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영화) 신과함께 - 인과 연
개봉 8월 1일 장르 판타지, 드라마 감독 김용화 출연 하정우, 주지훈, 김향기, 마동석 등
환생이 약속된 마지막 49번째 재판을 앞둔 저승 삼차사가 그들의 천 년 전 과거를 기억하는 성주신을 만나 이승과 저승, 과거를 넘나들며 잃어버린 비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지난해 말 개봉한 ‘신과함께-죄와 벌’이 한국 영화 관객 수 역대 2위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이의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강림 역의 하정우는 “저승 삼차사 중심의 드라마로 1편보다 깊어진 감성을 만날 수 있다”며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전시) 황금문명 엘도라도 - 신비의 보물을 찾아서
일정 8월 4일~10월 28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순금으로 길이 포장되어 있고 온몸에 금가루를 바른 사람들이 산다는 전설의 황금도시 ‘엘도라도’. 20세기, 콜롬비아 구아타비타 호수 근처에서 황금 전설이 표현된 작품 ‘무이스카 황금뗏목’이 발견되면서 엘도라도의 전설이 전설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한때 ‘엘도라도’로 불렸던 콜롬비아의 황금 유물 중 322점을 선보인다.
(뮤지컬) 바넘 : 위대한 쇼맨
일정 8월 7일~10월 28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출연 유준상, 박건형, 윤형렬, 김소향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뮤지컬을 찾는다면 ‘바넘:위대한 쇼맨’을 추천한다. 희대의 엔터테이너 P.T. 바넘의 생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기존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서커스를 극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 토니상 3개 부문, 런던 프로덕션 올리비에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탄탄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올여름 국내에서 초연되는 이번 무대에는 유준상, 박건형, 김소향 등 베테랑 배우들이 오른다.
(전시) 지도예찬 - 조선지도 500년, 공간·시간·인간의 이야기
일정 8월 14일~10월 28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국내 최초로 진행되는 대규모 ‘지도’ 전시로, 동국대지도, 대동여지도 등 국가 지정 문화재를 포함한 주요 지도 및 지리지 130여 건을 만나볼 수 있다.
(뮤지컬) 오! 캐롤
개봉 8월 16일~10월 21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출연 서범석, 성기윤, 박해미, 김선경 등
197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팝의 거장, 닐 세다카의 히트 팝을 배경으로 리조트에서 펼쳐지는 러브스토리를 담은 작품이다. ‘Oh Carol’,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중·장년층에게 익숙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일정 8월 25일 장소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출연 국립창극단
고선웅 연출가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된 판소리 ‘변강쇠전’을 재해석했다. 박복하지만 당찬 여인 옹녀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부각하면서 변강쇠와 옹녀의 19금 이야기를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유럽 미술의 거장들과 만나다 ‘유럽 미술관 박물관 여행’ 휴가철이 시작되는 7월. 해외로 떠난다면 숙소, 관광지, 맛집 등과 더불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한 곳쯤은 다녀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전시된 작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유럽 곳곳 미술관, 박물관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정보를 친절하게 담아낸 여행안내서 ‘유럽 미술관 박물관 여행’을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유럽 미술관 박물관 여행’ 김지선 저
자료 제공 낭만판다
요약 정보 활용해 여행 스케줄 짜기
미술관, 박물관 소개의 첫 페이지에는 외관 사진과 함께 주소, 교통, 운영시간, 휴일, 요금, 웹사이트 등을 요약해 보여준다. 교통 정보는 인근 역에서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까지 상세히 적혀 있어 여행 일정을 짜는 데 유용하다. 바로 옆 페이지에서는 내·외관 사진들과 더불어 공간의 역사와 전시품 정보, 건축의 특별함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또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한 관람 팁도 알차게 담겨 있다.
관람지도로 관람 동선 파악하기
‘오르세 미술관은 5층부터 둘러보는 게 좋다’, ‘루브르 박물관의 어디부터 관람해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쉴리관으로 먼저 입장하라’ 등 관람 순서를 안내하는 ‘효율적으로 돌아보기’ 코너가 마련돼 있다. 건물의 층마다 대표 작품의 위치를 표시하고 계단, 화장실, 안내소, 식당 등을 표시한 ‘관람 지도’도 제공한다. 여행 가기 전 지도를 보고 미리 동선과 주요 작품 위치를 파악해두면 실제 방문했을 때 덜 헤맬 수 있을 것이다. ‘전시관별 살펴보기’, ‘오디오 가이드 대여하기’, ‘뮤지엄 패스 사용하기’ 등 상세 정보도 빼놓지 않았다.
주요 전시품 예습하기
각 미술관과 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품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눈으로 익힌 뒤 실제 작품을 마주하면 그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책에는 주요 작품의 이미지와 함께 제작 연도, 크기, 전시관 내 위치, 역사 및 특징들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아직 어느 곳을 관람할지 정하지 못했다면, 여행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품 정보를 먼저 훑어보고 관심이 가거나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 곳을 골라 가도 괜찮겠다. 전시 작품들 외에 인근 성당이나 공원, 궁전 등 함께 둘러볼 만한 곳도 함께 소개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01
‘세계 3대 박물관을 둘러보는 10박 12일 알찬 여행’, ‘인상파 화가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10박 12일 프로방스 여행’, ‘르네상스 대가들을 찾아가는 9박 11일 여행’, ‘미술관 박물관과 함께 30일 유럽 여행’ 등을 통해 미술관, 박물관 정보와 전시품 소개는 물론 테마별 추천 루트까지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머무르게 될 도시와 여행 계획, 이동 방법, 숙박 도시 등을 하나의 표로 정리했다. 여행 일정 짜기가 막막하다면 저자의 제안 루트를 토대로 조금씩 취향에 따라 맞춰가는 것도 좋겠다.
plus 02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다빈치 코드’(2006)는 프랑스 최대의 박물관인 ‘루브르 박물관’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하버드대학 기호학자 교수로 등장하는 톰 행크스(랭던 역)는 의문의 사건이 남긴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 등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속에 숨겨진 비밀들을 파헤친다. 영화 속 수수께끼를 풀듯 암호를 맞춰가며 루브르 박물관 곳곳과 작품들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plus 03
프랑스 남부 니스의 ‘샤갈 미술관’에는 450여 점의 예술품이 전시돼 있는데, 마르크 샤갈의 종교 작품만을 전시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당장 프랑스로 떠날 수는 없지만,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를 통해 샤갈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자. 국내에서 개최된 샤갈의 전시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마르크 샤갈 특별전-영혼의 정원 展’이 8월 18일까지 M컨템포러리(르 메르디앙 서울)에서 열린다.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4개국의 개인 소장자 작품 중 국내 최초 공개작 25점을 포함, 샤갈의 예술사를 총망라한 26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나의 운명을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인생이 편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에게 자신의 운명을 점지 받았다. 무녀가 아폴론 신을 대신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것은 그 시대의 역대 왕들은 물론 소크라테스 등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델포이 마을에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파르나소스 바위산과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첩첩 산골마을 델포이.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주민들은 떠나는 여행객의 옷깃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2500여 년 동안 델포이를 지킨 유적지
델포이(오늘날은 델피로 불린다)는 BC 8~6세기 무렵만 해도 아테네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길을 묻지 않아도 “뭘 도와줄까?” 하고 말 걸어오는 정겨운 사람들이 있다. 델포이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돌아다니면 된다. 델포이 마을 주변에는 2500여 년 전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유적지는 크게 두 군데로 나뉜다. 산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은 신성 지역이고 아래쪽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이 자리한다. 마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신성 지역이다.
우선 입구에서 박물관도 함께 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구입한 뒤 고대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적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종교 용품과 생활 용품을 거래했던 아고라(시장), ‘블레우테리온’이라 불리던 델포이 의사당, 여러 도시 국가에서 보내온 보물을 보관해놓았던 보물창고 등 흥미로운 유적들이 부서진 채로 흩어져 있다.
옴파로스에 앉은 여 사제
아폴론 신전 앞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이라는 돌이 있다. 이 돌 밑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독수리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들이 다시 만난 곳이 델포이의 파르나소스 산(Parnassos, 2457m) 정상이었다. 제우스는 아들 아폴론을 이곳에 머물게 했다. 아폴론은 파르나소스 산의 코리시안 동굴에 살던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죽이고 신탁소(神託所, oracle, 신이 여 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일)를 열었다.
아폴론 신이 사는 곳이라 알려지면서 델포이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당시 델포이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했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을 정갈하게 한 뒤 듣고 싶은 내용을 남자 사제에게 말하면 남자 사제가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피티아는 그 내용을 아폴론 신에게 전달해 답을 받아 다시 전달했다. 신탁비로 펠리노스라 불리는 세금을 받았고, 제단에 동물을 바치도록 했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 리디아의 크리소스 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해서 진 이야기와 소크라테스가 무녀의 말을 듣고 탐구의 길을 떠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번성하던 신탁소도 서서히 쇠퇴했다.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문득 생각해본다. 현실에서 신이 미래를 점지해준다면 삶의 갈등이 줄어들까?
델포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
아폴론 신전을 지나 보물창고를 거쳐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델포이 극장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넓은 원형 극장과 부서진 유적들 밑으로 시야가 확 트여 눈이 시원하다. 뒤로는 파르나소스 암산이 턱 버티고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밑으로는 울울창창 올리브 나무가 경사진 터를 장악한 풍경이다. 골이 깊어 마치 강이 흐르는 듯한 전경도 장관이다.
극장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이동하면 온통 침엽수로 둘러싸인 곳에 경기장이 있다. 델포이 제전이 개최되던 경기장이다. 바위를 깎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경기장은 길이가 200m, 폭은 50m에 달한다. 델포이 제전은 아폴론이 구렁이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BC 8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AD 582년부터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다. 델포이 제전의 흔적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지로 남아 있다. 김나지움은 그리스어로 ‘운동하는 곳’이고 마르마리아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성역이다. 델포이 신탁소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으로, 부서진 아테네 신전과 BC 4세기경에 지어진 원형 건축물인 ‘톨로스’ 등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특히 톨로스는 현재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적으로, 그리스를 소개하는 포스터와 책자에 자주 등장한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노천 유적지를 다 보고 나면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1902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델포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내부 전시관은 기원전으로 시대가 돌아가 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눈여겨볼 것으로는 아르카이크 시대에 만들어진 은판으로 된 황금머리 황소, 낙소스 인의 작품인 스핑크스, 대지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 무희의 기둥 등이다. 또 마을 안쪽 끝으로 올라가면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1884~1951)와 에바 팔머(1874~1952)의 축제 박물관이 있다. 이들은 1927년, 델포이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을 기획했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극단이 모여 벌인 연극 축제였다. 현재도 7~8월의 휴가철이 되면 음악과 고대 드라마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Travel Data
항공편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가면 된다.
현지 교통 아테네 리오시온(Liossion) 버스터미널에서 델포이로 가는 버스가 1일 2~3회 운행된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맛집 정보 고급 식당보다는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인기다. 카페에서도 피자는 물론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대부분의 숙소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조식이 제공된다. 카스탈리아 부티크 호텔, 레토 호텔, 이니오호스 호텔이 상위 순위에 있다. 대부분 4~5만 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날씨 정보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지닌 나라다. 6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평균기온은 25℃ 이상. 7월은 30℃를 웃돈다. 델포이는 첩첩산중이지만 부서진 유적지는 나무가 없는 노천이라서 뜨겁다. 여름옷은 물론 파라솔, 모자는 필수다. 고온이긴 해도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는 거의 없는 편.
물가와 화폐 정보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유로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델포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번잡스럽게 움직일 필요 없이 천천히 즐기면 된다.
5월에 계속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갔다. 예정에 전혀 없던 춘천행이었다. 사실은 이날 여럿이 모여 야외운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에 세찬 비가 내리자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주 전에 한 약속이라 아쉬웠다. 그렇다고 날씨 탓만 하며 그냥 집에 있기에는 새벽부터 서두른 시간이 아까웠다. 다른 계획이라도 세워야 했다.
일단 운동 도구를 빼놓고 카메라와 가방을 들고 나섰다. 걸으며 순간 생각난 곳이 바로 김유정을 만날 수 있는 실레마을이다. 그곳은 몇 번 가봤기에 두렵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디를 가든 그곳을 빠짐없이 살펴보려면 여럿보다는 혼자가 훨씬 도움이 된다. 그전에 두 번이나 갔지만, 일행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깊이 있게 반복해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대중교통으로는 처음이었지만, 안내판이 잘 되어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 12월 1일 김유정역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사람 이름을 사용한 역이다. 걸어가며 보니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보이는 모든 곳이 김유정에 관한 지역이었다. 상점이나 식당이나 온통 김유정 작품의 제목을 따서 점순네 닭갈비, 중화요리 만무방, 봄봄 닭갈비, 카페 산골나그네 등이다. 마치 마을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느낌이라 새로웠다.
비록 날씨는 언짢았지만, 그가 나고 자란 생가와 ‘김유정기념전시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천재작가의 안타까운 생애와 작품에 관한 것에 대해 샅샅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여러 작품의 산실이었던 실레마을로 향했다.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걷는 기분을 아마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봄봄’의 점순이가 된 듯 설레기도 하면서도 김유정의 허망한 생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한국 문학사에 토속적인 언어와 자신의 고향을 바탕으로 길지 않았던 작품 활동 기간에 금쪽보다 더 귀한 작품들을 남긴 그를 떠올리며 마음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김유정, 실레마을 곳곳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다
실레마을, 김유정 작가의 고향이며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들이 허구가 아닌 실제했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봄봄’의 점순 아버지 봉필영감이 마을 가운데 잣나무 숲에서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주인공 나(머슴)와 점순이의 혼인 약속은 지키지 않으며 일만 부려먹던 봉필영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백꽃’의 배경은 금병산자락 아래 잣나무 숲 뒤쪽이다. 기념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세운 ‘금병의숙’ 터가 있다. 움막을 짓고 마을 아이들에게 열정을 다해 야학을 가르친 곳이었다. 그 옆에는 김유정이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도 있다. 마을지도를 보니 유정이 술을 마시던 주막 한들의 팔미천에는 ‘산골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 자리가 있다.
이와 같이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 12편이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 등 인물들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29세 짧은 생 동안 자신의 고향을 통틀어 작품 속에 등장시킨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참 행복한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은 1936년 잡지 ‘조광’ 5월호에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를 기고했다.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제주도는 근세에 70주년인 4·3사건이 발생했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넘어서 밀려왔다. 1271년. 그날 하늘은 파랗고 땅은 붉었다. 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1273년 4월’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 가면 토성 옆 쉼터 움막 안에 쓰여 있는 누군가의 글이 가슴을 쓰리게 한다. 이곳은 13세기 말엽(1271~1273) 유럽과 아시아 등 대부분 나라를 세계최강의 세력으로 말발굽 아래 굴복시켰던 몽골(원)의 침략에도 끝까지 항거한 고려무인의 정서가 서린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원나라는 고려를 고종 18년(1231)부터 30년간 7차례에 걸쳐 침략했는데, 강화도 천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겪었던 고초는 참혹했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발원하여 77년 만에 완성됐는데, 이는 거란의 침략을 부처님의 원력으로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몽골은 부인사에 보관된 초조대장경을 고종 19년(1232) 침략해 불태워 버렸다. 다시 몽골과 항전이라는 호국의 의지를 담아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을 제작한 것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강화 항전에 세계 최강 몽골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고려와 화의하고 철군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개성 환도파들의 강행에 무신파 중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 장군들이 대 항몽전에 나섰다.
이들은 원-고 연합군에 항전하다 진도로 밀려나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하였으나, 몽골 세력에 의해 원종 12년(1271) 진도가 함락됐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였다.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로 탐라(제주)에 들어와 바다 탐지에 전망과 방어 입지 조건이 좋은 항파두리에 토성으로 내외성과 바닷가에 환해장성을 쌓아 항몽전에 나섰다. 원종 14년(1273) 1만2000여 명에 달하는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항파두성이 함락됐다. 김통정 장군이 붉은오름으로 퇴각하다 자결하며 삼별초 군사들은 전원 순의하였고 40여 년 몽골 침략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후 고려와 별개의 몽골 직할지로 탐라도(총관부)라는 명칭이 생겼다. 일본과 남송을 침략 전진기지로 함선건조, 목마장(조랑말이 몽골의 말) 등을 조성하며 각종 착취로 탐라도민은 노예와 같은 고초와 억압을 받았다.
공민왕 23년(1374) 최영 장군이 탐라국을 완전 토벌까지 100여 년을 비참하게 살았다. 진도와 제주로 밀리며 대적했던 고려 군대는 고려무신 최우가 만든 삼별초를 주축으로 대항몽전이 이루어졌으나, 고려인의 기상이 제주에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제주문화는 몽골의 문화가 많은데 몽골의 초원을 달리던 제주조랑말, 오메기떡, 빙떡, 말똥 연료 등이 그 잔재라는 것을 근래에 알게 되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항몽유적지에 ‘항몽순의비’를 세워 보존이 시작되었으며 1997년 사적 396로 지정됐다.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문화재청에서 발굴 사업을 하는 중이다. 발굴된 일부 유적을 보관 전시하는 유적전시관도 만들었으며 발굴은 고증을 찾아 점차 진행하고 있다.
700여 년 전 세계 최강의 몽골(원)과 맞서 싸운 고려인의 드높은 기상이 제주까지 이어졌던 사실을 현재 역사의 뒤안길에서나마 후손들에게 전하여 국가의 힘과 호국의 결의인 대항몽전을 통해 알려야 한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토성에 대해 장점 등을 찾아보며 발굴된 유적과 발굴 중인 현장도 가봐야겠다.
‘그들은 무신정권의 버팀목이었고 역사의 승자에게는 반역의 무리였다. 그들은 새로운 고려를 꿈꾸기도 했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감한 군대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란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야만 했던 고려의 백성이었다.’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봄꽃에 설레어 마음에도 꽃물 번진다. 처처에 흐드러진 벚꽃은 절정을 넘어섰다. 꽃잎마다 흩어져 비처럼 내린다. 만개보다 황홀하게 아롱지는, 저 눈부신 낙화! 남도의 끝자락 완도 땅으로 내려가는 내내 벚나무 꽃비에 가슴이 아렸다.
한나절을 달려 내려간 길 끝엔 완도수목원. 칠칠한 나무들, 울울한 숲이 여기에 있다. 사철 푸른 야생의 수해(樹海)다. 천연의 상록 난대림이 산자락을 뒤덮었다.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완도호랑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녹나무 등 770여 종의 난대성 목·초본과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환호할 만한 종 다양성과 놀랄 만한 광활한 규모를 과시하며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는 삼림이다.
산길로 들어서 초록 숲에 풍덩 빠진다. 숲길을 노니는 발걸음은 노루처럼 가뿐하다. 잡다한 소음과 미세먼지가 들끓는 도시에서의 보행과는 다르다. 인위와 허영이 난무하는 도회의 거리는 개운한 활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뇌에 사로잡힌 카프카처럼 도시에서 사람들은 흔히 소심한 행보를 하지 않던가. 숲에서는 다르다. 깊은 근원으로 침잠한 숲 사이로 뻗은 오솔길이 발길을 보듬어 유유한 지경으로 인도한다. 숲길을 걷기란 그래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탈출처럼 자유롭다.
이럴 때 의식은 자명종처럼 깨어나고 오감이 열린다.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숲의 언어에 귀가 민감해진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숲속의 공인된 가수인 산새들의 악곡이 귓속으로 스민다. 이것들은 숲과의 협연의 산물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순간적으로 숲의 식솔이 된다. 물속 같은 적막이나 사무치는 고요마저 숲의 언어다. 이 묵묵한 숲의 좌정 앞에서 번잡한 혀처럼 날름거리던 욕망이 비로소 순해진다. 숲길을 가만히 걷는 일은 그래서 오롯한 순례다. 내밀하게 전개되는, 조촐하되 순수한 향연이다.
완도수목원의 무진장한 상록 숲은 한때 황무지에 가까웠다.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벌과 도벌로 헐벗기어 황량했다. 재질이 조밀해 숯 재료로 널리 알려졌던 붉가시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은 한결 자심한 수난을 당했다. 수목원 곳곳에 발달한 ‘맹아림(萌芽林)’은 당시의 벌채가 남긴 상흔이자 재생의 현장이다. 맹아림?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서 새로 돋은 움싹들이 자라난, 여럿의 줄기로 이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한다. 생존의 고역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무와 숲도 때로 부당하게 찢기고 스러진다만, 불굴의 인간처럼 용을 써 기어이 회생한다.
숲길에 상큼한 향이 감돈다.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향기렷다. 피톤치드는 갖가지 균(菌)들의 내침으로 야기된 상처나 고난을 다스리기 위해 나무가 분비하는 휘발성 물질이다. 아픈 나무가 풍기는 향기, 우리는 그 피톤치드를 마시고 심신을 치유한다. 사람이 나무의 숨을 마시고, 나무가 사람의 숨을 마셔 서로 재미를 본다면 그건 공정거래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음에도 마냥 태연한 게 숲의 천성이다. 나무도 숲도, 사람과 멀면 멀수록 안전하고 온전하다. 사람의 속세는 아수라장. 나무들의 마을, 숲 안의 생명들만 격의 없이 어울려 자애롭다.
근원을 헤아리자면 나무와 사람은 다를 게 없다. 나무의 몸에 흐르는 수액과 사람의 혈관을 달리는 피가 서로 무엇으로 다르단 말인가. 나무를 남으로 알았던 시절엔 꽃이 피건, 무참히 낙엽 지건, 폭설에 가지가 우두둑 부러지건, 사시사철 보기에 좋았다. 나무가 남이 아님을 알고 난 뒤로는 꽃 피우는 진통에, 낙엽 떨구는 우수에, 겨울나기의 고역에 한결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무들의 도가니를, 숲길을,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행위란, 그렇기에 가상한 명상이자 성찰에 가깝다.
완도 앞바다를 건너온 바람일까. 하오의 숲은 세찬 바람을 품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등을 미는 바람 따라 들어선 ‘푸른 까끔길’은 어둑한 숲길이다. 기차게 무성한 동백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서. 태초 이전처럼 심원한 적막에 휩싸인 동백 숲은 그러나 밝다. 순결한 몸을 붉게 연 동백꽃들이 초롱처럼 환해서다. 매달린 꽃도, 통째 떨어져 뒹구는 꽃도 성(聖)의 이미지로 다가와 내 안의 진흙탕을 헹군다. 향화(香火) 아니면 촛불 보살이다, 저 4월의 동백꽃!
탐방 Tip
완도수목원은 2000여 ha(약 600만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난대림 자생지로 공립수목원이다. 숲길의 총길이는 약 94km. 한나절을 머물며 숲길 걷기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산림전시관, 아열대온실, 방향식물원, 수생식물원 탐방도 즐겁다. 개원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홍성열(洪性烈·63) 마리오아울렛 회장의 삶을 들여다보면 도전과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토종 브랜드 론칭, 초대형 패션 아울렛 도입 등등 돈도 지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게 되겠어?”라는 주변의 비웃음까지 들어야 했던 그의 선택과 도전들은 모두 커다란 성공이 되어 보답으로 돌아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요즘 마리오아울렛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과 함께 경기도 연천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마리오허브빌리지 경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의 인생과 준비 중인 또 다른 선택에 대해 들어봤다.
“밖에 나오면 좋죠. 회사 안에 있으면 머리가 아파.(웃음)”
농담을 건네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에는 자수성가하여 산업의 지형까지 바꾼 사람다운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 마리오아울렛은 평일 10만 명 이상, 주말에는 20만 명 이상의 고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온라인 몰을 론칭하여 1년 만에 11만 명의 회원 수를 보유할 정도로 꾸준한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이 모든 시작은 형제들의 돈을 긁어모아 마련한 사업자금 200만 원이었다.
“홍성열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홍 회장이 200만 원을 들고 패션 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40여 년 전 이야기다. 당시 우리나라의 의류 생산 산업은 호황기를 거쳐가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의류 업체들은 외국 바이어들의 지시에 따라 하청받은 제품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홍 회장은 단순한 노동력 제공과 지시 답습이 아닌 토종 브랜드가 필요함을 직감했고, 고민과 연구 끝에 1985년에 패션 브랜드 까르뜨니트를 출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까르뜨니트는 한국 최초로 일본 게이오백화점에 입점하는 성과와 함께 한국 제품이라면 싸구려라고 홀대하던 일본 바이어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에서 출시한 비디오 게임 ‘슈퍼 마리오’가 게임의 역사를 바꾸며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일본 바이어들은 홍 회장에게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마리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바이어들 사이에서 “홍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마리오 제품을 수입하면 다 팔린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기 때문이다. 홍 회장은 신뢰와 책임으로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켰다.
한 사람의 도전이 거대 아울렛 타운을 만들다
1997년부터 시작된 IMF 체제는 국가의 산업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1차, 2차산업을 주로 맡던 공장들이 문을 닫자 수많은 인력들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구로공단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폐쇄된 공장들이 싼값에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런 국가적 위기 앞에서 홍 회장의 과감한 기획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주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넓은 공장 부지를 싸게 매입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울렛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 자신의 별명을 붙여 도심형 정통 패션 아울렛인 마리오아울렛을 세웠다. 2001년의 일이었다.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렴한 상품을 주로 찾게 될 것이며, 그러한 소비 성향과 판매가 사이의 이격 현상 때문에 재고가 쌓이게 된 회사들은 재고 처리가 급박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산업의 순리다. IMF 같은 대형 외환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홍 회장을 비웃었지만, 그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산업의 순리를 따라 마리오아울렛을 통해 그 판을 커다랗게 깔아준 셈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손님이 몰렸고, 3년 만인 2004년에 2관을 열고 이어서 3관까지 개장했다. 이후 대기업들이 대형 아울렛을 주변에 개점함으로써 과거의 공단지대는 연매출 1조 원가량의 돈이 움직이는 거대 아울렛 타운으로 재편됐다. 한 사람의 의지가 지역 산업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꾼 사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 거절, 서비스와 가치를 높인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마리오아울렛은 신규 출점에 대한 많은 제안을 받고 있다. 지방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쪽에서도 제안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회장은 모두 거절하고 가산의 마리오아울렛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통해 가산의 구심점이 되는 동시에 자체 브랜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7년 8월부터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이름은 ‘가산디지털단지(마리오아울렛)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역명 병기 사업은 명칭의 인지도와 이용 편의 증진 가능성을 심의하여 엄격하게 선정되는데, 이 결과는 마리오아울렛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는 인정이기도 하다.
마리오아울렛은 또한 무분별한 확장을 배척하는 대신 서비스와 가치를 높여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홍 회장은 일찌감치 대기업들이 무분별한 확장 전략으로 중소기업들이 이뤄놓은 터전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말한 바 있고, 마리오아울렛 또한 그러한 전략을 배제함으로써 그 말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마리오아울렛이 ‘한 우물만 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울렛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홈페이지와 앱을 제공하는 것부터가 새로운 도전을 증명한다. 그리고 상당수 아울렛이 이미 준테마파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처럼 마리오아울렛 또한 다양한 즐기는 공간들을 통해 유통과 소비공간으로서의 성격만을 가지는 것에서 탈피한 지 오래다. 서비스적인 면에서 보면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증가하고 있는 해외 고객들을 위해 다국어 쇼핑 가이드, 외국어 안내 서비스, 자국통화결제서비스 등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경영학회 최우수 경영 대상, 올해의 브랜드 대상, 국무총리 표창, 한국유통대상 대통령상 등 경영 분야의 수많은 수상 실적들로 드러났다.
‘자연이 만든 천당’이 허브빌리지의 목표
“우리나라는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야단맞아요. 그래서 뭔가를 하기가 겁나죠.”
홍 회장의 말이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마리오아울렛만 하더라도 공장지대에 유통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정부 규제와 계속 줄다리기를 하면서 완성시켰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최근에 언론에 오르내리게 된 일들도 그렇다.
그는 201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씨가 소유한 경기도 연천의 허브빌리지를 매입했다. 2017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기 사흘 전에 매입했다. 사람들에게 화제와 함께 의혹을 불러일으킨 이 두 번의 거래에 대해 그는 소위 ‘로열패밀리’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음모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는 오래전부터 강남의 주택으로 이사를 가려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의 주택이 급매로 괜찮은 가격에 나와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20년 전부터 개인농장을 운영해오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허브빌리지는 도시농업과 정원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업 투자 목적으로 인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경영 방식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디자인 불모지에서 과감하게 토종 디자인 브랜드를 론칭하고 문 닫은 공장들이 즐비했던 황무지에 아울렛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가져와 성공시킨 그다. “경영이란 남들이 건드리지 않는 열쇠를 통해 얻어내는 최선의 효과”라는 공식은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허브빌리지의 경우를 보면, 네 번의 유찰을 통해 최초 감정가 250억 원에서 지속적인 하락이 이뤄져 홍 회장은 118억 원이라는 저가에 인수할 수 있었다. 현재 허브빌리지는 홍 회장이 야심차게 진행하는 본격적인 사업 구상 아래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허브빌리지는 동산이다, 건축이다’를 넘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운영하고 있어요. 돈을 보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허브빌리지는 자연이 만든 천당이 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천당을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천당이라고 느낄 만큼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합니다.(웃음)”
경영인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
이처럼 원칙과 정도를 걷는 홍 회장에게 어릴 적 꿈에 대해 묻자 비밀이라고 말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대답이 나왔다.
“아티스트였죠. 패션 디자이너.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패션 쪽이 제 적성에 맞았어요. 주변에 그런 일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제 직업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렵게 나와야 했단 말인가? 의아했다. 아무튼 그가 가졌던 크리에이터로서의 꿈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패션 전시관을 만들려고 기획하고 있다.
“선두에 있다는 건 힘들죠. 그래도 나이 들어서는 젊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곡과 와전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최근의 논란들에 대해서 그는 어느 정도 해탈한 듯하다. 그는 과거 인터뷰들에서도 오랜 기간 사업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헤쳐 나가게 해준 것은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저에 대한 오해도 많고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저런 과정에서 많이 걸러져요. 저를 믿는 사람은 꾸준히 저를 지지해주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대한 그에게 미래 계획을 물었다.
“브랜드를 키워서 국격을 높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어린 시절 꿈이 아티스트였다는 것이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마리오아울렛을 타 지역에 확장하지 않은 채 가산의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 그리고 허브빌리지를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닌 작품으로 생각하고 경영한다는 것, 모두 자신이 만든 창작품을 소중히 다루며 그 가치를 독보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예술가의 자세와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모든 시도는 브랜드 가치로 연결되고 있다. 또 길은 그 앞에 활짝 열렸다.
무모한 도전을 성공으로 연결시킨 남자. 홍성열 회장은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예술로서의 경영이 아닐까. 서두르는 것 같지만 하나의 뚝심을 갖고 경영을 펼쳐나가는 그의 미래가 계속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