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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가요의 번지 없는 주막을 찾아서
- 청중은 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서 박수쳤고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제2인생을 준비하는 은퇴자를 비롯해 교사, 시인, 사진작가 등 모인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도 참 다양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들 앞에 선 강연자는 이동순(李東洵·68)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라는데 옛 대중가요에 심취해 살다 보니 ‘대중음악 연구가’라는 이름표도 늘 따라다닌다.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로맨스그레이 이동순 대표는 강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노래를 직접 들려주며 이해를 돕는다.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일깨우며 살고 있는 이동순 대표의 이야기를 동년기자가 직접 들어봤다. 6월 말 만난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로 풀어보는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야기경영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미래유산과 서울시가 후원한 이 강좌는 서울미래유산(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현재 문화재 등록이 안 된 서울의 근현대 유·무형 유산) 중 하나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이어 역사를 이해하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가수의 인생 스토리는 물론이고 서울의 옛 거리도 슬라이드 사진으로 더해졌다. 이동순 대표가 맛깔나는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청중도 따라 부르면서 시간여행을 하듯 추억 속으로 함께 잠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대중가요 사랑과 전파에 쏟는 열정은 국보급이다. 이동순 대표는 대구 계명문화대학교 평생교육원의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며 힐링하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센터 이름을 지었다. 주 활동무대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지만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대중가요 연구가이기에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모시기 바쁘다. 지금까지 공연을 겸한 강연을 500회 넘게 한 것 같다고. 대중가요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동순 대표는 대학 졸업 무렵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를 쓰는 문인이자 학자로서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를 엮어 ‘백석시전집’(1987)을 발간했으며 ‘백석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인의 삶 외에 특이한 이력 하나가 바로 ‘대중가요 연구가’라는 타이틀이다. 대중가요에 심취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동순 대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산달을 얼마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답니다. 피란도 못 가고 경북 김천 선산 가까이에 있는 초가에서 저를 낳으시곤 10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딸자식 둘은 계모 설움 안 받게 해 달라, 포대에 싸여 윗목에 누워 있는 어린 핏덩이는 곧 나를 따라올 테니 걱정 안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유년 시절이 되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유난히 설움과 눈물이 많았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수성 또한 섬세하고 예민했다. 이 시절의 성격이 시인이 되는 데 일조한 것 같다고 이동순 대표는 회고했다. “전매청 창고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놓고 ‘정오의 희망음악’이라는 방송을 듣곤 하셨어요. 이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그리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같은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어요.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도 저런 목소리였을 거야’라며 상상하곤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빈 종이와 연필을 찾아 미친 듯이 가사를 옮겨 쓰기도 했다. 가사를 적으면 노래가 외워지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이 그를 대중가요에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반 가득한 친구 집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등하교를 같이하던 길목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 방에는 탐나는 예쁜 전축과 함께 음반이 가득했다. 혼자 몸으로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구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전축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 음반이 가득 꽂힌 방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 온종일 노래를 들으며 대학노트 두 권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 가사를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친구 집에서 기록했던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한 480곡쯤 될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 대중가요 연구의 밑천이 되었어요. 가요 평론가로 가요 해설가로 또 노래를 부를 때도 당시 기억을 다 써먹고 있습니다.(웃음)” 학창 시절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잘 부르기까지 하니 섭외 1순위가 당연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등 어디서든 칭찬받는 것이 좋아 능청스럽게 무대에 선 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치 남자 기생이 된 거 같았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임이 노래 부르게 하고 술 한 잔씩 따라주곤 했거든요. 그야말로 노래 사역을 한 셈이었어요.” 꿈을 포기하고 대중가요에 빠져들다 이동순 대표의 젊은 날 꿈은 방송인이었다. 대학 시절 방송반 활동을 쭉 했기에 당연히 기자나 라디오 PD쯤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시험 신원조회에서 친척의 부역 기록이 발견됐다. 연좌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방송인의 꿈은 펼치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누구보다 빨리 국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고서와 음반도 사 모을 수 있었다. 천직처럼 느꼈던 대중가요 연구는 1980년대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살펴보니 일제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이 대부분 가사를 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사가 굉장히 품위가 있고 훌륭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중가요를 ‘뽕짝’ 혹은 ‘딴따라’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모멸적이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딴따라는 두드리고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요.” 당시 대중음악가들이 자해의식, 피해의식 등 상처가 많았다고 이동순 대표는 진단한다. “대중음악가가 술집에서 서양음악을 하는 작곡가나 성악가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서양음악 가들은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음악계에 반상계급 의식이 존재했는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중가요 연구에 심취하다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를 ‘문화적 번지를 잃어버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음악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양음악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가요’야말로 민족 예술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도구인데 ‘왜 이렇게 천대를 받나!’ 하는 생각에 1981년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요에 대한 에세이, 신문 칼럼, 논문을 수시로 썼다. 2001년 월간조선에 1년여 기고했던 옛 가요 관련 에세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요 연구가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갈 즈음, 대구MBC에서 연락이 왔다. 옛 가요를 중심으로 한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원래 방송인이 꿈이었으니까요.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행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방송을 함께할 작가를 구해주기로 했으나 옛 노래에 대해 잘 아는 작가가 없었다. 결국 원고 준비에서부터 내레이션, 노래 선곡까지 이동순 대표 혼자 도맡아야 했다. 1인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주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방송을 했어요. 나들이 갔다가 길이 막힐 때 라디오를 트는 황금시간대였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죠.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송 진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잖아요.” 자부심도 대단했다. 5년 동안 이어온 방송 진행으로 가요 연구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은 전국에서 강연 초청이 물밀듯이 들어와 정신없다고. 청중에게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아코디언도 배웠다.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생겨나 색소폰, 장구는 물론 판소리할 때 쓰는 소리북과 거문고 등도 익혔다. “삶이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질 수 있는 악기가 늘어나니까 아주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걸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강연 반, 공연 반 이렇게 합니다.(웃음)” 악기를 배우고 보니 재능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산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아가 치매 노인들에게 옛 노래를 들려주곤 한다고. “요양원 직원들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치매 노인들을 미리 홀에 모아 앉혀놓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목석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노인들을 위해 연주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10분, 20분이 지나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의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낄 때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떠돌이 유랑가수로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다 노래방 가사책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노래방 가사책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생일대의 결투가 있다. 바로 김지하 시인과의 대중가요 부르기 대결이다. 김지하 시인은 가왕(歌王) 조용필도 꺾은 문단계 노래 지존으로 불렸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댔다. 보다 못한 김지하의 후배가 “청주 시골뜨기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놀리자, 김지하는 “그런 놈은 우리가 꺾어야지” 하면서 대결을 신청했다. 배심원도 배석할 정도로 큰 대결이었다. “같은 노래도 안 되고 상대방이 부른 노래도 부를 수 없고 별별 규칙을 다 만들어 노래 대결을 했습니다. 밤 9시에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도 안 끝났어요. 김지하 씨가 ‘아이고,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처음 보네.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시는 안 할란다!’ 하면서 항복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인 김성동 소설가가 이 일화를 이동순 대표가 1987년에 출간한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발문에 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대결은 이동순 대표가 대중음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이동순 대표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고 잘 부르지만 특히 고운봉의 ‘명동 부르스’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부른다. 자신의 음색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는 역시 이화자의 ‘어머님 전상서’, 백련설의 ‘어머님 사랑’, 현인의 ‘비나리는 고모령’ 등이다. 어머니와 관련한 노래나 글자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학자의 길을 걷지 않고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함경도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악사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옛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떠돌이 유랑 가수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 옛 노래를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대중가요 연구가. 이동순 대표의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모습 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중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이 숨겨져 있다.
- 2018-08-1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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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나른한 주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근대쌈밥과 주꾸미엿장조림
- 주꾸미엿장조림 쫄깃쫄깃하고 야들야들한 주꾸미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재료다. 여기에 물엿과 간장으로 요리하면 달콤 짭조름한 밑반찬이 완성된다. 그야말로 밥도둑이 따로 없다. 비록 손바닥만 한 주꾸미이지만 타우린이 풍부해 피로 해소에 좋다. 재료 주꾸미 10마리, 마늘 10쪽, 청·홍고추 각 1개, 간장 3T(1T: 20㎖, 큰 숟가락 1스푼 정도 분량), 물엿 3T, 청주 2T 만드는 법 1 깨끗이 씻은 주꾸미를 끓는 물에 살짝(약 5초) 데친다. 2 냄비에 간장, 물엿, 청주를 섞어 중불로 끓인다. 3 소스가 바글바글 끓어오르면 마늘과 고추를 넣어 다시 한 번 끓인다. 4 마지막으로 주꾸미를 넣고 섞으며 졸인다. 5 완성된 주꾸미엿장조림을 보기 좋게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근대쌈밥 쌈밥은 만드는 방법도 어렵지 않을 뿐더러 채소를 함께 섭취할 수 있어 건강에도 좋다. 특히 근대의 무기질산염이라는 성분은 혈압을 낮춰주고 몸의 혈액순환을 도와주기 때문에 혈압이 높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이번 레시피에서는 낙지젓을 사용했지만 개인 입맛에 맞게 된장이나 고추장 등을 넣어도 좋다. 재료 근대 잎 12장, 밥 2공기, 낙지젓 2T, 참기름 1T, 깨소금 1T, 홍고추 1개 , 소금 약간 만드는 법 1 소금을 넣고 끓인 물에 근대를 살짝 데친 뒤 찬물에 담근다. 질긴 섬유질 부분(줄기)은 벗겨낸다. 2 밥에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잘 섞는다. 쌈에 들어갈 낙지젓도 잘게 썰어 준비한다. 3 밥을 먹기 좋은 크기로 뭉친 뒤 낙지젓을 올린다. 4 근대 잎으로 밥알이 흩어지지 않도록 돌돌 말아준다. 5 완성된 근대쌈밥 위에 홍고추를 올려 마무리한다. #레시피 #주꾸미엿장조림 #근대쌈밥
- 2018-06-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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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순간에 닥친 슬픈 불행
- 몸이 불편한 나를 돕기 위해 우리 집에 오는 가사 도우미 이야기다. 우리 가족은 그분을 ‘이모’라고 편히 부른다. 이모의 큰아들은 30대 후반 한의사라고 했다. 며느리는 아들과 동갑으로 아주대학 수간호사 출신이었다. 7년 전, 아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쟁 심한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한의원을 열었다.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며느리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갔고 경력이 단절됐다. 두 딸 아이 낳아서 어느 정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나니 며느리는 취업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청주에는 일할 만한 큰 병원이 없었다. 간호사 면허가 아까웠던 며느리는 병원 대신 양호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2년여 피나는 노력 끝에 이모의 며느리가 올 초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소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한다!”며 축하하는 마음으로 환호성 쳤다. 교사 임명장을 받자마자 며느리는 출근할 때 쓰겠다며 빨간 폭스바겐 중고차부터 샀단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차라고 했다. 호사다마라고 며느리가 출근 첫날부터 아프다고 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폐암이었다. 본인이 간호사고 남편은 한의사인데 어떻게 증상을 모를 수가 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들 가족은 청주에 있는 한의원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병원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모는 사정상 우리 집 일을 못 하겠다고 했다. 나 또한 이모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처지다. 남편 혼자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나는 이모가 편한 시간 아무 때나 와달라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새벽이건 밤이건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날 도와주었다. 며칠 전, 이모의 며느리는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발병한 지 3달 만이었다. 암이 증상 없이 오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건강에 관한 한 전문가 부부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니 믿기 어려웠다. 증상을 발견하자마자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는 얘기 또한 들어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젊어서 암세포가 빨리 퍼진 건가? 간호사 출신 양호 선생님, 두 딸아이 엄마의 죽음에 할 말을 잃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못 느꼈다니 말이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 아닌가 싶다.
- 2018-06-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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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복쟁이에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제2 인생을 살다
-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뉴스가 있다.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 이야기다. 젊은 주민이 나이 많은 경비원을 폭행하지를 않나, 경비원을 마치 머슴쯤으로 생각하고 자기 집 허드렛일을 시키지 않나, 주민이 잘못하고도 경비원에게 뒤집어씌우지를 않나.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면 보기도 좋고, 편안하련만.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에게 바짝 긴장해서 거수경례를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경비원이 사는 모습도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세상이 왜 이럴까. 경비원의 삶은 어떤지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지인이 사는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A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50대 중반에 시작한 게 벌써 60대 중반이 됐습니다. 10년이 조금 넘었군요. 처음엔 잠깐 하면서 다른 더 좋은 일을 찾아보려던 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는 부인과 슬하에 1남 1녀를 둔 올해 나이 66세 가장이다. 딸은 결혼했고, 아들과 세 식구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다. 고향은 충북 청주라고 했다. “시골에서 살았는데 어릴 때는 잘 살았습니다. 양반집에 형편도 좋고요. 외가댁이 마을 유지였어요. 제가 마흔 살 때쯤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아기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시대에도 대학 나온 엘리트였고 농협 임원으로 사택에서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 나이 서른아홉 되던 해에 병을 얻는 바람에 더는 직장에 다닐 수 없어 사표를 냈다. 당연히 사택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명을 몰라 용하다는 병원이 있다면 전국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했다. 그 많던 땅도 하나둘씩 팔다 보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나중에는 하나도 안 남더란다. 얘기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이야기를 멈춘다. 경비원 A 씨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다. A 씨는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아버지 일만 생각하면 지금 일처럼 가슴이 미어진다고 한다. 그 옛날이야기가 바로 눈앞에 닥친 현실처럼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삶이 순조롭게 흘러갔다면 A 씨도 의사가 됐을 것이다. 아버지 병은 고치지도 못했고 20년간 병석에 누워 계시다 추석날 임종했다. 그때 A 씨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남은 건 작은 전셋집 하나에 여섯 식구뿐이었다. 5남매 장남인 A 씨는 졸지에 가장이 됐다. 어머니는 양반집 귀한 막내딸로 태어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셨다. 자존심이 강해서, 양반 체면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일찍 시집을 보냈다. A 씨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학 진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담임 선생님 도움으로 겨우 졸업했다. 그해 봄, 온 식구가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로 이사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양복쟁이가 돼 새로운 삶을 꿈꾸다 서울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이모부가 경영하는 소공동의 유명 양복점이었다. 이모부 밑에서 잔심부름과 허드렛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조금씩 익혀 나중에는 디자인, 재단, 재봉까지 정식으로 배우면서 일했다. “월급이라야 그땐 쥐꼬리만큼도 안 됐어요. 그래도 일 다 배우고 나면 기술자로 대우받을 수 있잖아요. 그 희망 하나로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 낼 수 있었어요. 삼십 대 후반에 양복점을 열었어요. 초반에 꽤 괜찮았는데 기성복이 아주 잘 나오다 보니 맞춤 양복이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었습니다. IMF 때문에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니 양복을 맞춰 입던 사람들도 발길을 멈췄어요.” 적자가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 눈도 점점 침침해졌다. 양복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A 씨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평생을 양복쟁이로 살아온 내가 다른 걸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요.” 아파트 경비원 제2 직업이 되었다 양복점 문을 닫고 한 달쯤 쉬고 나니까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쉬어 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일만 하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나중에는 밥도 잘 안 넘어가더라고요. 뭐라도 해야 마음 편할 것 같아서 구인·구직신문을 가져다 열심히 살펴봤습니다.” 아내와 진지하게 의논했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집사람이 ‘지금까지 사장님 소리 듣던 사람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힘들 텐데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겠냐’고 그러더군요. 그런 걸 견뎌낼 수 있을까. 다른 일을 좀 더 찾아보다가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더군요.” 아내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자존심 꾹꾹 눌러 접어 두고 이력서를 들고 가서 경비원 면접을 봤다. “대기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나보다 훨씬 돈 많고, 형편 좋은 사람도 많더군요. 자기 소유 건물이 있어서 임대수입만으로도 생활을 충분한데 집에서 놀면 뭐하냐는 생각이 지원한 사람이 있더군요. 고등학교 교감, 공무원 국장, 육군 장교 출신도 있고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행히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합격해 경비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경비원을 초기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억울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가면 달리할 것도 없으니 그러지도 못했다. 죽을 맛이었다. 경비원 생활하면서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용역회사 횡포 심해요. 간혹 나쁜 주민이 와서 억지 부리고 몰상식하게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할 때 주민들과 마찰이 잦아요.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를 잔뜩 담아 와서 억지 부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경비원이 된 이후 낙엽과 하얀 눈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내가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낙엽이건 눈이건 제가 다 치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맘 놓고 좋아할 수가 없대요. 그런 집사람을 보면, 내 맘도 짠합니다. 저도 물론 낙엽이나 눈을 쓸 때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요. 온몸이 쑤시고 아프죠.” 나의 직업은 경비원, 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 올봄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취직을 못 해 걱정이라는 A 씨. 아들에게 미안해 취직 얘기는 물어보지도 못한다. 그래도 마음은 어서 빨리 아들이 취업했으면 한다고. 서로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고 여유 있는 삶을 꿈꾼다고 했다. “이제 점점 나이도 먹고 힘도 달리고요. 사실 그만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사람과 같이 여행 다니고 느긋하게 살고 싶어요. 맛집도 다니고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를 게 없다고 말이다. 주민이 경비원에게 ‘갑’질을 해대는 뉴스가 가끔 들린다. 주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급료를 지급하면 ‘갑’이 될 수 있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아파트 단지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낯선 자의 방문 제한, 주차문제, 택배 보관, 이사 들고 날 때, 이웃 간의 소음문제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일을 주민 대신하는 이가 경비원이다. 주민 편의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건네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 2018-05-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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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스 경기 대회를 돌아보며
- 살아 온 날 중에 댄스스포츠 경기대회에 출전한 일들은 하나하나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백만 명의 댄스 스포츠 동호인 중에 정식 댄스 스포츠 대회에 선수로 참가해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는 행운아인 셈이다. 처음 댄스 대회에 출전한 것은 댄스에 입문한지 10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동덕여대 총장 배 대회에 라틴 포메이션으로 출전했다. 필자 외에 여러 커플이 한 팀으로 출전했다. 주차장에서 연습을 하는데 필자의 옷소매 단추가 파트너의 가발에 걸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필자가 팔이 짧아 소매 단추가 걸린 것이니 팔을 크고 높게 돌리라는 주의를 받았다. 막상 본 대회에서는 우리 팀 중 가장 키가 큰 커플이 같은 사고를 냈다. 소매 단추가 와이프의 가발에 걸리자 가발을 뽑아 내동이친 사람 때문에 꼴찌를 했다. 퇴근 후 모여 밤늦게 까지 연습을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맥이 풀렸다. 올림픽공원에서 500여명이 모여 하루 종일 벌어진 자이브 페스티벌에서는 뜻밖에도 필자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유력한 우승 후보가 결승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필자가 어부지리로 덕을 봤다. 그날 모인 여러 사람들 중에 단 한 커플 챔피언을 가리는 경쟁이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다음 해에도 이어서 계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자 축하 보다는 질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 모던댄스로 전향했다. 시각장애인을 가르쳐 왈츠 단 종목으로 같이 출전했는데 첫 대회는 동상에 그쳤다. 그러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종목을 늘려 모던 5종목까지 할 수 있게 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파트너가 고령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다시 다른 파트너와 시작해야 했다. 2015년은 필자 댄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해였다. 새로 젊은 장애인 파트너를 만나 가르쳤는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협회에서도 장애인 대회만 뛰기에는 아까우니 일반인 대회까지 해보라고 했다. 청주대회는 새벽 4시에 만나 하루 종일 대회에 출전하고 서울에 와서 허기를 달래니 다음 날 새벽 4시였다. 여수 대회에서는 오전 장애인 대회에 이어 오후 일반인 대회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까지 출전했는데 3부문 모두 결승에 올라 우승, 우승, 준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모던 5종목으로 출전했으니 대단한 체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파트너가 밤에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멋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상경한 것이 아쉽긴 했다. 그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 무대에도 서 봤으나 그게 끝이었다. 코앞의 전국체전에서는 다시 새 파트너와 나갔으나 무관으로 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한산성 배 대회 등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들었다. 장애인들을 인솔하고 참가한 대구 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나고 산중의 정화여상에서 부랴부랴 짐을 꾸려 터미널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안 잡히고 시간이 촉박했다. 지나가던 봉고 차를 세워 모두 태우고 가까스로 버스 시간에 맞췄던 일이 잊을 수 없는 무용담이다. 전국의 여러 도시를 돌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시간이 나서 같이 바닷가를 거닐던 추억, 저녁에 같이 어울리던 추억,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제주대회 때는 당일 경기도 댄스파티 날짜와 겹쳐 댄스파티 참가는 포기했었다. 그러나 주최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랴부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파티에 정시에 참석한 일화도 흐뭇한 추억이다. 댄스 대회 시작은 장애인과 같이 했으나 그 덕분에 일반인 파트너와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울산 대회에 KTX를 타고 당일 아침에 갔을 때는 모던 5종목 타임 테이블이 오전으로 변경되어 출전도 못하고 나머지 종목으로 출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용인대회에서는 오전 예선에 착오로 출전하지도 못했으나, 주최 측의 배려로 결승에 추가로 참가하여 트로피를 건졌다. 대회마다 음악을 트는 순서가 달라 엉뚱한 위치에 서 있다가 당황한 적도 있다. 전국체전에 4번이나 나가 3번 메달을 딴 것도 귀중한 추억이다. 평창 올림픽 폐회식을 보며 대구에서 벌어진 당시 전국 체전 입장식이 떠올랐다. 젊은 선수들과 어울려 스타디움의 수많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지금도 댄스 대회장에 가서 쿵쾅거리는 음악을 들으면 몸이 들썩인다. 플로어를 지날 때면 연미복을 입고 경기를 뛰던 생각이 나서 흥분하게 만든다. 아직 선수 은퇴선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 플로어를 누빌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찬란한 트로피와 메달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 2018-03-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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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던 중 기쁜 소식
- 설날을 맞아 기쁘고 고마운 뉴스가 있어서 같이 기뻐하고 싶어서 올려 본다. 우리 집 도우미 아줌마(이모)의 큰아들이 한의사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개업비가 많이 드는 서울을 떠나 지방 청주에서 한의원 개업을 했다. 개업할 때는 물론 은행의 대출을 받고 곧 갚을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시작했는데 병원 운영이란 것이 임대료니 뭐니 해서 생각같이 쉽지 않아서 대출 이자와 아이 둘의 양육비로 힘들어서 원금은 아직 갚지도 못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며느리는 아주대학 병원에서 간호사를 하다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할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인 병원을 고만두고 청주에 내려가서 6년 동안 아이 둘을 키우며 전업주부를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간호사 면허가 아까워 2년 전부터 교사 임용고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임용 교사는 요새 하도 합격이 어려워서 ‘고등 고시’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다. 생전 공부를 하지 않던 엄마가 시간만 나면 공부를 하니까 아이들이 “엄마는 학교도 안 다니는데 왜 그렇게 공부를하냐”고 불평하면서 옛날처럼 함께 놀아 달라고 떼를 쓰며 울기고 했단다. 애들을 재우고 일어나서 혼자 밤 중에 공부를 하며 혹시라도 또 실패하면 애들에게 창피해서 두 번 째 시험 볼 때는 외할머니 댁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헤치고, 서울 같으면 노량진 학원이라도 다니겠지만 지방에서 혼자서 순전히 독학으로 재작년에 한번 실패하고 올해 재수 끝에 합격을 했는데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며칠 전에 제일 먼저 청주시내 고등학교 양호 교사로 발령이 났다고 한다. 더욱 기쁜 일은 병원 근무의 경력이 인정 되어서 높은 호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취업 절벽에다가 취업청탁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단독으로 시험을 합격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듣던 중 기쁜 소식이다. 더구나 경력 단절 여성이 과거의 근무 경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 남편은 올해의 큰 설날 선물이라며 소 한 마리를 잡아도 모자를 경사라고 더 난리이다. 남편은 어제 예쁜 꽃다발에 를 쓰고 금일봉도 함께 넣어 배달 시켰다. 남편이 이렇게 이모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남편도 나이가 들어가서 혼자 살림하기 힘든데, 이모의 남편이 전부터 우리 집에 오는 일을 그만두고 쉬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부인이 힘든 것을 걱정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로서는 참으로 난리가 날 일이다. 이모는 우리 집 오기 전까지 어느 시각 장애인의 도우미를 하였는데 그 때 그 시각 장애인으로부터 틈틈이 마사지를 배웠고 요즘 매일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필자를 위해 이것을 안 하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 지경이다. 이것이 이모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집에 계속 와야 하는 이유이다.
- 2018-02-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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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산골로 귀촌한 윤정현 신부, 욕심일랑 산 아래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2-0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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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띠 남편과 사는 아내가 말하다, ‘58’의 일그러진 영웅들
-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 2018-01-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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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도 “사랑해요, 고마워요”라는 말을 듣고 싶다
- K는 기계 기술자이면서 시인이다. 기술자가 시를 쓴다는 것도 드문 일인데 그동안 시집도 두 권이나 펴냈다. 그는 젊어서부터 열사의 나라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지역 건설 현장을 두루 경험한 산업 전사였다.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큰소리를 치고 대우도 받으며 해외생활을 마쳤다. 그의 시집을 선물받아 읽어봤다. 이국의 색다른 풍경과 고국의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시가 많았다. K와 주말에 가벼운 등산을 하고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아내와 황혼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K의 부부금슬은 그가 쓴 시집에도 잘 나타나 있고, 평소 부부사이를 봤을 때도 전혀 이상함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K의 집은 서울 송파다. 청주 현장에서 근무할 때 그는 금요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 일요일 오후에 내려오는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그의 아내는 끼니마다 먹을 국거리와 반찬을 손에 들려 보냈다. 주중 하루는 아내가 직접 청주로 내려와 청소도 해주고 올라갔다. K도 주위의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고 거기에 감성을 살린 글을 몇 줄 적어 매일 아내에게 보내주곤 했다. 잉꼬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혼을 결심한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주말이면 함께 골프를 치던 K의 아내의 어께가 고장이 났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상태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수술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결국 병을 더 키웠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상태가 심각해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K는 사표를 던지고 아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고 오늘 필자와 만났다. 아내가 한쪽 팔을 거의 못 쓰니 머리도 감겨줘야 하고 음식도 K가 다 해야 했다. K로서는 최선을 다해 살림도 하고 아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내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내의 잔소리는 늘어갔고 K가 견디다 못해 어느 날 한마디 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타박만 하느냐?” 그러자 아내도 지지 않고 볼멘소리를 하더란다. “나는 당신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아이들 키우며 이보다 더한 고생을 수없이 했어요.” 결국 K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그 뜨거운 모래바람, 햇볕 속에서 고생을 엄청 했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나에 대해 불만이 많다면 우리 헤어집시다. 당신 팔은 내가 어떻게 하든 고쳐주리다. 그리고 내 재산 절반을 딱 잘라서 주겠소. 그 돈이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아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모습을 보면 아내도 내심 황혼이혼을 꿈꾸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이제 갈라서야겠다고 말한다. 그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등산 간 사람이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K는 서둘러서 일어났다. 그렇다! 남자도 힘들 때는 위로를 받고 싶고 “고마워요, 감사해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 2018-01-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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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처창업 페스티벌
- 올해의 마지막 달력을 한 장 남긴 12월의 첫날 국내 최대 벤처창업 축제에 다녀왔다. 창업이라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식사업으로 생겼다 하면 얼마 안 가 간판이 바뀌고 가게가 없어지는 일을 많이 보아왔는데 이번 전시장에 와보니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이렇게 많다는데 놀라기도 했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홍종학)가 주최하는 벤처창업 페스티벌이 11월 30일부터 3일간 강남 코엑스 전시 홀에서 열렸는데 필자는 둘째 날인 12월 1일에 참석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매우 다양한 수많은 벤처기업의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창업자-투자자-미디어 매칭, 글로벌 컨퍼런스, 네트워킹 파티, 토크 콘서트, 제품전시, 데모데이, BJ 리뷰 등이 있고 벤처 창업기업,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예비창업자 및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 참여대상이다. 생소한 용어도 많았는데 스타트업은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벤처기업이고 엑셀러레이터는 창업기업을 발굴하고 투자해서 키우는 스타트업에 초기자금과 멘토링 등을 제공하는 단체를 말한다. ‘혁신성장, 스타트업 생태계와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이번 페스티벌의 목적은 창업자,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등 창업생태계 구성원 간 협력의 장을 통해 창업기업의 글로벌 성장을 촉진하는 데 있다. 넓은 전시장은 글로벌 창업생태계 교류를 위한 B홀의 유료행사와 벤처창업 붐 확산을 위한 C홀의 무료행사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었다. 다양한 벤처기업의 부스를 돌아보니 예비창업자나 초기, 도약창업자, 그리고 창업에 관심 있는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할 만한 프로그램이 많은 것 같았다. 필자는 먼저 세 곳의 안내받은 벤처 부스를 찾았는데 건국대학교 학생이 창업한 스타트업 ‘팜스킨’이 눈에 띄었다. 젖소의 초유를 이용하는 독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초유를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다가 피부에 좋은 효과를 주는데 착안하여 마스크팩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젖소가 생산하는 초유의 아주 작은 양만 송아지가 먹고 나머지는 버려지는데 초유에는 많은 천연 생체 활성 성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개발기술이 없어 그동안은 폐기되었다. 이에 팜스킨에서는 기술을 인정받아 도전 K스타트업 2017 특별상을 받았다. 청주의 청원 목장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여성들의 필수품인 질 좋은 마스크 팩을 생산하는데 다른 제품과의 차별점은 마스크 팩 후 바르는 영양 크림이 같이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척 관심이 가는 제품을 생산하는 팜스킨 스타트업이다. 두 번째 방문한 곳은 2000년에 개업했다가 2004년에 폐업했었다는데 문제점을 보완하여 재도전해서 성공한 업체이다. 벡터 방식의 인쇄기술을 PDF 그대로 전자책을 제작할 수 있으며 사진도 확대 수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음원을 넣을 수도 있고 읽어주기도 가능하며 현재는 교육 쪽으로만 사용하지만, 일반 전자 인쇄 등으로 확대할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세 번째 취재한 곳은 노즈클린이라는 투명 코 마스크를 생산하는 곳이다. 실은 필자도 황사나 미세먼지 방지를 위해 마스크가 필요한 점은 잘 알고 있지만, 안경을 착용하는 입장에서 마스크 쓰는 게 매우 불편해 착용하지 않았다. 이 벤처창업가는 이점에 착안하여 콧속에 삽입하는 코 마스크를 개발했다는데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샘플로 하나씩 받아 착용해 보니 피톤치드의 상쾌한 향이 코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청량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로 속에 한지 필터가 들어 있다는데 콧속에 넣었지만, 이물감도 없고 이대로 미세먼지나 나쁜 냄새까지 걸러준다니 기존의 쓰는 마스크보다 참으로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넓은 전시 홀의 각 부스마다 자신들만의 좋은 아이디어로 만든 제품을 홍보하려는 벤처 창업업체가 많았는데 이들 모두 성공해서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수많은 중소 벤처기업의 파이팅을 응원한다.
- 2017-12-14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