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10시, 목동 파리공원에서 우리들은 작은 모임을 가졌다. 연령도 20대에서 60대요, 직업도 틀리지만 쇠귀 신영복(牛耳 申榮福, 1941~2016) 선생의 책과 신문 칼럼 이야기를 듣고,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기탄없는 자유토론의 시간이 즐거웠다.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토론이 격해지면 인근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신 선생은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경제학을 강의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고, 1988년 8월 15일 만기 출소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더니 11월 말엽,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 건물 지하 ‘세실레스토랑’에서 40여 점의 서예 작품으로 첫 서예전을 열었다. 옥중에서 20년을 정진한 그 서예 작품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과 큰 감동이 가시지 않았다. 연말에는 이라는 옥중 서신들을 책으로 출간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 1889년 1월에는 결혼을 해 서울 목동에서 가정을 이루고, 성공회대학교에서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가히 생활인으로서 새 출발을 했다. 1993년에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엽서들을 모아 를 출간했고, 1995년 11월부터는 중앙일보에 를 기고했다.
1995년 3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인사동 학고재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학고재 사장의 소개로 처음 선생을 상면하고, 50여 점의 서예에 대한 소회를 직접 들었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선생을 돕고자 하는 여러 지성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마음에 정해둔 작품이 금방 팔려 기회를 잃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다가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은근히 휘호를 받고자 하는 속내도 있었다.
그의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은 누구의 청(請)도 거절 못했다. 필흥(筆興)이 솟아 경오(庚午, 1990)년 황화(黃華, 가을)에 써두었던, 편의 한 구절인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에서 취한 ‘夜深星輝’와 임신(壬申, 1992)년 성하(盛夏, 한여름)에 시필(試筆)한 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있는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에서 뽑은 ‘觀海難水’의 예서체(隸書體) 두 작품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다. 소위 ‘신영복체’, ‘어깨동무체’라는 한글 휘호도 받고 싶었으나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해 섣달그믐께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그토록 소망하던 ‘어깨동무체’의 를 말아서 들고 계셨다. 펼치니 먹 향이 그윽하고 관지(款識)의 인주 빛이 선명했다. 이후 선생은 대학 강의와 신문 기고가 늘어나며 일정이 바빠져, 주 1회 모임에서나 잠깐씩 상면했다. 나도 바쁜 일이 생기면 서너 주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내를 비롯해 친구들이 선생의 전력(前歷)을 들어 모임 참여를 말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의미의 ‘야심성유휘’는 선생이 아주 즐겨 썼는데, 남다른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어온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맹자(孟子, BC 372~BC 289 추정)가 공자(孔子, BC 551~BC 479)를 언급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의 ‘관어해자난위수’는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깊은 함의(含意)가 있는 들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선생만의 독특한 서체다. 두 줄의 굵고 납작한 글자들은 서로 부딪치고 얼싸안으며 힘찬 기운을 발한다. 옥중에서 받았던 노모의 한글 글씨체에서 골격을 찾아 변용했다고 말하지만, 한글 서체의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대 교수인 김태호(1967~)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Carara) 국립미술학교로 유학 떠나기 전에 부인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1996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식사를 대접하려고 불고기집으로 안내했으나 한사코 냉면만 먹겠다고 하여 조촐한 송별이 되고 말았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의 깊은 속내가 대견했다. 부인이 종교음악을 전공했기에 바흐의 음반을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김태호의 조각작품과의 인연은 1993년으로 되돌아간다. 인사동 어느 화랑에 놓여 있던,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을 눈 깊게 만났다. 까까머리의 동자가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작품이었는데, 기교 없는 순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화랑의 큐레이터도 ‘동자상’에 반해 매일 한두 번씩 쓰다듬는다며 화랑의 ‘지킴이’라 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막 군대를 다녀온 풋풋한 조각가의 작품이었기에, 몇 주 동안 드나들며 “누구에게 팔지 말라”고 이르고 관찰만 했다. 화랑 주인은 ‘중진 조각가의 작품과 견줄 만한 수작(秀作)이라서 값싸게 팔 수 없고, 상당한 가격에 구입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화랑에서 소장한다’며 애를 태웠다. 아내와 상의해 통장을 비워, 기어이 혼자 들기 버거운 을 택시에 싣고 와 온 식구가 쓰다듬으며 한 가족으로 삼았다. 조각작품 수집의 시작이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다. 지치고 고달픈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예술혼은 얼음처럼 차가운 대리석을 헤집고 인애(仁愛)의 형상을 쪼아낸다. 샐러리맨의 고독과 실직자의 아픔도 용해해 젊은이들에게 힘찬 형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은 2010년 벽두에 서울 서촌의 ‘갤러리 자인제노’ 전시회에서 만난 작품이다. 좌대까지 하나의 대리석으로 깎아낸 수작이다. 어린 남매를 배 위에 얹고 있는 따뜻한 모정이, 작품의 안정감과 리듬감을 균형 있게 전달한다. 세파(世波)에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가족사랑’이 위대한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한낱 돌덩이에 맥이 돌고,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된다. 누구나 성(城)에 안주하려 들지만, 그 성을 쌓아가는 고뇌의 노정(路程)을 잊지 말진저.
>>이재준(李載俊)
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6개월 전에 결심한대로 이번 5월 말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 그동안 임기 연장에 대한 여러 유혹이 있었다. 일을 멈추는데 대해 불안 해 하는 아내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무엇보다도 35년이 넘도록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던 패턴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을 많이 했다. 떠나기로 결심하고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고심했다. 결론은 60 이후의 삶을 좀 더 느리게 살자는 것.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삶처럼 앞만 보고 뛰면서 살지 말고 옆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면서 느리게 걷듯 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느리게 걷듯 사는 것...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떠나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그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직원들과 정리해야한다. 업무는 워낙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정리가 필요 없다. 업무와 관련하여 당부하는 것조차도 사족이 될 듯싶다. 다만 감정 정리가 필요하다. 회사 전체에서 필자의 나이가 제일 많다. 신입사원들의 이력서에서 부모 나이를 보면 필자보다 어린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어린 직원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이 든 직장 상사로서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 주었다. 우리가 살면서 ‘미리 준비 했더라면’이나 ‘미리 알았더라면’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이 필자와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을 한 가지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관계를 맺었던 회사관계자들과의 정리도 필요하다. 필자가 떠나더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직원들과 외부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인계해 주어야한다. 그 회사들과 협업하여 진행할 향후 업무도 많고 콜라보 행사도 있어서 지속가능한 관계가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가 자산이 되듯이 좋은 협력회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회사의 자산이 된다. 오랜 세월 겪은 후에 진정한 친구가 생기듯 좋은 협력회사도 하루아침에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책 욕심이 많다. 필기구 욕심도 많다. 특히 손에 잘 잡히고 써지는 느낌이 좋은 필기구는 참지 못하고 구입한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보니 건축 책보다 시집이나 인문학, 자기 계발서 등이 더 많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시니어’ 관련 책들이다. 그동안 저자 강연을 찾아다니면서 모아둔 책도 많다. 각종 건축 프로젝트의 서류를 모아 둔 파일도 엄청 많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서류 중에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어서 그림파일로 저장하고 나머지는 파쇄 해 버린다. 책은 일부 주변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나머지는 그냥 서가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필기구는 전부 가져간다.
그동안 전시회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종 소품과 도자기, 액세서리 등이 제법 많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내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더 감사한 것은 여러 직원들이 자기들의 애장품을 바자회에 기증해 주어서 바자회가 한층 풍성해 졌다는 것이다. 수입금은 필자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필자는 짐을 정리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기부에 동참하니 일석이조의 좋은 행사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중에는 아쉽게 떠난 사람도 많았고 떠나는 날 얼굴을 못 본 사람도 많다. 가장 적당한 때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어쩌면 떠날 때 뒷 모습이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책상 옆에 붙여놓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읽어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싶다. 편한 것이 좋고, 느린 것은 싫고. 오랜 것은 쉬이 버려버리는 요즘 세상, 옛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그리워하는 문인들의 안식처가 있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이 바로 그곳. 문학관을 가득 메운 모든 공기와 기운은 이 세상 모든 문인에게 보내는 연정이다. 컴퓨터 모니터 앞, 최첨단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깊게 내쉬어보고 싶다면 바람 잔잔히 와 앉은 그곳에 가보시라.
세상 모든 문인을 기억하는 ‘영인문학관’
문학관이라고 하면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와 삶, 역사를 풀어놓은 곳이라고 인식하겠지만 영인문학관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시와 소설 등을 쓰고, 찬란하건 아니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문인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부인인 강인숙 관장은 문학을 향한 남다른 사랑으로 문학관을 건립했다. 그녀는 유실 위기에 처했던 문인들의 원고와 다양한 소품을 오래전부터 수집해왔다. 집 안에 점점 쌓여가는 원고, 한 시대를 살았던 문인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강 관장의 퇴직금과 3년 치 급료 등으로 기금을 마련해 2001년 영인문학관을 개관했다.
다수의 작가를 두루 살피는 마음으로…
개관 이후 전시의 대부분이 기획전시로 이뤄지고 있다. 다른 문학관이나 개인 박물관이 상설전시로 이뤄지고 있는 반면 이곳은 기획전시로 시공간을 채운다. 전시때마다 작품이 바뀌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리 배치, 전시 운용까지 새로 조직해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인문학관이 한 명이 아닌 다수의 문인을 두루 살피는 문학관이기에 기획 전시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전시만 봐도 그렇다. 다양한 작가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게 해준 개관전시 , 등이 그랬고 김상옥과 최인호 등 단독전도 영인문학관에서 기획했다. 취재 차 방문했던 날은 영인문학관 제38회 전시회인 (5월 말까지 전시)이 열려 각계 인사들과 문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움직이는 벽에 쓴 시-문인병풍전’
이번 문인병풍전은 소설가 김동리, 박두진, 조병화 등 작고한 문인병풍을 비롯해 정진규, 이근배, 이제하 등 원로 문인의 필체와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전시회 행사에 앞서 만난 강인숙 관장은 새로 시작되는 전시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대 병풍과 옛날 병풍을 모아서 전시를 하는 겁니다. 예전 것은 낙관이 병풍의 시작과 끝에만 있었는데 요즘 병풍에는 각 폭마다 낙관이 찍혀 있죠. 예전 병풍은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이 글을 써내려갔는데 요즘 병풍은 들쭉날쭉 흔들흔들한 것이 다 의도된 거죠. 병풍 예술이 바뀐 거예요.”
전시회를 위해 많은 작품을 대여했지만 조병화, 김동리, 박두진의 병풍은 강 관장 소유의 병풍이다. 그런데 전문 소장이 된 것처럼 병풍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내가 아주 보관을 잘해요. 예전에 부채를 보내주신 분이 20여 년 만에 와서 보더니 전문화랑보다 보관을 잘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또 하나 그려주시더라고.”
문인 사랑꾼(?)에 내려진 숙명 ‘사명감’
강인숙 관장은 새 기획전시를 여는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있을 전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오는 6월 15일에는 2007년 별세한 무용평론가이자 시인 김영태의 10주기를 맞아 ‘김영태 편지전’을 기획하고 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시인 마종기한테 보낸 편지를 100여 통 주고 가셨어요. 그 편지만 해도 전시실 안이 가득 찰 거예요.”
김영태 시인은 암 투병 3년 동안 무용 관련 자료는 무용계로, 사진들은 사진 자료가 필요한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마종기 시인과 나눴던 편지는 강인숙 관장을 찾아갔다.
“내가 좀 신용이 있거든요(웃음). 김 시인도 수소문해서 저에게 보내준 겁니다. 잘 간직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나봐요. 내가 그렇게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죠.”
편지 내용을 읽어보니 그냥 편지가 아니었다. 작품을 읽고 감상을 써 보낸 것이었다. 올해부터는 1년에 한 번씩 문인 관련 특별전을 하려고 한다.
“내가 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해요. 문인들에게 제가 갚아야 해요.”
강 관장은 많은 문인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진정한 사랑꾼이었다. 문학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흠뻑 담아낸 영인문학관은 그저 ‘감동’이었다.
개관시간 10:30 ~17:00
입장료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주소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81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백승우(白承雨·59)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 백 상무는 자신만의 시간관리로 호텔리어, 사진가, 교수, 궁궐문화역사 해설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싶다며 취미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고 있으며 그에 더해 오디오 수집에도 도전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 그가 취미의 고수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는 비결을 들어보자.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미’라고 부르자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2016년 7월 파리 ‘La Capital Gallery’ 초청의 사진전 에서 그의 전 작품이 솔드아웃됐다. 뿐만 아니라 2017년 4월에 파리 샹젤리제 ‘The Gallery Boa’ 초청으로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이, 11월에는 ‘La Capital Gallery’ 특별 초청으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도저히 취미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프로 작가. 전시할 때마다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숙한 작가의 모습이다.
파리 ‘The Gallery Boa’ 초청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
“파리 샹젤리제나 뉴욕에 초대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죠. 지난번 전시에서 18점을 전시했는데 첫날에 모두 솔드아웃됐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탑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이미 2009년에 ‘The Window 시리즈’를 강남의 일반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그때도 대규모로 판매가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작품은 포스코와 호텔 등지에서 주로 구매가 이뤄졌다고. 그렇다면 사진으로 얻는 수익도 꽤 되겠다 싶어 물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카메라 살 정도 들어와요. 제가 기자재비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이번 전시는 프랑스 쪽 은행과 정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10여 년에 걸친 사진 프로젝트들 진행 중
프로 작가답게 그는 사진 작품의 제작을 특정한 테마를 잡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The Window 시리즈’를 10년, ‘My Korea’ 시리즈를 1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The Window 시리즈를 하면서 두세 가지 전시를 준비 중에 있어요. 당장 6월부터는 유럽의 아트 퍼니처(예술과 가구 디자인을 접목한 개념으로 예술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가미된 일상 속 가구) 작가와 제 작품을 컬래버한 전시가 1년 동안 잡혀 있습니다. 제 작품의 테마는 나무가 될 거예요.”
그의 말에는 유난히 힘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제대로 한국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12년 동안 진행한 ‘My Korea’ 사진 작업은 같은 제목의 책 로 정리되어 그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아줬다. 텍스트가 모두 영어인 이 책은 반응이 좋아 속편을 발행하기로 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의 성과 또한 성실히 거두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일하는 데서 작품의 소재 찾아
사진작가 외 백 상무의 다채로운 취미활동들을 살펴보자. 그는 교수이기도 하다. 본업인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은 대학원과 석·박사 과정에서 호텔경영학과 경제학 등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또 궁궐문화역사 해설가이기도 하다. 문화재에 관한 사진을 찍으려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는 문화재를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럼 내가 문화재청 해설가를 하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1년에 걸친 공부 끝에 그는 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진 작품 세계가 더욱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철저히 호텔리어로서의 본업을 지키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일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저는 일하는 데서 사진을 찍을 소재를 찾아요. 그러니까 백 퍼센트 호텔이 배경이죠. 출장 가서 남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거예요. 주말에 일부러 어딘가를 가서 찍은 적은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는데 시간이 어딨어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하라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은퇴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의 성공에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운이 따라줘서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투자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은퇴하면 모두 해외여행을 떠나요. 갔다 와서 돈이 떨어지면 자전거 타고 색소폰 불고 산에 가 있어요. 이게 (은퇴 후 삶의) 다예요. 그 세 가지를 하다가 그것들마저 안 되면 근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죠. 그러다 몸이 아프면 집에 있게 되고 가족들과 싸우게 돼요. 결과적으론 남들이 입어본 옷이 멋있으니까 자신도 입어보는데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거죠. 왜 그런가 하면 준비를 안 해서 그래요.”
그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도 타보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등산도 하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실패하다 보면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 걸리게 돼 있어요. 저도 사진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동료였던 일본인 아다치씨가 나보고 일만 한다고 취미를 가지라면서 저에게 카메라를 줬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거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고수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맞는 게 걸리면 그것에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은퇴할 때가 되면 남을 가르치면서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돈만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40대 넘어가면 앞으로 20년은 짧아요. 저는 2007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그게 10년 전이죠. 그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파리에서 전시도 하는 거지 갑자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는 또한 취미를 익히는 노하우로 전문가를 꼽았다. 자신은 뭔가를 한다고 하면 최고의 고수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배울 때는 진동선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는 나중에 함께 미학 논문을 쓸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워라
그가 최근에 열중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오디오다. 마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는 그냥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오디오 책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이자 건축가인 박준씨에게 메일을 보내 오디오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라고 불리는 오디오 파일(오디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들과 3년을 함께 다녔다. 또한 클래식을 배우기 위해 음대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디오를 들으면 오디오 너머의 악기 위치가 보인다고 한다.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보인다고.
그가 요즘 배우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도 전문가를 찾는 그의 취미 철학이 적용된 경우다.
“전주에 사진에 관해 5년간 강의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그룹 중에 한 명이 정형외과 의사였는데 기타를 칠 줄 알았죠. 그가 제게 콘트라베이스가 잘 어울리고 잘할 것 같다고 추천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2년을 고민하다가 바로 악기를 샀죠. 지금 2년 반째 독일 마인츠 국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어려워요(웃음).”
최고의 고수를 만나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수를 만난다고 해도 노하우 전수가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고수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티튜드가 중요해요. 배우는 일에 있어선 학생이 되어야 하는 거죠. 스승이 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공부로 거듭난 제2의 인생
무엇을 해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취미의 ‘참맛’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람은 40대, 50대가 되면 가족, 회사,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이죠. 그런데 그것을 작품에 쏟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져요. 저는 평생 카메라를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오디오를 들은 일도 없죠. 클래식도 배운 일 없어요. 제가 한 일은 평생 회계학과 호텔경영밖에 없었어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그리고 제대로 공부를 하니까 굉장히 재밌어져요.”
그는 보람이 단순한 감정의 승화를 넘어서 직업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이룬 성과는 그 희귀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결과, 그의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요? 강의는 계속할 거 같고, 펀드 컨설턴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격주로 궁궐 해설을 하고 사진 작업도 해야죠. 책도 써야 하고 오디오 수집도 해야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는 해야겠고. 바빠요(웃음).”
이석현 회장은 동부증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증권맨. 2009년 잠시 은퇴를 했을 땐 코스닥 상장사 대표이사였다.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딸이 미대 진학을 결심하자 딸과 함께 100곳이 넘는 전시회를 보러 다닌 것이 사진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촬영으로 이어졌고, 촬영한 사진이 쌓이면서 다른 동호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사진을 팔고 싶다’는 그의 욕구는 ‘스톡사진 전문가’ 소리를 듣게 될 때까지 독학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스톡사진 전도사를 자처하며 다양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스톡사진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사진을 취미로 하고 있는 시니어들에게 스톡사진을 꼭 추천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스톡사진 작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돼줘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여유 있는 은퇴자들에게 딱 맞는 일이죠. 스톡사진 작가로 자리 잡게 되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직업을 가질 수 있어요. 카메라와 노트북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이고,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으니까요.”
이 회장이 은퇴자들에게 스톡사진을 권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상속이다.
“사진가의 지적재산권은 사후 70년간 보장돼요. 예를 들어 정말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를 보유했다면 그 혜택은 자녀에게로까지 이어질 수 있어요.”
그는 스톡사진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진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팔려야 하는 사진이니까 다를 수밖에 없죠. 예를 들어 취미로 많이 찍으시는 새 사진 같은 것들은 절대 팔리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의 구름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좋아하는 사진과 시장이 좋아하는 사진은 달라요. 시장의 요구를 파악한 다음 주제에 맞춰 촬영을 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회장은 또 스톡사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키워드라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들이 사진을 보게 되는 계기는 키워드예요. 검색에 대한 결과로 만나게 되니까요. 키워드는 가급적 많이 기재하고, 풍경사진은 시간이나 장소, 날씨까지 반드시 적어야 해요. 그리고 사물에서 연상되는 다양한 감정까지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스톡사진 작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스톡사진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일까?
“동북아 3국 중에 스톡사진 산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저는 한국에서 유리 아커스 같은 작가가 탄생하면 좋겠어요. 제가 스톡사진 전도사로서 갖고 있는 꿈입니다.”
인생 후반전에서 만나는 취미활동은 이전의 취미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유희를 통한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공백을 대신하기 때문. 그래서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은퇴 후 갖게 된 취미를 ‘제2직업’처럼 소중히 여긴다. 또 자신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취미를 찾아낸 은퇴자들은 종종 취미를 ‘두 번째 인생의 반려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가 만난 시니어들은 어떤 취미로 인생의 반전을 이끌었을까?
“옻칠 공방으로 창업해요” 이수매(李秀梅·63)씨
이수매씨가 옻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부기술교육원의 옻칠나전학과를 통해서다. 옛 문화재를 보며 전통공예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씨는 규방공예를 거쳐 옻칠까지 배우게 됐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는 이수매씨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그림으로 외롭게 사는 방법 배웠죠” 윤성호(尹性浩·65)씨
그가 송파의 한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열정은 욕심을 만들어냈고, 욕심은 많은 연습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은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도 됐다.
“붓을 잡고 세 번째 인생 살아요” 하효순(河孝順·67)씨
하효순씨의 그림 사랑은 수집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뉴욕의 갤러리에서 종일 멍하니 그림만 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도통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선물받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반복하다 직접 그려보겠다는 용기를 갖고 근처 화실을 찾게 됐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취미로 유년 시절의 꿈 이뤘죠” 윤민용(尹民鎔·80)씨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이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 물론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의 해설은 이제 칠장사(七長寺)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朴文秀)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와 함께 명물이 되었다.
“수영은 이제 삶의 일부죠” 서은희(徐銀姬·58)씨
그녀의 수영 경력은 올해로 25년.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반세기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접어들 무렵 동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아직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해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취미 덕분에 교우의 폭 넓어졌죠” 김호영(金好榮·72)씨
평생 교직에서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김호영씨. 그는 교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건강의 이상 증세와 은퇴는 그를 바로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취미를 찾다 어릴 적부터 관심 있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문화센터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불타올랐던 교직생활처럼 그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지금은 문화센터 기타반 반장까지 맡게 됐다. 그가 꼽는 취미로서의 연주가 갖는 최고의 미덕은 봉사활동이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를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게 됐어요.”
“평발 이겨내고 마라톤에 중독됐죠” 김학윤(金學倫·58) 원장
42.195km의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네 번이나 달렸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선배 덕분이다.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평발인 그에게 고통은 따라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그의 관심은 마라톤에서 수영, 자전거로 옮겨가며 ‘아이언맨’이 되었다.
주경중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거장 조각가 황준혁 역으로 이성재, ‘나탈리’의 모델이며 오미란 역으로 박현진, 오미란의 남편 민우 역으로 김지훈이 나온다.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지만 박현진의 미모가 빛나는 작품이다.
여인의 눈부신 나신을 조각한 작품 ‘나탈리’는 평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전시회 마지막 날 평론가 장민우가 나타나 나탈리의 실제 모델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조각상을 팔라고 하지만 황준혁은 거절한다. 그 대신 황준혁은 나탈리의 실제 모델 오미란과의 격정적인 사랑 얘기를 들려준다. 민우는 황준혁에게 그녀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사랑했냐고 따져 묻는다. 황준혁은 자신 있게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남편이었던 민우는 믿지 않는다.
대학 교수인 황준혁은 제자 오미란이 제 발로 다가와 나체 모델이 되겠다고 해서 나탈리라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바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으나 황준혁이 결혼을 원치 않는 독신주의자라서 오미란은 떠난다. 그 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오미란은 병으로 죽는다. 민우는 오미란이 제 발로 황준혁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황준혁이 교수이자 저명한 조각가라는 위세를 이용해 오미란을 불러 유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화는 두 장면을 모두 보여준다. 오미란이 종강 기념으로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황준혁은 오미란이 “너를 갖고 싶어”라는 글을 써달라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우는 오미란이 황준혁이 사인을 하며 “너를 갖고 싶어”라고 썼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오미란에 대해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몇 해 전 청순한 이미지의 한 여자 배우가 자살한 일이 있다. 사람들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때 한 가수가 그녀가 생전에 자기를 사랑했다는 발언을 해서 매스컴에 오른 일이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녀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언행은 자제했어야 한다고 본다.
남녀관계는 당사자들만 안다. 백년해로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끝까지 가는 확률보다 헤어지는 확률이 훨씬 많다. 둘의 추억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 특히 남자는 그래야 한다.
남자들의 성 경험담에는 과장이 많다. 사랑 이야기는 당사자들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다. 누가 물어보더라도 함구하고 살아야 하는데 무용담 얘기하듯이 상대 여자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남자들이 있다. 남자답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보수적이다. 함부로 하는 연애 이야기로 여자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라 해도, 설사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이야기라 해도 상대방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페리의 속 한 문장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을 길들였던 것처럼, 한홍섭(韓弘燮·71) 회장은 자신의 마음속 소행성 ‘쁘띠프랑스’를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돈’이 아닌 ‘꿈’ 덕분에 지금의 작은 프랑스 마을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청평호반 언덕 위의 아름다운 소행성, 반짝이는 그 꿈은 30년 전부터 빛나고 있었다.
1980년대, 연 매출 100억원의 페인트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한 회장은 기술제휴 건으로 유럽 출장이 잦았다. 프랑스에도 종종 오가며 혼자 미술관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신문 문화면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피카소의 딸이 아버지의 소장품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회를 연다는 기사였다. 그길로 프랑스를 찾은 한 회장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시장에 관람객들이 긴 행렬을 이룰 정도로 성황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프랑스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 내 형편에 맞는 작은 미술관 하나 있었으면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상 구체적으로 검토하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미술 작품보다는 그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죠. ‘그래, 프랑스 마을을 한국에 옮겨 놓아보자!’ 하고는 그때부터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떼섭이 왕자의 집념으로 길들여진 소행성
그가 프랑스 마을을 계획할 당시에는 88서울올림픽 개최로 국제화 바람이 한창이었다. ‘국제화 시대에는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도 상대의 문화를 알아야 경쟁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마음에는 남모를 사명감까지 움트고 있었다.
“중소기업 경영자로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라에 보탬이 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일 년에 서너 번씩 현지에 직접 찾아가 골동품을 수집했죠.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마을 부지를 물색했는데, 1995년에 지금의 터를 찾았어요. 명의 이전을 마치고 허가가 난 건 3년 뒤였죠. 묘지 이장 문제랑 IMF 여파로 지체됐거든요. 페인트 사업을 병행하며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꿈에 대한 열정과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서울대·고려대·홍익대 등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30년에 걸쳐 10군데 이상 수료하는 등 경영과 문화에 대해 익히고자 노력했다. ‘잘나가는 중소기업 CEO가 뭐가 아쉬워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하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향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노라 말하는 한 회장이다.
“어렸을 적 별명이 ‘떼섭이’였어요.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포기를 몰랐으니까요. 회사를 경영하면서 먼 프랑스에 비싼 여비를 들여가며 발품을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그러나 강한 집념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페인트 사업은 내가 달리 아는 게 없어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면, 쁘띠프랑스는 나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래서인지 힘들긴 했어도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 것 같아요.”
한 회장은 쁘띠프랑스라는 소행성은 떼섭이라는 어린 왕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가 100여 차례 유럽을 오가며 직접 발품을 팔아 마련한 골동품과 미술품 등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떼섭이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은 바로 주택전시관이다. 150년 된 프랑스의 전통 가옥을 목재와 기와, 바닥까지 모두 해체해서 한국으로 싣고 와 재현한 것이다. 프랑스 시골집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이곳은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가옥이라고. 그만큼 한 회장의 고난이 뒤따른 산물이기도 하다.
“수년간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프랑스 전통 가옥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막상 마음에 드는 고택을 사도 뜯어서 한국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프랑스인들은 자기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거든요. 겨우 찾아낸 150년 된 목조 가옥을 해체해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우리와 건축 방법이 다른 데다가 설계도면도 없으니 다시 조립하기도 어려웠죠. 그러나 무엇 하나 대충하려 들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지름길은 ‘정직’이거든요. 100명 중 99명이 몰라본다 할지라도 오리지널을 고수하고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죠.”
수익보다 유익을 추구하며 이뤄낸 값진 꿈
주택전시관 안에는 그가 20년 동안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구한 19세기 장롱이며, 200년이 넘은 타피스리 의자와 가구, 장식품들이 놓여 있다. 이 공간뿐 아니라 쁘띠프랑스를 둘러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애초에 이곳을 계획할 당시 150년 전의 프랑스 시골 마을을 모티브로 해 옛날식 인테리어와 골동품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가이드가 ‘200년 전 사진과 현재가 똑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하는 거예요. 밀레의 생가가 있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인데, 가서 보니 정말 옛날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로 지은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마을이 좋겠다 생각했죠. 손때가 묻은 골동품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가 더 와 닿거든요. 또 디자인이 좋고 물건 상태가 좋아야 100년, 150년을 가는 거지 나쁜 물건은 그렇게 오래 남아 있기도 힘들죠. 그만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가 수집한 골동품만큼이나 쁘띠프랑스에서 가치 있는 공간은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떼섭이의 집념과 인생의 좌우명과 같은 정직 덕분에 프랑스 생텍쥐페리재단과 정식으로 국내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지 통역사를 통해 생텍쥐페리 외삼촌의 손자가 생텍쥐페리재단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2000년 한 해 동안 네 차례나 재단을 방문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의미로 기념관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 무던히 설명했죠. 페인트 사업을 할 때도 오로지 ‘정직’을 무기로 그 흔한 접대 한 번 안 해봤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열심히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경험이 생텍쥐페리재단과의 협상 때도 통했죠. 덕분에 쁘띠프랑스를 개장했을 때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작가가 입었던 옷 등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유품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가면 1943년에 출간된 의 초판본을 비롯해, 작품 구상 당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자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오르골 전시관, 인형 박물관 등도 프랑스 현지 못지않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 때문에 더러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만든 공공 문화시설 아니냐?’며 묻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일궈진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저마다 감탄을 마다치 않는다. 수익보다는 유익을 위해 시작한 사업인 만큼 쁘띠프랑스는 아직도 개관 당시 입장료(8000원)를 받고 있다. 그동안 그가 들여놓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더 풍성해졌으니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보람에 무게를 둔다.
“나는 자선사업가는 아니지만,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뤘고 그것에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만족하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지금도 인스타그램(사진 공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보면 우리 마을을 찾아간 사람들이 올린 사진만 4만7000장이 넘어요. 참 뿌듯하죠. 그전에 페인트 사업을 할 때는 인화성 물질, 니스, 신나 같은 것을 다루니 늘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미술품, 예쁜 소품을 만지니 한결 기분이 좋죠. 또 사업을 할 때는 100여 명의 직원을 신경 쓰고,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를 위한 즐거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고 있어요. 경쟁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때와는 전혀 다른 기쁨을 느끼고 있죠.”
완벽한 꿈을 향해 여전히 발품을 팔다
프랑스 마을 조성을 꿈꾼 것이 1988년, 터를 잡은 것이 1998년, 그리고 쁘띠프랑스가 문을 연 것이 2008년. 중년 사나이의 가슴에 피어오른 순수한 꿈은 꼬박 20년 만에 이뤄졌다. 그는 40년 넘게 공을 들였던 페인트 사업을 정리하고 ‘문화마을 촌장’으로 본격적인 제2인생을 맞이했다. 어느덧 고희를 넘겼지만, 여전히 발품을 팔고 있다는 한 회장이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개관하고 2개월 만에 드라마 촬영지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죠. 막상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니 부족한 것들이 보이고,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지런히 프랑스를 오가며 모은 수집품들로 3년에 걸쳐서 건물 두 개를 더 지었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직접 수집하러 다닐 생각이에요.”
꿈을 이룬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이뤄가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꿈에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보내는 평범한 삶은 무의미하죠.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쁘띠프랑스를 만들면서 막연했던 꿈은 이뤘지만, 아직도 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지금은 이탈리아 마을을 조성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여전히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제2인생의 꿈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멀리 내다보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