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약 800km의 길을 한 달가량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물론 출발지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섬이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순례길처럼 걷는 길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 섬의 12사도 순례길은‘섬티아고’라 부른다.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신안 섬의 순례길은 갯벌이 살아 있는,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바로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다.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달에 다녀와서 지금껏 그 들판이 차분하게 나를 다스린다. 여건상 순례길 일부만 돌아봤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찾아가 제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마음속에 기분 좋은 여정을 감춰두고 기다리는 은밀한 기분이다.
순례길의 주요 지점은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제와 합덕성당, 원시장과 원시보 우물터를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를 경유해 신리성지까지 약 13.3㎞ 코스로 비순환형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다. 시간은 발걸음에 따라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름길이나 거친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해서 이곳이 더 알려지지 않고 지금만큼만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솔뫼라는 순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으로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지난 201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곧 다가올 2021년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의 해이다.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도 선정되어 당진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 행사를 예고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솔뫼성당 입구로 들어서 조금 걸으면 원형 공연장 겸 야외 성당인 솔뫼 아레나가 쉼터처럼 펼쳐진다. 둘레에 12사도가 세워져 있어 야외 행사의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성당 주변을 둘러싼 솔밭 사이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모습이 노송들 사이에서 성스럽게 서 있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만나는 물길로,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범근내포’에서 유래됐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이 길에 서린 순교와 박해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발길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합덕제를 거쳐 합덕성당을 만난다. 1929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페랭 신부가 봉헌한 합덕성당은 조용한 합덕 마을을 앞에 두고 고요히 서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룬 두 개의 종탑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경건함이 붉은 벽돌의 고딕과 어울려 아름답다. 가던 길 멈추고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합덕성당에 들러 그 풍경 속에서 한참 머물다 가길 권한다. 100년쯤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합덕의 너른 들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받으며 처절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을 기억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걸어간다. 바람 부는 평야를 지나 조붓한 둑길을 걸으면 평온한 자연 속에서 버그내 길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순례길이 품은 순교자들의 신념, 아픔, 그리고 뜨거웠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시간이다.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 말이 당진 곳곳을 지나면서 자주 보였다. 여기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내심 생소했지만 하루쯤 걷고 둘러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서 그들의 뿌리와 죽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것을.
걷기 열풍이 계속 이어지는 추세이지만 순례길만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시간은 남다르다. 지난해엔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었을 만큼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다만 주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 묵상하면서 걷는 예의도 명심할 일이다. 비대면 여행이 강조되는 이즈음에 순례길 걷기는 더없이 좋다. 특히 이곳은 '혼행'으로 최적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아도, 애써 여러 날을 비울 필요도 없다. 어느 날 하루 훌쩍 떠나면 된다. 신념의 전파를 위해 피 흘리기를 택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언가 가슴에 실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면 가능한 버그내 순례길의 여운은 아주 길다.
▲주변 명소& 맛집
당진 면천읍성(沔川邑城 ) 마을
당진시 면천읍성 일대를 성안마을로 부른다. 아주 오래된 이곳은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이다. 우체국을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 자전거포를 동네 책방으로 변신시킨 ‘오래된 미래’, 원래는 대폿집이었던 소품 가득 감성 가득 ‘진달래 상회’, 건너편에 면천향교를 둔 연꽃 가득한 연못 ‘골정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등 마을 전체가 개발이 제한된 유적지여서 푸근한 시간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 느리게 그러면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면천읍성 마을이다.
아미미술관
당진보다는 아미미술관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들길을 지나고 산 아래로 다가가면 나타나는 맑은 공기 속 예술 공간 아미미술관. 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의 폐교를 개조한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 낡은 학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만에 갔더니 복도의 설치 작품들이 교체되어 다시 새롭다. 실내의 전시작품, 마당의 너른 잔디밭과 핑크 뮬리가 혼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소설 '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의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 당진에 내려와 직접 설계해 지은 집 ‘필경사’(筆耕舍). 필경사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 농촌 소설인 ‘상록수’가 집필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지식인은 붓으로 시대의 어둠을 가는 존재다"라는 심훈의 말처럼 당시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심훈기념관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 한참을 쉬어도 좋을 농촌 마을이다.
교황님도 다녀간 당진 식당 '길목'의 '꺼먹지 정식'
‘꺼먹지’는 당진의 향토음식이다. 가을 무청을 염장했다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무청 짠지로 처음에는 파랗게 절여졌던 것이 검게 변했다 하여 꺼먹지라고 한다. 걸쭉한 들깨 찌개에 구수한 꺼먹지가 함께 어울려 맛을 내는 음식이다. 그릇도 흰 분청사기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손맛이 좋은 반찬들이다. 교황이 솔뫼성지 방문 후 사제단 만찬을 이곳에서 했을 때 꺼먹지 정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명장이 만든 떡, 민속떡집
민속떡집의 쑥 왕송편이 유명해서 당진을 떠나면서 늦은 저녁에 들렀더니 왕송편은 이미 다 팔린 후였다. 떡 명장이 만들어내는 민속떡집은 당진시 최초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나는 서예에 입문한 지 8년이 넘었다. 그런데 덧없고 가뭇없고 하염없다. 붓을 잡기 전에는 내가 그래도 좀 쓸 줄 알았더니 도무지 나아지는 게 없고, 지금 서예에 기울이는 열성과 공부시간은 시작 때보다 훨씬 못하다.
이틀 전 서예모임 겸수회(兼修會)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하는 겸수회 소풍은 일반 단체의 나들이와 다르다. 그 계절에 맞는 시문을 선정한 다음 지필묵을 준비해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한 글자씩 써서 글을 완성하는 게 주 행사다.
이번 가을엔 단풍을 노래한 연산군(1476~1506)의 한시와, ‘가을’이라는 한글 가곡이 선정됐다. 연산군의 시는 이렇다. “단풍잎 서리에 취해 요란히도 곱고/ 국화는 이슬 젖어 향기가 난만하네/ 천지조화의 말없는 공 알고 싶으면/가을 산에 올라 그 경치 보면 되리”[楓葉醉霜濃亂艶 菊花含露爛繁香 欲知造化功成默 須上秋山賞景光] 연산군의 시를 쓴다는 데 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진지하고 즐겁게 참여했다.
이렇게 함께 글씨를 쓰다 보니 내가 참 엉터리라는 걸 다시 알게 됐다. 스스로 한심 두심 세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붓의 소풍’은 나들이를 통해 우의를 도모하면서 각자의 자세와 내공을 점검하는 의미를 갖는데, 남들 앞에서 붓 잡고 글씨를 쓰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에 덜덜 떨었던 나는 지금도 남들이 보는 데서 글씨를 쓰는 게 영 어색하고 서투르다.
나는 모든 서예 단체가 이런 형식의 소풍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 서예 스승인 하석 박원규 선생님의 창안이었다. 글을 고르는 것, 지필묵을 준비하는 것, 막내부터 역순으로 글씨를 쓰는 것, 그리고 끝난 뒤 식사와 산책으로 마무리하는 전 과정이 소풍이면서 학습이다. 노는 듯하지만 간단없이 이어지는 공부인 것이다.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벼루가 들어가는 말로는 세연례(洗硯禮)가 있는데, 글을 짓거나 책을 읽는 모임을 마칠 때 베푸는 잔치를 뜻하는 거라서 의미가 좀 다르다. 선비들이 글을 지으며 노니는 만남과 풍류의 모임을 아회(雅會)라고 하니 필아회(筆雅會) 또는 묵아회(墨雅會)라고 불러볼까. 붓을 모아 시문을 완성하니 합필(合筆)아회라고 해볼까. 그러나 찾아보니 합필은 여러 필의 토지를 합쳐 한 필로 만든다는 말이었다. 합필이 안 되면 거꾸로 필합(筆合)은 어때? 필합아회, 발음하기 쉽지 않다. 붓잔치, 즉 필연(筆宴)은 어떨까. 춘필연 추필연 식으로 쓰면? 그것도 좀 어색한 것 같다. 그러면 기초로 돌아가 그냥 알기 쉽게 필묵회(筆墨會)?
이렇게 이름을 궁리하느라 자료를 찾다가 영조~순조 연간의 문신 권상신(權常愼, 1759~1824)의 소풍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는 1784년 3월(물론 음력) 어느 날 벗들에게 남산 꽃놀이를 제안한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제1조, 제2조 형식의 ‘남고춘약’(南皐春約, 남산 봄나들이 조약)을 정했다. 빗속에 노니는 것은 꽃을 씻어주니 세화역(洗花役), 안개 속에 노니는 것은 꽃에 윤기를 더해주니 윤화역(潤花役), 바람이 불면 꽃이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니 호화역(護花役)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 날씨 핑계 대지 말고 놀러 가자는 것이다.
꽃을 꺾으면 벌주, 잘 걷는다고 혼자만 가도 벌주, 규정시간이 지났는데 글을 못 짓고 끙끙거려도 벌주, 술잔을 잡고 가만있어도 벌주다. 재미있는 건 술이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다. 도저히 못 마시겠으면 술을 꽃 아래에 부으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꽃의 신이시여. 주량을 살피소서. 주량이 정말 적어 술을 땅에 붓습니다” 하고 고해야 한다.
권상신의 소풍 규약은 봄나들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진달래꽃이 필 때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가을에 국화 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음력 9월이며 음력 9월의 별칭은 국추(菊秋), 국월(菊月)이다. 가을은 곧 국화다. 계절은 23일 상강, 25일 중양절(음력 9월 9일)로 이어진다. 가을은 깊어지고 깊어져 어느덧 저물려 하고 있다.
“푸른 물가 한두 잎 낙엽이 지고/ 들리느니 개울물 소리뿐이네/ 타다 못해 지는 잎 내 어이하리.” 그날 우리가 함께 쓴 한글 시는 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전범중)이 짓고 음악 선생님(박일환)이 작곡한 노래다. 50여 년 전에 배웠지만 여전히 새롭다.
이렇게 함께 어울려 글씨를 쓴 다음 즐겁게 점심을 먹고 우리 동연(同硯, 서예를 함께 배우는 동료 학우)들은 한강변을 거닐었다. 유쾌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햇살이 반갑고 바람이 시원했다. 한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붓을 가지고 놀았지만, 사실은 그날도 붓이 날 가지고 놀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언제나 붓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아니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건지. 강변을 거닐며 싱거운 소리를 연발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계속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소풍을 대체 뭐라고 해야 되지? 좋은 이름이 없나? 누가 좀 멋지고 적확한 말을 찾아내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후사할 텐데(후사=일이 다 끝난 뒤 고맙다고 말로 때우는 것).
음악이 그리운 브라보 독자를 위해 두 귀를 풍성하게 채워줄 이달의 음반을 소개한다.
우리家
김호중·카카오M
‘트바로티’ 김호중의 정규 1집. 김호중의 유년 시절과 현재, 미래까지 인생 전반을 노래로 담았다. 더블 타이틀 ‘만개’와 ‘우산이 없어요’를 비롯해 총 15곡이 수록됐다.
장윤정 베스트 2020
장윤정·세일뮤직
국민가수 장윤정의 전성기를 압축한 한정판 LP. ‘사랑아’ 등 장윤정표 발라드를 모아놓은 사이드A와 ‘짠짜라’ 등 히트곡을 담은 사이드B로 구성됐다. 신곡 ‘좋은 당신’도 수록됐다.
7080 음악다방 쎄시봉 친구들
쎄시봉·서울미디어
7080시대 최고의 음악 그룹 쎄시봉의 앨범 중 인기곡 24곡만을 엄선해 LP로 출시했다. 오리지널 음원을 2020년 버전으로 리마스터링해 보다 깔끔한 음질로 제공한다.
베토벤의 사계, 영혼을 치유하다
베토벤·KBS 클래식FM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앨범으로 그의 음악과 생애를 사계절에 비유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베토벤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벽화를 앨범 표지로 실었다.
희망가
홍혜란 · 워너뮤직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아시아 최초로 우승한 소프라노 홍혜란의 정규 1집. ‘산촌’, ‘진달래꽃’을 비롯한 한국 대표 가곡을 홍혜란의 깊이 있는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지난 201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미술평론가 37인에게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를 물었다. 1위는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인 김환기(1913~1974)가 차지했다. 2위는 백남준, 3위는 박수근이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화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한 집중력과 놀라운 다산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김환기, 그는 창작 에너지를 이미 과도하게 소비하고도 허기로 괴로워 여분의 에너지까지 또 소모하기 위해 광분한(?) 화가이지 않았을까.
김환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김환기의 모든 일상과 모든 생각, 모든 시공간이 예술이었다는 얘기?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은, 우리가 눈먼 지지를 보내도 무방할 게 틀림없는 김환기의 작품을 숱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유화, 드로잉, 구아슈, 오브제 등 2000여 점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속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명망에 걸맞은 걸작들, 그리고 유품들에 서린 일상의 흔적과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값진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겹으로 품을 벌려 사람들을 보듬는 곳. 봄이면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어여쁜 꽃순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달려올 듯 반색하는 산동네. 자연 풍치로 낙원을 꾸려 서울에서 드문 이색 지대인 부암동이다. 환기미술관이 이 부암동에 있어 찾아가는 발길이 가뿐하다. 짙푸른 산자락 갈피에 그림엽서처럼 곱상하게 꽂힌 작은 집들과, 저 너머가 문득 궁금해지는 언덕길, 그리고 골목골목에 감도는 의외의 적막감이라니. 이렇게 슬슬 걷기에 좋은 길의 안통, 주택가 고즈넉한 곳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흙내가 훅 끼치려나. 서울에서 토속적인 시골 마당을 보게 되다니. 요란한 이방에서 구수한 고향 원주민을 만난 듯 반갑다. 김환기의 정신을 담은 미술관의 마당답게 자연스런 서정이 깃들어 정겹다.
부정형(不定形)의 경사진 터에 들어앉은 건물은 석 동이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달관이 저마다 상이한 형상을 가지고 공간을 분할한다. 넓지 않은 터전에 건물 셋이 있으니 여백이 부족해 옹색할 만도 하지만 층계로 유도되는 동선의 다변성으로 활달하다. 나무 정원의 푸름이 주는 생동감으로 헌칠하다. 건물들의 외양은 언뜻 보면 상자처럼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기능성을 극대화한 건실한 풍모이며 섬세한 미학이 입혀져 당당하다. 본관의 구성과 디자인은 특히나 옹골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색이다.
환기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건 김환기의 아내 고 김향안 여사. 돌아보면 모든 게 사랑이자 백년동맹이었나?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김향안은 사별의 허탈한 심경을 그렇게 토로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생애 중에 해야 할 오직 유일한 일은 남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에 있다는 양 집념과 뚝심을 다해 미술관을 건립, 1992년에 개관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김향안은 소장하고 있던 남편의 모든 작품을 유럽의 이름난 미술관에 줄 계획이었단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한국에다 아예 미술관을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 ‘환기재단’을 만들어 일을 추진했다. 이렇다 할 독지가 하나 없는 상황에서 틈틈이 김환기의 작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 콜롬비아대학 유학생 시절부터 김환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겼던 인물로 김환기의 일기에도 나온다. 과연 어떤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것인가. 김향안은 숙고했으리라. 김환기의 분신에 해당할 미술관이니 무엇보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기술의 집적이면서 예술까지 발현되는 건축물, 김환기의 작품과 혈연처럼 상통하는 미술관. 김향안이 지향하고 우규승이 추구한 건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이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다.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건축의 품새, 내부 전시공간의 변화감과 탁월한 전시기능 등을 높이 평가받았던 거다.
김환기는 어떤 화가였나.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엔 온통 그림과 맞붙어 산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술 작업으로 삶을 실감하는 감관의 소유자? 주로 작업실에 붙박이 장롱처럼 붙어살았으니 창작의 충일감이 그의 붓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했으리라. 열정, 또는 탐욕스러울 지경의 창작 욕구 자체가 그의 재능이었을지도. 인간사의 모든 경향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예술가는 남다른 노력으로 고귀한 종(種)의 반열에 오르며, 고귀한 영혼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히지 않아 진취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혜안과 용기. 이것이 김환기라는 예술이 보유한 특별 자산이지 않을까.
르네상스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면밀한 성찰과 민감한 촉으로 자신을 읽고 미술을 해부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도를 읽어 가야 할 좌표를 스스로 찍었으니 그를 일러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한다.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가 섭렵한 구상과 반추상의 여정 역시 탁발한 것이었다. 초기의 구상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이어서 빼어났다. 이후 달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의 민족 정조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작풍을 시도했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그린, 이른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순수추상의 극점에 도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형적 변신을 관습으로, 신세계적 회화 언어의 개발을 본분으로 삼아 거둔 결과물이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해석에서 관조로, 김환기는 그런 관점 이동을 통해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고자 했나보다. 순수추상으로의 질주 경위를 알게 하는 그의 진술이 여기에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환기미술관은 해마다 두 차례 김환기 기획전을 펼친다. 올 하반기 타이틀은 ‘수화시학’(樹話詩學)전이다. ‘수화’는 김환기의 호. 영리한 애호가들이여, 시에도 조예가 깊어 시적 상상력으로도 그림을 그렸을 김환기의 기재(奇才)와 문재(文才)를 그림에서 명민하게 찾아보시라! 미술관의 기획 취지는 그런 것일 게다. 사실 김환기는 상당한 분량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시로써 먼지와 소음에 미만한 세상을 관조했고, 시어의 유희와 조탁으로 예술정신을 표출했다. 그는 “미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김환기의 글쓰기와 시학은, 자신의 그림에 최루성(催淚性) 감흥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주입할 것인가에 관한 모색의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김환기의 눈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장착된 눈? 그는 세심하게 멀리, 혹은 깊숙이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전차 내부 풍경을 쓴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유심한 관찰엔 허비가 없고, 그의 회화정신은 일상에서 무르익은 내공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차를 탄 승객들이)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線)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혹은 휘어지고,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 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를 알았고, 회화정신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겉볼안이라고, 겉만 보고도 속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환기미술관 본관의 속은 겉보다 웅숭깊다. 군더더기 없이 명증한 구조로 아름답다. 모든 구성이 김환기를 향한 일종의 헌화인가? 설계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에다 건축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진땀깨나 쏟았겠다. 이번 기획전엔 대형 전면점화 10여 점을 비롯해 모두 200여 점을 내걸었다. 김환기 작품의 심원한 숲에선 새가 날고 달이 뜬다. 자연의 숨결이 스멀거리고, 안도할 만한 적막감이 선(禪)처럼 광활한 뉘앙스를 풍긴다. 불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를 보라. 강력한 자장을 발산한다. 화가는 점점이 찍은 무수한 점으로 삶과 사랑을, 자연과 순리를, 해탈과 우주를 이야기했나? 어떻게 보든 무방할 테다. 점 하나하나를 세포 입자로, 그리움을 기록한 엽서로, 도통한 나한(羅漢)의 눈알로, 혹은 우리가 끝내 돌아갈 저 밤하늘의 별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보더라도 답일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거대한 질서가 응축된 하나의 소우주로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금융그룹 100년 행복연구센터에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이란 책을 발간했다. 2019년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은 평균 49.5세에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40대 후반~50대 초반이다. 퇴직 후 국민연금을 받는 시점까지는 평균 12.5년이 걸린다. 이 상황을 소득 크레바스(crevasse)라고 한다. 크레바스는 히말라야 등정을 하는 산악인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위험 지점을 말한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 틈이 벌어져 한 번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 낭떠러지다. 우리 삶에도 크레바스가 있다.
퇴직은 소득 중단을 의미한다. 매월 들어오던 급여가 어느 날부터 뚝 끊어진다. 가정은 일정한 소득이 들어오지 않으면 고통을 겪는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아도 매달 필요한 기본경비가 있다. 상황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의식주에 들어가는 기본경비는 만만치 않다. 한 달에 두세 번 마트를 갔다 오면 아내는 볼멘소리를 한다. 먹는 데 들어가는 식료품비가 “별로 산 것도 없는데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사계절이 있어 옷도 가끔 사야 한다.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면 대출이자를 갚아나가는 것도 버거운 일이다. 통신비는 또 어떤가? 집에 컴퓨터가 있어도 각자 들고 다니는 핸드폰은 필수다. 정부에서 조사한 바로 1인당 생활비는 170만 원이라 한다. 그러니 부부가 생활하려면 월평균 생활비는 최소한 250만 원 이상 되어야 한다. 퇴직자에게 매월 250만 원은 큰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퇴직자의 어려움은 경제적 문제에만 있지 않다. 돈이 있어도 할 일이 없으면 고통이다. 돈도 없으면서 할 일이 없다는 건 더 지옥이다. 은퇴 후에도 치열한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 때문에 노후의 생을 낭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히 은퇴 전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앞으로는 자신의 삶도 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의 욕심을 조금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마음 비우는 일도 중요하다. 연습이 필요하다. 마인드컨트롤도 하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 “행복은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고 숨 쉬는 이 공간이 소중하다. 철따라 형형색색 피는 꽃과 향기를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풀벌레 소리와 산새 울음소리도 즐겨야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조그만 동산이 하나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있고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노랗고 붉게 꽃을 피운다. 가을엔 노란 은행나무 잎이 황금물결을 이룬다. 얼마 전 은퇴 기념으로 지리산에 숙소를 얻어 열흘을 지내고 왔다. 조용한 숲속에서 아침을 맞아 커튼을 열자 온갖 새소리가 들렸다.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집 베란다를 열고 거실에 앉아 있는데 지리산에서 듣던 새소리가 앞동산에서도 들려오는 것이었다.
“지리산에서는 그렇게 새소리가 잘 들렸는데 여태껏 왜 집에서는 새소리를 듣지 못했지?”
아내가 놀라워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는 그만큼 집중을 못해 듣지 못한 것이었다. 새벽부터 출근하랴 일상에 쫓기다 보니 새소리 들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좀 내려놓고 새소리도 들어가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따라 “행복은 결과보다 과정”이란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 성공적인 의정 활동을 수행한 국회의원, 그리고 감사와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김홍신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여러 가지 명칭들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무엇보다도 다시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와 마주한 작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외부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멈췄던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완성하기로 했다.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빨갱이’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장편소설 ‘적인종’의 집필, 그리고 ‘월간 에세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수필집 출간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코로나19 여파로 역경의 연속인 삶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을 들어봤다.
방송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김홍신 특유의 인자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그의 삶은 그런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저 김홍신 인생이 순조롭다고 여기실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는 않죠. 모든 삶이 순조롭다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음이 있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실수와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신화와 역사가 될 수 없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그는 원래 의대를 가고자 했지만 떨어지면서 재수를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울분과 절망은 스스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결국 재수를 해서 들어간 건국대학교 국문과.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다 하여 타과 학생들이 ‘국물과’라고 부르는 학과였다.
“그때 집안이 망해서 휴학까지 했죠. 그래서 데뷔도 늦었어요. 그나마 당시에 가장 권위 있던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지만 날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종합대학 중 문인 숫자가 가장 적은 학교가 건국대였으니까요. 내 소설이 뛰어났다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죠.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떨어지니 ‘다 지들끼리 해먹는다’ 싶었고…. 물론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야 내가 견디잖아요? 유명한 소설가들을 비판하면 비평력이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죠.”
절망의 청춘을 지나 성숙해지다
그의 날선 비판 대상에는 당대의 대표 소설가였던 최인호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야인으로 살던 시절 끝에, 마침내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 작품의 심사까지 맡게 됐다.
“그때 최인호 형과 같이 심사하게 됐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했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려니까요. 그래서 ‘선배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했죠.”
최인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홍신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다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을 비판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나를 끌어안는 거예요. ‘내 앞에서 최인호를 비판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김홍신이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탄없이 받아들인 최인호나 둘 다 넉넉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서로 돈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의형제를 맺는다.
“그때 인호 형이 한 얘기가 ‘지금 김홍신을 시샘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견뎌야 한다.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바른 걸음으로 걸으며 세상과 너무 타협하지 말라’는 거였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는걸(웃음). 온갖 협박 공갈에 편할 날이 없었어요.”
우리 어딘가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줘야
그의 고난은 작가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 시절로도 이어진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 주변과 싸워야 했다. 15대 국회에서는 ‘이틀만 근무하는 5월에 한 달 치 세비를 받는 건 혈세 남용이라며 세비거부 운동을 벌여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2003년에는 당 지도부에 의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권에서 배척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진심이 닿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 16대 연속 의정 활동 1위 국회의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는 정치에 대해 싸울 때는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할 말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몰아내고 영웅이 될 만한 사람들을 쳐냈어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고 진단했다. 자기가 역사에 남고 존경받으려면 남을 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건 상대를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음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은 일궜는데 기쁨을 잃었어요.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배아픔은 해결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는 시대를 이끄는 현자와 의인들은 시대가 만들어주고 옹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끝까지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 우리 사회 곳곳에 계세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대구의사협회장의 호소문에 응답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었다고 봐요.”
굴곡 많은 시련을 어떻게 견뎌왔나
얘기가 자연스럽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들어가게 될 시점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끝나기는커녕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 거대한 역병의 파도에 쓸려 심신이 고달프고 막막하며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처럼 굴곡진 삶에서 김홍신은 누구보다도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히 지옥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소설 ‘대발해’를 쓸 때였다. 시작은 법륜 스님의 권고였다. “국회의원, 장관 열 번 하는 것보다 발해 역사를 알리는 게 할일 아닙니까”라는 말에 동의하며 시작된 ‘대발해’ 집필은 2004년 말부터 3년간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며 피폐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때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점도 그를 힘들게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아와 눈, 허리에 문제가 생겼죠. 불면증도 생겼어요. 자다가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해놓고 잠을 자야 했으니까요.”
소설은 마침내 2007년 여름에 발표됐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요로결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스카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연이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밖을 안 나가다 보니 햇볕 알레르기가 생겨서, 햇볕에 노출되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더군요. 얼굴은 약을 바르면 됐는데 목은 치료가 안 돼서 스카프를 두르게 된 거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손에 마비가 와요. 원고지 만이천 장을 썼으니까요. 교정만 7개월을 봤고요.”
우리는 역경을 거치면 반드시 더 강해지는 민족
김홍신은 ‘대발해’를 발표한 후 7년 동안 소설을 못 썼다. 소설 집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또 아프다 쓰러지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발해’로 소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소설을 못 쓰겠다’는 두려움이 집필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다 그동안 사회비판소설, 역사소설을 주로 썼으니 사랑 이야기를 쓰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쓴 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죠. 그 이후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적인종’을 집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소설을 쓰다 죽을 뻔한 경험을 치른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108배를 하며 세상, 민족, 평화, 북한 동포,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자신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변할까마는, ‘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같은 희망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품앗이 정신이 대단한 민족이에요. 대구만 봐도 모여드는 의사, 간호사, 봉사자들 보세요.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이 달빛동맹으로 교류하는 걸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려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걸 보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토록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안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 반드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DNA가 있잖아요.”
나를 존중하고 세상을 존중하라
그는 잘 늙으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존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 공기, 풀, 햇빛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과 세상을 위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고 말한다. 이는 김홍신 자신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 못할지언정 그에 대한 미움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내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하면 내가 편안해져요.”
그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과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를 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재작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부고 소식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놓고 그 옆에 그와 자신의 사연을 썼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방향을 향해 108배를 했다. 생전에, 그는 김홍신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김홍신은 그런 그를 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그를 용서한 걸까?’ 그래서 108배를 해보며 계속 되물었다. 답은, 용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마음의 다짐
“지금 제가 찬 시계는 흔들어줘야 가는 오토매틱 시계예요. 이틀 가만 놔두면 죽어요. 이 시계처럼 인생도 자꾸 흔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남한테는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안 하면 안 되겠죠.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흔들어야 해요. 명상과 기도, 고맙다는 감사 등이 그 방법들이에요.”
그는 요즘 모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진달래, 홍매화도 스승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운 사람이 생겼다고 쳐요. ‘에휴…’ 하다가도 ‘내가 미워하면 안 되지. 잊어버리자’ 하며 다잡습니다. 그리고 저녁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반성합니다. 그러면 내가 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제 스승인 거죠.”
물론 무조건 다 그의 말처럼 살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계속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깨달음과 평화가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김홍신이란 이름을 부를 때 기뻤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쁘진 않더라도, 싫지 않고 밉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려고 하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거죠.”
마음 한쪽이 아련히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지금 ‘장총찬’이 절실한 이 시대에 김홍신이라는 문인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무릎을 탁 치며 늙음과 낡음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축복이 스며들었다.
김용택 시인은 ‘봄날’이라는 시에서 “나 찾다가 / 텃밭에 /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 예쁜 여자랑 손잡고 / 섬진강 봄 물을 따라 /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라고 노래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이 바뀐 이즈음, 책을 가까이하며 위로를 받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정갈하고 고즈넉한 책들의 고향, 종이의 고향에서 시집을 펼쳐 보고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봄맞이 산책을 떠나도 좋겠다.
‘종이의 고향’으로 떠나는 소박한 여행
파주출판도시는 책들의 고향이자 건축의 도시, 영화의 도시, 생태의 도시다. 출판인들이 모여 도시 건립을 위한 ‘위대한 계약’을 체결한 지 올해로 20년이 흘렀다. 이곳에는 출판사, 인쇄소, 영화사를 포함해 500여 개의 업체가 자리를 잡았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들부터 책방, 박물관, 북카페, 갤러리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근거리에는 야트막한 심학산이 있고, 거리 곳곳에 아담한 벤치가 있어서 잠시 멈춰 쉬기에 좋다. 겨울에 갈대가 우거졌던 샛강 변은 지금 서서히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얕은 강 위를 한가롭게 거니는 재두루미도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오다가 문발IC로 진입하면 오른쪽에 ‘출판도시의 심장부’라 불리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있다. 이곳은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가 돋보이는 건물로 2004년 제14회 김수근 건축문화상을 받았다. 박물관, 강연장, 숙박 시설이 있는 대규모 복합문화공간으로 인문학 강연, 작가와의 만남, 예술작품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2014년 이곳 1층에 개관한 ‘지혜의숲’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동의 서재이자 독서공간이다. 여기에 있는 책들은 모두 개인과 출판사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15만여 권의 책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카페도 있어 커피를 한잔 마시며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도 있다. 안쪽에는 ‘북소리’라는 할인서점이 있고, 2층에는 헌책방 ‘보물섬’이, 3층에는 출판산업체험센터가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책에 둘러싸여 느긋하게 하루를 지내면 어떨까.
바로 옆 ‘지혜의숲3’ 1층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기증한 책들이 다양한 형태의 서가에 들어차 있고, 좌석들은 편안한 형태로 꾸몄다. 2층부터 5층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紙之鄕’이다. ‘종이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 객실은 TV가 없는 대신 책들이 비치돼 있다. 79개의 객실 중 박경리, 박완서, 김훈 등 작가들의 전집이나 소장품으로 꾸민 ‘작가의 방’과 출판사 책으로 구성한 ‘출판사의 방’도 있다. 객실 크기는 9평 정도로 TV없는 하룻밤을 보내기에 적당하다.
건물 왼편의 응칠교 근처에는 전북 정읍에서 ‘김동수 씨 작은댁’의 사랑채를 옮겨 세운 ‘서호정사’가 있다.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쓴 안내문을 보면, 1971년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정읍 김동수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 조상 김명관이 1784년경에 지었다. 김명관의 둘째 아들 김상하가 1834년에 김동수 씨 작은댁을 십여 년에 걸려 지었으니, 현재 186년의 역사를 지닌 고가다. 출판도시에 하나뿐인 이 건물에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도시를 지향한다는 출판도시의 뜻이 담겨있다. 5월이면 한옥 담장을 따라 흰 꽃 등나무에 향긋한 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것이다. 국어학자이자 시인인 일석 이희승 선생이 아끼던 50년 수령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
지혜의숲 뒤편에 놓여있는 야외 벤치에 앉아 갈대 샛강을 구경하거나, 건너편 책방거리까지 갈 수 있도록 꾸며놓은 ‘김소월 시의 다리’를 산책하노라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이 얼굴을 간질인다. 진달래꽃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야간조명 덕분에 밤에는 더 낭만적이다. 출판도시에서는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책 만들기’까지, 책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열화당책박물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등을 해설사와 함께 투어할 수 있는 특별한 산책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건물 정면 맞은편에 있는 피노키오뮤지엄과 카페 헤세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한가롭고 여유 있게 책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소박한 여행을 떠나보자.
주소: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45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산에 가자" 오랜만에 전화한 동갑내기 친구가 대뜸 산에 가자고 한다. 정년까지 일하겠다는 당찬 그녀. 코로나19로 장기간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떠올랐지만 서로 바쁘기 전에는 자주 산행을 하던 친구라 단칼에 거절이 어렵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전수칙을 잘 지키면 되지 않을까. 조심조심 다녀오자고 마음을 굳힌다.
그녀와 나는 걸을 때 보폭이 비슷하다. 빠르거나 더디지 않으니 산길에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편이다. 오랜만에 산에서 먹는 밥맛은 또 얼마나 좋을까? 쳐져있던 마음이 한껏 부풀어 들뜬 맘으로 집을 나선다.
불광역 2 번 출구에서 장미공원 방향으로 걷다보면 북한산 족두리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그녀와 내가 좋아하는 코스다. 시작부터 가파른 만큼 재미도 있다. 맘이 통했는지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족두리봉으로 향했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진분홍 꽃들이 길 양 쪽에 마주 서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길에 진달래가 이렇게 많았나? 새삼 놀랍다. 겨울이 멈칫대는 사이 몰래 온 봄이 족두리봉과 연결된 좁은 오솔길 사이에서 노닐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에 누런 흙먼지가 날린다. 중턱쯤 오르다 마스크를 벗었다. 때마침 능선을 타고 넘어오던 바람이 맑은 공기를 훅 몰아준다. 누구랄 것 없이 크게 숨을 들이킨다. "와아! 너무 좋다~" 산 중턱에서 마시는 공기는 집에서 마실 때와 확실히 다르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혹은 코로나19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생각해선지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족두리봉 너른 바위를 등지고 앉아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을 내려다본다. 바짝 말라 건조한 하늘 아래 봉긋봉긋 솟은 아파트와 빌딩, 사이사이 납작납작 엎드린 다가구 주택들. 탁한 느낌인데 신기하게 하늘은 푸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에서 먹는 밥은 유난히 맛있다. 후다닥 챙긴 밥과 조금씩 덜어내 온 반찬이 꿀맛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마주하니 마음도 여유롭다. 사는 게 뭐라고 그리 아옹다옹 하냐고 즐겁게 살자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이 텅 비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 손질해온 딸기를 입에 넣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지난 연말 세상을 떠난 남편이 시간이 갈수록 그립다고. "그렇구나… 그렇겠지…."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그저 끄덕끄덕 고갯짓이라 슬프다.
족두리봉을 끼고돌아 향로봉으로 향했다. 진분홍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나무 사이사이마다 만개했다. 사진을 찍어 확인해보니 수분이 모자라 꽃잎이 바짝 말랐다. '멀리선 아름답게만 보이더니 너도 애쓰는 중이었구나' 하긴, 사람도 그렇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한 걸음 가까이 들어가 보면 걱정과 근심이 있다. 사람이나 꽃이나 서로 적당한 거리에 있을 때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한다.
달콤한 행복을 떠올리다
습기라곤 없는 진달래꽃을 따서 입에 넣고 씹어본다. 텁텁한 꽃 향이 입안에 퍼진다. 기분이 좋다. 나란히 걷는 친구의 입에도 넣어준다. 몇 해 전, 혼자 배낭을 메고 산에 올랐다가 소나기를 만난 날은 아카시아 꽃을 따먹었다. 비를 피하느라 바위 아래 멈췄다 내려오는 길에 따먹었던 젖은 아카시아 꽃잎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그 후로 산에서 꽃을 보면 입안에 넣고 씹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처럼 먹어도 되는 진달래, 아카시아가 대부분이지만.
그녀의 수다가 줄었다. 진분홍 꽃잎을 오물오물 씹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오늘 같은 날은 아카시아 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씹을수록 달콤한 그 꽃. 아카시아 꽃을 씹으며 행복하던 그 느낌이 그립다. 그녀와 함께 오물오물 달콤한 행복을 씹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다음엔 내가 먼저 전화를 해야지. 아카시아 꽃 필 무렵 산에 가자고 해야겠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포가 음산한 안개처럼 온몸을 감싸고돈다. 주말이면 즐겨하던 테니스운동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테니스장이 폐쇄되는 통에 통하지 못했다. 테니스장뿐만 아니라 사람이 모여 운동하는 곳은 모두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예방의 한축인 인체 면역력을 높이는데도 운동은 필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운동할 곳이 없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운동을 못한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달포가 지나다 보니 몸도 근질근질하고 쌓이는 뱃살에다. 뭔가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사람이 모이지 않고 맑은 공기와 햇볕을 마음껏 받으며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생각해보니 등산과 걷기가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걷기보다는 두 세 명이 함께 하면 무엇을 해도 좋다. 서로에게 동기부여도 되고 혹 모를 사고가 발생해도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좋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네친구 두 명에게 ‘서울둘레길’157km을 함께 완주 해보자고 의사타진을 했더니 쌍수를 들어 답을 한다. 매주 토요일 10시에 출발지에서 만나서 10km정도 걷는 것으로 대략적인 얼개를 짰고 이미 몇 개 코스는 실천을 했다.
제4코스 양재시민의 숲에서 출발하여 소가 잠을 자는 형상의 산이라는 우면산을 돌아서 사당역까지의 도보길 7.6km 3시간 20분 코스다. 만나기로한 양재시민의 숲 5번 출구에서 일행 3명은 단1분도 지각하는 사람이 없이 만났다. 작은 약속도 약속이다. 우리는 철칙처럼 시간 약속은 지킨다고 다짐을 한 사람들이다.
일행 세 사람은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주제가 공유되어 좋다. 지난주에 쓴 글이나 읽은 책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한다. 오늘 대화 중 한 토막은 법륜스님이 71세의 어느 할아버지에게 잘 늙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주제가 되었다. 봄꽃은 예쁘지만 떨어지면 지저분해서 비로 쓸어버리지만 잘 물든 단풍은 떨어져도 사람이 주워가서 책갈피에 꼽기도 한다. 즉 잘 늙으면 청춘보다 낫다는 말에 여유로운 ‘시간부자’ 시니어는 공감했다. 잘 늙는 방법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잔소리를 줄이고 재산관리를 잘 하라는 말이다. 세 사람 걷기 친구는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님에도 실천이 어렵다는 생각을 함께 하며 계속 걸었다.
산행 중에 말을 하면 숨이 가빠온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도 과욕을 하지 않는 시니어의 산행 기본이다. 빠른 걸음으로 잽싸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에게는 길을 비켜준다. ‘산악마라톤’하는 20대의 청년이 가쁜 숨을 토해내며 달려간다. 나도 한때는 산악마라톤을 했지만 지금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하지 않는다. 나이에 맞게 멈출 때 멈추는 것도 용기다.
도보 중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운동원들을 만났다. 보이지 않는 유권자들을 찾아 산에까지 올라오다니 정성이 대단하다. 손뼉을 쳐주며 이런 초심을 잃지 말고 당선되면 끝까지 국민을 생각해달라는 내 반응에 운동원들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무리 소리쳐도 무덤덤한 유권자들만 보다가 파이팅을 해주며 반응하는 내 모습에서 힘을 얻는 눈치다. 내가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얻게 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종착지인 사당역까지 왔다. 유명하다는 냉면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4월의 햇볕과 봄바람에 진달래꽃의 향기가 더해져 면역력이 강화되었을 것이라고 믿으니 졸음이 올 정도의 피곤함에도 기분은 좋다.
모든 병을 고치는 영역이 의사의 몫이라면 예방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직접적 예방법으로 마스크와 손 세정은 우리의 일상사가 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불안하다. 조심한다고 해도 사람을 매개체로 전파되는 병원균은 언제어디서 누구로부터 전염될지를 모른다. 오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문자가 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4월19일까지 2주 연장되었으니 한번 더 동참해달라는 호소문자다. 남들과 2m이상 떨어져 혼자 하는 면역력 강화 운동을 생활에서 찾아 계속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