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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⑦ 해남 대흥사(大興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 2018-10-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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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 ⑥ 양산 통도사(通道寺)
-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자장율사가 당나라 구법(求法) 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을 쌓은 뒤 봉안하였다. 절이 위치한 영축산(靈鷲山)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說)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으로 통도사라고 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 통도사는 산기슭에 계류를 끼고 펼쳐진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위치한 규모가 매우 큰 절집으로 통도사를 일컫는 표현은 여러 가지다. 첫째가 5대 적멸보궁(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 중 제1적멸보궁이라는 자부심이다. 5대 적멸보궁은 통도사 외에는 모두 강원도에 있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와 태백산 정암사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했다.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했다. 불교도 간에는 이들 5대 적멸보궁을 모두 찾아보는 순례적 숭배를 뜻깊게 생각하며 가장 신봉하는 기도처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용연사와 건봉사, 도리사를 합쳐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통도사는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 중 불보(佛寶) 사찰이다. 법(法)에 해당하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승(僧)을 뜻하는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와 함께 삼보(三寶) 사찰로 부른다. 그중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셨기에 삼보사찰 중 으뜸인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 한다. 이는 일주문 좌우에 걸린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말로 통도사의 품격과 사세(寺勢)를 가늠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영축총림(靈鷲叢林)'이다. 우리나라(조계종)에는 ‘5대 총림’으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를 손꼽는다. 승려의 참선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叢林)이라고 한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조직과 체계가 정비된 큰 절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를 추가하여 ‘8대 총림’이라 한다. 통도사에는 국보 제290호 대웅전 및 금강계단과 25점의 보물이 있으며, 성보문화재 4만여 점을 소장한 국내 최대 규모의 성보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통도사의 가람(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배치는 금강계단을 서쪽에 정점으로 두고 동쪽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 ‘하로전’이 있다. 불이문을 지나면 대웅전 못미처 세존비각까지가 ‘중로전’이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는 지역을 ‘상로전’이라 한다. 이렇게 노전(爐殿)이 세 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쳐진 복합 사찰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크고 역사가 오래된 절을 의미하며 특히 금강계단이 있는 상로전이 통도사 핵심지역이다. 중로전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대광명전과 용화전, 관음전이 있다. 하로전에는 극락전과 영산전, 약사전 등이 있다. 통도사로 들어가는 경부고속도로 IC 명칭이 통도사이다. 특정 종교시설을 나들목 명칭으로 한다고 말도 많았지만 이 근처에서는 통도사를 대치할 지명이 없다. 절 아래 마을은 기념품점과 식당이 모여 있다. 사하촌(寺下村) 수준을 넘어 작은 신도시를 연상케 한다. 어린이집부터 양로시설까지 통도사 시설이 여럿 눈에 띈다. 시가지가 끝나는 지점에 거대한 산문(山門)이 매표소를 겸한다. 걸어가거나 차량에 탄 채로 표를 끊고 십 분여 들어가면 두 번째 산문인 총림문(叢林門) 옆이 주차장이다. 길옆에 흐르는 맑은 시내는 차고 시원해 여름철 피서지로도 인기있다. 영축총림(靈鷲叢林) 대형 현판을 단 총림문(叢林門) 앞에는 제법 큰 규모의 석당간(石幢竿)이 있다. 오른쪽에는 경내 승탑과 탑비를 한 곳에 모아놓은 부도원(浮屠院)이 조성되어 있다. 총림문 지나 오른쪽으로는 성보문화재 40여 만점을 보관, 전시 중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성보박물관이 있는데 목재와 석재 사찰 장승이 2기씩 서 있다. 초입부터 볼거리가 많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을 지나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사찰영역이며 하로전이다. 통도사는 일주문도 여느 절집에 비하여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이나 이미 지나온 2개의 문이 워낙 크고 화려해서 오히려 작아 보인다. 보통 2개의 기둥을 한 줄로 세우지만 이곳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운 세 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에 다포형식이 화려하며 좌우 앞뒤로 또 4개의 활주를 받쳐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일주문이다. 일주문 앞 2개의 돌기둥에는 구하(九河) 스님이 쓴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 즉 '각 성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해야 하고,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통도사 스님들에게 주는 경구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일주문 현판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道寺)’는 흥선대원군 친필이다. 일주문 가운데 기둥 2곳에 걸린 주련은 남쪽 지방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 앞서 통도사의 위상을 설명할 때 나온 2가지 표현,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나타내는 글귀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하로전이다. 왼쪽에 2층 건물 범종루가 있고, 오른쪽에 극락보전이 있다. 그 앞마당에는 왼쪽에 만세루, 오른쪽에 영산전, 극락보전 맞은편에는 약사전이 중앙의 3층 석탑을 중심으로 'ㅁ자' 꼴로 모여 있다. 하로전을 독립된 하나의 사찰로 간주했을 때 만세루를 입구로 하여 중앙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정면에 영산전, 오른쪽에 극락보전, 왼쪽에 영산전을 갖춘 모양새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로전의 중심건물은 영산전으로 보이는데 사람들 발길은 극락보전으로 먼저 향한다. 들어오는 입구에 있기도 하거니와 극락보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기 때문인데 극락전 후벽 중앙에는 반야용선 벽화가 그려져 있어 모든 이들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하로전의 중심건물은 영산전으로 극락전마저 이곳에서는 부속 불전이다. 만세루와 마주 보며 서 있는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으로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하로전에는 앞에서도 언급한 만세루와 약사전이 있다. 뜻밖에도 눈길을 끄는 건 천왕문 왼쪽에 숨은 듯 자리 잡은 작은 가람각(伽藍閣)이다. 가람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사방 1칸짜리 법당이다. 아홉 마리 중 남아있는 한 마리 용신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목수 한 사람이 도끼 하나로 쇠붙이를 전혀 쓰지 않고 지었다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중로전이다.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미불의 글씨이다. 그 아래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 편액은 명 태조 주원장 친필로 전해지는데 원래는 일주문에 걸었다고 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하로전보다 약간 높은 지형의 일주문을 지나 중로전으로 들어서면 먼저 관음전이 나타난다. 그 오른쪽 뒤편으로 용화전, 대광명전이 있으니 이 세 불전이 중로전의 중심건물이다. 관음전은 정면, 측면 공히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주심포식 팔작지붕이다. 자비로운 관음보살을 모셔 항상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느라 분주한 곳이다. 관음전 앞에는 3m가 넘는 큼직한 석등이 하나 서 있다. 네모난 화창에 팔각 받침과 지붕돌을 얹은 고려시대 형식으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관음전 뒤 용화전 안에는 하얗게 호분칠을 한 석조미륵불 좌상을 모셨다. 내부 벽체에는 절집에서는 유일하게 서유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특히 용화전 앞에는 봉발탑(奉鉢塔)이 서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물이나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다. 용화전 뒤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중로전의 중심건물 대광명전(大光明殿)(보물 제1827호)이 있다. 통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대웅전과 함께 통도사에서 중요한 목조건물 꼽힌다. 내부의 삼신불 탱화는 보물 제1042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러 통도사가 모두 타 버렸을 때도 대광명전만이 불타지 않았다. 내부 들보에 화재를 예방하는 묵서가 쓰여 있어 그랬다는 말이 전해온다. 吾家有一客(오가유일객) 定是海中人(정시해중인) 우리 집에 한 분의 손님이 계시니, 바로 바닷속에 사는 사람이다 口呑天藏水(구타천장수) 能殺火精神(능살화정신) 입에는 하늘에 넘치는 물을 머금어, 불의 정신을 소멸할 수 있네 이후 통도사에서는 위 문구를 적은 종이로 밀봉한 소금단지 60여 개를 크고 작은 당우(堂宇)마다 처마에 올려놓아 화재를 예방했다. 매년 양기가 가장 세다는 단오에는 새 소금을 담은 소금단지로 교체하는 용왕재를 올린다. 그 밖에도 불전마다 댓돌 계단 아래 아귀발우(餓鬼鉢盂)가 있다. 아귀밥통이라고도 하며 부처님께 올린 청정수나 공양을 마친 후 물을 버리는 용도로 퇴수대(退水臺) 혹은 청수통(淸水筒)이라고도 한다. ‘아귀는 늘 배고파서 아우성인데 목구멍은 바늘만 해서 물만 마실 뿐 음식을 먹지 못하니 소중한 물을 버리지 않고 아귀에게 준다’는 의미다. 음식 찌꺼기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절약과 검소함을 익히려는 한국불교의 귀한 풍습이기도 하다. 중로전 마당 왼쪽의 원통방과 감로당은 법회 시 대중을 수용하는 대방(大房)으로 공양간이 함께 있는 편의시설로 쓰고 있다. 원통방 처마 밑에는 원통소(圓通所) 편액이 있다.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석파(石坡) 호가 쓰여 있다. 그밖에 원통전 옆 서쪽에는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이 있다. 사대부집에나 있을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三門)에 개산조당(開山祖堂) 현판을 달았다. 그 뒤편의 전각이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이다. 개산조당 삼문 앞에는 고려시대쯤으로 보이는 고식(古式)의 석등이 하나 서 있다. 그 오른편에는 야간에 불 밝히는 정료대(庭燎臺)처럼 보이는 석물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37가지 방법을 새겨 놓은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이라고 한다. 개산조당 삼문 옆 금강계단 축대 아래 붙여지은 작은 비각은 세존비각(世尊碑閣)이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불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 안에 보관하였다. 그 후 한 개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태백산(太白山) 갈반사(現 정암사)에 봉안되었음을 새긴 비석이다. 이렇게 하로전, 중로전의 중요한 전각만 둘러보았어도 웬만한 절집 두 곳 넘게 본 셈이나 정작 통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상로전이 남았다. 상로전에는 별도의 문이 없어 정(丁) 자 형태의 특이한 대웅전이 바로 나타나는데 오른쪽 뒤에 있는 금강계단과 함께 국보 제290호이다. 상로전의 주 건물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 규모인데 동, 서, 남, 북 네 곳 모두에다 현판을 걸어놓았다. 들어가는 방향인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등 각기 다른 현판을 걸었다. 적멸보궁(구하 스님 글씨) 외에는 모두 흥선대원군 글씨이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5년(인조 23)에 중건했다. 건물 기단은 통일신라시대 석조기단과 같은 구조다. 남측 정면과 양측면 지붕이 합각인 특이한 모습에 일부는 철제 기와도 보여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붕 정상에는 찰간대(刹竿臺·큰 절 앞에 세우는 깃대)라고 통칭해 부르는 청동제 보주(寶珠)에 철주(鐵柱)가 솟아있다. 이는 규모가 있는 절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나타낸다. 처마 끝 지붕에는 도자기 연봉 장식이 있어 불사리 금강계단과 적멸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내부 우물천정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했다.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했다. 통도사 절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을 교화시켜 승천하게 한 뒤 연못을 메운 후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했다. 아홉 마리 중 한 마리는 남아서 절을 지키겠다하여 연못 한 귀퉁이에 살게했다. 천왕문 옆 가람각은 용을 위한 전각으로 전해진다. 계단(戒壇)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하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이 깃든 곳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금강계단에 직접 참배를 금지하였으나 최근에는 지정된 날자와 시간에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에서 참배할 수 있다. 음력 초하루부터 초삼일, 음력 보름날 그리고 지장재일인 음력 18일과 관음재일인 음력 24일의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다. 대웅전의 서쪽으로는 산령각과 삼성각, 응진전이 있다. 비좁은 공간에 작고 예쁜 연못이 하나 있는데 남아서 절집을 지키겠다던 한 마리 용이 살던 구룡지(九龍池)이다. 연못자리에 절이 지어졌다는 창건설화를 증명하듯이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멋스러운 공간이다. 상로전의 나머지 공간에는 응진전과 명부전, 일로향각이 있고 보광전과 선원 구역이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관리 목적의 건물 등이다.
- 2018-10-0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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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④ 순천 선암사(仙巖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 2018-09-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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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색다르게 즐기는 홈메이드 사찰음식①
- 마늘·파·부추·달래·흥거 등 오신채를 넣지 않고 만든 요리를 ‘사찰음식’이라 한다. 자칫 맛이 덜하거나 심심할 것이라 오해하지만, 다양한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접목하면 얼마든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특별한 메뉴에 건강 밸런스까지 생각한 제철 사찰음식 한 상을 소개한다. 레시피 및 도움말 디알앤코 R&D총괄 장대근 셰프(조계종 한국사찰음식전문교육기관 이수) 장소 협찬 키프레시(홍대점) 그릇 협찬 지승민의 공기 유익한 토종균을 섭취할 수 있는 청국장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해 이뇨작용과 해독작용에 탁월한 단호박을 매치했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저칼로리인 송화버섯 장아찌를 더하면 콜레스테롤 걱정 없이 소화가 잘되는 한 끼를 즐길 수 있다. 후식으로 말린 과일을 곁들여 비타민을 보충한다. 싸리나무차는 고혈압과 동맥경화 완화에 도움이 된다. 열이 나거나 맥이 약할 때 음을 보충하는 ‘보음식품’으로 대표적인 것이 호박, 토란, 버섯 등이다. 이들 식재료를 활용한 이번 한상차림은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 지친 생체 리듬을 회복하고 기력을 더해줄 것이다. 염분과 열량은 줄이고, 영양과 맛을 올린 사찰식단으로 건강하고 활기찬 가을을 맞이해보자. 단호박 청국장 곤드레덮밥 곤드레 100g을 끓는 물에 10분간 연하게 삶아 물기를 꼭 짠다. 한입 크기로 쫑쫑 썰어 낸 곤드레에 진간장(2큰술)과 들기름(3큰술)을 넣어 밑간한다. 씻은 쌀(500g)에 준비한 곤드레와 물(쌀 부피의 1.2배)을 넣어 밥을 짓는다. 단호박은 껍질을 벗기고 통째로 15분간 찐다. 찐 단호박에 파프리카(1/4개), 브로콜리(1/4)를 넣고 속 재료가 익을 때까지 끓이다 녹말물을 풀어 걸쭉하게 만든다. 소금이나 간장 대신 청국장으로 간을 하고 들기름을 넣어 고소함을 더한다. 완성된 곤드레밥과 단호박청국장을 카레라이스처럼 플레이팅한다. 기호에 따라 청국장을 더해도 좋다. 로즈메리 송화버섯 장아찌 송화버섯(500g)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뺀다. 다시마(1장), 멸치(50g)를 넣어 끓인 육수(50g)에 집간장(185g), 진간장(840g), 사이다(470g), 로즈마리(5g)를 넣고 팔팔 끓이다 준비된 송화버섯을 넣는다. 식성에 따라 청양고추를 더한다. 산해진미인 ‘솔잎 송로버섯 장아찌’에서 착안한 요리로 솔잎 대신 로즈메리를, 송로버섯(트러플) 대신 송화버섯을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말린과일·김튀각 오렌지, 레몬, 파인애플 등 얇게 썬 과일을 건조시킨다. 과일의 수분감이 날아가며 과일 본연의 영양 성분이 농축돼 적은 양으로도 풍부한 영양 섭취가 가능하다. 여기에 바삭한 식감을 더해줄 김부각을 함께 낸다. 찹쌀가루(5g), 물(15g), 소금(0.5g)을 골고루 섞어 묽은 찹쌀풀을 만든다. 김밥용 김에 찹쌀풀을 반만 발라 반을 접고, 다시 반만 발라 접은 뒤 윗면에 찹쌀풀을 발라 통깨를 뿌려 말린다. 식용유(2컵)를 넣고 170℃로 달군 팬에 풀칠한 김을 바삭하게 튀겨낸다. 싸리나무차 구황식물로 콩과에 속하는 싸리나무는 잎, 줄기, 씨앗 모두 식용으로 널리 쓰인다. 고혈압, 동맥경화 완화와 예방에 효과가 있다. 싸리나무 잎(100g), 감초(2개), 다시마, 연근, 당근을 넣고 끓인다.
- 2018-09-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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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③ 안동 봉정사(鳳停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세 번째는 안동 봉정사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봉정사는 조계종 16 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보유한 고찰(古刹)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심포 건축인 극락전과 가장 오래된 다포 건축인 대웅전이 각각 마당을 갖춘 병립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대웅전의 석가 신앙과 극락전의 아미타 신앙을 구현한 봉정사에는 종합 승원으로서 스님들과 신도들의 신앙과 수행, 생활을 위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아직도 주변 밭에서 음식재료를 재배하고 식용하는 수행 합일을 실천하는 산사(山寺)이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세계유산에 등재된 올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들르며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히며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수행을 이어간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 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그리고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7개 산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절집이며 여느 사찰처럼 오 리나 십 리 숲길도 없고 초입이나 산자락 어딘가에 수십 개의 승탑이나 탑비가 줄지어 있지도 않으며, 높다란 당간지주나 우람한 산문이 위압적으로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해탈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안동시내에서 30분 남짓,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절 아래 사하촌도 복잡하지 않아 그 흔한 산채백반 식당가도 없고 몇 채의 민가와 식당이 있을 뿐이다. 매표소를 거쳐 오르막 왼쪽으로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 명옥대(鳴玉臺)를 지나면 잠시 평지가 되는 곳에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인데 이내 평지 주차장 겸 작은 절집 앞마당이 나온다. 다시 경사진 돌계단을 올라 만세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대웅전이다. 제법 긴 오르막 지형인데 그리 험하거나 지루하게 길지는 않아 차분하게 올라갈 수 있다. 누각 2층 안쪽에는 ‘萬歲樓’(만세루) 현판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걸려있다. 즉, 만세루가 한때는 덕휘루였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만세루로 바뀐 것인데 ‘癸丑中夏(계축중하) 金嘉鎭(김가진)’이라는 낙관을 보면 1913년 여름에 썼다는 것이니 최소한 100년 정도는 덕휘루라 불렀던 것 같다. 덕휘루라는 명칭은 이곳을 유생들이 제법 많이 찾아와 공부도 하고 경전을 읽으며 지낸 흔적이라고도 한다. 입구에 명옥대가 있는데, 이는 유교와 불교가 반드시 배척한 것만은 아니고 잘 지내기도 했다는 흔적으로 보인다. 만세루에 올라서면 대웅전 마당인데 왼쪽에 있는 극락전을 먼저 보기로 한다.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 만세루처럼 우화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영산암으로 옮겼다고 하며 바라보는 정면이 극락전, 왼쪽에 고금당, 오른쪽에 화엄강당이 ‘ㄷ’자 형태로 모여 있고 마당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통칭되어 왔으나 1972년 완전 해체 시 발견된 상량문에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1376년 중수한 무량수전에 앞서는 건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옥의 건물 중수(重修)는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후에 하게 되므로 건축연도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정확한 건축연도가 나온 것은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을 묶어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은 극락전이 더 고식(古式)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참고로 창건연도가 확실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1308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지만 측면 칸은 좁아서 정면이 긴 직사각형 건물이며 배흘림기둥을 세운 주심포식 맞배지붕 형식이다. 1972년도 해체 복원 시 근대식 안료를 이용한 단청을 했다는 등 졸속 복원의 비난이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극락전 옆은 대웅전 영역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보물 제55호였으나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선다는 것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판이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는데 이 부분을 보수할 때에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또 다른 후불탱화를 발견하였다. 대웅전 초창기 때 그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사찰에서 별도 보관 중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둘러보았으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을 다 본 것이다. 그만큼 봉정사의 규모는 크지 않고 당우(堂宇)들도 많지 않다. 그밖에는 작은 삼성각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 보았다고 하산을 해서는 안 된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영산암(靈山庵)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립문을 나서 흐르는 물을 건너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랐다는데 지금은 계단이 잘 놓여 있다. 그저 고즈넉할 뿐 따로 볼만한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산사의 분위기가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다. 극락전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는 우화루(雨花樓)에 들어서면 정면에 응진전(나한전)과 삼성각이 있고 왼쪽에 송암당, 오른쪽에 관심당이 역시 네모꼴(ㅁ) 구조로 모여 있다. 가운데 마당에는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기암괴석을 심어 휘어진 향나무 고목과 함께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봉정사를 일컬어 목조건축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졸하고도 검박한 건물들인지라 더욱 맘에 끌린다. 과연 영국 여왕에게 보여줄 만큼 가장 한국적인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절집들보다 작은 규모에, 크고 화려하게 추진하는 중창불사 하나 없어 더욱 맘에 드는 진정한 산사(山寺) 봉정사였다.
- 2018-09-0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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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② 보은 법주사(法住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 2018-08-3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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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① 공주 마곡사(麻谷寺)
-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 2018-08-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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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세 이상 주축으로 한반도 평화 만들기 ‘은빛순례단’
- SNS를 통해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시절, 사회에서 한몫 제대로 하던 시니어들이 뭉쳐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고 했다. 앉아서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대와 이념, 종교를 떠나서 터놓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이 모였다. 열정만큼은 청춘인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축인, 이름하여 ‘한반도평화만들기 1000인 은빛순례단(이하 은빛순례단)’이다. 갈등을 넘어서 마주 보다 “걸으면서 세상과 나누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자.” 이런 의견이 모인 것은 작년 9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있었던 연찬 모임에서였다. 남북에 불어온 훈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이 땅을 물려받을 미래 세대를 위해 뭔가해보자며 의견을 모은 것이 ‘은빛순례단’을 탄생시켰다. 지난 3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성대하게 출발 행사를 치르고 난 뒤 은빛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국립 현충원 참배였다.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은 엄숙한 장소이면서도 정치 대립이 극명한 곳이다. 소위 내 편의 영령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은빛순례단으로 발을 떼면서 난생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민주당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 그가 박정희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하면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이부영 이사장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서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뿐이라 생각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인해 마음속 무엇인가가 씻겨나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 현재의 과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일생 지켜왔던 자기 원칙을 깨기란 쉽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은빛순례단의 운영단장을 맡고 있는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도 현충원 방문이 꽤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임정요인(臨政要人) 묘역에서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역 말고도 신돌석 의병장, 홍범도, 김규식 등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지킨 분들 또한 잠들어 있는 곳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새해 어떤 정당인이 누구의 묘소에 참배했는지 그 사실에만 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부정적 시각으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인정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은빛순례단의 생각이다. 이후 은빛순례단은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4·19 기념탑을 참배하고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등 비교적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 충북 음성, 옥천, 영동 등지에서 걷기 순례와 연찬, 방문 순례를 했다. 5월에는 전남 일대를 돌며 평화의 소중함을 알렸다. 도법 스님과 느리게 함께 걷는다 인천 지역에서 은빛순례단 걷기 모임이 있던 날, 도법 스님과 수지행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으며 개항의 역사를 비롯해 한국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역사 탐방으로 꾸며졌다. 60세 이상을 은빛, 이하를 금빛이라 칭하는 은빛순례단.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신구 세대가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걷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은빛순례단은 3·1운동 100주년인 내년까지 연찬 모임, 방문 순례, 걷기 모임 등을 통해 세상과 경계 없이 나누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이날 모임에는 도법 스님 외에도 이삼열(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손이덕수(디자인 아티스트) 부부, 정세일(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 씨 등 은빛순례를 함께하고자 하는 50여 명이 동참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든 것은 20여 년 전. 지리산 댐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시절이었다. 2004년에는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탁발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깨달음과 가르침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과 마주했다. 수지행은 도법 스님을 도와 일정을 짜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수지행이 일정을 짜주면 도법 스님은 따져 묻지 않고 순례길에 응했다. 매일같이 10km를 걷는 강행군을 계속해온 순례의 달인들이다. 인천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궁금해 도법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길에서만 사시냐?”고 말이다. 도법 스님은 “나는 할 줄 아는 게 걷는 것밖에 없다”며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을 하다 “순례, 즉 걸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순례는 꼭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있는 활동도 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경청 순례’라고 했다. “우선 각 종교계를 먼저 만나고 있어요. 천주교 주교회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은빛순례단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종교계가 우리 사회 통합에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단체들도 만나볼 생각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마음을 잇고 벽을 허물어 넘어설 것인가가 화두이자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연찬 순례다. 대중을 상대로 평화의 한반도로 만들려면 과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현장을 찾아가는 걷기 순례를 한다. 걷게 되더라도 많이 걷지는 않는다. 시니어가 주축이다 보니 걷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있다고. 매일 8km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으나 좀 더 시니어 세대의 상황에 맞게 계획을 바꿨다. 도대체 왜 걸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걷지 않고 편히 쉬면 그만 아니냐? 걷는 행위를 거스를 수 없는 순례길. 다리도 성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길 위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장수시대인 만큼 환갑을 넘겼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안주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도법 스님은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해 뭔가 할 일이 없는 세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할 게 많은 시대인데 그것을 못 찾고 있는 것이죠.” 은빛순례단 중심에서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이부영 이사장에게서 들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불안이 고조되니 자녀들 입에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부영 이사장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뭘 한다고 설치고는 다녔는데 결국 내 손자, 손녀들한테 전쟁 불안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이구나.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헛살았나? 하는 자괴심이 컸다더군요.” 이부영 이사장은 남은 세월이라도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순례가 시니어에게 더욱 적합한 사회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고 했다. 세대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다 도법 스님 눈에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포착됐다. 은빛순례단이 출범식을 하던 날, 태극기와 함께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한쪽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과 적개심을 표출하던 모습.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이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모든 종교와 이 편과 저 편이 벽을 넘어서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리는 날 후손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개심을 표출했죠. 독립선언을 했던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 반목하는 모습, 이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려면 누군가가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바로 어른들이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든 다 만날 겁니다.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도법 스님은 사회를 좀 더 종합적으로 균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새의 날개 이야기를 했다. “흔히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온몸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아요. 대한민국이라는 새도 온몸으로 날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좌우 갈등만 있었는데 지금은 세대 갈등도 있습니다. 어른과 젊은이들 사이가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죠. 모든 관계가 소중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그런 마음들이 깨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삶의 모든 과정을 평화롭게 다뤄갈 수 있는 실력과 방법, 정화의 체질화, 문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이 돼야 한다. 평화운동은 통일이 돼도 지속돼야 한다. 일상의 평화. 결국 은빛순례단이 미래 세대를 위해 다지고 싶어 하는 기본이란 일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평화가 아닐까.
- 2018-06-2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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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종사 삼정헌(三鼎軒)
-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 2017-12-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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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 “음식을 의식주의 하나가 아닌 약으로 보라”
-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 2017-05-02 0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