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반세기가 지나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 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루 꽃이 지네 루루루루루 가을이 지네
‘날이 갈수록’이다. 이 노래를 부른 기라성 같은 가수는 많은데 정작 작곡·작사자는 잘 모른다. 어떤 이는 ‘몇 미터 앞에 두고’, ‘안돼요 안돼’ 등을 부른 트로트 가수 김상배의 자작곡으로 알고 있다. 가수 김상배가 ‘가요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TV 화면 밑으로 ‘작곡·작사·노래 김상배’라는 자막이 뜨기 때문이다.
웃픈 현실이다. 이 노래의 원작자인 김상배 씨가 50여 년 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그동안 그가 얼굴 없는 작사·작곡가로 발표한 노래는 70여 곡이나 된다. 공전의 히트곡 ‘날이 갈수록’은 1971년 가을에 만들어졌다. 대학교 2년을 마치고 입대한 김상배 씨가 휴가를 얻어 오랜만에 방문한 교정에서 뒹구는 낙엽을 보며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다.
이 노래는 신촌 대학가를 중심으로 운동가요처럼 불리다가 마침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던 故 하길종 감독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화 주제곡을 찾지 못하고 있던 하 감독은 대학가에서 불리던 이 노래를 듣고 원작자 김상배 씨를 수소문해 만났다.
이후 ‘날이 갈수록’이 ‘바보들의 행진’ 주제곡으로 선정되면서 김상배 씨는 영화 각색에도 참여하고 음반 크레디트에도 작사·작곡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웠지. 근데 음악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집에 있던 기타며 피아노를 다 때려 부수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학은 그나마 국문학과로 입학한 거야.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희곡 쓰고 연출한다며 또 난리치고 다녔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전공으로 택했지만 그는 몰래 음대 작곡학과 강좌를 들었다. 그리고 이때 한 학기 동안 도강한 ‘작곡에 대한 이해’를 밑천 삼아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작곡에 대한 강의를 한 교수도 그가 도강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뭐라 하더니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포기하고 오히려 그의 열정을 칭찬했더란다.
집안의 반대로 그의 음악적 재능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지만 음악적 재능 못지않은 문학적 능력만큼은 제대로 발휘했다. 대학생활 내내 희곡 창작에 빠져 지낼 만큼 연극에 미쳐 살았다. 학교 수업 때문이라고 하면 아버지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했다. 그저 연극에 빠져 사는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것밖에 없었다.
“국문학과를 다니면서 연극반 동아리 활동을 했어. 희곡 쓰고 연출하고… 당시 동아리 후배였던 마광수도 함께 활동했지. 1974년 가을이었어. 내가 ‘어느 애꾸의 죽음’이라는 창작극을 쓰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어. 공연 하루 전날 갑자기 서대문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연극반 학생들을 끌고 간 거야.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아니 그럼 사람이 안 죽어? 신이야? 그냥 그런 차원에서 말을 한 건데 우리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하던 작품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문학적 상상력과 음악적 재능을 뽐내던 청년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다. 동네 저잣거리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안주 삼아 통치자에 대해 비판 한마디라도 하면 긴급조치 아래 구속 수감되던 서슬 퍼런 통치의 시대였다.
유명 대학교의 연극 공연 등 주요 행사는 보안과 형사들이 눈을 치켜뜨고 감시를 했다. 희곡 작가였던 김상배 씨도 당연히 사찰 대상이었다. 그때 경찰서에 잡혀간 그는 감금된 상태에서 죽도록 매를 맞으며 회유당했고 그렇게 일주일을 넘긴 뒤 각서를 쓰고 겨우 나왔다. 각서 내용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다시는 희곡 나부랭이 같은 글을 쓰지 않겠다. 둘째, 이곳에서 고문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음악과 문학을 아우르는 재능을 갖고 있던 청년 김상배는 그렇게 스스로 가슴속에 대못을 쳤다. 당연히 그 해 연세대학교 연극반 공연은 없었다.
긴급조치까지 내리며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시절, 그 정도의 수난을 당하고 풀려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애달프게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금융권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빼내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부탁을 했단다.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풀려난 지 한참 지나서였다.
청년 김상배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시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집에서 그토록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직장에 입사했다. 대학 동기였던 정몽헌 씨가 같이 일해보자며 현대그룹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 이유도 있었다.
현대그룹에 입사한 그는 조선, 건설 등의 분야에서 현대맨으로 20년을 살았다. 더 이상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낼 일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그래도 틈틈이 곡을 써서 음반을 내기도 하고 가수들에게도 줬다.
정주영 회장과의 에피소드
현대그룹에서 일할 때 정주영 회장과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느 날 정 회장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고 한다. 그가 회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정 회장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너 요즘 돈이 궁하냐?” 하며 크게 꾸짖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전후사정은 이랬다. 정 회장이 어느 날 한 술집 입구에 ‘날이 갈수록’ 김상배 출연이라는 홍보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는 걸 보고는 그를 불러 밤무대에 나가지 말라고 야단을 쳤던 것이다. 그도 깜짝 놀라 술집을 찾아가 “‘날이 갈수록’ 원작자는 나다. 나는 가수 김상배가 아니니 현수막을 내려 달라.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라고 사정을 하고서야 플래카드를 철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 회장에게 야단을 맞아서가 아니라 현대에서 일할 때는 도무지 틈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속에 불타오르는 창작욕은 어찌할 수 없어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친 날이면 기타를 붙잡고 코드를 잡으며 간간이 노래를 만들었다.
‘창작’만이 나의 오아시스였다
1978년에 가수 이동원이 부른 ‘가버린 날들’, 1981년 대학가요제에서 단국대학교 밴드 스물하나가 불렀던 ‘스물한 살의 비망록’은 그가 회사생활 틈틈이 작업했던 곡들이다. 특히 스물하나가 불렀던 노래는 대학가요제 입상을 거쳐 가수 이택림도 불렀고, 2003년에는 자전거를 탄 풍경이 리메이크하는 등 가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의 반대로 소위 딴따라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가끔 곡을 만들어 가수들에게 줬다. 그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녹음실에서 음반작업을 할 때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창작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곤 했다.
‘날이 갈수록’이라는 주옥같은 곡을 만든 그가 문화계나 방송계에서 일한 게 아니라 현대그룹에서 샐러리맨의 꽃인 임원자리에까지 앉았다니 약간의 배신감(?)이 든다. 또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의 불꽃은 대단했구나 하는 경외감도 밀려온다.
‘날이 갈수록’은 어떤 과정 속에서 탄생한 걸까?
“이 노래는 내 첫 사랑에 대한 자기고백 같은 노래야. 대학교 2년 다니고 휴학한 후 군대를 갔어. 마음속엔 요즘 말로 썸 탔던 여학생을 품고 있었지. 그런데 휴가를 나와 보니 그 여학생이 다른 남학생과 사귀고 있더라고. 허탈했지. 마침 그때가 가을이었는데 연세대 백양로에 흩어진 낙엽처럼 인생이 그리 허무할 수 없더군. 시간이 지나면 이 풋풋한 첫사랑도 잊힐 테고,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일만 하다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려나 하는 생각들? 그게 배경이 됐지.”
1995년 현대그룹에서 이사로 퇴직한 후에는 콘텐츠 비즈니스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동안 이전만큼 창작에 대한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비즈니스로 접근하니까 더 안 써지는 거야. 안 되겠다 싶어서 일을 접고 창작자로 살겠다고 다짐했어.”
2012년 그는 다시 창작에 매달렸고 신인상 공모전에도 도전했다. 몇 차례의 도전 끝에 2015년 종합예술잡지인 한국문학예술이 공모한 시나리오 부문에 ‘까떼리나’(나비의 꿈)가 당선됐다.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그는 당선소감에 “40년 공백을 깨고 태어난 졸작을 뽑아주시어 인생 이모작 등단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1974년 타의에 의해 발표되지 못했던 ‘어느 애꾸의 죽음’ 이후 절필을 선언하고 40년 만에 다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창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창작인으로 돌아와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김상배 씨. 한때 좌절됐던 꿈을 다시 찾기 위해 72세 나이에 열정을 불태우는 그의 모습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수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김상배 씨는 요즘…
김상배 씨는 최근 앨범 녹음을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후배들의 재능이 아까워 더 늦기 전에 함께 앨범 작업을 해보려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1980년도에 포크 남성듀엣으로 활동했던 ‘나이테’ 멤버 구명회 씨와 박시몬 씨가 그들이다.
‘나이테’는 1980년에 가수 윤형주의 기획으로 앨범을 발표한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가끔 LP판 수집가들에 의해 두 사람이 소환되기도 하는데 ‘나이테’는 현재 발매 앨범만 등록돼 있고 가수 이름은 없어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40여 년 만에 다시 기타를 들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거주하다가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다.
미국에서도 두 사람은 버지니아 주 근처에서 가까이 거주하며 함께 찬양 사역을 하는 등 피우지 못한 음악의 꿈을 잊지 않았다. 최근 김상배 씨가 작사·작곡한 ‘망각’과 ‘인사동 그림자’ 등의 노래로 앨범 작업을 하고 있다. ‘나이테’ 멤버인 구명회 씨는 개그맨 故 구봉서 씨의 큰아들이다.
구명회 씨 역시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 반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공통점 때문일까? 김상배 씨와 구명회 씨는 오랜 시간 ‘형 먼저 아우 먼저’를 외치며 각별하게 지낸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앨범에 올드 팬들의 격려가 필요해 보인다.
지난 5월 마지막 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료들과 제주 여행을 했다. 미션이 있는 워크숍 형식의 여행이었다. 첫째 날 조별 미션을 수행하고 둘째 날은 다시 조를 바꿔 자유여행을 했다. 자유여행은 각자 가고 싶은 곳을 확인해 동선이 비슷한 두어 군데를 묶기로 했다. 조 팀원 중 한 사람이 비자림에 한 번도 안 가봤다며 꼭 넣어달라고 한다. 비자림이야 자주 가도 좋은 곳이니 안 될 이유가 없다.
제주 관광지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장소가 바로 비자림이다.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 보호하고 44만8165㎡의 면적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빼곡하게 자라는 비자림은 사려니숲길과 함께 제주의 걷고 싶은 길로 손꼽힌다.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높이 7m 이상의 비자나무들이 군집해 있다.
재질이 좋은 비자나무는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비자열매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또한 비자림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피로회복을 도와 인체의 리듬을 되찾게 해주는 자연 건강 휴양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비자림 주변으로 월랑봉,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있어 가벼운 등산이나 운동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동료들과 찾은 비자림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사람이 많다. 키 큰 나무들이 사방을 가린 초록의 숲을 걸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을까 잠시 유혹을 느꼈다. 여기저기 추억을 가두려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댄다. 처음 왔다는 조 팀원도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두 해 전 여름, 친구와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한여름 비자림에서 만났던 청춘들이 생각났다.
스물 초반 여학생으로 보이는 그녀들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얀 챙 모자에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역시 비슷하게 생긴 모자에 디자인만 다른 똑같은 색 원피스를 입은 또 다른 그녀가 서로 포즈를 잡고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우리는 만났다. 사실 만났다기보다 초록의 숲에서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들이 너무 화사해서 친구와 내가 걸음을 멈췄다. 사진을 찍어 확인하면서 깔깔대는 그녀들이 눈부셔 멈추고 바라본 것이다.
"사진 찍어줄까요?"
그녀들이 셀카봉을 들고 이리저리 포즈를 잡을 때 내가 물었다. 그들은 "감사합니다" 하면서 또다시 깔깔 웃었다.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웃을 나이지' 우리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녀들과 헤어져 비자림을 걷고 주차장으로 막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흰 원피스는 편한 반바지로, 챙 모자는 야구모자로 바뀌어 있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아니었으면 몰라볼 뻔했다. 그녀들은 비자림에서 기억에 남을 사진을 찍으려고 소품을 미리 챙겨온 거라고 했다. '그랬구나.' 조금 전 초록 숲을 배경으로 서 있던 그들이 꿈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도 나중에 원피스 챙겨 사진 찍으러 오자"
친구가 하는 말에 "그전에 살을 빼야 하지 않을까?" 했더니 그녀는 "어우 야~"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날 우리는 한여름 태양 아래 다시는 갈 수 없는 청춘을 애잔해하며 낄낄거렸다. 우리 앞에서 깔깔거리던 그녀들의 청춘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흰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그들의 젊음을 훔치고 싶었던 것 같다.
흰 원피스가 펄럭이던 곳에서 동료들과 사진을 찍었다. 초록을 품고 높이 솟은 비자나무를 배경으로 어색한 포즈를 지으며. 생각난 김에 친구에게 전화해볼까?
"희정아, 흰 원피스 입고 비자림 가자"
방구석 라이브 공연이 있는 서울시50+재단의 서부캠퍼스를 찾았다. 방구석 라이브는 서부캠퍼스의 야심찬 힐링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음악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공연 영상을 찍고 편집해 서부캠퍼스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리고 있다. 50+세대의 공연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활동이 주춤한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서부캠퍼스 1층 모두의 카페에 도착하니 1부 공연을 하게 될 '퍼커션 떼아모' 팀의 준비가 한창이다. 팀원 중 청일점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 빨간색의 단체 티셔츠를 입었다. 50+세대는 분명한데 티셔츠 효과 때문인지 나이가 도통 가늠이 안 된다.
연주곡은 '베사메무쵸'와 장윤정의 '사랑아'다. 퍼커션 공연을 마치고 둘러앉은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퍼커션은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모든 리듬악기를 지칭한다. 난타를 떠올리면 된다. 스페인어 떼아모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혹은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퍼커션 너를 사랑해'다. 가까이 앉은 회원 몇 분에게 모임을 시작한 계기와 전후로 달라진 점을 들어봤다.
"2015년 12월에 정년퇴직하고 지내던 차에 2016년 서울시 도심권 50+센터에 '청춘 칸타빌레'라는 음악교실이 열린 걸 알게 됐다. 평소 남미 라틴음악에 관심이 많아 합류했는데 지금까지 ‘카혼’을 두드리며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 바쁘게 사회생활만 하다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악기를 배우면서 인생 이모작을 실현하고 있다. 퇴직하면 사회에 봉사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공헌 활동을 해보고 싶었는데 실현하게 돼 즐겁고 행복하다. 기회가 주어지면 ‘카혼’의 본고장인 남미에 가서 버스킹도 하고 싶다. 나의 버킷리스트다. 제2의 인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악기 배우기다. 특히 퍼커션은 우리 같은 동년배가 하기에 너무 좋은 악기다. 우선 손으로 두드리는 악기라 치매예방에 좋다. 악기를 배우다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퍼커션은 익히기도 쉽다. 신나게 두드리다 보면 모두 친구가 된다. 50+세대에게 퍼커션을 꼭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퍼커션이 아니더라도 뭐든 배워서 재능을 기부하면 여생이 즐거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장기숙
"떼아모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동대문 DDP 행사 때였다. 함께 활동하는 날꽃밴드 공연을 위해 행사장에서 기다리던 중 중장년층으로 보이는 분들이 음악에 맞춰 북을 두드리며 신나게 공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떼아모였다. '저거다!' 그동안 날꽃밴드 파트가 코러스여서 악기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숙제를 푼 것 같았다. 멤버들과 '탑골공원 버스킹', '광화문 아리랑 페스티벌' 등 공연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나만의 인생 이모작을 실현하는 중이다. 앞으론 퍼커션을 통해 소외계층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아가 강의도 하고 싶다. 중장년뿐 아니라 노년층에게도 흥을 드리는 악기 연주자가 되도록 공부하는 중이다. 재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몰두하면 내 것이 된다고 믿는다. 몰입해서 시간과 공간에 빠져보는 악기 연주를 50+세대에게 추천한다."-유영남(떼아모의 청일점)
"떼아모와 동행한 지 5년. 퇴직 후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다. 도심권 50+센터 청춘 칸타빌레 강좌가 열렸을 때 지원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왔는데 어느 사이 몸이 반응하고 익숙해지는 걸 느낀다."- 송영옥
중년 이후 악기를 배우고 활동을 지속하는 게 쉽지는 않다. '퍼커션 떼아모' 회원들은 5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요즘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재능기부까지 하고 있어 회원들에게 삶의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나이가 들면 꼭 필요한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즘 새롭게 추가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반려 악기다.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틀면 누구나 반려 악기와 함께 멋진 인생 이모작을 시작할 수 있다. 서울시 50+재단이 운영하는 서부캠퍼스와 중부캠퍼스, 남부캠퍼스의 문을 두드려보자. 이밖에도 다양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서울시평생학습포털도 추천한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대한민국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건배사를 외친다. 함께 외치며 안면을 익히고, 친목을 다지고, 우의를 키운다. 요즘은 연말연시도 아닌 데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행사와 회식이 줄어 건배사 외칠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새것은 나온다. 만들 건 만들어야 되나보다.
얼마 전까지 “나라도”를 선창하면 “잘하자”로 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꼴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건배사일 것이다. 내가 가장 최근에 들은 것은 ‘정경심’이다.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석방된 이후에 나온 거 같은데, 말이 재미있다. “정, 정치 이야기(정경심 이야기?) 하지 말고, 경, 경제문제 따지지 말고, 심, 심각한 이야기 하지 말고” 이런 뜻이다. “정경심!” 하고 외치면 “아멘!”으로 받는다. “아, 멘트 좋다!” 그 말이다. “멘트 좋다!”는 “멘트 좋~고!”일 수도 있고, “멘트 쥑이네”일 수도 있고, “멘트 끝내준다”일 수도 있지.
모임에서건 카톡방에서건 정치나 종교 이야기 꺼내면 골 아파진다. 최근엔 ‘4·15 부정선거’ 주장을 퍼뜨리거나 윤미향 사건을 계기로 친일과 토착왜구를 시비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로 피곤하고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딴 이야기 하지 말자고 나온 게 ‘정경심’이다. 정말 필요한 건배사 아닌가. 애들 울거나 떼쓸 때 “뚝!” 하고 말리는 것 같은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다.
건배사는 원래 중·노년의 몫이다. 젊은이들은 이런 거 말고도 할 일과 놀 거리가 많은데 굳이 건배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시니어들이 즐기는 건배사는 나이야 가라, 백두산(백 살까지 두 다리로 산에 가자),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자), 이기자(이런 기회를 자주 갖자), 이런 것들이다. 늙기 싫고 병들어 아프기 싫은 마음이 담긴 건데, 이런 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삶의 진도가 늦는 걸 반성하라.
시니어들이 모이면 뒤풀이와 건배사까지 해야 모임이 끝난다. 코로나 이전 상황이겠지만 어떤 사람이 지하철 풍경을 써놓은 인터넷 글이 재미있다. “산악동호회 한 열댓 명 탔는데, 동호회 회장이 산만 타고 뒤풀이 빠짐. 어떤 아줌마가 회장에게 ‘위하여 해야지’라며 스피커폰으로 전화기 켜놓고 ‘위하여 좀 혀~’ 하자 그 사람이 ‘나 지금 지하철이라 힘들어’ 그랬더니 열댓 명이 몽땅 ‘지하철이라 힘들어~!’ 하고 소리침. ㅋㅋㅋ”
시니어들이 애용하는 건배사엔 ‘노발대발’도 있다. “노인이 발기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말인데, “노발!” 하고 외치면 “대발!”로 받는다. 노인은 발광하거나 발작하거나 발발거리며 (남의) 발목이나 걸지 말고 발기나 잘되면 제일 좋겠지. “노인이 발전해야…”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역시 발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말로 보인다.
그런데,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에 이 건배사가 등장했다. 봉하마을 추도식이 끝난 뒤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여권 인사들과 오찬을 할 때 “노발대발”을 외쳤다고 한다. 앞에서 설명한 그 노발대발이 아니라 “노무현 재단이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뜻이었다. 본인이 주도한 건지 참석자들과 함께 외친 것뿐인데 그렇게 보도된 건지는 모르겠다. 노발대발 건배사는 같은 날 다른 지역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식에서도 나왔다. 여기서는 ‘노’가 ‘노무현 재단’이 아니라 ‘노무현 정신’이었다고 한다.
노발대발은 노동자단체도 많이 쓴다. “노동자가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 또는 “노총이 발전해야 대통령도 발전한다.” 이런 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0월 24일 노동계 대표단을 청와대로 초청한 만찬행사에서도 이 건배사가 나왔다. ‘노발대발’은 한국노총이 제작하는 노동 전문 팟캐스트 방송의 이름이기도 하다. ‘노동자 편파방송’이라는 슬로건 아래, ‘갑에 치이고 삶에 지친 2천만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방송’을 표방하고 있다.
노발대발로 다른 말은 없을까? 인터넷 뒤져보니 이렇게 변형해서 외친 사람들도 있긴 있더라. “노가리만 풀지 말고/발바닥 불 나게 일해(뛰어)/대한민국/발전시키자”, “노력하고 노력하라/ 발바닥도 건강하게/ 대단한 성과와/ 발전을 위하여.” 그러나 좀 억지스럽고 어색한 건 사실이다.
노발대발은 원래 성이 나서 화를 내고 또 크게 낸다는 반복 표현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름에 술을 대하다’[夏日對酒]라는 시에는 “자식 놈이 그제야 노발대발하면서”[兒乃勃發怒]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발발노(勃發怒)가 곧 노발대발이다. 활발(活潑)보다 활발발(活潑潑)이 더 생동하는 것처럼 노발대발보다 더 생생한 표현 같다. ‘勃’은 노할 발, 발끈할 발, 일어날 발 자다.
노발대발을 바꾸어 대발노발이라고 하면 어찌 될까? 대한민국이 발전해야 노(노무현 재단이든 노동자든 노숙자든 노래방이든 노인이든)가 발전한다는 뜻이 되겠지. 케네디가 취임연설에서 그랬잖아?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그가 처음 창안해낸 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길이 기억되는 역사적 명연설이다. 바로 그런 것.
하지만 즐겁자고 외치는 건배사를 가지고 이것저것 따질 거 있나? 코미디하자는데 왜 다큐를 찍느냐고 시비 거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끝~!
>
딸과 함께 읽고 싶은 도서들 - by 한성희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찰스 핸디 저)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각계각층 60대 여성 29명의 이야기. ‘요즘 60대의 초상’을 콘셉트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경영철학자인 찰스 핸디가 글을 엮고,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핸디가 사진을 찍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저)
인간의 고독을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글로 담아낸 시대의 지성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사람과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 등을 비롯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 과학자들과의 우정 등을 들려준다.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20세기 청춘들을 열광하게 한 성장소설. 사립학교의 문제아인 주인공이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화를 그린다. 10대들의 언어를 고스란히 살린 문장과 기성세대를 향한 예리한 성찰이 돋보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호모 사피엔스부터 인공지능까지, 방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생물학, 경제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시원부터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인간의 끊임없는 진화를 조명한다.
시집 ‘묵호’를 읽고 막걸리를 안 마실 수 없다는 선배의 SNS 글을 보고, 기억 속 묵호를 떠올렸다. 묵호등대마을의 비좁고 가파른 골목 끝에서 마주했던 검푸른 바다, 슬레이트집 담벼락에 그려진 소박한 벽화들, 묵호등대 턱밑 민박집에서 창문으로 감상했던 묵호의 밤 풍경을. 유난히 묵호에 끌리는 건, 왜일까. 좋은 건 이유가 없다더니 묵호가 그렇다.
논골담길 코스
묵호역▶ 대우칼국수▶ 묵호등대마을과 묵호등대▶ 묵호자연산활어센터▶ 묵호항▶ 묵호역
묵호가 한때는 말이야
올 3월부터 KTX가 동해 묵호역과 동해역에 정차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2시간 30분쯤 뒤면 동해에 닿는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훌쩍 다녀올 수 있게 됐다.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 아침, 묵호행 첫 열차를 탔다. 열차 타고 동해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나처럼 동해 여행의 시작은 묵호등대마을. 묵호역에서 묵호등대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굳이 걷는 이유는 칼칼한 장칼국수를 먹고 싶어서다. 묵호역에서 묵호항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한자리에서 60년 동안 장사한 장칼국수집이 나온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했다. 백발의 노부부가 주인이고, 딸 내외가 연로한 부모를 돕고 있다.
장칼국수는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끓인 음식이다. 국물이 어죽처럼 걸쭉하다. 먹으면 속이 확 풀려 해장 칼국수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주인장에게 맛 비결을 물으니 “멸치와 버섯으로 국물을 내는데, 고추장 맛이 가장 중요해요. 감자를 함께 넣고 끓여 구수하고요. 감자를 채 썰어 넣은 장칼국수는 흉내만 낸 거예요” 한다. 오래전 뱃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장칼국수가 요즘 사람들 입에도 맞는지,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에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장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묵호항과 활어센터를 지나 묵호등대마을로 향한다. 이 마을은 묵호등대가 세워진 산비탈에 형성돼 있다. 묵호항을 터전으로 살았던 이들의 거주지였다. 1936년 개항한 묵호항은 1940년대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해 1970년대까지 무연탄과 석탄, 수산물을 출하하는 항구로 전성기를 누렸다. 매일 밤 항구는 오징어잡이 배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다고 한다. 길거리 개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온다.
묵호항에 일거리가 넘치자 전국에서 인부들이 몰려와 산비탈에 슬레이트집을 짓고 정착했다. 아랫마을에는 주로 뱃사람들이, 윗마을에는 명태 덕장 인부들이 살았다. 덕장 인부들은 묵호항에 들어온 명태를 지게에 올려 산꼭대기 덕장으로 날랐다. 여자들은 빨간 고무 대야에 생선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었다. 지게와 고무 대야에서 줄줄 흘러내린 물 때문에 흙길은 논길처럼 질척거렸다. 그래서 ‘논골’이라 불렸다. “마누라와 남편은 없어도 살지만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장화는 생필품이었다.
묵호등대마을의 추억을 만나다
불꽃처럼 호황을 누렸던 묵호항은 1980년대 동해항이 개항하면서 쇠락했다. 젊은이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묵호를 떠났다. 묵호 인구가 절반 이상 줄었고 빈집도 늘었다. 현재 거주자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스러져가던 묵호등대마을에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10년 마을 골목길에 묵호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지면서부터다. 회색빛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이 벽화 골목을 ‘논골담길’이라 이름 붙였다. 논골담길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묵호를 향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절절한 연시이자 묵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추억의 사진첩이다. 비탈길을 오르며 묵호의 옛 사진첩을 넘겨본다. 고된 뱃일을 마친 일꾼들이 매일 들러 막걸리와 노가리 안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대폿집, 묵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오징어와 명태와 문어, 생필품이었던 장화, 코흘리개 아이들이 군침을 흘리며 넘겨다보았을 구멍가게, 명태 지게를 진 할아버지 그림에서 묵호의 청춘을 만난다.
벽화가 낡으면 새로 그린다. 그림이 바뀔 때마다 전망 좋은 언덕에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펜션도 들어선다. 가끔 옛 그림과 누군가 담벼락에 써놓은 시가 그립다. “이제는 보라색 조가비랑 내 아버지 젊은 시절 팔뚝처럼 철철 힘이 넘치던 물고기랑 먹빛 눈물점이 슬펐던 목포집 주모랑…. 열이, 철이 내 친구들과 내 누이도 모두 떠나고 기억의 눅눅한 막국수 같은 호수만 남았네. 기억하리라! 정든 墨湖!” 이 시 때문에 묵호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논골담길은 비좁고 가파르다. 시멘트 바닥은 굴 껍데기처럼 거칠다. 대문 없는 슬레이트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대문은 없어도 마당에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건조대 하나쯤은 두고 산다. 창호지를 바른 나무 창살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집도 있다. 이 문을 열면 바로 바다와 마주한다. 묵호등대마을의 집들은 허름해도 전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전망 맛집 논골카페와 묵호태
논골담길 꼭대기에 있는 묵호등대의 전망대에 오르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랭이논 같은 산비탈에 빨강, 파랑, 노랑 양철지붕들이 갯바위의 따개비처럼 모여 있다. 멀리로는 두타산과 청옥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파견된 부사가 이곳 바다 물빛이 검고, 물새도 검다면서 마을 이름을 묵호라 지었다고 한다. 깊고 깊은 바다는 정말 칠흑 같다.
묵호등대 아래, 깎아지른 비탈을 ‘바람의 언덕’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전망 데크도 들어서 있다. 전망 데크에 서면 묵호항과 묵호등대마을 전경이 손금 보듯 훤히 보인다. 시야가 탁 트여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하다. 카페의 폴딩 도어를 모두 열어젖히면 바다가 와락 품에 달려드는 것 같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시고, 그리운 이에게 엽서를 썼다. 카페 앞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전달된다.
카페 앞 동해 특산물을 파는 매장에도 들러 묵호태를 샀다. 묵호태는 묵호에서 만드는 먹태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해발 70~80m 높이의 묵호 덕장에서 생산한 것이다. 11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리와 눈, 비를 맞히지 않고 전통 해풍 건조 방식으로 말린 명태다. 20여 일 동안 해풍으로만 말리기 때문에 바싹 마른 황태와 달리 속살이 부드럽다. 그냥 먹어도 맛있다. 새우깡도 아닌데 자꾸 손이 간다.
묵호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활어센터와 묵호항을 다시 들렀다. 오전과 달리 손님들로 붐볐다. 이곳 활어센터는 자연산 수산물만 취급한다. 구입한 횟감은 활어판매센터에서 회로 썰어준다. 인근 식당에서 초장과 채소 등 재료값만 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묵호항 부두에서 갈매기 떼가 요란하게 떠들기에 가보니, 아침에 조업 나간 배가 막 항구에 들어왔다. 뱃사람들이 생선이 가득 담긴 상자를 부두 바닥에 쌓아 놓으면,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상자 주변으로 하나둘 모인다. 곧 경매가 시작될 분위기다. 활기 띤 항구 풍경에 왠지 안도감이 든다. 시장과 항구는 시끌벅적해야 제맛 아닌가.
◇ 주변 명소 & 맛집 ◇
천곡황금박쥐동굴
국내에 하나뿐인, 도심에 있는 동굴이다. 4~5억 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황금박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총길이는 1400m, 관람 구역은 약 700m다. 베이컨, 오백나한상, 마리아상, 샹들리에 모양의 다양한 종유석을 볼 수 있다. 동굴 전시관에 황금박쥐를 테마로 한 동굴 탐험 VR 체험 시설을 갖췄다. 동해시 동굴로 50,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어른 4000원, 문의: 033-532-7303
무릉계곡
두타산과 청옥산 자락 골짜기의 계곡물이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반석 위로 힘차게 흘러내린다. 반석의 크기는 무려 4958m²(1500여 평)에 이른다. 반석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과 글귀들이 볼 만하다. 삼화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계곡 입구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가벼운 산책코스다. 좌우 두 개의 폭포가 하나의 소로 떨어지는 쌍폭포가 장관이다. 동해시 삼화로 584, 문의: 033-539-3700
장칼국수와 해산물 맛집
동해 원조 장칼국수집은 대우칼국수다. 인근 오뚜기칼국수도 유명하다. 묵호항 주변 동백식당의 해물탕과 해물찜, 부흥횟집의 물회, 물곰식당의 곰치국도 오래된 맛집 메뉴다. 까막바위 인근 어달리 회타운에서는 오부자횟집의 냄비물회, 동해바다곰치국의 생선구이가 맛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그것을 무시하거나 수용하고 체념하는 사람, 그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 세 부류가 있다. ‘마녀체력’이라는 책을 쓴 이영미 작가(53세)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운동을 통해 허약체질을 건강 체질로 바꾼 것이다.
이 작가는 2018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콘셉트로 이 책을 썼다. 지난 4일 일산의 한양문고에서 독자들과 만난 그는 “153cm의 작은 키에 게으름뱅이 저질 체력의 소유자가 어떻게 아침형 근육 노동자로 변신했는가”를 들려줬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3년 동안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건강 때문에 총체적인 난국에 부딪히게 됐어요. 늘 피곤함에 절어 살다가 고도고혈압 진단을 받았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후 난생처음 수영장에 등록해 6개월 동안 운동을 하면서 세 가지를 깨달았다. ‘그동안 건강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몸이 머리보다 기억을 잘한다, 체력은 좋아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수영을 꾸준히 한 결과, 지금은 2킬로미터를 한 번에 종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다음으로는 달리기에 도전했다. 집 앞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매일 돌면서 운동량을 하루 한 바퀴씩 늘려나갔다. 이제는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할 정도가 됐다. 못 타던 자전거도 배웠다.
동아마라톤대회를 시작으로 철인 3종 대회에 참가했다. 첫 대회에서 수영하면서 공포감에 경기를 포기할 뻔했다. 그 일을 계기로 “두려움이 발목을 잡을 때는 더 중요한 걸 생각하면 그것을 누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운동에서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연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그는 나이가 많다고, 체력이 약하다고 운동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시작부터 하세요. 그리고 연습하세요. 마치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점점 나아질 거예요. 인생의 지혜는 건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올 수도 있어요.”
그가 자전거로 미시령을 넘을 때의 일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한 굽이씩 가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다 너머 있었다. 이것은 “작은 목표들이 쌓여서 크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며 “운동하다 보면 누구나 실패의 경험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의 맷집은 강해지고,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배운다”라면서 운동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수영, 자전거, 배드민턴 등 모든 운동은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또 다른 모습의 나로 변신하게 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다. 운동 덕분에 결혼 22년 차의 부부 싸움 양상도 달라졌다고 한다. 싸우고 나면 1주일씩 대화를 하지 않던 부부가 지금은 각자 2시간씩 운동을 하고 나서 다시 만나니 긍정의 에너지가 생겨 싸움이 금방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혹시 평생 이루고 싶은 것이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동을 하세요. 운동을 하면 노인도 청춘이 되고, 운동하지 않으면 청춘도 노인이 될 수 있어요.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규칙적으로 꾸준히만 하면 돼요.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돈과 시간이 많아도 갈 수 없는 곳들이 많아요.”
이 작가는 운동 덕분에 50살이 넘어서 눈 덮인 몽블랑과 세계 3대 트레킹 코스 중 한 곳인 노르웨이도 다녀왔다. 혼자였다면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친구들과 함께해서 가능했다고 한다. 마치 작은 거인처럼 자신감 있게 전하는 그의 강연은 “지금 운동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운동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뭐부터 시작하지?”라며 고민하는 사람, 의지도 부족한 사람에게 강력한 운동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귀농귀촌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숲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산촌지역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매년 6만 명 이상의 도시민이 산촌으로 이주하고 있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 귀농·귀촌을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에 국립산림과학원은 생명의숲국민운동, 유한킴벌리와 함께 귀촌하는 시니어들의 실패를 최소화하고 숲에서 안정적인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시니어산촌학교’를 운영 중이라고 24일 밝혔다.
시니어산촌학교는 3개 기관이 협력한 민관협업 사회혁신활동으로 2016년에 개설됐다. 도시민의 귀산촌에 대한 인식전환 및 귀산촌 수요에 대응한 전문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시니어산촌학교는 국립산림과학원의 귀산촌 관련 통계분석 및 교육생 분석에 기초한 교육과정 설계와 프로그램 개발 지원, 생명의숲국민운동의 교육 운영, 유한킴벌리의 활동 지원 등 3개 기관이 만족도 높은 교육을 지원한다.
앞서 높아진 수요에 대응해 국립산림과학원과 생명의숲국민운동, 유한킴벌리는 지난 7일 발전된 교육 프로그램 제공을 위한 실무자 협의회를 개최했다. 이날 협의회에서 교육추진과 관련해 도시에 거주하는 시니어의 친환경 생활 관련 지표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수요자 맞춤형 교육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서정원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복지연구과장은 “다양한 기관이 귀농·귀촌과 관련해 지원하고 교육하고 있지만 귀산촌분야는 상대적으로 교육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라며 “귀산촌 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기관들이 협력해 확대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귀산촌과 관련한 트렌드 변화에 대응한 연구를 통해 고품질의 귀산촌 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시니어산촌학교의 귀산촌 교육 참여 지원은 2016년 1기 40명 모집에 2:1의 경쟁률을 나타낸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총 7번의 교육과정 모집에 평균 8:1의 높은 경쟁률을 나타냈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들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가스실 문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던 말이 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놓친 것이 못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뜬금없이 류시화 님의 글 중에 라는 글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럴 때 딱 맞는 비유의 글은 아니지만 굳이 끼워 맞춰본다. 또한 포기하거나 미루기의 증세가 느껴질 때면 이 글이 떠올라 조바심을 부채질을 한다.
10여 년 전쯤 프라하 여행 중에 뾰족 지붕 아래 전망 좋은 꼭대기 층에서 민박을 한 적이 있다. 아침이면 함께 투숙한 여행자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그날의 계획을 꺼내놓으며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늦은 밤에 하나 둘 귀가하면 필스너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그날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여행지에서의 열린 마음들이 거리낌 없는 정보가 되고 공감하는 동지애가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 중학교 교사였던 젊은 여행자가 그 날 인접국인 드레스덴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 이야기였다. 혼자 차분히 느끼며 다닌 그녀의 드레스덴 이야기가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잠깐 우리도 거기 가볼까 갈등을 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뮌헨으로 넘어갈 일정이 있어서 그곳엘 가질 못했다.
그 후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간간히 드레스덴이 생각났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그쪽을 다시 가기가 어디 뭐 쉬운가. 그때가 좋은 기회였는데...
간 김에 그때 하루쯤 시간 만들어 다녀왔으면 좋았을걸.
아무래도 그때 갔어야 했어.
그런 아쉬움의 여파인지 아들이 유럽 여행 중에 들른 드레스덴의 사진을 어느 날 밤 스무 장이 넘게 보내와 자다 말고 일어나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안달을 했나 하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역시 기억하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 드레스덴을 집어넣었다. 프라하에서 Flix bus로 드레스덴까지 1시간 55분 걸린다. 물론 국경을 넘으니까 티켓과 함께 여권 검사를 한다. 유럽의 들판을 달리고 숲길을 스치는 풍경은 덤이다.
마치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기나 한 듯 결국 왔어야 할 곳에 온 듯한 기분으로 드레스덴 중앙역 앞에서 내렸다. 역 뒤편에서 내린 줄도 모르고 숙소 쪽으로 향하다가 '어? 이 길이 아닌걸?'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현지인 인듯한 부부가 우리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한참 걸어서 예약된 숙소 앞까지 우릴 데려다 놓고 그들은 후딱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 그 부부의 등 뒤에 대고 우리말로 '감사합니다아~' 크게 외쳤더니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미소가 기분좋다. 드레스덴 여행의 예감이 좋다.
신기하게도 시작부터 모든 순간들이 거리낌이 없다.
발걸음을 옮기면 마침 그것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공기의 저항조차 없이 길을 열어주는 듯하다. 배가 고파서 골목을 돌아서면 맛있는 음식점이 있을 거란 예감이 적중했다. 다리를 쉬고 싶으면 멋진 풍경이 눈앞에 있는 벤치가 나타났다. 이 무슨 신비한 조화인가.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모르겠지만 드레스덴의 은혜를 마음껏 믿어본다.
머리와 마음을 텅 비워가지고 온 내게 이 도시의 충만한 햇빛과 에너지와 고고한 문화를 채우는 시간은 피곤하도록 길어져도 좋다. 구시가지의 돌길에 내딛는 내 발걸음 소리가 어느 날 역사가 될 거라는 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면서.
어째서 낯설지 않은 걸까.
엘베강을 바라보며 오랜 전통의 미술대학이 세워진 것도, 그 강변의 행위 예술가들도, 긴 세월의 든든함 아우구스투스 다리, 폭격에 허물어진 교회 벽돌 하나하나 시민들에게 번호를 부여해서 보관했다가 재건에 사용하던 그 마음이 담긴 교회도 모두 자연스럽게 조화롭다. 온 도시가 2차 대전의 공습으로 불타고 무너져 내렸어도 그 거뭇한 색감조차도 생소하지 않다. 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도시 자체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브륄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엘베강은 마치 내가 본 듯한 그 옛날의 강처럼 흐른다. 괴테가 즐겨 산책하며 유럽의 발코니라 일컬었음을 나도 인정하기로 한다. 거길 걷다 보면 그 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만큼 각종 문화유산에서 고풍스러움의 멋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왕궁이나 대성당, 오페라하우스나 마차가 다니는 골목길에 스며들어본다는 것은 심장이 두근대는 걸 느끼는 시간이다. 어딜 돌아보아도 감각적인 바로크 건축물들의 위용이 도시의 멋과 고고함에 흠뻑 빠뜨린다.
요하네스 왕 청동 기마상 앞 광장에서 BTS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던 젊은 청춘들을 보며 어쩐지 가슴 뭉클. 오옷... 이쁘신 우리의 bts~. 길 가다가 갈증 나면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이 도시를 넓은 눈으로 둘러본다. 거리의 아티스트가 벌이는 전위 예술도 인상적이었고, 가던 길 멈춰 서서 들었던 숄로스 광장의 털보 악사의 연주도 기억난다. 특히 밤 산책길이 이쁘고 편안했던 시간.
독일 라이프치히 남동쪽으로 마이센과 피르나 사이에 있는 엘베 강 유역에 있는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 게르만의 식민에 의하여 1200년 이전에 성(城)이 구축되고 1206년에 도시가 되었다. 베를린 남쪽 약 189km 지점에 위치했다. 독일의 도시중 외곽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슬라브어(語)로 숲 속의 사람이란 뜻의 드레스덴(Dresden), '평야의 삼림 거주민'을 뜻하기도 하는데 드레즈단이라는 슬라브족 촌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옛 동독의 古都,
도시가 오가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이쁜 뮌츠 골목도, 강변을 바라보는 나란한 벤치들도, 노란색 트램도, 소소하게 품격을 느끼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다닐 수만 있어도 좋은 곳, 이 도시가 폼나니까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 아름답다. 그들의 눈빛은 따뜻하다. 그냥 다녀도 가슴 벅찬데 게다가 마냥 관대해지기까지 한다. 드레스덴은 더없이 은혜로웠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잊을만하면 떠들어댈 만했다. 그리고 오고야 말았다.
▲드레스덴의 맛
독일에는 감자요리가 여러 가지 있다. 그 중에 노천카페에서 먹었던 뢰스티는 우리의 감자채전과 흡사하다. 그 위에 소스와 잘게 썬 베이컨이나 샐러리 등을 뿌리고 채소를 듬뿍 얹어서 먹기 때문에 식후에도 가벼운 느낌이 좋다.
특히 구운 토마토와 콩 요리를 많이 먹었는데 잘 익은 토마토 맛의 풍부함은 최고다. 그리고 드레스덴에 왔으니 흑맥주 한잔쯤 빠뜨릴 수 없다.
요즘처럼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지난 영화를 검색해서 다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근에 본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2017년 개봉작으로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 감독의 데뷔작이다. 남편의 동유럽 출장에 동행하려다 감기가 걸리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이 남편 동료의 제안으로 프랑스를 여행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감독 데뷔 전에는 ‘회상,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다큐멘터리 연출도 했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설치미술가, 작가 등 다양한 이력이 있다.
여주인공 ‘앤’역은 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 맡았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남편 ‘마이클’역은 ‘알렉 볼드윈(Alec Baldwin)’이, 프랑스의 연출 겸 작가, 배우로 활약하는 ‘아르노 비야르(Arnaud Viard)’가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역으로 나와 프랑스 남동부 곳곳을 안내한다.
자꾸 어딘가를 들르는 ‘자크’에게 ‘앤’은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 ‘자크’ 는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라고 센스 있는 대답을 한다. 결국 칸에서 파리까지 7시간이면 오는 파리를 거의 40시간 만에 도착하게 된다.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이때 경험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약 6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남편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든든한 외조 덕에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은 자신의 이야기를 에 녹여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하는 이 영화는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제60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제35회 뮌헨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별하지 않은데 설레게 하는 영화
화면에는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프랑스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을 출발하여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는 중년 남녀의 모습 역시 청춘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설렘을 준다.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리옹에서는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박물관’이 나온다. 도시의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있는 리옹에서 가장 큰 ‘폴 보퀴즈 시장’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앤’의 작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프랑스 정통 와인과 프렌치 푸드의 다양한 색감과 화려함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행 중에 ‘앤’이 먼저 가자고 한 곳이 한군데 있다. 성모 마리아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진 ‘성 막달레나 대성당’ 이곳에서 ‘앤’은 마음 깊이 있던 자신의 상처 하나를 ‘자크’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남편의 사업 동료가 안내하는 여행은 내내 정중하고 사려 깊다. 특별하지 않은데 아련하게 다가온다. 두 중년 배우가 주는 원숙미와 프랑스 거리의 풍경들. 두 사람의 여행이 길어지면서 불안해하는 남편의 반응과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덤덤하게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관심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