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세, 교사로서의 35년 삶을 뒤로하고 명예퇴직 후 시작한 택시 운전. 아내와의 유럽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속쓰림과 몇 번의 토악질 끝에 찾은 응급실에서 시작된 투병생활.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2년간 사투를 벌이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배의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오늘 예약한 외래 진료를 기다리며 진통제를 몇 번이나 먹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항암치료는 권해드릴 수 없다며 호스피스 입원에 필요한 진단서를 써준 의사는 외래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 끝내 제 눈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정된 시간까지 이 고통을 견디는 일만 남은 걸까요? 차라리 그날이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힘들게 견뎌온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주치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스피스 입원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혹은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라고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의 명시적인 말기 진단 이전에 이미 자신의 병이 악화돼가고 있음을 눈치 채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 가족들은 인터넷에서 말기 암 환자를 완치시켰다는 ‘OO주사, OO약침, OOO추출물’ 등에 대한 경험담을 보고 매달립니다. “호스피스 알아볼까?”라는 말은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아 입안에서만 머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지 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밤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물론 낮에도 통증이 끊임없이 몸을 웅크리게 했지만 특히 밤에 통증이 심해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는 저를 위해 며칠째 밤을 새운 아내도 연신 두통약을 삼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그렇게 망설이던 호스피스 병동 입원을 선택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첫인상은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의외로 병실 복도를 오가며 운동을 하는 환자도 있었고, 다리를 마사지해주는 봉사자들과의 대화 속에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여 나오곤 하더군요. 저는 아주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로 숨쉬기 답답한 병실을 예상했거든요. 입원하자마자 담당의사는 통증에 대해 이것저것 한참을 물었습니다. 바로 주사를 한 대 맞았고 수액병이 걸리자 10여 분 후부터 정말 놀라운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통증이 약간의 불편함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통증이 사라지자 정말이지 제가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적극적인 통증 조절을 통해 환자가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암 환자의 통증은 소위 ‘총체적 통증’(total pain)이라고 불리듯 신체적 문제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환자가 겪는 우울, 불안, 분노, 두려움 등의 심리적 문제는 약물 치료와 함께 지지적 상담을 통해 돕다 보면 완화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지 이제 3주가 지났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물만 마셔도 구토를 해 얼음을 입에 녹여 갈증만 줄이고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입마름 때문에 종종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영양제를 맞아서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주선해 요법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습니다. 올가을에 아들과 결혼 예정인 예비 며느리도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말렸지만 고집을 좀 피워 제 영정사진도 부탁해 찍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수고를 하나 줄여준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입니다. 미용 봉사를 받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두길 잘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임종을 앞둔 마지막 몇 주의 시간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귀중할 것입니다. 호스피스 팀은 이 기간이 환자와 가족들이 사랑을 확인하고 혹은 갈등을 치유하는 금쪽같은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생전 장례식’, ‘자서전 출판기념식’, ‘미술 전시회’, ‘미니 결혼식’, ‘가족사진 촬영’, ‘가족음악회’, ‘가족여행’ 등등 다양한 이벤트가 오로지 ‘한 가족’만을 위해 준비됩니다. 종종 이런 시간들은 환자 사후에 가족들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임종 과정의 환자를 위한 별도의 ‘임종실’(1인실)이 운영됩니다. 호스피스 팀은 임종 과정이 온전히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임종기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 불필요한 두려움과 오해가 생기지 않게 돕습니다. 또한 처음 경험할 수도 있는 장례 과정 등 사후 절차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돌봄은 환자가 병동에 머무는 시간뿐 아니라 사후 사별가족들에 대한 지지와 상담 등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은 체계적인 사별가족 프로그램 및 고위험 사별가족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자연과 친화 관계 맺기에 성공한 건축을 만나는 즐거움의 반향이다. 자연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미술관을 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이응노의 집’으로 고고싱!
‘이응노의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이응노는 생의 후반을 줄곧 파리에서 살았으나 고향을 못내 못 잊어했다. “나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외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고향 땅이 그리워 자랑처럼 흔히 홍성을 얘기했다. 그리운 게 고향의 산천뿐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의 순수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게다. 고향이란 인간의 욕망이 회항하는 귀소(歸巢)다. 영혼마저 한 자락 실린 고감도의 어떤 차원이다.
한국을 넘어 유럽으로 창작활동의 범주를 확장했던 거목 이응노. 그의 창작력은 한 번 터져 멈출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격렬했다. 미술의 온갖 장르를 편력하며 쏟아 부은 다재다능은 또 어떻고? 이 걸출한 화가는 미술에 목숨을 걸어 얻을 걸 다 얻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응노의 집’을 건립할 때 눈총들이 쏟아졌다. 싫어하는 소리들과 반대하는 입장들이 분분했다. 이응노라 하면 ‘동백림 사건’부터 떠올리며 ‘불온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에 의해 왜곡된 혐의는 벗겨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2년 6개월간의 옥고로 갚았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여파.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불편해하는 눈들이 있었다. ‘이응노의 집’은 이 일각의 소음과 맞선 단호한 결행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는 홍성군 당국. 그들은 2011년, 마침내 ‘이응노의 집’을 개관해 지자체가 멀뚱히 앉아 한심하게도 펜대만 굴리는 ‘철밥통’ 집단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고개 숙이고 마을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
‘이응노의 집’은 2만6000㎡(약 8000평)의 널찍한 부지에 조성되었다. 991㎡(약 300평)의 미술관을 본동으로 하고 북 카페와 다목적실을 곁에 배치했다. 원래 있었던 지형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한 야외정원은 순박하면서 평온하다.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념처럼 일렁이는 정원의 저 부드러운 곡선들. 돌처럼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은 공간이다. 정원 전면엔 연(蓮)이 자라는 못이 펼쳐진다. 연못과 정원을 거쳐 뒷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산책로 역시 그지없이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 순리를 느끼게 하는 이 모든 유순한 외경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하등의 낯설음을 야기하지 않는 풍경들의 협연. 티 나지 않게 공들인 결과일 게다.
본동 건축을 볼까. 지나치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지어져 소박하다. 위압이나 위세가 없어 얌전하나 은근히 세련돼 당당하다. 그 무엇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지세 성격과 산세 리듬에 조응해 정당하다. 과거부터 터를 잡고 존재해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까지 고려한 수굿한 모습이라 안성맞춤이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마을의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이지 않은가. 이런 구색, 이런 조합이 어디 흔할까보냐. 설계자의 의도가 정밀하게 구현된 걸 느낄 수 있다.
미술관 벽채의 색상을 보자. 황토를 이기고 다져 발랐으니 황토색이다. 굳이 황토를 채택한 건 그게 향토의 빛깔을 뿜어서일 게다. 대지의 살갗 색깔 말이다. 그러나 온통 황토색 일색이면 지루하겠지. 외벽을 분할하며 개입한 흑회색 벽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조용히 생동한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이는 중견 건축가 조성룡. 그는 건축물이 튀거나 돋보이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인위가 자연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일 게다. 사람의 기술이 자연과 풍속을 말처럼 타고앉아서는 무례하다 봐서일 게다.
홍성군청과 설계자는 생가 터만 휑하게 남은 부지에서 이응노의 형적을 찾는 일로부터 사업을 착수했을 것이다. 화가는 이곳에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가는 물론, 뭐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는 상태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생가를 복원했을 테다. 다행히 소년 이응노에게 미술의 싹눈을 틔워준 자연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안도하지 않았을까. 나지막한 산들은 충청도 말씨처럼 느릿느릿 푸근하게 품을 펼친다. 저만치 띄엄띄엄 산재한 농가들의 지붕 위로는 새가 기쁘게 날고 솔바람이 감나무를 흔들며 지나간다. 인근에서 소음을 쏟아내며 물방개처럼 허우적거리는 차량만 아니라면 마냥 예스러울 농촌 풍경이다. 이응노는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했다. 나는 남몰래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외로움을 잊었다.”
찡하지 않은가. 고향 산천은 이응노를 길러 그림에 눈뜨게 했으나, 다만 홀로 외로이 온갖 것에다 끼적거릴 수밖에 없었다지 않은가. 홀로 외로이! 이는 예술을 부양할 수 있는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응노는 고향의 자연과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무신경을 통해, 어차피 홀로 가야 하는 창작의 외길을 견딜 고독의 힘과 강철 같은 인내심을 기른 게 아니었을까. 이응노의 광적인 창작 욕구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다산성(그는 자그마치 3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의 싹은 이미 고향에서 발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이응노의 눈으로 이곳의 평범한 자연을 평범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음을 상기하며.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었던 작가
미술관 내부로 들어선다. 로비를 돌아서자 외부처럼 수수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레와 꾸밈을 한껏 자제해 담박하다. 혹여 전시공간의 장식성이 전시작품으로 향하는 시선들의 집중도를 해할까 염려해 꾸린 의도가 완연하다. 외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공간 자체의 미감까지 과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신중한 고려를 했다. 그럼에도 멋 부린 티 없이 멋스러운 게 있다. 벽과 벽 사이에 설치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 채광이 자아내는 효과가 그렇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 밝음과 어둠의 공존으로 공간에 깊이감과 긴장감을 부여했다.
전시실은 네 개로 구성됐다. 현재 ‘고암 이응노의 사생과 소묘’라는 타이틀의 전람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 작품들은 물론 ‘이응노의 집’의 소장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000여 점에 달하는 이응노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했다. 화가의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기증품이 많지만 홍성군이 직접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작정이라 한다. 군 단위 지자체가 예술품 구입에 적극 나선다? 아마도 드문 일일 게다. 지역 정책에 예술이 가세하고서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 터. 시대를 읽는 홍성군의 촉이 예리하다.
이제 전시회에 나온 그림을 둘러볼까?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응노가 전국을 기행하며 사생한 그림들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습작처럼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들 일색이어서 살짝 아쉽다. 그러나 대가의 노련한 필치와 호방한 운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흔히 이응노가 말년에 그린 ‘군상’ 시리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화풍을 변주하고 전복해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느새 저기까지 갔나 했더니 또 저만치로 내달리는 폭주 열차? 그는 혈관에 팽배한 아드레날린을 주체 못하는 사람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또 그렸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파리에서 동양의 정신을 기저로 한 ‘문자 추상’ 또는 ‘서예적 추상’으로 유럽 화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럽인들은 ‘범신론적 미학’을, ‘주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주술! 작품 이전에 이응노 자신이 이미 주술의 올가미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주술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다.”
이응노의 예술은 만발했다. 그러나 삶엔 그늘이 서려 불운했다. 옥고도 고난이었지만, 이후의 시간들도 밝을 수만은 없었으니. 정치적 파랑에 휩쓸리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야 했으니.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로. ‘이응노의 집’ 허공에 서늘한 바람 한 점 서성이걸랑 고인을 기릴 일이다. 바람이 그의 기척인 양.
‘이응노의 집’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
“그거 아는가? ‘이응노의 집’은 참으로 눈물겹게 지은 기념관이라는 거.”
조성룡 선생의 첫마디에 저릿하다. ‘이응노의 집’ 설계자인 그는 건립 과정상의 곡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물겹게 지었다”는 한마디에 이미 모든 게 들어 있지만, 그는 ‘이응노의 집’이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많은 애환을 거쳐 건립된 공간이라는 걸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이응노의 집’은 손쉽게 지어진 기념관이 아니다. “좌파 화가에게 무슨 기념관이냐? 어림없다!” 홍성군에 의해 기념관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일부 주민들 속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에 홍성군은 ‘이응노의 집’이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북돋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준공 직후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건축물의 모양새가 너무 소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고암 이응노의 담백한 예술정신을 담고자 한 설계자의 진중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던 셈이다.
“홍성은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한 곳이다. 나는 그 ‘켜의 드러내기’를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주안점으로 했나? “고암이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연 환경을 존중해 일을 진행했다. 이곳의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은 물론, 평온한 마을 풍경은 한 소년을 예술로 이끌어준 벗이자 스승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연 경관을 고려해 건축을 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건축물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외부 정원에서도 설계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관람객이 이곳 쌍바위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통행로인 다리와 농로를 거쳐 정원과 만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런 동선을 통해야 고암 선생이 늘 바라보았을 시골 풍경의 정취를 누릴 수 있어서다.”
생가 복원엔 본으로 삼은 자료가 있었나? “어느 시골집을 그린 고암의 풍경화를 참고로 했다. 생가 뒤편에서 울타리를 이룬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되살렸다.”
상업적 의도를 중심에 둔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농촌의 한적한 자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거장의 소장품이 있고, 아울러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이 미술관은 특유의 공간이다. 그 무엇보다 고암의 숨결이 배인 장소라 소중하다. 농촌에 있는 미술관치고는 관람객도 많은 편이다.”
조성룡 선생은 소마미술관과 의재미술관도 설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책 ‘건축과 풍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풍화’의 개념을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기의 영향으로 낡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급적 풍화를 지연시키기, 노화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게 짓기. 이게 나의 목표이자 사상이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정치혁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빠른 속도의 이동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다. 접이식 이젤, 튜브형 물감의 등장으로 밖에 나가서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졌다. 이런 변화들은 빛과 색채의 회화를 도입하려는 세잔,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등장을 촉진했다.
점차 발전되는 경제적 풍요와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그림의 대상도 변했다. ‘자연의 풍경’에서 ‘풍요롭고 여유로운 지금 여기의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1889년 완공되었다. 에펠탑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 발전과 변화는 과학적 광학 이론에 따른 색채 구사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맞춰서 ‘조루즈 쇠라’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한편, 인상주의의 성공을 넘어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갈망을 품은 화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파리를 떠났다. 세잔, 고흐, 고갱이 그들이다.
인상주의의 전성기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시기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획득과 물질문명의 발달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네, 고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어서 회화는 마티스 등 야수파와 피카소 등의 입체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탐욕과 물질의 팽창은 전쟁으로 폭발했다. 이후의 그림은 고통과 비극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가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이 시기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그림들을 모아 ‘프렌치 모던:모네에서 마티스까지’전이 ‘고양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곳으로 그림 감상 여행을 떠났다.
1800년대 중반 대대적인 도시 정비로 파리가 지금의 형태로 재편되는 시기에 파리 근교에 모여 순수한 자연과 농민들의 가치를 그린 화가들이 있었다. 사실주의 화가 밀레, 카미유 코로 등이다. 이들은 신화나 영웅 이야기가 아닌 농촌을 중심으로 눈 앞에 펼쳐진 환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농촌 그림은 인기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쥘 브르퉁’의 농민 그림이 더 인기가 있었다.
전시회에서 내가 첫 번째로 만난 여인도 ‘쥘 브르통’의 ‘양초를 들고 있는 농민 여성’이었다. 대서양에 접하고 있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흑백색 전통 의상을 입은 노파가 양초와 묵주를 든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시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검소하고 소박한 종교적 자세와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화폭에 담겨 있다.
‘쥘 브르통’의 다른 작품으로 감자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 여성을 그린 '귀갓길'도 있다.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감자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1848년 혁명의 영향 때문인지 농촌 노동자들을 영웅화하고 싶어 한 당시 사회의 허구가 반영되어 장밋빛 하늘을 그린 배경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그려진 여인은 농촌에서 일하는 여성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되고 곱다. 그것은 고흐의 말처럼 작업실에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주의의 한계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부는 농부답고, 밭 가는 사람은 밭 가는 사람다워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두 번째 만난 여인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스파르타의 젊은 여인’이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한 그는 가장 좋아하는 모델을 선택해 자신의 시정을 불어넣는 방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작가의 이상적 여성상이었다. 집시 복장 차림의 나른한 자세와 눈길에서 작가의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어서 ‘앙리 팡탱 라투르’의 ‘마담 레옹 마스터’를 만났다. 마네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그림 역시 명암을 깊게 해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한 사실적인 초상화다. 그녀가 입은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와 그 뒤에 감춰진 우울한 분위기가 당시의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이라는 모순된 시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인의 체념한 눈빛은 기본적 욕구와 욕망마저 포기한 무너져버린 생의 의지가 보여 애잔한 아픔의 해일이 밀려왔다.
주최 측의 의도였는지 바로 이어서 애잔한 가슴을 먹먹한 비애로 만든 조각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 신하에 나오는 ‘다나이드 이야기’를 주제로 형벌을 받아 밑바닥이 빠진 항아리에 계속 물을 채워야 하는 ‘다나이스’를 표현한 로댕의 조각 작품이다. 이 ‘다나이드’는 로댕에게 조각적,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제자이자 연인 ‘카미유 클로텔’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 여인을 만난 순간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가냘픈 등줄기와 팔에서 살갗의 온기가 느껴졌다. 벗어나고 싶은 운명을 말하듯 방향을 돌린 얼굴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전하는 절망에 대한 공감 때문에 미술관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슬픔, 고통, 불행이 너무나 아름다운 우아한 선과 볼륨으로 표현되어 여인의 운명을 품앗이 하고 싶다는 깊고 깊은 한숨의 울림이 가슴 속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다나이드’와는 완전히 다른 여인을 만났다. 당시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예술의 번창을 상징하는 여인으로 이탈리아 출신 ‘조반니 볼디니’의 ‘여인의 초상’이다.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작가는 뉴욕의 자선가 ‘플로렌스 블루멘탈’을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검은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역동적인 자세를 순간 포착한 구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옆에 있는 의자에 눈길이 멈췄다. 곡선을 ‘가우디’는 신의 선이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선이 그림 속에 있었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만났다. 마티스의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그린 이 그림에서 그는 모델인 이탈리아 여성 ‘로레토’에게 모로코 전통 의상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 분홍색 천의 의자, 길고 검은 머리카락, 녹색 간두라에서 야수파의 특징인 보색대비가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여인은 ‘드가’의 ‘몸을 닦는 여인’이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실내 빛의 효과와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특성이 나타났다. 드가는 주로 매춘부들을 모델로 고용해 누드화를 그렸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번성했던 당시 매춘업의 실태와 작가의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각이 나타난 현상이다. 그림은 단색의 밑그림으로만 돼 있어 미완성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델의 자세는 작가의 훔쳐보는 시선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노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였던 드가가 가지고 있던 자기모순의 내면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코로나19로 멈춰진 세상. 그러나 4월 초 예술의전당에서는 반짝이는 보석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적지 않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감탄이 배어나왔다. 코로나19를 막으려는 개개인의 긴장감 속에서도 전시품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이 느껴지던 이 자리는 바로 보석 디자이너 김정희의 개인전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어워드에 유일한 한국인 심사위원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내 멜라니아 여사를 위한 브로치를 만들며 국내 최고의 보석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그녀를 만나 작품 세계와 삶에 대해 들어봤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 김정희 보석 디자이너는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 전시기간 내내 자리를 지켰다. 직접 사진 촬영과 편집까지 하며 준비한 전시회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본 그녀는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전시를 치른 소감을 묻자 감동받았다고 대답했다.
“악조건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이 와서 관심을 보여주시더군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제가 희망을 얻었어요. 두 개의 나뭇가지가 결국 한몸이 된 ‘연리지’ 작품을 보면서 상처 입은 나뭇가지가 상처 안은 나뭇가지를 밀어내지 않고 안아주고 보듬어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감상평을 해주셨어요. 저, 너무 행복했어요.”
그녀는 시간을 품은 듯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자연과 사람을 끊임없이 고찰한다. 재료도 일반적인 귀금속에 얽매이지 않고 디자인에 맞춰 자유롭게 선택한다. 18K 핑크골드 가지를 힘차게 뻗게 하니 다이아몬드와 투어멀린 그리고 해수진주로 꽃을 피워 핑크와 블루 사파이어로 물결치듯 열매를 맺게 한다. 여인의 꿈이 진주가 되어 귀걸이로 피어나게 하고, 그리움을 별로 승화해 목걸이를 걸치게 하고, 소나무의 절개를 브로치로 반짝이게 하고, 천년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오로라를 만나 링이 되게 한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예술성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함께 아우르며 영혼까지 투영해야 얻을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멜라니아 여사를 위해 브로치를 만들다
이번 개인전에 나온 170여 점 중 20여 점은 개인 소장품이다. 보석의 오너들은 김정희의 전시 제안에 기꺼이 함께했다.
“저는 작품을 만들 때 스토리를 넣으려 노력해요 보석이 아름다운 건 화려함 속에 개인의 추억과 역사를 담을 수 있어서죠.”
그녀의 작품을 소장한 사람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내인 멜라니아 여사도 있다. 2017년 한미정상회담으로 트럼프 대통령 내외가 방한을 준비하던 시기에,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그녀에게 연락해 작업 의뢰를 했다. 아직 방한 관련 소식은 언론에 보도되기 전이었기에 그녀는 아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누구냐고 물었다. 주한미군 쪽에서 온 대답은 ‘말할 수 없다’였다.
“아무런 내용도 없이 의뢰하신 분이 붉은색(red)을 선호한다는 것이 전부였어요. 받는 분에 대한 정보 없이는 도저히 작업이 안 된다고 하니 며칠이 지난 후 사진을 한 장 보내왔어요.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가 찍힌 사진이더군요. ‘그녀는 붉은색을 좋아한다’라고 딱 한마디 적혀 있더군요.”
그녀의 모든 작업은 스토리텔링으로 시작되는 만큼 용도에 맞게 매듭 형태 하나하나와 실크 컬러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노리개 겸 브로치는 나비매듭을 모티프로 디자인에 착수했고 마침내 주얼리로 탄생했다. 여덟 개의 매듭으로 되어 있는 나비매듭은 장수와 부부의 화합을 상징한다. 또한 나비는 희망을 상징한다.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정상회담인 만큼 화합과 희망을 중요한 메시지로 담았다. 물론, 색은 붉은색이었다. 작품을 전달한 후 그녀는 멜라니아 여사가 굉장히 만족해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비 모양의 주얼리 장신구와 탈부착이 가능한 나비 브로치를 멜라니아 여사에게 선물로 전하면서 대한민국 주얼리 문화외교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계기도 마련했다.
세계 디자인 어워드의 유일한 한국 심사위원
김정희는 사실 국내 보석 디자인 분야의 1세대라고 해도 될 인물이다. 그녀가 처음 이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보석 디자인과 관련한 학술적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할 때도 보석 감정사는 있었지만 보석 디자이너는 없었다. 학교에서 관련된 공부를 한다 해도 장식 오브제나 목공예 정도나 배우던 시절이었다.
“일은 1993년부터 시작했죠. 방학 때 신세계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주얼리를 접했어요. 혼자 나름대로 보석에 대해 공부한 게 있어서 그걸 적용해봤죠. 당시 일당이 보통 만팔천 원이었는데 저는 삼만팔천 원을 받을 정도로 매출을 높였죠. 그게 인연이 돼서 주얼리 업체에 스카우트돼 졸업하기 전에 취업했어요.”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IMF 외환위기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출 파트를 맡아 1위로 올려놓았다. 대단한 커리어우먼이었다.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보석시장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주얼리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를 더하고 싶었어요. 국민대학교 금속공예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같은 학과를 전공한 후 보석을 위한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을 위한 보석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99년에 퇴사하면서 보석디자인연구소를 열었고 2001년에 첫 브랜드를 론칭했어요.”
2001년은 아직 30대이던 시절이었다. 생기발랄하고 의욕이 넘치던 그 시절의 작품들은 추상적으로 자연을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는 비로소 자연을 제대로 형상화해 풀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주얼리 디자인의 세계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워낙 값비싼 재료를 취급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작업을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는 철학이 있는 차별화된 보석 디자인을 추구해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아시아 3대 디자인 어워드 ‘K-DESIGN AWARD’ Winner로 선정된 그녀는 2017년,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어워드 'Italy A'Design Award'에 도전했다. 세계 180개국, 110개의 디자인 카테고리에 6만 5000점이 출품되었다. 이중에서 선택된 1780점의 입상자 작품 중 그녀는 안경·시계·주얼리 카테고리에서 은상을 받았다. 그 당시 175명 전 세계 심사위원 명단에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두 번째도 다시 도전해 은상을 받으며 세계 랭킹 4위에 레전드 디자이너라는 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먹게 됐죠. 다음 목표는 심사위원이 되어야겠다고. 제가 그 길을 개척해보겠다고 소신을 가지고 도전했어요.”
그 다짐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녀는 올해부터 ‘Italy A'Design Award’ 심사위원이 됐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이고 현재 단 한 명인 쾌거다.
작품의 영감이 된 ‘어머니’
김정희 디자이너의 인생에서는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의 삶 전반뿐만 아니라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영향력은 곳곳에 숨어 있다.
“어머니는 누굴 따라가기보다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죠. 제 정신적 지주였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어요. 어머니가 없었으면 영감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2남 2녀의 장녀인 그녀는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면서 작품이 만들어지면 가장 먼저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세상에 없다.
“제 작품 ‘그리움이 향기로 피어나다’의 나무(미선나무 꽃)들은 어머니의 향기를 품고 있고 함께했던 정서가 담겨 있어요. 어머니는 2018년 2월 5일 의료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제 곁을 떠나시기 전날 목욕을 시켜드렸죠. 그때 어머니 손을 계속 잡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녀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어머니와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생명의 나무’ 연작은 어머니를 살려내고자 하는 의지로 만든 작품이다. ‘생명의 나무’의 마지막 작품 ‘하늘에 뿌리를 두다’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는 인간사를 형상화했다. ‘나비 되어 날다’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49일 동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는 매일 꿈에 나왔다. “네가 계속 우니까 내가 떠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49일째 되는 날 산소에 갔는데 햇살도 따뜻하고 아지랑이도 피어올랐고 꽃도 피었더라고요, 그날 진짜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어느 날은 어머니가 늘 앉아 계시던 정원에 앉아 있는데 노랑나비가 와서 제 옆에 앉더군요. 제가 움직이니까 나비가 정원을 날아다녔어요. 저는 나비를 따라다녔죠. 그러다 나비가 사라졌어요. 그러고 나선 꿈에 안 나오시더라고요. 제 ‘나비’ 작품들은 그때 영감을 받고 만들어졌죠.”
장롱 속 잠자는 주얼리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보석 대물림. 그녀가 그 보석들을 새롭게 리폼해 재창조한 ‘Reborn’ 작품들은 시간을 거스르는 특별한 예술품으로 빛나고 있다.
김정희 디자이너는 ‘Reborn’ 작품 의뢰를 받으면 의뢰자의 삶의 철학, 나이, 생활 패턴, 물려받은 동기, 왜 의뢰를 하게 됐는지 등등 희로애락의 모든 걸 듣고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주얼리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위로와 행복, 감동을 줄 수 있는 생활 속의 예술품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디자인 철학입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삶의 깊이가 묻어나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작업할 때는 오로지 그 생각만 해요. 영감을 받아야 하니까요.”
장롱 속에서 잠들어 있던 귀한 패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한 사람만을 위한, 세상에 하나뿐인 주얼리’로 재탄생시키는 일. 혼을 담은 그녀의 손끝으로 빚어낸 주얼리들은 자손들에게 마음의 보물로 간직할 가보로 물려줄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다. 보석 자체의 화려함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디자인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내려는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보석 디자인은 디자인이 주연이며 보석은 디자인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이 다른 보석 디자인과 그녀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보석이 시선을 압도하는 디자인보다는 디자인이 더 돋보이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을 만들 때 그 사람을 담아야 한다는 기준을 지키려면, 그 작업시간이 보통 걸리는 일이 아닐 터. 그러나 그녀는 일만 하며 사는 삶이지만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작품을 떠나보낼 때는 와인을 한 잔 한다. 허전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가장 작품을 많이 만들었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이었어요.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어머니의 그리움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꽃으로 피어나는 작품을 만들었죠.”
보석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조형예술 세계
그러나 주변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스케치만 해놓고 작품을 못 만든 게 많아요. 특히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봉황이죠.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가 열린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생활에 밀착한 조형 예술로서의 보석 디자인이다.
“생활 속 예술로서 감동과 위로, 소통할 수 있는 보석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이미 보석 디자인은 작은 조형예술이에요. 그렇다면 큰 조형예술로도 가능하겠죠. 그래서 완전한 조형예술의 한 분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제 삶이 멈추지 않는 한 항상 꿈을 꾸며 도전할 거예요.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하는 삶은 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녀에게 보석은 희망, 지속되는 꿈이다. 그래서 보석을 볼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빠져든다고 말한다. 그녀가 보석을 통해 만들 더 넓고 다양한 예술세계를 기대해본다.
일명 ‘욜드족’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욜드(Yold)란 ‘Young Old’의 줄임말로 젊은 시니어라는 뜻. 나이로 보면 노년층이지만 몸과 마음이 젊은이들 못지않다는 의미로 생겨난 신조어다. 주로 65~75세 사이의 시니어 세대를 통칭한다.
영국의 정치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2020 세계경제를 전망하는 보고서’에서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만 30세 이상 인구가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수동적인 은퇴생활을 거부하는 젊은 시니어들을 비중 있게 다뤘다. 올해는 욜드 세대가 서비스, 금융 시장을 뒤흔들 것이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욜드족들은 지속적으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하고,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에 참여하는 걸 축복으로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재력까지 뒷받침되는 이 욜드 세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콘퍼런스와 전시회가 점점 많아지고 관광업계, 식품업계, 금융업계는 욜드족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새 판을 짜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트렌드를 모두 소화하는 젊은 시니어들은 이제 뒷방으로 물러난 노인네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키워드가 됐다.
모든 예술가는 '돌+아이'여야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그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돌+아이’ 중의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 전시회를 보러 갔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린다는 로트렉 작품 전시회. 물랑 루즈의 작은 거인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로트렉 전은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5월 3일까지 열린다.
최근 미술계에 정착된 도슨트 해설도 풍성하다. 특히 젊은 관객들을 몰고 다녀 도슨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정우철 도슨트의 해설 시간대에 맞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이 있을 정도이니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작품 감상을 훨씬 풍성하게 할 수 있어 강추!.
전시회를 알차게 보려면 도슨트 해설 시간 전에 넉넉하게 도착해 미리 작품을 한번 훓어 본다. 도슨트 해설시 기본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우철 도슨트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1시간 정도 로트렉의 삶에 대한 스케치를 곁들인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은 한 가지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물랑 루즈의 빨간 풍차를 그린 화가, 난쟁이, 알코올 중독자, 매춘굴에서 살다시피 했던 성 도착자, 로트렉을 떠올릴 때 따라붙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로트렉은 파리 최고의 귀족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한데 이 가문은 재산을 타인에게 나눠주기 싫은 탐욕적인 가문이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간의 결혼으로 가문의 계승자를 돌려막았다. 계속된 근친결혼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뼈가 부서지는 병이 대를 걸러 나타났고 하필이면 로트렉의 아버지 대를 건너 이 병이 로트렉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불운의 귀족 로트렉은 14세 되던 해 넘어지면서 허벅지의 뼈가 부러지게 되고 이후 로트렉은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렸다. 하반신 성장이 멈춘 채 상반신만 성장하는 난쟁이로 어른이 된 로트렉은 백작인 아버지처럼 승마나 사냥 등을 하지 못하고 대신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에서 종일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를 이겨내야 했다.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로트렉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천박한 귀족성에 치를 떨기도 했다는데 그가 그린 삽화 중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는 귀족은 그의 아버지를 빗대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말풍선으로 “천박해, 너무 천박해” 까지 그려 넣은 로트렉은 아버지의 차별과 냉대, 멸시를 받으며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낸 예술가다. 이에 반해 한없이 너그럽고 죄책감을 가진 채, 평생 로트렉을 보살피며 그의 마지막 죽음까지 지켜줬던 어머니는 로트렉에게는 인자한 성모 마리아 그 자체였다.
‘천박한 아버지와 성스러운 어머니’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모에 대한 천착을 넘어 로트렉이 다음으로 천착한 것은 파리 몽마르트르 아랫마을의 유곽을 이룬 매춘부들이었다. 로트렉은 아예 이곳에 방을 얻어 자유스럽게 그들과 교류하며 귀족의 눈에 보기엔 뒤틀렸지만, 사실은 생존의 삶 그 자체인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물랑 루즈에서 춤을 추는 무희거나 노래를 부르는 가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매춘부 등을 그린 작품들이다.
현대 회화의 대가인 피카소가 존경했던 화가, 로트렉
피카소는 그의 작품 ‘푸른 방’에서 로트렉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로 ‘푸른 방’ 작품 속 공간인 벽면에 로트렉의 작품인 메이밀튼 포스터를 그려 넣기도 했다.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라는 후대 예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19세기 후반인 로트렉의 활동시대가 무색할 만큼 현대의 팝 아트 같다. 지금 2000년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올드 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 설명에 의하면 그림 전체를 꽉 채우기보다 사물의 특성을 극대화해 캐치하는 로트렉 특유의 기법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의 이 기법은 현대 회화에 가장 크게 미친 영향이라고 하니 조롱과 멸시, 냉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이룬 로트렉의 정신세계는 현대인 모두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포스터와 삽화 등의 일러스트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열린 로트렉 전시회를 통해 현대 포스터, 그래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트렉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나 스스로 나를 지키고 뭔가를 이뤄내는 일에 대한 자기 단련은 어디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화두를 자신에게 던져본다.
예술의 전당에서 5월 3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며 도슨트 가이드를 통해 관람해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별도 요금 없음).
코로나19 여파로 박물관, 미술관은 물론이고 영화관에도 관객이 없다. 아예 휴관을 한 문화공간들이 많아서 딱히 어딘가를 갈만한 곳도 없다. ‘TV는 내 친구’도 하루 이틀이고 유튜브로 좋아하는 음악이며 동영상 짤 등을 찾아보는 이제 볼만큼 봤다.
‘궁하면 통하는 법’.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이룩한 재빠른 응용력에 5G 인터넷 인프라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문화계에 부는 코로나 19 적응시대의 문화 공유는 기존 오프라인 관람객에 온라인 관람객을 추가하는 쪽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는 오프라인에 온라인 관람을 추가하는 추세지만 앞으로 문화계는 온라인 관람 및 향유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뉴스나 콘텐츠를 신문이나 방송 등으로 소비하던 시대에서 현재는 모두 인터넷 및 SNS 등 온라인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문화적 대변혁의 시대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말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앞으로는 BC가 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orona를 가르치는 단어가 될 것’이라는 칼럼을 실어 전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 역사의 한 기원을 가르는 충격적 문화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한결 같은 학자들의 전망이다.
현재 K 방역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전 세계적인 찬사를 얻고 있는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온라인 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그 동안 온라인 분야가 부수적인 분야로 머물렀던 문화계의 온라인 공유는 음악 공연과 미술 전시회 등 전 분야에서 자리잡고 있어 문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문체부와 문체부 소속 산하기관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한데 모아놓은 문화포털에서는 ‘집콕 문화생활!’이라는 콘셉트로 방구석에서 즐기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 등을 즐길 수 있는 사이트들을 소개해놓았다.
무료로 즐기는 고품격 온라인 공연
◇국립국악원
지난달 17일부터 주중 매일 오전 11시에 국악 한 편!! 이라는 슬로건으로 춘향가, 심청가, 가야금산조, 남도시나위 등의 공연일 계속되고 있다. 지난 공연도 감상할 수 있으므로 언제든 들어가서 즐길 수 있다.
◇국립극단 온라인 상영회
국립극단은 2016년에 공연했던 세익스피어 원작의 ‘실수연발’을 온라인 상영하고 있다. 1시간 55분 공연 전작이 올라와있어 코로나로 방콕하고 있는 연극팬들을 위한 훌륭한 팬 서비스라는 댓글 호응이 뜨겁다.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취소된 현대무용 공연 ‘혼자 추는 춤’ 시리즈의 10개 작품을 무관객 공연으로 제작, 무료 감상할 수 있도록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방구석1열에 딱 알맞은 콘텐츠. 야외 생활이 아무래도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코로나 정국에서 방구석에서라도 따라 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경쾌한 공연이다. 강추!!
◇국립오페라단
‘집콕 오페라 첼린지’라는 이름으로 국립오페라단이 긴급 업로드한 작품은 2019년 10월 상영했던 ‘호프만 이야기는 2시간 41분 공연 전작이 국립오페라단 공식 유튜브 체널에 올라가 있다. 1주일에 1편씩! 보고 싶었던 오페라 전막 감상에 도전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국립오페라단의 집콕 생활 응원 오페라 공연은 평소 접하기 힘든 공연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추천 집콕 생활이다.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은 무용단원이 직접 지도하는 집콕 스트레칭 영상 및 가극단원이 지도하는 배우들의 환절기 기관자 꿀팁 등 ‘스펙TV특별편’을 제작해 실내에서만 생활하고 있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꿀팁을 전수하고 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 손안의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현악 5중주, 바이올린 4중주와 더블베이스, 퍼커션, 플루트 4중주 및 클라리넷 5중주 등 실내악을 중심으로 무관객 공연 생중계를 실시한다. 집에서 답답하게 머무르는 오케스트라 애호가들이라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만한 프로그램. ‘내 손안의 콘서트’ 지난 공연까지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있다.
심심한 손자손녀와 함께 온라인으로 즐기는 문화 콘텐츠
◇어린이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의 어린이박물관에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전시 및 영상이 모여져 있다.
또한 국립민속박물관 산하에도 어린이박물관이 마련돼있어 온라인 놀이 체험 공간이 마련돼있다. 이곳 사이버놀이터에서는 컴퓨터로 민속놀이를 컬러링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민속 놀이를 배우는 코너가 있고 놀이체험마당 코너에는 지도 퍼즐 맞추기, 물건 알아 맞추기, 다른 그림 찾기, 네오 점프, 에어리언 점프, 컬러 점프, 네오 매치 등 어린 자녀 및 손자 손녀와 함께 즐기기에 적합한 교육 사이트다..
◇국립국악원의 e-국악아카데미
국악 애니메이션을 통해 엉덩이가 들썩이고 흥이 절로 나는 국악 교육을 시킬 수 있다. 어린이들이 보다 쉽게 국악을 이해하고 접할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형태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국악 형태의 창작동요 나는야 껌딱지, 꽃마을, 밥도독, 밤밤밤부리, 별님이 가시연꽃에게, 아침소리 등의 창작동요 10곡 이외에도 60여개의 창작동요가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업로드 돼있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한국 전래동화, 외국 전래동화, 창작동화 등의 동영상 동화 456편이 영어 및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태국어 등의 5개국 언어로 자막 처리돼 구비돼있다. 손자손녀와 함께 보며 다국어 동화구연 교육을 통해 언어교육과 동화 교육을 함께 시킬 수 있는 곳이다.
힘내라 대구! 대구미술관
코로나 바이러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00점의 작품을 전시하는 소장전을 컴퓨터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다. 대구미술관은 현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잠정적으로 휴관을 한 상태.
유튜브 박물관이란 말처럼 유튜브 상에 현재 전시하고 있는 전시회를 대구미술관 학예사들의 설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를 반영하는 온라인 미술전시회 감상을 맛볼 소중한 기회.
또한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을 미술관 프로그램에서 구현한 ‘달이 떴다’는 대구시립미술관의 소장품과 광주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는 기획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대구가 힘들 때 가장 먼저 병상을 내어주고 도움을 줬던 도시가 광주였다는 점에서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지만 유튜브 상에서 만나보는 ‘달이 떴다’는 한번쯤 볼만한 온라인 전시가 아닐까 싶다.
이밖에 한국의 신진작가와 중견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당신 속의 마법’이 온라인 전시로 기획돼 업로드 돼있으므로 멀리 대구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 손안 갤러리에서 작품들을 감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국외 미술관 관계자 초청 특강, 대구미술관 실습생 블로그 등 미술관과 관련된 다채로운 콘텐츠들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kfRXhh7ib_bOzUmDNFWghg/featured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어와 영어로 제공되는 큐레이터 라이브 투어가 진행된다. 큐레이터가 미술관을 직접 돌아보며 작품 해설을 하고 있어 말처럼 방구석 1열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전시회 감상 영상이다.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 학예사 전시투어가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가장 최근 전시로는 덕수궁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술관에 書’ 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에 書’ 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하는 한국 근현대 서예전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휴관으로 전시가 불가능해졌다가 이렇게 영상으로 만나게 됐다.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직접 설명하며 한국 근현대 서예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있어 서예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관람객들이 들어와 댓글을 남겨놓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https://youtu.be/Sx1Vr7vNtcw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 과천관에서 열릴 ‘한국 공예 지평의 재구성 5070’ 전시회도 투어 영상과 VR영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좋아하는 멕시코 맥주 코로나가 어쩌다 이렇게 우울한 바이러스로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수입 맥주 보기 힘들었던 때에도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그리고 코로나... 이렇게 수입맥주의 대명사 같던 그런 맥주였는데...
한국 맥주 회사가 만드는 짙은 갈색 맥주병이 아니라 투명한 병에 노란색 빛깔의 맥주.. 지금은 동네 편의점에서도 팔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호텔 바나 전문 클럽에서나 팔던 수입맥주 코로나. 레몬을 잘라서 병 입구에 멋들어지게 꽂아 주던 그 코로나 맥주, 그 브랜드 이름이 지금은 전 세계의 공포와 원흉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코로나 맥주는 멕시코의 대표적 국가 브랜드다. 라임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멕시코 사람들은 레몬 대신 라임 한 조각을 병 입구에 꽂아 쏙 집어넣고 마신다. 미국에서도 멕시코 원조를 따라 코로나에 라임을 넣어 마시는 것이 일반화됐다.
라임을 병 안으로 쏙 집어넣으면 맥주의 노란 빛깔에 연두색 라임이 보글보글 빠지며 라임의 맛이 더해져 시큼하고 알싸해진다. 미국에 있을 때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태평양 바닷가 앞 카페에서 코로나 맥주를 마시곤 했다. 바닷가에서 마시는 코로나 맥주 맛은 언제나 진리이다. 코로나 맥주 한 잔이면 '바로 여기가 파라다이스'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릴렉스 된다. 한마디로 매혹적인 맥주임이 틀림없다. .
코로나 정국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일을 하기 위해 나가는 것 이외에 영화 관람이나 콘서트, 전시회 등의 문화생활도 참고 있다. 아니 공연이 다 취소돼서 딱히 갈 공연들도 없다.
문화생활만 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봄꽃을 보러 야외로 바람을 쐬러 가는 것도 뚝 끊었다. 지난해 벚꽃 만개했을 때 부산이나 광양, 여수, 순천, 보성 등 한국 전역을 돌아다니던 그때 사진을 구글 포토앨범에서 불러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딘가 돌아다니다 괜스레 민폐 끼치면 안 되니 말이다. 지인을 만나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을 하는 것도 서로 부담스럽다. 이 시국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자며 카톡으로 정(?)을 나누고 부대끼는 중이다.
잠깐 참고 집순이(?)로 당분간 살아야지 결심하며 실천하고 있지만 어떨 때는 갑자기 '욱'하고 그분이 올라오신다. 오늘 저녁 같은 경우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은 차츰 땅거미가 내려앉고 사람들은 지하철로 버스로 분주히 오간다.
갑자기 이 황금 같은 금요일에 어딘가 갈 수 있는 형편이 안된다는 사실이 갑자기 온몸으로 체감됐다. 서서히 그 분, '욱'이 올라오셨다. 아무래도 뭔가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할 것 같다. 집 앞 도미노 피자에서 피자 한 판을 주문하고 편의점에서 4캔에 만원인 수입맥주를 골랐다. 하이네켄, 호가든, 블루문과 스텔라 아르투아 4캔. 평소 즐겨 마시던 코로나에는 손도 가지 않았다. 자, 오늘은 피맥이다.
왁자지껄한 펍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자 한 판, 깔아놓고 수입 맥주 골라 마시니 그럭저럭 집순이로 살아온 몇 주간의 스트레스가 조금 날아가는 것 같다. 근 한 달을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코로나 맥주병을 들고 가볍게 병목을 부딪히며 지인들과 건배를 나눴던 그 시간들이 갑자기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역시 사회적 동물인가? 은근 외톨이가 좋다고... 나에게 집중하겠다고 두문불출하던 내가... 타의에 의해, 사회적 환경에 의해 나가 돌아다니기가 꺼려지는 분위기가 되니 갑자기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정말 청개구리다.
멕시코의 대표 맥주 코로나 이야기를 꺼낸 김에 멕시코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미칠라다(Michelada) 이야기도 좀 해야겠다. 흔히 멕시코의 맥주 칵테일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맥주에 이것저것 섞기보다는 맥주를 따라 마시는 컵 입구에 소금과 라임을 무치고 칠리 파우더까지 묻혀서 차가운 맥주를 부어 마시면 이를 다 미칠라다라고 부른다. 마치 데킬라나 보드카 마실 때 소금과 커피를 컵 입구에 묻혀 마시는 것과 같다.
멕시코 시티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바에서 미칠라다를 시켜 마셨다. 칠리 파우더에 소금, 그리고 라임까지 어떨 맛일지 상상은 했지만….OMG!! 맛은 그 이상으로 강렬했다.
'어이쿠, 어떻게 이런 맥주를 마시지?' 멕시코 사람들은 이 맥주를 해장술로 마신단다. 정말 특이하다. 워낙 대중화된 술이라 간편하게 즐기기 위해 미칠라다용 인스턴트 컵까지 상품화됐다. 그 컵을 갖고 다니면서 찬 맥주만 부어 마시면 즉석에서 미칠라다가 된다.
이렇게 미칠라다 컵을 갖고 다니면서 맥주를 부어 마시고 또 마시고... 하루 온종일 맥주를 마시며 산다고 한다. 미칠라다 한 잔을 마셨더니 땀이 흘렀다. 마치 더운 여름날 매운 냉면 먹으면 땀이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해장을 하기 위해 이 술을 마시나 보다. 멕시코와 우리는 참 비슷한 식성을 가진 나라다.
'사회적 거리 두기' 스트레스로 오늘은 맥주 이야기만으로도 한 꼭지가 완성될 판이다. 정말 갑갑하긴 한 것 같다. 사실 지인들과 편안하고 예쁜 레스토랑을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 잔 하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이 힘든 세상을 버텨 왔는데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요즘의 생활에 모두들 집단 우울증에 걸리겠다고 난리들이다.
집단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이다.
집에서 대충 먹는다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과 밥통의 밥 한 그릇 덜어서 그렇게 막 차려먹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먹을 때가 훨씬 더 많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 그 주일을 마감하는 금요일에는 일부러 나만을 위한 요리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해물볶음, 연어샐러드, 치즈도 조금 잘라놓는다. 약소하지만 근사한 나만의 만찬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지는 와인 한 잔.
내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다운받거나 내 지식욕을 충족시켜줄 다큐멘터리 한 편 보면… 금요일 저녁 남부럽지 않은 ‘나와의 데이트’가 어느덧 끝난다. 내 나이 50에 들어서 뒤늦게 알게 된 ‘나와의 데이트’가 의외로 나를 위로한다. 집단 우울증으로 힘든 브라보 멤버들에게 강추!!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전설’ 이라는 주제로 세계적인 보석 디자이너인 김정희의 개인 전시회가 열렸다. 지난 5일까지 열린 이 전시회는 포이베 보석 디자인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쥬얼리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등 한국대표 보석 디자이너로 차근차근 성장해왔던 김정희 작가의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 ‘A 디자인 어워드’ 은상 작품과 ‘아시아 태평양 미술대상전’ 우수상 작품 등은 물론이고 26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150여 작품에 김정희 작가가 옛 보석들을 새롭게 리폼하여 재창조한 고객 소장품 20여점도 소장가들이 흔쾌히 전시에 동의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김정희 작가는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26년을 결산하는 이번 전시회가 단순히 미를 추구하는 개성표현의 수단을 넘어 예술적 감성적 가치를 충족시키는 조형 예술로서의 보석 디자인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시장은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됐다.
'인간과 자연' 테마에서는 자연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생명력과 신비로움, 그리고 삶의 언어들이 스토리가 되고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새로운 가치 속에 창조됨을 보여줬다.
'시간 그리고 공존' 테마에서는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모더니즘 그리고 고전주의와 접목시켜 과거에 존재했거나 유행했던 것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여 보석 자체의 가치보다 각각의 감성과 스토리를 가진 디자인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생활 속의 예술품으로 재탄생 된다는 것을 구성했다.
묵혀있던 추억들은 스토리가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어 새로운 가치 속에 창조된다. 이야기들은 희로애락이 담긴 인고의 과정을 통해 시간과 함께 공존하고 과거의 현재를 넘나든다는 'Reborn'테마로 나뉘어졌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인상적인 작품은 2020년작인 ‘나비 되어 날다’ . 몇 년 전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 보낸 김정희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잊던 중 생전에 어머니가 가꿔놓으셨던 정원에 날아온 나비를 보게 됐다고 한다.
마치 이 노란 나비는 어머니인 듯 김정희 작가 주위를 돌다 하늘로 날아갔다며 이를 경험하면서 “어머니가 나비가 돼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시는구나. 내 걱정은 말라고 이 딸을 찾아오셨구나’ 이런 마음이 들면서 본인 스스로도 큰 위안을 얻게 됐다고 전했다.
2주간의 짧은 전시회 기간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동이 불편한 가운데에도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찾아오셨다며 관람객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조만간 다시 전시회로 찾아 올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