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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주 따라 발길 옮긴 길 위의 작가 김주영
- 김주영, 그는 청송의 기적이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장터에 둘 수 없다며 결연히 거처를 옮겼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장터 한복판에 아들을 뒀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학교 부근에 묶어두었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온종일 장터를 맴돌아도 그냥 내버려뒀다. 그리하여 맹자는 당대에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작가가 되지 못했고, 주영은 장터를 샅샅이 뒤진 덕에 대한민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쯤 되면 맹모삼천지교가 무색하다. 적어도 주영에겐. 그러기에 기적이라는 것이다. 장터와 길 위의 작가 김주영, 그는 지금도 돌아다니는 중이다. 청송의 기적, 보부상 문학을 낳다 “보이는 것은 머리 위 하늘과 사방의 산뿐이었죠. 마치 항아리 속에 갇혀서 세상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하루에 한두 번 완행버스가 다녔는데 버스 안의 사람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차창 밖으로 던져주는 사과 껍질을 받아먹으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사는 걸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넋 놓고 바라보았지요. 그러다 장이 서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는 거죠. 왁자지껄 흥정에, 욕설에, 국밥에, 막걸리에…. 장날엔 학교는 뒷전이고 장터에 눌어붙어 있었지요. 제게는 장터가 학교였어요.”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송의 첩첩산중 외딴 마을. 1939년생인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도 그런 가난이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도시락 한 번 못 싸 다녔을 뿐 아니라 교과서도 없이 잡기장 하나 들고,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저 바퀴벌레처럼 왔다 갔다’ 했다. 푸른 소나무의 고장, 그래서 ‘청송’이지만 정작 그는 푸른 소나무를 그려본 적이 없다. 늘 흰 소나무를 그렸다. 왜냐하면 크레파스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정사정해서 친구들한테 빌릴 수 있는 색은 오색 중에서 제일 안 쓰는 흰색이었으니까. 그는 지금도 옥수수, 감자는 먹지 않는다. 수제비, 칼국수도 질리고 물렸다. 그의 소설 ‘잘 가요, 엄마’에는 반죽부터 썰기까지 칼국수 만드는 과정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칼국수 만드는 걸 하도 많이 봐서 그렇단다. 그가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모친 왈 “지금까지 굶은 것으로도 한이 덜 찼냐?”였다니. 그래서 그랬을까,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온 그는 시 빼고는 다 쓰는 작가다. 운문 말고 산문은 소설부터 동화까지 가리지 않고 쓴다. 감수성 예민한 산골 소년의 외로움과 소외감, 육체적 허기와 정서적 따돌림을 운명처럼 보듬으며 그를 키운 8할은 장터였다. 소년 주영은 작가로서의 토양이 되어준 장터 속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갔고, 성년이 되어서는 팔도의 장터를 마당마냥 누볐다.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글을 썼다. 그에게는 길을 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동일한 일이며, 길 위의 삶이 그의 인생의 메타포가 되었다. “결혼해서도 한 달에 집에 가는 날이 열흘이나 됐을까요? 습관이 돼서 일 없이 여관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지요. 하하.” 토속어 풍미 짙은 ‘객주’와 객주문학관 2013년, 34년 만에 대망의 10권으로 완간된 ‘객주’는 장돌뱅이들의 행로를 따라 저잣거리를 치열하게 답사하며 1878~1885년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애환과 시대상을 담은 소설이다. 그는 보부상 작가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보자기나 걸망에 걸머지는 봇짐장수를, 부상은 등이나 지게에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가리킨다. 1979년 6월부터 5년간 총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한 ‘객주’는 김주영이 대학 노트를 봇짐으로 걸머지고, 카메라를 등짐에 진 채 ‘팔고 다닌 물건’이다. ‘객주’를 쓰기 위해 보부상의 발자취를 따라 200개에 달하는 시골 장터를 누볐다. 글은 길에서 써서 길에서 송고했다. 분량을 줄이려고 펜촉을 뒤집어 최대한 작은 글씨로 썼다. 말 그대로 깨알 같은 크기로 대학 노트 한 쪽에 200자 원고지 35매를 빼곡이 채웠다. “처음에는 장터를 묘사하는 중편소설 정도를 써보고 싶었는데 남쪽 땅끝에서 휴전선 턱밑까지 전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 보니 그만 대하소설이 되어버렸어요. 보부상에 대한 자료도 없고, 역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어서 어디 가서 물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요. 조선 후기 상업사에 관한 논문만 100편 쯤 읽고 관련 서적도 200권 넘게 읽었지요.” ‘객주’의 작품 가치는 조선 천지의 토속어가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빛난다. 방방곡곡 장터와 산골을 누비며 옛말을 수집하고,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과 고증이 버무려져 독특한 풍미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객주’에는 중노미(음식점, 여관 따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 지청구(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말),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매나니(무슨 일을 할 때 아무 도구도 가지지 아니하고 맨손뿐인 것), 복장거리(마음이 쓰리고 아프도록 걱정스럽거나 성가신 일), 새물내(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등 국어사전에도 미처 오르지 못한 토속어들이 활어처럼 튀어 오른다. 그가 주축이 되었던 보리회(대구 경북 출신의 문인 모임, 보리문둥이란 뜻)에서 함께 활동한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는 김 작가에 대해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성정을 가졌죠. 술도 엄청나게 좋아해서 마셨다 하면 같은 회원이었던 이문열, 김원일 등과 함께 2, 3일간 쉬지 않고 마셨어요. 기질이 그렇다 보니 일생을 걸고 끈덕지게 민속 언어를 발굴, 수집하고 다닐 수 있었을 겁니다. 걸어 다니는 민속 언어 사전이라고 할 만큼 탁월하고 독보적인 존재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014년, 고향 청송에 그의 문학 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3층 규모의 객주문학관이 개관했다. 전국의 50여 개 문학관 가운데 객주문학관은 알찬 전시실과 옹골진 자료를 갖춘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향이 그에게, 그가 고향에게 가장 잘한 일이다. 객주문학관은 그에게 또 다른 장터다. 여느 문학관과 달리 작가가 관람객들을 직접 맞이하고, 함께 어울려 떠들썩하게 대화 마당을 펼친다. 어릴 때는 벗어나고만 싶었던 고향이 이제는 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저의 작가적 영혼을 낳고 길러준 곳이니까요.” 문학관과 함께 그의 생가 및 주막, 전통시장 등을 복원하여 보부상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테마 마을도 조성되어 있다. 어머니, 아 어머니! 김주영의 작품은 ‘객주’를 비롯해 ‘활빈도’,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화척’, ‘홍어’, ‘멸치’, ‘빈집’, ‘아라리 난장’ 등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다. 1971년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200여 권에 달하는 작품으로 유주현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그의 작가적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가난, 외톨이, 떠돌이, 약자 의식 등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밑바닥에는 어머니가 원형처럼 자리하고 있다. 김주영 문학의 원천이라 할. “참 고생 많이 하셨지요. 아니 고생하셨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혹독하고 가혹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당시에는 흠이라 할 재혼까지 하셨지만 여전히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지요. 96세에 돌아가신 후 호적 정리를 하다 보니 두 번의 혼인 모두 신고가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가족 내의 위치조차 없었던 분이니 그 한평생의 신산함이 어떠셨겠어요? 글도 읽지 못하고 숫자도 구분 못 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70 평생 어머니를 봐왔지만 정작 어머니를 몰랐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앞서 언급한 ‘잘 가요, 엄마’는 불효한 자신의 참회록이라고. 한 달이면 쓸 수 있는 분량임에도 일 년 반이나 걸려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어머니를 소환해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의미일 터. 그의 가장 큰 불효는 너무 늦게 어머니를 발견했다는 것이니, 어머니를 등장시킨 소설은 어느새 가족소설로, 가족소설은 성장소설로 잇대어졌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행위는 거짓이 개입되지 않은 반성문 같은 거예요. 말하자면 자기 인생의 변형이 소설인 거죠. 특히 성장소설은 비록 좁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유년 시절의 내밀한 시선으로 더듬어나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거지요. 서로 미워하는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서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 ‘멸치’는 저의 대표적 성장소설입니다.” 소설은 작가의 감수성을 타고 흐른다. 그는 삶에서 감수성을 잃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이 들면 몸도 뻣뻣해지고, 가슴도 뻣뻣해지고, 감수성도 무뎌지죠. 홍시처럼 말랑하던 살결이 딱딱하게 굳는 것과 같고, 기름 떨어진 차와 같아요. 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잖아요. 감수성을 유지하려면 연애를 해야 해요. 반드시 이성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봐도 애정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사랑이 뭡니까. 애틋하고 뿌듯한 감정 아닙니까. 연애를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그 감정을 품는 것이니, 많이 보고 많이 느낄 수 있어야 글이 나옵니다.” 그래서일까. 객주문학관에는 소설 도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평생 그가 모은 소설이 빼곡이 서가를 메우며 방문객들의 메마른 감수성을 적셔주고, 동료 문인들의 마르지 않는 감수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저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써도 반드시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봅니다. 1987년에 나온 ‘쇠둘레를 찾아서’를 쓸 때도 배경이 된 철원을 세 번이나 갔지요. 그 고장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사람이 사는지, 말씨는 어떠한지 철저히 조사하고 답사합니다. 제게 문학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의 집을 짓는 것이니까요. 31세에 데뷔해 83세인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글을 썼어요. 제가 쓴 글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그만큼 많이 다녔다는 뜻도 되지요. 요즘은 그간 쓴 제 작품 모으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설 한두 편을 더 쓰고 남은 시간은 제 삶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작가 인생 50여 년을 결산하며 지난 5월,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를 냈다. 2017년에 출간한 ‘뜻밖의 생’ 이후 4년 만이다. 시간에 곰삭아 웅숭깊은 성찰의 샘에서 길어 올린 신작은, 전통을 지키며 자연과 함께 삶을 일궈나가는 한 마을에 문명과 자본이 밀어닥치면서 마찰과 갈등을 빚는 내용이다. 김 작가 특유의 입체적인 인물 설정과 입심 가득한 해학적 문장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 남자 그에게 문학은 길이요, 생명이다. 그의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문학을 길 위에서 떠돌며 만났기에. “보부상이 그랬듯 우리 모두는 뜨내기이자 떠돌이로 오늘이란 시간을 살아갑니다. 떠도는 인생은 세파에 시달리며 때론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지요. 제가 80세에 쓴 ‘뜻밖의 생’은 바보가 주인공이에요. 바보는 이리 치이고 저리 당하지만 긍정심을 잃지 않지요.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는 절대 긍정성, 산다는 건 결국 그런 거지요.” 한 시대를 오롯이 관통해온 대작가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표상은 어떨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내면과 관계는 피폐한 세대를 향한 따스하지만 따끔한 일침이 있을까. “저는 영락없는 외톨이에 철저한 약자였어요. 그러나 그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내면적 힘도 동시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게는 글이 그 힘이었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동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너무 쉽게 좌절하고 스스로를 내던져버리지만 않는다면. 돈이라는 것도 그래요. 돈은 매우 중요하지만, 돈보다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10가지라면, 저는 20가지쯤 나열할 수 있어요.” 노령의 작가에게는 강인한 삶의 신념이 있다. 모든 고통과 아픔에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 아픔, 슬픔, 사랑도 모두 내 것이니 비빔밥처럼 한데 섞어 견디고 인내하는 것. 그는 글을 통해 인생의 파고를 넘었지만, 누구에게나 잠재된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그는 잘 웃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잘 웃는다. 80 평생 울고 싶은 날이 더 많았다는 뜻이리라.
- 2021-10-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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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앞서간 종합예술인 홍서범 ‘잘 노는 게 잘 사는 거다!’
- 예능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다재다능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이 오랜만에 본업인 음악으로 돌아왔다. 지난 3월에 그가 발표한 신곡은 ‘월든에 놀러간 니체’라는 다소 프로그래시브한 제목이다. 노래 내용도 제목 그대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연 속 삶을 통해 물질주의를 비판한 명저 ‘월든’을 쓴 월든 호수에 ‘신의 죽음’과 실존의 중요성을 외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찾아간다는 내용의 노래.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홍서범에게 평범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신곡을 통해 다시금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그를 만나 독특한 인생관을 들어봤다. “대중음악은 다양해야 하고 본인 생각이 담겨야죠. 인기만 쫓는 건 창작자로서 할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아이돌처럼 대 히트를 할 것도 아니고…. 가요계에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예전 록 스피릿으로 돌아가서 음악도 옥슨답게 하자 싶었죠. 가사도 나이 들어서 사랑 타령 하기도, 이별 노래 하기도 그렇고…. 대신 내가 삶에서 느꼈던 거, 내 생각의 중심이 뭔지 정리해서 발표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월든에 놀러간 니체’예요.” 홍서범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과 니체의 철학이 자신의 중심을 잡아줬다고 말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묻고자 출세를 접고 스스로 자연으로 들어갔다. 니체 또한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호숫가에서 요양을 하며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을 정리했다. 두 사람의 우연한 공통점은 호수에서 자신의 대표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홍서범은 그 두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니체가 월든 호수에 갔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그 상상을 오롯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홍서범을 통해 월든 호수를 만난 니체 노래의 비하인드를 들으니 과연 홍서범다웠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고 한다. “‘넌 왜 이렇게 안 되는 음악만 하냐’와 ‘이런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는 게 반갑다’였죠. SBS PD 했던 분은 ‘서범아 넌 이제 대중성 있는 것 좀 해라, 실험적인 음악 그만하고’라고 하시고, 저를 아는 분들은 ‘뭐 어차피 네가 할 음악 하는구나’라고 말하더군요.(웃음)” 자신의 음악을 누가 뭐라고 하든 관철한다는 게 그의 완고함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요즘 아이돌은 어떨까? 혹시 그의 기준에 벗어나는 거슬림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요즘 아이돌에 대해 무한한 긍정을 표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 미국 팝 음악이 들어오면서 미8군 출신 가수들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거든요. 일본은 처음에는 영미 팝을 따라가다가 자기들 특유의 제이팝을 만들었어요. 물론 일본은 워낙 인구도 많고 다양해서 수준이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혼란기가 있었던 게,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제이팝을 많이 베꼈어요. 일본 음악이 금지였을 때 양심 없는 작곡가들이 많이 표절했죠. 그러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그쪽으론 못 간 거지. 그래서 다시 미국 팝을 추구한 거죠. 그런데 거기에 우리 민족 특유의 음악성, 표현력, 특유의 한이 블랙 뮤직 이상인데, 그게 더해져서 성공했다고 봐요. 이 짧은 시간에 빌보드를 점령할 정도니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우수성은 저도 감탄하고 있어요.” 그는 주변을 봐도 노래와 악기 연주를 너무 잘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감탄했다. 더구나 디지털 문화가 보급되면서 과거보다 쉽게 원하는 걸 접하고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 때는 소위 음반을 구해도 ‘빽판’이었고 악보도 없이 귀로 들어서 코드를 땄어요. 그러다 보니 이 팀 저 팀 코드가 다 다르고.(웃음) 지금은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죠.” 가장 싫은 것은 주변에 민폐 끼치는 것 최근 음악 트렌드에 대한 홍서범의 평가를 들으니 자연스레 후배 양성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사래를 쳤다. “게을러서 사업 쪽으론 관심이 없어요. 주변에선 그 정도 노하우 있으면 해도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업 재능이 없어요. 유혹은 많았죠. 하지만 그런 거에 혹해서 나도 해볼까 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줄까봐, 스스로 판단해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나도 할 일이 많고,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수만이 형 대단하고 박진영도 대단해요. 음악도 잘하지만 사업도 잘하니까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민폐 끼치는 일이다. 지금 시대에 아이돌 같은 후배를 대중가요 시장에 맞게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면 기본 자산이 천문학적으로 든다. 그렇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혹시 사업이 잘 안 되면 투자자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가 사업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기준과는 너무나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통해 7080 문화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 그럼에도 홍서범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살길 바라는 그가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7080 문화로 전국 투어 하고 해외 투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게 막혔죠. 이제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아요. 7080 문화의 새 콘텐츠로 뮤지컬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작가도 있어야 하고 투자자도 있어야 해서 보통 일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공연할 때 나열식으로 차례대로 노래 부르고 내려오는 건 이제 끝났고, 그때 음악과 그때 사건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그 단계예요.” 7080을 위한 장기 공연 문화이면서 기존과는 다른, 뮤지션도 좋고 관객도 즐거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판단은 비슷한 시대를 산 가수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조용필조차 자신의 노래들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현재 7080 뮤지션들의 공연 문화가 너무 일방적이라 답답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시놉시스를 짠 후 작가를 불러서 이런 내용으로 써보라고 한 적 있어요. 그랬더니 ‘형, 이거 하려면 투자 많이 받아야 하고 언제 코로나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일단 써놔야지!’(웃음)라고 타박했죠. 앞으로 7080이 가야 할 길은 그쪽이에요. 새로운 문화를 자꾸 만들어서 방향을 바꿔야죠.”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의 고충 이해돼 홍서범이 활동했던 7080으로부터 세월이 흐르면서 가요계도 가수들도 바뀌었다. 완제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는 요즘 세대 가수들과 달리 그의 세대 가수들은 데뷔 후에 연습도 겸하면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그는 노래에 대한 관점이 다른 가수들과 달랐다. “저는 노래를 어떻게 해야 잘할까가 아니라 전체적인 음악의 완성도를 중요시했어요. 솔직히 노래를 만든 후에 녹음할 때가 되어서야 처음 불러본 노래도 있었죠. 노래는 신경 안 썼던 거지. 그래서 초창기에는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샤우트를 했어요. 감성 표현 같은 게 약했죠.” 음악을 종합적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가창자로서의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와 흡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에 대한 비판에도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나보다 노래 잘하는데 어떻게 평가를 하지?(웃음) 이런 경우도 생길 테고. 그렇다고 ‘정말 잘하시네요’라고만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방송이라 뭔가를 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남을 평가한다는 건. 해본 사람만 알지. 저는 못 할 거 같아요. 그리고 프로들이 무대에 올라도 스트레스가 큰데 아마추어면 더 심하겠죠. 오래 준비했는데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있으니 평소의 70%만 해도 성공이라고 봐요. 그것도 멘탈 싸움인 거 같아요. 웬만하면 칭찬도 많이 해줘야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잘 노는 게 잘 사는 것 홍서범은 한국식 나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강조하는 자신의 나이는 만 62세다. 환갑을 넘긴 그에게는 잘 노는 게 잘 사는 거라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유쾌하게 살다 가자, 나에게 주어진 대로 즐길 수 있는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이에요. 물론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민한다고 풀리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아니면 내 능력 밖인가’ 판단하는 게 중요해요. 능력 밖인 고민은 접는 거예요. 그런데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럼 해보는 거죠.” 한마디로 그는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 아니다. 그 덕분인지 유독 피부가 좋아 보였고, 살도 안 찌는 듯했다. “체질도 그렇지만 가만히 한자리에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운동도 많이 하고. 옛날에는 축구를 많이 했고 지금은 배드민턴을 일주일에 한 번 쳐요. 틈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에 가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살이 찔 수가 없지. 피부도 땀을 많이 흘리니까 좋은 거 같네요. 등산처럼 혼자 하는 게 가장 운동이 많이 돼요. 즐겨 찾는 산은 북한산입니다. 코스도 많고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무한긍정과 힘찬 에너지, 자유로움 홍서범의 성격을 지금까지 들여다봤으면, 그가 소위 관계 정리에 대해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정리한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만날 사람은 만나고 안 만날 사람은 안 만나게 되는 거죠.” 그가 참여하고 있는 연예인 모임이 꽤 많다. 공놀이야(축구), 콕놀이야(배드민턴), 산놀이야(등산), 큐놀이야(당구), 휠놀이야(자전거), 술놀이야(음주)까지 총 6개. 그중 공놀이야에만 쉰 명 이상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활동할 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안 나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 그래서 관리를 맡고 있는 후배가 안 나오는 회원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홍서범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참여할 상황이 못 되니까 못 하는 거지. 만약 걔네를 내치면 내쳐지는 사람 기분이 어떻겠냐. 놔두면 적당한 때 돌아온다. 언제든지 문을 열어놔야 들어올 게 아니냐. 한번 인연 맺었는데. 그리고 참여 안 한다고 우리한테 해 되는 거 있어?” 그 말을 들은 후배는 할 말이 없었다. 홍서범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사례였다. 뭐든지 푹 빠져 사는 남자 홍서범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한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어떤 사람은 평생 갖지 못할 후회 없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 이미 있었다. “니체 형님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좋은 말씀이 ‘다시 살고 싶도록 그렇게 살아라’예요. 그럴 정도로 살아야죠. 어제도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북한산에 갔어요. 다들 대기업 사장 하다 명퇴했는데 삶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날이 70대 중반까지면 이제 10년밖에 안 남았어요. 원 없이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시간이 너무 짧더라고요. 그러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노는 게 남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걔네들이 ‘야, 난 매일 놀아’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야, 그렇게 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빈둥빈둥 노는 건 진짜 무료해’라고 답해줬죠. 무료함이 인생 최대의 적이에요.” 그가 심심하고 지루해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 10년 후에도 그는 니체를 월든 호수로 불러들인 것처럼, 또 다른 독보적이고 독특한 노래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유쾌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의 인생이 보여줄 무료하지 않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 2021-10-0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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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의 현대화 ‘생활한복’, 우리 일상에 얼마나 가까워졌나
- 최근 BTS(방탄소년단)와 블랙핑크, 유재석 등 대중스타들의 생활한복 착용하고, K-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생활한복 열풍이 불고 있다. 생활한복이라는 용어 의미는 ‘생활’ 속에서 편하게 입도록 한 한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한복을 재해석했다는 생활한복은 시니어들이 일상 속에서 입기에 얼마나 편해졌을까. 한복의 현대화, 생활한복 어떻게 변했나 초창기 생활한복은 1980년대 후반 민족문화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생활한복은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목적에 맞게, 소재를 일률적으로 사용하고 디자인을 단순화해 이를 많은 국민에게 보급하고 생활화하는 데에만 초점을 둬 제작했다. 실용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당시 생활한복은 ‘생활’이라는 부문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 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 생활한복은 용도와 트렌드에 따라 다양한 소재와 색상을 사용해 한층 편하고 다채로운 디자인의 한복으로 변신했다. 유명 생활한복 브랜드 ‘돌실나이’는 변화하는 대중의 요구와 사회적 흐름에 맞춰 매년 새 제품 600~700개를 제작할 정도다. 최근 사회적으로 환경에 대한 이슈가 커지자 100% 면이나 린넨과 같은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이용한 한복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소재는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한 특성이 있어, 최근에는 생활 속 편리함에 대한 요구를 반영해 합성소재를 활용한 실용적인 한복들이 시장에 대거 나오는 추세다. 그렇다면 생활한복은 일상에서 착용할 의복으로서 얼마나 입기 편하고 간편해졌을까. 지난 2020 도쿄패럴림픽에서 화제가 됐던 우리 선수단의 생활한복 유니폼 디자인을 통해 알아본다. 선수단이 입은 생활한복은 ‘자켓’형 덧저고리, ‘셔츠’형 속저고리, 그리고 대님바지로, 전통 한복에 비해 구성이 매우 간소화됐다. 유니폼을 제작한 ‘돌실나이’의 김남희 대표는 “현대 생활의 정장 차림에 맞는 형태로 한복의 요소를 보완·변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저고리는 자켓 형태로 만들어 입고 벗기 간편하게 만들었다. 원단은 ‘쿨울’(Cool wool) 소재를 사용해 온도와 습도가 높은 여름에 시원하고 가볍게 입을 수 있도록 제작했다. 덧저고리 안에 입는 속저고리 셔츠는 땀 흡수성과 통기성이 좋은 pk 소재를 사용했다. 팔 길이도 짧게 해 시원함을 더하고, 옆구리와 겨드랑이 부분에 매쉬 원단을 사용해 습하고 더운 날씨에도 시원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바지는 우리나라 한복 바지의 풍성함과 편안함을 담은 두 폭 바지로, 한국의 멋을 살렸다. 우리 전통을 멋스럽게 표현하면서도, 구김성 없는 스판 소재의 원단 사용과 허리 부분의 고무밴드 처리로 활동성을 더했다. 전통적인 대님의 형태를 사용해 발목 부리를 모아주며, 여밈 단추를 통해 탈착이 편리하도록 디자인했다. 이렇게 요즘 생활한복은 ‘생활’에 초점을 둬, 계절과 용도를 고려해 남녀노소 편안하게 입을 수 있도록 제작되고 있다. 기계세탁이 가능하고 다림질이 필요 없는 소재의 제품까지 개발돼 실생활에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는 추세다. 중장년층 취향 저격하는 생활한복의 매력 특별한 날에만 입는 행사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 한복을 생활화하기 위해 생활한복 시장은 50~60대를 먼저 겨냥했다. 김 대표는 “돌실나이의 주 소비층은 중장년층”이라며 시니어들이 생활한복을 선호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하나는 중장년층의 나이에 걸맞는 ‘우아함’과 ‘중후함’이다. 한복의 고운 선과 아름다운 색감은 중장년층의 연륜에 우아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배로 더한다. 김 대표는 “시니어 고객은 재구매율이 매우 높은 편”이라며 “생활한복을 입고 나가면 다른 사람들과 차별점이 생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 받아 좋다는 것이 중장년층 소비자들의 일반적인 평”이라고 덧붙였다. 또 하나는 ‘편안함’이다. 요즘 생활한복은 한복의 디자인을 갖추면서도 현대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현대복에 가깝다. 오히려 부드러운 소재와 넉넉한 핏으로 편안함을 더한다. 이렇게 일상에 특별한 우아함을 주면서도 생활에 무리가 없는 실용성까지 갖춰, 생활한복의 매력 한 번 빠진 시니어는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 업계 이야기다. 한편 김 대표는 우리 고유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색으로 50~60대를 겨냥한 ‘돌실나이’와는 차별점을 둔 산하 브랜드 ‘꼬마크’를 2014년 런칭했다. 생활한복은 나이 들어야 입는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 10~20대를 겨냥한 브랜드로, 돌실나이에 비해 스타일링이 파격적이고 트렌디한 것이 특징이다. 생활한복 대중화 전망은? 사실 현재 한복업계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돌실나이 김 대표는 “코로나로 인해 결혼식과 같은 행사가 줄어들면서 전통한복을 찾는 사람이 급격히 감소했다”며 “생활한복 업체는 타격이 적다고 해도, 생활한복의 뿌리인 전통한복만 보면 한복업계가 존폐 위기라고 할 정도로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활한복에 대한 관심이 업계 안팎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에서도 우리 고유의 의복인 한복에 관심을 가지고 뛰어드는 젊은 한복 디자이너들은 꾸준히 늘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온라인 시장이 강화되면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생활한복 브랜드를 론칭하고 있다”며 “한복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 우리 한복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리슬, 리을, 단하주단 등 20~30대 젊은 한복 디자이너들이 우리 전통 의상에 트렌디한 감각을 더하며 생활한복 시장을 새롭게 이끌어가고 있다. ‘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를 통해 세계인의 이목을 끈 블랙핑크의 한복을 제작한 ‘단하주단’과 BTS의 애용 한복 브랜드로 유명한 ‘리슬’이 대표적인 젊은 감각의 생활한복 브랜드다. BTS, 블랙핑크와 같은 영향력 있는 K팝 아이돌 스타들의 한복 착용에서 비롯한 MZ세대의 한복에 대한 관심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경복궁 등 가까운 고궁에 방문하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복 착용 인증샷을 올리거나 한복 일러스트를 올리는 ‘#한복챌린지’에 적극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젊은 층의 한복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면 생활한복의 대중화는 감히 기대해볼 만하다. 생활한복의 대중화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김 대표는 “물론 현재로서는 어렵다. 하지만 한복을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답했다. 한복 디자이너들은 우리 옷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켜야 하며, 소비자인 대중은 한복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이를 생활 속에서 향유하려는 도전을 이어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운 것을 따라가기 급급한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전통문화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생활한복은 우리 전통의상에 현대의 색깔을 입혀, 한국 고유의 멋을 살리면서도 실용적인 의복으로 재탄생했다. 그 열정과 노력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남녀노소 모두가 생활한복으로 일상을 편안하고 멋스럽게 누리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 2021-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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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정, 타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거물로 선정
- 영화 ‘미나리’로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74)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타임은 15일(현지시간) ‘2021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을 발표했다. 타임은 2004년부터 매년 아이콘(Icons)과 거물(Titans), 예술가(Artist), 선구자(Pioneer)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그 해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한다. 윤여정은 이 중 거물 부문에 이름을 올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팀 쿡 애플 최고 경영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윤여정은 소속사를 통해 “늘 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과분한 칭찬을 받은 한 해다. 100인에 제가 뽑혔다는 데 나 역시 놀라고 있다”며 “긍정적인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기를 바라며, 나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과 같이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어 “바라건대 긍정적인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기를 바라며,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과 같이 타임의 영향력 있는 100인에 제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물 부문에는 팀 쿡 애플최고경영자(CEO),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 유명 드라마 작가 숀다 라임스 등 11명이 선정됐다.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동료이자 ‘예술가’ 부문에 이름을 올린 재미동포 배우 스티븐 연이 윤여정에 대한 추천사를 썼다. 그는 “윤여정만큼 자신감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다. 깊은 곳에서 우러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제는 세계가 그의 존재를 알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지난 4월 영화 ‘미나리’ 순자 역으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시아 배우로는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미요시 이후 64년 만의 수상이다. 이 외에도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 아카데미상(BAFTA) 등 세계 각국 유력 영화제에서 42관왕에 올랐다. 한편 올해 타임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해리 왕자와 부인 메건,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미국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미국의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 일본의 야구선수 오타니 등이 포함됐다.
- 2021-09-1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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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는 살아 있다, 표정과 감정을 담아라
- 다양한 SNS를 통해 소통하고 이를 활용하여 덕질을 하는 중년들이 점차 늘고 있다. 대면 만남이 어려워지면서 SNS를 통한 소통이 중요해진 가운데, SNS 사용 시 주의해야 할 나쁜 습관을 돌아보고 좋은 매너를 살펴본다. 비대면 시대, 남자를 부탁해 “문자 메시지나 카톡 대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어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가 있는데 여자들과 소통할 때 특히 그렇지요. 수다 떠는 느낌 같아 거부감이 듭니다.” “저는 칭찬을 해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보내온 것을 읽기만 해요. 상대로선 머쓱하고 뻘쭘하고 때론 서운할 거란 생각도 들지만.” “저는 묻는 것에 대해서만 답을 해요. 나머진 내용을 확인만 하지요. 가령 ‘2시까지 오세요’란 문자를 받았을 때 회신을 안 하는 거죠. 그러곤 2시까지 가지요. ‘알았다’고 간단하게라도 답하면 손가락이 부러지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습관이 그렇게 굳어져버렸어요. 상대는 무시당했다거나 불쾌할 수 있겠다는 걸 최근에 느꼈어요.” 바야흐로 비대면 소통의 시대다. 코로나19와 맞물려 좀 더 가속화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중년의 SNS 대화 풍경도 다양하다. 주고받는 내용은 차치하고, 전달하는 방식과 대화 스타일이 달라 관계가 서먹해지거나 뜻하지 않은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얼굴 보고 얘기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을 비대면이라는 한계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SNS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인 소통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불리하다. 중년층 이상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도드라진다. 팩트 위주의 전달 훈련을 주로 받아온 세대로서 감성적 언어 구사에 익숙하지 않고 감정 표현에 미숙하기 때문이다. 주변 이성 간의 대화를 비롯해 아내, 딸, 며느리 등 가족관계에서 소소한 안부나 잡담을 나눌 때 중년 남성들은 당황한다.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버겁기 때문이다. 이모티콘 남발, 자제를 부탁해 “이모티콘을 중복해서 날리거나, 한 텍스트 내에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섞어서 쓰는 사람, 문장마다 ‘ㅋㅋ, ㅎㅎ’를 붙이는 사람을 보면 경박하게 느껴져요. 특히 저는 ‘ㅋㅋ’는 자제하는 편이죠. 연장자나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에겐 사용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전혀 안 쓰면 무뚝뚝하거나 다소 무례한 인상을 주기도 해요. 업무 전달을 받을 때 상사의 센스 있는 이모티콘 하나가 아랫사람의 긴장을 풀어주죠. 하지만 분위기에 맞게 쓰지 못할 바엔 아예 안 쓰는 게 나아요. 부모상을 당한 지인이 받은 카톡 위로의 말끝에 ‘ㅠㅠ’가 붙어 있어서 진정성이 의심됐다고 하더라고요.” SNS상의 대화에서는 면대면에서 드러나는 얼굴이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뉘앙스와 느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는 애매하지만, 단체 대화방에서는 그마저 무시되기 쉽다. “단체 대화방에 내가 뭘 올리는 순간 나가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종교나 정치 등 예민한 사안도 아닌데, 내가 뭘 잘못했나 당혹스럽죠. 다른 사람이 글을 올릴 때는 바로 나가지 말고 타이밍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탈퇴할 때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사유를 밝혔으면 해요. 그게 예의가 아닐까요? 아, 그리고 사전 언질도 없이 별 관심도 없는 단톡방에 초대받는 것도 불쾌하고 황당하더라고요.” 이것만 말아줘, 소통을 부탁해 비대면 시대일수록 만남이 더욱 소중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요즘, 이상과 같은 지적과 의견을 중심으로 대화의 만족감과 의사 전달 극대화를 위한 효율적인 SNS 소통법을 정리해보자. ➊ 이모티콘을 적절히 활용하자. 남발이나 부적절한 이모티콘 사용은 역효과나 불쾌감을 낳지만 적절한 사용은 대화의 윤활유가 된다. 여러 가지를 섞지 말고 한 종류의 이모티콘을 사용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센스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 끝맺음을 이모티콘으로 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다. ➋ 맞춤법을 체크하고 내용을 다시 읽어본 후 보낸다. 지성과 품격이 드러날 것이다. ➌ 단체 대화방에서 다른 사람의 글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나가기를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괜한 오해를 사거나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➍ 종교나 정치 등 예민한 주제는 피하자. 대부분 설전으로 번진다. ➎ 되도록 자기 자랑은 삼가자. 누구에게도 별 도움 안 된다. ➏ ‘소중한 인연,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있어 행복해요. 오늘도 당신을 응원합니다. 꽃길만 걸으세요’ 등 입에 발린 문구를 유치한 그림에 새겨 보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격이 낮고 무성의해 보인다. 단 한 줄의 안부라도 자신이 직접 써서 보내자. ➐ 가까운 사이라 해도 긴 동영상이나 유튜브 콘텐츠 등은 가급적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안 보면 부담이 된다. 그것에 대한 감상을 물을까봐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➑ 펌글은 되도록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할 것이며, 글쓴이나 출처가 엉터리인 경우가 많아 나중에 망신스러울 수 있다. ➒ 내 흥에 겨워, 혹은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밤 열두시 넘어 새벽 한시, 두시에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는 것은 제발 삼가자. 새벽 네다섯시에 보내는 것 역시 실례이자 무례한 행동이다. ➓ 보내기 전에 수신자를 체크하자. 아내에게 보낼 급여명세서를 지인 여성에게 잘못 보내는 바람에 프라이버시를 스스로 노출한 경우도 있었다.
- 2021-09-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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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차 56세도 문제없다…73세 최윤수 프로의 행복한 라운딩
- 최윤수 프로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인 골프의 매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골프는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신한동해오픈 1라운드에서 손자뻘 선수와 플레이를 펼친 최윤수 프로가 이런 골프 매력을 다시 보여줬다. 지난 9일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 골프클럽에서 제37회 신한동해오픈이 막을 올렸다. 최윤수는 버디 1개와 보기 9개를 묶어 8오버파 79타를 치며 공동 133위를 기록했다. 성적은 최하위권이었지만 그는 이번 대회 출전으로 2018년 KPGA 선수권에서 작성했던 코리안투어 최고령 출전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1948년생으로 올해 73세인 그는 서른에 프로가 된 뒤 코리안투어에서 11승을 올린 전설적인 선수다. 시니어 무대인 챔피언스투어에선 26승, 만 60세 이상이 참가하는 그랜드시니어 부문에선 19승을 기록하고 있다. 최윤수는 이번 대회에 주최자인 신한금융그룹의 초청을 받고 고심 끝에 출전했다. 그는 “KPGA선수권대회도 3년 전에 마감해 나가야 하나 망설였다”며 “어렵게 결정을 하고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경기에서 아마추어 국가대표인 17세 송민혁과 함께 플레이해 더 화제가 됐다. 송민혁과 최윤수의 나이차는 55년으로, 2018년 제61회 KPGA선수권대회 최윤수-정태양의 51년10개월을 넘는 역대 KPGA 투어 최다 나이차 동반 라운드 기록이다. 송민혁은 “대선배님과 함께 해 영광이었다”며 “선배님의 조언에 제 플레이 스타일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최윤수는 손자뻘 후배의 기량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잘 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체격도 그렇게 크지 않은데 공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나와 100m 이상 차이가 난 것 같다”며 “이런 선수들이 있기에 우리나라 골프가 세계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고 감탄했다.
- 2021-09-1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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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생각의 관성
- 생각의 관성(慣性) 직장 문을 나선 지 꼭 2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안식년을 포함해서 만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평소 바람대로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볓을 쬐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림 같은 경치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으며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 달 동안의 기숙사 생활 같은 것도 체험해봤다. 그런데 그동안 겪은 이런저런 경험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었다. 예를 들면, 출근 시간에 회사 방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다 중간에 옆길로 빠져 체육관을 향한다거나 회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등이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심을 향해 질주하는 차량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정신없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도 들었고, 아침 운동을 위해 체육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길로 들어서면 갑자기 세상에서 밀려난 듯한 묘한 상실감이 일던 기억도 난다. 내가 지나는 길에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도심과 반대 방향으로 달릴 때 역시, “이제야 내 시간을 찾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슬며시 끼어든, 마치 다른 세상에 편입된 것 같은 기분은 한동안 어쩔 수 없었다. 눈 뜨면 밥 먹고 회사 가는 일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면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慣性)의 법칙이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한 채로 있으려고 하며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해서 등속, 직선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방향으로 내달리다 보니 방향만으로도 낯선 환경이 실감났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방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이번에는 속도가 문제였다. 어느 날 오전,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가 이 시간에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안 하면 뭔가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나를 허둥대게 만든 것이다. 평소 누려 보지 못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고마워하긴 커녕 불안감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백팩 메고 공부도 하러 다니고 배움길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와 함께 생전 해보지도 않던 일 등도 하다 보니 언제 3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만 3년의 세월이 지나자 이제야 겨우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속도의 관성이 서서히 약해지자 비로소 그간의 내 행동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 시간이면 일어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는 것도 별로 없이 하루해가 금방 가던 실망스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멍 때리는 하루가 있어도 그날에 연연하지 않는다. 익숙한 생각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으니 생각의 관성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퇴직 후 삶의 기준을 전반기와 같이 할 수는 없으니 시간이나 생각과 마찬가지로 행동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 경우는 우선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과거에는 나쁜 일이 발생하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생각에만 집착해 불쾌해하고 짜증을 냈다면 지금은 ‘새옹지마(塞翁之馬)’로 흘려버리는 일이 실제 많이 늘어났다. 운전을 하다가도 전방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 있으면 초록색 불이 켜 있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이끌려 하고, 연속해서 초록색 불이 켜 있으면 오늘의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감사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한다. 물론 약속 시간에 늦었을 경우는 거리의 신호등을 모두 내 차에 맞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럴 일은 이제 별로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으니 조금만 일찍 출발해 세상 구경하면서 걸으면 운동도 되고 기분도 좋아진다. 좋은 생각의 관성은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이끈다. 결국 생각의 관성을 잘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요즘 뜻하지 않은 계기로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배우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폰트와 달리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캘리그라피는 글자의 의미 외에 그 자체로 제작물의 내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 방송의 타이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방송국에서도 이것만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글씨를 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기존의 문화센터 수업이 끊겼다가 새롭게 개강을 하게 되자 당시 여러 가지 조건이 캘리그라피와 맞아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캘리그라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자 그림에도 곁눈질이 간다. 이전에 봤던 판화가 이철수 님이 그린 촌철살인의 문장과 글씨체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그림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림을 배우면 나도 흉내를 낼 수 있을까? 그림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에 파스텔을 도배하다시피 그린 것으로 가작(佳作)을 받은 게 최고의 결과였다. 과연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단지, 반(班)에서 나보다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래서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지레 포기했을 뿐인 것이다. 내가 지금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에 출품할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못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꾸준히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느긋하게 마음 먹으니 전에 없던 용기도 생긴다. 혹시라도 아나? 내가 이쪽에 소질이 있다면 나는 생각지도 않던 작가가 되는 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 몸도 마음도 덩달아 상쾌해진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이래서 포기하고 저래서 포기하면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지금이, 지난 세월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자족하는 지금이 생각을 바꾸기 위한 적기(適期)라고 생각한다. 좋은 생각과 좋은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것이고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갈 것이다. 생각은 나를 점점 강하게도 만들고 약하게도 만든다. 바로 관성(慣性)의 힘이다. •수상소감 - 우수상 산문 김영창 “우리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이지, 우리의 인생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퇴직 이후에 시작한 것인데 첫 공모전 출품에 상까지 받게 되니 용기백배입니다. 코 로나19가 진정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축하 파티를 해야 하거든요. 정보를 얻기 위해 몇 가지 뉴스레터를 구독하는데 거기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이 올라와 있더군요. 제가 우리 인생학교 카톡 동기방에도 소식을 퍼 날랐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카톡에서만 글을 주고 받는데 혹시라도 동기 중 누가 당선이라도 되면 단톡방이 왁작거리지 않겠어요? 제가 지금 동기회장이라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야 하거든요. 덕분에 목적을 100% 달성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발췌를 해가면서 읽었어요. 다 읽고 나면 핵심이 되는 문장을 인용한 후 거기에 제 생각을 엮어서 독후감을 마무리 하곤 했지요. 다 쓰고 보니까 뭔가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용한 문장은 거의 대부분 빼어난 문체이거나 깊이가 있는 글이거든요. 이렇게 요약한 글은 외부에서 강의를 할 때도 자주 인용을 한답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교육 프로그램 중 ‘1인 창직과정’이 있었어요. 그때 맥아더스쿨의 정은상 교장 선생님이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올리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요약만 했지요. 그러다가 “이러지 말고 조금 더 다듬은 문장을 만들어 보자”하고 시작한 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빈 공간을 채울 콘텐츠도 필요하고 해서 산문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걸 읽어 본 창직 동기들이 용기를 주더라고요. 당신 글에 공감 가는 게 많다고요. 제가 칭찬에 특히 약한 팔랑귀라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한 때거든요. 언제 까지고 다닐 것 같은 회사를 나왔지, 마땅한 일도 없지, 늙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는 않고. 퇴직 후 인생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어요. 글을 통해 솔직히 토로도 하고 용기와 격려를 주고받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신 정은상 선생님과 창직 동기들 그리고 우리 인생학교 중부2기 동기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제가 퇴직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 제 삶에 용기와 격려를 많이 해 주신 분들이거든요. 아! 또 한 분 있네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후’의 저자, 헤닝 쉐르프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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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마음우체통
- 지난주에 작은 우체통 하나가 놀이터에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은지가 좋아하는 노란색이었고 작은 집 모양의 우체통이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나는 마음 우체통이에요.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말을 편지로 써서 보내주세요. 비밀도 보장해주고 답장도 해드려요.’ 라는 설명이 우체통 아래에 붙어 있었습니다. 안내문을 슬쩍 읽고 난 은지는 며칠 째 낯선 우체통 앞을 그냥 지나쳐 집으로 갔습니다. 은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은지 왔구나. 학교 수업 잘 했어?” 은지는 무심한 듯 “네.”라고 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엄마는 실망했지만 다시 목소리를 높여서 은지의 방을 향해 물었습니다. “은지 좋아하는 피자해 놨는데 먹을래?” 은지는 이번에도 짧게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한 숨을 쉬며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볕이 참 좋네.’ 엄마는 두 팔을 벌리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난 후, 멀리 보이는 놀이터의 우체통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빨랫줄의 빨래가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엄마는 은지의 바지와 원피스와 티셔츠를 걷어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파에 빨래를 놓고 맨 위에 있던 청바지부터 개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낡아서 입지 못하겠네.’ 엄마는 실밥이 터지고 무릎 부위가 두 주먹만큼 뚫린 바지를 옆으로 치웠습니다. 새 바지를 사 주면 은지가 좋아할 거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새엄마라서 헌 옷만 입힌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머지 옷들도 차례대로 개키면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은지가 마음을 열까, 어떻게 해야 은지의 말수가 늘까.’ 은지 엄마는 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은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다섯 살이었던 은지는 말을 잃었고, 다행히 작년부터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빠의 노력이 컸습니다. 아빠는 일주일에 두 번씩 회사에 조퇴를 하고 은지를 심리상담 센터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은지는 아빠랑 함께 미술치료를 받았습니다. 상담 선생님이 소풍가는 사진을 그리라고 하면 은지는 자신과 아빠 사이에 엄마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림 속의 엄마는 아빠나 은지보다 두 배로 컸습니다. “은지, 이건 뭐야?” “엄마소예요.” “이건?” “엄마나무예요.” 동물을 그리건, 식물을 그리건, 늘 은지의 도화지엔 엄마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빠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 시간씩 은지와 놀아주었습니다. 아빠가 퇴근해서 오기까지 세 시간 동안은 은지를 위해 돌봄이 선생님이 와주셨습니다. 은지가 유치원에서 끝나면 돌봄이 선생님이 데리러 가서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왔습니다. 돌봄이 선생님은 은지가 종이접기를 했고, 사과를 두 쪽 먹었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등 그날그날의 일을 은지 아빠에게 상세히 전달했습니다. 은지 아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은지도 돌봄이 선생님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을 지낸 은지는 돌봄이 선생님과 친해졌습니다. 은지의 아빠도 선생님과 친해졌습니다. 주말에 세 사람이 함께 놀이동산에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은지 아빠와 돌봄이 선생님은 결혼을 했습니다. “은지야, 선생님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건 어때?”라고 아빠가 물었을 때 은지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은지는 결혼식 날, 꽃분홍 드레스를 입고 빨간 융단위에 꽃을 뿌리는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새엄마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아빠가 은지와 놀아주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아빠는 밀렸던 회사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 대신 엄마가 동화책도 더 읽어주고 많이 놀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은지, 잘 자. 자다가 무서운 꿈꾸면 언제든지 안방으로 와.” 엄마가 은지의 잠자리를 봐주고 떠날 때 하는 말이었습니다. 엄마가 방의 불을 끄고 나가면 은지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나란히 누워 있을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면 아빠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엄마가 아빠한테 잘 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고 아빠가 엄마한테 잘 할 때는 골이 났습니다. 선생님으로서 하루에 세 시간씩 돌봐줄 때와 엄마로서 매일 함께 지낼 때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엄마가 된 선생님은 집이 지저분하다며 이것저것 버리자고 했습니다. “아빠가 바빠서 대청소할 시간이 없었나봐.” 은지는 싫었습니다. 친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은지 마음을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알 지 못했습니다. “싫어, 싫어.” 떼를 쓰는 은지에게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은지가 고집이 심하네. 너무 오래 되고 망가져서 쓸 수가 없다고.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은지는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은지는 점점 아빠와 엄마가 섭섭했습니다. 은지가 말을 잘 하지 않아서 답답한 아빠와 엄마는 잠들기 전에 은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엄마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재료를 이용하여 우체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삼 일 후에 예쁜 우체통이 식구들 모르게 만들어졌습니다. 엄마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우체통을 놀이터에 있는 큰 나뭇가지에 얹어놓았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노란 우체통으로 놀이터가 환해졌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 은지의 마음을 알 수 없던 엄마가 슬쩍 물었습니다. “놀이터에 이상한 물건 있는 거 봤어?” “네.” “예쁘지?” “네.” 그뿐이었습니다. 엄마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은지가 학교에 간 사이에 한 번씩 놀이터로 가서 자물쇠를 열었습니다. 편지가 한 통, 두 통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편지마다 정성들여 답장을 썼습니다. 편지 내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동생이나 친구 흉보는 편지도 있었고 욕을 써 넣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중 엄마에 대한 불만의 편지가 제일 많다는 점에 은지 엄마는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엄마는 가족 중에 잔소리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의 마음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엄마는 편지가 늘어날수록 답장을 써야할 시간도 늘었지만 막상 기다리던 은지의 편지는 없었습니다. 우체통 앞을 지나치던 은지가 이번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았습니다. 우체통을 한참 쳐다보다가 가방을 열어서 노란 편지봉투를 꺼냈습니다. 두 손으로 우체통에 밀어 넣었습니다. 톡,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루던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때부터 은지는 답장이 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거짓말처럼 하늘나라 엄마의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실 창으로 엄마가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은지는 몰랐습니다. “은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엄마가 은지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이번에도 은지는 “네.”라고만 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새엄마가 좋으면서도 싫어요. 친구들이 새엄마 생겼다고 소곤거리는 것도 싫고, 새엄마와 종일 뭐하고 지냈냐고 아빠가 묻는 것도 싫고, 새엄마가 친엄마의 물건들을 내다 버리는 것도 싫어요. 점점 싫은 게 많아져서 싫어요.’ 엄마는 은지가 학교에 간 사이에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은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고민하다가 답장을 썼습니다. 며칠 후 편지는 우편배달부를 통해 은지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은지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편지를 발견한 은지는 기뻤습니다. 은지는 노란 편지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내서 읽었습니다. ‘은지, 편지 잘 받았어요. 나도 은지처럼 어려서 싫은 것 투성이었어요. 엄마도 싫고, 아빠도 싫고, 친구도 싫고, 학교 가기도 싫고. 우리 통하네요. 그런데 싫은 걸 표현 안하고 참고 있으면 상대방이 몰라요. 내가 화가 나서 엄마한테 참았던 말을 쏟아 부었어요. 엄마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어! 듣고 난 엄마가 놀라면서 말했어요. 진작 말하지, 맘을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은지도 싫은 것들에 대해서 엄마한테 말해보면 어때요? 예를 들어, 은지가 물건을 버리기 싫은 이유를 설명하면 엄마가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로 하기 힘들면 편지를 남기는 건 어떨까요?’ 편지 끝에 세 잎 클로버가 그려있었습니다. 전에 엄마가 세 잎 클로버의 의미를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귀해서 ‘행운’의 뜻이 있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의 의미가 있으니, 네 잎 클로버 하나보다 세 잎 클로버가 많을수록 좋다고. 은지는 세 잎 클로버를 보니 행복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고, ‘마음 우체통으로부터’라고만 적혀있었습니다. 누가 보내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은지는 답장을 쓴 사람이 하늘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만한 나이였습니다. 은지는 편지를 책상 서랍 깊은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답장에 있는 대로 하진 않더라도, 남의 흉을 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은지는 또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마치 은밀한 비밀 모의를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은지가 낡은 청바지를 찾았습니다. “너무 낡아서 며칠 전에 버렸는데......" 은지가 엄마를 노려보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미워, 미워. 내가 제일 아끼는 바진데......” “미안해, 은지야,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상태야.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은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음 우체통의 답장처럼 엄마한테 청바지를 아끼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게 은지는 후회되었습니다. 엄마는 겨우 은지를 달래서 학교로 보내고 주민센터로 급히 전화를 걸었습니다. 헌옷 가져가는 트럭이 은지 동네 옷을 조금 전에 가져갔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엄마는 차키를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다 발목을 삐끗했습니다. 절룩거리면서 차로 가서 올라탔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민센터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급한 사정이 생겼으니 차 좀 멈춰주세요. 금방 도착합니다. 제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기다려주세요.” 엄마는 마음이 초조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서럽게 울던 은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엄마가 그리워서 은지가 물건들을 못 버리게 한 거구나.’ 뒤늦게 은지의 마음을 알게 된 엄마는 부끄러웠습니다. 엄마는 힘들게 헌옷을 수거해 간 차를 발견하고 무사히 은지의 낡은 청바지를 찾아왔습니다. 곱게 접어서 편지를 쓰던 서재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바지를 찾아오느라 오전을 다 소비해버렸기 때문에 답장은 밤에 잠을 줄이고 써야 했습니다. 당장은 밀린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부지런히 청소를 마친 엄마는 은지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은지가 현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서재에서 바지를 뒤에 감추고 나왔습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은지는 신발을 함부로 벗어던졌습니다. 인사는커녕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엄마가 낡은 바지를 내밀었습니다. 은지는 얼굴 표정이 바뀌더니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그렇게 좋아? 맛있는 간식 만들어 줄게.” 엄마가 돌아서다말고 신음 소리를 내며 어쩔 줄 몰랐습니다. 아까 옷을 찾으러 가다가 삐끗한 발목이 아팠습니다. 그때 서재에 있던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울상이 된 엄마가 말했습니다. “은지야, 휴대폰 좀 갖다 줄래?” 은지는 얼른 서재로 달려갔습니다. 책상위에서 벨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집으려는데 책상위에 쌓여있는 온통 노란색의 편지봉투와 편지지가 보였습니다. 익숙한 글씨체였습니다. 편지 끝에 세 잎 클로버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은지는 놀랐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은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못 찾았니?”, “가요.” 은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휴대폰을 엄마에게 주었습니다. 벨소리가 멈췄습니다. 엄마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 은지에게 물었습니다. “청바지가 너무 찢어졌는데 입을 수 있겠어?” 은지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저도 입을 수 없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갖고 있을래요.” “그 바지를 은지 방의 벽에 멋지게 걸어 두는 건 어떨까? TV에 나오는 언니, 오빠 방을 보면 연예인 사진이나 천 조각을 붙여두는 것처럼.” “너무 멋진 생각이에요.” 은지는 손뼉을 치며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습니다. 며칠 후에 엄마는 은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엄마, 감사해요. 제가 엄마의 비밀을 알아버렸거든요. 이제 아빠 몰래 엄마랑 저만 비밀을 나누는 거예요. 앞으로 잘 할게요. 친엄마도 내 엄마고, 새엄마도 내 엄마에요. 저는 엄마가 둘이라서 두 배로 행복해요.’ 편지 끝에는 세 잎 클로버가 빼곡히 그려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마음 우체통은 거기에 있었고, 여전히 은지는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낡은 청바지가 벽에 걸려있는 자기만의 방에서. ㆍ수상소감 - 쏠드상 동화 박상미 “성인이 돼 읽은 동화, 신선하면서도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 줘”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합니다. 몇 년 전에 서랍 정리를 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써 놓은 이십여 년 전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읽다보니 가슴이 답답해졌어요. 내 맘조차도 상세히 적어 내려가지 못한 어설픈 문장들,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들의 나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한정적 어휘나 표현 방식. 일기장을 덮고 나니 글에 시멘트가 발린 느낌이었어요. 내 몸에 음식을 잘 넘어가게 하는 기관인 식도가 있듯이, 내 감정을 체하지 않고 잘 넘어가게 하는 방법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지요. 글쓰기 강의를 신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직장 근무시간을 피해서 들을 수 있던 장르는 소설밖에 없었습니다. 얼떨결에 단편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했지요. 처음엔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불편했지만, 쓰고 보니 유치하면서도 신기했어요. (초등학교 때 아이들 모아놓고 꾸며낸 얘기를 해줄 때는 거짓말 한다는 의식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책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소설 한 권, 한 권이 나올 때마다 작가가 얼마나 진통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겠지만 글쓰기도 ‘주기’가 있어서 어떤 느낌이 오면 글이 술술 나오는 듯하다가, 한 줄도 못 쓰고 몇 주를 흘려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글 쓰는 실력이 후퇴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1년에 4편의 단편을 쓴 적도 있지만, 작년부터는 코로나로 인한 우울과 두 번에 걸친 수술로 인해 다리가 아프니까 근력도 빠지면서 몸 전체가 병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직장을 그만둔 터라 시간은 많은데 글이 써지기는커녕 오히려 머리에 박스를 뒤집어쓴 기분이었습니다. 소설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만 가진 채 애꿎은 텔레비전 리모컨만 눌러댔지요. 그러다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우체통’ 이란 모티프를 건지게 되었고, 동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동화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터에, 이만교 작가 수업을 들으면서 몇 편의 동화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이만교 작가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성인이 되어 읽은 동화는 신선하면서도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었어요. 동화 속에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있고 불가능이 없는데, 동화를 읽고 자란 어른이 된 나는 왜 상상력이 줄어들고 있을까. 줄어든 상상력 자리에 편견과 선입견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필명을 ‘상상’이라고 지었는데. 가장 인상에 남은 동화는 미셀 누드슨의「도서관에 간 사자」였습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나왔어요. 편견을 허물고 융통성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규칙을 만들 때 예외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 읽고 나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읽을 수 있는 동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이 연장되다 보니 한 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써놓은 작품과 이번에 응모할 작품을 초등학교 3학년 조카한테 읽어보라고 했지요. 응모작인 ‘마음 우체통’은 재미있고 주인공의 마음이 잘 전달되는데, 전에 써놓은 작품은 덜 감각적이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감각적이란 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줄래?”라고 물었더니 조카가 대답했어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소리는 귀에 대고 듣는 것처럼, 묘사는 진짜 보는 것처럼 써야 한대요.” 입이 벌어졌지요. 내가 조카 나이 때 그런 생각을 못했거든요. 소설 수업에서 과제물로 썼던 동화는 슬그머니 서랍 안에 넣어두고, 조카의 칭찬을 받은 최근 작품으로 응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카는 수상 소식을 듣고 신기해했어요. 고모가 유명한 동화작가라도 된 듯. 이제 조카는 나의 1호 평론가가 되었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동화를 계속 쓰고 싶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읽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같이 소설 공부하는 문우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공고를 보고 ‘여기에 당선되는 사람들은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말았지요. 잊고 지내다가 응모 기간 일주일을 남겨두고 느닷없이 동화 소재거리가 생각났고, 몇 시간 만에 써 내려갔습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힘들게 만든 곡보다,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몇 분 만에 쓴 곡이 의외로 인기가 더 많은 경우가 있다는 작곡가의 말이 떠올랐어요. 문제를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예상과 반대로 빨리 풀리기도 하는 삶의 과정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포기하지만 말고 꾸준히 하자고 오늘도 나 자신을 독려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뮤즈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문학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장(場)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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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에게 다가가는 중년 부부 소통법
- 중년의 부부 생활은 쉽지 않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아내, 머리가 굵어지면서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 고부와 장서 간의 갈등. 이처럼 가족 내의 인간관계가 녹록지 않다. 특히 오랜 세월 함께한 배우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혼의 위기에 놓인 황혼 부부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시니어 이혼 상담 건수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여성의 경우 3.2배 증가했고, 남성의 경우 4.1배 증가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관계자는 “이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옅어졌고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고통스러운 부부 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위한 선택으로 이혼하는 시니어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황혼이혼 사유의 1순위는 바로 ‘성격 차이’다. 첨엔 정반대 성격이라 끌렸지만, 부부 생활을 지속하면서 성격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부 상담 전문가는 “부부 사이에 성격 차이가 있다면 서로 맞춰가려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과 상대의 어떤 기대와 욕구가 좌절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부부 갈등의 씨앗 중 하나다. 고부 및 장서 갈등, 은퇴 후 가족의 외면, 배우자와의 불화 등 가족 간의 스트레스로 중년은 괴롭다. 실제로 한 논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혼의 중년 남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족 스트레스가 1순위로 꼽혔다. 설경옥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결혼 관계 내에서 개인 스트레스는 부부 공동의 스트레스로 전이되기 때문에 배우자의 스트레스에 부부가 함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거리를 좁히는 친밀감 자녀들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얼마 전부터 남편이 은퇴해서 둘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경우가 많아졌다. 집안일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사사건건 지적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고맙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계속된 비난과 명령조 말투에 지쳤다. 예전 같으면 자식들 때문에 참았겠지만, 이제는 참고 싶지 않다. 결국 부부 문제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얽히고 꼬여버린 관계의 매듭은 결자해지 자세로 당사자가 풀어야 한다. 논문 ‘부부 갈등이 결혼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갈등의 주제보다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이 결혼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평소에 소통법을 미리 점검하고,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의사소통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특히 친밀감, 열정, 존중, 이 세 가지 요소를 명심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다. 일단 정서적 친밀감이 중요하다. 일상 속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자. “귓가에 새치가 많네요”, “오늘 피곤해 보여요”처럼 사소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것도 좋다. 가벼운 스킨십도 괜찮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사람이 10초간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잘 잤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거나, 각자 일을 하러 가기 전에 10초간 포옹을 해보는 것이다. 연문희 성산효대학교대학원 가족상담학과 석좌교수는 “친밀감 형성을 위해서 부부간 언어적 소통도 좋지만, 중년 부부는 서로 잘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상대의 시선이나 음성, 표정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심리적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감에 비례한다”라며 “서로 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포옹이나 팔짱 같은 가벼운 접촉을 생활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다가가는 대화 은퇴 이후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중년 부부는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은퇴 후 상대적으로 시간은 많지만, TV 시청에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고 부부 사이에 아예 대화가 단절되기도 한다. 이때는 서로 감정이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결혼사진, 자녀들의 돌사진, 가족사진 등을 꺼내놓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과 감정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좋다. 반려견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똥 치우는 법, 사료 등 관련 주제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는 “중년 부부는 대화가 단절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서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라며 “중년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함께 먼 곳을 바라보는 관계다”라고 말했다. 중년에는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남편은 갈수록 여성화되고, 반대로 아내는 남성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갱년기를 같이 겪기 때문에 서로 예민하거나 다투는 일이 많다. 은퇴 후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집안일이나 자녀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많다. 이때는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법이 필요하다. 남편의 경우엔 인정과 행동 변화가 필요하다. 잘못한 일을 사과할 때는 자신의 잘못된 점을 명확히 말해주고, 더불어 앞으로 개선할 방법에 관해 말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좋다. 반대로 아내의 경우엔 잘한 점이 있으면 “당신이 최고야”라며 남편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칭찬을 해줄 필요가 있다. 최성애 HD 행복연구소장은 “비난과 경멸은 원수가 되는 대화일 뿐이다. 대신 ‘정말 힘들었겠네’, ‘우리가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까?’처럼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세와 더불어 ‘다가가는 대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2021-08-0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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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추억과 휴식, 함께하는 여행의 매력
-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앞마을 냇터에 빨래하는 순이, 뒷마을 목동들 피리 소리.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 집이 그리워지네!” ‘그리운 고향’의 1절 가사인데, 시니어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곡은 1970년대 ‘노래의 전령사’로 불렸던 작곡가 전석환이 미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치 보이스’의 ‘Sloop John B’를 개사한 것이다. 사실 이 곡의 주인은 비치 보이스가 아니다.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하마의 민요를 편곡한 노래다. 노래의 내용은 주인공이 긴 여행을 마치고 ‘Sloop John B’라는 배를 타고 고향 바하마로 돌아가는데 항해 중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주인공의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엉망진창이 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 여행은 내 생애 최악의 여행이야! 난 집에 가고 싶어!”라는 하소연을 되풀이하며 노래를 마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검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도 같은 곡이 흘러나온다. “이건 최악의 여행이야! 난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부분이 강조되며 겁에 질린 검프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하지만 그 최악의 여행이 검프에게 전혀 새로운 관계와 기회를 열어준다. 이처럼 노래도 반전 매력이 있다. 가사의 내용과 달리 비치 보이스의 화음은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12줄 기타 소리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다. 일상의 소중함 코로나19로 꼼짝 못 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 여름휴가에는 여행을 가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많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가족 여행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지난번 여행을 떠올리며 벌써 걱정되고 불안해서 약을 더 달라고 한다. 가족끼리 즐겁게 지내자고 떠나서,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좋겠지만, 막상 닥치면 잘 안 된다. 가족 여행의 목적은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추억을 쌓는 것이다. 여행 계획을 독단적으로 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함께’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계획도 같이 정해야 한다. 같이 가는 사람들의 의견을 최소한 하나씩은 반영해야 한다. 물론 각자의 취향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균형이 필요하다. 무조건 손주가 좋아하는 대로, 부모가 좋다는 대로 하는 여행은 다른 구성원에게 최악의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이때는 리더의 적절한 중재가 필요하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현명한 이가 리더를 맡아서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계획을 융통성 있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함께 즐겁게 여행을 하려면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물론 지름길은 없다. 일단 인정과 칭찬이 들어간 언어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즐거움과 행복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한 걸음 물러나는 지혜 혹은 인내할 줄 아는 미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하얀 거짓말이 때론 필요하다. 여행의 리더는 독단적인 결정 대신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함께하는 사람들은 리더가 “좋지?”라고 물어보기 전에 먼저 좋다고 말해주는 게 좋다. 다만 반응을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싫다는 표시가 없는 무언의 긍정도 수긍하자. 비언어적인 소통도 중요하다. 계획을 이행하는 것도 좋지만, 같이하는 구성원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다. 소중한 존재일수록 기대를 많이 하고 상처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마음 상태가 되어야 성공적인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여행에서 함께하는 시간 동안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갖추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힘든 시기일수록 여행을 통해서 쌓는 소소한 추억의 즐거움과 휴식이 주는 재충전이 필요하다. 이번 여름엔 가까운 곳으로라도 잠시 떠나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일상의 가치를 깨닫는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집, 가족, 일터, 평범한 일상의 감사함과 소중함을 느낀다. 떠나는 목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금 돌아온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것. 그것이 여행의 또 다른 매력 아닐까? Sloop John B - The Beach Boys 미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치 보이스는 윌슨가의 형제와 사촌 형제들이 모여서 만든 5인조 밴드다. 당시 미국 서해안 젊은이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서프 음악(Surf Music)의 선두주자였다. 원래 그룹명은 ‘Pendletones’였으나, 첫 싱글 앨범 발표를 앞두고 당시 레코드 회사에서 서핑이라는 곡 주제에 맞게 이름을 ‘The Beach Boys’로 바꿔버렸다. 원곡은 섬나라 바하마의 낫소에 살던 선원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민요로, 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가 출간한 민요 모음집에 실리면서 알려졌다. 비치 보이스는 비틀스 타도(?)를 목표로 이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를 위해 최신 녹음 기술을 활용하고 편곡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 2021-08-04 0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