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귀농한 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농장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단다.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냥 그렇게 자연의 생리를 좇아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변한 건 있다. 처음 몇 가지 소소하게 길렀던 채소, 과일, 화초의 수가 자그마치 300여 종으로 늘었다. 그 많은 식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지? 그다지 넓지 않은 농장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도 단박에 알아보기는 불가능하다. 비정형적으로 또는 제멋대로 작물이 산재하고 있거니와, 그마저도 수북이 자란 풀들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얼추 야생의 풀밭을 연상시키는 농장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리멸렬한 농사의 산물? 아니다. 농장주 한은영(59, 아르아르농장 대표)은 옥천군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선진농업 경영인이다. 매우 독특한 농법으로 순풍을 돛에 매단 배처럼 질주하고 있다.
서울에서 살았던 한은영이 이곳 옥천군 외진 시골로 내려와 관심을 가진 건 양봉이었다. 과천시 변두리에서 양봉을 했던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좀 익힌 양봉 기술이 있어서였다. 그래 벌통 몇 개를 놓고 소규모 양봉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급자족에 있었다. 이왕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길러 취하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 스타일의 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겐 수칙 하나가 있었다. 농약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시종일관 유지하겠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농장은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아래에 있다. 저 멀리 사방에도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싱그럽다.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지만 첫눈에 호감을 갖고 탄성을 터뜨렸다. 양봉을 할 만한 밀원(蜜源)도 있어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자급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산골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여기에서 산 15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농사를 했을 뿐, 계획적인 생산이나 판매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지?
“그렇다. 애초 무슨 구상을 가지고 귀농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농약 치지 않은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거둔 것들을 친지나 이웃들과 나누자는 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비닐하우스 두 동 외에 농업 시설이나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귀농의 나날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웠다.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 유쾌했다. 작물을 가꾸고 꽃을 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농사 초심자였던 만큼 유기농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싱싱하게 잘 자라는 재미에 빠져 무엇이든 갖다가 잔뜩 심었다. 한 평 땅에 20여 가지 채소류를 가꾸기도 했다. 서툰 재배 기술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여쭈어 보완했다. 그런데 농업기관에서 나온 이들이 작물마다 특화된 농약과 비료가 있다며 만류하더라. 자칫 다 죽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있는 그대로 자연조건을 고려해 심은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확량은 관행 농사보다 적을망정 생태농업을 통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이곳에서처럼 무농약농업, 생태농업을 하는 농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익성이 낮아 흔히 고전한다.
“무농약농업은 제초 작업부터 버거운 게 사실이다. 나는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거나, 발로 밟아 쓰러뜨려놓거나, 그냥 그대로 놔둔다. 농토를 최대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식물을 기르는 게 사리에 맞다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소 한 마리를 기를 생각도 했다. 기계장비로 밭을 가는 것보다 소 쟁기질로 일을 처리하는 게 땅이라는 자연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봤는데, 소 한 마리 사육을 위한 축사 허가가 불가능한 걸 알고 포기했다.”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먹거리 자급자족만으로는 생활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텐데.
“소득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해왔던 직업 활동의 일부를 이곳에서도 틈틈이 계속해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판매 목적의 농사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살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들
한은영에겐 서울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직업이 있었다. 그는 국악을 전공했다. 비파라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비파를 복원한 유공자이기도 한 그는 강의를 했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와 같은 경륜과 재능 일부를 시골 생활에 접목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로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을 꾸려왔던 것이다.
이채로운 건 또 있다. 그는 여동생 한은미(57)와 이곳에서 함께 산다. 즉 이 농장은 자매가 지향점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일군 노력의 소산이다. 한은미도 예술을 전공했다. 금속공예로 기량을 발휘했다. 이런 한은미 역시 텃밭 농사를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역에서 공예 관련 일을 함으로써 수입원으로 삼았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근 학교 아이들에게, 또는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재능을 나누며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에선 자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된 예술적 프로그램이 자주 펼쳐졌던 것 같다. 어쩌면 농장이 통째 두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날갯짓하는 오픈 스튜디오, 혹은 꿈의 공간일지도. 한은미는 요즘 인근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이날도 출근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삶이란 묘한 것이다. 사람을 미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변신이랄까, 한은영은 귀농 중기에 이르러 완전한 농부가 됐다. 직업으로 농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한편 이웃들과 결실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시나브로 농장 상황에 한결 긍정적인 변화가 오면서 판매 활동에 나서게 됐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풀들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 그러니까 남들에게 생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7~8년 전부터다. 당초 농작물 판매는 계획에도 없었고 예감하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우리 농장엔 방문객이 많았다. 구경 삼아, 체험 삼아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풀밭에서 자라나는 온갖 식물들을 신기해했다. 단장을 하지 않아 농장은 어수선했지만, 말 그대로 ‘자연이 준 선물’에 가까운 친환경 생산물을 거둔다는 데 관심을 갖고 지지해줬다. ‘정신 나간 농사’라는 말도 들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나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조차 우리가 나누어준 먹거리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구매를 원했고, 그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상업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저절로 고객층이 형성되다니. 이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신개념 판매 루트에 가까울 것 같다. 농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판로 문제가 선행적으로 자동 해소된 ‘넘사벽’ 마케팅이다.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덩달아 나서 주문이 잦았다. 그런 상황 변화에 따라 농장 일이 한결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배 꾸러미를 만들어 배송을 하거나 로컬푸드 마켓을 통한 판매 활동 같은 게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소규모 농장이라 생산 물량은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진 않지만 일찌감치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작은 가게도 차렸다.”
가게까지? 어떤 물건을 판매하나?
“식당 겸 농산물 매장을 겸한 공간이다. 먹을 수 있는 약용 꽃들을 콩처럼 넣어서 지은 밥으로 만든 ‘꽃김밥’이 주력 상품이다. 모든 상품이 자연농법으로 거둔 청결한 것들이라 인기가 있다.”
농장 연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농산물 판매와 체험 교육으로 얻는 수입,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매출 등을 합해 1억 원 이상이다.”
적지 않은 매출이다. 한은영은 애초 생태농업에 관한 인식조차 없이 그저 당연지사처럼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농사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풀들과 공생하는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그는 즐겁다. 소농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이득을 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하거나 순진한 농사라 할 수 있는 생태농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얻는 자신감과 보람 역시 크기만 하다. 그의 농사를 두고 ‘이상적인 미래 농업의 모델’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한은영의 농사법엔 인상적인 게 더 있다. 주변 농가들과 협업하는 방식이 그렇다.
“농사에 욕심부릴 것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토마토 3개를 수확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이웃과 나누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에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나의 농장 일이 이웃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 예컨대 마을 분들을 나의 고객들과 연결시켜 농산물 판매를 적극 거들곤 했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농장 일을 돕는다.”
농사는 물론 식당 일까지 하느라 일상이 매우 분주할 것 같다. 한 이틀쯤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이걸 어쩌나? 난 자유에 갈증을 느낀 적이 없다.(웃음) 내 딴엔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일도 어렵지 않다. 시장 할머니들과 사이가 좋아 사나흘 가게에 못 나가도 그분들이 알아서 척척 장사를 대신 해주신다. 행운처럼 난 귀농 이후 많은 주민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역시 즐거운 생활의 원천이다.”
10년 후 당신의 농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전 과거의 모습과 현재가 다르지 않듯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풀들은 여전히 가득하고, 새들과 곤충들이 지천이고,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현실에 만족이 커서 미래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그가 지닌 고민은 딱 한 가지. 어떤 방법으로 지역 친환경 농가들의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자신의 농사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남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이다.
한은영이 주는 귀농 Tip
•시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생활로 만족을 누리려면 우선 소박한 삶의 방식을 기획하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감성을 끌어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게 ‘소확행’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사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 치밀한 준비 없이 귀농해 큰돈을 벌 욕심에 사로잡힐 경우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생계유지조차 버거울 수 있는 게 농사라는 걸 유념하자. 큰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낫다.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마라. 농토도 가급적 작게 확보해 농사를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
•그림 같은 집보다 편안한 집을 지어라.
•좋은 풍경만 보고 산속 외진 곳에 터를 잡는 건 좋지 않다. 밤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떠날 수밖에 없는 불운을 초래할 수 있다.
마카오에서 진행 중인 ‘샌즈 골프데이’ 행사 참석을 위해 방문한 교포 선수 이민지(호주)를 현장에서 만났다. 이민지는 “밤새 잠도 못 자고 와 힘들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전날 승리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계속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민지는 22일 경기도 파주시 서원밸리 컨트리클럽 서원힐스 코스(파72·6천369야드)에서 열린 LPGA 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총상금 220만 달러)에서 최종 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우승했다. 이 승리로 이민지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10승 고지에 올랐다.
이민지는 이번 승리가 10승이라는 것 이외에 한국에서의 첫 승리라는 점에 의미를 두었다.
그는 “부모님이 모두 한국 분이셔서, 모국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 우승을 해보고 싶었다”며 “할머니와 친척들까지 현장에서 응원해줘 연장전에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골프스타 남매로 활약 중인 동생 이민우에 대해서는 ‘좋은 동반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동생과 사이가 좋고, 경기에 대한 조언을 가감 없이 주고받는 사이”라며 “게임이 안 풀릴 때는 응원도 하고, 잘했을 때는 칭찬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이민지는 랭킹 1위에 대한 욕심도 비쳤다. 그는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고,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며 “좋은 경기력을 통해 랭킹을 계속 차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스타 선수로서의 생활에 대한 질문에는 “신인 시절이나 지금이나 많은 연습량을 유지하는 것이 때론 고통스럽고 쉽지 않다”면서도, “최근에는 마사지사와 투어를 함께하며 도움받고 있는데, 경기력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징크스와 관련한 질문에는 플레이 스타일이 ‘쿨한’ 편이라며, 특별한 징크스는 없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이민지, 이민우 남매를 후원하고 있는 라스베이거스 샌즈사의 주최로 진행됐다. 라스베이거스 샌즈 측은 이번 행사에 이민지, 이민우, 콜린 모리카와, 리디아 고 등을 초청해, 마카오 지역 사회와의 교류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자회사인 샌즈 차이나는 마카오에서 대형 복합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으로, 마카오 내 여러 호텔을 소유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연결하는 고속 페리도 운행 중이다.
“여러분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노주선 한국인성컨설팅 대표가 물었다. 중장년에게 은퇴 후 대인관계는 ‘너무 어려운 숙제더라’고 하니 돌아온 질문이다. 대인관계를 재정립하고 싶다는데 꿈 이야기라니.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은퇴 후 고립되지 않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만들고 싶은 중장년이라면 그의 말을 들어보자.
노주선 한국인성컨설팅 대표는 기업에서 리더십 교육, 채용 평가, 저성과자 교육, 심리 케어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수많은 중장년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에서 30년을 일하고 임원 자리에 올랐어도, 공공기관에서 고위 공무원 자리까지 올랐어도, 은퇴하는 순간 마음 둘 곳을 잃는다.
나이 50이면 절반 살았다
그를 만난 중장년들은 많은 것을 하소연한다. “요즘 MZ세대(밀레니얼+Z세대)와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말로만 듣던 꼰대가 나인가 싶다. 집이라고 다를까. 아내는 매일 모임 있다고 나가고 회사에만 있는 줄 알았던 MZ세대는 우리 집에도 있다.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도, 취미 생활 하려고 가입한 골프클럽에서도 재력 자랑, 자식 자랑이 가득하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점점 더 위축될 일만 생기는 것 같다. 한창때는 안 그랬는데, 사람 만나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이다.
은퇴를 앞둔 중장년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다. 노 대표는 재취업 교육을 할 때 항상 ‘어릴 적 꿈’을 묻는다. 50대는 인생의 후반이 아니라, 인생의 절반을 온 것일 뿐이라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애주기를 재정립해볼까요? 건강수명이 76세쯤 됩니다. 60세에 은퇴해도 16년은 활동을 더 해야 하죠. 30세 정도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고 가정하고, 민간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은퇴 나이를 평균 내어 55세쯤 은퇴한다고 생각해봅시다. 25년을 활동했고, 앞으로 20년을 더 활동해야 합니다. 건강수명을 기준으로 한 거니 기대수명인 83세까지 생각하면 활동을 마치고도 여생이 더 남아 있어요. 자, 0세에 태어나 90세에 죽는다고 가정하고 그래프를 그려볼까요? 우리는 이제 인생의 절반을 왔을 뿐입니다.”
노 대표는 남은 20년을 설계할 때 어릴 적 꿈을 떠올려보라고 한다. 지금 다니던 직장이 꿈이었던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대통령, 과학자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이제 와 대통령을 다시 꿈꾸자는 말이 아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왔다면, 이제는 노하우를 펼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에 좋은 때라는 말이다.
50대라면 인생의 절반을 살았을 뿐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또 있다. 은퇴 후의 삶은 이전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나의 사회적 위치가 어디였든,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다 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경험치가 있기 때문에 리더의 역할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예요. ‘왜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거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갈등이 시작될 수밖에요.”
“여러분의 삶을 존중하세요”
관계로부터의 고립은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시작된다. 노 대표는 자존감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짚었다. 은퇴 후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면 대인관계도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자존감을 잃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근본은 자기 존중감,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나는 유능한데 왜 사회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지’라고 생각하면 ‘내가 진짜 잘하는 게 맞나?’ 의심하게 되고, ‘그동안 해온 게 무슨 소용인가’라며 우울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스스로 말해줘야 합니다.”
노 대표는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을 만든 에릭 에릭슨을 언급했다. 사람은 60세가 넘어 노년기에 들어서면 지혜와 자아 완성(Integrity)의 특성을 가져야 한단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 살아왔고, 나의 가족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체력도 환경도 젊었을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노 대표는 ‘이전과 삶이 달라진다’는 걸 받아들이고 사회로부터의 인정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고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채우는 게 너무 어렵다면 또래들을 만나보세요. ‘우리 왕년에 그랬지’라며 추억을 나누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젊은 세대에게 하면 꼰대가 되죠. 윗세대에게 말하면 ‘우린 풀 뜯어먹고 살았다’고 합니다.(웃음)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또래는 그 마음을 알아요.”
노 대표는 아예 중장년의 ‘라떼는 말이야’ 성토장을 열어준다. 그가 운영하는 서비스 중에는 무조건 ‘왕년에~’로 시작하는 말로 글을 써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러면 또래들이 ‘그때 저도 그쪽에서 일했는데, 우리 참 힘들었죠’라며 공감해준단다. 나의 현실을 인정하고 내가 당당하면 관계도 잘 풀린다. 노 대표는 말한다. “Respect your life! 여러분의 삶을 존중하세요.”
대화, 어떻게 하는 건가요?
그럼에도 대인관계를 맺는 일, 타인과 대화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노주선 대표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나이를 잊을 것. 둘째 맞춤형 접근을 할 것. 셋째 나의 쓰임을 살필 것.
“여러분은 이제 고등학생쯤 된 겁니다. 앞으로 20년을 더 활동할 거니까요. 그러니 나이를 잊어야 합니다. 만약 고등학생 과외를 하다가 초등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야겠죠? 과거에 내가 잘나갔더라도 현재 내가 있는 곳에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경험을 어떻게 적용할지 나의 쓰임을 잘 살펴보세요.”
‘관계’라 함은 첫째 관계를 맺을 대상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셋째 관계를 통한 이익과 만족이 있어야 유지된다. 중장년은 주로 업무나 성과 중심의 관계 패턴을 많이 배워왔다. 사적인 관계가 많지 않고, 혼자 무언가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배경이다.
“80대 이상이면 일제강점기를, 70대 이상이면 6·25전쟁을 겪었어요. 행복, 즐거움, 만족 등의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예요. 칭찬은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거든요. 게다가 남성성이 강조되는 가부장적 문화였죠. 우리나라를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끈 주역임에도 50대 베이비붐 세대는 부모 세대에게 칭찬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비업무적 대화를 어려워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는 업무적 삶에서 비업무적 삶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그래서 비업무적 대화를 연습해야 한다. MZ세대와의 대화가 어려운 중장년이라면 더더욱 성과 중심적 대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 대표는 ‘스몰 토킹’을 연습해보라 제안했다. 미국에 이민을 간다면 미국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MZ세대의 관심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하시면서 우리 중장년 말로 ‘아이스 브레이킹’ 다들 해보셨을 거예요. 스몰 토킹이 그런 거예요. MZ세대의 관심사로 워밍업을 해보세요. 비업무적 대화는 이런 연습이 쌓여야 합니다. 만약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는 게 너무 어렵다면 접점을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자녀가 아이돌에 푹 빠져 있는데, 나는 아이돌 노래가 너무 정신없어 듣기 힘들 수 있어요. 그럴 때는 운동이나 게임처럼 함께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보는 거죠. 관계의 재정립은 비업무적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중장년이 대인관계가 어렵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관계의 편향’ 때문이다. 지나치게 업무적인 관계가 많다는 것. 따라서 동호회나 취미 활동으로 비업무적 관계를 늘려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다만 비업무적 관계를 목적으로 할 때는 성과 지향적 모임보다 취향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 좋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돼?’라고 생각하면 슬퍼질 수밖에. 노 대표는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30년을 한 직장에서 일했다면 얼마나 대우받았겠어요? 하지만 은퇴 후는 달라요. 20대 청년들과 경쟁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면, 20대 청년과 같은 급여를 받지만 30년간 쌓은 노하우가 있으니 중장년은 얼마나 훌륭한 인재들이에요! 신혼부부가 빚을 내어 집을 마련했어요. ‘우리 이 빚을 언제 다 갚아?’라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도 우리가 집을 마련했네’라고 생각하면 다르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예요.”
은퇴 후 재취업이 쉽지 않을 때, 가족 사이에서 겉도는 것 같을 때, 마음 나눌 친구가 없을 때 좌절하지 말고 나를 안아주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왔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여러분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십니까? 지금부터 30분 동안 자신에게 칭찬해주세요. 리스펙트 유어 라이프를 꼭 기억하세요!”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등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주거 대안으로 ‘공동체 주택’이 떠오르고 있다. 공동체 주택이란 독립된 공동체 공간(커뮤니티 공간)을 설치한 주거 공간으로, 공동체 규약을 마련해 입주자 간 소통‧교류를 하며 생활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동체 활동을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말한다. 그간은 청년을 중심으로 공동체 주택이 증가·보급되어 왔는데, 초고령사회를 앞둔 현재는 고령자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정말 고령자 공동체 주택은 필요할까, 그리고 장단점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고자 서울시 내에 있는 어르신 공동체 주택 ‘해심당’을 직접 찾아가 봤다.
‘따로 또 같이’ 공동체 주택
서울시 도봉구 소재의 어르신 맞춤형 공동체 주택인 ‘해심당’(海心堂)은 바다와 같은 마음과 따뜻한 햇살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르신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집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도봉구청, 사회단체가 협업해 만들었다. 기존 노후 주택을 신축해 재탄생된 곳으로 2021년 문을 열었다.
총 21세대가 살 수 있으며, 1층에는 장애인, 2·3층은 1인 가구, 4층은 부부 세대가 거주할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배리어프리(무장애) 디자인이 도입됐다. 거주 공간뿐만 아니라 복도 등 공용 공간에도 손잡이를 설치했고, 단차를 최소화했다. LH 최초로 소규모주택 배리어프리(BF·무장애) 인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해심당의 입주 조건은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50% 이하’로 정해져 있다. 임대료 시세는 주변 시세의 45% 수준으로 보증금은 월 800만 원, 임대료는 월 40만 원 정도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저렴하다고 느껴지지만,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앞서 말했듯이 4층을 제외하고는 해심당의 거주 공간은 1인 가구를 위해 설계됐다. 입주를 원해 방을 둘러 본 이들은 ‘집이 임대료 대비 좁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터줏대감인 이현민 자치회 총무 역시 “공간 자체가 작긴 하다. 입주 당시 물건을 많이 정리했고, 늘 정리해야만 한다. 반대로 장점도 되는 것 같다. 공간을 깔끔하게 유지하게 되고, 또 생활하기 편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심당의 매력은 ‘공동체 주택’이라는 데 있다. 이에 따라 1층에는 카페 ‘향’이 있고, 2층부터 4층까지 각 층에는 입주민들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마 의자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옥상의 ‘키친 가든’이다.
키친 가든은 해심당 설계에 참여한 이연숙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특히 신경 쓴 공간이다. 정원과 텃밭이 합쳐진 복합 공간으로 도시 농업이 가능하도록 체계적으로 설계했다. 꽃, 식물뿐 아니라 채소, 허브 등을 심고, 입주민들은 직접 기른 작물을 수확해 먹는다.
특히 키친 가든 관리를 맡은 이현민 총무는 이곳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매일 정원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무엇이 심어져 있고, 열매는 언제 맺는지 다 알고 있다. 이현민 총무는 “교수님이 친환경을 목표로 만든 곳이라서 사용하는 비료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주민들이 화학 비료를 막 뿌려서 나는 반대했다. 그래서 우리가 주민인데 왜 교수님 편을 드냐고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공용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보니 갈등도 종종 일어났다. 입주민들은 얘기를 나누며 의견을 조율했고, 본래의 목적대로 친환경 도시 정원 형성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기른 작물을 나눠 먹으면서 이웃 간의 정도 더욱 끈끈해졌다. 올여름에는 샐러드 파티도 열렸다. 이현민 총무는 “최근에도 호박이 나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요리를 못 하시는 분들은 안 가져가려고 해서 내가 감자를 사서 호박과 같이 전을 부쳤다. 그래서 모두에게 호박이 돌아갔다”라고 덧붙였다.
가족 아닌 가족, 노인 갈등 해결해야
해심당은 노인들이 이곳에서 공동체로 외롭지 않게 살며, 자립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설계된 곳이다. 초반에는 일자리 제공도 했다. 실제로 이현민 총무는 입주와 동시에 일자리가 생겼다. 1층 카페 ‘향’에서 실버 바리스타로 일한다. 이 총무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는 열정을 발휘했다고.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데 해심당 입주 후 2년째 일하고 있다. 집에서 내려오면 바로 일할 수 있고, 주민들과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취미, 운동 등을 함께 하는 커뮤니티 활동은 예상과 달리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LH의 공동체 활동 지원이 끊긴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해심당의 임대 관리를 맡은 김익 유니버설하우징협동조합 본부장은 “다른 서울시의 공동체 주택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끼리 공통점이 있고, 유대관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만 65세 이상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면서 “작년에는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총 16강짜리의 심리 치료 및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했다.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입주민들의 체력적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김익 본부장은 짚었다. 그는 “사실 건강한 분들이 계셔야 커뮤니티 활동도 가능하다고 본다. 해심당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 같이 모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면서 “벌써 두 분이 돌아가셨고, 곧 요양원에 가신다는 분도 계신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공동체 활동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어르신들이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민 총무는 “정말 많이 싸웠고, 지금도 맞춰가는 과정인 것 같다. 우리는 가족 아닌 가족 사이기 때문에 싫어도 매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익 본부장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르신들이 사소한 것으로 많이 다투신다. 그런데 금방 화해하시기도 한다”면서 “싸우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김익 본부장은 이현민 총무가 공동체 운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칭찬했다. 이현민 총무는 “참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남편이 부도를 두 번씩이나 맞아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저는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제가 어디를 가나 몇 명만 모이면 리더가 되는데, 그래서 여기서도 총무가 됐다. 총무라고 어떤 보수가 있는 것도 없는데,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이라 불이익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꼭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현민 총무는 공동체 주택에 장점이 더 많다고 느낀다. 그는 “다 같이 모여 사니까 외롭지 않은 게 제일 크다”라면서 “저도 누군가 도와줄 수 있고, 제가 어려움에 처하면 저를 도와주는 분들도 많다. 그럴 때 의지가 되고 보람도 많이 느낀다. 가족처럼 외식하러 나가서 맛있는 것 먹는 것도 좋고”라고 설명했다.
김익 본부장은 “우리 회사에서는 나중에 실버타운을 만드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이곳을 관리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고독사 예방 등, 노인에게 공동체 주거 공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간 운영 기관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 지자체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심당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이현민 총무도 앞으로 노인 공동체 주택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배우 조은숙(53)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어느 순간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배우가 된 그는 데뷔와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남들 다 겪는다는 무명 시절도 없었다. 그러나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도 늘 가슴속에 자리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진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찾고 있다.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를 지녀 동네에서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소녀 조은숙. 연예인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는데 정작 그는 네모 상자 텔레비전 속에 출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막 흔든 적이 있어요. 그 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싫었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중에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는데, 다 재미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연기는 정말 할수록 재밌어요. 결국에는 배우가 될 운명이었을까요? 신기한 일이죠.”
텔레비전 일화만 봐도 조은숙은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다. 그 감수성을 글로 풀었고, 미모 칭찬만큼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그는 어느 날 지인이 연출한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극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다. 그게 이어져 몇 번 무대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홍상수 감독의 눈에 띄었다. 그 계기로 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한 조은숙은 1996년 ‘제17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1997년 ‘제20회 황금촬영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배우를 꿈꾼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우가 된 거죠. 무명 시절도 없었고요. 갑자기 얼굴이 알려진 셈인데,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낯설고 힘들었어요.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죠. 연기라는 게 얼마나 치열해요. 너무 긴박하게 촬영이 진행될 때는 덩달아 쫓기면서 연기하게 되는데, 집에 돌아가면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스스로한테 너무 화가 나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구나,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진심이구나를 느꼈습니다.”
‘하늘의 인연’으로 고민 해소
“지금까지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령 불편한 옷을 입고 있으면 아무리 예뻐 보이려고 해도 어색하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은 거죠.”
조은숙이 최근까지 품고 있던 고민이다. 연기 활동은 오래 했지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KBS 2TV ‘야망의 전설’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에서 비련의 여인 역할을 소화했고, KBS 2TV ‘내 딸 서영이’, ‘별이 되어 빛나리’ 등에서는 사연 있는 악녀로 분했다. MBC ‘세 친구’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그나마 자신의 실제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까칠하다거나 말수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조금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의외로 털털하다며 놀라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허당기가 많고 소녀 같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새우깡이랍니다. 계속 챙겨줘야 해서 손이 많이 간다는 의미예요.(웃음)”
이러한 고민에 한창 빠져 있을 때 MBC 일일 드라마 ‘하늘의 인연’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조은숙이 맡은 나정임은 모든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캐릭터인데, 산장 화재 사고로 기억을 잃고 어린아이처럼 된 상태다. 가끔씩 기억이 돌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는 복수의 핵심 열쇠로 활약할 것을 기대케 한다.
“제가 성격이 어리바리하다 보니 실제 나와 비슷하면서 재밌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죠. 어딘가 모자란 바보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나정임을 연기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고민이 조금은 해소됐죠. 그동안 KBS 드라마 위주로 출연해서 MBC 드라마 출연은 오랜만이었어요. 처음에는 낯을 가렸는데, 금세 제 실제 성격이 나오더라고요. 스태프분들이 ‘그냥 평상시대로 연기하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연기가 자연스럽게 잘 나오고, 재밌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모성애 넘치는 엄마
‘하늘의 인연’의 나정임이 이전 캐릭터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또 있다. 바로 가슴으로 낳은 딸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조은숙은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누군가의 고모나 이모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기혼 캐릭터라고 해도 남편은 있어도 자녀는 없었다. 실제 세 딸의 엄마이기도 한 조은숙은 나정임의 모성애에 매우 공감하며 연기를 펼치고 있다.
“‘하늘의 인연’을 찍으면서 SNS로 좋은 반응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고아로 자란 분인데 저의 SNS에 ‘상처를 치유받았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너무 감사한 거죠. 지금도 그분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또 결혼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고아나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많이 했어요. 당시 만났던 한 친구가 SNS로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감동적이고 감사했어요.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데,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조은숙이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은 또 있다. 아니, 매우 많다. 바로 그동안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이다. 조은숙은 “내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는 내가 낳은 또 다른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이 끝나면 나는 떨어져 나가지만, 그 캐릭터는 살아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애정을 전했다.
그럼에도 친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2005년 광고기획사 대표인 박덕균 씨와 결혼한 조은숙은 슬하에 세 딸을 두고 있다. “가족은 산소 같은 존재다. 산소의 소중함을 평소에는 못 느끼지만 산소가 없으면 죽지 않나”라고 표현한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세 딸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자랑은 물론 교육, 가치관 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천생 엄마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원래 아이를 셋 낳고 싶었는데, 신기하게 그렇게 됐죠. 아이들이 다 다르게 생겼고, 매력도 다 달라요. 저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거예요. 엄마를 따라 연예인을 하는 것도 찬성입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이타적인 사람이에요. 아이들한테도 항상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죠. 살면서 힘든 일을 겪을 수도 있고 고통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꽃길만 걸어요’라는 표현을 지양해요. 그 꽃길을 걷기 위해서는 누군가 돌을 치워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 아이들이 그 돌을 치워주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꿈 찾는 중년
조은숙은 2012년 ‘초콜릿 복근’을 공개해 ‘몸짱 스타’로 화제를 모았다. 셋째를 출산하고 3개월 만에 20kg을 감량하고 얻은 식스팩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었는데 그는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매일 근력 위주 운동을 즐기면서 한 덕분이다.
“몸매 관리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정도의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준점도 없어요. 그냥 운동을 좋아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젊은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촬영할 때 주얼리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담을 곳이 없었는데 마침 한 번도 안 쓴 쓰레기통이 있어서 거기에 주얼리를 담았죠. 그랬더니 그 쓰레기통이 보석함이 된 거에요. 반대로 보석함에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통이 되겠죠. 그때부터 살면서 나에게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까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예체능에 능통한 조은숙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배우는 늘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미국 액팅 스쿨에서 공부하기’라고 밝혔다.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고 남들한테 밀린다는 생각에 갈급했다. 연기에 관한 책이 나오면 바로 사서 읽으면서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연기가 그 안에 갇혀버린 때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극복 중인 단계에 있는데, 미국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워보고 싶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연기하던 때가 그립다”라고 설명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는 꿈이 뭐야?’라고 묻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제 꿈이 배우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배우가 인생의 끝일지, 또 다른 뭐가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저는 여전히 꿈이 뭔지 찾고 싶고, 그래서 계속 뭔가를 배우려는 것 같아요. 저의 또 다른 버킷리스트는 대형 오토바이 타기예요. 자격증은 취득했고, 오토바이를 구입해 타고 싶어요. 연기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조은숙은 주어진 삶을, 찰나의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시간 아까운 일이다. “지난 과거를 후회할 때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고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차피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배우는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하게 된 일이지만 즐기면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조은숙은 배우가 되어 지금처럼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것 같다.
“중년의 시기에 힘들고 외롭고 헛헛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벌써 이렇게 살아왔나 싶고, 지나간 세월이 너무 아쉬울 테니까요. 후회되는 순간도 많겠죠.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최선이고 최상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나간 날은 돌아오지 않아요.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시간을 살아가는 중년 여러분, 늘 응원합니다!”
겉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인데 듣는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칭찬받았을 뿐인데 옆에 있는 내가 언짢았을 때도 떠오릅니다. 우리 왜 이러는 걸까요? 심보가 못되고 밴댕이 소갈딱지마냥 그릇이 작아서 그런 걸까요?
칭찬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다음 네 가지 상황에서 칭찬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독자 여러분이 맞혀보실까요? 답은 천천히 알려드릴게요.
#장면 1. 식탁에서
고 여사는 어제 다녀온 읍내 오일장에서 코다리 한 코(네 마리)를 사와 바닥에 무 깔고 갖은양념으로 칼칼하고 시원한 코다리찜 저녁 밥상을 차렸습니다. 맛나게 드시던 바깥양반이 한마디 하시네요.
“코다리가 물이 좋아 그런지 참 맛나네. 역시 음식은 재료가 중요해.”
#장면 2. 산악회 모임에서
격주로 정기 산행을 하는 OO산악회에서 지난주엔 아차산에 올랐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여자 회원 김정미(가명) 씨. 회원 모두 무사히 하산한 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안부를 주고받던 중, “와 우리 정미 씨, 간만에 봐서 그런지 얼굴이 화사하니 찔레꽃보다 곱네요” 하며 산악회장이 반깁니다.
#장면 3. 전화 통화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처음 치르는 대규모 행사에 손님이 얼마나 올까 노심초사하며 밤낮없이 준비하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던 이 부장에게 전화를 건 최 이사.
“행사 참 좋았어. 자네가 수고 많았지. 덕분에 내가 인사를 정말 많이 받았지 뭐야. 내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했네.”
#장면 4. 직장에서
“자, 우리 팀이 이번 달 매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선진(가명) 씨, 일어나 보세요. 다 같이 박수!”
마케팅1팀장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호명한 직원을 일으켜 세웁니다.
공자도 어쩔 수 없었던 것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
‘논어’(論語) 첫 부분 ‘학이’(學而)편에 실려 있는 이 구절은 1970~80년대 한문 교과서에 나왔을 만큼 중년 이상 세대라면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왜 공자는 배움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이 말을 했을까요. 공자 생애를 잠깐 살펴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쳐 도덕과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유학(儒學)을 뿌리내린 공자(孔子). 노(魯)나라에서 나고 자라 형조판서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라는 벼슬을 살았으나, 실각(失脚)한 뒤 제자들을 이끌고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천하를 돌며 뜻을 같이할 군주를 찾아다닙니다. 춘추시대 군웅이 할거하던 시절, 공자에게 무수한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심층면접, 때로는 압박면접을 일삼던 당시 제왕들. 그러나 정작 공자는 아무에게도 등용되지 못합니다. 스승인 공자 대신 공자학당 제자 가운데 괜찮은 인물을 추천해줄 수 없냐는 제안만 받을 뿐입니다.
다시 앞 구절로 돌아가 풀이해보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란 뜻입니다. 공자의 솔직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당신 제자 중에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천거해달라는 주문을 들었을 때, 무려 3000명에 이르는 제자를 거느렸던 공자 마음은 어땠을까요. 내가 이렇게 훌륭한 스승인데 나를 제치고 제자를 찾다니 참 얄궂다 싶고,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런 말을 남겼을까 싶습니다. 공자도 타인이 알아주고 칭찬받고 인정해주기를 그렇게 갈망했나 봅니다.
약이 되는 칭찬, 매를 버는 칭찬
이제 필자가 낸 문제의 답을 찾아볼 시간입니다.
네 가지 장면 가운데 칭찬이 아닌 경우는 몇 번일까요.
필자가 원하는 정답은 바로 1, 2, 4번입니다. 칭찬인 경우는 단 하나, 3번 전화 통화이고 나머지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칭찬이 아닙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가 속출하고 있네요. 도통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당신에게 찬찬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코다리찜을 맛나게 드신 고 여사 남편은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겉보기에 분명 칭찬인 말이 어째서 칭찬이 아니라는 걸까요. ‘코다리가 물이 좋아 맛나다, 음식은 역시 재료가 중요하다’는 말은 물론 틀린 말도 아니고 누구를 비난하는 말은 더더욱 아닌 듯 보입니다. 여기서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 마음이 관건입니다. 고 여사는 남편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답니다.
“당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요. 코다리 물이 좋은 게 아니라 내 음식 솜씨가 좋은 거겠지요. 무슨 말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나요?”
1번 장면이 바로 매를 버는 칭찬입니다.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칭찬이랄까요.
여기서 칭찬이 약이 되려면 사람 자체를 칭찬해야 합니다. 칭찬의 대상이 물건이나 코다리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코다리야? 나야?” 앞에 살아 있는 아내와 죽은 코다리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자주 저지릅니다. 사람 자체, 그 사람의 성품이나 능력, 솜씨, 마음씨, 맵시 등을 칭찬해야 듣는 사람이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해합니다.
칭찬은 은밀히? 아니면 공개적으로?
앞선 질문 중 2번과 4번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보통 산악회 같은 친목 모임이나 공적인 회의석상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로, 누구 한 사람을 지목해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멋지다거나 찬사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성과에 기여한 직원 한 사람을 호명해 박수를 유도하며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할 때 역효과가 납니다.
자녀에게 꾸중을 하거나 조언을 해야 할 때, 따로 불러 은밀히 해야 한다는 데는 다들 동의할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 혼나거나 비난받는 것은 굉장한 모욕을 주기 마련입니다. 칭찬 역시 남들 앞에서 할 경우 칭찬받는 당사자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되고, 심하면 모멸감을 느끼게도 합니다. 대놓고 형만 칭찬하고 예뻐한다면 동생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배려를 빼먹은 헛된 칭찬
‘화사하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그 여자 회원은 기분이 날아갈지 몰라도 그 자리에 함께한 다른 여자 회원들은 상대적으로 칙칙하고 못생겼다는 말처럼 들려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어요. 직장 회의 시간에 일 잘한다고 칭찬받는 그 직원 외에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조직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기부여 대신 자괴감을 느끼고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칭찬도 조언이나 꾸중처럼 은밀히 일대일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기를 권합니다. 막상 칭찬받는 당사자도 마음이 편하고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주변에서 경쟁 상대로 의식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자리에 없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 역시 나머지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합니다. 굳이 같이 있지 않은 누군가를 콕 집어 인물이 잘났다느니, 총명하다느니, 인간관계가 좋다느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공부 잘하는 자녀만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상급자가 자리에 없는 직원을 굳이 칭찬할 경우 그 조직이 건강할까요.
칭찬에 인색한 까닭
기성세대일수록 또 한국인일수록 칭찬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해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하는 데 인색한 편입니다.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해본 경험이 없거나 잘한 일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부족하거나 실수한 부분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즉각 반응하는데, 켄 블랜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에서는 이것을 ‘뒤통수치기 반응’이라 부릅니다.
지나친 칭찬이 필요할 때
필자가 20년 전쯤 미국에서 1년 동안 지내면서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강사에게 스키를 배웠는데, 처음 해보는 거라 넘어질까 두려워하던 제게 ‘잘한다! 최고다! 완벽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강사를 믿고 중급자 코스까지 겁도 없이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또 운 좋게 골프를 처음 배우게 됐을 때, 서툰 스윙에도 젊은 강사는 ‘Beautiful!’, ‘Perfect!’를 연발하며 생초보인 필자를 안심시키고 맘껏 골프채를 휘두르게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수영이나 테니스를 배웠을 때 필자는 단 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돌고래처럼 날아다니는 기존 회원들에게 주눅 들어 있는데 칭찬은커녕 비교나 안 당하면 다행이랄까요. 운전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오죽하면 부부가 운전 가르치다 그 차로 가정법원 앞에 도착해 이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습니까.
칭찬은 구걸 말고, 비난에 주눅 금지
그렇다고 평생 칭찬의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칭찬이 꼭 득이 되는 것만도 아니니까요. 남이 해주는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대신 내가 먼저 칭찬하고 인정하고 격려해준다면 오히려 칭찬의 노예가 아니라 칭찬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닐까요. 가끔은 아니 자주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맙시다.
오늘 그 상황에서 격분하지 않고 잘 참았어. 멋지다, 나라는 사람.
하기 싫은 분리수거, 아내한테만 떠넘기지 않고 먼저 일어난 내가 했네. 참 잘했어.
거울 보다 깜짝 놀랐네. 미간의 깊은 주름 보고 화난 줄 알겠어. 웃으니까 근사하네.
‘남이 비소(鼻笑)하는 것을 비수(匕首)로 알고, 남이 조소(嘲笑)하는 것을 조수(潮水)로 알라’는 옛 말씀처럼 전쟁 중에 대장이 비수를 얻어야 적진을 헤쳐 나올 것이고, 용이 조수를 이용해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칭찬보다는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칭찬에 연연해 자기중심을 잃기보다 비소와 조소를 역이용하는 지혜와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대접받고 싶습니까? 친절하십시오.
존중받고 싶습니까? 친절하십시오.
인정받고 싶습니까? 친절하십시오.
성공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친절해야지요.
건강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친절해야지요.
행복하고 싶습니까? 친절하고
친절하고 또 친절해야지요.
연기가 옆으로 기어가는 굴뚝
우리나라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자로 첫손에 꼽히는 이는 아마 경주 최부잣집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일화와 뒷이야기가 무성하지만 그 가운데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수평 굴뚝’ 이야기입니다. 보통 굴뚝은 지붕 꼭대기에 만들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먼발치에서도 밥 짓는 연기가 하늘로 솟는 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반면 최부잣집은 마루 아래 섬돌 밑에 가로로 굴뚝을 냈는데, 아궁이에 불 때서 밥하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기어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배곯는 이웃들에게 설움이 되고 상처가 될까 봐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복 짓는 경주 최부잣집
만물이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 보통 양력 5월 21일쯤으로 추운 겨울 견딘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시기지만, 정작 일반 서민들은 먹을 양식이 떨어져 ‘한 많은 보릿고개’니 ‘춘궁기’(春窮期)니 하며 목숨 부지하기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딱 그런 때 누군가 새벽에 최부잣집 문 앞을 말끔히 쓸고 돌아가면 안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뉘 집 빗질 자국인가?” 하고 물어보고 먹을 양식을 보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양식 구하러 다니기 곤란했을 가장의 체면도 세워주고 자존심도 구기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던 최부잣집 전통에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덕을 베풀더라도 상대를 함부로 하지 않는 친절하고 다정한 마음이 대를 이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책이 아니었을까요. 경주 최부잣집이 자리 잡은 터가 명당(明堂)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음택(陰宅)인 묘지가 아닌 양택(陽宅)인 집이 명당일 경우 복이 당대에 그친다고 하는데, 최부잣집은 스스로 복을 짓고 또 지어오면서 그 기운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남이 버린 행운 줍는 오타니 쇼헤이
3월 22일 열린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결승전에서 3번 지명타자로 맹활약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가 9회 초 다시 마무리 투수로 나와 야구 종주국 미국을 물리치고 우승컵과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대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오타니는 훤칠한 키와 출중한 외모뿐 아니라 평소 몸에 밴 특별한 태도와 행동으로 더욱 관심을 끌었습니다. 1994년생인 그는 운동장에서 ‘쓰레기 줍는 야구선수’로 불립니다. 경기 중에 출루하거나 투구(投球) 사이에 담배꽁초나 휴지가 눈에 띄면 바로 주워 유니폼 주머니에 태연히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운(運)을 줍는 겁니다.”
오타니가 강조한 운은 그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직접 만든 ‘만다라트(Mandal-Art : 목표를 달성하는 발상 기법) 계획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최종 목표인 ‘8구단 드래프트 1순위’를 달성하기 위한 9가지 세부 목표 중 하나인 ‘운’을 이루기 위해 인사하기, 쓰레기 줍기, 청소, 심판에게 공손한 태도, 물건을 소중히 쓰자 등을 적어놓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룬 성공의 밑바탕엔 작은 친절이 쌓이고 쌓여 대운으로 작용한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입니까? 불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회교도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친절입니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지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필자는 문득 법정스님이 그립습니다. ‘무소유’(無所有)라는 어려운 가르침보다 훨씬 쉬운 ‘친절’(親切) 한마디에 사랑과 자비, 인(仁)과 존중을 담았으니까요.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법정스님. 스님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며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2004년 하안거(夏安居) 해제 법문과 집필한 책(‘아름다운 마무리’)을 통해서 누누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친절의 반대말은?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 레프 톨스토이
도대체 친절은 뭘까요?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한 것을 친절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친절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보통 ‘불친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필자는 ‘갑(甲)질’이 친절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나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행하거나 괴롭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친절하게 대하고 존중하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과는 딴판입니다. 운행 중인 항공기를 억지 회항시킨 희대의 ‘땅콩 유턴’ 사건부터, 고용주가 저지르는 끔찍한 폭행과 욕설,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임금으로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무수한 사례까지, 열거하기 고통스러울 만큼 갑질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안(童顏)의 비결, 친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의대 연구팀이 코로나19 기간에 10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긍정 공명’(Positive Resonance)이 높을수록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긍정 공명’은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는 친절한 마음과 태도를 말합니다. 친절을 실천한 사람들은 스트레스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23% 낮다고 합니다. 나아가 친절함은 염색체가 분열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는 ‘텔로미어’(Telomere)의 감소 속도를 느리게 하면서 노화를 늦춰 어려 보이는 효과까지 있다니, 돈 안 드는 동안(童顏) 수술이 바로 친절입니다.
뇌 속에 새기는 ‘건행선’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친절을 꾸준히 실천할 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도파민이 뇌 속에서 분비된다고 합니다. 기분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함은 물론, 심장 박동 수를 느리게 하고 관상동맥 질환 위험도 줄여줍니다. 전에 느꼈던 기분 좋은 경험을 다시 느끼려고 우리는 친절한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는군요.
친절과 관대함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인간관계를 다정하게 묶어주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드는 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수많은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친절은 전염성이 강해 다른 사람의 친절한 행위를 목격할 경우 또 다른 사람에게 친절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고 합니다. 일종의 ‘친절 피드백’이자 ‘친절 부메랑’ 효과입니다. 건강과 행복을 주는 급행열차, ‘건행선’이라 부를 만합니다. 길을 새로 놓았으니 누구든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답니다. 그것도 공짜로 말입니다.
아직도 친절이 어려운 당신에게
타인에게 공감과 관심이 잘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절을 베푸는 사람한테도 ‘왜 굳이’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꺼리는 사람이라면, ‘Awe Walk’라고 불리는 ‘의식적인 산책’을 권해드립니다. 광활하고 웅장한 대자연뿐 아니라 동네 천변(川邊)을 산책하면서 해 질 녘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면 자신이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이는 친절함으로 우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고 합니다(버클리대학교 폴 피프의 2015년 연구). 또 ‘자비 명상’(Compassion Meditation)도 좋습니다.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헬렌 웡(Helen Weng)은 2013년 연구에서 사랑하는 사람, 자기 자신, 낯선 사람, 심지어 적에게조차 호흡을 신경 쓰며 선한 감정을 흘려보낸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타인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뇌 영역이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친절 근육, 친절력(親切力) 키우기
러닝머신 20분, 스트레칭 40분씩, 주 3~4일 필자가 아파트 단지 안 커뮤니티센터를 이용하면서 목욕 후 반드시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로커룸 머리카락 치우기입니다. 제 머리카락이 굵고 까만 데다 숱도 많은 편이라 머리 말리고 나면 바닥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로커룸 청소를 시작해 오늘 아침에도 대걸레로 머리카락을 치웠습니다. 경주 최부잣집만큼은 어림없어도 날마다 할 수 있는 필자만의 행복한 일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걸레질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습니다. 치우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고 흉보는 대신 치우는 사람을 칭찬하고 덕담으로 하루를 열 수 있으니, 그야말로 너나없이 좋은 일입니다. 척추기립근만 키울 게 아니라 친절 근육도 키워봅시다.
또 짬 날 때면 ‘자비 명상’으로 주변 모든 생명에게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을 가집시다. 필자는 무생물한테도 자주 말을 건넵니다. 네 식구 벗어놓은 더러워진 빨래를 20년 넘도록 거품 내고 헹구고 짜주느라 고생한 통돌이 세탁기한테 머리도 쓰다듬고, 엉덩이도 톡톡 치며 고맙다 말합니다. 밀린 겨울 이불 빨래까지 하루에 세 번쯤 돌린 날엔 미안하다 사죄도 합니다. 그 덕분인지 고장 한 번 안 나고 식구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 1친절 운동’ 같이 하실 거죠?
작품 속 캐릭터를 보고 실제 배우의 성격을 오해할 때가 있다. 배우 최수린(49)은 악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터라 실제로도 까칠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작품 속 모습과, 머릿속 막연한 생각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5월 봄날의 햇살을 꼭 닮은 그의 해맑음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최수린은 과거 MBC ‘밥줘’, KBS 2TV ‘내사랑 금지옥엽’ 등에서 얄미운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고, 근래 작품에서는 주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했다. 최근 작품인 KBS 2TV 일일드라마 ‘태풍의 신부’에서도 그는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최수린은 사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MBC 사극 ‘김수로’와 ‘마의’에서는 선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악녀 연기, 시어머니 연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게 들어온 캐릭터를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연이어 나오거나 대중의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늘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편견 탈피한 여배우 행보
1995년 SBS 드라마 ‘까치네’로 데뷔한 최수린은 베테랑 배우다. 활동한 지 거의 30년 차가 되어가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KBS 2TV 주말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밉상 시누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강렬하게 찍은 후, ‘태풍의 신부’로 기세를 이어갔다.
‘태풍의 신부’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1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최수린이 연기한 ‘태풍이 엄마’ 남인순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였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사랑스럽고 허당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최수린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남인순을 표현했고, 시청자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남인순을 연기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가 여러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거든요. 여자로서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리를 골고루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몰입도 많이 했고, 즐거웠습니다.”
최수린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연기 호평과 함께 ‘젊은 엄마’라는 평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왔다. 최수린은 “20대와 30대 때 나이에 맞는 젊은 역할을 연기하지 못했다. 30대 때는 이미 40대, 40대 때는 50대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배우 중에서는 나이대가 높은 캐릭터 또는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기피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수린은 이런 편견을 깨는 반전의 행보를 펼치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스토리가 있다. 최수린은 1994년 SBS 1기 공채 MC 출신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배우로 전향했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연기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30대가 되면서 최수린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른 살에 아들을 낳고 배우로 복귀한 그는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수린은 “항상 일이 간절했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역할을 선택할 처지도 아니었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후 30대가 됐고, 젊은 역할을 맡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제가 살을 원 상태로 다 빼지 못해서 좀 통통했거든요. 아예 머리도 볶아버렸고,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맡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9년에 ‘내사랑 금지옥엽’을 만났어요. 다른 제작진분들은 다 반대했는데, 작가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고, 저한테도 터닝포인트가 됐죠.”
그렇게 최수린은 실제보다 나이 많은 역할도, 악한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죽기 살기로 연기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이 쌓여가면서 점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정도 생겼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역을 맡든지 그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드라마로 인해 다음 드라마가 이어서 들어오기를 바랐죠. 그래서 욕심을 과하게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연기가 미워 보이더라고요. 배우는 연기할 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상 통해 온화함 찾아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최수린은 “미술 쪽 일, 뭔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워낙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 특히 자개장을 좋아해서 나전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잇는 전수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설명을 이었다.
최수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배우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열 살 많은 친언니이자 배우인 유혜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혜리는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걱정하며 배우 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마음먹은 대로 배우를 하게 됐죠. 저도 처음에는 제 성격이 연예계 활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저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연기라는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성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격이 중화됐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도 좀 능숙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어 보니 최수린의 성격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온화하다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 그의 일상 또한 단조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최수린은 건강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과 식단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한식 위주로 건강하게 식사하는 편이다. 마음은 명상을 통해 다스리고 있다.
“만약 누가 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는 그 사람한테 뭐가 기분 나빴는지 다 말했어요. 그러면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게 되니까 결국 제가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한마디 더 할 걸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말을 줄인 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상을 통해 풀어요. 명상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눈을 감고 내 마음에 있는 더 큰 세상을 보는 게 명상이에요. 저는 매일 하고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연기하는 배우 되고파
이처럼 평온한 일상과 달리 연기할 때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소리도 지르고, 울고, 누군가의 뺨을 때려야 할 때도 있다. 최수린은 역할에 워낙 몰입하는지라 감정 소모도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고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번에 ‘태풍의 신부’를 마치고는 헝가리, 체코,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오랜 시간 머무는 편이에요. 관광지도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고 일상을 지켜요.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고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여행을 다녀오면 차분하게 마음 정리가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최수린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표정이나 감정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연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최수린의 배우로서 목표는 ‘리얼(Real)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슬플 때, 또 어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 기가 막힌 톤이 나오더라고요. 그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또 저는 고향이 안성이거든요. 어렸을 때 들었던 사람들의 말투, 느꼈던 정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실생활에서 연기를 배우는 거죠. 배우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에 공감해야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오는 거죠.”
최수린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만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120세 시대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만큼, 최수린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본다. 늘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인간적으로는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카이다이빙도 해보고 싶고, 어학 공부를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요. 50대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많이 다닐 때라고 하던데, 이제 성인이 된 아들하고도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함께 같은 걸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 생활은 여든셋의 어느 날, 달력 뒷장에 무심코 그린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됐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듯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무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라며 밑천 삼는다. 어느덧 아흔여섯의 화가가 된 그는 오늘도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알록달록 물감 칠해진 시골집에는 늦깎이 예술가, 김두엽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실, 부엌, 안방 곳곳을 꿰찼다. 완벽한 직선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섬세하게 이어진 선과 과감한 색 조합은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올해로 14년 차 화가가 된 그는 현재까지 600여 점을 그려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 토크쇼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김두엽 화가는 매일 아침 8시 반, 아침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감은 지난날의 기억, 일상에서 본 풍경,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등에서 다양하게 얻는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끄적인 그림이 이토록 인생의 큰 줄기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들도 화가예요. 그림을 팔기 위해 그리지 말자는 신조를 지녔죠. 그래서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퇴근하면 틈날 때마다 작업실에 있더라고요. 나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를 그렸어요.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 그래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이 났지요. ‘내가 진짜 잘 그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읍내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왔어요. 이것저것 그려서 벽에 붙여뒀는데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고는 잘 그렸다고 하셨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랬지요.”
그가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간 데는 아들 정현영 화가의 도움이 컸다. 정현영 화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등단해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중견 화가의 눈에도 처음 그려낸 어머니의 사과 그림은 놀랍도록 꼼꼼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색연필, 물감 등 다양한 색채 도구를 쥐여드렸다. 원색 위주의 과감한 색을 사용하지만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세월이라는 재료
김두엽 화가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학교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에 제약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귀국한 뒤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아 길렀다. 너무 가난했던 탓에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내 가족이 평안한 것, 남편과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은 계속됐다.
김 화가의 그림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화사하고 또렷하다. 모진 시간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오히려 사랑하고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테다.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은 김두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수십 편의 시를 썼고, ‘지금처럼 그렇게’라는 시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두근거림이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니었어요. 꽃피는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 가고, 어스름한 저녁 산책하다 들꽃 한 아름 받고 싶었네요. 지금이라도 내 바람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어 좋아요. 괴로웠던 기억도 저편으로 날아가거든.”
최근에는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니어 컬러링북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 화가가 70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전증을 그림으로 극복한 것처럼, 동년배들도 손의 감각을 되찾는 기쁨을 느꼈으면 해서다. “참 오래 살았어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참이더라고. 나이 먹어서 그림을 매일 그릴 줄 누가 알았겠어. 기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붓을 잡고 있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요. 느리더라도 천천히, 계속 그려봐야지. 여러분도 다들 힘냈으면 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100번째 발행을 맞이해 귀중한 손님을 초대했다. 특별한 기념일 파티에 초대받은 스타는 트로트 가수 정다경(30). 이번 촬영으로 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통해 소개된 수많은 스타 중 ‘최연소’ 타이틀을 가져가게 됐다. 국내 트로트 열풍의 기폭제가 된 2019년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1’)의 막내에서, 이제는 청년층부터 노년층까지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는 어엿한 스타가 된 그의 매력을 만끽해보자.
정다경은 ‘미스트롯1’에서 최종 4위를 차지하며 이름과 얼굴을 알렸다. ‘미스트롯1’ TOP5 중 나이가 제일 어린 그는 당시 유일한 20대였다. 가창력을 겸비한 것은 물론 막내다운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해 중장년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다경은 “팬들께서 딸, 손녀딸처럼 대해주신다. 저도 살갑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팬들이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재 정다경은 지난해 발매한 디지털 싱글 ‘좋습니다’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긴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자르고 밝은 색으로 염색해 스타일 변신을 꾀했다. 통통했던 젖살도 빠져 미모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정다경은 “머리가 길었을 때는 차분하고 참한 느낌이 강했는데, 머리를 자르고 나니 발랄해 보여서 이전보다 친숙하게 느끼시는 것 같다. 많이 귀여워졌다고 칭찬해주신다”라고 말하면서 미소 지었다.
“제 팬들은 연령층이 다양해요. 30대가 제일 많고요.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80대 팬도 몇 분 계세요. 현장에서 어르신 팬이 ‘지난번에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못 왔다’고 하시면 걱정이 많이 되더라고요. 저뿐 아니라 트로트 가수들은 팬들의 연령층이 높다 보니 ‘건강이 최고다’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팬들은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는 법이 없어요. 반말도 절대 안 하시고요. 저한테 ‘다경 아씨’라고 존칭을 써주신답니다. 팬들께서 저를 많이 예뻐해주시고 존중해주시는 게 느껴져서 항상 감사해요.”
‘미스트롯1’과 트로트 가수
정다경은 “20대 초반만 해도 트로트 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트로트 가수뿐 아니라 연예계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다경은 한국무용 전공자로 한길을 파왔다. 계원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양대학교에서 무용학을 전공했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공연예술학과에 재학 중이다.
“무용만 하고 살다가 생을 마감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정다경. 예상하지 못했던 트로트 가수의 길은 우연히 열렸다. 대학교 4학년 때 댄스 스포츠 선생이 아는 기획사 대표에게 그를 연습생으로 추천했다. 정다경은 워낙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넘치는 끼를 선생이 알아본 것. 그렇게 들어간 기획사는 가수 남진과 전국 투어 콘서트를 10년 동안 한 공연 기획팀이었다. 정다경은 남진과 함께 공연하러 다니면서 무대에서 무용도 하고,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트로트의 매력을 깨달았다.
“원래는 트로트에 관심이 많지 않았어요. 노래방에서 몇 곡 부르는 정도였죠. 기획사에 들어가서 트로트를 부를 일이 생기면서 노래 연습을 하게 된 거죠. 어떻게 부르는지도 몰라서 선배님들의 창법을 무작정 따라 했어요. 그러면서 트로트에서 필요한 보컬 테크닉을 습득하게 됐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게 느껴지니까 뿌듯했죠. 무엇보다 제가 느낀 트로트의 매력은,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장르여서 효도하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에요. 제 무대를 통해 그분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을 드릴 수 있어서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정다경은 트로트 가수로서 운이 좋았다고 자평한다. 그는 2017년 10월 디지털 싱글 앨범 ‘좋아요’를 발매하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1년여의 세월이 흘렀을 때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1’이 열렸고, 경연에 참가했다. ‘미스트롯1’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의 트로트 열풍은 ‘미스트롯1’ 전과 후로 나뉘고, ‘트로트 가수 정다경’도 ‘미스트롯1’ 전과 후로 나뉜다. 그에게 ‘미스트롯1’의 의미를 묻자 “정다경을 만들어준 프로그램”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한 답이 돌아왔다.
“데뷔를 하고 1년 뒤 ‘미스트롯1’에 나갔는데 사실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죠. 2019년 당시에는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지 않았고, 트로트 오디션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어요. 이렇게 프로그램이 잘 될지 몰랐고, TOP5 안에 들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스트롯1’ 덕분에 무명 시절도 1년으로 짧았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긴 점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데뷔 6년 차인 트로트 가수 정다경. 트로트 가수로 전국 무대를 누비며 필요하다고 느낀 자질은 무엇일까. “가수이기 때문에 노래를 잘 불러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장년 팬분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신선한 답을 들려줬다.
“트로트 가수는 너무 소심해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모님 세대를 많이 상대하기 때문에 살갑게 대하거나 대화를 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느낌, 여유로움이 필요한 거죠. 저도 평소에는 조용한 편인데 일할 때는 텐션을 올리려고 많이 노력한답니다.”
‘외유내강’ MZ세대
벌써 4년이 흘렀지만 정다경의 ‘미스트롯1’ 결승전 무대는 아직도 회자된다. 당시 인생곡 미션에서 그는 송대관, 전영란의 ‘약손’을 불렀다. 정다경의 청아한 목소리는 노래의 감성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여기에는 정다경의 개인적인 스토리도 한몫했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남동생과 함께 자랐다.
정다경은 자신의 끼를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에어로빅 강사로 일했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정다경은 “어머니께서 한국무용 입시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면서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서 저를 키워주셔서 늘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희생하신 만큼, 이제는 제가 어머니의 노후를 책임져드리고 싶어요. 손재주가 많은 어머니는 지금도 매일매일 저보다 바쁘게 지내고 계세요. 최근에 바리스타 1급 자격증도 따셨고, 취미 생활로 제과·제빵도 하시고, 캘리그래피도 하시거든요. 나중에 카페를 하고 싶다고 하시면 제가 차려드릴 겁니다. 저는 제 스스로 가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머니도 홀로 계시고, 남동생은 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거든요. 가장으로서 어머니와 동생을 더 챙길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죠!”
정다경과 얘기할수록 그가 ‘외유내강’ 캐릭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고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정다경. 장녀라는 책임감이 클 뿐 아니라 무용 입시를 치르면서 경쟁사회에서 살다 보니 성격이 단단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철이 일찍 들어버렸다. 그는 “이제는 스트레스나 힘듦을 잘 못 느끼는 무던한 성격이 됐다”고 말했다.
정다경은 트로트 가수로서 힘든 점은 없지만,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겪는 불편함은 있다고 털어놓았다. 크고 작은 소문이 늘 따르는 연예계이기 때문에 사람 만나기가 조심스러워진다고. 그는 “점점 사람을 믿기도 어려워졌다. 조금이라도 가식적으로 느껴지면 불편해진다”면서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집에만 있게 된다. 연예인들이 왜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접근해오는 사람들과 달리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어 행복하다고도 덧붙였다.
정다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MZ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MZ세대답게 똑소리 나고,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중장년 팬이 많은 만큼 그들과 소통도 잘되고 사랑받는 법도 안다. 젊은 트로트 가수답게 ‘세대 통합’이라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정다경의 목표는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무용과 트로트를 접목한 공연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듯이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고 싶어요. 올라가는 중에 뭔가가 잘 안 되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전공 분야나 일을 못하는 사람이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트로트 가수로서, 한국무용가로서 누가 봐도 ‘잘한다’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죠.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