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도보여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면, 지방마다 조성된 걷기 코스까지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황안나 도보여행가가 추천하는 지방 도보여행 코스를 소개한다.
코스 추천 및 사진 제공 도보여행가 황안나
◇ 도보여행가 황안나의 지방 걷기 코스 추천 코멘트
경기도 남양주 다산길 “다산길은 한강과 팔당나루터, 소재나루를 보면서 운길산까지 걷는 ‘한강나루길’(1코스) 구간을 가장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 길이 평탄해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고, 강가와 호숫가를 둘러싼 경치가 으뜸이다. 걷다 보면 중앙선 옛 철로가 나오는데, 어릴 적 추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다산 생가 부근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피어 절경을 이룬다.”
충청도 태안 해변길 “태안 해변길 하면 ‘노을길’(5코스)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꽃지해변이 나오는데, 시간을 잘 맞춰 일몰 때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해안을 물들이는 석양이 장관을 이뤄 셔터만 누르면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다. 홀로 걷다 보면 해 질 무렵에 이따금 마음이 쓸쓸해지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정취와 아름다운 노을이 버무려져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전라도 변산반도 마실길“새만금을 따라 방조제를 걷는 코스로는 넉넉잡아 8~9시간 정도 걸린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 내소사를 탐방하고, 광활한 갯벌을 바라보며 곰소항까지 거닐어도 좋다. 곰소 젓갈 축제가 열리는 때에 맞춰 방문해 행사도 즐기고, 곰소젓갈시장에 들러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다. 곰소항, 격포항 인근 맛집이 많아 식도락 도보여행가에게도 안성맞춤이다.”
강원도 강릉 바우길“바우길 하면 선명하게 겨울의 끝자락 하얗게 눈이 쌓인 선자령 풍차길에 피어 있던 노란 복수초가 생각난다. 머리에 덮인 차디찬 눈을 털어내고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여린 꽃망울이 어찌나 아름답고 또 기특한지. 복수초 외에도 사시사철 피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보기 위해 이 길을 걷는 여행가가 많다.”
경상도 상주 MRF 이야기길“낙동강 줄기를 끼고 걸을 수 있는 ‘낙동강길’(1코스)의 끝자락 경천교 인근에 상주 자전거 박물관이 있다. 다양한 자전거 조형물을 구경한 뒤 자전거를 빌려 즐길 수 있다. 개인적인 추억이지만, 이곳을 걸으며 아이들이 어릴 적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자전거를 보물처럼 다뤘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손주나 자녀와 함께 가도 좋겠다.”
부산 부산 갈맷길 “갈맷길의 백미는 해안 절경이 아름다운 ‘이기대’다. 광안리 해수욕장과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이 가까워 관광 삼아 거닐어도 좋은 길이다. KTX를 타고 당일치기 도보여행으로 즐겨도 손색없다. 드넓은 바다와 기이한 암석, 귀여운 쑥부쟁이, 울창한 소나무 숲 등 걷는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다.”
경상도-전라도 지리산 둘레길 “발걸음이 닿는 길마다 맛 좋은 음식과 넉넉한 인심이 넘쳐난다. 어느 가을날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농사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마침 수확한 감을 나눠주시며 정겹게 말을 건네시던 기억이 난다. 특히 5일장 등이 서는 날 맞춰 가면 이곳만의 정취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 태안 해변길
서해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으며, 갯벌과 사구 등 해안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내에서 유일하게 해안 자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전망이 뛰어나고 걷기 좋은 해변길이 7개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그중 백미는 5코스인 안면도 노을길이다. 안면도 초입에 자리한 백사항에서 꽃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노을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길과 멋진 해안 풍경이 절경을 이룬다. 여기에 서해안 3대 낙조로 꼽는 꽃지해변 노을길은 도보여행자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 변산반도 마실길
아름다운 해변과 포구가 있고 유서 깊은 절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변산반도는 숱한 세월이 켜켜이 쌓인 채석강, 그윽한 아름다움이 깃든 내소사, 맛깔스러운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 등이 주요 명소다. 이 모든 곳을 아우르는 코스가 바로 ‘변산 마실길’이다. 1~8코스 66km와 해안누리길 18km로 나뉜다. ‘바다와 대화하고, 갯벌과 벗하며 마실간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해안 길을 걸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다. 단, 썰물 때는 해안이 길게 드러나 길이 생기지만, 밀물 때는 바닷물이 해안으로 들어와 길이 없어지거나 걷기 어려워지므로 시간에 유의해 여행 계획을 짜야 한다.
◇ 상주 MRF 이야기길
곶감의 고장 상주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산(Mountain), 강(River), 들(Field)을 뜻하는 걷기 좋은 ‘MRF 이야기길’이 있다. MRF란 산길, 강길, 들길을 걷거나 달리는 신종 레포츠를 뜻하기도 하는데, 원점 회귀가 가능하면서 낮은 산길(해발 200~300m) 구간이라야 한다. 총 13개 코스로,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길은 제1코스 낙동강길이다. 비봉산을 거쳐 경천대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청룡사와 자전거 박물관, 상도 드라마 세트장 등 볼거리가 많다.
◇ 남양주 다산길
‘다산길’은 한강과 북한강, 국립수목원, 운길산, 축령산 등 남양주시의 둘레길을 통틀어 말한다. 코스를 모두 합한 거리는 170km 남짓, 총 14개 코스로 저마다 볼거리와 분위기가 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길은 1코스인 한강 나루길과 2코스인 다산길, 3코스인 새소리 명당길이 겹쳐진 팔당역~능내역~운길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 길을 다산길의 으뜸으로 꼽는 것은 시원한 강줄기를 따라 걷다가 옛 기찻길을 걷는 낭만도 있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 다산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다산 유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 강릉 바우길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연장 약 400km의 장거리 코스다. 강릉바우길 17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울트라바우길, 계곡마우길, 아리바우길로 이뤄져 있다. 강원도의 자랑인 금강소나무 숲이 70% 이상 펼쳐져 있는 바우길의 매력은 트레킹과 삼림욕을 동시에 즐긴다는 데 있다. 도보여행에 자신 있는 이라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울트라바우길’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4박 5일 동안 총 72km를 걷는 코스로, 고난도 트레킹과 야영이 혼합된 바우길 특별 구간이다.
◇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등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장거리 코스다. 구간 대부분이 중·상급 난이도로 도보여행 초보자가 걷기에는 다소 버거울 수 있다. 2004년 ‘생명 평화’를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이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순례길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바로 지리산 둘레길이다. 매년 5월 약 보름 동안 참가자를 모집해 지리산 둘레길을 한 바퀴 걷는 ‘이음단’을 창단하고, 다양한 걷기 축제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부산 갈맷길
갈맷길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갈매기의 길’이란 의미를 지닌다. 총 9개 코스로, 길이는 268.8km다. 이 코스를 다 걸으면 부산을 한 바퀴 도는 셈이다. 갈맷길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부산 해변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제2코스다. 특히 바다와 기묘한 바위들이 어우러진 ‘이기대’를 품은 2-2코스는 해안 산책로의 백미 구간으로 도보여행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갈맷길을 걸으며 구간별 시작점, 중간점, 종점에 마련된 인증대 38개소에서 도보인증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완주인증 및 기념품 수령이 가능하다.
>>황안나 도보여행가
국토종단 800km, 국내해안일주 4200km, 24시간 울트라 걷기 등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을 65세 이후 이뤄냈다. 국내는 물론 산티아고, 네팔, 홍콩, 부탄, 아이슬란드 등 세계 50개국 걷기코스를 섭렵하며 도보여행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위암은 대장암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종으로 알려졌다. 한국인의 이런 잘못된 편애(?)는 세계적인 수준이기도 하다. 세계암연구재단(World Cancer Research Fund International)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2012년 전 세계 위암 발병 통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 마찬가지다. 특히 이런 추세는 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한국에 이어 몽골이 2위, 일본이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인이 위암에 더 많이 노출되는 이유는 뭘까. 서울특별시 서남병원 소화기내과 강민정 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잘 아시겠지만 짠 음식이 가장 문제입니다.” 강민정 과장은 위암의 원인으로 짠 음식을 지목했다.
“한국인이 많이 먹는 젓갈류나 김치, 찌개 등 대부분의 음식에 소금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한국인의 하루 소금 섭취량은 20g 정도로 서양인들에 비해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또 최근 많이 먹고 있는 가공 육류는 질산염 함량이 높은데 체내에서 발암 물질인 질산나이트로소 화합물을 만들어 위암 발병을 높여요. 특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불에 구운 고기나 생선, 훈제 음식에 들어 있는 PAH(다환방향족탄화수소) 역시 위암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나라와 함께 몽골, 일본이 위암 발병률이 높은 것이 이해가 됐다.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염장 음식을 즐기는 나라이고, 몽골의 대표 음식인 허르헉이나 수태차 역시 소금이 적지 않게 들어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강 과장은 한국에서 나는 식재료가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요리법의 문제이지 재료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의미였다. 기본적으로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는 원칙만 잘 지키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담배의 니코틴도 주요 원인
또 하나 위암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바로 흡연이다. 담배를 피울 때 체내로 흡수되는 니코틴이 위산의 분비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흔히 흡연자들이 ‘식후 담배는 소화제’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최근 유산균 음료의 광고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헬리코박터균도 문제다. 헬리콥터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헬리코박터균은 주로 위장 점막에 서식하며 상피세포를 손상시킨다. 염증을 일으켜 위암뿐만 아니라 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위림프종 등을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위염 환자가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됐다면 위암 발병률이 3~5배 높아진다. 한국인의 헬리코박터균 감염은 꽤 높은 편이다. 국가암정보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16세 이상 한국인 중 54.5%에게서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되었다.
“항생제에 대한 내성 균주의 증가에 따라 국내 헬리코박터균 치료에 대한 성공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표준 삼제 요법의 경우 국내에서 지난 15년간 제균율을 분석하였을 때 2010년 이전에는 80% 이상의 제균율을 보였으나 최근에는 70% 이하의 제균율을 나타내 항생제 내성률이 걱정입니다. 헬리코박터균은 위암과의 관계가 적지 않기 때문에 궤양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면 반드시 제균할 것을 추천합니다. 약제를 복용하여 헬리코박터균 제균에 대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별다른 증상 없이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됐을 때다. 균의 발견만으로 치료를 원한다면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제균 치료를 해도 환자가 이후에 문제를 제기하면 병원 측이 치료비를 전액 보상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내에선 위·십이지장궤양, 위 말트(MALT) 림프종에 걸린 환자, 조기 위암 내시경 치료를 한 환자만 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
위암을 가장 간단하게 치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빨리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 과장은 조언한다. 강 과장이 위암과 관련해서 ‘위 내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암 조직이 커지지 않고 가장 안쪽 점막(mucosa)에만 자리 잡고 있을 땐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크게 개복할 필요도 없이 내시경만으로도 가능합니다. 빠르면 1박 2일 안에 치료가 끝나고 암 환자들이 무서워하는 방사선 치료나 항암제 치료도 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문제는 조기 위암(early gastric cancer)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에요. 자각증세가 없거든요. 위암으로 인한 메슥거림이나 구토 증상이 나타난다면 대부분 위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예요. 결국 초기에 암을 발견하려면 정기적으로 위 내시경을 받아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내시경 검사가 완벽한 만능은 아니다. 강 과장은 경우에 따라 놓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내시경 검사라고 설명한다.
“흔적이 거의 없는 조기위암이나 진행성 위암 중 점막에 변화가 없는 보우만(Borrmann) 4형은 내시경으로 간혹 놓칠 수 있으며 조직학적으로 분화도가 나쁜 암은 순식간에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내시경 검사의 추적 관찰이 중요합니다.”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에서는 40세 이상이 되면 1~2년에 한 번씩 위 내시경 검사를 받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 관련 질환이 있거나 가족 중 위암을 앓은 환자가 있는 경우에는 젊은 나이에도 발병 가능성이 있으므로 더 일찍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
위암의 조기 발견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전이에 있다. 위암을 조기에 발견하여 가장 초기단계에서 치료를 받으면 96%가 5년 이상 생존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암세포가 위장을 뚫고 나와 위장 주변의 장막을 침범한 상태에서 위장 주변 림프절 1군에도 퍼져 있는 3A기라면 5년 생존율은 50%로 낮아지고, 이보다 더 퍼져 대동맥 주위의 림프절이나 뼈, 폐, 간 등에 퍼져 있는 4기라면 10%로 더 떨어진다.
]먹어서 치료하려는 생각 변해야
치료는 수술이 기본이다. 종양의 크기나 위치에 따라 수술 방법이 달라진다. 종양의 크기가 작거나 아랫부분에 위치해 있을 때는 위의 하단을 잘라내 소장과 연결한다. 그러나 위를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암이 자랐거나 윗부분에 종양이 발생한 경우에는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한다.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암이 퍼져 있거나, 암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암화학요법, 즉 항암제 투여를 진행한다.
위의 일부 혹은 전체를 절제하더라도 거의 정상적인 삶에 가깝게 생활할 수 있다. 위가 없다고 해서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술 후 장기적인 영양관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 과장은 설명한다.
“위절제술 후 가장 흔한 혈액학적 장애는 빈혈입니다. 비타민 B12 결핍보다는 철분 결핍성 빈혈이 더 흔한데 그 이유는 수술 후 비타민 섭취 부족과 수술로 십이지장을 우회하여 흡수장애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 비타민 D와 칼슘 흡수 장애로 골다공증이 올 수 있습니다. 메슥거림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역류성식도염이나 알카리역류위염 때문이죠. 또 쌀밥과 같은 탄수화물이 소장으로 바로 넘어가서 나타나는 급격한 인슐린 증가도 문제가 돼요. 갑작스럽게 인슐린이 증가하면 저혈당 증상이 나타나 오한이 나고 메슥거릴 수 있어요. 이를 의사들은 덤핑증후군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위암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는 과식하지 말고 조금씩 자주 드시길 권합니다. 장기도 적응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히 수술 후 6개월 정도는 조심하시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 과장 역시 의료 현장에서 다른 의사들이 겪는 유사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민간요법이나 정체 모를 건강식품들이다.
“환자가 의사의 치료 외에 다른 방법에 의지하고 있다면 치료 결과를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져요. 섭취하는 음식이나 약재에 양약과 동일한 성분이 있을 수 있고, 간 건강을 악화시켜 정작 꼭 필요한 약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고요. 치료를 위해서는 무작정 무언가를 먹어서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의사와 상의 후 결정하시길 권하고 싶어요.”
발효 식품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발효 식품의 종주국이라고 할 만큼 예로부터 발효 식품을 많이 먹었고, 한의학에서도 발효 약재를 많이 사용해왔다. 식품을 발효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비위가 안 좋다, 비위가 약하다’는 말에서 비위(脾胃)는 한의학 용어로 소화기관이다. 위(胃)는 음식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고, 비(脾)는 음식을 삭혀서 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삭혀서 소화된 것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은 음식을 받아들이고 삭히는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발효 식품은 삭힌 음식이기 때문에 비위가 해야 할 기능, 즉 소화를 도와준다. 또 위장이 다 삭히지 못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덩어리, 종양, 근종 같은 것도 발효 식품이 삭혀준다. 이러한 이유로 김치, 된장, 청국장 등을 항암 식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술은 사람의 침으로 발효시키기도 한다. 침 속의 아밀라아제는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한다. 결국 소화효소와 발효는 같은 개념이며, 발효는 소화를 돕는다. 단식 후 위장이 가장 약할 때 묽은 된장국이나 일본식 전통 된장국인 미소시루부터 복용한다. 비위의 소화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다.
박테리아, 곰팡이에 의해 발효가 진행되면 몸에 좋은 성분이 새로 만들어지고 몸에 흡수되기 좋도록 변한다.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도 우유보다 소화가 잘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발효 식품으로 알고 먹는 것은 전통 천연 발효 식품과는 다르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제빵 장인인 리처드 부르동(Richard Bour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연 발효는 박테리아와 이스트(yeast, 酵母)의 복합체로 이루어진다. 박테리아는 반죽 속의 탄수화물과 질긴 글루텐을 완전히 분해하고, 곡물 속의 좋은 무기물을 추출해 우리 몸이 흡수하기 좋게 만들어준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존해온 천연 발효 식품에서는 소화 문제나 건강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도입된 이스트 속성 발효는 단기간에 많은 소화 문제, 건강 문제를 야기했다. 이스트로 속성 발효시켜 만든 빵은 소화하기 힘들고 침이 나오지 않아서 콜라나 우유 같은 마실 것을 찾게 된다. 하지만 천연 발효로 잘 구워진 빵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고 입에 침이 고인다.”
프랑스 제빵 장인인 미셸 이자르(Michel Izard)는 “천연 발효 빵은 미생물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발효 물질이 생성돼 향이 특히 깊다. 약간 시큼한 듯한 냄새도 난다. 빵 속은 희지만 약간 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했다. 그래서 천연 발효 빵을 주식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발효 식품이 발달한 나라다. 술, 식초, 청국장,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젓갈 등 다양한 발효 식품이 있다. 콩 발효 식품이 특히 발달해서 메주, 된장, 간장, 청국장이 개발되었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켜 온갖 사기(邪氣)와 나쁘고 독한 기운을 없애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도우며, 피부를 윤기 있게 만든다. 술은 소화를 도와주기에 술 없이 먹으면 한 끼밖에 못 먹을 음식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식초는 따뜻하고 시큼하다. 시큼한 맛이 강해서 염산, 황산처럼 뭉친 것, 종양 등을 뚫고 녹인다. 산후에 피를 많이 흘려서 생긴 빈혈을 치료하고 목 아픈 것을 치료한다. 물고기, 고기, 채소의 독도 풀어준다. 정기신혈(精·氣·神·血)을 수렴해 장수하게 한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콜라가 그렇듯 식초도 살과 오장, 뼈를 손상시킨다. 그렇다고 모든 식초의 신맛이 강한 것은 아니다. 발사믹식초, 흑초, 홍초는 강한 신맛이 아니고 오히려 끝 맛이 달며 입에 침이 고이고 한다.
청국장은 콩을 짧은 기간(며칠)에 발효시킨 음식이다. 향이 강하고 차갑다. 땀을 내어 관절을 편안하게 해주고 독에 중독된 것을 풀어준다. 청국장은 비위와 콩팥 기능을 강화하는 효능이 있다. 가슴이 뭉쳐서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풀어주고 변비와 설사에도 좋다. 콩을 피부에 문지르면 열을 내려준다. 우리나라의 청국장은 일본의 낫토(納豆) 같은 식품이다.
된장은 오랜 기간(몇 달 또는 몇 년)에 걸쳐 발효된 식품이다. 콩의 기본 성질은 해독력에 있다. 한약의 성분까지 해독해버리기 때문에 한약을 복용할 때는 콩 섭취를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발효된 콩은 소화를 돕기 때문에 오장(五臟)을 안정시킨다.
간장은 된장을 담글 때 만들어지는 장이다. 소금이 들어가서 매우 짜다. 벌레에 물렸을 때 간장을 피부에 바르면 해독이 된다. 해독력이 있는 콩이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변비가 있을 때 간장으로 관장을 하면 도움이 된다.
김치는 종류가 무척 많아서 그 효능을 한 가지로 말하기 힘들다. 에는 “배추를 시큼하게 발효시키면 위장의 담연(痰延)을 토하게 할 수 있고 비위를 보하며, 술이나 국수의 독을 풀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소화를 잘되게 해서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것을 막아준다는 의미다. 천연 발효를 시킨 김치는 유산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끝 맛이 달아 침을 잘 나오게 해줘 소화를 도와준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조직검사 보냈어요.”
처음에는 검진을 받아보라는 후배의 권유를 그냥 무시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건강검진센터에서 의사로 일하는 후배의 제안이 고마워 그럴 수 없었다. 약간의 치질이 있는 상황도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장내시경을 받고 난 후 후배가 의외의 말을 전했다. 조직검사라니!
그리고 며칠 후 김재규(金在圭·66)씨는 더 놀랄 소식을 듣는다.
조직검사 결과 직장암이었다.
“그때는 깜짝 놀랐죠, 암이라고 하니까. 수술을 해야 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다들 알 만한 병원으로 향했죠. 문제는 수술시기였어요. 가장 먼저 찾은 종합병원은 4개월은 기다려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 하고, 다른 대학병원에선 3개월 후에 수술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고 친구들이 더 난리였어요. 어떻게 암을 안고 몇 달을 사냐고.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우연한 기회에 암을 초기에 발견했으니까요.”
30년 지기 고향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와 인연이 닿은 의사는 한솔병원의 정춘식(鄭春植·51) 진료원장이었다. 등 떠밀리듯 찾은 한솔병원에서 김재규씨는 한숨 돌렸다. “당장 내일이라도 수술할 수 있다”는 의사의 답변 때문이었다. 그렇게 잡힌 수술 날짜는 2007년 7월 11일. 정확히 10년 전이다.
가족에게 숨긴 채 수술실로 들어가다
“사실 수술날짜가 잡혔는데, 아내에게는 말도 못했어요. 딸에게도 마찬가지고요. 괜한 걱정을 할까봐요. 사업한답시고 밤마다 술에 절어 살았으니, 병 얻은 것이 내 탓인 것 같기도 했죠. 그래서 그냥 정밀 건강검진을 위해 일주일 정도 입원한다고만 말했어요. 아내는 의심했지만 적당히 둘러대고 병원으로 향했어요.”
수술하는 날까지 입원실을 찾아 수선을 떨던 고향 친구들과는 달리 정작 김씨는 두렵진 않았다고 했다. 처음 선고를 받았을 땐 멍해지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이름의 병, 직장암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중년의 경상도 사나이는 링거 스탠드를 한 손에 잡은 채 뚜벅뚜벅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누워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의 거짓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입원해 있을 때 친구 중 한 명이 아내에게 전화로 사실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에게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재규씨는 자신의 병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에 운영하던 회사가 디스플레이 관련 원천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기술을 가져다가 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속상한 일들이 많았어요. 소위 ‘갑질’을 많이 당했죠. 그래서 화풀이하듯 술도 엄청 마셨고, 영업을 위해서 참석하는 술자리도 잦았어요. 말 그대로 몸을 혹사시킨 것이 병을 만든 것 같아요. 한번은 오징어 젓갈을 잘못 먹고 비브리오패혈증에 걸린 적이 있어요. 그때 치료해준 의사가 장 속에 여드름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하라고 했는데 지키질 않았죠. 그것도 8년이나 말입니다.”
김씨가 한솔병원을 선택했던 이유는 수술이 당장 가능하다는 것 말고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은 보편화된 수술법이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복강경수술을 선도하던 병원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보수적인 외과의사들은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개복수술을 고집하던 시절이었다. 현재도 대장항문전문을 표방하는 병원은 전국에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고, 아직도 개복수술 비중이 높은 병원들도 있다.
김씨는 복강경수술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복강경수술은 내시경을 닮은 장비를 몸속에 넣어 수술하는 방식으로, 절개 부위가 작고 장운동도 빨라 식사 시기를 앞당길 수 있어 회복속도가 빠르다. 김재규씨가 수술 일주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직장암은 예방과 치료가 쉬운 암
“종양 사이즈는 좀 큰 편이었지만 아직 주변으로는 전이가 안 된 2기 직장암이었습니다.” 정춘식 진료원장은 당시 김씨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장암은 수술 과정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장암하고 비슷한 성향을 띠는데, 대장은 주변 장기와 붙어 있지 않은 반면에, 직장은 주변에 신경이 복잡하게 자리 잡고 있고 배뇨기능이나 성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김재규씨의 경우에는 다행히 종양 위치가 항문과 4cm 이상 떨어져 있어서 항문을 유지할 수 있었죠.”
직장암 환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항문이다. 직장암은 다른 암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발견이 되고 성장속도도 더디기 때문에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다. 여러 암 중에서 완치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문제는 암 위치에 있다. 항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항문을 제거하고, 인공항문인 영구장루에 의지해야 한다. 영구장루는 일종의 주머니인데 옆구리로 배설물이 배출될 수 있도록 입구를 만들어 이곳을 통해 나오는 배설물을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당연히 환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되지만 암 재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아직까지는 영구장루를 대체할 만한 획기적인 기술은 없다.
1, 2기의 직장암은 수술만으로 대부분 치료가 끝난다. 전이가 염려되거나 재발이 걱정되는 경우에는 방사선 치료도 하지만 드물다. 과거 2기 환자는 경구항암제를 복용하며 재발을 막기도 했다. 김씨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직장암과 대장암 치료를 위한 표적치료제 개발도 이뤄졌지만, 전이가 된 4기 환자에게만 쓰인다.
정춘식 진료원장은 직장암과 관련해 섣부른 자가진단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괜한 걱정만 늘어난다는 것이 이유다.
“직장암의 초기 증상은 몇 가지가 있긴 해요. 변이 가늘어진다든가, 혈변을 본다든가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이러한 증상이 대부분 치질 증상과 겹쳐요. 증상을 자각한다고 해도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기가 그만큼 어려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딱 하나, 대장내시경이에요. 의사가 직접 몸속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죠. 이 방법만큼 정확한 것은 없어요.”
정 원장은 직장암과 대장암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고 말한다.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대장암과 직장암 모두 예방법이 있어요.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해서, 발견되는 작은 용종을 제거하는 거예요. 다행히 이런 용종이 모두 암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고, 용종이 암으로 발전하는 데도 약 10년 내외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40세 이후에는 5년에 한 번 정도 대장내시경을 통해 별다른 변화가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겁니다. 만약 용종이 발견된 적이 있다면 위험군이므로 3년에 한 번 정도로 검사 간격을 앞당기면 그만이고요. 또 가족력이 있다면 30세 이후부터 정기검진을 받는 것이 좋아요.”
암이 생겨도 이렇게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면 수술을 통해 완치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수술이 잘못돼 합병증이 생기거나, 간혹 대장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검진이 제대로 안 되는 ‘블라인드 포인트’의 종양을 놓치는 경우가 있지만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정 원장은 “식생활도 마찬가지예요. 특별히 신경 쓰거나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그냥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생활하기를 권해요. 채식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골고루 많이 드셔서 면역력만 잘 유지하면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수술 후 달라진 삶
물론 수술 후 정상생활로 돌아오는 데는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술 직후에는 화장실을 하루에도 10번 가까이 가는 생활이 반복됐고, 변의가 오는 상황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았다.
“배에서 신호가 오면 무조건 화장실로 가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지사제를 먹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줄이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됐지만, 그래도 평소 같지는 않았어요. 화장실이 없는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가는 것은 꿈도 못 꿨죠. 그래서 웬만한 곳은 차를 끌고 다녔어요. 6개월 정도는 경구항암제를 복용했는데, 이 역시 몸을 무겁게 하더라고요.”
수술 후 김재규씨가 겪은 변화 중 하나는 가족과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릴 때는 허가받은 장소를 찾아 사냥을 즐기고 낚시도 자주 했지만, 지금은 ‘살생’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절 끊었단다. 대신 아내와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를 이끌어온 그는 건강을 위해 일도 줄이고 보안 관련 IT 기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제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때는 그저 먹을 것으로만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생명으로 보여요(웃음). 수술 후에는 아내와 등산을 많이 다녔어요.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 주변에 있는 산이란 산은 모두 다녔어요. 지금은 아내가 더 등산을 좋아할 정도예요. 요즘엔 관절이 좋지 않아 자주 다니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내와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누에박물관을 돌아본 후 격포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로 갔다.
바로 옆에는 채석강이 있다. 층층이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위는 여전했다.
40여 년 전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곳이다.
풍경은 여전한데 그리운 아버지는 옆에 없어 가슴이 아려왔다.
그 당시 아버지는 지금의 필자 나이보다도 어렸다. 필자가 어느새 그때 아버지의 나이를 훨씬 넘어 손주들을 둔 할머니가 되어 있으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과 함께 격세지감이 들었다.
바닷가는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수평선이 눈부시게 푸르고 깨끗해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직 피서철이 아니어서 바닷가는 한적했다.
빨간색의 비치파라솔을 펴니 파란 바다와 넓은 모래사장에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매우 더운 날씨였지만 비치파라솔 아래 그늘은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참으로 쾌적했다.
아이들은 필수품인 모래장난 도구로 융단처럼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대며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필자도 덩달아 행복했다.
오늘은 며느리와 아기들을 외가에 내려주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오전 10시쯤 호텔 체크아웃을 한 후 아쿠아 월드로 가기로 했다.
물놀이만큼 신나는 놀이도 드물어서 어른, 아이 모두 들뜬 기분이 되었다.
실수로 호텔 방에서 커피 컵 하나를 깨뜨려 5000원을 추가로 내야 했다.
아쿠아 월드엔 연휴를 맞아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자녀와 함께 온 젊은 가장이 많았다.
우리 아들과 같은 다정다감한 젊은 아빠들이 많이 보여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필자도 물을 좋아해 수영장이 즐거웠다.
수영장 안에서는 필수로 수영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데 수영 모자가 머리를 찰싹 눌러 웬만큼 두상이 예쁘지 않으면 어울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수영 모자 쓰는 게 불편했는데 요즘엔 야구 모자로 대신해도 되어 훨씬 편해졌다.
아쿠아 월드는 실내와 옥외 수영장이 연결되어 있었고 아기들을 위한 작은 풀과 폭포, 여러 가지 슬라이드 놀이기구도 있었다.
필자가 가장 즐겼던 건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살 마사지였다. 여기저기 마구 두드리는 물줄기가 마치 안마를 받는 것처럼 시원하고 좋았다.
또한 아이들이 즐기는 슬라이드도 즐겼다. 곡선의 통로를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무섭고 불안했지만 신나게 미끄러지는 게 즐거워 눈치도 보지 않고 자꾸만 줄을 섰다. 아들은 아이들보다 엄마가 더 좋아하신다며 웃었다.
서너 시간 놀다가 이곳의 유명 특산품 젓갈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
며느리의 친정이 있는 계룡으로 가야 했으므로 젓갈로 유명한 강진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진에 가까워져 오니 동네가 온통 젓갈 판매장으로 가득했다.
아직은 젓갈 철이 아니어선지 동네는 한산했다.
한 젓갈 판매장에 들어가 사돈께 드릴 젓갈 세 종류와 필자가 좋아하는 낙지젓을 골랐다.
짭짤한 맛이 좋아 시식을 자꾸만 했더니 입안이 얼얼했다.
판매점 주인에게 동네가 조용하다고 하니 김장철에는 활기를 띤다고 한다.
계룡에 도착하니 사돈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저녁을 함께한 뒤 며느리, 손주들과 바이바이를 했다.
외할아버지 차에 탄 손녀가 큰 소리로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외쳐서 가슴이 뭉클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기들은 외가에서 며칠 즐거울 것이다.
연휴 중간이라 그런지 길도 막히지 않아 아들과 필자는 휴게소마다 서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며 고속도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2박 3일의 꿈같은 휴가여행을 마치고 나니 몸과 마음이 힐링이 되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여행이란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준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벌써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연휴 여행에 엄마를 초대한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올 것이 왔다 싶었다. 화장실에서 평소와 다른 시커먼 그것을 보았을 때 말이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것은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그의 병이 위암이라고 했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서 만난 오성표(吳聖杓·68)씨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상부위장관외과 장유진(長有鎭·40) 교수를 만나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병을 부정하며 진단을 탓한다. 그렇게 여러 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반복한다. 그러나 오성표씨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암인지 알기 2년 전쯤에 집안에 힘든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2011년쯤이었습니다. 그때 실의에 빠져 매일 술로 살았거든요. 잠이 오질 않으니 자기 전 소주를 들이켰고, 새벽에 잠에서 깨 맨정신이 되면 또 괴로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침 5시부터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죠.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으니 몸이 온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흡연도 문제였다. 아내와 자녀의 잔소리는 수십 년째 이어졌지만 끊기가 힘들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담배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씨가 놀라지 않았던 데에는 주변 지인들을 통해 위암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이유도 있었다. 먼저 병을 경험한 선배(?)들은 위암은 이제 치료가 가능해진 병이라고 했다.
몸이 보낸 구원의 신호
그렇게 지내다 혈변을 몇 차례 확인하곤 동네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암의 진행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두 곳의 종양 중 하나는 초기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1기에서 2기로 막 넘어가려는 상태였다. 의학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몸이 ‘혈변’이란 신호를 보내준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위암은 대부분의 경우 초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위암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은 소화불량이나 복부의 불편감 정도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다. 결국 정기적인 검진 정도가 일찍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인데, 오씨는 검진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어려운 자영업자라서 이 점에서도 불리했다.
그렇게 불행 중 다행으로 암의 존재를 알게 된 오씨는 지인 소개로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을 찾는다. 수술 날짜를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씨의 운명을 좌우할 수술 집도의 장유진 교수를 만난다.
장유진 교수는 서울삼성병원 안지영 교수, 보라매병원 안혜성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위암 분야 여성 외과의사 1세대로 꼽힌다. 그전까지는 남성 의사의 전유물이었던 셈이다. 흔치 않은 여성 외과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괜한 염려를 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오씨의 대답이 돌아온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여자 의사도 이런 수술을 하는구나 했죠. 얼마나 잘하시길래 여자 의사가 이런 수술을 하실까 하며 별 걱정 안 했어요.”
장유진 교수도 같은 대답을 한다.
“처음 부임할 때 병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걱정을 했죠. 혹시 환자들이 거부감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괜한 기우였어요. 환자분들은 선입견에서 훨씬 자유로워요. 어차피 이름을 보고 미리 성별을 짐작하고 오시기 때문에 처음 대할 때 어색함은 없었죠. 오히려 여자 의사라서 꼼꼼하게 더 잘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수술 난이도 높인 심방세동
하지만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수술에 문제가 생겼다. 외과의들이 꺼려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위의 상태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 위의 벽은 모두 5개 층으로 이뤄졌는데, 그중 큰 것이 안쪽에서 3개 층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죠. 암이 발생한 위치도 모두 아래쪽이어서 위 전체를 잘라낼 필요 없이 3분의 2 정도만 절제하면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부정맥으로 인한 심방세동이었죠. 심장이 떨면서 피떡이 만들어질 수 있어 피가 굳지 않도록 항응고제를 드셔야 하는데, 수술 부위가 아무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출혈이 계속되면 상황이 좋지 않으니 주의해야 했어요.”
그리고 2013년 9월 9일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오씨는 그날을 자세히 기억했다. 워낙 겁이 없고 담담했던 그도 그날만큼은 겁이 덜컥 났단다.
“수술실 바닥은 모양에 신경 쓰기보다 청소하기 쉽도록 되어 있잖아요. 수술 도구들도 많고요. 그것을 보니 예전에 갔었던 소 도축장이 생각나더라고요. 묘한 기분이 들면서 진짜로 내가 수술을 한다는 실감이 났죠. 그리고 마취에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수술 후더라고요.”
수술은 복강경 수술로 진행됐다. 복강경 수술은 끝에 수술 도구가 달린 기다란 막대만을 몸속에 넣어 집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개복 없이 4cm 이하의 크기로만 절개하면 충분하다. 절개 부위가 적어 환자의 회복은 빠르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개복 수술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에 외과의사의 섬세함이 필요한 수술 방법이다.
장 교수는 수술 과정에서 정확한 범위의 림프절을 절제하고 출혈부위를 최소화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수술은 기대했던 대로 성공적이었다. 걱정했던 출혈도 없었고 회복도 빠르게 이뤄졌다. 항응고제도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투약할 수 있었다.
위암 수술의 성패는 조기발견
대체 위암은 왜 생기는 것일까? 위암은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암종 중 하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 조기위암 통계자료를 보면 위암 환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011년 5만1584명에서 2015년 7만1564명으로 5년 새 약 39%가 증가했다. 또 2015년 기준, 60대가 31%(2만2245명)로 가장 많았고 70대와 50대가 그 뒤를 이었다.
위암의 원인으로는 몇 가지가 지목되고 있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소금이다. 실제로 서구식 식생활을 하는 나라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위암 환자 비중은 높은 편이다. 찌개, 김치 같은 고염식이나 젓갈 등의 염장 음식을 즐기는 식습관 때문이다. 직화나 훈제 같은 조리법도 위암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 발표가 있다.
위암 발병은 여성에 비해 남성이 두 배 정도 많은데, 상대적으로 음주 과정에서 짜고 자극적인 음식 섭취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장유진 교수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젊은 여성은 비슷한 연령의 남성이나 갱년기가 지난 여성보다 위암 발병률이 낮은 대신, 암이 발생하면 치료가 어려운 ‘반지고리형 암’인 경우가 많다. 의학계에선 이 원인을 여성호르몬으로 지목하고 있다.
장 교수는 위암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위암은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1기 정도에만 발견되면 우리가 완치라고 부르는 5년 생존율이 97%까지 올라가요. 국가에서도 국가암조기검진사업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위내시경으로 위 상태를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위암은 거의 대부분 수술로 치료한다. 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고 위의 위치가 상부에 있거나 암의 진행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완전히 잘라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항암 치료제나 표적 치료제가 활용되기도 하지만 위암의 특성상 수술이 가장 확실한 치료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위 ‘약빨’이 잘 듣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위암은 많이 발생하는 만큼 치료 수준도 높다. 환자가 많다 보니 의료 현장의 전문의들 경험이 많아 국내 의사들의 위암 수술과 치료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그래서 장 교수는 위암 판정을 받으면 반드시 수술 전문가, 특히 소화기외과의와 상의할 것을 권한다. 치료 과정이 수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외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85%나 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소화기내과와 종양내과 전문의들도 치료에 참여한다. 장교수는 수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면 병만 키울 뿐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활동적 생활로 긍정적 마음 갖게 돼
흔히 위의 일부나 전체를 잘라내면 잘 먹지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오씨의 경우처럼 3분의 2 정도 잘라낸 사람도 일반인과 비슷한 식사량을 보인다. 오씨 역시 그랬다.
“수술을 하고 나서 처음 한 달 정도는 죽 같은 것만 먹었죠. 하지만 이후부터는 예전처럼 식사를 했어요. 지금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살고 있어요. 사실 어려운 수술도 했고, 위의 절반 이상을 잘라냈는데 그 전과 달라진 것을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도 위암 수술을 하고 난 뒤 환자들에게 잘 먹을 것을 권한다. 영양분 흡수가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철분 결핍성 빈혈이나 비타민D 부족으로 인한 골다공증도 걱정해야 한다. 장 교수는 “수술 후 석 달 동안은 영양실조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래서 무리한 저염식, 특히 소금을 아예 안 쓰는 금염식은 말리죠. 일단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수술한 환자는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지는데 입맛까지 잃으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안정이 되면 금염이 아닌 저염식 식사를 권하죠”라고 말했다.
물론 오성표씨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술을 줄였다. 그렇게 즐기던 술은 이제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한두 잔 마신다. 그리고 새벽에 운동도 시작했다. 특히 다시 시작한 일은 그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차에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싣고 경로당이나 마을회관 등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 옛날로 치면 보부상 같은 일이다. 워낙 활동적인 일이다 보니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특히 여러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요즘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다. 교수님은 술은 위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술에 의지했던 그 시절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특히 친구들을 만나면 늘 말해요. 아무리 속상해도 빈속에 강술은 먹지 말라고요. 안주 ‘좋은 놈’으로다가, 밥하고 같이 먹으라고요.”
건강을 위해 도시락을 먹는다고 하면 의아할 것이다. 도시락은 편리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지만, 그만큼 맛과 영양은 부실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저 가볍게 한 끼 때우기 식사가 아닌 내 건강상태까지 고려한 맞춤 도시락이라면 어떨까? 물론 가장 중요한 ‘맛’을 빼놓을 수는 없다. 프리미엄 도시락 전문점 ‘바빈더박스’에서 찾은 맛과 건강, 그리고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계기로 본지 제작에 참여한 김홍관 시니어 인턴기자가 직접 체험하며 맛본 도시락 후기까지 담아봤다.
‘대한민국 액티브 시니어 라이프스타일 조사’에 따르면 소득수준을 불문하고 5060세대의 고민 1위는 ‘건강’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운동이나 음식을 통해 건강을 챙기려는 이는 많지만, 꾸준히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고혈압, 당뇨가 있거나 다이어트를 결심하면 매일 식탁에서 마주하는 음식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건강을 위해서라지만 번거로운 일이라 관리에 소홀해져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많다. 바빈더박스의 장대근 대표는 이러한 식단 관리의 불편함은 줄이고 맛과 건강을 더할 방법으로 ‘도시락’을 제안한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면서 맛과 영양까지 담아내기 위해 ‘건강한 조리법’과 ‘엄선된 식재료’를 원칙으로 삼았다.
세계 3대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를 졸업한 후 해외 유명 레스토랑에서 미슐랭 셰프들에게 요리를 사사한 장 대표는 음식이 우리 몸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길로 운동학을 배우며 헬스 트레이너와 크로스핏(고강도 복합운동) 자격증을 따는 등 음식과 운동 두 분야를 고루 섭렵했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는 개인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한 맞춤형 도시락 상담이 가능하다. 도시락은 원하는 기간, 시간, 횟수 등을 정해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어 꾸준한 식단 관리에 유용하다. 장 대표는 “중·장년의 경우 커다란 근육을 키우는 것보다는 일상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기능적인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필수 영양소가 고루 들어 있으면서도 자극적인 맛은 줄인 도시락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패스트푸드처럼 여기는 도시락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수비드(sous-vide, 저온 진공조리) 공법으로 재료의 식감과 영양을 살렸다. 인스턴트 도시락에는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튀김 메뉴가 주로 쓰이지만, 바빈더박스 도시락에는 튀긴 음식은 찾아볼 수 없다. 재료의 수분과 영양소 파괴를 줄일 수 있는 수비드 공법으로 조리하면 손은 더 많이 가지만 시간이 지나 도시락을 먹어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즐길 수 있다. 화학조미료로 맛을 내지 않고, 유기농 채소 등 신선한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한다. ‘도시락이라는 작은 공간에 자연을 가득 담아 정성을 선물하겠다’는 게 그들의 모토(motto)다.
새해를 맞아 건강 식단 관리를 염두에 두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김홍관 시니어 인턴기자가 나섰다. 직접 자신의 상태를 토대로 상담을 받고 그에 맞춘 도시락을 주문했다. 조리해서 바로 먹지 않는 도시락의 특성상 포장 후 5시간 뒤에 맛보았다.
◇ “비타민과 영양은 올리고, 염분과 당분은 낮추고” (61세 남성 시니어, 기자 본인)
이번 탐방은 시니어를 위한 프리미엄 수제 도시락 전문점에서 이루어졌다. 자신의 체형, 건강상태, 입맛 등을 고려한 맞춤형 도시락 주문이 가능해 육식을 줄인 채식 위주의 식단을 요청했다. 상담 결과 단백질과 비타민 성분이 풍부하고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생굴해산물볶음 도시락을 추천받았다. 신선한 생굴과 더불어 주꾸미, 홍합, 야채 등이 어우러진 메뉴다. 시중에 파는 도시락은 물기가 별로 없는 반면, 본 도시락은 재료 본연의 수분을 함유하는 수비드 공법으로 조리해 식감이 부드러웠고 맛도 좋았다. 반찬은 오징어젓갈, 매실절임, 배추김치, 소고기장조림 등이었다. 간이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해 먹기 편했다. 밥은 곤드레나물밥이었는데, 볶음밥처럼 수분이 없고 꼬들꼬들했다. 도시락에 담기 전 팬에 볶아내기 때문인데 상담 시 요청하면 부드러운 밥으로 받아볼 수 있다. 도시락 용기가 환경호르몬이 발생되지 않는 무해한 재질이라 시간이 지나 온기가 없는 음식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도 된다고 한다. 도시락 용기와 포장 디자인은 우리나라 전통 문양인 문창살을 형상화해 고급스러워 보였다. 기본 메뉴에 국물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 역시 컨설팅 과정에서 된장국 등을 추가 주문할 수 있다. 가격은 주문 메뉴에 따라 차이가 난다. 기자가 주문한 도시락 가격은 1만2000원.
◇ “굶지 않고 맛있게 즐기는 다이어트 도시락” (60세 여성 시니어, 다이어트 중)
저칼로리, 저지방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도시락을 주문했다. 컨설턴트는 바빈더박스의 메뉴 중 여성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헬스메뉴’를 제안했다. ‘헬스메뉴’는 기름기가 없고 단백질 성분이 풍부한 닭가슴살이 담긴 샐러드다. 비타민과 칼슘이 풍부한 미니 양배추, 그린 빈, 방울토마토, 케일, 아마란스 등 신선한 채소와 말린 과일이 들어 있다. 닭가슴살과 채소는 40~60도에서 저온 수비드 공법으로 조리해 수분기가 많았다. 촉촉한 닭가슴살과 신선한 채소 본연의 맛과 향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샐러드드레싱은 과카몰리와 오리엔탈소스가 제공된다. 과카몰리소스는 아보카도로 만들어 걸쭉하면서 깊은 맛을 낸다. 오리엔탈소스는 간장을 베이스로 해 가볍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다. 주문한 도시락 가격은 8000원.
△ 도시락 문의 www.babindbox.co.kr
분당점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103-9 (031-704-8180)
홍대점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6 (02-336-8180)
가을이 온전하게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논 물웅덩이에도 얼음이 얼었다. 추수 끝자락 논에 널린 볏짚 위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강아지 목줄을 잡은 손끝이 시리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다. 찬바람이 대나무 잎을 가르며 쌩쌩 불던 겨울 밤, 어린 필자는 어머니 따뜻한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다. 생일이면 꼭 끓여주시던 따끈한 미역국도 생각난다.
미역국은 아이를 낳은 산모에겐 필수 음식이다. 산후조리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모의 밥상에 꼭 올라오는 음식이다. 가난한 산골마을에서도 아이를 낳은 산모는 미역국을 꼭 먹었다. 아내가 큰아들 낳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두 손주를 우리 부부에게 안겨준 녀석이다. 80년생이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아내는 서울시 망우리의 처가에서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의 산통이 잦아져서 청량리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차를 불렀으나 도착이 늦어 처가 근처의 작은 병원에 급히 입원했고 그곳에서 첫아이를 순산했다. 여기서도 아침, 점심, 저녁 산모 밥상에는 미역국이 따라 나왔다. 아내는 매번 미역국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그나마 필자와 시어머니의 권유로 두세 숟가락 떠먹는 게 고작이었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알지만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젓갈을 좋아하는 등 다소 짜게 먹던 아내의 입맛에는 싱거운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미역국을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미역국을 남기면 대신 필자가 먹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고 했으니 남편이 미역국을 먹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을 잘 먹었다. 특히 부드럽게 푹 끓인 미역국을 아주 좋아했다.
필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피난처를 찾아 거창 지역에서 산을 넘고 넘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하셨고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고 청학동 계곡 주변에서 다랑논을 만들어 논농사도 지으셨다. 어느 가을날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총질을 하지 않고 소나무 둥치에 묶어두고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밧줄을 간신히 풀고 그 길로 동네를 떠나셨다.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도 팽개치고 빈 몸으로 청학동에서 10리 길이나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마을로 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
옛날 시골생활이 다 그랬듯이 필자의 집도 지지리 못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춘궁기면 뒷산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고들고들 말려둔 것을 솥에 넣어 밥을 해먹는 날이 다반사였다. 고향 마을에선 이것을 ‘송구밥’이라 불렀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생일이면 어머니는 집 안 구석에 아껴둔 찹쌀과 팥으로 찰밥을 하셨고 미역국도 함께 끓여내 주셨다. 미역은 아버지가 하동읍 장날에 40리 길을 걸어가 사오셨다.
생일 아침이면 새벽녘에 일어나신 어머니가 불을 지펴 큰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작은 가마솥에는 미역국을 끓이셨다. 그런 뒤 안방 윗목에 정화수 한 사발과 팥물이 곱게 물든 찰밥 한 그릇, 미역국 한 대접 그리고 잘 다듬은 짚 서너 줄기를 묶어 벽에 비스듬히 세우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를 드렸다. 꿰맨 자국이 있는 치마저고리이지만 깨끗이 손질해 갈아입으시고 다소곳이 앉으셔서 두 손을 비비시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그러고 나면 찰밥과 미역국은 필자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의 미역국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역국에 고기를 넣을 만큼 형편이 좋은 살림이 아니어서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을 맞췄을 뿐인데도 참 맛있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었으니 당연히 꿀맛이었다. 미역 또한 자연산 돌미역이었을 테니 지금보다 그 맛이 풍부하면서도 구수했다. 세월이 흘러 먹거리가 많아진 요즘 세상에도 미역국은 여전히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지금은 거의가 양식 미역이다 보니 예전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미역국을 즐긴다.
남편들은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기 힘들다. 물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이것저것 다 챙기는 아내들도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야 더 정성이 담긴다. 서울에서 주로 자라고 생활한 아내의 입맛과 시골 촌놈인 필자의 입맛이 비슷할 리 없다. 두 사람 입맛이 비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건강을 위한 웰빙 먹거리 바람 덕에 요즘은 아내도 시골 음식을 점점 좋아하고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비롯해 우거짓국, 된장찌개, 청국장도 밥상에 자주 오른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채소 코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즐겨 먹는 머위, 곰취에 아내도 이젠 익숙해졌다. “시골 촌사람 아니랄까봐 티낸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이젠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는 아예 주변이 논밭인 고양시의 외곽 전원마을에서 살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 텃밭도 가꾼다.
나이가 들어가고 미역국을 좋아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살다 보니 아내도 요즘은 입맛을 들여 자주 미역국을 끓인다. 쇠고기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끓여 한 대접 가득 퍼주면 필자는 뚝딱 먹어치운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입맛과 지금의 입맛이 같을 수는 없다. 고기도 안 들어가고 양념도 안 된 미역국이지만 가끔 어린 시절에 먹던 그 담백한 맛을 느끼고 싶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미역국을 먹을 때면 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새벽에 필자에게 줄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손으로 끓이시던 미역국은 이제 필자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젖줄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필자가 미역국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