원님들의 찬조로 바닷장어의 깊은 맛을 맘껏 느끼고 내친김에 펜션까지 소개받아 김해시 신어산 자락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게 됐다.
상동면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은 신어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일품이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다소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전거 하룻길에 대한 담소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이어갔다.
정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신어산 자락의 초승달도 구름에 숨고 밤벌레 소리만 적막한데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그렇게 둘째 날 밤도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