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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 인생 60주년 배우 이순재, 다시 오른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를 향한 열정과 확신
- 대표 원로배우 이순재가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아 아서 밀러의 대표작 을 올린다. 이번 작품은 중견배우 손숙이 파트너로 나서고, 그의 제자들이 뜻을 함께한 데 더욱 의미가 있다. 공연 시간만 약 3시간에 달하는 데다가, 주인공 윌리 로먼의 대사가 580마디에 이르는 등 이순재의 어깨가 무겁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 대본을 연구하고, 누구보다 빨리 대사를 암기하는 등 책임감 넘치는 모습으로 현장 스태프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한다. 60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배우 이순재의 연기 열정과 그칠 줄 모르는 연기자의 고뇌와 노력에 대해 들어봤다.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이하는 소감, 기념 공연으로 을 선택하게 된 계기 그동안 40주년, 50주년일 때도 그랬지만 햇수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그것을 계기로 연극을 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하려 했어도 지금과 같은 무대를 마련하기는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내 생일 날짜도 잘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그런 것에 무심한 편인데 오히려 일이 커져서 송구스럽고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막상 60주년이라는 말이 붙으니 마땅한 작품이 없더라고요. 나를 위해 일부러 쓴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역이 앞에 나오는 작품도 드무니까요. 그러던 중에 이 떠올랐죠. 세월이 갈수록 새로운 의미와 의도를 발견하는 게 고전 아니겠어요. 그동안 원작을 그대로 살린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해 보자고 했습니다. 작품이 지닌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나 깊이를 담기 위해서는 원작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이 올해가 처음은 아닌데, 그동안에 변화가 있었다면? 1978년도에 처음 이 작품을 했었죠. 고 김의경 연출이 맡을 때였는데, 그 당시에 나에겐 큰 역할이라 조심스럽게 맡았던 거였어요. 그때 해보니 아주 좋은 작품이더군요. 원작은 1940년대 작품인데 당시엔 미처 잘 이해 못 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개발 후에 오는 도시 공해, 환경 문제 등에 대해 우리나라는 생각하지 않을 때라 생소할 수밖에요. 가스흡입에 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그 시절 우리는 연탄을 땠으니…. 그런 문학적·상징적 표현에 대한 해석이 잘 안 됐고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1막 끄트머리에 “달이 아파트 사이로 간다”는 대사가 나오거든요. 나는 그저 기분 좋게 보았던 달인데 알고 보니 그 달의 영역이 축소됐다는 건 세일즈맨 자신의 사회적 영역이 축소된 것에 비유한 비탄이었던 셈이죠. 그러고 나서 2000년도에 드라마 이 끝나고 한 3개월 정도 공백기가 있었는데 한참 연극을 안 했을 시기라 연극 한번 했으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마침 제안 들어온 작품이 또 이었어요. 그땐 윤소정씨가 파트너였죠. 확실히 처음 할 때보다 더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뒤에 김명곤 전 장관이 연출한 라고 해서 한국버전으로 했을 때, 그리고 이번에 6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하게 됐죠. 오래된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한국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4번째 연기하는 윌리 로먼, 이번 무대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다. 그리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연극은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배우가 다 감당해야 해요. 나중에 끝나고 연출에게 야단맞더라도 그 순간에 중단할 수가 없으니까요. 편집도 없고, 올려놓으면 끝날 때까지는 배우의 몫인 거죠. 특히 이번 작품은 배우가 표현해야 할 디테일이 아주 많습니다.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며 극의 의도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상당히 힘이 필요한 작품이죠. 해외의 한 배우가 40대에 이 역할을 맡고 “나는 젊어서 이 역할이 안 되겠다”고 했더니 연출이 “이 작품은 힘이 들어서 나이 먹으면 못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만큼 격렬한 역할이기 때문에 40~50대 정도 돼야 소화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부분이 힘들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젊을 때보다 나이 먹어서 하니 그 정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장점이에요. 힘은 떨어지지만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마음에 와 닿는 게 많아져서 다시 한번 해보자 결심했어요. 이제 작품의 갖고 있는 의미나 상징성, 작가의 의도 등은 거의 이해했고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더 원숙하고 정밀하게 표현해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작품 속 아버지 윌리 로먼과 아버지 이순재의 닮은 점 잘나가고 떵떵거리는 아버지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심리적인 어려움은 모든 아버지가 공통으로 느낄 거예요. 배우는 정년이 없다고 다르게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똑같아요. 나 역시 돈 못 버는 배우였고, 바쁘게 일하느라 아이들과 시간 못 보내고, 밤낮으로 돌아다니니까 집사람과 여행도 제대로 못 해보고. 또, 배우라는 명성은 있지만 배역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 얼마나 가족에게 면목 없어 하는지…. 다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 직종을 택했던 자존심과 의지가 있는데 뜻대로 안 됐을 때의 회의감이나 허탈감이 들겠죠.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조건이 위축됐을 때의 고민이 왜 없겠어요. 은 그런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극 속 상황은 경제공황으로 밀어닥친 여파이지만, 사실 이 아버지는 세대 차이에서도 밀려요. 새로운 세대로부터 밀려 나가는 그런 필연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위기의식,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고통을 느끼는 아버지들이 많을 겁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조건은 앞으로도 달라지기 어렵고, 그런 면에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느낄 수 있어요. 원로배우로서의 사명감 아들 역을 맡은 배우들은 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에요. 나는 이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경험을 통한 하나의 실습과정일 뿐이라 생각해요. 연기라는 것은 이론도 필요하지만 작품의 주제, 사회적 메시지, 자기 역할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다행스러운 건 다양한 매체와 수단이 발달해서 젊은 친구들의 그런 이해력은 더 좋아졌어요. 그렇다고 그게 다가 아니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건 훈련을 통해 터득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역할에 확신을 해야 할 수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제자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함께 경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남다른 연기 열정에 대해 배우 손숙이 “이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에 대해 답한다면?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죠. 싫은 일을 하면 이렇게 견딜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우리 일이라는 게 끝이 없어요. 예술적 창조애가 어디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의 어느 거목이라 하면, 그저 거목이 있었을 뿐이지 그게 완성과 끝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도전하고 개발하고 창조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아무리 막장 드라마 할아버지라도 이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다 다르지 않겠어요? 연기를 달리하겠다는 의지와 발견, 그런 창조적 활동이 재미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껏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거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면 재미없잖아요. 그게 우리 직업의 장점이자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이 마지막 이라 생각하고 임했다”고 했는데, 그 의미와 60주년 이후 배우 이순재의 모습 각오라면 각오이겠고,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나이도 있고 하니 언제까지 현재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론 배우는 누군가가 불러줘야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도 있어요. 바로 암기력입니다. 대사를 못 외워서 후배나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미안하잖아요. 그러면 그때는 내가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해야죠. 물론 어느 정점이나 연령에서 ‘이제 끝이 왔구나’라고 판단하고 나태해지면 정말 그걸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런 한계를 두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탕이 돼야겠죠. 나뿐만 아니라 신구, 박근형 이런 친구들이 건재한 이유는 그런 점에서 자기 관리와 개발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에요. 이번 연극 중 윌리 로먼이 아들에게 “봐라.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게 물론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영역은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자기 확신을 두고 최선을 다하는 게 현재의 노력이라 생각해요. △ 배우 이순재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 12월 13~2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박병수 연출, 이순재ㆍ손숙ㆍ이문수ㆍ맹봉학ㆍ김기훈 등 출연
- 2016-12-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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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돌보기 이렇게 했다]⑤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한 세 가지 삶
-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희미한 여명(黎明)이 창문을 통해 침실로 스며들면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로 나가 50여 년 세월을 살다 보니 그 소리를 잊고 산 지 꽤나 오래되었다. 필자는 도회지의 어둠을 회색빛 어둠이라고 표현한다. 가로등 불빛, 집 안 곳곳의 스위치에서 꺼지지 않는 빛, 그리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박명(薄明). 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완벽한 어둠’을 빼앗겼다. 가끔은 완벽한 어둠이 그리워진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달빛도 느껴보고 싶다. 필자는 2014년 말에 정년퇴직했다. 헤아려보니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다.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 세월 속에서 필자 인생 절반 이상은 훌쩍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이었다.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던 시간, 정녕 내 자신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정년퇴직 직전에 필자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퇴직 후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자신을 되찾고 싶어 세 가지를 준비했다. 그 첫째는 ‘글쓰기’였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만화책을 좋아했던 필자는 책 읽는 취미가 붙어 학급문고에 비치되어 있던 동화책들을 몽땅 읽어치웠다. 독서를 많이 해서였는지 작문(作文)에도 소질을 보여 교내외 백일장을 나가면 꼭 상을 타곤 했다. 퇴직 후 시간이 생기니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2009년 11월에 수필가로 등단을 하고 2013년에는 두 권의 수필집까지 출간하게 됐다. 두 번째는 ‘서예’ 공부였다.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이었다. 어린 시절,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집에서 살았던 필자는 그 영향을 받아 서예에도 관심이 많았다. 퇴직하기 5년 전부터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가던 2013년 11월 어느 날, 필자는 인사동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 닦으며 쓴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筆力)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과 함께하는 전시회가 좀 더 정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해서 겁도 없이 명함을 내밀었다. 세 번째는 양지바른 고향 언덕 위에 소박한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만 했다.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이번만큼은 필자 의지대로 밀고 나가기로 하고 정년퇴직을 하던 해에 고향 친구를 통해 우선 집을 지을 만한 조그마한 땅을 한 필지 사두었다. 퇴직 후 1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후, 필자는 세 번째 목표를 위해 큰 결정을 했다.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와버린 것이다. 우선 친구 집에 방을 하나 얻어 숙식을 하면서 공항 물류 단지 내에 있는 반도체 제조공장에 취직을 했다. 또 정신없이 살다 보니 고향에 내려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나마 연착륙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으로 내려오자 도시의 회색빛 어둠은 사라지고 완벽한 어둠이 침실을 점령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자연의 밤인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밤벌레 소리, 가끔씩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교교한 달빛이 필자를 설레게 한다.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되찾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또 긴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매일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나이 육십을 넘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으니 다소 늦은 감이야 없지 않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제 세 번째 목표를 위해 점진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목표가 이루어지고 나면 매일 향긋한 묵향(墨香)에 취해 나른한 오후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 2016-12-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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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행복 노후 은퇴 설계 멘토가 된 정기룡 전 대전중부경찰서장 "퇴근 후 2시간, 퇴직 후 20년을 위한 골든타임"
- ‘수십 통의 전화도 이젠 스팸 문자 달랑 세 통. 식탁 내 자리는 아내가 차지했네. 아이고 내 신세. 장롱 속에 철 지난 옷들, 통 넓은 양복바지 저 주인이 누구였었나 이젠 짐 덩어리. 아~ 지나간 시간, 아~ 그리운 시간, 있을 때 잘할걸, 퇴근 후 2시간’ 정기룡(鄭基龍·59) 미래현장전략연구소 소장 겸 삼성에스원 충청 상임고문이 작사한 노래 ‘퇴근 후 2시간’의 가사다. 노래 속 그의 어깨는 처져 있지만, 이제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현역 때 못지않은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다. 지금의 행복한 시간이 있기까지, 그의 두 번째 인생 시계는 10여 년 전부터 돌아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0년 그가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전 보문산에 경찰 서류 800건이 버려져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 관내가 아니니 문제없다”고 보고했던 그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자신이 소속된 대전 서부경찰서의 수사과 서류였다. 한 직원이 사무 감사를 앞두고 업무에 부담을 느껴 서류들을 산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담당 직원은 구속되고, 당시 서장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가자 그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내가 걱정하면서 ‘중징계 먹으면 퇴직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라’ 하더라고요. 정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거예요. 뭘 해야겠다는 답도 없고.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언젠가는 정년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퇴직 후를 생각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 떠올리면 그때 그런 마음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는 정 소장이다. 사건 이후, 그가 대전 정부청사 경비대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확실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후배 경위가 어딜 바쁘게 가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학원에 요리 배우러 간다더라고요. 언제까지 경찰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정년 이후를 생각해서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한다면서요.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동안 뭐하며 시간을 보냈나 싶었죠. 퇴근하고 나면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가면 티브이 보고 쉬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찾아 시작하기로 했어요.” 제과·제빵, 떡, 두부 배우기에서 노무사 준비까지 그가 근무하던 대전에는 ‘성심당’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근처 성심당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그는 퇴직 후에 근사한 빵집 주인을 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1년 3개월을 투자해 자격증까지 따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에게 ‘제가 빵집을 차리면 빵이 잘 팔릴까요?’라고 물어봤죠. 근데 ‘요즘은 프랜차이즈 빵집이 대세라 개인 빵집은 문을 닫는 추세다’라고 하는 거예요. 미리 알려줬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래도 한번 해보고 나니 다른 것도 해볼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떡집에 찾아가서 떡도 배우고, 손두부 가게에 가서 두부 만드는 법도 배웠죠. 콩 가는 기계도 사고 솥도 걸었는데 집에서 하려니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 지금까지 했던 것들로는 전혀 승산이 없겠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사’자가 들어간 직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노무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말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에 다니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영어 점수 때문에 결국 그만둬야 했다. 빵을 배우기 시작해 노무사 자격증을 내려놓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자격증을 따느라 들인 돈만 해도 수천만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격증만 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얼마고 쓴 돈이 얼마인데. 근데 그거보다 더 속상한 게 이런 고민을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멘토가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다 아내가 데일카네기연구소에서 하는 리더십 강의를 받으라고 권유했죠. 3개월에 24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야 해서 망설였는데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도 투자 못 하느냐’고 해서 결국 마음먹고 등록했어요.” 3개월간의 리더십 과정을 이수하고, 4회 코치를 하고 나면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코치 마무리 과정까지 총 2년이라는 시간을 들이고도 강사 실습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 그때 나이 쉰,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포기하는 순간 이혼이야. 지금 과정 수료 못 하면 당신 평생 후회할 거야!”라는 아내의 협박(?) 덕분에 강사 과정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년퇴직 후 ‘이제 강사로 활동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공무원 교육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진행자가 저를 ‘프리랜서 정기룡씨’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전에는 명함 한 장이면 나에 대한 소개가 끝났는데, 퇴직하고 나니 한 30분 정도 내가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야 했어요.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니 아내가 차라리 연구소를 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렇게 ‘미래현장전략연구소’를 만들고 새 명함과 직책이 생겼어요. 소속감, 명함 등 현역에 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인데 퇴직하고 나니 그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침마다 하던 ‘다녀올게’라는 평범한 인사도 그런 것 중 하나였죠.” 아내의 꿈을 키워주는 것도 은퇴 준비 정 소장은 퇴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가 앞으로 어떤 명함을 쓸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떤 명함이 나의 얼굴이 될지 상상하면 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에 은퇴 후 계획을 세우는 데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다고. 물론 그에게는 ‘아내의 강력한 조언’ 역시 동기부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인생 2막을 준비한 것은 정 소장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뭘 해도 같이 배우고 함께하자고 약속했어요. 아내는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제가 은퇴 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를 하면 아내도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했죠. 분야는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도 같이하고 석사, 박사 과정도 동시에 이수했어요.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죠. 최근에는 사회복지사를 준비했는데 부부가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아내의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노후의 삶은 경제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닌 아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꽃을 좋아한다면 꽃꽂이를 배우거나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서 꽃가게를 차리도록 도울 수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면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활동하게끔 지원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보다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그만큼 성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반대로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시간을 할애하는 게 벅찰 수 있다. 야근과 회식이 잦은 우리 직장인들에겐 더욱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 소장 역시 이러한 이유로 ‘퇴근 후 2시간’ 투자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은퇴 후 직업을 찾는다고 해서 현재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죠. 맡은 바 업무를 다 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면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해요. 나는 경찰서장이 되면 절대로 회식이나 무리한 야근으로 직원들의 저녁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축하할 일이 있거나 논의할 문제가 있으면 점심시간을 활용하고, 퇴근 후엔 각자 취미활동을 하라고 권했죠. 그렇게 11년을 생활했는데 오히려 직원들도 업무시간에 더 충실한 태도로 임하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수혜자는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나였죠.” 퇴직 후 20년 준비 완료, 이제는 나이 드는 준비 중 수많은 수험서와 빵 굽는 오븐, 두부 가마솥 등은 지난 꿈의 산물로 남아 있다. 은퇴 설계 전문 강사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실패의 잔상과도 같지만, 그때의 경험은 그가 하는 강의의 좋은 재료로 쓰인다.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그이기에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도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그가 고군분투하던 시절 필요로 했던 ‘멘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보람도 더욱 크다. 직장생활에 한계가 있듯, 지금의 삶 역시 유한할 터. 그는 이제 노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롭고 너그러운 노인이 되기 위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있어요. 첫째는 내려놓는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이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거죠. 둘째는 의존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배우자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식 또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준비를 해야죠. 마지막으로는 신앙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두려워하죠. 이를 초월하고 소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하려면 무엇이든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강사로 활동하며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는 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년 3월이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는 그는 이전부터 롤모델로 삼은 이찬수 목사의 설교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노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골고루 하고 있는 셈이다. “은퇴 준비 하면서 피아노도 배웠거든요. 시골 교회에 가서 직접 반주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복지사랑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땄으니 어려운 중·장년을 위해 직업상담을 하는 것도 좋겠고요. 사실 아들이 신학대학을 다닌다고 하니 아내가 ‘당신은 신학대학원이라도 다녀서 아들에게 도움을 줘야지’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아들이 진로를 바꾼다지 뭐예요. 그래도 덕분에 또 다른 꿈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 2016-11-2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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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풍미식품 유정임 대표 '김치와 함께 익어가는 맛있는 인생 이야기'
- 11월 22일은 대한민국김치협회에서 지정한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발효 과정을 거치면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김치의 날에 태어나 김치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이가 있다. 바로 포기김치명인 2호 유정임(兪貞任·61) 풍미식품 대표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양념과 함께 숙성되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버무려 명인의 삶으로 승화시킨 그녀에게 김치는 우연이 아닌, 운명과도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누가 김치를 사 먹어? 미쳤군!” 30년 전,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은 생소하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유 대표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명함을 건네면 뒤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이도 있었고, 험한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유정임표 김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김치를 사서 먹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난도 끊이지 않았지만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녀에게 결코 포기란 없었다. “치욕스러울 때도 많았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자고 마음먹었죠. 김치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그해의 배추 농사나 재료의 질,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좌우되니 김치 맛이 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한번은 배추밭을 사놨는데 수확시기에 가보니 노랗게 배추꽃이 펴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파악하고 점검하며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죠. 매해 환경이 달라지니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게 원칙 15평 다락방에서 김치를 팔던 평범한 주부가 2000평 규모의 연 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식품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환희의 순간도 많았겠지만,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달콤했던 순간에 현혹되기보다는 쓰디쓴 나날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잃지 않는다는 유 대표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사업이잖아요. 오너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외부에 있다가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지곤 하죠. 그런 긴장감이 나를 채찍질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김치명인이 되고 인증패를 받던 날에도 기쁨보다는 잘 지켜야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부터는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게, 수수하지만 격식을 갖춰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녀는 사무실 한편에 드레스룸을 마련했다. 특별한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알맞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인터뷰 당일에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른 일정을 마치고 온 그녀는 “5분만!”이라고 외치더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루에 5~6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는 유 대표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농식품여성CEO연합회 회장, 대한민국김치협회 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 제12대 혜경궁 홍씨로도 선발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현장부터 내려가요.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깍두기를 얼마나 담그고 열무를 몇 단이나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직접 점검하죠. 만드는 김치를 매일 맛보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당연하죠. 그게 내 일이니까요.” 본업에 충실해야 다른 일도 떳떳하게 마음놓고 할 수 있다는 유 대표는 김치를 만들 땐 좋은 재료가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그해 상황에 따라 배추 등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녀에게 가격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손해를 보면 봤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료의 품질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다. “싼 김치를 만들어 팔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김치를 지켜낸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건데 얕은수를 써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윤만 따졌다면 맛과 신뢰를 잃었을지도 모르죠.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갔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김치는 재료의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드는 식품인 만큼 만드는 이의 ‘손맛’ 또한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그 맛도 좋아진다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간혹 부부싸움을 하고 왔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직원은 김치 담그는 작업에서 제외시키고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한다.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김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래왔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직원들의 속사정까지 살피는 유 대표의 살뜰한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사원은 가족처럼’이라는 풍미식품의 사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고, 나이에 대한 기준도 없어요.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함께할 수 있죠. 80세가 넘었는데도 김치를 담그는 분이 계시고, 70대 직원도 많아요. 모든 김치의 속을 내가 다 채울 수는 없잖아요. 나를 대신할 직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하죠.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며 일하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그런 분위기가 원활히 회사를 경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풍미식품의 경영 목표 중 하나는 ‘수입의 사회 환원’이다. 김치를 만드는 곳이므로 김치 기증이나 김장 봉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 9월, 유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사 자금이 아닌, 그동안 강의 활동 등을 하며 모은 개인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밤낮으로 김치만 생각하며 어렵게 번 돈이지만, 그렇게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대신 동생들 끼니를 챙겨주곤 했어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갔고 졸업도 미뤄졌었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사주거나 학비를 지원해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요. 내 작은 도움으로 한 아이가 꿈을 키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다가도 즐거워진다니까요. 방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이 하나 있거든요. 번외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다 돈을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직원 중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노인복지회관 등에 기부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진도 팽목항에 김치를 보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김치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랐다. 대개 김치를 기증한다고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더 좋은 김치를 내놓는다는 유 대표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는 그녀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김치’, ‘직원들을 가족처럼’ 등 인터뷰 내내 가족이라는 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성 직장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살림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1인 2역의 고충이 있다고 토로한다. 유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여사장은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행여나 사업에 실패해서 가세가 기울면 우리 가족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 엄마이고 싶어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반찬도 자주 만들어줬는데, 그런 게 소홀해져서 미안하죠. 이제는 아이들도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건 꼭 우리 가족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가족도 같이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사업이 30년 동안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외조 덕분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이해와 신뢰가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어요. 저녁에 업무 약속이 잡히거나 거래처에 가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간섭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했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일하지 못했을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가끔 식당에 가면 ‘고객을 가족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편하니까 허물없이 대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고객처럼’이라고 반대로 말해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더라고요.” 글로벌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게 꿈 김치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지원으로 회사를 잘 키워가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유 대표는 ‘성공’이 아니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자칫 안일해질 수 있기에 거리를 두기로 한 것. 늘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요즘은 그 끝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칠십 정도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적임자에게 회사를 물려줘야겠죠. 사업을 이어받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이 있으면 승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면, 그때부턴 교육사업이나 강의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여행도 가보고요. 그런데 일 중독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놓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천천히 하나씩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나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유 대표는 일찌감치 레크리에이션과 성교육 자격증 등도 따놓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노후생활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김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내려놓을 때가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매일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는 있어야겠죠. 그것이 매 순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니까요. 요즘 내 목표는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계시는 세계 대사들을 모셔와 김치 담그기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요. 대사들이 담근 김치는 각 나라로 보내고요. 그러면 우리 김치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 2016-11-0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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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흔적 남기기
- 虎死遺皮人死遺名(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을 소중하게 여겼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다. 인간의 수명이 크게 늘고 있다. 건강 수명도 그렇다. 100세 장수 시대에서 건강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세계인구의 평균 수명이 120세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예측한다. 노후에 주어질 한가한 시간, 여가가 많이 늘어난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노후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후 여가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준비의 필요성이 화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변화를 싫어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작심삼일이 그 반증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이유다. 그렇지만, 은퇴 후 4~50년의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에 여가관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안이다. 과거의 갑옷을 벗지 않고 준비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재무준비에 치중했다. 은퇴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 마련이 그 중심이었다. 경제적 준비도 선결 과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나긴 노후의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느냐이다. 필자(66세)와 5575세대는 삶의 우선순위가 자식을 키우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답습해왔다. 자신의 삶은 늘 뒷전이었다. 자식에게 보상받기를 원해서가 아니고 당연한 부모의 책임으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았다. 자식의 성공은 곧 자신의 즐거움이었고 영광이었다. 자식 농사라고 하였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 삶을 살았다.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리 많지 않은 노후 시간을 보내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년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수명이 늘어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급격한 노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경제부분과 마찬가지로 노후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여가생활 준비 역시 대부분 하지 못하였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이웃을 살펴보아도 은퇴를 한 사람의 대부분이 하릴없이 하루를 지루하게 보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도 하고 영광스러웠던 과거에 사로잡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글쓰기는 시간 관리에 좋고 삶의 흔적을 남겨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니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원제도가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 눈만 돌리면 나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수없이 많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다. 필자가 현재 사는 곳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아파트 이웃에 살던 94세 할아버지는 아파트 정원의 공간을 이용하여 텃밭을 가꾸며 노후를 즐겁고도 건강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작은 일도 여가를 잘 보내는 방법의 하나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고 도전하지 못할 나이가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그런 노후생활 준비의 하나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투데이’ 경제신문의 자매지 ‘브라보마이라이프’의 기자로 활동 중이다. 유어스테이지라는 포털사이트에 9년 전부터 블로그를 개설하여 거의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고 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우수 블로그에 선정되기도 하여 두서너 군데 홈페이지의 기자로도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적은 금액이지만 원고료도 받는다. 취미 활동이 용돈도 버는 소일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써 놓은 글을 정리하여 수필집 두 권을 출간하였다.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와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것이다. 노후 생활과 사진 촬영에 관해 써 놓은 글을 정리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글쓰기는 여가를 무료하지 않고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의 하나고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의미 있는 일이다.
- 2016-09-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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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 2016-08-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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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잠 못 드는 밤과의 이별을 위한 레시피
- 불면증을 겪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힘든 고통은 없을 것 같다는 아픔을. 반면에 불면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불면증으로 고생한다고 하면 속으로는 아마 별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한다고 빈정댈 수도 있는, 조금 사치스러워 보이는 습관으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런 하릴없는 증세(?)로 크게 두 번, 작게는 여러 차례 고통과 직면해야만 했었고 그때마다 그로부터 해방되는 방안을 찾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만큼 이제는 나름 불면증에 관한한 준전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체가 아프거나 마음이 아파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면 당연히 먼저 병원을 찾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개인적인 몇 가지 팁을 제시해 보려한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닐 때 처음으로 불면증이라는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늘 고뇌와 번민을 달고 살았던 예민의 시절이었기에 어느 정도 잠 못 드는 밤이 있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아파오고 몸이 피곤해 무엇에든 집중하기 어려운 날이 몇 달 지속되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신경과민이 나를 심하게 괴롭혔다. 매일 아스피린을 달고 살거나 술에 만취해서 예민한 신경을 잠시라도 잠재우려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존재에 대한 불안’에 근거한 잠 못 드는 밤은 실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정신을 피폐케 하였다. 결국 병원에서 가끔 수면제 처방을 받아 임시방편으로 잠에 빠져보기도 했지만 약이 없으면 이내 또 정신이 너무 눈부시게 깨어나서 잠을 이룰 수 없게 되고 젊은 혈기가 넘칠 나이에 약에 의존한다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는지 약의 효과는 점차 반감되어가기만 했다. 일반적으로 잠이 안올 때 책을 읽는다든가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어 나간다든가 하는 여러 민간처방을 해보았지만 효험을 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내 영혼의 근본적인 불안이 원인이라고 잠정결론을 내리고 내 안에 오래 내재된 잡다한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참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십분 정도일지라도 참선을 하는 것을 지속했고 잠자리에 들 때는 사지를 편하게 뉘이고 오직 복식호흡에만 집중하였다. 아무런 잡념 없이 오직 심호흡에만 집중하여 계속하다보면 깊은 숨에 의한 체내 산소공급의 원활화로 인해서인지 편안한 마음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게 되고 보통 한 두시간지나면 다시 깨곤 했었던 악순환 없이 6시간 이상 지속적인 깊은 잠을 이루게 되면서 드디어 악몽 같았던 불면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게 되는 갈등으로 잠시 불면의 밤을 지새운 적도 많고 심호흡을 해도 잠이 오지 않는 고통스런 순간도 많았지만, 적극적인 마음으로 나를 괴롭히는 갈등을 정면으로 돌파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보면 무의식 세계의 평안함이 찾아오게 되고 이는 다시 나의 수면주기를 정상적으로 돌려놓곤 해주어서 그다지 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다시금 된통 불면증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한동안 살아야했던 기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너무 생생하여 되새겨보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으나 불면증이 다시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고생할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이 먼저 앞서는 것으로 보아 편한 마음으로 써나가도 될 듯하다. 삼십 여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그리 큰돈을 모으지도 못한 채 맞이한 정년퇴직 후의 삶이 시작되었을 때다. 퇴직 후 일,이년 남짓한 기간은 해방감을 만끽하면 전국을 돌아다녔고 히말라야나 시베리아까지도 ‘무릎 떨리기 전에 가슴 떨림을 먼저 느껴야 한다!’고 우기면서 신나게 즐길 수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55세 이후 대략 또 다른 40~50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 뭔가 확실한 인생 2막을 열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원래 꼼꼼한 성격에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고민에 침잠하다보니 예전 고민 많던 20대의 상황과 거의 유사한 내적불안으로 인한 잠 못 드는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여행과 사진 활동을 접고, 노인에 대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노후에 하고 싶었던 직업으로 생각한 관광통역사 자격도 취득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던 몇 가지 사업들도 지속적으로 매달려 보기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한다고 해보았지만 돈이 되는 것은 없고 돈만 계속 들어가는 시기였다. 아무래도 동업에 따른 갈등도 적지 않다보니 내 자신의 사업을 별도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법인을 만들고 직원채용과 마케팅으로 하루하루 몰두를 했지만 너무 앞서나가고 시장을 제대로 파악치도 않고 뛰어든 사업의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번아웃 되어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잠 못 드는 밤과 나란히 친구가 되어 고통을 견디어야만 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여러 고통은 예전과는 달리 두렵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별로 없고 번거롭다는 생각일 뿐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또는 ‘연식이 오래되면 여기저기 탈이 나는게 자연의 섭리’라는 정도로 달관하게 되어 그다지 고통스럽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다. 다만 얼마 되지 않은 사업자금이 바닥나고 30년간 관리자 역할밖에는 모르던 사람으로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대안 마련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저녁에는 잠들기 어렵고 새벽에는 진정 노인이 된 듯 일찍 깨면서 내 머리 속은 지나치게 밝은 조명을 바라보듯 집중이 어려워졌다. 어차피 잠 못 드는 시간이라면 가급적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다보니 일석이조의 방안이 떠올랐다. 치매예방을 위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글을 보고 한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영어공부를 다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특별히 공부시간을 정해 놓을 필요 없이 잠이 오지 않아 고통스런 시간이 오면 무조건 스마트폰에 저장된 가장 어려운 등급의 영어 리스닝을 틀어 놓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약 한달 정도 사이에 70킬로의 몸무게가 66킬로까지 빠질 정도로 불면증은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악당이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달리면서부터 거짓말처럼 잠이 빨리 찾아와 주었다. 처음에 자동꺼짐을 한시간 정도 여유 있게 해 놓곤 했으나 점점 30분, 15분... 짧은 시간을 세팅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들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잠은 급히 쏟아지게 되었다. “역시 어려운 공부는 졸음으로 가는 지름길!” [불면증 관련 엉뚱한 제언] 민간요법(?)의 하나로서 잠이 오지 않은 경우 양을 세는 방법이 우리나라의 방식이 아니라 외국에서 전래된 내용으로 알고 있다. 보통 잠을 잘 못자는 경우 양을 세라고 하면 우리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하겠으나 외국의 경우에는 one sheep, two sheep...하면서 ‘잠’에 해당하는 단어인 ‘Sleep’과 유사한 발음을 하므로 인해 잠을 유도하게 된다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양한마리’ 대신에 ‘잠자리 한 마리, 잠자리 두 마리...’하다보면 잠자리에서 쉽게 잠이 들지 않을까?
- 2016-08-0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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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
- 2016-06-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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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64세 ‘대세 배우’ 장광
-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
- 2016-06-1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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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도사 되기] 도전하면 극복할 수 있다.
- 학문에 왕도가 없듯이 IT 분야를 공부하고 익히는 데도 특별한 비법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비법이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여 실제로 익혀가는 것이다. IT란 Information Technology의 약어로 오늘날 정보의 생산과 응용, 관리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말한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초고속 인터넷, 이동통신, 광통신, 홈 네트워크 등 통신 기술과 컴퓨터 등 정보기술의 융합에 따른 정보 통신 기술의 핵심을 뜻한다. 직장 생활할 때 PC로 결재받고 결재하는 첨단의 업무를 큰 어려움 없이 해왔지만 이는 조직 속에서 틀에 박힌 업무만을 조직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수행 해왔던 것에 불과하였다. 막상 정년퇴직을 하고 동료직원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니 직접 익혀서 알아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PC를 통해 문장을 작성하려면 한글이나 MS 워드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대충이 아닌 철저히 익혀야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표 작성이나 통계를 내려고 하면 일이 중단되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니어로서 혼자 사는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는 IT 도움 없이는 적응해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돼 IT 익히기에 도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당위성의 문제였다. 직장생활하면서 이럴 때 난관을 극복하는 비법은 익혀 알고 있었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 바로 구청에서 시니어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한글 기초, 중급, 고급과정과 엑셀 초급, 중급과정에 등록해 차례로 익히기 시작했다. 한글은 어느 정도 타이핑이 가능했지만 다섯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속도감 있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기초부터 새로 다지기 시작하였다. 즉, ㅁ,ㄴ,ㅇ,ㄹ 부터 하나씩 자판을 익히기 시작해 보지 않고 자판을 두드릴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니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숙달이 되기 시작했다. 약 4개월 정도 국문과 영문을 함께 익히니 메일 수발신이나 문서작성에는 문제가 없게 되었다. 자판을 보지 않고 다섯 손가락을 움직여 PC상에서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PC의 자판을 익히는 것은 머리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기능의 문제라서 노력을 경주하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큰 어려움 없이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기본이 됐으니 다음에는 PC의 기능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들을 배우기 사작하였다. 카페, 블로그 만들기 및 활용 방법을 통해 원하는 카페나 블로그 활동을 할 수 있어 글을 한 편씩 쓰고 올리는 것이 가능해 졌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사에서 시니어를 상대로 명예기자 선발이 있어 응시하여 합격하여 많은 좋은 기자 동료들을 만나고 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친구의 추천으로 SBS,유어스테이지 등에서 리포터 활동도 하게 되니 퇴직 후 나의 교우관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확대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카페, 블로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사진 저장법을 위시하여 포토스케이프 등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좀 더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식을 배워서 익히게 되었다. 이제 PC관련 된 업무는 어느 정도 자력으로 할 수 있게 되자 스마트폰 활용법에 대한 강의를 구청 및 시니어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웬만한 앱 작동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누가 스마트 폰 관련 물어보면 주눅이 들어 피하곤 하였지만 본 과정을 통해서 하나씩 익혀 나가니 누가 좀 물어봐 주었으면 하는 자신감까지 생기게 되었다. 함께 배운 동료들 중 몇 몇 분은 아예 스마트 폰 활용을 위한 강의 팀을 구성하여 봉사활동을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시내 아니 전국에서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는 스마트 폰 전문 강사들이 되었다. 여기서 내가 터득한 주요한 사실은 한 번 배우고 익힌 것을 계속 가르치고 익히면 전문가가 될 수 있으나 배운 후에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배운 것을 새까맣게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배운 것을 다시 배워보지만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 외는 금방 다시 잊어버리게 되곤 하였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가까운 아내나 지인들에게 전수해 주는 것은 기본이고 배운 것을 정리해 두고 필요할 때 마다 꺼내서 익히는 것이다. 지금도 나의 PC나 USB에는 이러한 비법을 적어 놓은 나만의 재미있는 기술서가 들어 있다. 이름 하여 ‘하늘의 대화법’ 이다.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을 공중에 떠 있는 이 비법을 통해 다시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나의 꿈이었던 강의를 위해서는 파워포인트 PPT를 배워야 했다. 대학 졸업 당시 생활이 어려워 학계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국제계약의 이론과 실무, 대한민국 1%의 성공비법, 생활경제 이야기 등 내가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젊은 사람들이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수하고 떠나는 것이 내 노년 삶의 계획이고 목표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니어들이 인생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다시 한 번 더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나 또한 갖는 것이다. PPT를 배우다 보면 동영상 활용법을 함께 배우게 되어 시니어들이 노후의 삶을 정리하는 데도 아주 좋은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PPT 자체의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만 Google 계정에서 드라이브를 활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이 되면 PPT를 클릭하여 강의를 할 수 있는 편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것 뿐인가? 별의 별 프로그램이 속속 개발되어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도와주고 있다.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하면 전국에서 함께 들어가 마치 옆에서 함께 일하는 것처럼 스프레드시트를 통해 일도 같이 할 수 있다. 알 마인드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자신의 인생계획이나 복잡한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는데 긴히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독서를 하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알 마인드를 활용하면 체계적으로 내용을 기록하여 기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요컨대 시니어들이 IT를 익히는 비법은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기본과정부터 하나씩 익혀 나가는 것이다. 만일 IT를 배우지 않았다면 도전하지 않았다면 시니어로 나의 삶은 결코 지금과 같이 Active한 삶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배우되 그것을 요약하여 언제든지 다시 익힐 수 있도록 저장하여 두고 필요할 때 다시 익히는 것이 어찌 보면 비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기회를 만들어 배운 기술을 자주 실습을 통해 익히는 것이 IT를 배워 나의 삶의 차원을 넓혀가는 첩경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IT는 세월과 같이 변화무상하게 발전하고 변화한다. 오늘 날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함께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IT의 장벽을 넘으니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SBA에서 창업닥터 교육을 받아 창업닥터로서 청장년 사업자들의 컨설팅을 하는 일 또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이런 일들은 IT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Senior5060 신 용 재
- 2016-06-03 1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