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김형석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애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요사이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8년에는 내 나이가 우리 관례에 따르면 99세가 됩니다.
10년 전에는 미수(米壽)의 나이라고 해서 미국에 다녀왔어요. 같이 가기로 했던 둘째 딸네는 집 일 때문에 못 가고 혼자이지만 가서 ○혜, ○애, ○순 세 딸들과 여행도 했어요. 막내인 ○순이가 벌써 대학 교단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애들과 당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와 같이 고생하던 옛날이 가장 행복했다 말하며 다들 공감했어요. 가난한 세월에 전쟁까지 겪었으니까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지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어요. 사랑이 깊을수록 행복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그 시절이 제일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구십이 되던 해에는 미국의 애들도 한국에서 다같이 모여 5일간 제주도 여행을 했고요. 여행을 끝내면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산소에도 다녀왔고요. 막내가 “이다음에 나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우면 안 돼?”라고 해서 내가 “신랑과 애들이 허락해줄까?”라고 했어요. 막내는 큰애들보다 부모와 머문 기간이 짧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요?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내가 2011년 봄에 ○진이가 교수로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주는 일송(一松)상을 받았어요. 그때 여러 사람이 주는 꽃다발을 받았는데, 강원도 양구의 군수님이 주는 꽃다발도 받았어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나와 안병욱 교수가 50여 년 가까이 사회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으니까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양구로 모시자는 협의를 본 것입니다. 둘 다 구십 고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고마운 뜻을 전달하기 위해 군수가 직접 수상식에 와 꽃다발을 주었던 것입니다.
양구는 북녘땅과 가장 가깝고 우리나라 국토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파로호를 둘러싸고 있는 풍치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 호숫가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안 선생을 위한 기념관을 건설하고 우리 둘을 모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93세에 세상을 떠나 기념관 옆에 잠들고 계십니다. 부인께서도 세상을 떠나면 안 선생과 함께 잠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 선생의 안식처 옆자리에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잠들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숫가이기 때문에 기념관에 온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고 가족들도 찾아오기 편한 곳입니다. 기념관 안에는 나에 관한 사진들과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고 가족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나보다 더 고맙게 만족할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지, 제자들은 물론이고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이들도 한국에 오면 들러보곤 합니다. 다행히 내 건강이 허락하기 때문에 벌써 4~5년 동안 그 기념관에서 양구의 여러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개최해 3년간 직접 강의도 하고 후배와 제자 교수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진과 ○우도 다른 강사들과 함께 강의를 돕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두 과정을 진행해왔는데, 내가 마지막 특강을 맡아주기도 했어요. 둘이 같이 잠들 곳이고 옆의 기념관에는 많은 사람이 참관해주겠기에 감사한 마음을 함께해줄 것으로 압니다.
또 한 가지 약간 놀라워할 사실을 얘기해야겠네요.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1960년 초부터 30여 년간 많은 일을 했지요. 그중에서도 라는 책이 나온 후부터 10여 년은 전국적으로 나와 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요. 그 후부터는 비교적 조용히 일하면서 꾸준히 저서도 남기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정초에 KBS1 프로그램 에 나가 한 시간 동안 행복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같은 방송국에서 한 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이 방영되었습니다. 내 생애에 관한 기록 다큐멘터리였지요.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다른 TV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을 해와 내가 사양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마치 행복을 알려주는 멘토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방송들을 계기로 조선일보에서 두 차례, 동아일보에서도 두세 차례 내 얘기가 보도되었고 문화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서도 큰 비중으로 소개되는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김 교수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교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방군은 옛날부터 잘 아는 제자였지요? 한국까지 찾아와 큰절로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 과거에 썼던 책들 와 가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가 다시 출간되었고 몇 권의 수필·수상집이 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서 라는 책은 널리 알려진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말년에 다시 한 번 장·노년층을 상대로 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애독자가 생겼습니다.
그 책 때문에 청탁이 들어와 강연회도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2017년에도 한 달에 평균 15~16회의 강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애가 전화를 걸어서, “아들과 사위들이 다 정년으로 쉬고 있는데 아버지 혼자서 일하시네요?”라면서 다른 애들과 같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내 남편이 최고!’라면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함께 지낼 때는 내가 교만해질 것 같아 “당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 나이를 보면 당신도 감탄할 것입니다. 어머니와 당신이 있다면 내놓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자랑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옆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더 추가할까요? 내가 2016년 말에는 ‘도산인상 교육상’ 받았고요, 금년에는 유한양행에서 주는 ‘유일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가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는 ‘인촌상’까지 받았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을 기리는 상을 다 받았습니다. 상금도 당신은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았고요. 이제는 더 준다고 해도 사양할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식 때 ○예가 당신 대신 자리를 채우곤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예를 보고 사모님이 젊고 아주 미인이라고 부러워했어요. 사실은 당신이 더 아름다웠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요. 어제도 지방에 강연을 갔는데, 사람들이 김 교수가 얼마나 늙었는가 보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이전보다 강연이 더 좋았다며 감사하다는 겁니다.
여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네…. 그러지 마세요.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는 얘기하고 싶은 것을 참았어요. 믿기 어려우면 주어지는 시간에 우리 함께 갈 양구의 기념관 ‘철학의 집’에서 내가 다 설명해줄게요.
무어라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네요.
보고 싶어요! 왜 눈물이 나지요? 많이 사랑했는데….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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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다.
어렵든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쪼그라들고 말라버리는지 알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슬픈 일을 당해도 스쳐가는 바람 대하듯 무덤덤해 지는 방관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아니다. 조금만 소외되어도 잘 삐지게 되고 서러움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 후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감성적으로 그냥 슬프고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식구들 데리고 제주도 놀러갔단다. 우리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도 같이 갈 형편도 못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과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확 오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따로 살고 있으니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며칠 다녀오는 것은 당연하다. 머릿속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이유 모를 황량한 찬바람이 분다.
어머니는 저녁 할 때쯤이면 할머니의 의사를 꼭 물었다. ‘어머님 오늘저녁 뭘 할까요?’하고 묻는다. 농촌의 저녁메뉴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없으니 뻔하다. 밥, 국수, 죽이다. 할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네가 알아서 해라!’이다 매일저녁 되풀이되는 이 질문과 대답을 왜 하는지 어려서는 몰랐다. 필자가 나이를 들어보니 이런 몇 마디 말에 부모는 자신의 권위가 살아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영화를 보러갔다. 슬픈 장면이 있다. 눈물이 핑 돈다. 주위의 반응이 너무 무덤덤하여 눈물 닦기가 조심스럽다, 나이든 사람이 눈물 찔끔거린다고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비비는 척 하면서 슬쩍 눈물을 훔친다. 양쪽 눈을 다 닦으면 저사람 울고 있네 하는 모습이 들킬까봐 한쪽 눈만 닦고 시차를 두고 다른 쪽 눈을 닦는다. 남들을 의식하면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나이든 남자다. 집에서 TV를 보는데 다른 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잘도 보고 있는데 혼자 눈물이 흐를 때 참 민망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들어온다. 남자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
K는 대학의 시간강사다.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머슴 같은 노력을 계속하지만 점점 더 절벽을 느낀다.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의미를 통 모르는 시골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인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은 맞지만 수입도 형편없는 시간강사라는 말을 차마하지 못한다. 더구나 대학교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에게 쪼들리는 경제사정은 더더욱 말 못한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한다. 밤에는 대리운전도 해보지만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동굴이 있다면 몰래 찾아 가서 목이 터져라 ‘이 더러운 세상아!’하고 외쳐 보고 싶다. 그러나 통곡할 장소가 없다. 어디를 가도 인파의 행렬에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마음 편히 울어볼 곳조차 없다.
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하고 이것이라고 적혀있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는가! 남자는 농경사회에서는 근육질의 몸만 필요했지만 지금은 감성이 필요한 시대고 생존경쟁의 다양한 변수가 많은 세상이다. 한마디로 울 일이 많은 세상이다.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앤티크는 세월과 함께한 흔적을 통해 멋을 발한다. 대대손손 물려받은 가보로서 또한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한 사람들 곁에서 100년, 200년의 시간을 이어간다. 취미로 앤티크 제품을 수집하기란 쉽지 않다고들 한다. 백정림(白瀞林·53) 대표는 앤티크 물건들을 모아 이고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는 앤티크의 멋에 푹 빠졌다고 한다.
자연과 어우러져 더 빛나는 ‘이고 갤러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엔 꽤 큰 별장촌이 숨어 있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을 따라 근사한 별장이 들어서 있는데 그중 맨 위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백정림 대표가 운영하는 이고(以古) 갤러리다. 이곳은 그가 20여 년간 모아온 앤티크 컬렉션을 일부 전시해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개인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좀 더 특별하다.
“이고 갤러리를 차린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아진 작품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어요. 지금 와서 수집을 그만둘 수도 없고…(웃음). 그래서 이왕에 만드는 거 상업적인 공간보다는 앤티크를 좋아하는 사람, 관심 있는 사람이 모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자 해서 하우스 갤러리 개념의 공간으로 꾸미게 됐죠.”
대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정원에서부터 그의 앤티크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 주위로 물확, 석등, 항아리 등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골동품으로 정원을 꾸몄다. 통유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거실과 부엌을 장식한 앤티크 컬렉션을 비추며 갤러리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갤러리를 마련할 장소를 찾기 위해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러다가 이곳을 알게 된 거죠. 무엇보다 자연 속에 위치해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이라 좋았어요.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한눈에 조망하고 그때마다 어울리는 앤티크 물건으로 갤러리를 꾸며 새로운 분위기의 공간으로 탄생시키기도 하죠.”
알수록 빠져드는 앤티크의 매력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앤티크 컬렉션의 향연이 시작된다. 주방, 거실, 침실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화병 제품은 18세기 세브르 화병이고 아르누보 시대의 화병도 있어요. 그리고 19세기 초의 저그, 빅토리안 시대의 티 캐디… 아! 탁자는 조선시대 교자상입니다. 쿠션은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방석을 재해석해서 만들었고요. 2층으로 가면 크리스털과 은으로 된 빅토리안 시대 디캔터도 볼 수 있어요. 거의 다 100년의 세월을 거친 아이들이죠.”
집 안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앤티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뿜어져 나왔다. 백 대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대학생 때 본격적으로 앤티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엔 7년 동안 서양 앤티크를 공부하며 홈 인테리어나 커트러리 위주의 수집을 시작했다.
“어머님이 상당히 상류층 분이셨어요. 그 당시 유행했던 제주도 연자방아를 활용한 테이블과 조선시대 반닫이를 집에서 볼 수 있었죠. 덕분에 일찍 앤티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앤티크 물건은 들여놨을 때 집 안 전체를 우아하게 마무리해주는 문화의 힘이 있어요. 정리정돈을 해준다고 해야 하나? 그게 바로 앤티크가 갖고 있는 세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한 점도 안 사는 사람은 있지만 한 점만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하죠. 그 매력에 빠지면 그야말로 중독되는 거 같아요(웃음).”
재력가들이 앤티크 물건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이태원에 앤티크 가구거리가 조성되면서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반 앤티크 열풍이 한차례 불었다. 사실 진짜 골동품이기보다는 그 모양새를 흉내 낸 ‘앤티크풍’의 가구가 유행한 것이다.
“앤티크가 주는 고급스러움과 멋스러움도 한몫했겠지만 상류층 사람들이 즐긴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더 많은 모조품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다수의 사람이 앤티크는 다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누구나 취미로 할 수 있는 게 앤티크 수집인걸요. 단 소비를 어느 정도의 선에 둘 것인가의 문제죠. 취미로 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고 싶어요. 제발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시작하면 좋겠어요!”
앤티크를 잘 아는 사람이 워낙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관련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섣불리 다가가면 예상치 못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백 대표는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사는 것 또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며 추천했다.
“고려청자로 만든 기와를 뭐하러 사겠어요. 가치는 있겠지만 박물관에 있어야 더 잘 어울리겠죠(웃음). 저 같은 경우 테이블에 세팅해둔 빅토리안 시대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어요. 깨지면 어때요! 깨질 수 있는 DNA인걸요. 무서워서 쓰지 못한다면 앤티크를 최상으로 즐길 수 없어요.”
앤티크 강연 펼치며 제2인생 시작
젊은 시절 영어 강사로 유명했던 백 대표는 남편과 함께한 교육사업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전국 프랜차이즈 망까지 갖춘 사업을 대기업에 넘긴 백 대표는 그 후에도 강의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했다. 앤티크 물건을 수집하면서 차곡차곡 배운 지식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강의를 시작했다.
“이고 갤러리에선 한 달에 한 번씩 앤티크 인문학 강의가 열려요. 또 반얀트리에서도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죠. 강의하면서 행복해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역시 나는 강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해요(웃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집안일을 도와주는 남자, 살림하는 남자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백 대표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품격 있는 홈 문화를 퍼뜨리는 게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tvN의 를 보니 남자가 다 일하고 그러는 모습… 에휴. 요즘 여자가 너무 중성화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아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정말 중요한데 말이죠. 품격 있는 홈 문화를 가르쳐 가족에게 정성껏 대접하고 그럴 때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엄마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일찍이 고향을 떠나 사셨기 때문에 엄마가 충청도 사람이란 걸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충청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가끔씩 엄마 손맛이 떠오르는 밥상을 받게 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추석연휴를 마무리 하면서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외암마을에서 먹은 시골밥상이 생각나서였다.
외암마을에 들어가려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한다. 표를 끊으며 보니 '외암민속마을을 재밌게 관람하는 방법'이 쓰인 안내판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쭈~욱 가서 홍보관 영상 보고 상류층, 중류층, 서민층 가옥을 둘러본 다음 자연미 넘치는 돌담을 따라 걸으며 마을 정취를 느껴보길 권하고 있었다. 안내문에 써진 대로 좌측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아빠 무등을 탄 꼬마나 나이 든 부모님이나,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즐겁게 전통가옥을 구경하였다. 담 너머에서 들리는 다듬이 방망이 소리에 옛 추억이 생각난 사람들은 다듬이 체험장에서 신나게 방망이를 두드렸다. 어린 아이들에게 다듬이질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들도 신이 나 보였다.
전시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진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고즈녁한 동네가 나온다. 명문 고택과 초가로 된 농가가 한데 어울려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마을은 온통 돌담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돌담의 길이가 무려 6,000m에 이른단다. 집 안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낮게 만든 돌담은 제주도 돌담과는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했다.
돌담길을 걸어 찾아간 곳은 이 마을 유일한 밥집인 신창댁이다. 밭에서 직접 길러 만든 반찬으로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먹을 수 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1인분에 5,000원이니 시골인심이 듬뿍 느껴진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신창댁 아주머니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막 쪄낸 옥수수를 싸주었다. 내가 미안해 하자 '여긴 아직 촌인심이 살아있다'고 선하게 웃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아주머니를 위해 달달한 파운트 케익 하나를 준비했다.
대청마루에 앉아 구수한 청국장찌개를 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방 안에서 빵을 드셨나보다. 밥을 다 먹었을 즈음, 빵이 너무 맛있다며 밥상도 물리지 않은 상에 다가오셨다. 아주머니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시부모님 몰래 밤 마실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려고 하니 시아버지 방에 불이 켜있어서 오도가도 못하고 쩔쩔 맸던 옛날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었다. 밥도 맛있고 커다란 대청마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도 즐거웠다. 마치 시골 친척집 아주머니집에 다니러 온 것 같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여유로운 농촌에서 휴식을 즐기는 것이 요즘 여행의 트렌드다. 잘 여문 벼들과 감나무, 밤나무, 고염나무 열매가 풍성한 가을날, 외암민속마을을 거닐며 보는 풍경은 한없이 정겹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 30분이면 올 수 있다. 게다가 외암민속마을 주변에는 현충사나 공세리성당,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 즐길거리도 풍성해 당일여행으로도 매력적이다.
10월 21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가을여행주간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를 비롯해 전국의 지자체와 민간기업이 함께하는 국내여행 특별 주간으로, 여행주간 기간 동안은 정부의 지원 아래 지자체, 관광업계가 협력해 전국의 주요 관광지에서 숙박ㆍ편의시설, 입장료 등을 무료 혹은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가을여행주간(fall.visitkorea.or.kr) 사이트를 둘러보고 깊어가는 가을을 즐기러 떠나보면 어떨까.
요즘은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필자가 자랄 때는 열매나 과일채소라고는 봄에 딸기, 여름부터 가을철에 나오는 수박, 참외, 토마토, 자두, 복숭아, 사과, 배, 포도, 감, 대추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품종이 몇 개 안 되고 시장에 나오는 시기도 짧았다.
예를 들어, 자두는 7월이면 끝물이었는데 요즘은 품종은 다르지만, 자두가 가을에도 시장에 나온다. 복숭아도 여름까지는 나왔지만, 복숭아털이 없어 먹기 좋은 천도복숭아라는 것은 나온 지 몇 년 안 되는 신품종이다. 먹기 좋게 품종 개량한 방울토마토도 그렇다. 제주도 귤도 지금은 흔하지만, 어렸을 때는 못 먹어 보던 과일이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 선물로 사오던 과일이다. 사과도 지금은 어느 품종이든 다 맛있지만, 그 당시에는 맛없는 품종도 여럿 있었다. 지금은 맛없는 사과는 도태되어 안 보인다.
그전에는 흔하지 않던 과일도 보인다. 거들떠도 안 보던 오디, 우름, 꾸지뽕, 복분자도 제 철에는 먹을 수 있다. 무화과도 귀한 과일이었는데 흔한 과일이 되었고 가격도 싸다. 블루베리도 그렇다.
수입과일도 많다. 오렌지, 자몽, 메론, 바나나는 물론 동남아시아 관광이나 가야 맛 볼 수 있던 갖가지 열대 과일도 수입되어 들어온다.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라고 하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유일한 수입과일이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인기 있는 체리도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운송, 저장 기술도 발달해서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겨울철에도 여러 가지 과일이 있다. 온상 재배한 과일까지 나온다. 그 덕분에 노모가 겨울철에 딸기를 먹고 싶고 하여 산야를 헤매다 쓰러진 효자에게 신선이 딸기밭을 인도했다는 동화 속에나 나오던 겨울철 딸기도 현실화 되었다.
당도도 높아졌다. 재배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달아야 좋아한다. 그전에는 수박은 두드려 보고 잘 익은 것을 골라서 샀다. 꼭지 부분을 삼각형으로 오려 내서 빨갛게 잘 익었다며 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믿을만한 판매처에서 사면 당도에 문제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지만, 지금도 아침 식사에는 과일이 빠지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사시사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요즘 참 살기 좋아졌다며 이런 얘기를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시큰둥하다. 제 철 과일이 시장에 나왔다고 만만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집도 많지 않았다. 겪어 보지 않은 세대들이라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일에 얽힌 얘기도 많다. 필자는 자두를 좋아했는데 아내가 참외만 사들고 와서 다시 시장에 갔다가 여름 휴가지로 떠나는 단체 버스를 놓쳤다. 끝물이라 다 삭은 자두 담은 봉투를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만리포까지 따라 간 적이 있다. 제주도 신혼여행 때 귤을 몇 박스 샀다가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느라고 고생한 추억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 시 장티푸스에 걸려 식사를 제대로 못할 때 바나나 한 다발로 식사를 대신하며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지난 8월 27일, 야학 시절 필자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주셨던 진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서둔야학 단톡방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필자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안 돼!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 지난 2월에도 예술의전당에서 건강한 모습을 뵈었는데!’
아아! 님은 가셨는데
님을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크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는데,
북한농업 발전, 미얀마 농촌 프로젝트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굵직한 일들을 여기저기 벌여놓으셨는데,
아직 할 일이 너무도 많으신데,
어찌 그리 황망히 가셨나요!
선생님! 내 사랑하는 선생님!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걸려 있는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졌다. 그로부터 하루도 선생님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다.
야학 시절 진 선생님의 손은 거칠기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었다. 제주도 가난한 농촌 집안 출신으로 당신 손으로 학비를 해결하며 공부를 하셨기에 그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1년 벌어서 1년 공부할 정도로 힘들게 학업을 하셨다고 한다. 험한 일 궂은일을 가릴 수 없었던 선생님의 손은 늘 상처 투성이였으며 굳은살이 박혀 울퉁불퉁했다. 그 손이 안쓰러웠던 필자는 언제부턴가 선생님을 뵙게 되면 얼른 손부터 보게 되었다. 입고 있는 옷도 군복에 대충 검은 물을 들인 작업복 아니면 서울대 교복 차림이었는데 자주 빨아 입지 못해서인지 얼룩덜룩할 때가 많았다.
가톨릭 신자인 진 선생님은 철저한 휴머니스트였다. 필자의 아버지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바쁘신 와중에도 틈틈이 문병을 와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을 돕느라 물심양면으로 애쓰시던 선생님은 아버지 산소 양쪽에 어디선가 구해오신 진달래꽃까지 심어주셨다.
우리 가족을 보살펴주시던 진 선생님은 야학 후배 윤선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또 그 후배를 돕느라 동분서주하셨다. 우리 아버지와 윤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서둔야학을 졸업한 지 각각 1, 2년 후의 일이었는데 선생님은 졸업한 야학생들의 궂은일까지도 모른 척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주신 것이다. 당신도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을 텐데도 제자들을 그렇게 살뜰히 보살펴주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라’고 강조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는데 최근에 찾아 뵌 선생님은 필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가족을 선생님께 맡긴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주셨다. 읽을 책 하나 변변히 갖고 있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에게 두터운 골판지로 된 김유신장군 책과 외국 동화책을 사다 주셨는데 영어로 돼 있던 그 책의 내용은 기억 못하지만 주인공 소녀의 토실토실한 볼은 지금도 참 귀여운 인상으로 남아 있다. 또 책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특별히 헤르만 헤세의 를 선물해주셨다. 내용은 별로 흥미롭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사랑이 묻어 있던 그 책에 상당한 애착을 가졌기에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했다. 어디선가 어렵게 구한 은박지로 표지로 쌌으며 책을 볼 때는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은 후 볼 정도로 아꼈다.
"과자 한 봉지 실컷 먹어 봤으면…."
진 선생님의 어렸을 때 소망이었단다. 당신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였을까? 궁핍한 살림에 과자 하나, 사탕 하나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을 위해 가끔 과자도 사다 주셨다. 영어가 씌어 있는 흰색 봉투에는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밤과자, 부채 모양의 부채과자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필자의 집은 수수깡과 진흙을 섞어 만든 집 벽에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우리 형제들은 겨울에는 대낮에도 두꺼운 이불을 펴놓고 그 속에 발을 묻었다. 밖에서 뛰어 놀다 들어와 그대로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 넣는 통에 이불이 꼬질꼬질했다. 그 방에서, 추워서 옹송그리고 있던 동생들은 한줄기 따스한 빛 같은 진 선생님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선생님이 반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궁색함, 누추함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하신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학비를 걱정하는 가난한 고학생이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망각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덴마크의 개척자 달가스, 이스라엘의 민족지도자 그룬트비히와 우리나라의 안창호 등 애국애족의 민족주의자에게 한창 매료되어 있던 필자가 이라는 책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은 어디선가 그 책을 구해다 주셨다. 그 책을 읽으며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 거창한 이상주의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20여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선생님께 필자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선생님 곁에서 선생님을 보살펴드릴 거예요. 선생님 눈이 되어드릴 거예요."
깨고 나니 꿈이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필자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때까지 받기만 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던 충정이었다.
진 선생님,
제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가슴에 고이 모셔두겠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아름다웠던 내 동화 속 왕자님이었습니다.
우리의 미술품 시장은 화랑과 경매 회사로 양분되어 있다. 물론 작가가 직접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개인전 기간에도 작가는 화랑을 통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술품은 그리거나 만드는 예술인의 정신세계가 투영되기에, 각각의 개성이 다르고 장르가 다르므로 공산품이나 생필품처럼 쉽게 살 수가 없다. 제아무리 저명한 작가의 예술품도 내 보기에 탐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가 서명한 미술품에는 나름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집약돼 있으므로 오랜 시간 작품과 교감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의 침체 속에서도 미술품 경매시장은 나름 활기를 띠어 2017년 전반기 경매회사를 통한 미술품 거래액만도 989억원으로 2016년 상반기 964억4000만원보다 2.5%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국내 12개 경매회사를 잘 관찰하면 미술품 시장의 흐름뿐 아니라 거래된 장르별, 작가별 가격의 추이를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현장경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미술품 판매를 하므로 집에 앉아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경매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온라인으로 보는 작품 이미지와 짧은 설명이 미흡하면 경매사에 방문해 전시된 실물을 직접 살펴본 후 구매를 결정하면 된다.
집의 거실이나 서재, 침실 등에 그림 한 점 걸고 싶으면 우선 예산을 정하고 화랑이나 경매 회사를 찾아가 예산 범위에 맞는 미술품을 선별해본다. 작품 가격이 예산에 맞는다면 작가의 경력이나 전시 이력, 작품평 등을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한다. 또 그 작가의 최근 작품 가격 추이도 살펴본다.
천칠봉(千七峯, 1920~1984) 화가는 전북 전주에서 출생해 국전 특선 수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화가다. 남녘에서는 경매 시 언제나 인기를 누리는 작가다. 는 4호의 소품이지만 농염한 붉은 빛이 명품인 작품이다. 인사동 화랑끼리 모여서 하는 경매에서 35만원에 낙찰받았다. 천 화가는 중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화업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히 빨간색의 처리는 가히 초일류급이란 평을 듣는다. 석류 알이 곧 쏟아질 것 같은 긴장의 순간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실 빈 벽에 이 한 점만 걸어도 공간을 충분히 채운다.
공석순(孔錫洵, 1944~) 화가는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국전에 입선했으나 화장품 회사 등에 근무하다 50대에 전업 작가를 선언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격조 높은 작품을 표출하고 있다. 몇 해 전 인사동에서 함께 점심식사 후 골동품 가게에서 연꽃 모양의 소반을 사서 그곳에 꽃 그림을 부탁했더니, 보름 후 그림을 완성했다. 이 작품 또한 30만원 미만의 가격이 소요되었다.
철우(鐵友)란 아호를 쓰는 서각인(書刻人) 곽금원(郭錦元, 1955~)은 우리나라 각자장(刻字匠,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장인) 철재(鐵齋) 오옥진(吳玉鎭, 1935~2014)의 수제자로 30여 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명인이다.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그분의 작품을 하나둘 장만하게 되었다. 나의 캐리커처도, 서실의 현판도 그분의 작품이다. 오옥진 선생은 문하생들과 경복궁 흥례문 회랑에서 전시회를 가져왔는데, 곽금원 선생이 무늬 좋은 느티나무 판재로 짜 맞춘 를 출품했을 때 30만원을 주고 가져왔다. 표면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선생의 푸른 대나무 그림을 새겨 품위와 운치를 더하고 있는 작품이다.
원로 화가 김숙진(金叔鎭, 1931~)은 홍익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분으로 국전 문공부장관상, 예술원상을 수상한 관록의 화가다. 1호의 이 조그만 그림 속에는 ‘이상향(理想鄕)’이 꽉 차 있다. 바다 혹은 강가에 복숭아나무가 줄기를 늘어뜨리고, 사이사이에 분홍빛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파란 물 위 하늘은 오색 빛으로 휘황하고 꼬리에 초승달과 보름달을 매단 새 두 마리가 힘차게 날고 있다. 덧없는 세월의 여정이 물결 따라 느리게 지나간다. 이 작품은 온라인 경매 당시 작가를 잘 인지하지 못해 입찰자 없이 15만원에 낙찰받았다.
한 포기의 히아신스를 맑고 투명한 수채로 그린 홍종명(洪鍾鳴, 1922~2004)은 평양에서 출생,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제주도를 근거지로 활발한 미술활동을 한 분이다. 특히 문명세계를 초월하는 시원(始原)을 향한 그리움과 두고 온 고향, 평양에 대한 향수를 승화시킨 시리즈와 시리즈의 작품들은 이분의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2호 사이즈의 이 수채화는 8만원에 낙찰받았다.
이렇듯 예술성과 인생의 경륜이 조화된 원로 화가의 작품 석 점과 집 안 어느 공간에 두고 봐도 좋을 장미꽃 소반, 서각 명인의 공예품을 모두 118만원에 구입했다. 예술작품을 금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술품을 바라보고 애호하고 한두 점씩 수집하면서 겪게 되는 개개인의 눈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의 푸른 영혼이 깃들어 있어, 정서를 함양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미술품 수집은 30만원에서 시작하되 50만원, 100만원으로 상향한다. 그 안에서도 언제든 빼어난 명품을 만날 수 있다. 부지런히 화랑가와 미술품 경매 현장을 드나들고 꼼꼼히 살피어 예향(藝香)에 젖어볼 일이다.
장마가 지나가고 더욱 더 더워진 무더운 여름, 더위를 식힐 피서의 시즌이 다가왔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두고 갈 반려동물이 걱정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여름은 반려동물과 함께 떠나는 것은 어떨까?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한 ‘멍비치’, 그리고 반려동물과 같이 가볼 만 한 여행지를 추천한다.
반려견과 시원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멍비치!
반려견과 함께하는 바다 여행과 물놀이는 반려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사실 반려견과 같이 갈 수 있는 해변이 많지 않을뿐더러 다른 이용객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이런 견주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해수욕장이 바로 강원도 양양 남애해변에 있는 ‘멍비치’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한 반려견 전용 해수욕장으로 일반 관광객과 분리돼 있다. 해변에 반려견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도 있고, 함께 해변에서 해수욕도 즐길 수 있다. 멍비치에는 100m의 길이로 안전펜스가 둘려 있고, 1m 20cm 깊이의 바다까지만 들어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전하다. 또한 해수욕장 입구에는 강아지 전용 놀이터와 샤워장까지 마련되어있다.
이용수칙과 주의해야 할 점
멍비치는 한 사람이 반려견 두 마리를 데리고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는 인당 3천 원, 강아지는 kg에 따라 5천 원 이상 낸다. 맹견류(입마개를 해야 하는 종류)는 입장이 불가하고 반려견이 없는 일반인도 들어갈 수 없다. 깨끗한 해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강아지의 배설물을 치울 수 있는 비닐봉지가 파라솔마다 준비되어있다. 배설물을 수거해 오면 간식이나 사료 같은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루에 2번씩 모래사장 소독을 하고 매일 해양경찰 점검도 받고 있단다. 이 외에 애견 에티켓과 공지사항을 잘 참조하여 즐긴다면 우리 강아지들과 함께 시원하고 즐거운 바다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주소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광진리 78-20 광진해변
개장 기간 2017년 7월 8일 ~ 8월 20일
강원도 평창 봉평 허브나라 농원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강원도 태기산 자락에 허브나라 농원이 있다. 1993년 문을 연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 허브 테마 관광농원으로 평창의 대표 명소 중 하나다. 이곳은 반려견과 함께 입장할 할 수 있어 애견인들 사이에서는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손꼽힌다. 태기산의 흥정계곡을 따라 조성된 허브나라는 1만여 평 규모의 정원으로 7가지 주제로 꾸며져 있다.
이용수칙과 주의해야 할 점
허브나라 농원의 입장료는 인당 7,000원이며, 반려견 입장료는 없다. 허브나라 농원 안에서는 반려견에게 목줄을 반드시 착용시켜 주변 관람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실내 관람 시에는 반려견을 안고 입장하며 배변 봉투를 지참하여 배설물을 즉시 수거해야 한다. 대형견은 출입할 수 없다.
주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계곡길 225 (흥정리 302-7)
덕평 자연 휴게소 ‘달려라 코코’
강아지와 장거리 이동이 걱정되시거나,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를 원할 때 애견 테마파크 ‘달려라 코코’를 추천한다.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는 체험장소로 애견 테마파크가 떠오르고 있다. 그 중 덕평 자연 휴게소 내에 위치한 ‘달려라 코코’는 반려견을 기르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명소 중의 명소다. 덕평 자연휴게소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 테마파크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운전 중 휴식의 목적이 아닌, 이곳 휴게소의 테마파크를 목적으로 방문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 ‘달려라 코코’는 도심 속에서 산책할 공간이 부족한 반려견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서 반려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친환경 애견 놀이터 ‘달려라 코코’는 1,200평의 천연 잔디 시설로 전력 질주 코스, 물고 당기기, 터널, 망루 등과 같은 시설을 마음껏 뛰놀며 도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소형견을 위한 인조잔디 공간과 반려견카페가어 다른 애견친구를 만나 사회성을 기를 수도 있다.
이용수칙과 주의해야 할 점
친환경 애견 놀이터와 애견카페를 이용할 수 있는 입장권은 10,000원이다. 반려견을 동반할 시 5,000원이 추가된다. 강아지가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위생 관리도 철저히 한다. 퇴장 시 소독용 물티슈와 세면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달려라 코코’는 예방접종이 완료된 3개월 이상의 건강한 반려견만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견의 건강과 쾌적한 환경을 위해 음식물 반입은 금지하며 일부 공격성이 강한 강아지나 타인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품종은 입장이 제한된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덕이로 154번길 287-76 덕평 자연휴게소 내
제주도 애견 동반 가능 관광지
요즘 반려견과 함께 제주도를 여행하는 관광객이 많다. 국내 항공사에도 반려견이 탑승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고 제주도 내 애견 펜션과 애견 출입 가능 식당도 증가했다. 사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하면 어렵지 않게 반려견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 반려견이 입장 할 수 있는 제주도의 관광지는 어떤 곳들이 있을까?
● 섭지코지
드넓은 초원과 광활한 바다를 함께 볼 수 있는 제주도의 대표 관광지다. 영화 , , 드라마 의 로케현장이기도 하다. 이 근처 성산일출봉은 반려견 출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섭지코지는 가능해 반려견을 동반한 관광객을 종종 볼 수 있다. 섭지코지 입장은 무료이고 이곳 역시 배변 봉투와 목줄은 필수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 제주 카멜리아힐
제주 카멜리아힐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는 동백 수목원이다. 80개국의 동백나무 500여 종에 6,0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꽃과 식물들로 예쁜 풍경을 이루어 계절마다 보는 즐거움이 다르다. 동백과 벚꽃, 튤립, 야생화가 계절마다 자태를 뽐내는 이곳의 여름은 동그랗고 풍성한 수국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반려견의 출입이 가능한 곳으로 입장료는 성인 기준 8,000원, 청소년은 5,000원, 반려견은 따로 입장료를 내지 않는다.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병악로 166
● 한림공원
입구에서부터 야자수가 늘어져 이색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한림공원은 반나절을 할애해도 될 만큼의 큰 공원으로 9가지 테마로 즐길 수 있다. 적정한 습도가 유지되며 넓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걷기 좋다. 재암 민속마을에서 옛 제주의 초가집을 볼 수 있고, 사파리 조류원에서 먹이를 주는 등 체험도 가능하다. 용암동굴과 석회동굴이 공원 안에 각각 있고, 7월에서 9월은 연꽃축제 기간이다.
한림공원 역시 반려견 입장 가능한 제주도 관광지로, 성인은 11,000원이며 반려견은 따로 입장료가 없다. 또 한림공원 바로 앞으로는 에메랄드빛의 금능으뜸원해변이 있다. 한림공원에 반려견과 함께 입장할 때에는 목줄과 배변 봉투를 반드시 지참한다.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한림로 300
반려동물과 이동 시 주의해야 할 점
과거와는 다르게 반려동물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비행기나 배를 이용해 멀리 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운송수단마다 준수해야 하는 사항이 각기 다른데 어떤 규칙이 있는지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 자동차 장시간 여행시 휴게소에 들려 휴식을 갖는 것이 좋다. 반려견 또한 장거리 탑승의 경우 멀미를 할 수도 있다. 여행 가기 전 동물 병원에 들려 멀미약을 미리 처방 받아 준비해놓아야 한다.
주의점 어떠한 이유라도 개를 차안에 혼자 있게 하면 안 된다. 바깥의 기후 변화를 예측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를 스트레스, 저체온증, 열사병,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 발생 할 수 있다.
⊙ 비행기 항공사마다 약관에 의해 다르나 국적기의 경우 소형 반려동물의 기내 동반 탑승을 허용한다. 전용 이동장을 사용해야 하고 기내에서는 이동장에서 나오지 않도록 한다. 대형견의 경우 수화물 위탁을 해야 하며 소형견과 대형견 모두 kg에 따라 규정 요금을 지불한다.
⊙ 지하철 운영 약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모든 지하철에서 반려동반 동반 탑승을 허용하고 있다. 이때 전용 이동장에 넣어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한다. 또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 반려동물의 동반 탑승을 허용하고 있다.
⊙ 버스 장애인 보조견 및 전용 이동장으로 이동하는 반려동물은 함께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운송 시 불쾌감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탑승이 제한될 수 있다.
⊙ KTX 외 기차 전용 운송장 또는 가방을 이용해 반려동물이 보이지 않게 이동한다. 광견병 예방접종 등 예방접종을 마친 애완동물의 동반 탑승을 허용한다.
반려견 여행 다녀온 뒤 케어
해수욕을 했던 여행이라면 바닷물의 소금기로 인해 피부병이 날 수도 있으니 해수욕 후에 꼼꼼히 씻겨야 한다. 뙤약볕에 오랜 시간 있었다면 미지근한 물에 부드럽게 마사지 하듯이 씻겨주는 것이 좋다. 허브 농원 또는 수목원, 놀이터 다녀온 뒤라면 반려견의 몸에 벌레나 진드기가 붙어 있을 수도 있으니 부드럽게 빗질을 해준 뒤 목욕시킨다. 귀가 덥힌 품종의 경우 귀 쪽에도 벌레가 들어 갈 수 있으니 유심히 봐주는 것이 좋다. 여행에 신이 난 반려견의 몸에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여행 전에 반려견의 상처 연고를 처방받아 가져가는 것도 좋다. 반려견에게도 여행이 피로 할 수도 있으니 다녀온 뒤 반려견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한 뒤 이상 징후가 있다면 동물 병원을 내원해야한다.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통상 어딜 가나 꼭 들러봐야 할 곳이란 게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런 곳이 마음에 든 적이 별로 없고 내 마음대로의 코스를 다니곤 했다.오키나와 여행 중 츄라우미 수족관((沖縄美ら海水族館)은 꼭 들러보는 코스라고들 하는데 이곳 역시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즐거운 곳 같았다. 그러나 청정한 오키나와 바다를 보여주는 아시아 최대의 수족관이라 하며 꼭 들러야 한다 해서 할 수 없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도착했을 때는 간간히 뿌리는 비와 함께 습한 무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족관은 총 4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방대함이란 가히 어마어마하다. 아주 오래전 홍콩에서도 이런 수족관엘 갔던 적이 있는데 내부가 거의 흡사했다. 외국인 여행객은 물론이고 일본인 여행객들도 꽤 많이 보러 온다는 명소라고 한다. 오키나와현이 일본에서는 우리의 제주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8m의 고래상어나 쥐가오리, 산호초나 심해의 생물들의 풍부한 어종과 신비한 풍경들을 생생하다. 물론 야외에서는 다이내믹한 돌고래쇼가 있는데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치며 관람하는 여행객들이 몰려있다. 시원한 실내에서 바닷속 풍경에 더위를 식혔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흐리고 후두둑 빗방울을 뿌린다. 수족관 건물 아래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가면 에메랄드 비치가 있었다. 수질이 AA등급으로 코발트블루의 바다 빛깔로 유명하다고 한다. 구름이 덮이며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고 해변 쪽으로 오는 여행자들도 별로 없다. 인적 드문 해변을 조용히 한 번 둘러본다.
어차피 기왕 왔으니 샅샅이 둘러보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건너편 쪽에 있는 해양박물관과, 그 아래쪽에 민속촌처럼 생긴 아주 오래된 옛 마을이 있었다. 여행자들이 거의 와 보지 않아서 관리하는 직원들이 한가로이 있다가 반가이 맞이한다. 어릴 적 읽었던 일본소설이 떠오르던 풍경들이다. 높은 기온과 습도에도 추억어린 듯한 마을을 둘러보니 지친 마음을 상쇄해 주는 듯 하다.
모두 돌아보고 나오니 츄라우미의 바다와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이렇게도 후텁지근하고 짜증유발의 날씨는 지금도 기억난다. 고온다습으로 미칠 것 같았던 날씨였다. 어떤 계절이나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관없이 여행했었는데 이젠 인내심이 부족해진 건지 요즘의 여행조건에 계절과 날씨를 빠뜨릴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녀오고 나니 좀 더 잘 참고 찬찬히 살피며 다녀보고 사진도 잘 좀 담을걸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여행이란 가끔씩 이렇게 일상에서 떠올리며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기억으로 또 하루가 쌓여가는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