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별다른 증상이나 기저질환이 없던 A(41·여) 씨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난 후 발음이 어눌해진 것을 느꼈다. 급하게 응급실을 찾은 A 씨.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뇌지주막하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으로 개두술 혈종제거술과 뇌동맥류 결찰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 후 별다른 신경학적 후유증 없이 퇴원했지만, 반대편 우측에 시신경 주위 비파열성 뇌동맥류가 동반되어 있어 5개월 뒤 시력 손상 없이 뇌동맥류 결찰술을 받고 완치됐다.
뇌혈관은 심장에서 대동맥을 거쳐 맨 먼저 혈류가 도달하는 기관으로 매순간 혈압의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뇌세포는 일정한 혈류량 유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혈압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과정에서 혈역학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나이가 들거나 동맥경화와 같은 뇌혈관의 염증성 변화로 인해 뇌혈관에 병리학적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뇌에 혈액을 운반하는 뇌동맥의 특정 부위가 작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뇌동맥류 환자, 절반 이상은 여성
뇌동맥류란 이렇게 뇌동맥이 병적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몸속 다른 동맥과 달리 혈관 주위 조직이 없고, 뇌척수액이나 매우 부드러운 뇌조직에 싸여 있어, 뇌동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터지면 뇌지주막하 출혈을 일으킨다.
뇌동맥류가 발생하는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혈관 벽을 약하게 만드는 요인은 있다. 바로 흡연이나 고혈압, 과음 등이다. 또 뇌동맥류 환자 중 절반은 중년 여성인데, 혈관 보호 역할을 하는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분비가 폐경기 이후 감소하면서 뇌동맥류 발병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선 머리 부상이나 심내막염 등 혈액 내 감염 후 뇌동맥류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가족력이 있다면 미리 검진을 받는 게 중요하다. 아울러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혈관이 갑자기 수축했다가 팽창하기 때문에 혈압이 급상승하는 경우가 많다. 뇌혈관이 혈압을 이기지 못해 뇌동맥류가 터질 위험이 증가하는 만큼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전조 증상 없고, 터지면 극심한 두통
뇌동맥류가 파열된 경우엔 뒷목이 뻣뻣하거나 갑작스러운 의식 저하, 구토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극심한 두통을 갑작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는 뇌지주막하 공간으로 혈액이 한꺼번에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파열 당시 두통을 느낄 정도라면 즉시 응급실로 오게 되는데 그나마 이 경우는 불행 중 다행이다. 파열 시 뇌혈관이 받는 압력의 크기에 따라 출혈량이 결정되고 출혈량이 너무 많으면 응급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파열성 뇌동맥류 환자도 간혹 두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주로 건강검진 등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다.
뇌동맥류는 크기가 커질수록 파열 위험성이 현저히 증가하는 건 맞지만 크기가 작아도 파열될 수 있다. 크기 외에도 위치와 모양이 파열과 관련한 중요한 인자들인데, 뇌동맥류가 대뇌 쪽의 전방순환계보다 소뇌 쪽의 후방순환계에 위치한 경우 더 잘 터진다. 또 뇌동맥의 가지가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는[분지(分枝)] 부위에 위치한 경우, 모양이 일정하게 둥근 것보다 불규칙적으로 울퉁불퉁한 경우 더 잘 파열된다고 알려져 있다. 사례의 환자처럼 파열된 뇌동맥류와 동시에 발견된 비파열성 뇌동맥류는 일반적인 비파열성 뇌동맥류 환자보다 파열 가능성이 높아 조기에 수술적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 상태에 따라 치료 방법 찾아야
뇌동맥류가 파열된 경우에는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지만 비파열성 뇌동맥류는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환자의 나이, 건강 상태, 동맥류 파열 위험성이나 위치, 모양, 개수, 크기 등 전체적인 뇌동맥류의 특징을 고려해 치료법을 정한다. 혹여 당장 치료해야 할 정도가 아니더라도 뇌동맥류의 모양이나 크기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뇌혈관 영상 검사를 통해 변화를 관찰하는 게 중요하다.
파열된 뇌동맥류를 치료하는 목표는 재출혈을 막는 것이다. 치료법은 일반적 수술인 클립결찰술과 시술인 코일색전술로 나뉜다. 클립결찰술은 두피 절개 후 두개골을 열고 부풀어 오른 뇌동맥류 입구를 클립으로 묶어 혈류가 뇌동맥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수술이다. 그러나 뇌를 직접 접촉해야 하고 상처를 남겨 환자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를 보완한 것이 ‘눈썹절개수술’이다. 눈썹 부위를 3~4㎝ 정도 절개한 후 두개골을 작게 열고 뇌동맥류 결찰술을 시행한다. 상처 범위가 작아 환자들이 수술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다.
코일색전술은 두개골을 절개하지 않고 사타구니의 대퇴동맥을 통해 뇌동맥에 접근한 후 뇌동맥류 내부를 백금 등으로 만들어진 특수 코일로 채워 넣어 혈류의 유입을 차단하는 시술이다. 뇌동맥류 모양에 따라 그물망을 씌워 혈류를 변환하거나 코일이 흘러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기술한 치료법 중 어떤 게 우수한지는 큰 의미가 없다. 환자의 뇌동맥류 모양과 위치 등에 따라 치료법의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뇌동맥류 파열 시 환자의 절반 정도가 병원 도착 여부와 상관없이 사망에 이르거나 심각한 후유 장애를 남길 만큼, 발병만으로도 예후가 매우 좋지 않은 질환이다. 하지만 파열되기 전에 치료하면 약 90% 이상 정상생활이 가능하고 완치도 된다.
분노사회’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 중장년의 경우 ‘한이 많은 세대’라 불릴 만큼, 노여움과 울분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이가 대다수다.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해, 또 누군가는 화를 내뱉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다. 이러한 화가 자칫 ‘분노증후군’이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흔히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으로 잘 알려진 ‘분노증후군’은 오랜 시간 축적된 화를 표출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다. 이와 반대로 ‘분노조절장애’는 느닷없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화를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분노조절장애의 경우 지하철에서 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노인이나 묻지마폭행을 가하는 중년남성 등이 표면적 이슈가 되어 이러한 증상을 가진 시니어가 많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생계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온 한국 중장년의 특성상 분노증후군을 겪는 이가 훨씬 많다(분노조절장애는 해외에서, 또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남). 다만, 가족도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는 증상이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조증상이 덜한 암일수록 늦게 발견돼 치료가 어렵고 위험하듯, 분노증후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나도 꿈이 있었는데… 엄마의 울화
# 70대 여성 A 씨는 젊은 시절의 사회 분위기와 가정 사정 등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한을 자녀 교육을 통해 풀고자 했고,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은 고학력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자녀들은 번번이 어머니의 무지(無知)함을 들먹이며 무시를 일삼았다. 이에 A 씨는 소외감과 우울함으로 지난 세월을 한탄했고, 급기야 극단적 시도까지 생각하게 됐다.
한국의 중장년 여성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학력 단절을 겪거나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전업주부로서 소임을 다했고, 못다 이룬 꿈을 대신 펼쳐줄 자녀들에게 헌신하며 살았다.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의 공(功)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식수준과 비교하면서 종종 무시하거나 소외시킨다. 물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본의 아니게 내뱉은 말 등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중장년이 박탈감을 갖게 되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번아웃증후군(소진증후군)까지 겹치면 심한 우울 증세가 나타나고, 상태가 악화하면 극단적인 시도까지 감행한다.
이렇듯 위험한 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가 확인이 쉽지 않아 예방이 어렵다. 몇 가지의 체크리스트만으로 진단할 수 있는 단순한 심리·정신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와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예방책은 자녀들 손에 달렸다. 보통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과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한다. 그러나 이럴 때 자녀가 따뜻하게 공감해주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면 부모의 울화는 조금씩 누그러진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묻어둔 고충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게 좋다.
내가 왜 화를 냈지? 분노 컨트롤이 어려워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60대 남성 B 씨는 최근 들어 자괴감이 많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들어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자주 역정을 내곤 한다. 심할 땐 욕설에 소리까지 지르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희한할 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데, B 씨는 분노조절이 안 될 때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몰려와 괴롭기만 하다.
분노조절장애는 뇌신경이나 호르몬 등의 문제로 스스로 감정 조절이 어려워 뜻하지 않게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마치 조울증처럼, 심하게 화를 냈다가 이내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곤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본인은 물론 주변인까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증상이 의심되면 반드시 정신과 진료와 약물치료 등을 받아야 한다.
특히 과거에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았거나 파킨슨, 치매 등 뇌 질환 환자인 경우는 분노조절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또,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망가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때때로 분노조절장애가 지속되다가 우울증이 오거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한 주변과의 소통 단절을 겪어 분노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중장년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증상이 더 심해지므로 환절기나 추운 계절엔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주변에서 점검해주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보고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길 권한다.
우울증은 향후 치매의 발병을 예측할 수 있는 질환 중 하나다. 그동안 다양한 연구를 통해 노년기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년기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 19 관련 우울증인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는 이들도 급격하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전 생애에 걸친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을 확인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 유옥철 한의사 연구팀은 우울증이 생애주기에 있어 치매 발병과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해당 논문은 SCI(E)급 국제학술지 ‘BMJ Open (IF=2.496)’ 10월호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02~2013년 표본 코호트 (NHIS-NSC) DB를 사용해 2003년에 우울증을 진단받은 1824명을 우울증군, 우울증을 진단받지 않은 37만4,852명을 대조군으로 선정했다. 이후 두 군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성향점수매칭(Propensity score-matching)을 진행해 우울증군과 대조군을 각각 1824명으로 보정했으며, 로지스틱 회귀 분석을 통해 성별과 연령 등 한국인의 사회인구학적 특성과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을 분석했다.
먼저 연구팀은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을 확인했고, 우울증군이 대조군 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의 오즈비(Odds ratio, OR) 값이 2.2배(OR=2.20) 높다는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다. 오즈비 값이란 집단간 비교시 특정 사건의 발생 가능성 차이가 유의미한지 그 정도를 검증하는 데 사용된다.
특히 여성 우울증 환자는 남성보다 치매에 더욱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우울증 환자는 우울증이 없는 남성에 비해 약 1.55배(OR=1.55)인데 반해, 여성 우울증 환자는 우울증이 없는 여성에 비해 약 2.65배(OR=2.65)로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 여성의 우울증이 치매 발병의 위험 인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모든 연령대에서 우울증 환자의 경우 치매 위험이 높은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령대는 44세 미만과 45~64세, 65세 이상으로 분류했다. 그 중에서도 중년기(45~64세)에 우울증을 앓을 경우 치매 위험이 가장 컸다. 45~64세의 우울증은 치매 위험이 약 2.72배(OR=2.72) 가장 높았으며 44세 미만의 경우 약 1.88배(OR=1.88), 65세 이상은 약 2.05(OR=2.05)배 높았다. 따라서 위험 요소인 우울증에 대해 초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치매에 대한 합리적인 예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연구팀은 내다 봤다.
유옥철 한의사는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노인성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삶의 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치매는 선제적인 예방조치가 우선돼야 한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울증이 치매의 위험 인자라는 것을 확인한 만큼 우울증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에 집중하는 보건의료정책이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안의 가장, 직장의 리더, 사회의 어른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는 중장년 세대.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장작 삼아 불태우고 희생하며 소진하는 삶을 살았다. 문득 ‘나의 행복’을 저만치 두고 왔음을 깨닫지만, 체력도 의욕도 사라진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꺼져버린 불씨, 과연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소진증후군, 연소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번아웃증후군’(이하 ‘번아웃’). 소위 ‘하얗게 불태웠다’라는 말처럼, 무언가에 과도하게 몰두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어느 순간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최근 20~30대 직장인 사이에서 많이 언급됐지만, 중장년 역시 못지않게 겪는 증상이다. 젊은이의 경우 꿈과 야망을 향한 의욕이 강하고,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번아웃을 겪더라도 쉽게 회복되지만, 시니어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증상이 계속되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동반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극단적 시도까지 하게 된다.
‘관계 번아웃’도 함께 다스려야
# 50대 커리어우먼 A 씨. 회사, 집 어디서든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그녀. 주변 사람까지 살뜰히 챙기며 여러 모임의 리더까지 맡고 있다. 어느덧 갱년기가 찾아왔지만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친구 중에서도 진정 자신을 위로해줄 한 사람이 없음을 문득 깨닫는다.
맞벌이 여성도 번아웃에 노출되기 쉽다. 특히 중년의 경우 갱년기와 맞물린다면 더욱 심각한 증상을 호소한다. 몸도 마음도 쉴 곳이 필요한데 회사는 회사대로, 집은 집대로 일만 가득하고 자신만의 쉼터가 없다 보니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쉴 공간을 찾기 힘들다면, ‘수다’가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고충을 들어줄 이가 없다면? 일로 인한 번아웃과 더불어 관계 번아웃까지 함께 겪을 수 있다. 사회활동을 왕성히 하는 중장년인데도 의외로 관계 번아웃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산발적인 만남보다는 나름 ‘인맥구조도’ 등을 만들어 관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가령 ‘보험하면 이 친구지!’라는 식으로, 특정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을 비상연락망으로 꾸려두는 것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만날 수 있는 단 한 명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된다. 번아웃에 걸린 사람은 “왜 나만 희생해야 해?”, “왜 나만 미친 듯이 일하지?” 하며 ‘나만’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럴 때 주변 사람의 어려움과 고충을 들어주며 “너도 그렇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공감이 어우러지면 심리적으로 한결 안정된다.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여기기
# 50대 사업가 B 씨. 연 매출 100억 원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과거의 사업 실패를 만회하고자 불철주야 일에 매진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덕을 넘지 못하는 증상을 호소했다. 오르막은 잘 가는데, 내리막 앞에 서면 벼랑 끝에 선 듯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중장년은 조직의 상사이거나 사업체의 수장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하고 상당한 시간을 일에 바쳐야 하기 때문에 불안과 스트레스가 많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라면 번아웃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B 씨의 경우는 가업 승계를 원하는 아들이 있음에도 쉽게 일을 맡기지 못했다. 그러다 번아웃이 찾아왔고, 그 후유증으로 내리막을 걷지 못하는 강박 증세까지 생긴 것이다. 결국 그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일을 나누었고, 차차 증세가 호전됐다.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 능력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능력치가 10이라면, 7~8 정도만 계획하고 2~3의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자주 야근을 하거나, 집에까지 일을 가져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직에서 자신의 업무가 과중하다면 업무 분배 시스템을 제안하고, 사업을 꾸리고 있다면 50대쯤부터는 예비 경영인을 두고 일을 조금씩 줄이는 게 좋다. 늘어난 노후로 일을 놓을 수 없는 요즘 중장년. 박차를 가하기보다 잠시 쉬어감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슬기로운 방법임을 잊지 말자.
주부도 예외는 아니다
# 60대 주부 C 씨. 아들이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녀와 남편의 뒤치다꺼리, 집안일은 쉴 틈 없이 계속됐다. 어느 날 여자친구가 생긴 아들이 자신을 귀찮아하고 등한시하는 모습에 외로움을 느끼는 그녀다.
번아웃은 직장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가사와 육아에 매진하던 주부들도 번아웃을 느끼며,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엄마가 손을 놓아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가 드물다. 대학, 취업, 결혼, 나중엔 손주 문제까지, 엄마가 할 일은 도무지 끝이 안 보인다. 그런 자녀 뒷바라지로 남편 역시 직장을 놓지 못하니, 내조도 계속된다. 이미 다 소진한 상태인데, 가정에서 요구되는 엄마의 역할을 해내느라 끝내 번아웃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다 자녀가 반항을 한다거나 이성을 만나는 등 자신에게 소원해지면 우울 증세까지 더해져 상태가 악화되기도 한다.
주부들의 경우 ‘주말’이나 ‘휴가’ 등의 개념이 모호해 온전한 쉼을 갖기 힘들다. 인위적으로라도 휴가를 정해 여행을 떠나거나, 취미를 만들어 나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과 날을 마련하면 좋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시간만큼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즐기고 자신의 행복을 우선으로 다채로운 일상을 꾸려보자.
‘[Tip] 오감을 확장해 불씨를 살려라
번아웃은 어떤 일에 과하게 몰두할 때 생기기 때문에, 그만큼 생각이나 행동이 협소해진다. 한 가지 일에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면, 심신을 잠시 흔들어 깨울 필요가 있다. 스트레칭을 하더라도 사무실보다는 바깥으로 나가 시야를 확장한다. 잠시 쉰다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청각을 열어주는 것도 좋다. 특히 미각 확장이 중요하다.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매운 음식이나 알코올 등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이는 결국 건강 문제 등 악순환을 초래한다. 평소 자연식, 건강식 등을 즐기며 미각을 확장해두면 번아웃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사십대 후반, 또래의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 독서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든 손문숙(51) 씨. 어느덧 4년째 모임을 통해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부터 퇴직 후 인생 계획까지 함께 나누고 있다. 퇴직 후에는 작은 도서관을 꾸려 회원들과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는 그녀.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의 저자 손문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4년 째 직장의 여성 동료들과 독서 토론 모임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임 소개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글쓰기 강사의 조언을 듣고 독서 학습 공동체에서 1년 동안 독서 토론을 공부했습니다. 독서 토론의 즐거움을 먼저 깨닫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그런 기쁨을 나눠주고 싶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들게 됐습니다. 여리 독서 모임은 인천광역시교육청의 사무관 이상으로 구성된 여성 관리자 네트워크에서 만든 동아리로 회원들은 여자이고 나이는 40대 후반 이상입니다. 1년 단위로 회원들을 모집하는데 매년 17명 정도 활동하고 있고 인천 북구도서관에 직장인 독서 동아리로 등록돼 있어 매월 1회 평일 퇴근 후 도서관에서 모임을 합니다.
Q. 모임에서 주로 도서 선정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토론 방식은요?
토론할 책을 같이 의논해서 정하기 때문에 문학, 철학, 사회,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정 관념을 깨우치고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가 하는 토론은 찬반으로 나눠 경쟁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닌, 논제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비경쟁 방식입니다. 직장 동료들은 책 내용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정, 직장, 사회 문제 등 사적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풀어냅니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 자녀에 대한 고민, 남편과 시댁과의 문제, 직장 이야기, 퇴직 후 인생계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Q. 중년 이후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얻은 일상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또 동료들에게는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나요?
저는 40대 후반에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나를 찾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가정, 사회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인생 2막에 작가로 살고 싶다는 멋진 꿈을 가지고 제 인생에 첫 번째 단독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회원들 중에는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책을 잘 읽지 않는 회원들이 더 많았습니다. 독서 모임에 나오면서 1년 동안 같이 읽을 책 목록이 공지되면 시간 여유 있을 때 책을 미리 읽어둡니다. 매월 모임에 나올 때 한 번 더 읽고 토론 후에 블로그나 독서장에 기록을 남기면서 한 번 더 복기를 합니다. 그러면 한 책을 세 번 정도 읽는 셈이지요.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다보면 이해가 안 되던 것들도 알게 되고 본인의 생각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죠. 독서 모임을 통해 강제로라도 한 달에 한 권씩은 책을 읽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어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혼자 읽을 때는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독서 토론을 하게 되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도 하고요.
Q. 이번에 펴내신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에 담고자 했던 주요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요?
저와 독서 모임 회원들이 독서 토론을 통해 깨달은 자아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긍정의 힘을 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면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카페에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나가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함으로써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이 소수의 고상해 보이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공기 마시듯 행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죠.
Q. 독자로 책을 접할 때와 이번처럼 저자가 되어 책을 접할 때,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요?
독자로 책을 읽을 때보다 독서 에세이 작가로서 원저작을 읽을 때는 좀 더 꼼꼼하게 읽고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과 관련된 나의 생각과 통찰을 글로 담아내야 해서 일반 산문을 쓸 때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Q. 우리네 인생에서 ‘독서’(또는 책)가 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故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여성 중장년 독자들에게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입니다. 작중 니나를 통해 저자는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라는 말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들 중의 하나에 우리를 고정시키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을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죠. 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적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의 방식은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도 동경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Q. ‘내 인생의 책’이라는 타이틀로 한 권을 꼽는다면 어떤 책이 될까요? 그 이유는요?
인상 깊은 좋은 책들이 많지만 앞서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꼽고 싶습니다. 20년 20일이라는 긴 수형 생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간직하고 있는 작가의 마음을 통해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실천하는 지식인이셨고 “삶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가 변화와 창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공부이다”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Q.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등 SNS 활동도 하고 계신데요. 주로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계신가요?
동료들과 토론한 책 이야기를 주로 블로그와 브런치에 남깁니다. 처음에는 독서 토론을 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독서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정리해서 나중에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습니다.
Q. 현재 교육행정공무원으로 일하고 계시는데요. 장차 퇴직 후에 작가가 되어 책을 쓰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퇴직 후에 집필실을 겸해 여자들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지금의 독서 모임 회원들과 퇴직 후에도 우리들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어서입니다.
퇴직이 8년 반 정도 남았는데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미래를 상상하며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도서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고 꾸준히 책을 쓰고 있고, 뜻을 같이 하는 동료는 사십 초반에 사서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추억 속 음악은 아련했던 그 시절로 우리를 주유하게 한다. 지난날 삶의 변곡점을 만든 노래가 있는가 하면, 중년에 접어들어 새롭게 전환점이 된 노래도 있다. 오선지에 찍힌 음표처럼, 희로애락의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네 인생 변주곡을 채운 그때 그 노래들을 다시 소환해본다.
도움말 김동률 서강대학교 교수 참고 도서 ‘인생, 한 곡’
70년대의 좌절 속 청춘의 마음을 불태웠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by ‘고래사냥’(송창식)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1970년대. ‘고래사냥’은 대학가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며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던 셈이다. 안개 같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가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떠나야 한다. 동해 바다로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그렇게 ‘고래사냥’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라고 우리를 충동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by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빠빠빠빰 빠빠빰 빠빠빰 빠 빠빠빰”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숙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전주다. 반주나 마이크가 없어도 어묵 국물에 숟가락 서너 개 걸쳐놓고 목 터지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자타 공인 최고의 가수이지만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낸 그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왕 조용필의 이름을 전적으로 드높여준 노래다. 1970년대 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각종 단합대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단골곡이 됐다. 대학 엠티에서도 직장 회식에서도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이면 함께 열창하던 노래였다.
중년 이후 다시 들으면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by ‘서른 즈음에’(김광석)
서른을 많이 넘기지 않은 사람은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은 노래가 주는 슬프고도 시린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치기 어린 사랑 투정이라 짐작했을 그 가사가 얼마나 가슴을 치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서른 즈음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떠났고 살아남은 우리는 그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by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의 모티브가 된 통학길 완행열차에서 최백호는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최백호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름을 밝혀도 좋으리라 말한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최백호의 첫사랑인지조차 모를 테니까. 그렇게 낭만은 아득하고 추억마저 긴긴 세월 속에 야위어갔다. 젊은 시절에는 곡의 깊고 유창한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의 장소로 회귀하는 노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by ‘광화문 연가’(이문세)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종로서적이 떠오르고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당시 광화문은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거리였다.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창덕여고, 진명여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배제고, 경기여고 등 명문고교가 즐비했다. 입시학원, 고고장,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집, 빵집이 넘쳤고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가득했다. 특히 양식집 ‘이딸리아노’는 연예인이나 당대 명망가들이 드나드는 장안의 명소였다. 서울고와 이화여고 중간에 자리했는데, 이곳에서 고등학생 때 언약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도 꽤 있단다. 어느덧 세월 따라 그 시절 청춘들은 떠났고 노랫말처럼 언덕 밑 정동길엔 감리교회만이 버티고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by ‘골목길’(김현식)
그렇게 시작되는 ‘골목길’은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 동아리 모임에서, 회식 후 늦은 밤 귀갓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왔다. 노랫말처럼 그 시절 신촌의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가슴이 뛰곤 했다. 곳곳에는 숨겨진 술집과 만화방, 장미여관, 은하수여관이 있었다. 곡에 등장하는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였다. ‘골목길’의 탄생에는 신촌블루스가 있다. 1986년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 한영애가 결성한 록 밴드다. 그 시절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낭만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엄동설한 골목길 곳곳 카페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서울로 상경한 공순이 공돌이들의 삶을 위무했던 노래
"돌담길 돌아가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 by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에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이른바 수많은 공순이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이 노래는 국민가요라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물레방아 도는데’는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으로 사라져간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곡과 다름없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by ‘사계’(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는 여성 보컬과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단조롭고 신산한 삶을 노래한다. 그 발랄함 속에 숨은 페이소스에,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깊고 무거운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수시로 아픈 일이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젊은 학출(學出)들은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론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이 땅의 누나, 여동생들이 흘린 회한과 고독이 ‘사계’에 녹아 있다.
웰다잉을 위해 실버타운에 입주한 7명의 꽃중년이 펼치는 치어리딩 도전기를 그린 영화 ‘치어리딩 클럽’이 오늘 개봉한다.
BBC ‘100인의 여성’에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실버 치어리딩 클럽 ‘폼즈’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이안 키튼을 중심으로, 연기 경력만 총 300년에 달하는 할리우드 대표 여성 배우가 총출동했다.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는 실버 타운에 입주한 중년 여성들이 모여 치어리딩 대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담겼다. 젊은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치어리딩 퍼포먼스를 연습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시니어들의 고충마저도 유쾌하게 그린다.
실제 치어리딩을 해본 적 없던 중년 배우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영화 속 메시지를 몸소 전했다.
중견 배우들의 연기력과 작품성은 물론, 실화의 감동까지 담아 수많은 중장년에게 응원과 희망을 선사할 예정이다.
● Exhibition
◇빅 아이즈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큰 눈의 어린아이 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미국 여성 화가 마거릿 킨의 아시아 최초 회고전이다. 팀 버튼의 동명 영화로 알려진 ‘빅 아이즈’ 시리즈를 비롯해 긴 얼굴의 여인 등 다양한 화풍의 원작 1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총망라해, ‘빅 아이즈와 키치’, ‘이름을 되찾은 화가’, ‘킨의 현재와 그 영향력’ 등 작가의 삶의 변화에 따라 5부로 구성했다. 전시기간 중에는 도슨트 운영과 함께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낯선 전쟁
일정 9월 2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계기로 마련된 대규모 기획전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상처를 극복하고, 전쟁과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등 전 지구적 재난 속에서 미술을 통한 치유와 평화의 비전을 제시한다. 전시는 ‘낯선 전쟁의 기억’, ‘전쟁과 함께 살다’ 등 4부로 나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제작된 작품부터 시리아 난민을 그린 동시대 작품까지 폭넓게 다룬다. 드로잉, 회화, 영상, 뉴미디어, 퍼포먼스 등 장르를 넘어 전쟁을 소재로 한 국내외 작가 50여 명의 작품 25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2020 서울사진축제
일정 8월 16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올해로 11회를 맞이한 ‘2020 서울사진축제’다. 이번에는 ‘카메라당 전성시대’, ‘보고싶어서’ 2개 전시로 구성했다. 한국 사진사 연속 기획전인 ‘카메라당 전성시대’(부제 ‘작가의 탄생과 공모전 연대기’)는 공모전 제도를 중심으로 1910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사진사를 조망한다. 주제 기획전 ‘보고싶어서’는 일상을 주제로 한 가족사진, 풍경사진 등을 통해 사진 본래의 의미를 짚어본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인 만큼, SNS를 통해 ‘작가×비평가의 만남’, ‘작가 소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展
일정 10월 4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인 스티븐 퀘이와 티모시 퀘이 쌍둥이 형제의 작품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형제 특유의 괴기스럽고도 동화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확대경, 일러스트레이션, 초기 드로잉 등 10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뉴욕 현대미술관에 선보인 바 있는 ‘도미토리움’은 형제의 예술세계와 철학을 함축하는 애니메이션 세트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번 전시에서는 퍼핏 애니메이션(인형을 움직여 촬영하는 기법이나 작품)이라는 매체를 통해 생동감 넘치는 초현실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 Stage
◇더 모먼트
일정 9월 6일까지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연출 표상아 출연 박시원, 유성재, 강정우 등
각자의 사정으로 깊은 산골 산장을 찾게 된 세 남자가 하나의 노트를 단서로 얽히고설킨 비밀과 사건을 풀어간다. 코믹, 판타지, 멜로,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소통하고 미래와 만나는 판타지 요소로 극의 흥미를 더한다. 긴장감 넘치는 세 인물의 감정이 피아노, 바이올린 라이브 연주를 통해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전달된다.
◇렌트
일정 8월 23일까지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이재은 출연 오종혁, 아이비, 김호영 등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을 그린다. 한국 공연 20주년을 맞아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협력 연출가인 앤디 세뇨르 주니어가 함께 무대를 완성했다.
◇베르테르
일정 8월 28일~11월 1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조광화 출연 엄기준, 유연석, 규현 등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와 ‘롯데’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현악기 중심의 오케스트라 선율과 어우러져 애틋한 감성을 증폭시킨다.
● Movie
◇오케이 마담
개봉 8월 예정 장르 코미디, 액션 감독 이철하 출연 엄정화, 박성웅, 이상윤, 배정남 등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비행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중년 부부의 좌충우돌 구출 작전이 펼쳐진다. 아내 ‘미영’ 역을 위해 수개월 동안 액션을 연마한 엄정화의 연기 변신이 기대를 모은다. 남편 ‘석환’ 역으로 출연하는 박성웅은 그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대비되는 익살스러운 연기로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스크린 첫 악역에 도전하는 이상윤 역시 테러리스트 리철승 역을 소화하며 고난도 액션을 펼칠 예정이다. ‘검사외전’, ‘신세계’ 등을 작업했던 충무로 흥행 제작진의 합류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큐리오사
개봉 8월 6일 장르 드라마, 멜로 감독 루 주네 출연 노에미 메를랑, 니엘스 슈나이더 등
19세기 파리 시인 피에르와 그의 연인 마리가 주고받은 편지와 시,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여성의 성적인 자유’라는 주제를 관능적인 미장센과 감각적인 음악을 통해 고혹적으로 표현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개봉 8월 5일 장르 범죄, 액션 감독 홍원찬 출연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최희서 등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에 나선 암살자와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의 치열한 사투를 그린다. 배우들의 맨몸 액션부터 태국 현지를 배경으로 한 시가전까지 박진감 넘치는 시퀀스를 선보인다.
● Book
◇50부터는 물건은 뺄셈 마음은 덧셈 ()이노우에 가즈코 저 ·센시오
50대를 살거나, 살아갈 이들에게 일상의 변화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비결을 제안한다. 저자는 나이가 들수록 물건이나 관계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오직 자신을 위한 시간과 감정을 더하라 말한다. 50대부터는 절대 사지 말아야 할 물건 리스트, 집안일 줄이기, 내가 좋아하는 일 찾기 등 실질적인 방법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 (김현아 저·창비)
중년 이후 고민해야 할 노화와 죽음의 의미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까지 ‘죽음 공부’의 전반을 다룬다. 주체적으로 준비하는 죽음의 중요성과 그 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저·문학동네)
지독한 권태와 무력감에 ‘자발적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소재로 행복의 조건을 탐구하고 현대인의 고독과 우울을 묘사한다.
◇진짜 캠핑 요리 (이미경 저·상상출판)
조리 도구나 음식 솜씨가 부족해도 캠핑의 낭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레시피를 소개한다. 구이, 전골, 디저트 등 다양한 캠핑 요리 비법과 더불어 캠핑 짐 꾸리기 노하우 등을 일러준다.
우리 몸의 근육은 30대 후반이나 40대부터 매년 1% 이상 줄어들기 시작하고, 근력 역시 최대 4% 감소한다. 생각보다 빠르게 약해지는 근육과 근력은 원래로 회복시키기 어렵다. 특히 50대 이후에는 근육 손실량이 크고, 근력이 약해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건강상의 문제도 겪게 된다.
◇운동과 단백질 섭취 필요
근감소증의 주 증상은 근력이 저하되고 기력이 쇠하는 것이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한쪽 다리를 든 자세를 유지하는 시간으로 근감소증을 자가진단 할 수 있다. 40대는 50초, 50대는 35초, 60대는 10초, 70대는 5초 이상 자세를 유지해야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한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생활습관만으로도 중년 이후에는 근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 근력이 약해지면 무릎이나 허리 통증이 악화되고 가벼운 낙상도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이수찬 힘찬병원 대표원장(정형외과 전문의)은 “노화가 진행될수록 근육이 감소하는데 특히 허벅지 근육이 가장 먼저 빠진다”며 “중년 이후 약해진 허벅지 근육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 몸 전체 근육 중 60%는 하체 근육으로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허벅지 근육 강화는 근감소증뿐만 아니라 퇴행성관절염 예방에도 좋다. 대표적인 스쿼트 운동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투명 의자 앉듯 엉덩이를 내리며 무릎이 발끝보다 앞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면서 허벅지와 수평이 될 때까지 앉았다가 일어선다. 무릎 통증이 있는 경우에는 스쿼트가 무리가 될 수 있어 실내자전거처럼 낮은 강도의 근력 운동을 추천한다.
근육을 구성하는 주요 영양소인 단백질이나 비타민D 등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잇살을 빼기 위해 근육이 빠지는 무리한 운동이나 과도한 식단 조절은 피해야 한다. 근육감소 속도가 빠른 중년 이후에는 일반 성인보다 더 많은 양의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 몸무게에 1.2g을 곱한 정도가 필요한데, 한번에 흡수할 수 있는 단백질의 양은 20~40g 정도로 여러 번에 나눠 자신의 몸무게에 맞게 섭취하자.
◇골다공증성 골절 위험 커
50대 이후 완경이 되면 여성호르몬이 감소해 근력도 저하시키고, 골격계의 노화로 골다공증까지 초래한다. 50대 이상 여성 10명 중 4명은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데, 근감소증을 동반한 골다공증은 골절을 주의해야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근육량이 적기 때문에 충격으로부터 뼈를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지는데, 근육도 적고 뼈의 단단함도 약해져 있어 골절 위험이 크다.
하체 근육이 감소하고 운동신경이 저하돼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작은 충격에도 뼈가 골절되거나 주저앉을 수 있다. 골절이 될 경우 깁스를 하고 난 후 근육이 빠질 수 있어 낙상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실내 생활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조심성이 떨어지고 부주의해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미끄러지기 쉬운 욕실의 경우, 벽에 손잡이를 설치하고 욕조에 미끄럼방지 매트를 깔아두면 낙상을 예방할 수 있다.
살면서 내 삶을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인맥이 아니라 용기다. 이 말에 따르면, 소설 속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큰 용기를 낸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용기는 현상에 대한 평가일 뿐 자신에 대한 에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다.
화자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극단적이다. 이는 작품을 쓰던 시기의 사회적 배경이 작용한다. 전쟁에 지쳐 사람들이 ‘순수와 영혼’의 세계에 대한 동경, 예술 등에 목말라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고갱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타히티를 직접 방문했고, 그의 여인이었던 원주민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고갱의 삶과 닮은 부분도 있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도 많다. 이 때문에 예술적 이상인 ‘달’을 지향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인 ‘6펜스’의 현실을 포기한 미술가 스트릭랜드의 인생 후반전 이야기가 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보통 사람들은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트릭랜드와 같은 선택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대리만족이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스트릭랜드가 삶의 변화를 위해 용기를 냈던 나이는 40대. 현재 사회 환경 기준으로 보면 60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꿈을 접고 살아온 사람들은 스트릭랜드의 말에 적극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젊어서 읽어도 되고 나이가 든 후에도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잠자는 나를 깨워보는 건 어떨까!
▶ 책 읽은 소감: 문체가 간결하고 명쾌하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회화체 위주의 글이 대단히 매끄럽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캐릭터이지만, 작위적이지 않은 사건 전개로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높았다. 살면서 잊었던 ‘달’을 인식할 기회를 줬으며, 나의 잃어버린 길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사랑을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는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평점: 4.08 (5점 만점)
▶ 논제
- 작가는 천재 예술가의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을 통해 세속사회의 속물성과 위선을 풍자합니다. 고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만큼 일정 부분 사실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인공의 뛰어난 예술성으로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삶이 신화로 기록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p.10~11)
- 작품 해설은 ‘달과 6펜스’에 대해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달’은 ‘상상의 세계 또는 광적인 열정’, ‘영혼과 관능의 세계’,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6펜스’는 영국의 가장 낮은 단위의 은화로 ‘돈과 물질의 세계’, ‘천박한 세속적 가치’,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달’은 무엇인가요? (p.310)
- 이 소설에는 화자인 ‘나’를 제외하고 대표적으로 5명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삶을 버리고 화가가 되는 ‘스트릭랜드’, 남편과 갑자기 이별하게 되는 스트릭랜드 부인 ‘에이미’,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가졌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스트로브’, 남편을 버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한 끝에 결국 최후를 맞는 ‘블랑시’, 병으로 죽어가는 스트릭랜드를 끝까지 지킨 타히티의 원주민 처녀 ‘아타’입니다. 이들은 모두 꿈과 본능의 세계 추구, 혹은 물질과 세속의 세계 추구라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 자신만의 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다는 측면에서 순서를 정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순위는 어떻게 되나요?
- 저자는 여성 혐오증 성향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p.318) 해설자는 이에 대해, 저자는 소설에서 남성 중심 사회의 유형화된 여성상을 혐오한 것이고, 남성 중심주의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성에 대한 냉소, 남성이 가진 여성 혐오증에 대한 객관적 묘사를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에서 화자가 “교양 있는 여자들은 몰취미한 남자들과 결혼한다”, “똑똑한 남자는 교양 있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도서명: 달과 6펜스
- 지은이: 서머싯 몸
- 번역: 송무
- 출판사: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