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志一貫’은 필자가 초급장교(포대장) 시절에 부대훈(部隊訓)으로 삼아 액자에 넣어 병사들의 내무반에 걸어두었던 글귀였다.
왜 ‘초지일관’이었을까? 지휘자가 아닌 지휘관으로서 첫 발을 딛는 순간에 공인(公人)으로서의 필자의 자세를 가다듬고자 좌우명으로 삼아 늘 잊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부대를 지휘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첫마음, 그 첫마음처럼 훈련과 교육에는 추상같이 엄격하면서도 부하들을 내 혈육같이 사랑하여, 사랑과 정으로 똘똘 뭉친 부대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늘 잊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공(功)과 사(私)를 분명히 하고자 노력했지만 24개월의 지휘관 시절동안 많은 사건(事件)들이 때로는 잠못이루는 밤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부하의 영정 앞에서 슬픔에 겨워 소리없는 통곡을 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액자에 걸려있는 첫마음, 초지일관을 마음속에 깨알처럼 새기며 흐트러졌던 본연의 자세를 뒤돌아보곤 했다.
운동을 좋아하던 필자는 병사들과 함께 땀흘리며 운동장에서 축구, 배구, 족구 등으로 전우애를 다졌고 인접부대와의 대항전에서 거의 80%이상의 승률을 올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도 했다.
아울러 각종 부대시험에서도 오를대로 오른 병사들의 사기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모범이라는 글자를 항상 접두사로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늦가을 얼음이 얼기 직전에 일주일간의 야외숙영훈련을 하던 때의 일이었다. 전투는 예고 되는게 아닌 만큼,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야 말로 아군의 승리를 담보 할 수 있다는 것쯤은 군복을 입고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훈련은 늘 전투같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하였다.
포병훈련 특성상 야간 진지점령 훈련시에는 은밀하고 조용한 가운데 순식간에 점령이 이루어져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달리 그 날따라 훈련상태가 산만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지가 못했다. 어둠속 곳곳에서 점검관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체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따라 병사들간에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그로 인해 두런거리는 소리가 지휘관인 필자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장비들을 다루는데도 평소답지 않게 거친 소음이 자주 발생하여 수검을 받는 지휘관으로써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훈련이 종료되고 점검관들의 강평이 시작되자, 예상했던대로 몇가지의 지적을 받아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마무리 되었다.
점검관들이 모두 돌아가고 훈련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중간 간부들까지 모두 지휘관인 필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어둠속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훈련 태도에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 필자는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훈련장 가운데 흐르는 개울가로 갔다. 물론 개울의 물 깊이는 종아리에서 깊은 곳은 허리쯤 닿은 곳이었는데, 필자를 포함한 전원이 팬티바람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11월의 개울물은 만만치 않도록 차가웠다. 처음에는 진저리를 치던 병사들이 일단 물속에 잠기고 나니 추위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오리걸음을 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꽥꽥!꽥꽥!…” 구호를 외치며 개울물을 거술러 어둠속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훈련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각성할 때까지 물오리 걸음은 10여분간 이상을 계속되었다.
100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물속에서 오리걸음을 하던 필자는 그 순간도 ‘초지일관’ 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혹,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깊은 우려를 했지만 모두가 거뜬하게 그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아~ 젊음이 참으로 좋긴 좋구나!”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음은 11월의 물오리떼가 어둠속에서 단체로 낄낄 거리는 에피소드를 남겨 두고두고 회자(回刺)되었다. 얼음짱같이 추운 물속에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부대원들을 물 밖으로 내 놓고 보니 뽀얀 김이 무러무럭 하늘로 오른다.
그 순간 구름에 숨어 있던 달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어 웃음기 가득한 그 친구들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지금은 오십대 중반을 구비구비 넘기면서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젊은 날의 내 전우들이여…참으로 그립구나.
‘초지일관’은 내 젊은 날의 좌우명이었다.
유명 뮤지컬 를 볼 기회가 생겼다. 우리나라 배우 무대가 아니라 오리지널 팀이 내한해 공연하는 뮤지컬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의 연기도 좋지만, 본고장의 연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니 내한공연 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2014년 웨스트엔드를 시작으로 2015년 시드니, 파리, 2016년 브로드웨이, 2017년 유럽 투어를 끝내고 우리나라에서 하는 공연이다.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으로 가는 발걸음이 즐거웠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 데다 극 중 주제가 ‘메모리’는 늘 애잔하게 필자의 가슴을 울린다. 좌석도 무대와 가까운 VIP 자리였지만 필자는 젤리클석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젤리클은 고양이 종류의 이름인데 뮤지컬 에서 특별하게 무대 맨 앞쪽과 통로 쪽에 마련한 좌석에 같은 이름을 붙였다.
젤리클석이 관람하기에 좋다는 건 뮤지컬이 시작되면서 알게 되었다.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대에서는 수많은 고양이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떤 모습으로 첫 무대가 시작될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는데 갑자기 관객들이 웅성거리면서 뒤편을 돌아봤다. 의 출연진이 객석 뒤에서 뛰어나와 옆 통로를 지나 무대로 올랐기 때문이다.
출연진은 지나가다가 통로 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잠시 멈추어 머리도 쓰다듬고 악수도 했다. 관객과 이런 교류가 있어 젤리클석이 특별하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주로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인사를 건넸는데 아이들은 먼 훗날까지 그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 고양이)
화려하게 치장한 여러 고양이가 소개되고 춤과 무용이 시작되었다. 고양이와 너무 흡사하게 꾸민 분장에도 놀랐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그들의 몸짓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실제로 이 뮤지컬 지휘자는 배우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키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뮤지컬 는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이 세상의 고양이들 이야기다. 1년에 한 번 젤리클 고양이를 뽑는 축제가 있는데 젤리클 고양이로 선택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젤리클 고양이가 된다고 한다. 막이 오르면서 부자 고양이, 도둑 고양이, 늙은 광대 고양이 등 30여 마리의 고양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춤과 노래를 펼친다.
각각의 고양이 이름은 너무 길고 어려워 기억하지 못하지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메모리’를 부르는 고양이 이름은 ‘그리자벨라’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자벨라‘는 고양이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름답던 모습은 사라지고 초라해져서 다른 고양이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부르는 1막의 ‘그리자벨라’와 2막의 ‘메모리’는 특히 필자의 마음을 울렸다. 사람에게도 환하게 빛나는 청춘이 있다. 나이 들면 그 빛이 사라지듯 아름답던 필자의 젊은 날과 ‘그리자벨라’의 젊은 날이 오버랩되는 듯해서 슬픈 감정이 들었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리자벨라’가 과거의 영광, 아름다움, 지나간 세월에 대해 노래하자 고양이들은 ‘그리자벨라’를 올해의 젤리클로 뽑아 천상으로 올라가게 한다는 이야기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필자는 양옆의 스크린에 나오는 자막을 읽으랴 무대를 보랴 눈이 바빴지만, 손뼉도 치고 몸을 흔들기도 하며 정말 즐겁고 신나게 관람했다. 자리가 통로 쪽이 아니어서 지나가며 인사하는 고양이들과 직접 눈을 맞추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멋진 뮤지컬 한 편으로 하루를 아름답게 보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어제 그제 쏟아진 폭우로 그리도 무덥던 여름이 막을 내린 듯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아침저녁 시원해도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곡식이 영글 수 있도록 한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쨍쨍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은 한낮에도 그리 덥지 않아 쾌적한 기분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갔다.
좀 늦은 시간인 오후 8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느긋하게 집을 나섰다.
공연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지만 걱정할 것이 없다.
저녁 시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앞 분수대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화려한 분수 쇼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의 멋진 물의 향연을 감상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이번 공연은 서울 그랜드필하모닉과 함께 바리톤 김동규와 국악 소녀 송소희, 베이스 손태진의 멋진 콜라보레이션 무대이다.
서울 그랜드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 서훈 씨는 연주 사이사이 알기 쉽게 음악 해설도 곁들여서 대중성 있는 프로그램 구성은 물론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
이날은 주말이 아닌데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일, 이 층 넓은 좌석이 꽉 찼다.
출연자들의 시원한 성량을 기대하며 한여름 밤을 즐길 준비가 된 사람들인 것 같이 보인다.
시간이 되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먼저 서울 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서곡이 연주되었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국내 최고 수준의 연주자로 구성된 창립 23주년의 역사와 실력을 겸비한 국내 정상급 교향악단이라 한다.
첫 연주가 끝나자 성악가 김동규씨가 무대에 등장했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 많이 보아 온 분이라서인지 낮 설지 않고 우리 이웃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무대 매너도 매우 노련해서 관객과의 소통도 매끄럽게 잘 했다.
이런 저런 제스춰로 인사를 하는데 옷자락을 펄럭이는 게 투우사를 연상하게 했다.
역시 첫 노래는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였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자신이 옷자락을 펄럭일 때마다 “올레~”하고 외쳐달라고 주문했다.
시원하고 화통한 울림으로 노래가 시작되었고 옷자락을 펄럭일 때마다 관객들은 모두 “올레~”하고 외쳤다.
성악가와 관객이 한마음이 되어 즐기는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
필자도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올레~”소리치며 즐거웠다.
두 번째 들려준 노래는 필자마음을 울렸다. 에디뜨 피아프의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의 샹송으로 필자가 매우 좋아한 음악인데 김동규 씨의 성악 발성에 에디뜨 피아프의 애절한 음색이 오버랩으로 다가와 필자 마음을 흔들었다.
두 번째 출연자 송소희는 반짝반짝 눈부신 드레스로 무척 예뻤다.
등장하자마자 “배 띄워라~”청량하고 강한 울림이 귓전을 때렸다.
어린 나이에 어쩜 저렇게 성량이 풍부하고 우리 가락을 잘하는지 감동적이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아주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 인사를 해서 청중을 웃겼다. 좀 전의 노래할 때와 너무나 다른 목소리였다.
그저께가 광복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리랑’이 더욱 처연하고 감동으로 다가왔다.
세 번째 출연자는 베이스의 매력적인 보이스 손태진씨로 얼마 전 TV프로인 팬텀싱어에서 최종 우승을 해서 이름을 알린 분이다.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각자 노래도 좋았지만, 세분이 함께한 콜라보 무대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볼라레’나 ‘싱싱싱’ 등 잘 알고 있는 노래를 관객과 함께 부르며 즐긴 공연이었다는 점이다.
이 곡에는 관객 모두 일어나서 손뼉 치며 몸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불러 열광의 무대를 함께 했다.
클래식과 국악이 어우러진 감미롭기도 하고 격정적이기도 했던 멋진 공연을 볼 수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
타이틀처럼 한여름 밤 ‘멋진 어느 날’이 된 이 날을 필자는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6월 22일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는 계간 문학잡지 제 13회 신인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의 회원인 손웅익씨가 수필가로 등단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한마디로 겉모습도 속마음도 잘난 남자들을 좋아한다. 지휘자 중 가장 좋아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외모 자체가 명품이다. 이에 버금가는 손 수필가님도 외모가 근사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올린 그의 글들이 정말 훌륭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학자인듯 싶은데 예술가이고 사색가인 듯싶은데 수필가이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깊이가 있고 예술가의 향기가 배어있다. 내 평생의 변함없는 친구는 문학과 클래식음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문장들, 글들을 접해봤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수필가님의 글은 애저녁에 기성 수필가의 필력이었다. 문학지 어디에 실려도 모자람이 없는 빼어난 문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완전 반전이었다. 그의 글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고생하고는 거리가 먼 귀공자같은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가 청소년기에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혹독한 IMF시절을 겪어낸 과정을 읽는 중에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지고지순한 사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사모님께 ‘깨갱’ 꼬리 내리고 살아야만 한다.
여차하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겨우 살려 놓으니까 은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할 것이다.
인재는 키우는 것이다. 봄날에 손 수필가님께 구체적으로 심사방법을 알려드리고 작품을 출품하실 것을 권유 드렸다. 이쁜 남자는 이쁜짓만 골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작품을 내었고 일사천리로 작품심사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리풀 문학회는 서초문화원에서 신길우 교수님께 수필지도를 받고 있는 문하생들의 모임이다. 그 문하생들도 수강한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직 등단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의 심사에 통과된 것은 엄청난 실력자인 손수필가님이 일궈낸 쾌거였다. 그가 수필심사에 통과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이 연상되는 건 뭐지? 에디뜨 삐아프는 어렸을 때의 극심한 영양실조로 실명할뻔 했고 키가 142센치밖에 안된다. 불우한 환경 속에 내팽개쳐졌던 에디뜨 삐아프는 갖은 고생 끝에 가수로 성공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삐아프가 뼈아프게 키워낸 남자들은 성공한 후에는 하나같이 그녀 곁을 떠나갔다. ‘내가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ㅋㅋ’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의 관계는 애정이고 손 수필가님과 애란이는 우정이다.
등단 후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얘기에 나는 속으로 ‘앗싸라비아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필자는 그가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다.’ 큰의미를 두지 않는줄 알았던 것이다.
시상식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참석했고 ‘세컨드 같은 퍼스트’인 손 수필가의 애잔하고 어여쁜 사모님이 동석하였다. 맞다! 유유상종이다. 미남미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잘생긴 장남도 함께 하였다.
그의 수상작 과 은 사랑스러운 사모님과 얼마나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러사람에게 입이 아프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부정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겉모습도 영혼도 아름다운 손 수필가님의 곁에는 늘 행복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달아나다가도 멋진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시니어 여러분 혹시 무지크 바움을 아시나요?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 이소니프라자 빌딩 8층에 있는 무지크 바움은 고품격 음악 감상실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프로그램이 아주 다양합니다. 바닥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는 아늑한 분위기, 쉽게 접하기 힘든 고품질의 소리가 여러분을 단박에 사로잡을 것입니다. 필자는 약 10년 전부터 시간과 비용이 허락되는 한 틈틈이 가서 즐기거든요 제 광기가 어느 정도냐 하면 평택에서 다섯 시에 퇴근한 후 무지크 바움에 고속버스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밤 열한 시에 나올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전철로 수원까지 가서 거기서 총알택시로 집으로 갔지요. 집에 도착하면 새벽 두 시가 될 때도 있었지요.
이곳 게스트 회비는 2만원인데 교통비가 두 배 이상 들곤 했어요. 그런데 오늘 문득 이 즐거운 놀이터를 우리 친구들에게도 소개해드려 같이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겠어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시니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터가 되어줄 거예요.
월요일 오전 10:30
시네 바움: 작품성 높은 영화를 유형종 대표님의 해설을 들으며 영상으로 감상,
오후 7:30
클래식 바움: 클래식 동호회
화요일 오후 7:30
오페라 앤 컬처: 음악 칼럼니스트인 이용숙님의 해설로 음악과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
수요일 오후 7:30
동아일보 음악기자님의 해설로 문화 공부
금요일 오후 7:30
광장 클럽: 오페라 동호회 모임으로 오페라 마니아들의 맛깔나는 해설을 들으며 다양한 오페라를 영상으로 감상
토요일 오전 10:30
발레 바움: 무지크 바움의 유형종 대표님의 해설을 들으며 다양한 발레를 영상으로 감상
이밖에도 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세부적인 것은 '무지크 바움'으로 검색을 해보시면 됩니다.각 프로그램당 정회원 회비는 6개월에 30만원가량 하고요 이따금씩 자유롭게 가실 분은 게스트회원으로 1회당 2만원씩 내면 됩니다. 프로그램 운영은 처음에 해설자가 작품에 대해 해설을 해주시고 영상으로 감상하는 중간중간 보충 설명을 해주신답니다. 가끔은 유명 발레리나와 연출자(라 트라비아타, 카를로 리치) 그리고 성악가(소프라노 임선혜님)가 특별 초빙되어 가까운 거리에서 그분들의 생생토크와 노래를 듣는 호사도 누릴 수 있어요.
필자는 어제 저녁에도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님의 바이올린 곡들을 감상하고 왔어요. "몸을 흔드는 건 지휘자의 몫이다." 어느 지휘자가 그녀에게 이렇게 불평했다는데 과연 연주할 때 보니 그녀의 몸짓은 엄청 격렬했고 표정은 카리스마 넘치는 마녀 같았어요. 그래서 감상하는 우리는 더욱 즐겁고 흥미로웠지요. ‘꼭 저렇게 인상을 써야만 연주가 되는 건가?’ 하면서 말이에요 한국의 자랑스러운 딸! 영혼으로 연주하는 듯한 그녀의 손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정말 환상적으로 빚어냈어요. 당연히 황홀한 시간이었지요.
문학과 예술의 향기가 진동하고 그 문화를 향유할 줄 아는 향기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복합문화 공간 무지크 바움! 제가 인생 후반에 즐기는 놀이터 중 하나입니다.
요즘 손목이 아프다. 병원에 갔더니, 갑자기 너무 과도하게 사용해서 엄지로 이어지는 힘줄에 염증이 생겼단다.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불편함이 몰려왔다. 세안을 하거나 머리를 감는 일조차 수월치가 않으니 짜증이 나고 우울했다. 다 나을 때까지 그저 손을 쉬게 해야 한다는 처방전,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우아하게 살 방법 없을까.
그러는 필자에게 그는 무언의 일침을 가했다. 웬 엄살이더냐고!
엊그제 그를 만났다. 연초록 나뭇잎이 눈부시던 남산자락의 국립극장, KB하늘 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휠체어합창단 정기연주회’에서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고 있던 정상일씨는 더욱 밝아진 표정에 유머도 늘었다. “장애인이 되니 좋은 게 참 많더라구요, 대통령이나 그 어떤 높은 사람이 와도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웃음 짓게 했다.
현재 세한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5년 전 11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당시 담당의사는 살아 난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며칠째 사경을 헤매고 의식불명일 때 내 손을 놓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눈을 떴고, 세상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중증이어서 앉을 가능성도 희박했었죠. 모두가 이제 정상일은 회생불가라고 했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남에 감사하며 일 년에 걸쳐 열 번 이상의 대수술을 받은 후에 기적적으로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필자가 처음 병문안을 했을 때가 사고 후 일 년이 지났을 즈음이다. 그는 폐활량이 일반인의 40% 밖에 안 되어 호흡이 가쁜 상태였고, 대화가 단답식처럼 짧게 끊어가며 힘겹게 이어갔다. 생리적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에는 특수 장치가 달려있어 일정 시간이 되면 간병인이 인위적으로 처리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과 삶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이후 ‘휠체어 탄 기적의 지휘자’로 불리며 2014년에 자신의 이름인 ‘정상일‘의 이니셜로 CSI퓨전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이어 2016년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을 창단해 벌써 오스트리아와 로마까지 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30여명의 휠체어단원을 이끌고 첫 번째 해외 공연을 다녀왔는데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있었습니다. 아주 심했지요. 귀국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지금은 기립형휠체어로 바꾸어 몸놀림이 훨씬 자유로워져서 욕창도 재발되지 않는다고 한다. 올 여름에는 모스크바로 공연을 떠날 예정이고, 가을에는 미국의 카네기홀까지 진출할 예정이라니 그의 용기와 거침없는 추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연주회 준비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100여명의 합창단원을 이끌고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연습을 해오고 있다. 단원 중에는 멀리 광주광역시, 경남 양산, 심지어 미국 뉴욕에서 오는 명예회원도 있다고 하니 그들의 열정 또한 대단하다.
이번 연주회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노래를 불러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이남현씨다. 사고로 목신경이 끊어져 전신마비 장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남현씨처럼 하반신 마비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된 단원들은 호흡하기도 힘들다는데, 그들이 이뤄내는 하모니가 너무 아름다워 듣는 내내 감동이 밀려왔다. 일반인들보다 몇십 배 더 노력했을 시간들이 짐작이 미루어 되고도 남았다.
마지막 앵콜 곡으로 대중가요인 ‘무조건’을 부르며 이번 음악회의 화려한 막을 내렸다. 이곡을 선곡한 것은 대한민국 어디든, 세계 어느 곳이든 휠체어 합창단을 불러주면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란다.
“ 제가 장애인이 되고서야 장애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문턱하나 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제 남은 생, 그들을 위해 이 한 몸 아낌없이 봉사하고 싶습니다.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부단체에서 우리 합창단에게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공연이나 국내 무료공연을 다닐 때 모두 자비로 진행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휠체어합창단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익에도 한 몫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다음 목표는 평창동계올림픽이란다. 올림픽 개막식 때 100명의 휠체어합창단원이 무대에 올라 당당히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꿈이라고. 그럼으로써 전 세계 모든 장애인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그의 행보는 오늘도 거침이 없어 보인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칠천교를 건너다가 소나기를 맞았다. 칠천량(漆川梁) 해전 기념관을 둘러볼 때는 청명한 봄날이었다. 버스 기다리기 지루해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리 한가운데 이르러서는 소나기였다. 세찬 바람까지 몰아쳐 금세 신발과 바지 자락이 젖었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 치욕의 날도 이런 날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년 난리 이래 적선이 얼씬도 못하던 부산 서쪽 바다에 150여 척 전선(戰船)이 모조리 수장된 참담한 패전의 날도 비바람이 거세었다는 기록을 읽은 탓이리라.
기념관에서 관람한 영상물에는 수군이 곤히 잠든 한밤중 왜군이 작은 배를 몰고 와 판옥선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모르고 자던 조선 수군이 미처 응전 태세를 갖추지 못해 속절없이 왜적의 창칼과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패주해온 군대가 적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자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장수 한 사람 잘못 쓰면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교훈을 칠천량 패전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주말에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유년 7월 16일 자에 칠천량 전투 상황 개략이 나와 있다. 격군으로 출전했던 세남(世男)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알몸으로 찾아와 전한 참상이었다. 7월 4일(음력) 한산도 통제영에서 출진해 칠천도와 옥포를 거쳐 7일 부산 다대포에 정박한 왜선 8척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왜군이 뭍으로 도망쳐 빈 배들을 불 지르고 절영도 바깥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대마도 쪽에서 적선 1000여 척이 건너오기에 싸우려 했더니 적이 회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판옥선 6척은 서생포 앞바다로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다 왜적에게 거의 다 살육당하고 자신은 숲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왔다는 내용이다.
늑장을 부리다가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곤장을 맞고 부산포에 출진한 통제사 원균은 제대로 싸워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군 함대가 1000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였음에 틀림없다. 병력과 군량, 병참물자 등을 싣고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수송선단이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선들은 흩어져 달아나기만 했다. 부산 앞바다는 섬이 없어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좀 멀리 나가면 파도가 높은 물마루[水宗]다. 바람은 거칠고 물결은 높다. 왜선들은 접근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의 힘을 빼려는 것 같았다.
간신히 선단을 수습하여 후퇴 길에 들어선 원균은 가까스로 가덕도에 기항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섬에 닿자마자 병사들은 다투어 내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
칠천도로 가는 중에 거제도 북단 영등포에 닿아 밤을 보내려 했으나 적선 500여 척이 추격해왔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지가 거제도 서북쪽 칠천도였다. 본섬과 어깨를 겯고 있는 이 섬에는 아늑한 포구가 많아 선단을 숨기기 좋았다. 칠천도 도착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여러 포구에 전선을 분산 정박시키고 원균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후퇴를 제안했다. “용기백배할 때와 겁낼 때를 구분하는 것이 병가의 계책인데 지금은 싸움을 회피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원균은 이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쉬고만 싶었던 것일까.
그대로 주저앉아 뭉개자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가덕도에 부하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죄를 문책한 것이었다. 원균은 부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드러누었다. 이 모습을 본 장수들과 병졸들이 통제사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배설은 몰래 제 부하들을 이끌고 한산도로 튀어버렸다. 다른 부대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화 에서 배설은 비겁한 도망자로 묘사되었지만, 그가 인솔해간 전선 12척은 뒷날 이순신의 수군재건에 밑천이 되었던 유명한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그 배들이다.
칠천량 해전의 수치
운명의 날은 16일 새벽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지만 어떻게 번을 섰기에 소형 적선 5~6척이 밤중에 수군선단 정박지에 잠입하는 것을 몰랐을까. 추격을 당하는 패주 길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경계하는 게 마땅할진대, 적병이 판옥선 밑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도록 모르고 자기만 한 것인가!
원균 함대 곳곳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놀라 일어난 수군들은 미처 전투 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허둥거리다가 왜군의 총격과 창칼에 쓰러져갔다. 불붙은 판옥선들은 맥없이 침몰했다. 적은 3중 4중으로 조선 수군 함대를 둘러싸고 소총과 포화를 쏘아댔다. 적은 포구에 갇힌 조선 판옥선에 붙어 자기 배 돛대를 누이고 사다리처럼 타고 건너와 맹수처럼 날뛰었다.
단병접전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사무라이들이었다. 일본 수군의 전법은 적선에 올라 칼과 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일대일로 벌이는 단거리 접전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
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金軾)의 장계(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김식은 시종 통제사와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임진년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수많은 패전에 절치부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 전력을 크게 강화해 떼 지어 건너보냈다. 해전의 명장이라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칠천도 남쪽으로 빠져나가 허겁지겁 서북쪽으로 노 저어 갔다.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해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수하 병사에게 업히다시피 뭍에 오른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그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추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는데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원균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던 사실이 뒷날 조사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 전 재산인 전함 150여 척과 1만 안팎의 장병 목숨을 수장시킨 장수가 천명을 다 살았다는 사실은 칠천량 해전의 또 다른 수치다.
원균의 무능이 패인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선 수군이 왜 그런 치욕을 당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추상같던 기율의 해이와 사기 저하라는 게 임진왜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상승 조선 수군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누렸던 수군 장졸들은 후임 통제사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 옥에 갇히게 한 세력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수군을 지휘해 전투를 수행할 실력도 지략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졸들이 그와 따로 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병사들 사이에는 “이런 군대로는 왜적을 이길 수 없어!”, “적을 만나면 36계 줄행랑이 상책이야” 하는 말들이 돌았을 정도다.
거기에다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 더욱 영이 서지 않았다. 2년이 넘도록 수군을 떠나 있었던 원균은 전투가 두렵기도 했다. 도원수에게서 득달같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날아오는데 따르지 않는 장졸을 이끌고 나가기가 무서웠다.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여 배후를 튼튼히 한 뒤에 수군이 부산을 치는 수륙(水陸) 병진론을 거듭 건의하면서 날짜를 끌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을 거느린 삼도수군통제사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명령을 듣지 않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참모총장을 곤장으로 다스린 사례가 있을지 모르겠다. 육군 책임자인 도원수 권율이 수군 장수를 징치한 이상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권율은 또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6월 안골포 출동에 직접 앞장서지 않고 수하 장수들만 보냈다는 이유였다. 합천 초계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은 사천 곤양까지 내려가 원균을 불러올렸다. 매 맞는 통제사는 수하 장졸들 사이에 웃음거리일 뿐 존경과 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수하 장졸의 사기가 어땠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조정의 전투 수행 능력 부족도 큰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전투 지휘자 원균의 무능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칠천도로 가지 말고 좀 더 항해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갔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칠천도로 갔더라도 경계를 철저히 폈으면 그런 치욕은 면했을 것이다. 쫓기는 군대가 경계를 소홀히 해 적선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면 전투의 ABC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둔지 주변뿐 아니라 물길 곳곳에 척후를 박아 적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 한 이순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능이고 태만이고 무책임이었다.
패전의 결과는 수군에게만 참담한 것이 아니었다. 남해바다를 마음껏 휘젓게 된 왜적은 마음 놓고 전라도 땅을 유린할 수 있었다. 도망친 배설이 한산도 본영에 남은 군량과 병기들을 바다에 처넣고 불을 지르고 도망친 뒤 한산도와 전라우수영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남해와 순천을 차례로 손에 넣은 적은 전주를 목적으로 두 갈래 협공을 시작했다. 남원성을 지키던 군민이 모두 참살당하고, 전주성도 허무하게 떨어졌다. 두 성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삼남의 백성들은 조정의 청야(淸野)작전에 삶의 뿌리가 뽑혀나갔다. 청야란 왜적에게 이용되지 못하도록 집과 경작지를 태워 청소하듯 깨끗이 들판을 비우는 것이다. 도체찰사가 경상·전라·충청 삼도에 파견되어 제 손으로 제 집과 곡식을 태우지 않는다고 백성들 목을 쳤다. 왜적에게 당하고 제나라 조정에 당한 중첩된 비극이었다.
원균이 상륙한 장소는 고성 ‘추원포’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춘원포’의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 안정 국가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곳이다. 통영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그곳에 갯마을은 흔적도 없었다. 바닷가에 높다란 조선소 크레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런 데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조선소와 협력 업체들이 타운을 이룬 산업단지가 춘원포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택시를 내려 나이 지긋한 현지 주민에게 물으니 “어릴 때 저 너머에 목 없는 장균 묘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포구 뒤편 야산을 가리켰다. 거기서 원균이 최후를 마쳤다는 기록에 근거한 설화일 것이다. “옛날부터 이 포구마을을 춘원개라 불렀다”는 주민들 말에서 춘원포 위치를 믿게 되었다.
왜적의 소굴이었던 안골포도 거기서 멀지 않다. 육지가 바다로 길게 뻗어 나온 곶이다. 그 끄트머리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에 안골포 왜성이 있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택시를 내렸더니 바로 성터 입구였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 나무계단 길을 오르자, 무너진 성터 위에서 아낙네 둘이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그 너머로 부산 신항 크레인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 아래에서는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성터에서는 가덕도와 거제도가 보인다 했지만 초행자 눈에는 구별이 안 갔다. 남쪽 오른편 어름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거제도가 아닐까 짐작만 해보았다. 다만 거제도 가덕도 앞바다를 감제할 수 있는 작전 요충지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칠천도에 기항한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의 출진 기지가 바로 그곳이었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칠천도도 이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다. 2000년 거제도와 연결된 다리가 생겨 연륙이 되었다. 통영과 연결된 거제대교, 부산과 이어지는 거가대교를 건너 본섬 서북쪽으로 달려가면 바로 칠천도다.
본섬 서북단 칠전삼거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잠시 벚꽃 길을 따라 걸으니 이내 칠천교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크루즈 관광선 터미널이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횟집 숙박업소들이 고객을 부르고 있다. 다리에서 20여 분 더 가면 2013년에 문을 연 칠천해전기념관이다.
거제도 본섬을 마주 보고 걷는 칠천도 바닷길에는 온갖 봄꽃이 다투어 피고, 호수 같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어약연비(魚躍鳶飛)의 바다가 그런 참극의 현장이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하리오!
근래 경남도에서 거북선 찾기 운동을 벌였다. 칠천량 바다에 가라앉았을 잔해를 건져내 거북선의 실체를 마주해보자는 취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10억 가까운 비용과 3년이 넘게 걸린 그 사업의 결실이 보도된 일은 없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기회가 또 생겼다. ‘또’ 라고 하는 건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3번 공연에 갔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가기 전까지 필자가 잘 알지 못하는 클래식 연주가 얼마나 지루할지 필자의 무식함을 들키는 건 아닐지 매우 고민했었다.
잠실 롯데 콘서트홀의 시설은 훌륭했고 그날의 연주는 실황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은 곡 자체보다 필자가 좋아하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영화 ‘7년 만의 외출’의 삽입곡이어서 익히 알고 있는 곡이다.
7년 만의 외출은 지하철에서 뿜어 나오는 수증기에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뒤집히는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이다.
너무나 매력적이고 섹시한 마릴린 먼로가 이 음악에 맞춰 천천히 뇌쇄적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 눈에 선해서 이 피아노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오늘은 좀 독특한 방식의 연주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닉연주단의 신년 음악회를 녹화해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1월 1일엔 실황을 위성 중계했고 1월 3일은 실황을 녹화해서 보여주었다.
코엑스나 센트럴에 있는 메가박스에서는 이렇게 연주회나 오페라를 영화로 보여주고 있다. 처음 오페라를 영화로 보게 되었을 때 웅장한 실제 무대의 오페라만 접해보았던 필자로서는 그리 감흥이 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로 보는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는 오히려 중간마다 설명도 곁들여지는 등 오페라를 즐기기에 더 좋은 면도 있었다.
1월 3일 감상한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회도 실황만큼 감동적이고 웅장하게 다가왔다.
또 반가웠던 건 연주곡에 필자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13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오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경이 새해를 맞이하여 생동감 가득한 클래식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흐트러진 은발이 멋지게 보이는 ‘사이먼 래틀’경의 열정적이고 때론 속삭이듯 우아한 지휘가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다.
21세기 최고의 지휘자라 불리는 ‘사이먼 래틀‘ 경은 2002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으며 근대에서 현대에 걸친 폭넓은 레퍼토리를 토대로 살아 숨 쉬는 클래식을 들려준다는 정평을 받는 분이다.
오늘의 피아니스트는 2011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트리포노프’라는 러시아의 젊은이다.
무대에 등장한 피아니스트 ‘트리포노브’는 정말 어려 보였다. 그런데도 피아노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그의 손은 신기에 가까웠다.
두 시간 가까이 펼쳐진 신년음악회의 레퍼토리에서 클래식에 무식한 필자가 아는 곡이 두 곡이나 연주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웅장한 저음으로 시작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이다.
비록 영화로 보고 있지만, 영화 속 관객이 손뼉 칠 때 영화 보던 우리 관객도 오케스트라가 눈앞에 있는 듯 박수를 보냈다.
연주회가 끝났는데도 영화 속 관객이 계속 손뼉을 치자 앙코르곡으로 경쾌하고 빠른 아름다운 곡을 한 번 더 연주해 주는 서비스도 있어 즐거웠다.
클래식 연주회가 있다 하면 겁부터 났는데 앞으로는 모르면 모르는 채 즐겨보기로 했다.
음악은 장르와 관계없이 다 아름답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스위스 중부의 호수 도시, 루체른. 로이스 강에는 14세기의 목조다리 카펠 교가 긴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강변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가옥들이 줄지어 있다. 밤이 되면 호수 물길 따라 흔들리는 야경이 더 멋지다. 스위스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난 곳. 1897년 여름, 이곳을 찾은 마크 트웨인은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격찬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루체른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월광소나타’
루체른(Luzern, 해발 437m)은 취리히와 인터라켄의 중간쯤에 있다. 알프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루체른의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가는 물론 빅토르 위고, 괴테, 실러, 바이런 등 문학가들도 즐겨 찾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월광소나타로 불리게 된 배경에도 루체른이 있다. 베를린 태생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음악평론가인 루트비히 렐스타프(1799~1860)가 베토벤의 제1악장에 대해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루체른이 외부에 알려진 시기는 8세기, 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도시 명은 켈트어와 로망스어가 혼합된 로체리나(Lozzerina, 늪의 거주지)에서 유래했다. 13세기에는 장크트 고트하르트 고개(2108m)가 개통되면서 알프스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고, 1332년에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했다. 루체른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로이스 강을 길게 잇는 목조다리 카펠(Chape, 204m) 교다. 1333년에 축조된 카펠 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목조다리. 지붕이 있는 다리의 천장에는 축조 당시 새겨진 그림과 글씨가 이어진다. 다리 중간의 팔각형 석조물 바서투름(물의 탑)은 등대 겸 방위 탑이었다. 카펠 교 위쪽으로는 1408년에 세워진 슈프로이어 교(Spreuerbrucke)가 있다.
바그너가 결혼한 마테우스 교회와 빈사의 사자상
로이스 강과 루체른 호수를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Altstadt) 골목이다. 곡물 시장, 와인 시장, 뮐렌 시장 등이 있는 그곳에 마테우스(matthaus) 교회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코지마(1837~1930)가 결혼식(1870)을 한 곳이다.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는 당시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다. 바그너와 24세나 나이 차이가 났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바그너의 아이를 낳았다. 어쨌든 둘은 평생을 같이했다. 또 빙하공원으로 가면 ‘빈사의 사자상’(Lo ¨wendenkmal)이 있다. 작은 연못 위 바위 절벽 속에 들어앉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에는 스위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좁은 국토의 스위스는 농경지가 적은 산악지대인데다 지하자원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이들은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외국 부대 용병으로 참가해 돈을 벌어야 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단 하나. 후세들에게 용병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선대의 처절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은 1820년,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 발센이 시작해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자의 발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했다. 또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끄는 호프 교회(Hofkirche)가 있다. 735년, 이 도시에 처음 세워진 수도원이다.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1645년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25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두 개의 첨탑은 화재 때 피해를 입지 않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1640년에 4950개의 파이프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건물 주변으로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묘석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루체른 호수 따라 찾아가는 리기 산
루체른에는 멋진 리기(Rigi, 1797m) 산과 필라투스(Pilatus, 2132m) 산이 있다. 특히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 산은 스위스 최대의 관광 휴양지.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Vitznau)까지 1시간 정도 가면 된다. 유람선 여행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스위스 풍치를 보여준다. 호반을 정원 삼은 300~400m의 언덕 위에 터전을 잡은, 아름다운 스위스 가옥들과 전원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 비츠나우에 도착하면 산악열차 리기 쿨름(Rigi Kulm)이 눈앞에 있다. 리기 쿨름은 1871년 5월 21일에 개통한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리기 산 중턱 마을인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1453m)를 거쳐 30분 정도 가면 정상에 이른다. 그곳에는 1861년, 스위스 최초로 산정에 세워진 호텔이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로(30km)를 따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나 썰매를 탄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르는 이유는 멋진 풍치를 보기 위함이다. 미텔란트(Mittelland) 지방의 13개 호수와 켜켜이 이어지는 산들이 파도를 친다. 마치 ‘천국이 여기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산은 리기 칼트바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베기스(Weggis)로 10여 분 내려오면 된다. 435m 고지에 위치한 휴양도시 베기스는 여행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Travel Tip!
현지 교통:루체른 선착장에서 비츠나우까지 매시간 유람선이 운행된다. 스위스 패스(www.swisstravelsystem.com)가 있으면 무료. 시내는 걸어 다니면 된다.
맛집과 숙박:호수 주변이나 구시가지에 레스토랑이 많다. 강변 옆의 라트하우스 양조장(Rathaus Brauerei)은 하우스 비어를 생산하는 곳으로 블론드 비어가 대표적이다. 또 뮐렌 광장에는 대형 쿱(coop) 마켓이 있다. 숙박은 루체른 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리기 산 중턱에 있는 리기 칼트바트 호텔(www.hotelrigikaltbad.ch)에서는 온천욕이 가능하다.
여행 포인트:필라투스 산을 가려면 알프나하슈타트(Alpnachstad) 역에서 등산 철도를 이용해 필라투스 역(2070m)까지 오르면 된다. 눈 덮인 필라투스 산 풍치가 매우 빼어나다.
문의
루체른 홈페이지:luzern.ch
유람선:lakelucerne.ch
스위스정부관광청:myswitzerland.com/ko
소년 아카펠라 합창단인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선정하는 최정예 솔리스트를 비롯한 알토, 테너, 베이스로 구성된 24명의 소년합창단을 이끄는 지휘자 휴고 구티에레즈(Hugo Gutierrez)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한국에 방문한 소감
한국에 올 때마다 따뜻하게 맞이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투어 때마다 늘 재미있고 값진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역사와 전통, 명성을 쌓아온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고유의 목적인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주시는 관객들에게 노래를 통해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공연만을 위해 특별히 고려한 점
한국 공연을 위한 레퍼토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솔리스트들만 별도로 집중 훈련을 하였고, 변성기를 맞은 단원의 목소리와 성대 훈련을 위해 매일 단원들의 자세를 살피고 파트별 연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앙코르곡들도 함께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기 때문에 단원들이 발음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어려운 점이 있지만, 많은 한국 관객들이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아주시기 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신경 쓴 레퍼토리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곡인 마이클 잭슨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입니다. 또 뮤지컬 중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도 이번 프로그램에 함께 구성했습니다. 뮤지컬 합창곡으로 각 파트별 단원들의 웅장하고 뚜렷한 음색과 하모니를 감상할 기회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년합창단을 이끌며 보람을 느끼는 순간
단원들과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음악을 통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알리고, 서로 소통하면서 함께 호흡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주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아티스트로서 큰 보람입니다.
아이들과 소통은 어떻게 하는지
어린 단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소년합창단으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하기 때문에, 엄격한 교육과 함께 끊임없는 대화와 배려, 이해와 관용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투어를 다니면서 합창단원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늘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휘자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연을 본 관객이 얻을 수 있는 메시지
우리 합창단은 110년 전부터 노래를 통해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알려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단원들이 그 역사를 이어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난민 문제와 테러, 전쟁 등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아픔이나 경제적, 환경적인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마음의 여유와 위안,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을 돌아보고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 휴고 구티에레즈(Hugo Gutierrez)
10년간 프랑스 낭트 뮤지컬 아카데미에서 플랑타즈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 오툉대성당합창단에서 오르가니스트와 지휘를 맡았다. 2014년 7월부터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 공연 소개
일정·장소 12월 11일 용인 포은아트홀, 12월 17~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외 12월 8~16일 서울, 성주, 부산, 울주, 김포 순회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