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주차된 빨간색 승용차 손잡이 틈에 현금과 군것질거리가 담긴 봉지를 몰래 끼워놓는 할머니의 사연이 공개됐다.
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통영경찰서 광도지구대는 지난 14일 “누군가 자신의 차량 손잡이에 5만 원권 지폐와 과자나 떡 등이 담긴 봉지를 자꾸 끼워두고 간다”는 한 차주의 신고를 받았다.
이 차주는 “꼬깃꼬깃 접은 지폐가 손잡이 틈에 끼어 있고, 비닐봉지로 꽁꽁 싼 군것질거리가 차 옆에 놓여 있는 일이 지난 2월부터 5차례 이상 반복되고 있어 신고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주차된 차량 주변 폐쇄회로(CC)TV로 확인한 결과 돈을 끼워둔 건 86세 한 할머니였다. CCTV 화면 속 거동이 불편한 한 할머니가 힘겨운 걸음으로 와 차량 문을 만지는 걸 확인한 경찰은 며칠간 탐문을 거쳐 통영시 명정동에 있는 할머니 집을 찾았다.
확인 결과 이 할머니는 치매 증상이 있었고, 집 앞에 빨간 승용차가 있을 때마다 아들이 주차해 놓은 것으로 잘못 알고 모아둔 용돈과 군것질거리를 차에 두고 온 것으로 밝혀졌다.
아들은 몇 년 전까지 근처에 살았으나 현재는 타지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는 비록 치매에 걸렸지만 아들의 차 색깔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빨간색 승용차가 보일 때마다 쌈짓돈과 군것질거리를 두고 온 것이다.
경찰은 할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할머니가 5차례에 걸쳐 두고 갔던 돈 21만원을 돌려줬다.
● Exhibition
◇ 레안드로 에를리치: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정 3월 31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개인전이다. 에를리치는 주로 거울을 이용한 착시 현상에 착안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까지 가능한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몸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영화 포스터 13점으로 꾸민 ‘커밍 순’으로 시작한다. 이어 ‘탑의 그림자’, ‘자동차 극장’ 등 대형 작품을 비롯해 남·북한 지도를 모티브로 한 ‘구름(남한, 북한)’까지 만날 수 있다.
◇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
일정 4월 25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예술가에게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연한 발견이 예술적 발상과 작품으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환경적 조건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전시다. 창작에 영감을 준 이미지를 발견한 당시의 순간과 그 특별한 발견을 작품으로 옮겨나가는 창의적 행위의 과정에 대해 그린다. 이세현, 손봉채, 베른트 할프헤르 등 세렌디피티(뜻밖의 발견)를 경험한 작가 21명의 예술작품 78점과 더불어 흥미로운 일화와 사례, 작가노트 등을 공개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의 발견에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 환상의 에셔展: EXIT-에셔의 방
일정 4월 30일까지 장소 서울웨이브아트센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네덜란드 작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에셔의 그래픽 디자인, 판화 에디션, 아카이브 영상과 더불어 VR 작품과 특별 제작된 대형 오브제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미술에 수학과 과학을 접목한 작가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의 이성적인 논리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뫼비우스의 띠’, ‘펜로즈 삼각형’ 등을 직접 체험하며 작품 속 에셔가 표현했던 원리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감상하도록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00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단을 통해 선정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날 기회다. 2019년 수상작 전시 외에도 2018년 수상자 벤디 베르니치의 특별전이 함께 열린다. 더불어 어린이 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 도서 16권이 전시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세계 일러스트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다.
● Movie
◇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3월 5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초희 출연 윤여정, 강말금, 김영민, 윤승아 등
‘우리 순이’, ‘산나물 처녀’ 등으로 주목받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평생 일복에 시달리며(?) 살던 주인공 ‘찬실’에게 전에 없던 행운이 굴러들어오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성 서사의 작품에 따뜻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더했다. 배우 윤여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정 깊은 주인집 할머니 ‘복실’ 역을 맡아 극에 훈훈한 감동을 불어넣는다.
◇ 다크 워터스
개봉 3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 등
독성 폐기물 유출로 인류의 99%를 위험에 빠뜨린 미국 최고 화학기업 듀폰.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며 전 세계를 뒤흔든 일간지 ‘보스턴글로브’의 심층취재팀 ‘스포트라이트’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 리암 갤러거
개봉 3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개빈 피츠 제럴드, 찰리 라이트닝 출연 리암 갤러거 등
세계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화려한 시절을 지나 험난한 시간을 보낸 그가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고백하며 관객과의 소통에 나선다.
● Book
◇ 오팔세대 정기룡, 오늘이 더 행복한 이유 (정기룡 저ㆍ나무생각)
경찰서장을 지내다 정년퇴임 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 오팔세대 가장의 파란만장 인생 후반전을 담았다. 진솔하게 풀어낸 저자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뿐만 아니라,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도 얻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터득한 은퇴설계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며 오늘날 오팔세대의 활기찬 제2인생을 응원한다.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 (버나드 오티스 저ㆍ검둥소)
노년기 마음가짐과 실질적 조언의 비율을 3대 7로 구성해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입할 보험 조건, 병에 걸렸을 때의 대처, 유언 준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 인간의 모든 죽음 (최현석 저ㆍ서해문집)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죽음의 관계, 죽음의 유형과 특징, 치매·간병·호스피스·사별 등 웰다잉을 위한 실용적 지식을 총망라했다. 죽음에 대한 117개의 키워드를 꼽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저ㆍ㈜소미미디어)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녔던 ‘정년 아저씨’가 손주를 돌보기 시작하며 자신의 편견을 깨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주인공의 인식 전환을 통해 가족과 사회를 위한 긍정적 변화를 촉구한다.
◇ 양준일 MAYBE (양준일 외 공저ㆍ모비딕북스)
최근 JTBC ‘슈가맨’을 통해 19년 만에 돌아온 가수 양준일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좌절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그가 깨달은 삶의 본질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정유경(57)은 봄바람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슬쩍 묻은 눈매, 말랑말랑한 화법 그리고 인사를 건넨 이들에게 짓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봄날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녀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꿈만큼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KBS ‘젊음의 행진’ 백댄서 팀이었던 짝궁들 출신 정유경은 1983년에 노래 ‘꿈’을 부르며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그녀는 큰 눈의 귀여운 외모와 성악과 출신답게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가수 활동은 성공을 거뒀으나, 이내 비자 만료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중년이 되어 다시 우리들 앞에 섰다. 가수와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바로 연극배우로서 말이다. 제2의 인생을 촉망받는 연극배우로 맞이한 반가운 얼굴, 가수 정유경은 대학로 극단 거리에서 겨울 볕을 쬐고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첫 연극, 배우로 마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정유경이 다시 대중 앞에 선 것은 2012년 SBS ‘K팝스타’에 그녀의 아들 맥케이 김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맥케이 김은 당시 자작곡과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으며 톱5에 올라갈 정도로 성공했다. 당연히 그의 어머니인 정유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고,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과 패널 활동을 이어나갔다. 연극은 그 과정에서 우연처럼 다가왔다.
“연극하는 친구와 모임을 하면서 나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연락이 왔어요. ‘연극 캐스팅이 필요한데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무조건 보겠다 하고 갔더니 치매 할머니 역할이더군요.”
그녀가 지원한 연극은 ‘엄마의 레시피’. 대만을 배경으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딸,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손녀가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연극으로 매년 대학로에 올라가는 인기 레퍼토리다. 그녀에게 있어선 첫 오디션이고 첫 소극장 공연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했다. 오는 2월 17일부터 시작하는 새 연극 ‘5인실의 그녀’(가제) 극단 대표도 그 연기를 보고 바로 같이하자고 했다.
“저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분에게 칭찬받았어요. 이게 첫 연극이라는 걸 믿지 않더군요. 연극은 물론 마음에 들었죠. 사실 제가 평소에 음식을 잘하는 편이어서 정서적으로도 닮아 있었던 거죠. 제가 나이가 들면 이러지 않을까 싶은 걸 연기해서 칭찬을 받은 셈이에요.”
천생 무대 체질, 무대가 너무 좋다
‘엄마의 레시피’ 제작자는 모든 게 처음인 정유경의 오디션을 볼 때, ‘대본을 하나도 안 떨고 읽더라. 이 사람은 연기가 되든 안 되든 무대에서 떨지는 않겠다’ 싶어 뽑았다고 한다. 제작자의 눈썰미처럼, 그녀에겐 배우로서의 자질이 이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수 출신인 그녀의 발성이 무척 좋고 톤과 발음이 명확하다는 걸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가수 생활이 도움됐던 거 같아요. 사실 가수도 연기예요. 연기하면서 노래를 하는 거니까요.”
또 하나, 그녀는 무대공포증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아니 되려 무대를 매우 사랑한다.
“어떤 무대든 올라가면 떠는 일이 없어요. 그냥 무대가 너무 좋아요. 가수 김장훈 씨가 한 말이 생각나요. 저랑 나이가 같다 보니까 응원 차 연극을 보러 왔는데, 자기가 집에 가서 생각을 했대요. ‘아니, 저 끼를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하고요.”
무대를 오래 떠나 있었어도 무대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 정유경 본인이 아닌 무대의 인물 그 자체가 된다는 사람이 그녀였다. 천생 무대 체질인 그녀는 ‘무대에서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고 했다.
“사실 제가 나이가 많잖아요.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싶어서 두렵기도 했죠. 그런데 연극을 하다 보니 그건 저만의 두려움이었어요. 실력만 있으면 나이는 상관없어요.”
정유경은 ‘다 때가 있고 기회가 있다’는 숙명론적인 말을 좋아한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주어진 자리에서 얼마만큼 열심히 하느냐, 그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모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다.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다.
“연극의 매력은 숨소리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숨 쉬는 것조차 연기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관객이 호응하니까요. 그래서 1초도 허투루 할 수 없어요. 거기에 매력이 있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이혼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중년의 베테랑과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막 사회에 나온 열정 넘치는 청년 신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물론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사람을 만났을 때 으레 그런 패기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정유경의 에너지는 남달랐다.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졌다.
“현지 아나운서를 했어요. 교회 성가대 지휘도 했고. 집에만 있진 않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남편더러 ‘힘들겠어, 저런 여자를 와이프로 데리고 살려면. 아이고 끼가 보통이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죠. 그런데 이혼했어요.”
인터뷰 중에 불쑥 나온 이혼 얘기.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자연스러움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 전 남편과는 친구예요. 가족들과도 계속 교류하고 있고요.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고 남편 사업이 실패하고, 그리고 제가 예술적 끼가 많다 보니 그리 됐어요. 이혼하기 전에 아이들에게도 말했어요. 엄마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행복하지 않으니 이혼해야겠다고요. 아이들이 상처를 안 받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해해줬어요.”
억지로 사는 부부들은 좀…
정유경의 지론은 ‘이혼하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헤어져도 아이들의 부모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한국 사회의 부부들은 이상하다.
“한국에서 제 나이 또래 부부들을 보면 ‘따로 또 같이’예요. 대화도 안 하고 방도 따로 쓰고…. 왜 그렇게 사냐고 물으면 ‘어쩌겠어, 자식 때문에…’라고 답해요. 참 안타깝지요. 그게 진정 가족일까요? 그렇게 살면서 부모들이 싸우면 아이들은 싸우는 게 당연한 줄 알게 돼요. 그럴 거면 차라리 쿨하게 이혼하고 서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식들에게 정서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생각해요.”
틀린 부분이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졸혼이 수용되는 이유도, 어쩌면 이혼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의미에서의 부부간 절충점을 찾은 결과 때문이 아닐까. 미국에서 남편과 친하게 지내니까 사람들이 다시 재결합하라고 하는데, ‘친한 것과 합치는 건 다른 것’이라며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그녀의 당당함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더 자주 만나게 될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러운 삶이야말로 행복
“나이 먹는 걸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름다워요. 거기서 헤어나려고 할수록 추해지죠. 그 나이대로 그대로 가는 게 익어가는 거지. 설익은 과일을 억지로 익히면 맛이 없잖아요.”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정유경의 생각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 때문이다.
“풋볼, 골프선수였던 아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 지금 음악을 공부하고 있어요. 딸은 어릴 때부터 남 돕는 일을 좋아해서, 가난한 사람을 병원과 연결해 도와주는 소셜 워커로 일하고 있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가끔 ‘누가 하버드 갔대, 예일대 갔대’ 하면 ‘야, 공부 잘하는 사람만 있으면 세상 안 돌아가. 너처럼 음악하는 사람, 밥 잘하는 사람도 있어야 돌아가지’라고 말해줬어요.”
그녀는 “오늘 50점 받았으면 내일은 51점 받으면 된다. 내려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 기준으로 아이들을 믿었기에 그녀의 아이들도, 그녀 자신도 행복해진 것 아닐까. 그녀에게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나온 대답도 그 행복의 증거였다.
“이혼했지만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마음 모질게 살지 않은 것이에요. 저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제가 그런 사람이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연기자 되고파
정유경의 삶의 틀을 마련해준 건 아버지였다. 그녀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 제가 성악을 했잖아요. 그런데 가수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딱 한마디하시더라고요. ‘유경아, 가수를 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네 노래가 사람들 술안주가 되게 하진 말아라.’ 그걸 지키며 살았죠. 술 담배는 아예 안 했고 밤무대도 안 섰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그게 제가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녀의 인생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물론 아무런 굴곡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응어리를 안고 추락하기보다는 되려 발판 삼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삶에 대해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고민은 있죠. 그런데 그런다고 당장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스텝 바이 스텝, 한 걸음씩 가다 보면 해결되겠지 싶어요. 그렇게 신중하게 가다 보면 좋은 기운도 만나게 될 테고…. 그걸 믿고 가려고 해요.”
정유경이라는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찾았다. 착한 그녀가 사랑스럽다.
무더운 여름의 한복판 7월, 시원한 음료 한잔하며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박막례, 김유라 공저ㆍ위즈덤하우스)
71세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와 할머니의 행복한 노후를 응원하는 손녀 김유라가 함께 쓴 에세이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박막례의 인생 전반전부터,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전향한 뒤 펼쳐진 인생 후반전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느 날 치매 위험 진단을 받고 온 박막례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한 손녀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며 할머니와 호주 여행을 결심한다. 그렇게 시작된 동행이 두 사람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여행기 영상은 조회수 100만을 훌쩍 넘겼고, 이를 계기로 박막례는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차세대 유튜브 스타로 떠올랐다. 박막례는 “부침개처럼 인생이 확 뒤집혔다”고 호쾌하게 말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70여 년 인생을 충실히 살아온 그녀 스스로가 만든 결실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손녀 김유라가 관찰한 할머니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 할매의 탄생 (최현숙 저ㆍ글항아리)
‘할배의 탄생’의 저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가 이번엔 대구의 한 산골짜기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농촌, 젠더, 노년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투리와 정제되지 않은 언어까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 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 이야기 (김형석 저ㆍ열림원)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행복한 삶의 중요 조건으로 ‘성장하는 인생’을 꼽았다. 그런 그가 제안하는 성장하는 삶 속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인생의 조건’,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등 총 4부로 나눠 설명한다.
◇ 나만의 시크릿 홈카페 (예나 저ㆍ레시피팩토리)
레시피 제공뿐만 아니라 홈카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홈카페 추천 도구, 식재료, 식기를 비롯해 예쁜 얼음 만드는 법, 풍성한 우유 거품 내기 등 저자만의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한다.
◇ 전원주택 짓고 즐기며 삽니다 (정문영 저ㆍ청림Life)
은퇴 전 전원생활의 로망을 이룬 저자가 경험을 통해 터득한 좋은 땅 보는 법, 건축주가 알아야 할 예산 설정법, 시공업체 선정기준 등을 공개한다. 전원주택 구매자를 위한 99가지 체크리스트 등 유용한 정보도 함께 제공한다.
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
거품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통 안의 옷들을 보면서 어쩌다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을 잘 표현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바로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이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연말 대학로(알과핵 소극장/극단 모시는 사람들)에서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연극을 봤다. 30년 넘게 대를 이어 세탁소를 운영하는 강태국 씨의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다뤘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은 중견 극작가 김정숙 씨가 쓴 희곡으로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2005년 대학로 공연까지 33만 관객을 동원했다. 동아연극상, 희곡상도 수상했다. 극작가 김정숙 씨는 현재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대표이기도 하다.
연극은 시간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암전 상황에서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잠시 후 불이 켜져서 보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그 후 다시보기로 난장판이 된 상황을 되짚어온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아시스 세탁소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강태국 씨는 세탁소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단지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정이 오가도록 자신이 가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전 맡긴 어머니의 옷이 생각나서 찾아온 초라한 행색의 남자에게 옷을 찾아 그냥 내어주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가 하면 무명 연기자가 오디션을 볼 때마다 손님이 맡기고 오래 안 찾아가는 옷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로 오늘내일하는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세탁’이라는 말을 남기자 세탁소를 습격한 자녀들은 세탁소에 걸린 옷들을 뒤지며 할머니의 유품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연극은 욕심을 부리고 서로 밀치던 사람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에서 하얀 옷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
옷걸이마다 빼곡하게 옷이 걸린 무대를 보니 한 친구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계절별로 옷 세 벌만 남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눈에 익숙한 간결한 옷차림이다. 여럿이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세 벌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하고 물었더니 “많이 갖고 있으면 나중에 여러모로 힘만 들지” 하면서 미리 정리하는 삶을 연습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몇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극작가이자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살면서 한 번쯤 해봤을 세탁소 혹은 세탁기에 담긴 생각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인간관계가 점점 야박해지고 물질만능주의로 물들어가는 현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연극이었다.
새로운 다짐과 희망으로 가득한 1월 한 해를 시작하며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딸기색 립스틱을 바른 에이코 할머니 (가도노 에이코 저ㆍ지식여행)
30년 넘게 전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원작자인 아동작가 가도노 에이코의 에세이다. 2018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그녀는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책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기 위한 에이코 할머니만의 비법들을 담았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빛나는 자신만의 멋과 철학, 나이가 들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패션, 오랜 세월 즐겨온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그릇들, 딸기색 벽을 가득 채운 수많은 책 등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마흔 이후 빨간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 한마디에 ‘딸기색’을 자신만의 색깔로 삼은 저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예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채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옷장 속을 살피고 싶다”며 아름다운 삶의 비결과 꾸미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 같이 읽고 함께 살다 (장은수 저ㆍ느티나무책방)
10대 여고생부터 80대 할머니까지,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30년 넘게 맥을 이어온 ‘할머니 독서모임’, 귀촌자가 모여 만든 ‘남원북클럽’ 등 저자는 전국 독서공동체 24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 (노신화 저ㆍ포레스트북스)
말기 암과 치매를 앓는 시한부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딸의 마지막 76일을 그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가족의 질병이 갈등과 붕괴가 아닌 치유와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저ㆍ다산책방)
‘뉴욕타임스’, ‘가디언’이 추천하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유럽 소설의 새로운 목소리’로 주목받는 톰 말름퀴스트의 소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으로 평범한 일상이 파괴된 한 남자의 비극을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냈다.
◇ 왕초보 책과 글쓰기 도전 (가재산 외 공저ㆍ노드미디어)
100세 시대를 맞아 시니어들이 쉽게 도전해볼 수 있는 책과 글쓰기 방법에 대해 정리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등 글쓰기에 효율적인 스마트폰 활용 노하우를 친절하게 소개한다.
조용했던 뜨개질 방이 술렁거렸다. 이제부터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다니. 잠시나마 당황했다. 손녀뻘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알록달록 형형색색 끈을 펼쳐보였다. 막상 눈앞에 놓아둔 것을 보니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랑 할머니랑 도란도란 앉아서 우리네 옛 매듭을 엮어 만들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샘솟았다. 전통매듭과 함께 소녀시대로 돌아간 송파시니어클럽의 술술맵시단을 찾아갔다.
전통매듭이 뭐길래?
“작은 선생님, 이리 좀 오셔봐요. 나 길을 잃어버렸어. 요놈 가져다가 넘기지? 하나는 잘 넘어왔는데 하나가 영 안 되네.”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상에 바짝 앉아 ‘오벌가락지매듭’을 만들고 있던 한미자 씨였다. 매듭이 제 길을 찾아 잘 가나 싶었는데 결국 헤매고 말았다며 최현숙 선생을 불러 세운다.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이용해 끈과 끈이 오가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전통매듭이 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송파시니어클럽에는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8명의 여성 시니어가 모여 매듭을 배우느라 열기가 가득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1월이면 전통매듭을 만난 지도 5개월째다. 기초 매듭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니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젊은이들처럼 손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아가 예술성과 함께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시니어 취미를 넘은 수익활동 영역으로까지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전통매듭을 시니어와 함께 해보겠다며 송파시니어클럽에 노크를 한 이들은 30대가 주축인 문화예술사업단 술술공작소다.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시니어의 자세가 남달라 새삼 놀랐다.
“기초적인 매듭부터 하나하나 지어나가면서 완벽하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가 수업입니다. 저희가 매번 와서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 하루는 교육하고 그다음 시간은 숙제로 내드린 것을 해오게 합니다.”
매듭을 배우기 위해 시니어 학생들이 교실 안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좌석 배치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본매듭을 배우는 단계와 만들어진 매듭을 적당한 색상으로 배합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단계로 나눠서 일사분란하게 구성원들끼리 호흡을 맞춘다.
술술맵시단, 젊은이와 전통을 공감하다
전통매듭이라는 분야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고 보급할까 고민했다고 강순주 대표는 말했다.
“다른 지역의 시니어 관련 기관에도 가봤습니다. 마침 송파시니어클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셨어요. 이곳에서 뜨개질하는 시니어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전통매듭을 하는 시니어는 송파시니어클럽의 사업단 중 하나인 한코한코손뜨개사업단 소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주방용 아크릴 수세미 상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해왔다.
“뜨개질도 하는데 전통매듭을 만들어보시라고 제안을 드린 것이죠. 아무래도 손뜨개를 하는 분들이니까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거나, 집에서 만드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80대 시니어가 적지 않았다고. 30대 젊은 강사가 전통매듭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시니어에게 옛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것이 연봉매듭이에요. 왕의 곤룡포를 비롯해서 한복이 쓰이는 단추매듭이죠. 한 어르신이 옛날에는 시집가기 전에 옷감 자투리를 말아서 단추를 해가지고 가는 것이 혼수품이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만들어 쓰던 매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매듭이 생각 안 나면 어른들이 그러셨대요. 내가 이제 갈 때가 됐구나.(웃음)”
세대 간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이렇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세대 공감 프로젝트로 보였다. 5개월쯤 함께 활동한 후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도 신중한 고민을 거쳐 내놓았다. 바로 술술맵시단. ‘매듭을 만드는 시니어 모임’이라는 뜻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잖아요. 설명해드려도 모르는 게 있다 하시면 옆에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없을 때도 작업을 꽤 잘하십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이분들이 정식으로 자격증을 따고 더 나아가 또래 시니어는 물론 다양한 분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매듭을 가르쳤으면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작고 아담한 작업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눈과 손은 예리하게 반응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뜨개질을 오래도록 해왔던 이희자 씨는 “전통매듭이 생소한 분야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들면서 가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 초반 ‘오벌가락지매듭’으로 고생하던 한미자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던 모습만 봤는데 젊은 선생님에게 배우게 됐다”며 좋아했다. 술술맵시단 고령자 중 한 명인 김정애 씨는 “손을 많이 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지역 행사 때 어린아이들한테 매듭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보람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80대인 김을용 씨는 “너무 못 따라가고 민폐일까봐 고민을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셔서 만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다가와 새로운 걸 가르쳐줍니까.” 술술맵시단 시니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여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진지하게 매듭을 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술술맵시단의 멋진 미래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
클래식 소녀 국악을 만나 전통예술을 깨치다
“추계예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전통매듭을 가르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35세의 클래식 전공자였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교수들과도 격 없이 지냈다는 강순주 대표에게 국악과 교수들은 “클래식 작곡 전공자가 국악을 하면 더 가치 있지 않겠냐”며 조언했다. 그때의 강한 끌림으로 졸업과 함께 락음국악단(예술나눔청년사업단)에 들어가 3년 여 활동했다. 뜻 맞는 음악 친구들과는 전통예술단 ‘호연(浩演)’을 만들어 11년째 활동 중이다.
“예술 분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원금이 없으면 예술 단체는 힘들거든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잖아요. 지원도 걱정이 되고 자립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국악기에 달린 매듭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악기는 애지중지 닦고 조율하면서 매듭술은 악기 처음 샀을 때 있던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꼬질꼬질해졌다. ‘매듭술 만드는 곳 어디 없나?’ 하다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 선생님한테 제 전공부터 시작해서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말씀드렸어요. 상황을 들으시고는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사범증을 따고 나니 뭔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술술공작소다. 작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스타트업센터 예술 분야 업체로 선정돼 입주했다. 다양한 축제에 전통매듭으로 참여하다 보니 협업이 가능한 동반 집단이 있으면 좋을 듯싶어 다양한 계층을 만났다.
“다문화가정 여성들도 가르쳐보고 보호관찰소 여학생들도 만나봤어요. 꼼꼼하고 실력은 좋은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시니어에게는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전통이나 매듭을 생각하면 시니어를 떠올리게 되니 진부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모를 얘기, 특히 매듭과 관련한 추억을 들려주시는 시니어 덕이 컸다. 최근엔 조금씩 수익도 내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과 작업했던 작품이 면세점에서 판매됐다.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전통을 시니어와 함께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스토리를 담은 음악극도 훗날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음악가로서 포부도 밝혔다.
“우리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매듭이 자리를 잡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원활하게 돌아가면 음악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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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봤다. 이 작품은 2007년 4월부터 약 6개월 포털에 연재된 강풀 작가의 웹툰이 원작이다. 2008년 연극으로 만들어져 대학로 굿시어터에서 무대에 올려졌고, 2011년에는 영화로, 2012년에는 SBS 드라마로 방영돼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 바 있다. 영화에서 김만석 역을 맡아 열연한 이순재가 연극에서 박인환과 함께 더블캐스팅됐다. 상대역 송이뿐 할머니는 손숙과 정영숙이 교대로 호흡을 맞췄다. 나는 박인환과 정영숙이 무대에 선 공연을 봤다.
연극은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네 사람의 우정과 사랑을 잔잔하게 보여줬다.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유 배달을 하는 주인공 김만석 할아버지는 속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럽다. 홀로 살아가는 송이뿐 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근근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의 덤덤한 사랑과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 할머니를 보살피는 군봉 할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 네 사람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친정 부모님이 떠올랐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10년째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돌보던 친정어머니는 지난 추석에 쓰러져서 두 달 가까이 일반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머니는 다행히 건강을 되찾는 중이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요양원에 계신다. 처음에 집과 병원 양쪽을 오가던 우리는 어머니의 입원이 길어지면서 결국 아버지를 집 근처 요양원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치료가 끝나고 병원에서 퇴원하라 할 때까지도 걷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의사는 병을 이기느라 체력이 바닥나고 근육이 빠져나가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잠시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의사가 상주하는 요양병원으로 퇴원시켰다. 어머니 혼자 돌보던 아버지를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은 힘들다고 요양원으로 보내고 어머니마저 몸이 좋아질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요양병원에 보낸 것이다.
친정 부모님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가신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우리는 양쪽을 드나들며 부모님을 만난다. 거동이 어려운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가끔 영상통화를 연결해드리기도 한다. 영상 속 모습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의 보일 듯 말 듯 애잔한 미소는 서로를 위한 응원일 것이다. 영상통화는 늘 어머니의“밥 잘 먹어”라는 말과 아버지의 끄덕임으로 끝난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나는 온갖 백지수표를 남발했다. 일어나면 같이 놀러 다니자고. 연극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자고. 세상에 더없는 효녀라도 될 것처럼 많은 약속을 했다. 어머니는 이제 조금씩 혼자 걸을 수 있다.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좀 더 좋아지면 퇴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요양원에 있다. 집으로 올 날을 기약할 수 없다. 자식이 많아도 선뜻 나서서 모시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아무 문제가 없었던 두 분은 몸이 아프면서 삶의 질이 크게 달라졌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주인공들은 내 부모의 모습과 닮았다. 어쩌면 이 시대 모든 부모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위로는 노년의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부모가 되었거나 부모가 될 만큼 나이가 찬 자녀가 있는 낀 세대다. 지금보다 더 시간이 더 지나면 우리는 만석 할아버지와 이뿐 할머니처럼 홀로 남거나, 돌봄이 필요한 순이 할머니와 군봉 할아버지처럼 될 수도 있다. 연극을 보면서 순간순간 마음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 부모님이 북쪽에 고향을 두고 계셨던 까닭으로 명절이 되어도 어디 갈 곳이 없다. 그저 관성처럼 TV를 통해 남들 귀성행렬을 바라보며 설이나 추석이 되었거니 느끼며 살았다.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지만 올 추석은 유달리 썰렁했다. 유난했던 세계적 자연재해와 경제 침체로 흥이 날 리 없기도 하다. 게다가 명절 연휴만 되면 고향보다 해외로 나가는 유행이 거리를 더욱 한산하게 만들었다.
늘 그래왔듯이 긴 시간 집에만 있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신문에서 추석 연휴 TV채널 일정표부터 챙긴다. 형광펜으로 볼만한 프로그램에 색을 입힌다. 추석이면 늘 나오는 외국인 노래자랑은 식상하기에 주로 영화를 챙겨본다.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있다면 홍콩 배우 성룡이 주연한 영화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예술영화보다는 액션 대작이 추석 안방극장을 차지했다. 취향은 잘 안 맞지만, 공짜인데 어쩌랴. 우선 외국영화에 눈길이 가서 ‘셜록 홈스 시리즈’ 등 몇 편을 골라 본다. 류승완 감독의 2017년 작품 ‘군함도’ 등 소위 블록버스터 몇 편도 관람 대상이었다. 영화 개봉 당시 큰 관심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영화를 보다보니 연휴 절반이 휙 지나갔다.
연휴 3일 째 되던 날 모처럼 소박한 작품을 보게 됐다. 바로 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보려다 놓쳐 아깝다 싶던 작품이다. 노인 중심 영화는 흥행되기 어려워 영화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흥미를 끌었던 작품이다. 게다가 tvN의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에 등장했던 두 배우가 나와서 관심 또한 높았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가 올 연휴 하이라이트가 됐다.
영화는 홀로 사는 성격 괴팍한 노인 김성칠(박근형)과 이웃에 이사 온 예쁜 꽃가게 주인 할머니 임금님(윤여정)의 알콩달콩 로맨스로 진행된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들의 연애를 응원한다. 거칠고 한 성질 하는 영감은 장수상회 점원으로 일하는데 아무리 사고를 쳐도 해고되지 않는다. 또한 이 동네를 재개발하려 하는데 이 영감의 반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이들의 연애는 노인의 기억력 장애로 어려움에 처한다. 이쯤 되면 그렇고 그런 노년의 로맨스에 얽힌 이야기로 치부될 법하다. 그러나 서서히 지루해지려는 그 순간 놀라운 반전이 있다. 알고 보니 이 둘은 원래 부부 사이이고 노인은 장수상회의 주인이었다. 다만 노인의 치매 증상으로 아내와 가족을 알아보지 못 하고 아내가 췌장암 말기에 다다르자 따로 살게 된 것이다. 노인이 비밀 일기장을 통해 자신의 치매증상에 대해 인지하고 다가올 위험에 고뇌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 어느덧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 처하고 만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갈 때 젊은 시절 불러주었던 노래를 기억해낸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문득 인간의 존재 양식이 단지 기억력이라는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졌음에 놀란다. 이 영화는 치매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기보다 그것이 악화한 후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병으로서의 치매가 아닌 기억이 지닌 존재가치를 부각했다. 올 추석의 기억도 추억의 책갈피에 소중히 간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