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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삶과 죽음의 갈림길”
- 23년 전 필자 가족은 가까운 친지들과 사이판, 괌으로 3박 4일 휴가를 갔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 세 가족은 모두 웃고 떠들며 매 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꿈 같은 3박 4일이 끝나고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맞춰 괌 국제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즐겁던 여행은 그때부터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연발한 것이다. 두 집 아빠들은 직장 때문에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다른 비행기 편이 있어 두 아빠와 한 가족은 먼저 떠났다. 그러나 필자 가족 모두와 다른 한 가족 일부는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필자 일행은 괌에서 하루를 더 자게 됐다. 다행히 항공사가 호텔 방을 제공했다. 그래서 필자 일행은 별 불만 없이 호텔로 들어가 각자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필자도 샤워기를 틀어 공항에서 대기로 생긴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한참 샤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샤워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몸도 기우뚱거렸다. ‘쾅’하는 기분 나쁜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몸이 휘청거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남편이 소리 질렀다. “다들 엎드려! 바닥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다. 지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지진이었다. 알몸으로 후다닥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리자마자 TV가 ‘탕’하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붙은 액자도 납량영화의 한 장면처럼 혼자서 ‘부르릉’ 소리를 냈다. 엎드렸는데도 몸은 계속 이리저리 굴렀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은 채 작은 아이만 찾아댔다. 지진으로 정전이 됐는지 호텔 방은 전기가 다 나가 완전히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1~2분가량 지났을까? 남편은 다시 소리쳤다. “다들 밖으로 나가!” 헐레벌떡 일어나 공포심에 계속 떨리는 손으로 옷을 대강 걸치고 작은아이 손을 꽉 붙잡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멈췄다. 다시 비상구 계단을 찾은 뒤 계단을 통해 단숨에 1층 로비로 내달렸다. 9층에서 1층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말 그대로 초특급 스피드였다. 삶을 향한 투쟁으로 상기된 얼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였지만 모두가 살아서 다시 상봉했다. 이미 로비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알몸인 채 아랫도리만 손으로 가리고 있는 구레나룻이 수북한 중동계 사람, 젖을 물리다 내려왔는지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백인 아낙네 등 그야말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진이 지나간 후 곧 커다란 해일이 닥칠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에 남편은 전화로 택시를 찾았다. 다행히 한 택시기사가 연결돼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공항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배가 뒤집혀 육지로 올라와 있었고 땅이 갈라져 차량이 처박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이런 아비규환 속을 뚫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공항도 닫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할 수 없이 공항 문 앞 처마가 있는 쪽에 구해 온 비닐을 깔고 앉았다. 공항이 다시 정상화되면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죄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라말로 지껄여대는 바람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여기선 못 있겠다 싶어 남편을 호텔 찾으러 보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디낡은 숙소였으나 가장 안전하다는 내륙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 지진 공포 때문에. 다음 날 괌 당국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공지했다. “하루 더 묵어야 한다”는 것. 당국은 대신 고급 일본호텔로 필자 가족을 안내했다. 그곳은 모든 물품이 지진을 대비해 붙박이로 튼튼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안전한 호텔이라도 몸이 둥둥 떠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고가 가져다준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 속에서 이틀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드디어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필자 가족은 기내에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후유증을 남겨 줬으나 공항에서 마중 나온 다른 가족들과 만나선 오열이 아닌, 한 줄기 눈물만 흘렸다. 기다린 그들의 아픔도 알기 때문이다. 5박 6일 유난히 길었던 ‘죽음 체험 여행’. 다시는 외국여행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머리 숙여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 2016-05-3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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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슬픈 가족사
- 나에게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아버지는 뭇매를 맞았다. 아버지는 오봉산 꼭대기에 숨어 있었으며, 거기는 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어서 의지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고, 북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에게 발각돼 아버지는 혼쭐이 났다. 우리 집은 인민군의 숙소가 됐고 주인인 아버지는 눈치를 보느라 산 속에서 지냈다. 그 와중에 우리 큰 고모는 겁탈하려는 미군을 피해 달아나다, 그 충격으로 정신병자가 됐다. 논까지 부쳐 시집을 보냈지만 고모의 시아버지 장례를 마치고는 하얀 소복을 입은 채로 친정 마루 끝을 올랐다. 집안은 날마다 한약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고모는 아주 슬프게 객사를 했다. 이런 쓰라림을 간직한 채 나는 지난 6월 1일, 복지관에 강의를 하러 갔다. 어르신의 글쓰기 제목으로 '6월이 오면'을 지정했다. 6.25전쟁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을 적도록 했고, 사변 후 태어난 사람은 6월이면 생각나거나 들은 이야기를 쓰도록 했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어르신들은 또박또박 적어 발표했다. 그 중에서 한 어르신은 백병원 앞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유지인 관계로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어머니를 거꾸로 매달아 막대기로 때렸다. 치마가 엄마의 얼굴을 덮었다. 엄청 울었던 꼬맹이, 그 때가 여섯 살 이었다. 한강을 건너려고 하니 얼음이 얼었었다. 강을 건너던 미군이 머리를 쏙 내밀고 그대로 얼어가고 있던 광경보다 어머니의 고문이 더 슬프게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어르신은 연속극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했다. 아버지는 군의무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쫓기고 있었다. 그 당시 처녀들을 마구 잡아갔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군인들 속에 숨겨주었다. 간호사라고 말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 때 어머니는 따로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그 남자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87세다. 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어르신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에는 커다란 상처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는 우울증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그 아릿한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단다. 6월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전자가 되어 흐르는 이런 아픔이 희미해지는 날이 올까.
- 2016-05-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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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고난과 실패로 무르익는 ‘인생의 가을’ -고전평론가 고미숙
-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은 몇 가지나 될까? 고통으로 몸서리치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닌 인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패와 우여곡절로 다듬어진 조각들이 모여야만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56)씨다. 그녀는 중년 이후 삶의 여정에 는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그녀는 를 리라이팅하며 를 다시 봤다. 그전까지만 해도 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만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이 왜 이렇게 긴 여행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중년 이후 정독(精讀)하면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철학적 사유나 구원의 문제 등이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최고였어요. 아마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손오공이나 요괴 등의 캐릭터에 집중할 것 같아요. 하지만 중·장년이 읽으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대비해 굉장히 많은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막상 이런 장편을 읽으라고 하면 중·장년은 ‘내가 책을 놓은 지 오래됐어’, ‘한동안 공부를 안 했는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서지만 는 정말 쉽거든요. 심오하거나 고상한 것 없이 나를 아주 편안하게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 주는 책이죠.” 인생의 안전띠 ‘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14년간 10만8000리를 걸으며 총 81가지 난(難)과 마주한다. 이들은 108 요괴와 대적하며 구법과 구원을 위해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한다. 위험천만한 고비가 많지만, 고난과 실패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젊어서는 성공과 에로스를 향해 달려가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어. 이제 나는 뭐하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할 뿐이죠. 오히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게 다행이에요. 그러면 걸려 넘어질 테고, 더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결국 날 구하는 것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야 알아요. 젊을 때는 걸려 넘어지면 ‘나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은 다 그래’라고 이해하죠. 그때부터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81난을 겪어야만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덜어낼 수 있다는 의 내용처럼, 인간은 자랑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살면서 몇 가지 난을 겪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부분 대답을 들어보면 몇 가지 꼽지 못한다고. 그런 그녀는 그동안 몇 가지의 난을 겪었을까? “굉장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요. 현대인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고루 겪으며 살았죠. 그런데 나중에 고전을 공부하면서 ‘과연 그런 것들을 안 겪는 게 더 좋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난이 날 너무 무겁고 힘들게 했죠.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주변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둬두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들면 구법의 여행이 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 상처가 된다는 것을요.” 결국 과거 고난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난은 없는 셈이었다. 그녀는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약자가 되어 트라우마라는 착각을 핑계거리 삼는다고 지적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강하려고 온 게 아니라 생고생을 자처해서 온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즐기는 거죠. 갖은 고생을 해서 한고비를 넘겼을 때만큼 뿌듯한 것도 없잖아요. 고난을 통해 내가 변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기꺼이 대응할 수 있죠.” 인생의 가을,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그녀는 중년을 가을이라 표현한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 겨울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생기는 시기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년에는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 해요. 젊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기술적인 것이나, 전문적인 것에 치중하죠. 중년이 되면, 스펙이나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기적인 목표도 아니죠.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 그것을 걸고 공부해야죠. 그런 공부 없이는 노년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쾌락에 빠질 테고요. 그런 것을 뛰어넘으려면 진리와 접속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문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회피하죠. 청춘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해요.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라고 탄식하며 말이죠. 가을이 됐는데 봄을 모방하는 것은 가을의 정취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보면 봄이 썩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았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위가 20대예요.” 하지만 인생의 봄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터. 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닐지 의아했다. 이러한 물음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경제력이나 명성, 능력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돌아갈 만하겠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노하우에 몸은 젊으니까요. 나는 젊은 시절의 무능한 상태가 싫었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게 좋은 것 아닙니까? 폐경기가 되면 또 어때요. 나는 여자다울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려서는 얼굴에 점 하나도 큰 고민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자잘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죠.” 진정한 노후대책은 ‘유머’를 갖는 것 에는 81난이 나오지만,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 등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단순히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의 매력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유머를 겸비해야만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고, 세대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지혜롭죠.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유머가 없으면 바로 설교가 돼버려요. 정말 옳은 말인데 듣기가 싫은 거죠. 그게 세대 갈등의 포커스예요. 노인은 정말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겪은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노년세대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전달하면 소통의 벽이 생겨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대화를 못 하면 혼자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에 대한 설계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제시한 노후대책은 한 가지 더 있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라는 것. 그리고 오늘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고, 대부분 중·장년이 30년 뒤를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죠. 하지만 그럴수록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를 굉장히 집중해서 살 수 있어요. 앞으로 100세까지 뭘 하고 사느냐를 걱정하는 것은 내 삶을 유예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한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젠가 그날이 온다 해도 현재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죠.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오롯이 살기 위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소용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노후대책 아닐까요?”
- 2016-03-1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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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준의 스토리텔링] 트라우마 제거 작전
-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좋았을 때가 생각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안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들,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들…. 무심결에 실수하거나 다분히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과거의 나와 머릿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또는 내게 그렇게 하는 다른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반성보다는 후회를 먼저 하는 것이, 그래서 곱씹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작심하기보다는 그저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 나라는 용렬한 인간의 한심한 습성이다. 저마다 삶의 무게는 다르다, 트라우마도 다르다 요즘 부쩍 늘어난 그런 현상을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설명했더니, 대뜸 용어 정리부터 해주었다. 트라우마(trauma)는 옛날 그리스말로 ‘상처’를 뜻하는 단어라고, 그러므로 내가 의도한 뜻으로 쓰려면 앞에 ‘정신적’이라는 말을 붙여야 좀 더 옳다고, 트라우마가 ‘심적 외상’이라는 뜻으로 곧장 쓰이는 분야는 정신의학과밖에 없다고. 누가 이과 출신 아니랄까봐 자못 까다롭다. 그러면서 큰 인심 쓰듯 걱정 말라고 했다. 후회와 미련은 누구나 갖고 살아간다면서 그 정도는 정신적 외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했다. 하긴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끔찍한 테러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고민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친구는 그러면서도 당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 견디지 못할 정도면 언제든 병원에 찾아오라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실은 거의 빠짐없이 과거 자신이 한 일이나 겪은 일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렇게 되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뇌의 변연계에 존재하는 편도와 해마라는 두 부분의 구실에 대해 안다면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아주 쉬워진다. 편도와 해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곳이다. 쉽게 말해 편도는 무의식, 해마는 의식과 연관된 반응과 기억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심리 상태는 편도 때문이다. 해마는 그 뒤 자라가 아니라 솥뚜껑이었다면서 놀란 가슴 진정시키는 몫을 떠맡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편도와 해마는 당시의 경험과 감정을 각각 나눠 저장한다. 문제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격렬한 경험을 하게 되면 편도와 해마가 제 할 일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이 급증하고 세로토닌은 급감하는, 나로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생화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편도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고 해마의 힘이 지나치게 약해진다. 전에 없이 활발해진 편도는 조그만 자극에 시도 때도 없이 그때 그 기억을 끄집어낸다. 세상에서 부지런한 바보처럼 해로운 것이 없다는데, 해마가 바로 그런 ‘부지런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마음의 병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난다. 이 어려운 이름의 정신질환은 창작물, 그 가운데에서도 영화, 그 가운데에서도 스릴러 장르에 애용된다. 영화 속 트라우마의 두 얼굴 어떤 영화의 악당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면 십중팔구 이 병을 앓고 있다. 영화에는 플래시백이란 편집 기법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과거 회상 장면’이다. 현재 장면과 구별되게 촬영되거나 알기 쉽게 흑백 또는 세피아 톤으로 처리되곤 한다. 악당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을 푹 쓰면서 천연색 영상이 세피아 톤으로 바뀐다면 ‘어릴 적 나쁜 기억이 등장하겠군’ 하면 된다. 악당만이 아니다.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 역시 부모가 흉탄에 죽음을 맞이한 끔찍한 기억과 어릴 때 우물에 갇힌 폐쇄 공포의 기억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밤낮으로 브루스 웨인과 박쥐 사나이라는 두 얼굴로 살아간다. 007 시리즈의 신작이 개봉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능글맞은 제임스 본드조차도 실은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전작 에서 제임스 본드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킨케이드(앨버트 피니)는 부모가 죽을 때 어린 제임스가 밀실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왔을 때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지.” 꼬마가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니, 제임스 본드의 해마 역시도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진 게 틀림없다. 부모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처절한 경험과 폐쇄 공포라는 극단적 경험을 한꺼번에 치른 이후에. 스스로 진단하는 기준이 있다 얼마나 힘들어야 힘든 것일까? 바보 같은 해마가 얼마나 부지런해져야 ‘마음의 병’이라고 부를 수준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생활하기 힘들 정도면 전문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좀 젠체하는 의사라면 미국정신의학회의 에 실려 있는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기준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그곳에 실린 진단기준이라는 녀석을 써보기는 하겠는데, 과히 기대는 않는 게 좋겠다. 문장이 너무 까다로워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거기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리려면 이런 경험을 해야 한다. ‘실제적 죽음 또는 죽음의 위협에 대한 사건들 또는 심한 부상,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위협을 경험, 목격하거나 직접 직면한 적이 한 번 또는 여러 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강한 두려움, 무력감 또는 공포를 포함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 이 정신없는 진단기준은 심지어 자주 바뀌기까지 한다. 1980년에 처음 정해진 뒤로 벌써 다섯 번 이상 고쳐졌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서 기준에 대한 연구와 주장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란다. 과거의 극심한 경험 탓에 트라우마가 생겨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게 병적으로 좋다면 또 몰라도,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기준 따위는 그냥 잊도록 하자. 다행히 미국정신의학회도 자신들의 기준이 좀 심란한 줄은 알았는지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PTSD 자가 진단 기준’ 참조) 물론 이것은 테스트용일 뿐이다. 정확한 진단은 전문의에게 맡겨야 한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는 것 많은 의사들은 말한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현실이 힘들다면, 그 끔찍한 기억에 스스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고.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상처 난 마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했더니 적절하게 예를 들더군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꾸깃꾸깃 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 ‘지금 이 종이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한 번 구겨진 종이는 두 번 다시 예전처럼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짙건 옅건 구김이 남아 있지요. 트라우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 나아가 자신의 대처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일본 무사시노대학 심리임상센터의 고니시 세이코(小西聖子) 박사의 말이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고 과거에 용감히 맞부딪치면서 이겨나가는 것,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그냥 잊어”라고 종용하는 것은 술 마신 다음 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리 마셨어?”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술 마시는 사람은 다음 날 괴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알면서도 마시는 것이다. PTSD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잊고 싶다. 다만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괴로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해상 블로그에 트라우마와 관련해 흥미로운 제안이 실려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나름대로의 답안이다.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더 부지런하고 솔직해지면서 착해지자는 말인데, 비단 정신질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충고는 아닌 것 같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2-18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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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발레부부가 사는 법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깊다. “죽기 전에 ‘베토벤의 심포니9’, ‘햄릿’과 ‘맥베스’, ‘라이더 스핀’ 등을 발레로 창작하고 싶어요.”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자,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다. “곧 은퇴하신다더니 또 만들어요? 은퇴 못하겠네. 하여튼 이게 문제야. 공연 하나 끝나면 그 다음 작품 이야기가 나온다니까. (웃음)” 못 말리는 부부다.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욕심을 이야기하는 남편과 그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해해 주는 아내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칠 때면 핑크빛 긴장감이 감돌다가도, 작품 이야기가 나오면 그 양상은 180도로 변하기도 한다. 묘한 케미스트리다. 집에서는 서로 안 볼 듯이 싸우다가도 일터로 돌아가면 서로 웃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민간 직업발레단인 서울발레시어터의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 예술 감독 부부다. 1980년대 후반 김 단장은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활동했고, 제임스 전은 그곳의 객원 무용수로 활약했다. 동남아 투어는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계기가 됐다. 같은 호텔과 연습실에서 생활하며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많아지면서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은 1989년. 무용수로서 각자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던 그들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 이상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직하게 그것을 지켜냈다. 발레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고리가 그들을 단단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 서울발레시어터를 낳은 지 20년 “아마 저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지금의 서울발레시어터는 없었겠죠. 아이를 낳게 되면 여기에 쏟을 수 있는 열정을 분산해야 할 테니까요. 우리가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순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들 부부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 새로운 민간 발레단체를 만들 것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 다른 부부들이었다면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하게 절충하며 인생을 꾸려나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발레단과 아이에게 모두 양립할 수는 없었다. 한 곳에 집중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이 부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 이 부분에서는 둘의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발레라는 공통분모는 이들의 선택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는 것 대신 발레시어터를 만들어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식처럼 삼아 살기로 결정했다. 이름은 서울발레시어터. 1995년생으로 올해 20세 성인이 됐다. 20년 동안 단장인 김인희는 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상임안무가인 제임스 전은 예술적 책임을 도맡았다. 작은 민간 예술단체이다 보니 재정적으로 적잖게 어려움도 많았다.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20년 동안 굳건하게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예술단체로서의 책임감과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예술을 통해서 사회가 건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예술단체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20년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홈리스(Homeless)발레와 부부발레 “서울발레시어터를 만들 때 목표가 발레 대중화와 창작 발레 역수출이었어요. 그중에 전자는 발레 시장을 키우자는 뜻이 담겨있었죠. 그렇게 되려면 발레를 직접 체험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했어요. 몸으로 그 희열을 느낀 사람이 우리의 미래 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다. 이들이 생각하는 발레는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그 자체였다. 서울발레시어터라는 테두리 안에서 ‘귀족의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2011년 빅이슈 잡지 판매원(홈리스가 판매하는 잡지)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발레라는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일환이었다. 제임스가 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뉴욕에서 살 때 홈리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환멸이나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 제임스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Soloist’와 ‘꼬뮤니케’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홈리스 발레 프로젝트의 공연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홈리스들에게 자립심과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지만, 제임스와 김 단장에게 더 큰 떨림과 영감으로 돌아왔다. 발레 대중화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홈리스 발레에서 자신감을 얻어 장애우 발레단, 과천 시민 발레단을 거쳐 부부 발레단까지 결성했습니다. 특히 3년 전부터 시작한 부부 발레단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어요.” 홈리스 발레에서 이어진 부부 발레 클래스는 제임스와 김씨 부부에게 새로운 보람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클래스를 수강하는 부부들이 변화하는 모습은 보람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발레로 인해 8년 만에 처음으로 대화를 했다는 부부, 발레를 시작한 후 아내가 예뻐 보인다는 남편, 아들과 며느리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어머니까지. 부부 발레는 분명 발레 대중화 그 이상의 뜨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변화가 기가 막혔죠. 무뚝뚝했던 부부의 표정이 4~5주가 지나자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발레를 하며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주말에 2시간인 이 수업으로 많은 가정이 변화를 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지금 2기를 지나 3기를 뽑고 있는데 이전 부부들은 자체적으로 홍보대사가 됐어요.” ◇ 발레를 창작한다는 것 10월에 열린 스위스 바젤발레단과의 합동공연은 서울발레시어터에게 큰 의미를 안겨줬다. 제임스 전이 만든 ‘보이스 인 더 윈드(Voice In The Wind)’와 ‘달빛 속에 나(Under The Moonlight)’가 끝나자 수많은 외국인 관객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본 고전 발레의 틀을 넘지 않으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공연에 외국인 관객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안무를 창작한다는 것은 그만한 고통이 수반됐기에 공연 후 제임스가 느끼는 자부심은 더욱 컸다. “창작은 힘들지만 결과물이 나오면 성취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때문에 바젤발레단과의 공연이 끝났을 때는 힘들었던 것도 잊고 행복하더라고요.” 은퇴를 선언해 놓고도 작품 창작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박수갈채와 희열.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서 힘든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20년간 만든 크고 작은 작품이 104개나 된다. 1년에 5개의 작품을 만든 셈이다. 제임스 전이 이렇게 쉼 없이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작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죠. 저도 작품의 영감을 거기에서 받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제 영감의 소재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는데도 이 부부의 한숨은 멈추질 않는다. 발레라는 예술 문화를 향유하려는 이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레의 대중화에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가로서 서울발레시어터를 일정 부분까지 끌어올렸지만, 후배들이 가야 할 예술계의 현실과 미래가 어두운 탓이다. “제가 봐도 예술계의 앞날이 캄캄한데 자식 같은 후배들은 오죽하겠어요. 지금 시장도 좁고, 은퇴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도 없는데 후배들에게는 그것을 물려주지 말아야죠. 발레 대중화가 돼야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연하겠지요.” 김인희 단장과 제임스 전이 이끌어 온 20세의 서울발레시어터는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의 산물 이었다. 이제 그들의 열정은 후배들을 향해 있다. 40년 안무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김 단장과 은퇴를 앞둔 제임스 전은 이제 무대가 아닌 곳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살림을 책임 질 계획이다. 이들의 식지 않는 열정으로 서울발레시어터의 미래는 더욱 풍요롭다. >>>김인희 단장…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유학, 유니버설발레단 단원 및 지도 위원을 거쳐 국립 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STP발레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발레협회 올해의 발레리나상(1983),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문화예술공로상(2010), 한국발레협회 발레CEO상(2012)을 수상했다. >>>제임스 전 예술 감독… 줄리어드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모리스베자르 발레단 및 플로리다 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했다. 이어 유니버설발레단 및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및 예술감독, 한국체육대학교 생활무용학과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는 무용월간지 「몸」지 주관, 무용예술상 올해의 안무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4년에도 같은 곳에서 로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듬해 도 서울무용제에서 안무상의 영예를 안았다.
- 2015-11-3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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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도서] <공부하는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무한 긍정 경찰 엄마 이금형의 인생 공부법
- Interveiw 의 저자 이금형 교수 고졸 순경 출신으로 겪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35세에 방송통신대에 들어가 6년 만에 졸업하고, 40대에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석사 학위, 50대에는 박사 학위까지 받으며 만학의 열정을 불태운 저자 이금형. 특유의 긍정 에너지와 노력으로 여성 최초로 치안감 자리에 오른 그녀가 말하는 워킹맘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과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거릿 대처를 닮은 자신의 헤어스타일에는 경찰이라는 정체성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부하는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제목의 책을 낸 계기는? 38년 동안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들이 경찰 후배들이나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늘 ‘고졸, 순경, 여성’이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는데, 그런 나의 노력이 ‘공부’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었죠. 실제로 경찰 일을 하면서 대학교, 대학원 석·박사를 했고 딸들에게 늘 열심히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시간이 거꾸로 간다’의 의미는 소신과 열정이 있다면 퇴보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죠. 여성 경찰로서 임신했을 때나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병행하다 보니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요. 어떻게 극복해 나가셨나요? 특별히 무언가 관리를 했던 것 같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고 경찰 일도 그렇고 마음가짐과 정신자세가 중요하죠.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긍정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편이에요. 책에도 소개했듯 ‘긍정은 천하를 얻고 부정은 깡통을 찬다’는 말이 있잖아요? 반대로 엄마이기에 여자이기에 더 강점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다면? 피해자들을 대할 때 ‘그들이 내 딸이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가니 재수사를 지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 아이들을 보며 범인을 꼭 잡아 그들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경찰 조직은 남성 중심적인 조직이라 포용력이나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죠. 이러한 부분을 여성들이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책에서 ‘얼마 만에 공부를 마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꾸준히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해준 가족들의 도움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삶에 가족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척 커요. 남편은 경찰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며 조언해주었고,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봐주셨죠. 딸들도 어렸을 때는 엄마가 일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청소년기부터는 엄마의 일을 존중해주었어요. 승진시험 때마다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이나 대학교 대학원 수업을 열심히 따라가는 내 모습이 딸들의 학업과 인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뻐요. 부산지방경찰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는데요, 인생이모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현재 서원대에서 경찰행정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경찰로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어 보람되고 재미있어요. 또, 한국양성평등진흥원 초빙교수와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이사로서 양성 평등 문제와 청소년 문제를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과 공부에 도전하는 주부들을 위한 조언과 응원의 메시지.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바닥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주부들은 아이가 생기면 정말 시간이 모자라요.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 직장을 그만둘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이때만 잘 견디면 올라가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또,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엄마인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해나갔으면 해요. △ 이금형 現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석좌교수, 한국양성 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前 광주지방경찰청장, 경찰대학장, 부산지방경찰청장
- 2015-10-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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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70년을 빛낸 한국 영화 - 오동진 영화평론가
-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 2015-06-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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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분단 70년 한국인 살펴보기
-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년은 기념비적인 해다. 감격과 환호 속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칠순을 맞기까지 우리는 고난과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다. 한국의 70년은 외국의 17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기와 맞먹을지 모른다. 이 길고 험난했던 세월 동안 한국 사회와 문화는 어떻게 달라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엇이 시대의 화두였나. 앞으로 8월호까지 부문별로 나누어 7회 특집을 마련한다. 그 첫 순서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분석하는 세대론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해 자연 생각해보게 된다. 광복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빼앗긴 주권의 회복이자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이행' 하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격동의 현대사였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은 격화됐다. 냉전의 그늘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선포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참으로 험난한 나라 세우기 과정이었다.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국가를 성취했으되 통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진 셈이었다. 나라 세우기에 부여된 두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세계시간 속에서 뒤처졌던 만큼 그것은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로 진행되었다. 추격산업화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선(先)성장 후(後)분배’ 논리야말로 추격산업화의 요체였다. 성장은 가파르게 이뤄지고 경제적 삶은 빠르게 향상됐다. 하지만 추격산업화의 정당성은 그 과정 안에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유신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정함으로써 군사권위주의의 등장을 가져왔다. 추격산업화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여전히 논란을 안고 있다. 대중의 다수는 향수를 갖고 있는 반면, 지식사회에서는 거부 경향이 두드러진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들이 현재의 곤궁(困窮)으로 인해 과거를 그리워해 왔다면, 지식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지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추격민주화는 추격산업화 안에서 배태됐다. 군부권위주의는 민주화를 일시적으로 지체시켰지만 역사는 이미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추격민주화를 주도한 주체는 사회운동이었다. 분출하는 사회운동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요구하고 또 만들어냄으로써 서구민주주의를 단숨에 추격하고자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본격화된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대내적인 민주화와 대외적인 자주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추격민주화에도 그늘은 존재했다. 정치민주화는 이뤄졌지만 ‘거리의 민주주의’가 ‘제도의 민주주의’로 쉽게 전화되지 못했다.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화 역시 미완의 과제였다. 지역주의가 강화되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돼 온 것은 민주화 과정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민주화 과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추격산업화의 조건에서 민주화를 성취하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추격민주화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게 정보사회였다. 정보기술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정보사회는 경제·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정보기술과 연관된 산업은 경제의 중추를 이뤘고, 새롭게 등장한 온라인 공론장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한 중심을 형성했다. 그리고 정보사회의 도래가 가져온 가상문화는 일상생활은 물론 문화 생산 및 소비양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세계화의 충격과 한 쌍을 이루는 정보사회의 도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 왔다.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개인적·사회적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왔다. 특히 스마트폰의 대중적 보급은 정주(定住)사회를 넘어서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유목사회의 도래를 현실화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 정보 불평등, 인권 침해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을 낳아 오기도 했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갈등 광복 70년의 이러한 ‘압축적 발전’에 대응하는 개념이 세대다. 세대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대략 3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한다.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를 특히 주목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 정보시대에 각기 대응하는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정보화세대’가 존재한다.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50대 중반 이상이 산업화세대라면,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민주화세대이며, 10대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정보화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 세대 가운데 뚜렷한 대비를 보인 것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다. 산업화세대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끈 1960~70년대 산업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보여왔다면, 민주화세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시민운동·노동운동을 통해 진행된 민주화에 드높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가 비서구사회의 모범적인 사례였던 만큼 이러한 자부심들은 그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려 했던 산업화세대와 말의 자유 및 인권의 증진을 모색하려 했던 민주화세대 사이의 가치의 긴장 및 충돌은 우리 사회 변동의 또 다른 특징을 이뤄왔다. 우리 사회 세대갈등의 주축을 이뤄온 ‘6070세대 대 3040세대’ 간의 갈등은 ‘산업화세대 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세대 간의 갈등이 가장 예각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은 정치다. 우리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대통령선거의 경우 언제부턴가 세대갈등은 지역갈등과 함께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예를 들어,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민주화세대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었으며, 2013년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산업화세대의 지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세대는 5060세대와 3040세대의 사이에 놓인 50대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이들인데,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특징을 아울러 갖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현재 50대는 베이비붐 세대이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이들이다. 이들 다수는 2002년 대선에서 진보적인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보수적인 박근혜 후보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50대는 ‘이중적 불안’ 속에 놓여 있다. 하나가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직장으로부터의 ‘퇴출의 공포’라면, 다른 하나는 고령화에 따른 ‘노후생활의 공포’다. 이러한 불안의 일상화는 50대 다수로 하여금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정치적 구도보다는 어느 세력이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는가의 정책적 구도를 중시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50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이 세대가 갖는 역할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생애를 돌아볼 때 50대는 6070세대와 3040세대 사이의 ‘낀 세대’이지만, 동시에 두 세대를 이을 수 있는 ‘가교 세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가교 세대로서의 특징은 이 세대로 하여금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정보화 ‘트라우마세대’에 주목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를 이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진행돼 왔다. 정보화세대라 명명할 수 있는 이 세대가 갖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이념보다는 탈이념을 선호하고, 이성 못지않게 욕망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정보혁명에 익숙한 세대다. 다른 하나는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음으로써 물질적 가치와 탈물질적(post-materialist) 가치가 혼재하는 세대라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건 거시적으로 보면 물질적 가치에서 탈물질적 가치로의 변동이 이뤄져 왔고, 우리 사회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세대’는 탈물질적 가치의 기수라 할만 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탈물질적 가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좌절됐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 양극화가 강화되고, 특히 청년실업이 본격화되면서 정보화세대는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영향 받은 물질적 가치와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영향 받은 탈물질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정보화세대는, 이 시대를 규정짓는 ‘정보화’라는 말과는 달리, 개인적 생애에서 그렇게 행복한 세대는 아니다. 이들을 나는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 트라우마세대란 초·중·고교 시절에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의 실직 또는 부도를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가중된 청년실업에 다시 대면해 있는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을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이유는 외환위기로 인한 개인적 경험의 기억이 이후 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정보화세대인 트라우마세대에게는 민주화세대의 양대 축을 이뤄온 386세대, 신세대와 비교할 때 특히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386세대의 상징이 민주화와 학생운동에, 신세대의 상징이 ‘네 멋대로 하라’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있었다면, 트라우마세대의 상징은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과 청년실업에서 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세대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서 이제 정보시대와 세계화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증거한다. 둘째, 세대 내 양극화도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세대라 하면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조되지만, 정보화세대의 경우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물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이 동질성이라면,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은 이 세대를 승자 그룹과 패자 그룹으로 분화시키는 양극화를 낳아 오면서 세대 내 이질성을 강화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대 내 분화 및 양극화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창한 영어, 경영 컨설턴트, 상층 문화 등이 승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라면, 어눌한 영어, 비정규직 노동자, B급 문화 등은 패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다. 앞선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와 달리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뚜렷한 정보화세대는 탈이념적 성격이 두드러져 다른 세대와의 정치적 긴장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해와 공감의 세대공존을 향하여 어느 나라든 세대 간의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 까닭은 세대에 따라 가치와 이익이 다르고, 또 일정한 연령 차이에 따른 사고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세대긴장과 세대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어느 사회이건 매우 중요한 사회·문화적 과제다. 그렇다면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층갈등이나 지역갈등과 비교해서 세대갈등이 갖는 특징은 그 갈등의 양상이 예각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비록 서로 다른 세대라 하더라도 모두 가족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의 충돌이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연령에 따른 가치의 차이가 가져오는 긴장과 충돌은 매우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며, 이는 결국 세대간 소통을 가로막아 세대단절을 강화시켜왔다. 세대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세대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가 존재하는 법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 민주화가 제공한 인권의 신장,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자유로운 세계시민 등은 모두 소중한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을 다원적 관점에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로 세대갈등 해소와 세대공존의 출발점을 이룬다. 어떤 세대든 그늘이 존재한다, 특히 정보화세대는 앞선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청년실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세대다. 서로 다른 세대가 경험한 시대와 그들이 놓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면 세대간 소통은 활발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박사, 미국 UCLA 방문연구원 역임. 현재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 주요 저서 : , 등
- 2015-02-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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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2] 아산나눔재단 정진홍 이사장
- 정진홍(鄭鎭弘·78)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중·고교에 다닐 때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고,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죽음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덧 78세.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늙음의 의미, 삶과 죽음의 철학을 듣기 위해 아산나눔재단(서울 종로구 계동)을 찾았다. 편의상 대답은 평어체로 기술한다. 글 임철순 미래설계연구원장 fusedtree@etoday.co.kr 녹취·정리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노진환 기자 myfixer@etoday.co.kr 언제 처음 늙었다고 느끼셨나요? 정년을 맞았을 때였다. 어느 날 문득 ‘관악산(서울대)에서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이라는 게 없었다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003년에 은퇴를 하기 전부터 조금씩 달라지긴 했다. 예전 제자들을 만나면 내가 대부분 C D F학점을 줬다고 한다. 강의 내용을 그대로 쓴 답안지는 게을러 보여서, 좀 튀면 건방져 보여서 F학점을 주곤 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A학점을 주려고 한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면,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부터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변화의 계기가 정년이더라.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는 표현보다는 굉장히 고맙다는 게 더 맞겠다. 참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살다보니 싫은 사람, 안 만났더라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과 안 만날 수 없어 힘든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고맙다. ‘내가 참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구나’ 하고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동기, 선·후배, 가족 다 고맙게만 느껴진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많았고. 그런 이들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 아닐까. 모든 게 다 고맙다니 그러면 죽음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가요? 어느 때는 죽음이 기다려질 때가 있다. 굉장히 편하게, 아주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괴로움은 주고 가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염려 정도는 든다. 죽음은 굉장히 그윽한 휴식, 쉼이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사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나는 그런 의견과는 조금 다르다. 남겨주고 싶은 것도 없을 뿐더러, 무언가가 남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까지 끼적거린 글이나 남긴 것들도 함께 가면 좋겠다. 내가 살다 간 자리가 텅 비었으면 좋겠고 쉽게 잊히면 좋겠다. 아버지의 부자연스러운 죽음(판사였던 그의 선친은 6·25 와중에 숨졌다.), 자식이 시신도 못 찾은 일, 그런 경험 때문인지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야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대로 잘 될 것 같다. 나이 먹으니 친구들이 자꾸 간다. 죽음은 친구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일부도 함께 떼어간다. 사람이라는 게 기억에서 잊히면 없어지기 마련인데 뭔가 남기려 하거나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를 생각하는 건 욕심인 듯하다. 그런 생각이 지금의 삶을 더 추스르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긴 할 것이다. 근데 난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정말 텅 비었으면 좋겠다. 의식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한 두루 고맙다는 말을 남기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더욱더 노년의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겠다, 뭐가 되겠다는 것도 늙기 전의 생각이다. 나는 한강 근처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처음엔 한강대교에서 잠수교까지 뛰어 갔다 오곤 했다. 몇 년 지나니 나도 모르게 뛰는 게 안 되더라. 그 뒤로는 건강을 위해 속보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속보도 안 되더라. 지금은 그저 어슬렁거린다. 뛸 적에는 잠수교만 보이고 돌아서면 한강대교만 보이더니 걷기 시작하자 가로수도 보이고 가로등도 보이고 빌딩도 보였다. 이제는 어슬렁거리니 바람소리도 들리고 풀잎소리도 들린다. ‘늙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 다른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뛰는 것을 잃은 게 아니라 속보를 얻었고, 속보를 잃은 게 아니라 어슬렁거림을 얻었다. 젊었을 적에 분별과 판단으로 얻은 결실을 늙어서는 베풀고 살았으면 좋겠다. 죽음이 있다는 걸 알고 살되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봐야지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절망스럽다.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어떻게 내 삶을 완성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섭섭하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고까운 일이 왜 없겠나. 그러나 억지로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안 좋은 것만 보면 자꾸 그런 것만 보인다. 좋은 것만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참 괜찮다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보다는 100배 낫다. 한 방송사가 그동안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부모에게 보내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 자라줘서 참 고맙다”고 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대가 그래서 돼지같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했는데 너희들은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배낭 메고 세계여행도 다니며 참 잘 자라줬다고. 서울대에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이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교수가 지나가면 붙어 앉아 있던 남녀가 떨어지거나 일어섰는데 요즘은 허리를 감싸고 딱 붙어 앉은 채 인사를 한다. 나는 그 모습이 예쁘다. ‘녀석들아 오래오래 행복하거라’ 하고 속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근데 누군가는 버르장머리 없다고 험한 말을 한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행복한 걸 축복을 못해줄 망정 왜 욕을 하는가. 우리 때는 뭐 잘했나? 지금 시대의 노인들은 지혜가 부족해 보이고, 있다 해도 발휘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의 지혜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대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있다. 우리의 트라우마는 다음세대의 트라우마와 다르고 그다음 세대와도 다르다. 우리 선배들은 징병, 일제시대 이야기를 주로 하고 우린 6·25 이야기를 한다. 한 제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기에 너의 트라우마를 왜 남에게 강요하느냐고 혼낸 적이 있다. 그러한 한계가 지혜를 막는 벽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현 시대는 과거의 시간대보다 변화가 빠르고 시간차도 점점 짧아진다. 기존 세대가 변화를 체감하기 전에 이미 시대는 변해 버린다. 기존 세대가 지혜라고 알고 발언하면 그 다음세대가 적합성을 못 느낀다. 적합성이 없으면 진리가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노인을 배우라고 하기 전에 노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경험과 지혜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해야 젊은이들도 이해할 수 있다. 내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지혜 있는 어른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젊은이들과는 어떻게 교류하고 있습니까? 울산대에서 주 1회 ‘종교문화의 이해’ 강의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행복하니?”라는 질문은 어색해했다. 대신 “재미 있니?”라고 하면 이해한다. 요즘 아이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것을 못 먹어서 불행하다. 사랑을 못해서가 아니라 더 진하게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 아이들에겐 그런 게 절박한 문제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예전엔 굶어죽고 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라고 말하면 안 된다. 통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젊은이 수보다 직장이 더 많다. 실업률이 높다지만 취직할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직장을 가려 해서 문제인 거다. 그런 것도 우리가 젊은이들의 수준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어른은 거의 없다. 그러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지혜로운 어른이 없다고 하는 거다. 강의방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군요. 나는 강의보다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수강생이 75명이나 돼 대화하기가 참 어렵다. 질문을 던지고 원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처음엔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지금은 내가 뭘 물어 볼지도 모르는데 이야기하겠다고 나선다. 어른들이 3분을 못 기다려서 그렇지 그것만 기다리면 아이들은 대화를 한다. 나는 한 학기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5천원 안팎의 비용을 들여 점심을 준비해 오도록 한다. 조교가 그 음식에 번호를 매긴 다음 제비뽑기를 해서 먹게 한다. ‘점심 바꿔 먹기’는 남을 위해 점심을 마련하는 경험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충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 오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 오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편지도 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누구는 정성을 다했구나, 누구는 성의가 없구나,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된다. 중간고사 답안지도 임의로 나눠주어 논평을 하게 한다. 그런 다음 이름을 불러 답안지를 주고받고 얼굴을 보게 한다. 다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 ‘이렇게 잘 하는 아이가 있구나. 그럼 나는?’하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철학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며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했다. 그거 참 마땅찮은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몰라 죽겠는 아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니. 그보다는 함께 고민해보자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컴퓨터도 좀 하고, 걸 그룹 춤추는 것도 즐길 줄 알고, 랩도 들어야 한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젊은이들에게 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조언을 할 때에도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난 이렇게 살아왔노라는 고백의 언어에서 끝나야 한다. 결국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난 이렇게 살았으니 넌 이렇게 살아라” 이건 아니다. 장차 내가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내가 무슨 당위를 논할 수 있겠는가. 교육이란, 가르침이란 자신의 삶과 경험을 고백하는 정도이지 그것을 정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폭력’과 마찬가지다. 어려웠던 성장기를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신지. 어머니는 많이 배우신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어려워졌을 때 친지들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어머니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 그러나 집안의 도움을 받으면 갚지 못한다. 니들은 그렇게 자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집안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 그래서 7남매의 맏이인 나는 고아원에서 지내게 됐다. 만 17세 이상은 고아원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그 이후에는 모자원에서 지냈다. 대학 때는 서울에 계신 당숙의 도움을 받았다. 난 6·25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홈(Home)이 없었다. 해가 지면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갈 집이 없었다. 지금도 석양이 지고 어두워지면 괜히 초조해진다. 집에 가 드러누워 있으면서도 집에 가야 할 것만 같다. 그게 치료받아야 할 트라우마인데, 죽으면 집에 가는 것처럼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 2015-01-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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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_1955년生 블루스③ ]“우리끼리 잘하자”
- 1955년생이 모두 1300여 명, 체육대회를 열면 500~600여 명의 인원이 모이는 매머드급 모임이 있다. 그것도 지역 모임이 그렇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고양시에 자리한 고양 을미회가 그 주인공. 고양시 1955년생들의 추억과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를 맞으며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가 말하는 모습,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들어본다. 1992년에 결성된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 운영되고 있는 고양시 토박이들의 탄탄한 지역 모임이다. 아니, 이미 단순한 지역 모임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롤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고양 을미회의 시작은 고양시 안의 네 개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여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열 개 초등학교의 동창생들이 모인 커다란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열 개의 초등학교는 능곡(37회)·대화(16회)·백마(16회)·벽제(20회)·삼송(8회)·성석(20회)·송포(31회)·신도(38회)·일산(41회)·행주(19회)로, 회원들은 모두 1955년생이다. 초등학교 그 시절 체육대회를 맛보다 가장 큰 행사는 연 1회 열리는 체육대회다. 500~600여 명에 달하는 을미회 소속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뤄지는 이 체육대회는 매년 꾸준히 열리면서 을미회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대규모 연례 행사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공원 축구장 등의 넉넉한 공간을 빌려 진행되는 체육축전은 군악대의 지원을 받기도 하고 다른 큰 규모의 모임들과 친선 축구대회도 갖는 등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지역 축제의 성격까지 갖게 됐다. 이 자리에서 1955년생 동갑들은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며 즐거운 장난을 치기도 한다. 마치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려운 시절, 끈끈한 인연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고양 을미회 사람들이 기억하는 어렸을 때의 고양시는 아직 신도시와 콘트리트가 없었던 논 밭의 농촌 풍경이다. 전방이라는 척박한 땅에 만들어진 논과 밭의 마을.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지내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추억에는 생활의 어려움과 어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서로를 도우면서 생겨난 끈끈한 친분에 관한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1968년 졸업한 우리들은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마지막 세대죠. 그때 우리가 갈 수 있는 고양시 안의 중학교는 세 개밖에 없었어. 학교가 적다 보니 입학 시험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었지.” 고양 을미회 이강식 회장은 을미회 회원들의 우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진 것이라고 자부했다. 고양을미회는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자는 게 그들의 ‘교훈(校訓)’이었다. 마치 ‘다정다감(多情多感)’이 병인양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지역모임 있으면 나와보라는 듯이, 을미회를 위한 행사라면 ‘열성 그 자체’였다.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 이렇게 잘 뭉친 데는 무엇보다 을미초등학교(?) 출신 덕이 크다. 그만큼 모교 초등학교 제쳐두고 을미회를 위한 일이라면 이해타산을 할 게 없이 열성이다. 한국 사람들은 50만 넘으면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족보를 찾는다고 한다. 연어가 어머니의 강(母川)을 찾아 회귀하는 것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 느낄 나이가 된 것이다. 38세에 만나 이들은 이제껏 대처생활을 하면서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이들이 만난 자리에는 수 십년 만에 들어보는, 잊고 있던 사투리와 방언(탯말)이 춤을 춘다. 담방구, 공기, 공치기, 장정놀이, 대장놀이, 자치기….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몇 안 되는 놀이들은 1955년생들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드는 열쇠들이다. 그리고 털내기. 고양시의 명물 음식인 털내기는 미꾸라지와 국수를 넣고 끓여낸 매운탕이다. 가난한 시대가 만든 음식이기도 한 털내기는 고양 을미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미꾸라지 말고도 온갖 잡어들을 다 넣어서 끓이고 국수로 양을 불린 음식이었다. 옆 집에서 가꾸는 밭에서 몰래 가져온 깻잎을 털내기에 넣어 먹던 맛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기도 했다. 이명옥 봉사분과장은 “초창기 을미회 모임 때는 몇 가지 소싯적 추억이 전부라 할 만큼 화제도 궁해 만나면 그저 술잔만 주고받다 자칫하면 말싸움이 나고 감정을 사기도 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복순 산행분과장이 “하지만 우리들은 돈 있고 없고 떠나,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고만고만한 곳에서 모여 고만고만한 삶을 나누며 예의 좀 알아서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라 자신했다. “누가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고 추억 쌓기 호사를 누리는 이 을미회원들은 속칭 ‘겡우(표준말은 경우나 경위)’를 잘 안다는 것이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지킨다는 것이죠. 우정(友情)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의 트라우마를 잘 감싸줍니다.” 이강식 회장은 이렇게 자부심이 깔린 고양 을미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서로서로 존중해준다는 그자체가 뿌듯하고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겡우’를 잘 아는 1955년생들이 모였다 이처럼 고양 을미회 정도로 많은 동갑 친구들이 단합되는 단체는 드물다. ‘이정도 규모는 ’처음’이란 말도 어렵지 않게 듣는 고양 을미회 회원들에게 자연스러운 자부심이 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의 성공에 힘입어 파주에서도 을미회를 벤치마킹한 단체를 만들었다, 고양시 내에선 고양 을미회의 후배들이 같은 기수들끼리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력 면에선 아직 어느 단체도 고양 을미회를 못 따라오고 있다. 고양 을미회는 체육대회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단체 야유회를 가며 매월 봉사활동을 갖고 있다. 봉사활동은 노인요양 시설, 장애인 시설 등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장학 사업도 시작한 상태다. 이미 단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강식 회장은 “60세가 된 우리들끼리 만나면 손자들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개인 사업에 대한 얘기도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노후에 모여서 가족과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에 요즘 관심이 커요”라고 말했다. 또한 내년에 고양을미회 단체로 회원들의 환갑을 근사하게 치를 계획도 세우고 있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 필요 거대해진 고양 을미회에서 고민하고 있는 건 미래를 위해서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성연배 사무국장이 덧붙였다. “회원들이 모일 수 있는 고정된 공간이 생긴다면 종합적인 정책이 가능할 겁니다. 이익 창출뿐만 아니라 공동구매 같은 수단을 통해 저렴한 생필품을 제공할 수도 있겠구요. 회원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보다 용이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봉사활동을 봐도 기존 봉사활동들이 외부의 기관이나 이슈에 참가하는 식이었다면 앞으로의 봉사활동은 을미회 내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이뤄져야 할 테니까요.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고양 을미회는 이미 고양시 내에 있는 종합병원 다수와 협약을 맺고 회원들에게 의료 편의를 제공해주고자 논의 중에 있었다. 이제 고양 을미회는 미래를 위한 계획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유형렬 기획분과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인원이 많으니까 그 인원 안에 서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을 거예요. 중요한 건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란 겁니다. 지금 시점이 중요해요. 우리 내부에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각자의 역할 분배가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고 당차게 말했다. 우리 같은 모임은 또 없을 것 “그런데 사실 초창기에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할 얘기 자체도 별로 없었어요. 어, 우리 술 마시러 모였습니다! 아니면 장어 먹고 싶어서요! 그런 식이었지(웃음).” 이 회장의 말대로 정말로 재미있고 즐기기 위해서 모였기 때문에, 고양 을미회 초창기 멤버들은 을미회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고, 이제는 모임의 비전을 얘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양 을미회는 진화했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뿌듯함을 안겨준다. 우리네 삶이 그리 척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는 긍정적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양 을미회원들은 우정의 금자탑을 앞으로도 30∼40년 차곡차곡 쌓아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의 신념과 가치가 말갛게 무르익어가리라는 바람을 가져보자.
- 2015-01-16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