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이 선물로 받았다며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왔다.
‘나나스케’라는데 그게 뭐냐고 묻는다. 나나스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장아찌 음식이다.
‘나라스께‘ 라고도 불리지만 필자가 어릴 때부터 먹어서 아는 이름은 ’나나스케’이다.
단무지 종류로 보여도 전혀 다르고 고급스러운 ‘나나스케’는 어감으로 보아 일본이름인 것 같고 동봉된 설명서를 보니 울외 장아찌라 쓰여 있다.
‘나나스케’는 늙은 오이인 노각이나 참외로 만든다고 알고 있었는데 울외라고 쓰여 있으니 참외종류가 맞는 것 같으며 이 장아찌를 만든 회사에서는 울외 외에도 오이나 무, 마늘, 양파, 당근을 이용한 나나스케도 만든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하나를 꺼내어 겉에 묻은 노란 주박 (술지게미)을 깨끗이 씻어내고 얇게 썰어 한 조각 입에 넣으니 달콤, 짭짤 아삭한 맛이 옛날 맛과 똑같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흔하게 이 장아찌를 먹었다.
우리 아버지는 밀가루 묻혀 쪄서 양념장에 묻히는 풋고추 찜이나 밥에 얹어 쪄낸 보랏빛 가지를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서 집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무치는 가지나물, 새우젓으로 간한 애호박 볶음 같은 시골 반찬과 특히 ‘나나스케’를 좋아하셨다.
한여름에 아버지와 겸상해서 찬물에 밥을 말아 나나스케 한 조각 얹어 먹으며 그 아삭거리는 식감과 향긋한 맛에 같이 감탄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아마 친할머니가 손수 담아주셨던 이 장아찌의 맛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도 한번 만들어 보라는 부탁을 했는데 나나스케의 재료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엄마는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 때 대전에서 친할머니가 작은 몸집에 버겁게 보일 정도의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셨다.
갓김치와 나나스케를 만들어 오셨는데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도 생각나고 좀 뾰로통했던 엄마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 옛날 장남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딸만 셋을 낳은 엄마는 시집으로부터 아들 못 낳았다는 데 대한 무언의 핍박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친할머니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좀 냉정하게 보여 안타깝고 슬펐던 적이 있다.
그때 먹었던 친할머니의 나나스케는 정말로 감칠맛이 났지만 슬픈 느낌도 묻어있다.
그 후로는 입소문으로 알게 된 집에서 사다 먹었어도 느낌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의 맛만은 못했고 서둘러 내려가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울외는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물이라고 한다. 참외와 비슷하지만, 참외처럼 단맛은 없다는데 이 열매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내고 소금에 절인 후 꾸덕하게 말려 설탕을 첨가한 주박에 박아두면 울외장아찌가 되는데 주박이란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술지게미이다.
단무지와는 달리 흔하게 볼 수 없는 나나스케, 울외장아찌는 채소절임이 발달한 일본 장아찌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군산지방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군산에 일본인 청주양조장이 번성했고 거기에서 나온 지게미로 울외장아찌를 만들었는데 요즘에도 군산의 울외 가공공장에서는 대규모 양조장에서 나온 지게미를 받아다 장아찌를 만든다고 한다.
선물 받은 나나스케 하나를 꺼내 겉에 묻은 노란 주박을 깨끗이 씻어내니 황금색의 꾸덕한 장아찌의 모습을 드러낸다.
양념하지 않은 채로 얇게 썰어 물에 말은 밥 한 숟갈에 얹어 입에 넣으니 달콤하고 짭짤한 그 아삭거리는 식감과 독특하게 향긋한 맛이 일품이다.
이번엔 남편과 마주앉아 물 말은 밥에 나나스케를 나눠 먹었다.
오랜만에 맛본 울외장아찌 하나로 하늘나라 계신 아버지와 친할머니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높고 푸른 전형적인 맑은 가을 날씨가 이어지는 요즘 신대방동의 기상청과 충북 진천의 국가기상위성센터로 천리안 위성을 보러 가게 되었다.
기상청은 우리 생활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날씨를 알려주는 곳이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호기심과 관심이 컸다.
이상하게도 예전 어릴 때 소풍 가기 전날이면 꼭 비가 왔다.
전날까지도 맑았는데 왜 소풍 당일 날 비가 내려서 즐거운 소풍을 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는지 제대로 된 일기예보를 해주지 않은 기상청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예전엔 대체로 일기예보를 믿지 않았다.
맑은 날씨라 해서 그냥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낭패를 보았고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믿고 우산을 챙겨 나갔는데 온종일 쾌청해 들고 나간 우산이 매우 거추장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일기예보가 맞는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으면 오후에 꼭 비가 내렸다.
다들 예전과 달리 예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상청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우리나라 기상청이 첨단으로 발전해서 필자가 어렸을 때처럼 오보가 많지 않고 정확하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날씨를 미리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기상청의 존재 이유가 일기예보만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기상청은 관측과 예보라는 튼튼한 뿌리에 기반을 두고 지진, 화산, 기후변화, 기상 기후산업, 수문 기상, 국제협력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다.
국가기상업무는 하늘 땅 바다, 그리고 우주에서 대기와 해양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관측하고, 국내외에서 생산된 기상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처리 분배하며, 슈퍼컴퓨터를 활용, 정확하게 분석해 수치예측을 하고, 수집된 다양한 관측 자료와 현재의 기상상태 수치예보모델 결과에 예보관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예보를 생산하고, 방송 신문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
정확한 기상정보를 국민에게 알려주기 위해 많은 분이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는 기상청을 뒤로하고 진천의 천리안 위성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2시간쯤 달려 도착한 국가기상위성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지궤도기상위성인 천리안 위성을 운영하기 위해 2009년 4월에 신설된 기상청 소속 기관이다.
천리안이라는 명칭은 국민공모를 통해 지어졌다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성센터는 높은 건물 등 전파방해시설 때문에 도심에 위치할 수 없어 지방에 유치하였다.
진천센터는 청주와 대전의 위성센터와 협력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기상위성 활용으로 재난재해 분야뿐 아니라 기후변화 분야, 환경 분야, 농업 분야, 해양 분야, 항공분야까지 광범위하다.
하늘을 향한 우리의 꿈은 현재의 상상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도전을 망설이지 않은 국가기상위성센터의 노력으로 천리안위성 1호는 2010년 6월 남미 기아나 꾸르 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천리안위성에서 관측된 기상자료는 천리안 위성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지역 30여 개 국가에서 수신할 수 있다고 한다.
천리안위성 1호에 이어 더 나은 천리안위성 2A 호가 2018년 우주로 향한다.
차세대 기상 센서가 장착된 천리안위성 2A 호는 광범위한 지역의 기상 현상을 3~4배 향상된 고해상도로 관측한다고 하며 우리 기술로 개발한 우주기상 관측용 센서를 최초로 탑재하여 태양 활동 등 실시간 우주 기상 감시가 가능하고 기후변화, 지구환경 감시, 해양, 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여 세계 최고의 기상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 한다.
천리안 2호와 같은 위성은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만 보유한 자랑스러운 위성으로 기상위성을 선도할 것이라니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다.
이제 우리나라는 천리안 위성으로 기상위성자료 수혜국에서 기상위성자료 원조국으로 국가의 기상을 높이 세우게 되었다.
날씨예보만이 아닌 기후변화에 의한 국민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상청의 활약을 기대한다.
20여 년 전 댄스스포츠를 한창 즐기며 배울 때 세계적인 프로 선수들은 우리나라 방문을 기피했었다. 어차피 극동에서 벌어지는 아시안 투어에서 일본에는 가지만, 한국은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던 프로선수들이 불과 몇 년 전부터 한국에 자주 온다. 한국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한번 오면 고액의 시범료를 받을 수 있고 온 김에 레슨비를 두둑이 챙겨서 갈 수 있다.
당구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유럽에서 생겨난 당구의 세계적인 수준에 편승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세계 당구계의 변방이었으나 이제는 4대 천왕이라는 세계 프로 당구계의 거물들이 한국을 자주 찾고 있다. 올해만 해도 LG U+대회와 청주 직지 당구 월드컵 대회 등 세계대회를 두 차례나 치렀다. 그리고 여기저기 동호회에서 초대 받아 시범 몇 차례 보여주면 레슨비가 만만치 않다. 한국 당구 계는 TV나, 관련 업체 등에서도 이들 4대 천왕을 통하여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LG U+대회의 우승 상금은 무려 8천만 원이었다. 대부분의 세계 대회 우승 상금은 1천만 원 내외로 알고 있다. 청주 직지 당구 월드컵 대회의 우승 상금은 1천만 원이었으나 세계적인 선수들이 대거 몰려 와서 경합했다. 전 세계적으로 세계 대회는 일 년에 10개 남짓하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세계대회에서 심판이 국제 공용어인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쿠드롱 3점”, “득점”, “안 맞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니 외국 선수들도 아쉬우면 한국말을 배워야할 판이다. 물론 당구 용어는 뻔하고 득점수는 본인이 몇 점 쳤는지 잘 알고 기록원이 틀림없이 기재하기 때문에 신경 쓸 것은 없다. 전 세계 태권도 사범들이 “준비”, “차렷” 등 우리말로 구령을 하는 것과 비교된다.
우리나라 프로 당구 선수들의 수입은 아직은 경기 상금만으로는 생업으로 삼기에 부족하다. 대회 성적이 좋은 선수는 기업체의 후원을 받고 있거나 그 명성으로 레슨비를 수입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구 신동 조명우 선수의 경우 4대 천왕 중 한 명인 산체스를 키워낸 세계적인 종합스포츠 클럽 FC포르투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종합스포츠클럽 시스템이 안 되어 있다. 그러나 인프라는 가장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당구의 본고장 유럽에 가 봐도 우리나라처럼 몇 십 미터 간격으로 당구장이 많지 않다. 당구장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더구나 당구의 기초 과정을 배울 수 있는 4구 경기는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만 즐기고 있다고 한다. 4구에서 발전하여 3구 경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4구 동호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거기에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당구 붐을 타고 왕년에 당구 맛을 봤던 시니어들이 대거 당구 쪽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재력 있는 시니어들은 골프를 즐겼으나 골프는 날씨와 관계가 많고, 최소 4명의 마음 맞는 동반자를 구해야 하고,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등 난점이 많아 손쉬운 당구가 각광을 받는 것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당구를 생업으로 삼아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아 세계적인 프로당구선수들을 다수 배출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당구 계는 점점 더 세계적인 입지를 굳히게 될 것이다. 댄스 계 초기에 붐이 크게 일면서 젊은 선수들이 댄스에 정진했던 일과 비슷하게 비교된다.
말하자면, 그때도 “오빠 믿제, 한잔해?”라는 말이 있었다는 뜻이다. 2천여 년 전, 고구려 건국 전이다.
주인공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 부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의 기록을 따라간다. 하백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유화, 훤화, 위화다. 이들이 강가에서 놀다가 해모수를 만난다. 청춘 남녀가 만났다. 게다가 ‘천제의 아들’과 ‘강물의 신’의 세 딸이다. 잘나가는 집안의 ‘엄친아’다. 스토리가 뻔하다. “유화가 술에 취해 해모수와 통정을 했다”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술이 웬수’다. 아마 해모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빠 믿제?’
믿을 만했다. 유화 부인은 큰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 태어났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들이 백제를 세웠다. 무척 ‘생산적인 오빠 믿제?’였던 셈이다.
해모수가 유화 부인을 꼬드길 때 사용한 ‘작업주’는 발효주(醱酵酒)다. 발효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긴다. 과일이나 곡물을 자연 상태에 두면 주변의 효모 등과 작용하여 술이 된다. 막걸리, 맥주, 각종 과일주, 곡물주가 모두 발효주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발효주다. 누룩을 미지근한 물에 푼다. 쪄서 식힌 고두밥과 누룩 푼 물을 섞어서 술독에 넣는다. 이게 전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술이 괸다. 거품이 보글보글 나온다. 효모의 작용이다.
이 간단한 과정을 제대로 하는 양조장이 드물다. 장난을 친다. 누룩 대신 얄궂은 일본식 개량 누룩도 사용하고, 정제한 ‘고우지[麴, 국]’도 쓴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양한 술맛이 아니라 일정한 단맛이 난다.
막걸리로 한정하자면, 전북 정읍 태인의 ‘태인양조장’에서 빚는 ‘송명섭막걸리’ 정도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내놓는다. 자기 손으로 재배한 밀로 빚은 누룩과 자가 재배 쌀로 막걸리를 빚는다. 제대로 만든 술은 약이다. 한두 잔 가볍게 마시면 약이 된다.
막걸리는 우리 고유의 술이다?
참 섭섭하게도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자기들의 발효주가 있다. 곡물, 과일의 종류가 다르고 이름이 다를 뿐이다.
아주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라고 부른다. 순료는 물을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진한 술, 즉 농주(濃酒)다. 진국, 전국술이라고도 부른다. 오래전에는 양조장에서 ‘진땡이’라고 불렀다. 진땡이가 사라진 것은 세금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도수가 높으면 세율이 높다. 주세법상, 8도 이하의 술인 막걸리는 세금이 낮다.
오나라 주유(175~210)는 성격이 호탕하면서도 퍽 괜찮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오나라 장군 정보는 “주유와 사귀면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마침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른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순료도 역시 ‘진짜 막걸리’다. 중국에도 막걸리 혹은 막걸리 비슷한, 발효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막걸리의 장점은 다양성이다. 산촌에서 빚은 것은 ‘산료(山醪)’라 부르고, 거친 것은 ‘박료(薄醪)’라 불렀다. 조선 중기 문신 조임도는 시에서, “산촌 막걸리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라고 했다.
귀한 쌀로 산촌의 거친 막걸리를 빚었을 리 없다. 잡곡으로 빚은 술이니 거칠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료라도 있으면 곧 무릉도원이다. 우리는 거친 것도 귀하게 여겼다.
주막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사설 음식점 겸 숙박업소’다. 밥값, 술값은 받고 잠자리는 무료였다. 봉놋방에 여러 명이 웅크리고 잔 이유다. 술은 주로 막걸리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참제도 아래의 역이나 참, 점과 달리 주막(酒幕)은 주점(酒店) 노릇을 했다. 술 마시는 곳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막았다. 불법이니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술을 만들면 반드시 곡물을 허비하게 된다. 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막은 꾸준히 발전한다. ‘막(幕)’은 천막이다. 가건물이라는 뜻이다. 이 가건물이 조선 후기에는 제법 모양을 갖추고 세금도 내는 합법적인 공간이 된다.
술은 어떻게 먹어야 할까? 조선 후기 문신 이민서(1633~1688)는 “산으로 놀러 다니는 일과 술 마시는 일은 같은데, 여럿이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며 혼자는 무료하다”고 했다. 이민서는, “금강산에 갔을 때 미처 동행이 없어 쓸쓸했는데 다행히 산속에서 사람을 만났으니 마치 순료를 만난 것같이 기쁘다”고 했다. 나이 들어 술 마시는 일은 의 저자 이규경(1788~1863)의 말을 귀담아들을 일이다. 이규경은, ‘나이 든 이의 겨울철 섭생법’으로 ‘새벽에 일어나 순료를 마시고 양지쪽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고 했다. 잘 마시는, 좋은 술은 약이다.
소주 마시고 패전?
증류식 소주는 몽골의 원나라가 전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소수설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송나라 사람 전석의 말을 인용, 섬라주(태국 술)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술인데 우리나라 환소주와 같다고 했다. 송은 원나라 이전이다.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소주가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 말, 경상도 원수 김진은 술꾼이었다. 평소 기생, 측근들과 자주 소주를 마셨다. 주변에서는 이들을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 ‘소주 퍼마시는 무리’라는 뜻이다. 막상 왜구가 합포(마산)를 침략하자, 병사들은, “소주도에게 공격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김진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가덕도로 귀양을 떠났다.
소주는 한반도에서 여러 번 대형 사고를 친다.
태종 4년, 조정에서 경상도로 보낸 경차관(敬差官) 김단이 옥주(沃州·지금의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사인은 소주 과다 음주였다. 김단은 청주에서 소주를 과하게 마셨고 멀지 않은 옥천에서 사망했다.
태종 17년(1417), 수원부사 박강생과 과천현감 윤돈이 파직된다. 죄목은 ‘소주 과다 음주로 인한 동료 과실치사죄’다. 윤돈이 과천현감을 그만두었을 때 금천현감 김문 등 인근의 고을 관리들이 이별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강생과 윤돈이 김문에게 소주를 과하게 권했고, 김문은 소주 과다 음주로 사망했다. 태종은 “설마 죽이려고 술을 과하게 권했겠는가? 파직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한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도 소주 과다 음주에서 빠지지 않았다. 일하는 인부들에게 술을 과하게 권했고 그중 한 명이 과다 음주로 죽었다. 대신들이 양녕대군을 탄핵하지만 세종은 관대하게 대한다. 양녕대군은 죽을 때까지 꾸준히 소주를 마신다.
양녕의 아버지 태종도 술고래였다. 아들 세종 역시 술을 잘 마셨다고 하니 이 집안의 음주 내력도 범상치 않다. 태종의 형 진안대군 이방우도 술꾼이었다. 에는 “진안군이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왜 소주 술꾼들이 쉽게 목숨을 잃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독하다. 자연발생적인 술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증류한 독주다. 독주를 지나치게 마시면 목숨이 위태롭다. 간단한 이치다. 위스키, 보드카, 한국 소주, 중국 고량주 모두 증류주다. 물에 섞어 부드럽게 마셔야 하는 이유다.
“이제 제 라이벌은 나훈아씨예요. 한동안은 라이벌이 없었어요. 없는 동안에 저 혼자서 누나들을 많이 행복하게 해줬는데, 이번에 새 노래가 나온답니다(웃음).” 자신의 팬층이 가수 나훈아와 완벽하게 겹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수’ 이동준은 원래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1979년부터 태권도 국가대표였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톱클래스였다. 그러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연기자였다. 30년의 2막을 내리고 이제 그가 선택한 인생 3막의 삶은 가수다. 지금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이동준(60)을 만나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이제는 배우 이동준보다는 가수 이동준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늦깎이 가수지만(웃음). 큰 꿈을 꿔야 중간 정도라도 가지 않겠어요?”
나훈아를 라이벌로 삼은 ‘가수’ 이동준은 사실 2000년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수와 배우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동준씨는 배우인데…’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 이동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생 3막의 무대에 올랐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수하길 잘했어요.”
노래 ‘누나야’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일까? ‘늦깎이 가수’의 얼굴은 밝았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심정마저 느껴진다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인한 남성상의 대표적 이미지로 활약하던 그가 갑자기 가수를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수를 해야 하는 속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노래는 나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다
“우선 제 아들이 연기자니까 연기자 아버지로선 한발 물러나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젊었을 때는 주인공을 했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주인공을 못하는 것도 있고. 드라마 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됐구나’ 싶었죠.”
그는 또한 워낙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난 연기자였다. 그 자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부산, 미사리, 남양주 등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노래를 한 지 벌써 24년이 넘었다. ‘누나야’를 설운도가 곡을 써서 준 것도 그의 그러한 실력과 인맥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는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가수는 내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어요. 콘서트를 열어도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도 많고. 연기는 단체활동이라 개인활동을 하기에는 제한적인 데다 제작기간이 6개월이면 6개월 동안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있었죠. 그런데 노래를 하면 피드백이 빨리 와요. 관객과의 스킨십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가수 이동준으로 자리매김할 터
연기는 연기의 역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 이동준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수 이동준은 이동준의 원래 모습 그대로다.
“가수들이 저를 보고는 저러다가 말겠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만둘 생각 안 했어요. 이제 연기는 접고 가수의 길만 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 내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잖아요? 노래를 하니 즐거워서 내 갈 길은 이거다 싶고, 연기할 때보다 가수로 전향해서 더 바빠요.”
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의 노래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성인 발라드 곡인 ‘미안해요’가 제 첫 번째 노래예요. ‘남행열차’를 만든 김진용씨가 작곡한 노래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미안해요’가 롱런을 위한 노래라면 설운도가 준 ‘누나야’는 ‘팍 뜰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줄게’ 해서 받은 것이죠. 또 김동찬 선생이 저에게 맞춰주신다고 해서 주신 곡이 ‘그날그날’이에요. 이 세 곡이 요즘 제가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들이죠. 부지런히 공연을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들이 들어오네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그는 요즘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한강 조망권을 갖춘 고급 빌리지 ‘카스텔로 씨마’가 그것이다. 단지는 A, B, C 3개동으로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의 12가구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관과 차별화된 공간·구조로 설계해 입주민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15분 걸리는 거리예요. 남한강 근교에 이런 풍광이 있는 곳은 없어요. 앞에 도로가 없어서 공기도 맑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작 중입니다.”
가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주택까지 짓는 중이라니,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시행착오 없게 하려고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와 관계된 후배, 친구, 선배들이 많아요. 다들 고맙잖아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이걸 지어서 자금이 모이면 베풀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내 장사를 하면서 베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이동준의 아들 이일민은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그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도 스물여덟 살이 돼서야 데뷔를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들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니까요.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죠.”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직이기에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되면 좋지만, 잘되기까지는 남모를 아픔과 시련이 많다.
“나는 그나마 순탄하게 연예인 삶을 살아온 케이스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생계형이 있어요. 종합예술인으로서 이 세계가 좋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아들에게 바라는 건 정말 정통 연기자로서 살아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해병대 갔다 오고 해서 스펙이 훌륭하죠, 기다려줘야죠. 그런데 아들에게 미안한 게, 제가 더 바쁘잖아요. 아들은 나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해요.”
대나무 매듭짓듯이 살다
어쩌면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열어가고 있기에 갖게 된 여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이 있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에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일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치 대나무 매듭을 짓듯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영화에서 망했고, 인터넷에는 똥꼬쇼를 했네 뭐네 하지만 저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한 게 없어요. 망하기 전에는 돈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힘들어졌을 때도 돈에 쫓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한 달 준비해서 부산에서 일하며 바로 수익 창출해서 나머지 빚을 갚았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제는 돈이야 뭐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해요. 노래 부르면 되는데(웃음).”
남자답게, 정의롭게 산다
“스케줄이 비면 주로 골프를 해요. 지방에 지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만나서 공 치고 노래하고. 운동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선수로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그는 젊은 시절 11대 1로 상대했다는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년 전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보다 29세나 어린 선수와 상대해 이긴 적도 있다.
“감량은 음식과 운동으로 해야지 먹을 거 다 먹으면 안 빠져요. 건강은 자신하기보다 지켜야 해요. 소금은 줄이고 야채나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탄수화물은 차단하고 단백질을 먹어주며 물을 많이 먹어야죠. 그러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초기당뇨’ 징후를 발견했어요. 당화혈색소 수치가 6.0% 이상 나온 뒤부터 집사람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부산, 대구, 수원, 순천 등 전국 공연을 마치고 10월 청주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전 이제 시작이에요. 3막이 시작됐으니까. 일단 내가 행복하고 상대가 행복해야죠.”
여백의 에너지가 넘치는 상남자
그에게 가수 이동준으로서의 미래를 물어봤다.
“토털 엔터테이너 이동준. 사실 제가 악기를 조금씩이지만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알아요. 그리고 ‘이동준’ 하면 라이브라고 각인이 됐어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거짓말 좀 보태자면 50만 명 정도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어딘가에 들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던 털털한 이미지처럼, 천생 남자인 그는 남자답게, 정의롭게 살자는 마음가짐만큼은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에서 욕 안 하고 선배들이 인정해주니까 고맙죠. 그렇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죠.”
이동준의 인간미는 호쾌하다. 그의 인생 3막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호쾌한 인간미가 전해주는 여백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믿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서울 변두리 산 밑이다. 이 동네에서 꽤 오래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같은 아파트 사람 이외는 친분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남편은 같이 산에 물이라도 뜨러 갈 때면 언제 사귀었는지 온 동네 사람과 다 인사를 나눈다. 그런 남편이 참 생소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필자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들고 들어오는 청첩장이나 부고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동네 사람 경조사에도 많이 참여하는 것 같다.
며칠 전 남편이 이번 일요일에 동네 아는 분의 자제가 결혼하는데 결혼식 장소가 청주라 버스를 대절해서 동네 사람들과 축하하러 가게 되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혼주 되는 분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 망설여졌다. 요즘도 이웃 경사에 버스를 타고 지방까지 내려가는 일이 있는 것일까? 변두리 우리 동네 아니면 별로 흔한 일은 아닐 듯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치르게 되니 축하객이 너무 적을 것 같아 걱정이라는 혼주의 이야기를 전하며 남편이 필자에게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이전 같으면 절대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일까 모르는 사람들과의 하루 나들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속마음은 어디론가 훌쩍 나서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일요일 오전 9시 아파트 앞 도로로 나가니 커다란 대형버스가 서 있었다. 한두 사람은 안면이 있지만 거의 처음 보는 사람들이 30여 명 앉아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기온이 차가웠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마냥 설레었다. 촉촉한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두 시간쯤 달리니 그제야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며 햇빛이 활짝 피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 날 혼사가 있으니 더 경사스럽다는 덕담들이 터져 나왔다.
필자는 이전에 청주를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친지를 방문하러 오기도 했고 여행으로 들르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톨게이트를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필자의 눈을 가득 채웠던,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이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였다.
알고 보니 그 가로수 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리였다. 풍경이 아름다워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나왔다는데 예전에 푹 빠져 보았던 드라마 에서 최민수가 오토바이로 질주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란다. 청주에 가까워져 갈수록 플라타너스 거리를 기대했지만 가는 길이 다른지 가로수 길은 보이지 않은 채 어느 새 예식장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대형 결혼식장이었다. 좋은 날짜인지 식을 올리는 커플이 많아 축하객들도 만원이었다.
머리 올리고 한복을 차려입은 하객이 유난히 많아 축제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다.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랑 신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게 사람 살아가는 재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꼭 잘 아는 사람 아니어도 하객 부족할까 걱정하지 않게 동참해주는 이웃이 있는 우리 동네가 정겹다. 비록 변두리지만 인간의 정이 넘치는 자랑할 만한 곳이다. 훈훈한 인심을 가진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처럼 즐거운 나들이를 했다.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 쾨쾨한 매연,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공해로 얼룩진 도시의 묵은 때를 자연의 민낯처럼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 일상의 번잡함일랑 잠시 내려두고 너른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들어보자. 갑자기 떠날 곳이 막막하다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국립자연휴양림’을 이용해보는 것 어떨까?
◇ 수도권
아쉽게도 서울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없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경기도에는 5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산음자연휴양림’은 3km 거리의 ‘치유의 숲길’, 산림치유프로그램,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산림치유지도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에 위치한 ‘아세안자연휴양림’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의 전통가옥과 놀이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은 우리 꽃 자생식물원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라면 유익하다.
-산음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치유지도사 상주
-아세안자연휴양림(양주시) 이국적인 객실 외관
-운악산자연휴양림(포천시) 가마터 향토유적지 인근
-유명산자연휴양림(가평군) 우리 꽃 자생식물원 보유
-중미산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레포츠 오리엔티어링
◇ 경상도
한려해상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 좋다. 아울러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앞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사 계곡, 덕구온천, 백암온천, 동해안 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이른바 3욕(금강소나무숲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관동 8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명사십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망양정도 가까워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검마산자연휴양림(영양군) 책 4000여 권의 숲속도서관 운영
-남해편백자연휴양림(남해군) 편백나무숲 산림욕, 나비더테마파크
-대야산자연휴양림(문경시) 문경 8경 중심부, 천연염색체험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울주군) 통행차량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
-운문산자연휴양림(청도군) 야생식물관찰원, 농경시대 귀틀집
-지리산자연휴양림(함양군) 토요 숲속야학, 한지체험관 운영
-청옥산자연휴양림(봉화군) 그린스쿨, 자연학습 체험 교육
-칠보산자연휴양림(영덕군) 금강송숲 탐방, 숲속 작은 음악회
-통고산자연휴양림(울진군) 3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 체험
◇ 충청도
충남 서부의 최고 명산으로 불리는 오서산 자락에 있는 ‘오서산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히 쉴 수 있는 휴양관과 물놀이장, 야영장, 숲속교실 등을 고루 갖췄다. 휴양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숲 해설은 물론, 활쏘기 투호 등 놀이체험과 목공예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은 산 전체가 해송(海松)으로 뒤덮인 희리산의 푸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휴양림 수종의 95%가량을 차지하는 해송에서 피톤치드와 테르핀 성분이 다량 분비돼 삼림욕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상당산성자연휴양림(청주시) 유아, 학생 대상 산림교육 프로그램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보은군) 휴양림 내 토속 식용·약용식물 자생
-오서산자연휴양림(보령시) 어린이물놀이장, 대나무숲 체험장
-용현자연휴양림(서산시) 백제 후기 문화유산·유적지 인근
-황정산자연휴양림(단양군) 황정산 암벽지대 소나무 군락 경치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서천군) 해송 삼림욕, 솔방울 공예 체험
◇ 전라도
‘방장산자연휴양림’ 내 ‘에코어드벤처’에서는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친환경 레포츠 ‘집라인(zipline)’을 경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백나무를 이용한 비누, 문패, 액자 만들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곳이다. 낙안읍성민속마을 2km 지점에 자리한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등과 가까운 ‘덕유산자연휴양림’,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 등은 주변 관광지, 휴양지와의 접근이 편리하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순천시) 낙안읍성민속마을 주변 경관
-덕유산자연휴양림(무주군) 야생식물관찰원, 반딧불이 관찰
-방장산자연휴양림(장성군) 에코어드벤처 친환경 레포츠
-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모항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인근
-운장산자연휴양림(진안군) 휴양림 내 7km의 갈거계곡
-진도자연휴양림(진도군) 2017년 개장, 남도소리체험관
-천관산자연휴양림(장흥군) 휴양림 진입로에 동백·비자나무숲
-회문산자연휴양림(순창군) 유아·청소년 대상 ‘열려라곤충나라’
◇ 강원도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 ‘대관령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대관령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내 50~20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 중 일부는 1920년대 인공으로 소나무 씨를 뿌려 조성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양한 목공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싶다면 ‘백운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한다. 휴양림 내 ‘숲속공예교실’은 201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교육(ISD) 공식프로젝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대한걷기연맹에서 지정한 ‘제1호 건강숲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정선군) 정선오일장(아리랑시장) 인근
-검봉산자연휴양림(삼척시) 오토캠핑장, 산림문화 프로그램
-대관령자연휴양림(강릉시) 숯가마를 활용한 체험·공예 프로그램
-두타산자연휴양림(평창군) 두타산 두근두근둘레길 탐방
-미천골자연휴양림(양양군) 휴양림 내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지
-방태산자연휴양림(인제군) 인근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운산자연휴양림(원주시) 숲속공예교실 문화 프로그램 특화
-복주산자연휴양림(철원군) 용탕골 계곡과 잠곡리 경관 수려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오대산국립공원 인근 활엽수
-용대자연휴양림(인제군) 다람쥐 등 다양한 야생동물 서식
-용화산자연휴양림(춘천시) 등산·캠핑 전문 산림레포츠 휴양림
-청태산자연휴양림(횡성군) DIY목공교실, 인도네시아전통전시관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가인 엄정순(57)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화두였다. 보이는 것 이면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함. 엄 디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 그 밖의 세상에 있는 진실과 본질 등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이 ‘눈을 쓰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험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의 눈’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의 미술 작업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이 만나서 다르게 보는 눈 ‘Another Way of Seeing’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했어요.”
엄정순 디렉터가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시각장애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미술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눈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맹학교 미술 수업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맹학교로 찾아가 시각장애 학생들과 창의적인 융·복합 수업을 하는 것이다. 드로잉, 조소 등 미술 수업 외에도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사진 수업, 요리연구가와 함께하는 미각 수업, 조향사와 함께하는 후각 수업 등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미술대학에도 보내고,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 예술가 성장도 지원하고 있다. 미술 수업에서 작가 데뷔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미술 교육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와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공간인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는 복지 차원만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통해 서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시, 교육, 출판,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학습을 위한 점자촉각아트북도 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 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런 세계에서 너무 멀리 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소통을 위해 공동으로 쓰는 이미지를 배우고 즐기는 다양한 통로가 필요해요.”
‘우리들의 눈’ 내의 보르헤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샘플북을 제작해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미술 표현 중 시각은 작은 일부
‘우리들의 눈’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시각장애학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는 엉뚱한 발상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미술’이란 단어에서 나왔어요. 미술과 그림, 이미지는 보는 것과 연결되는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시각장애인은 못 보니까 시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죠. 저는 미술, 즉 이미지의 시작은 상상력과 오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각은 작은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엄 디렉터에게 미술은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던 것. 여전히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술은 잠과 사랑처럼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 교육을 시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취감,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너를 표현해봐라’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줘라’ 하고 주문했을 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려워했고 제대로 못했어요. 미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동떨어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미술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또 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과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도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된다’고 하고 자신도 ‘못할 거야’라고 했던 무엇을 뛰어넘는 경험이 되었다.
“저는 그들이 느낀 것을 일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말했던 ‘미술 수업은 인간으로 사는 품위를 알게 해주었다’는 고백으로 알 수 있었어요. 미술은 논리와 감성의 조화를 배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갖게 해줘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술의 의미를 시각장애인들의 경험을 통해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미술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작업을 하며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생겼어요. 예술가로 또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며 놀랄 때가 많아요. 일반 예술가들과 달리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적고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접하다 보니 보이는 대로 이해하는 비장애인들보다 형태와 표현 면에서 창의적인 작품이 많다.
“저희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요. 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중 하나인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코끼리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변화를 몰고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의적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2009년 6월, 33명의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15명의 티칭 아티스트들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311.5km 첫 번째 코끼리 로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번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12년 7월에는 청주맹학교 학생 8명과 관계자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기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비유잖아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인간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한다’고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뜬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메타포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엄 디렉터는 이 메타포로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안 되는 거대한 무엇에 다가가는 상상력과 시각장애 학생들의 부족한 스케일 감각에 도전해보는 한편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창의적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했던 맹학교 학생들이 훌쩍 성숙해졌고 ‘우리들의 눈’ 활동도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2009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2010년 7월 TEDxSeoul에서 발표됐고 이 발표를 계기로 2013년 EBS 다큐멘터리 가 방송됐다(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TV부문 다큐상과 한국피디협회 PD상 수상). 이어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작문과 화법’에 실리기도 했다. 동물원, 동물보호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생겼고, 2015년 ‘코끼리 주름 펼치다 展’으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파주 헤이리) 순회 전시도 했다. 미술 교육과 함께 진행되는 코끼리투어 프로젝트는 12개 맹학교 순회 투어를 계획중이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
비영리 단체인 ‘우리들의 눈’은 소중한 가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덕에 운영되고 있다. 기업 후원을 중심으로 매월 소정의 금액을 후원하는 사람들, 매년 바자회를 열어 행사 수익금을 기부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20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어려움이 생겼다. 운영비 지원이 줄어들어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 중에 있다. ‘우리들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북촌에 갤러리를 열었는데 임대료 때문에 고민이다.
“맹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술 교육 강사비, 재료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이 개안수술을 하거나 하면 봉사나 후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미술 교육은 제대로 짐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후원이 잘 안 되는 편이죠. 갤러리 장소 또는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선례가 드문, 시각장애인과 미술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활 정보를 주는 복지적 관점이 아닌 예술적 협업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어 오해도 많이 샀고 이해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장애인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척박한 물리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적 해법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런 시도에 즐겁게 사심 없이 동참하는 이들을 만날 때 엄청 신이 나죠.”
‘우리들의 눈’이 창설된 지 20년째인 2016년, 그간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이 자료집을 기점으로 20년간 펼쳐졌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대중들과 만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문화 예술이 소비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들의 눈’은 올해 두 권의 책 출판과 아트상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