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과 어머니

기사입력 2016-11-01 11:26 기사수정 2016-11-01 11:26

가을이 온전하게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논 물웅덩이에도 얼음이 얼었다. 추수 끝자락 논에 널린 볏짚 위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강아지 목줄을 잡은 손끝이 시리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다. 찬바람이 대나무 잎을 가르며 쌩쌩 불던 겨울 밤, 어린 필자는 어머니 따뜻한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다. 생일이면 꼭 끓여주시던 따끈한 미역국도 생각난다.

미역국은 아이를 낳은 산모에겐 필수 음식이다. 산후조리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모의 밥상에 꼭 올라오는 음식이다. 가난한 산골마을에서도 아이를 낳은 산모는 미역국을 꼭 먹었다. 아내가 큰아들 낳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두 손주를 우리 부부에게 안겨준 녀석이다. 80년생이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아내는 서울시 망우리의 처가에서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의 산통이 잦아져서 청량리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차를 불렀으나 도착이 늦어 처가 근처의 작은 병원에 급히 입원했고 그곳에서 첫아이를 순산했다. 여기서도 아침, 점심, 저녁 산모 밥상에는 미역국이 따라 나왔다. 아내는 매번 미역국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그나마 필자와 시어머니의 권유로 두세 숟가락 떠먹는 게 고작이었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알지만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젓갈을 좋아하는 등 다소 짜게 먹던 아내의 입맛에는 싱거운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미역국을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미역국을 남기면 대신 필자가 먹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고 했으니 남편이 미역국을 먹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을 잘 먹었다. 특히 부드럽게 푹 끓인 미역국을 아주 좋아했다.

필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피난처를 찾아 거창 지역에서 산을 넘고 넘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하셨고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고 청학동 계곡 주변에서 다랑논을 만들어 논농사도 지으셨다. 어느 가을날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총질을 하지 않고 소나무 둥치에 묶어두고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밧줄을 간신히 풀고 그 길로 동네를 떠나셨다.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도 팽개치고 빈 몸으로 청학동에서 10리 길이나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마을로 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

옛날 시골생활이 다 그랬듯이 필자의 집도 지지리 못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춘궁기면 뒷산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고들고들 말려둔 것을 솥에 넣어 밥을 해먹는 날이 다반사였다. 고향 마을에선 이것을 ‘송구밥’이라 불렀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생일이면 어머니는 집 안 구석에 아껴둔 찹쌀과 팥으로 찰밥을 하셨고 미역국도 함께 끓여내 주셨다. 미역은 아버지가 하동읍 장날에 40리 길을 걸어가 사오셨다.

생일 아침이면 새벽녘에 일어나신 어머니가 불을 지펴 큰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작은 가마솥에는 미역국을 끓이셨다. 그런 뒤 안방 윗목에 정화수 한 사발과 팥물이 곱게 물든 찰밥 한 그릇, 미역국 한 대접 그리고 잘 다듬은 짚 서너 줄기를 묶어 벽에 비스듬히 세우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를 드렸다. 꿰맨 자국이 있는 치마저고리이지만 깨끗이 손질해 갈아입으시고 다소곳이 앉으셔서 두 손을 비비시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그러고 나면 찰밥과 미역국은 필자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의 미역국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역국에 고기를 넣을 만큼 형편이 좋은 살림이 아니어서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을 맞췄을 뿐인데도 참 맛있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었으니 당연히 꿀맛이었다. 미역 또한 자연산 돌미역이었을 테니 지금보다 그 맛이 풍부하면서도 구수했다. 세월이 흘러 먹거리가 많아진 요즘 세상에도 미역국은 여전히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지금은 거의가 양식 미역이다 보니 예전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미역국을 즐긴다.

남편들은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기 힘들다. 물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이것저것 다 챙기는 아내들도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야 더 정성이 담긴다. 서울에서 주로 자라고 생활한 아내의 입맛과 시골 촌놈인 필자의 입맛이 비슷할 리 없다. 두 사람 입맛이 비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건강을 위한 웰빙 먹거리 바람 덕에 요즘은 아내도 시골 음식을 점점 좋아하고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비롯해 우거짓국, 된장찌개, 청국장도 밥상에 자주 오른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채소 코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즐겨 먹는 머위, 곰취에 아내도 이젠 익숙해졌다. “시골 촌사람 아니랄까봐 티낸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이젠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는 아예 주변이 논밭인 고양시의 외곽 전원마을에서 살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 텃밭도 가꾼다.

나이가 들어가고 미역국을 좋아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살다 보니 아내도 요즘은 입맛을 들여 자주 미역국을 끓인다. 쇠고기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끓여 한 대접 가득 퍼주면 필자는 뚝딱 먹어치운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입맛과 지금의 입맛이 같을 수는 없다. 고기도 안 들어가고 양념도 안 된 미역국이지만 가끔 어린 시절에 먹던 그 담백한 맛을 느끼고 싶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미역국을 먹을 때면 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새벽에 필자에게 줄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손으로 끓이시던 미역국은 이제 필자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젖줄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필자가 미역국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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