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60주년 배우 이순재, 다시 오른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를 향한 열정과 확신

기사입력 2016-12-13 18:06 기사수정 2016-12-13 18:06

대표 원로배우 이순재가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아 아서 밀러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올린다. 이번 작품은 중견배우 손숙이 파트너로 나서고, 그의 제자들이 뜻을 함께한 데 더욱 의미가 있다. 공연 시간만 약 3시간에 달하는 데다가, 주인공 윌리 로먼의 대사가 580마디에 이르는 등 이순재의 어깨가 무겁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 대본을 연구하고, 누구보다 빨리 대사를 암기하는 등 책임감 넘치는 모습으로 현장 스태프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한다. 60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배우 이순재의 연기 열정과 그칠 줄 모르는 연기자의 고뇌와 노력에 대해 들어봤다.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김홍관 기자 hongkwan@)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김홍관 기자 hongkwan@)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이하는 소감,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 계기

그동안 40주년, 50주년일 때도 그랬지만 햇수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그것을 계기로 연극을 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하려 했어도 지금과 같은 무대를 마련하기는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내 생일 날짜도 잘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그런 것에 무심한 편인데 오히려 일이 커져서 송구스럽고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막상 60주년이라는 말이 붙으니 마땅한 작품이 없더라고요. 나를 위해 일부러 쓴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역이 앞에 나오는 작품도 드무니까요. 그러던 중에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올랐죠. 세월이 갈수록 새로운 의미와 의도를 발견하는 게 고전 아니겠어요. 그동안 원작을 그대로 살린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해 보자고 했습니다. 작품이 지닌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나 깊이를 담기 위해서는 원작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세일즈맨의 죽음>이 올해가 처음은 아닌데, 그동안에 변화가 있었다면?

1978년도에 처음 이 작품을 했었죠. 고 김의경 연출이 맡을 때였는데, 그 당시에 나에겐 큰 역할이라 조심스럽게 맡았던 거였어요. 그때 해보니 아주 좋은 작품이더군요. 원작은 1940년대 작품인데 당시엔 미처 잘 이해 못 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개발 후에 오는 도시 공해, 환경 문제 등에 대해 우리나라는 생각하지 않을 때라 생소할 수밖에요. 가스흡입에 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그 시절 우리는 연탄을 땠으니…. 그런 문학적·상징적 표현에 대한 해석이 잘 안 됐고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1막 끄트머리에 “달이 아파트 사이로 간다”는 대사가 나오거든요. 나는 그저 기분 좋게 보았던 달인데 알고 보니 그 달의 영역이 축소됐다는 건 세일즈맨 자신의 사회적 영역이 축소된 것에 비유한 비탄이었던 셈이죠.

그러고 나서 2000년도에 드라마 <허준>이 끝나고 한 3개월 정도 공백기가 있었는데 한참 연극을 안 했을 시기라 연극 한번 했으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마침 제안 들어온 작품이 또 <세일즈맨의 죽음>이었어요. 그땐 윤소정씨가 파트너였죠. 확실히 처음 할 때보다 더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뒤에 김명곤 전 장관이 연출한 <아버지>라고 해서 한국버전으로 했을 때, 그리고 이번에 6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하게 됐죠. 오래된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한국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4번째 연기하는 윌리 로먼, 이번 무대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다. 그리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연극은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배우가 다 감당해야 해요. 나중에 끝나고 연출에게 야단맞더라도 그 순간에 중단할 수가 없으니까요. 편집도 없고, 올려놓으면 끝날 때까지는 배우의 몫인 거죠. 특히 이번 작품은 배우가 표현해야 할 디테일이 아주 많습니다.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며 극의 의도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상당히 힘이 필요한 작품이죠. 해외의 한 배우가 40대에 이 역할을 맡고 “나는 젊어서 이 역할이 안 되겠다”고 했더니 연출이 “이 작품은 힘이 들어서 나이 먹으면 못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만큼 격렬한 역할이기 때문에 40~50대 정도 돼야 소화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부분이 힘들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젊을 때보다 나이 먹어서 하니 그 정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장점이에요. 힘은 떨어지지만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마음에 와 닿는 게 많아져서 다시 한번 해보자 결심했어요. 이제 작품의 갖고 있는 의미나 상징성, 작가의 의도 등은 거의 이해했고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더 원숙하고 정밀하게 표현해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김홍관 기자 hongkwan@)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김홍관 기자 hongkwan@)

작품 속 아버지 윌리 로먼과 아버지 이순재의 닮은 점

잘나가고 떵떵거리는 아버지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심리적인 어려움은 모든 아버지가 공통으로 느낄 거예요. 배우는 정년이 없다고 다르게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똑같아요. 나 역시 돈 못 버는 배우였고, 바쁘게 일하느라 아이들과 시간 못 보내고, 밤낮으로 돌아다니니까 집사람과 여행도 제대로 못 해보고. 또, 배우라는 명성은 있지만 배역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 얼마나 가족에게 면목 없어 하는지…. 다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 직종을 택했던 자존심과 의지가 있는데 뜻대로 안 됐을 때의 회의감이나 허탈감이 들겠죠.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조건이 위축됐을 때의 고민이 왜 없겠어요.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런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극 속 상황은 경제공황으로 밀어닥친 여파이지만, 사실 이 아버지는 세대 차이에서도 밀려요. 새로운 세대로부터 밀려 나가는 그런 필연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위기의식,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고통을 느끼는 아버지들이 많을 겁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조건은 앞으로도 달라지기 어렵고, 그런 면에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느낄 수 있어요.


원로배우로서의 사명감

아들 역을 맡은 배우들은 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에요. 나는 이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경험을 통한 하나의 실습과정일 뿐이라 생각해요. 연기라는 것은 이론도 필요하지만 작품의 주제, 사회적 메시지, 자기 역할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다행스러운 건 다양한 매체와 수단이 발달해서 젊은 친구들의 그런 이해력은 더 좋아졌어요. 그렇다고 그게 다가 아니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건 훈련을 통해 터득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역할에 확신을 해야 할 수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제자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함께 경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와 상대역을 맡은 배우 손숙(김홍관 기자 hongkwan@)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무대에 오른 배우 이순재와 상대역을 맡은 배우 손숙(김홍관 기자 hongkwan@)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남다른 연기 열정에 대해 배우 손숙이 “이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에 대해 답한다면?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죠. 싫은 일을 하면 이렇게 견딜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우리 일이라는 게 끝이 없어요. 예술적 창조애가 어디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의 어느 거목이라 하면, 그저 거목이 있었을 뿐이지 그게 완성과 끝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도전하고 개발하고 창조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아무리 막장 드라마 할아버지라도 이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다 다르지 않겠어요? 연기를 달리하겠다는 의지와 발견, 그런 창조적 활동이 재미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껏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거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면 재미없잖아요. 그게 우리 직업의 장점이자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번이 마지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생각하고 임했다”고 했는데, 그 의미와 60주년 이후 배우 이순재의 모습

각오라면 각오이겠고,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나이도 있고 하니 언제까지 현재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론 배우는 누군가가 불러줘야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도 있어요. 바로 암기력입니다. 대사를 못 외워서 후배나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미안하잖아요. 그러면 그때는 내가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해야죠. 물론 어느 정점이나 연령에서 ‘이제 끝이 왔구나’라고 판단하고 나태해지면 정말 그걸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런 한계를 두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탕이 돼야겠죠. 나뿐만 아니라 신구, 박근형 이런 친구들이 건재한 이유는 그런 점에서 자기 관리와 개발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에요. 이번 연극 중 윌리 로먼이 아들에게 “봐라.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인간의 능력이라는 게 물론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영역은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자기 확신을 두고 최선을 다하는 게 현재의 노력이라 생각해요.


△ 배우 이순재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 <세일즈맨의 죽음>

12월 13~2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박병수 연출, 이순재ㆍ손숙ㆍ이문수ㆍ맹봉학ㆍ김기훈 등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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