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나이 든 부모의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주변에 많다. 치매나 뇌졸중, 암 등의 병을 앓게 되면 예전처럼 집에서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요양병원은 죽으러 가는 곳’이란 비관적인 말들을 한다.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셔보니 이런 말이 왜 나왔을까? 알 것 같다.
아버지는 폐암4기 진단을 받았지만, 통증 제어가 잘 되고 간병인 케어도 만족스러워 병원에서 안정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암이라는 몹쓸 병에 걸렸지만 이 정도만 지속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생각과는 달리 병원에서는, 더는 해줄 게 없으니 퇴원을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열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콧줄을 끼고 산소 공급도 해야 하고, 통증도 잡아야 하니 자신이 없었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결론을 내리고, 아버지가 원하면 명절에 잠깐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요양병원 입원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시설이나 평판이 좋은 곳은 대기자가 많았고, 대기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시설이나 의료진이 성에 안 찼다. 입원을 거절한 병원도 여럿 있었다. 발품을 팔고 눈으로 확인하면 좋은 병원을 고를 수 있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환자가 병원을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라 병원이 환자를 골랐다. 입원한 대학병원에선 퇴원을 종용하고, 마땅한 요양병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암 환자인 아버지는 결국 재활 전문 요양병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면회가 제한 됐다. 전화로 간신히 안부를 주고받았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아버지가 불안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입원 이틀 만에 의식이 흐려지고 말이 어눌해졌다. 간병인은 아버지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빨대 컵과 기저귀를 챙겨오라고 했다.
부랴부랴 찾아간 아버지의 새로운 집, 5인실 병실은 비좁았다. 간병인까지 10개의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어 몹시 답답해 보였다. 바로 옆 침대의 환자가 기침할 때마다 커튼이 흔들렸다. 게다가 대부분 장기입원 환자들이어서 간병인들 살림살이가 병실에 가득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존엄한 삶이 가능할까? 의문이 생겼다.
점심이 막 지난 시간이었는데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나절만 해도 걸어서 화장실에 다녀왔다는데 잠에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인사도 못 하고 돌아왔다. 불안한 마음에 저녁에 다시 병실에 들른 동생은, ‘왜 나 모르게 기저귀를 채웠냐’고, 아버지가 간병인에게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대학병원에서 아버지를 돕던 간병인을 요양병원까지 모시고 왔다.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했던 건 화장실이었다. 대소변을 끝까지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간병인은 밤에 화장실 가는 대신 기저귀를 채웠다. 요양병원에선 다 그렇게 한다고, 자존심을 기저귀로 막아버렸다. 아버지는 기저귀를 찬 채 종일 잠을 잤다.
통증 관리만 잘하면 요양병원에서 잘 계실 줄 알았는데 그건 우리의 바람이었고 현실은 전혀 달랐다. 아버지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어렵게 입원한 요양병원이었지만 일주일만에 서둘러 퇴원을 결정했다.
요양병원에서 나와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을 한 아버지는 예전 상태를 회복했다. 식사도 잘 하고 화장실도 걸어서 가고 일기도 쓰면서 온전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데까지 돌아왔다. 요양병원에 계속 있었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그 후로 한참동안 아버지는 요양병원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저었다. 요양병원에서 일주일은 아버지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선화 추상화가(52세)의 작품은 색채와 그림이 모두 인상적이다. 컬러풀한 색채는 열정과 에너지를 전하고, 역동적인 그림은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도 늘 밝은 기운을 발산해 주변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시가 대부분 취소된 가운데, 고양시에 있는 한양문고의 ‘갤러리 한’에서 3월 3일부터 6월 8일까지 이선화 작가의 ‘생명소통’ 전을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작년 8월에 초대전을 한 이후 반응이 좋아 2번째로 하는 전시다. 그는 20살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중학교 때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나도 색채의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색감이 뛰어난 작가’라는 평을 듣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대학졸업 후 여러 해 동안 미술 교사로 재직했을 때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외할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도 어린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목단꽃을 그려주곤 했다. 언니와 여동생 역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가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화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늘 생명력, 에너지, 색채에 관심을 두었고, 40대부터의 표현 주제는 생명소통이다. 작품과 제목에도 물고기와 새, 나무, 바람, 물 등 장자의 자유 사상과 생명체들 간의 소통을 담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기와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심리학과 동양철학, 명상 관련 책을 즐겨 읽은 덕분에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
“생명도 중요하고 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한 줌도 안 되는데 서로 연결이 되어 있죠. 사람을 포함한 생명 하나하나는 우주 안의 하나의 세포라고 생각해요.”
그는 작품을 통해 추상화의 동서양적 만남을 시도했다. 추상화의 출발은 서양이지만, 추상적 사유와 미학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주로 써요. 오방색이 우리 민족의 심성에 가장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양오행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청, 적, 황, 백, 흑색은 서로 충돌하면서 조화를 이루죠.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 즉 혼돈과 질서가 함께 있는 우주와 같아요. 이런 것들이 생명력을 표현하는 제 회화를 만드는 요소들이에요.”
그의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다가, 가까이서 보면 온갖 생명체들이 서로를 향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때로는 온화하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때로는 시원한 치유의 바람을 느끼길 바란다.
“컬러 테라피, 즉 색채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제 그림과 소통을 하는 모든 분에게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서 감상자들의 트라우마를 줄여주고 활력 있고 행복한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죠.”
그의 작업을 보면 현대미술 대중화를 위해 고민한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선입견 없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으려고 인문학 공부를 꾸준히 한 덕분인 듯하다. 그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행하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추상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감상법은 명쾌하다.
“예술가는 대상을 표현하고 평론가는 작품을 해석하려고 하죠. 그런데 감상자는 그 느낌 자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작품을 머리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바람의 의미를 묻지 않고 바람을 느끼듯이, 꽃의 의미를 묻지 않고 꽃향기를 맡듯이, 파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파도에 몸을 던지듯이 말이에요. 그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은 오롯이 감상자 고유의 것이 될 것이고, 감상자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그동안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석하며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다.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런던 ‘어포더블 아트 페어(Affordable Art Fair)’와 홍콩 ‘하버 아트 페어(Harbor Art Fair)’ 등 해외 여러 곳에서 전시를 했다. 2017년에는 20여 명의 한국 작가들과 함께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아트 쇼핑(Art shopping)’에도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키아프, 화랑미술제, 롯데호텔 아트 페어, 부산국제화랑미술제 등에서 단체전과 국회 아트갤러리, 현대백화점 등에서 초대 개인전을 했다. 작품은 박영사, 고영 테크놀러지, LG생활건강, 리더스경제신문사 등 많은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는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활용해 스카프, 넥타이, 스탠드 조명 등의 아트상품을 만드는 것도 소통을 위한 일 중에 하나다. 5월 한 달간 ‘갤러리 한’ 전시장에서는 추상화 개인 레슨도 할 예정이다. 그동안 종종 자신의 작업실에서 캔버스와 물감, 붓 등의 재료를 제공하고 2시간 동안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 왔는데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추상을 힘들고 낯설게 생각했던 이들이 추상의 매력에 빠져들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 성공적인 의정 활동을 수행한 국회의원, 그리고 감사와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김홍신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여러 가지 명칭들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무엇보다도 다시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와 마주한 작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외부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멈췄던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완성하기로 했다.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빨갱이’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장편소설 ‘적인종’의 집필, 그리고 ‘월간 에세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수필집 출간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코로나19 여파로 역경의 연속인 삶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을 들어봤다.
방송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김홍신 특유의 인자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그의 삶은 그런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저 김홍신 인생이 순조롭다고 여기실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는 않죠. 모든 삶이 순조롭다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음이 있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실수와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신화와 역사가 될 수 없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그는 원래 의대를 가고자 했지만 떨어지면서 재수를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울분과 절망은 스스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결국 재수를 해서 들어간 건국대학교 국문과.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다 하여 타과 학생들이 ‘국물과’라고 부르는 학과였다.
“그때 집안이 망해서 휴학까지 했죠. 그래서 데뷔도 늦었어요. 그나마 당시에 가장 권위 있던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지만 날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종합대학 중 문인 숫자가 가장 적은 학교가 건국대였으니까요. 내 소설이 뛰어났다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죠.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떨어지니 ‘다 지들끼리 해먹는다’ 싶었고…. 물론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야 내가 견디잖아요? 유명한 소설가들을 비판하면 비평력이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죠.”
절망의 청춘을 지나 성숙해지다
그의 날선 비판 대상에는 당대의 대표 소설가였던 최인호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야인으로 살던 시절 끝에, 마침내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 작품의 심사까지 맡게 됐다.
“그때 최인호 형과 같이 심사하게 됐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했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려니까요. 그래서 ‘선배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했죠.”
최인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홍신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다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을 비판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나를 끌어안는 거예요. ‘내 앞에서 최인호를 비판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김홍신이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탄없이 받아들인 최인호나 둘 다 넉넉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서로 돈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의형제를 맺는다.
“그때 인호 형이 한 얘기가 ‘지금 김홍신을 시샘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견뎌야 한다.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바른 걸음으로 걸으며 세상과 너무 타협하지 말라’는 거였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는걸(웃음). 온갖 협박 공갈에 편할 날이 없었어요.”
우리 어딘가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줘야
그의 고난은 작가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 시절로도 이어진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 주변과 싸워야 했다. 15대 국회에서는 ‘이틀만 근무하는 5월에 한 달 치 세비를 받는 건 혈세 남용이라며 세비거부 운동을 벌여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2003년에는 당 지도부에 의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권에서 배척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진심이 닿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 16대 연속 의정 활동 1위 국회의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는 정치에 대해 싸울 때는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할 말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몰아내고 영웅이 될 만한 사람들을 쳐냈어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고 진단했다. 자기가 역사에 남고 존경받으려면 남을 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건 상대를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음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은 일궜는데 기쁨을 잃었어요.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배아픔은 해결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는 시대를 이끄는 현자와 의인들은 시대가 만들어주고 옹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끝까지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 우리 사회 곳곳에 계세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대구의사협회장의 호소문에 응답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었다고 봐요.”
굴곡 많은 시련을 어떻게 견뎌왔나
얘기가 자연스럽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들어가게 될 시점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끝나기는커녕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 거대한 역병의 파도에 쓸려 심신이 고달프고 막막하며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처럼 굴곡진 삶에서 김홍신은 누구보다도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히 지옥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소설 ‘대발해’를 쓸 때였다. 시작은 법륜 스님의 권고였다. “국회의원, 장관 열 번 하는 것보다 발해 역사를 알리는 게 할일 아닙니까”라는 말에 동의하며 시작된 ‘대발해’ 집필은 2004년 말부터 3년간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며 피폐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때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점도 그를 힘들게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아와 눈, 허리에 문제가 생겼죠. 불면증도 생겼어요. 자다가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해놓고 잠을 자야 했으니까요.”
소설은 마침내 2007년 여름에 발표됐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요로결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스카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연이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밖을 안 나가다 보니 햇볕 알레르기가 생겨서, 햇볕에 노출되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더군요. 얼굴은 약을 바르면 됐는데 목은 치료가 안 돼서 스카프를 두르게 된 거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손에 마비가 와요. 원고지 만이천 장을 썼으니까요. 교정만 7개월을 봤고요.”
우리는 역경을 거치면 반드시 더 강해지는 민족
김홍신은 ‘대발해’를 발표한 후 7년 동안 소설을 못 썼다. 소설 집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또 아프다 쓰러지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발해’로 소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소설을 못 쓰겠다’는 두려움이 집필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다 그동안 사회비판소설, 역사소설을 주로 썼으니 사랑 이야기를 쓰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쓴 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죠. 그 이후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적인종’을 집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소설을 쓰다 죽을 뻔한 경험을 치른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108배를 하며 세상, 민족, 평화, 북한 동포,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자신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변할까마는, ‘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같은 희망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품앗이 정신이 대단한 민족이에요. 대구만 봐도 모여드는 의사, 간호사, 봉사자들 보세요.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이 달빛동맹으로 교류하는 걸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려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걸 보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토록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안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 반드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DNA가 있잖아요.”
나를 존중하고 세상을 존중하라
그는 잘 늙으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존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 공기, 풀, 햇빛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과 세상을 위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고 말한다. 이는 김홍신 자신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 못할지언정 그에 대한 미움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내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하면 내가 편안해져요.”
그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과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를 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재작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부고 소식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놓고 그 옆에 그와 자신의 사연을 썼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방향을 향해 108배를 했다. 생전에, 그는 김홍신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김홍신은 그런 그를 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그를 용서한 걸까?’ 그래서 108배를 해보며 계속 되물었다. 답은, 용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마음의 다짐
“지금 제가 찬 시계는 흔들어줘야 가는 오토매틱 시계예요. 이틀 가만 놔두면 죽어요. 이 시계처럼 인생도 자꾸 흔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남한테는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안 하면 안 되겠죠.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흔들어야 해요. 명상과 기도, 고맙다는 감사 등이 그 방법들이에요.”
그는 요즘 모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진달래, 홍매화도 스승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운 사람이 생겼다고 쳐요. ‘에휴…’ 하다가도 ‘내가 미워하면 안 되지. 잊어버리자’ 하며 다잡습니다. 그리고 저녁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반성합니다. 그러면 내가 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제 스승인 거죠.”
물론 무조건 다 그의 말처럼 살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계속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깨달음과 평화가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김홍신이란 이름을 부를 때 기뻤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쁘진 않더라도, 싫지 않고 밉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려고 하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거죠.”
마음 한쪽이 아련히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지금 ‘장총찬’이 절실한 이 시대에 김홍신이라는 문인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무릎을 탁 치며 늙음과 낡음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축복이 스며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0년 3월 8일까지 이색적인 타이틀인 '강박 제곱' 전을 연다. 굳이 제목을 강박 제곱으로 한 것은 강박이 보이지 않는 우리의 내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일상에서 반복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이것은 비단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사회적 구조 문제 속에서도 살피려는 것이다. 현대인의 강박 중 하나는 늘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 욕망 등으로 이어진다.
1. 뉴 미네랄 콜렉티브 팀(에밀리아 스카눌리터와 타냐 부스)의 '공허한 지구(Hollow Earth)'
에밀리아 스카눌리터는 1987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이고 무명 때 인천 레지던시에서 2년간 살았다. 삼겹살도 좋아한다. 타냐 부스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두 작가가 만난 곳은 비옥한 토양과 녹지로 뒤덮인 노르웨이의 트롬쇠이다. 두 작가는 지질학과 환경에 관심이 많아 현대 강대국들의 채굴 산업, 국제 정치,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 등에 대한 느낌을 영상으로 관람객에게 선사한다.
2. 우정수
작가의 강박은 불안과 공포에서 출발한다. 고대나 중세의 공포가 ‘죽음’에서 왔다면 현대의 공포는 ‘가난’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가난’에서 온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가난에 대한 불안, 부에 대한 강박이 있다. 작가는 최근에 ‘뉴트로’도 현대인이 가진 강박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표현했다. 작품은 ‘서사’ ‘젊은 화가들’ ‘물 위의 남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 등이 있다.
3. 오메르 파스트
작가는 다큐멘터리, 극,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주인공은 주로 전쟁이나 테러에 같은 충격적인 사건 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덧붙여지고 윤색되어가는 기억과 과거의 환영이 뒤엉킨 복합적인 이야기가 반복, 변형, 순환된다.
'5,000피트가 최적이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미국 프레데터(predator-마국 군 최첨단 무인정찰기 겸 공격기) 드론 조종사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와 재연의 형식을 번갈아 가면서 드론 조종사의 경험과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나는 범죄 이야기를 엮어간다. 기억은 결코 완전히 복원되지 않고 매번 재구성되며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 차이는 틈을 만든다는 점을 제시한 작품이다.
4. 차재민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지배와 폭력이 도시개발, 노동, 국가 권력과 정책 등으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특히 소외된 사람이나 물건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을 예술로 풀어낸 것이다.
영상 작품 '사운드 가든'
가로수가 된 훈련목이 뿌리째 뽑혀 옮겨지는 모습은 자신의 상처를 말하면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상담의 과정과 닮았다. 둘 다 상처가 있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회복을 꿈꾸고 있다. 이 반복되는 영상 이미지는 상처에서 벗어나 회복을 희망하는 인간의 강박과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상처를 안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보여준다.
5 정연두
'DMZ 극장 시리즈'
작가가 DMZ에 관심을 가진 것을 어느 날 외국에 사는 친구가 남북문제로 나라가 어지러우면 자기 집으로 피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다. 이 작품은 파주의 ‘도라 극장(도라산 전망대)’이다. 도라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 왕 씨와 결혼한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경순왕을 위해 낙랑공주는 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그 산에 도읍을 의미하는 ‘도’자와 신라의 ‘라’자를 합쳐 ‘도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장소는 분단의 현실과 통일이라는 이 시대의 강박을 담고 있다.
6. 김용관
'신파(New Wave) 60분 애니메이션'
과학을 근거로 한 미래의 상상이 SF(사이언스 픽션 science fiction)이고 예술을 근거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아트 픽션(art fiction)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미래에서 현재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이 종횡무진 누비며 경험하는 가운데 작가의 미래 예술에 대한 집요한 상상이 나타나 있다. 또한, 미래 어느 시점에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공간의 이미지들이 데이터화돼 ’새로운 예술’이 불가능해진다. 신파는 매 순간 새로운 예술을 찾는 현대 예술과 현대 예술가들의 강박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작품이다
7 .이재이
'한때 미래였던'
미국 텍사스의 로이스시티와 코르시카나 고속도로변에 버려진 퓨투로 주택 (futuro house 타원형 비행접시 모양의 이동 주택)은 1960년대 후반 완벽한 형태의 미래지향적 주택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기대했던 미래이지만, 그냥 지나가 버린 미래이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우주개발에 대한 기대로 지어진 퓨투로 주택이다. 미래에 대한 강박이 만든 폐허의 현장에 찰나를 상징하는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8. 김인배
'건드리지 않은 면 untouched side'
작가는 잘린 연근으로 통 연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압출법 단열재’인 10cm의 ‘아이소 핑크’를 사용한 것이다. 반복을 나타내고 하나하나 쌓는 단면은 그 앞에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반복에는 굴곡의 차이가 있듯이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쌓다 보면 그 안은 건드릴 수 없는 면이 되는 것이다
9. 에밀리아 스카눌리터
'T1/2'
이 작품은 올해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핀추크아트센터에서 주관하는 ‘퓨처 제너레이션 아트 프라이즈(Future Generation Art Prize) 2019 대상’을 수상했다. 시립미술관에서는 상 타기 전에 섭외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 받은 후 첫 전시다.
이것은 반감기 즉 방사성 물질의 양이 방사성 붕괴 때문에 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뜻하는 기호이다. 이 작품은 5년간에 걸친 작업과 리서치 전문가와의 협업으로 인어의 시선을 통해 지구에 거듭 상처를 내는 인간과 그들의 세계를 초인류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고 있다
10. 리메인더 라운지 (remainder lounge)
전시 참여 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이미지, 영감을 받은 책, 각종 리서치 자료들, 제작하는 동안 파생된 글, 사진, 드로잉 등 작품과 직, 간접으로 관계가 있으면서 작품으로 실현되지 못한 나머지들을 펼쳐 놓았다 김용관 작가의 여러 버전 글, 정연두 작가의 앨범, 이재이 작가의 퓨투로 하우스 도면, 이재이 작가의 영어책 등이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는 어떤 것이 있나 한 번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아! 나는 ‘나의 강박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면서 강박에 빠지고 말았다.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수많은 환자의 고민과 마주해온 하지현(河智賢·52) 건국대학교 교수. 그는 인생의 고민을 ‘중력’에 비유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작용하는 중력처럼, 고민은 삶에 적당한 긴장을 주며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민 없는 삶’을 바라기보다는 ‘잘 고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마치 국·영·수 각 과목의 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닌 ‘공부’를 잘하는 원리를 찾듯, 하 교수는 고민이라는 큰 주제의 해결 방법을 ‘고민이 고민입니다’에 담았다.
나이가 들수록 고민의 무게는 점점 더해진다. 어른으로서 결정하고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데, 가능한 한 좋은 방법을 찾아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다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러한 현상에 하지현 교수는 “결코 답을 못 찾아 고통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상담을 해보면 중장년 세대는 대부분 이미 해결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겪은 직·간접경험을 통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충분히 끄집어낼 수 있는 시기이니까요. 문제는 갖가지 고민을 한데 뒤엉킨 채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하나하나 떼어서 보면 쉬운 고민조차도 모두 어려운 고민으로 여겨버리고 맙니다. 정말 답이 없다기보다는 여러 고민을 펼쳐놓고 해결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거죠.”
그가 언급한 ‘공간’은 뇌와 마음의 여유를 뜻한다. 그럼 이 공간을 늘리면 고민은 잘 해결될까? 아쉽게도 뇌와 마음의 용량은 한계가 있다.
“뇌와 마음의 공간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합니다. 완벽주의자일수록 뭐든 중요하게 여겨 쉽게 못 떨쳐내는 성향이 강합니다. 때문에 중요도를 따지기보다는 고민의 개수를 파악하는 편이 낫습니다. 무얼 버려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인간의 ‘자동 정리 기능’인 ‘잠’을 이용해보세요. 복잡했던 생각과 감정이 한결 정돈되는 효과가 있지요. 잠을 이룰 상황이 아니라면 일명 ‘멍때리기’를 하거나 목적 없는 산책을 다녀오는 것도 뇌와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요령입니다.”
직관이 편견이 될 때
한 교수는 두려움, 불안 등 감정에 휘둘리거나 완벽한 답을 갈구하며 결정을 미루는 행위도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감정은 상황을 채색해버립니다. 마치 까만 선글라스를 끼면 까맣게, 빨간 선글라스를 끼면 빨갛게 세상이 보이듯 말이죠. 그렇게 어떤 일을 판단하는 데 감정이 개입하면 있는 그대로가 아닌 필터링이 된 모습으로 판단해버려요. 물론 인간은 감정이 완전히 ‘제로(0)’일 수 없습니다. 감정은 내 생각과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되, 다만 그것이 내 삶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완벽한 답은 없을 뿐더러,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는 ‘고민을 잘하는 성숙한 어른’이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할 줄 알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자기 성숙을 위해 고민보다는 실행에 비중을 두고, 반성은 하되 후회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반대로 전혀 고민 없이 자기 직관에만 의존해 판단하는 이들의 경우 소위 ‘꼰대’가 되기에 십상이라고 염려했다.
“뇌는 무조건 효율적으로 움직이려 하는데, 이는 에너지를 덜 쓰는, 즉 고민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좋게 말하면 ‘직관적’이라고 하죠. 그러나 ‘직관’은 아주 쉽게 ‘편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대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중장년 부류가 이런 성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직관적으로 결정을 먼저 내리고, 그 뒤에 이유를 찾아 설명하곤 해요. 문제는 성공해온 경험 덕분에 자기 판단을 합리화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는 거죠. 나이 들수록 과거부터 자신이 옳다고 여겨온 것들을 부정하긴 힘듭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 해도 거부하죠. 그건 ‘업데이트하지 않은 내비게이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새 길이 뚫렸는데도 옛길만 고집하는 거니까요. 더 나은 삶과 관계를 위해서는 스스로 편견에 갇힌 건 아닌지, 내가 틀린 것은 아닌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가능성을 찾기 위한 고민 갈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심리학을 통해 위로받는 이가 많아졌다. ‘트라우마’, ‘분노조절장애’ 등의 용어도 대수롭지 않게 쓰인다. 하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우려했다.
“심리학적 지식은 내 마음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하는 인식의 틀을 갖게 해줍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는 거예요. 트라우마처럼 세상만사가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받는 건 아닙니다. 아무런 계기 없이 벌어지는 일도 많거든요. 심리학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상황에도 이런저런 의미부여를 해서 스토리텔링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처지나 기분을 그럴싸한 단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삶을 이론적으로 해석하려 들죠. 한 번쯤은 이러한 과정으로 내 상태를 살펴볼 수는 있겠지만, 매번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지난 불행을 ‘트라우마’로 진단해버린 채 현재의 문제를 모두 그 탓으로 돌린다면 과거에 매여 더 나은 삶으로 전진할 수 없다. 자신의 고민을 분명하게 바라보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터. 그는 ‘불가능한 것’과 ‘어려운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민이 많을수록 쪼개서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나는 왜 1000억이 없을까?’라는 고민은 상식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죠. ‘일본어를 잘하고 싶다’ 이런 건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가능한 목표이고요. 그렇게 애당초 불가능한 고민은 제외하세요. 뒤섞여 있으면 모두 불가능해 보여 포기해버리기 쉽거든요.”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여러 문제를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특히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인지하면서도 ‘이제는 바꿀 수 없다’면서 변화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에게 하 교수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당부했다.
“최근 연구를 보면 노년기에도 뇌세포가 재생하고 변화한다는 결과가 많아요. 물론 젊은 시절보다 활발하지는 않지만 늙었다고 뇌가 퇴화만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중장년 세대의 장점은 지구력이 있다는 거죠. 스피드는 떨어지지만 끈질기게 해내려는 경향이 있어요. 갑자기 운동을 한다거나 행동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생각의 습관을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평균 석 달쯤 걸린다고 해요. 1년에 서너 개의 습관을 바꿀 수 있는 셈이죠. 불가능하다고 낙담하며 한 해를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우리의 노후는 꽤 깁니다. 여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 잘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굴업도는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로 발표했다가 유명해진 섬이다. 필자는 제주도 외에는 배 타고 외지에 나간 일이 없다. 굴업도는 인천에서 배 타고 덕적도까지 1시간, 그리고 다시 작은 배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리포에 갔다가 배 타고 오던 길에 뱃멀미를 심하게 한 트라우마 때문에 배 타는 것은 꺼렸다. 혼자 가려면 배편이며 민박 예약 등 번거로운 절차가 까다로워 엄두도 못 내던 중 단체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인천 역에서 아침 7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나와 가장 일찍 출발하는 5시 40분 발 전철을 탄다 해도 2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10분이 모자랐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면서 그동안 서쪽에 위치해서 서로 자주 못 보던 지인들이나 만나 그 동네에서 자고 아침에 인천 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밤늦게 술을 마실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뱃멀미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침 마곡나루 근처에서 열린음악회 공연이 있다 해서 서쪽 지인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공연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혼자 계양역까지 가고, 인천1전철로 갈아타고 부평역까지, 그리고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 역까지 갔다. 밤 10시였다. 인천 역 앞은 불은 다 꺼지고 깜깜했다. 인천 역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니 당연히 찜질방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있을 때 동네 노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으니 다시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으로 가라고 했다. 거기가 인천역보다 번화하니 찜질방이 있을 거라고 했다. 마침 인천에 산다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몇 정거장 더 거꾸로 와 주안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찜질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초행길에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버스까지 갈아타고 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과연 역사에서 바깥을 보니 찜질방 간판이 보였다. 잠을 잘 수 있는 24시 찜질방이어야 하는데 그건 가봐야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찜질방은 24시 운영 체제였다. 입장료 8000원에 찜질복 1000원인데 경로라고 1000원 할인받았다. 들어가 보니 주인인 듯한 남자와 손님으로 보이는 2명만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몇 가지 물어 오는데도 퉁명스럽게 대해 일단 몸을 씻고 잠자리를 찾았다. 변두리이니 그러려니 하고 몇 시간 동안 눈만 붙이자는 것이었다. 어두운 2층 마루로 된 침실에 들어가 누웠는데 다른 손님 한 명이 부스럭거리며 들어 왔다. 너무 추워서 열린음악회에서 지급해준 담요 한 장에 의지하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6시에 일어나 다시 씻고 둘러보니 커튼 뒤로 가족 찜질방이 따로 있었다. 커튼 사이로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 가지도 않았는데 거기가 이 찜질방의 중심지였다. 밤새 떨었던 몸을 찜질방에 들어가 녹이고 바로 나왔다.
전철을 타기 전에 아침 식사로 요기를 하려던 차에 보니 ‘24시 무인 라면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2000원이면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까지 느긋하게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 도착했다. 필자와 몇 정거장 앞 인근에 사는데도 첫차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첫차 타는 것을 수차례 고민했으나 전철 소요시간이 10분 모자라니 오면서 생 땀 흘리느니 느긋하게 미리 전날 인천에서 자고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배가 8시 30분에 출항이라 조금만 여유를 더 줬어도 필자도 당연히 집에서 자고 첫차로 출발했을 것이다.
인천 역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미리 직접 온 동행인들까지 12명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승차권을 받았다. 덕적도까지 경로 할인받아 1만9550원이었다. '코리아나'라는 배는 제법 큰 편이었고 일등석을 끊었는데 다른 좌석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한 시간을 달려 덕적도까지 갔다. 파도가 잔잔해서 뱃멀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내려 다시 2시간 여유가 있었다. 나래호라는 다른 배를 타고 2시간을 달리는데 중간에 문갑도-지도-율도-백아도에 잠시 들렀다가 목적지인 굴업도에 도착했다. 나래호는 경로 할인받아 6600원인데 작은 배지만 지정 좌석이 없고 바닥에 누워서 갈 수 있었다. 엔진 소리와 진동을 자장가 삼아, 등판 마사지 삼아 잠시 눈을 붙이니 2시간도 금방 지났다.
굴업도에 도착하자 민박 주인이 1.3톤 트럭을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화물칸에 타고 10여 분 달렸다. 방을 배정받고 가져온 점심을 먹고 하기를 달랬다, 바로 트래킹 코스로 나섰다. 덕물산이었다. 굴업도는 굴이 많은 섬이라 그렇게 부른 줄 알았는데 사람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덕물산은 왼쪽 다리이고 연평산이 오른쪽 다리에 해당한다. 섬 중심부가 큰 마을이고 머리 부분이 개머리 언덕이다. 덕물산은 가다 보니 욕심이 나서 정상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대단히 위험한 코스였다, 중간에 나무뿌리를 붙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 코스가 있고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데 고사목이 많아 자칫하면 나무가 부러질 수 있었다, 바닥도 바위가 늙어 부서진 마사토라서 등산화가 아니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꼭 등산화를 신어야 하는 코스이다. 해발 183m지만, 경사도가 높아 가파른 산이고 코스가 대중적이지 않아 보호 시설도 없다. 그렇게 험한 코스인 줄 알았다면 말리고 싶은 코스였다.
하산해서 민박집에 왔는데 서해 최서단이라 일몰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물어보니 빨리 가면 일몰을 볼 수 있다 하여 마을 뒤 SK 타워까지 20분 걸려 올라갔다. 해가 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가 없어진 것이다. 어쨌든 일몰 광경은 봤다. 저녁 식사 후 별이 쏟아진다 하여 밖으로 나갔으나 가로등 불빛이 여기저기 있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안 되었다. 여기저기 사슴이 놀라 서 있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것이 소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한 일행들은 일출 광경을 보러 나갔다. 섬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볼만했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개머리 언덕 쪽으로 향했다. 능선에 올라가니 섬 양쪽이 다 보이는 절경이었다. 가을 바닷바람이 제법 신선하게 불어 왔다. 산의 관목들이 바닷바람을 견디며 이만큼 자라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나무는 줄기가 하나인데 여기 관목들은 여러 줄기가 동시에 같이 자라 나온다. 키도 그리 사람 키 약간 넘을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군집을 이뤄 바람을 막는 모양이다. 개머리 언덕은 몇 해 전 등반객 화재 사고로 풀만 나 있어 걷기에 쉬웠다. 멀리 툭 터진 바다를 보는 멋이 있었다. 야영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있는데도 몇몇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화기를 이용한 취사도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재가 염려되기도 했다.
다시 개머리 언덕을 내려와 토끼섬 앞까지 걸었다. 썰물 때라 긴 백사장에 갯강구가 부지런히 다니고 바위 위에는 굴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연장이 없어 시식은 못 했다. 좀 더 기다리면 토끼섬 가는 길목에 물이 빠져들어 갈 수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바닷물에 침식된 절벽인 해식와는 감상할 수 있었다.
코끼리 바위는 연평산 쪽이라 포기하려 했는데 민박집 주인이 입구까지 태워다 준 덕분에 가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바다에 면해 있어 일부러 찾아가기 전에는 보기 어려운 해안 쪽이었는데 다행히 썰물 때라 볼 수 있었다.
2시 10분 나래호 배를 타고 굴업도를 떠났다. 덕적도에 들어 바로 코리아나 호로 옮겨 타고 2시간을 달려오니 인천항에 5시 반 이었다. 근처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 하여 가서 자장면을 먹었는데 조미료 범벅이라 입안이 말라 혼났다. 인천 역에서 동인천역까지 와서 급행으로 노량진역까지, 그리고 다시 9호선 종합 운동장 역까지 오고 집 앞에서 내리는 버스를 타고 내리니 9시였다. 막걸리 한 병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고 2박 3일의 여정을 마쳤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등 극찬의 글은 많이 올라와 있으나 필자에게는 섬은 그냥 섬이었다. 오래된 화산섬으로 마치 공사장 돌 쓰레기가 한데 엉겨 붙은 것처럼 보이는 단층이나 가지각색의 단층이 특이하기는 했다. 우럭 낚시가 너무 쉽게 잘 된다는 낚시꾼 얘기도 듣기는 했다. 민박집 반찬이 서울의 어느 음식점보다 맛있었다는 것만 기억된다.
흔히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어떤 운명적인 순간들과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당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선택들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작가 이언 매큐언은 자신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영화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나무와 꽃과 새 이름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자연을 사랑하는 역사학도 에드워드(빌리 하울)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클래식을 전공한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 플로렌스(시얼샤 로넌)는 운명적인 만남의 결실로 결혼에 골인하여 지금 이곳 체실 비치에 있는 작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다. 영화는 체실 비치의 아름다운 풍광과 끊임없이 흐르는 배경음악을 통해 이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신혼 첫날 호텔 방에 들어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랑해!”를 연발하지만, 내심 초조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이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한 1962년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아직 서툴고 어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고 감정적인 에드워드는 무작정 서둘렀고 성에 엄격한 영국 사회의 문화에 익숙하며 어린 시절 성적 트라우마를 겪은 플로렌스에게 첫 경험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둘의 합방은 실패로 끝나고 거친 언사를 주고받은 끝에 플로렌스는 방을 뛰쳐나간다. 바로 이 순간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플로렌스는 밖으로 나가 체실 비치의 긴 조약돌 백사장을 걸어 낡은 나룻배에 앉아 있고 뒤를 따라 나간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모진 욕설을 퍼붓고 그녀는 마음의 결심을 그에게 토로한다. 가장 행복했던 날 그들은 헤어진 것이다.
물론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사이사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과거를 교차 편집한다. 그곳에서 그들의 만남과 연애 과정이 드러난다. 런던 변두리 지방대이긴 하지만, 역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다. 집을 뛰쳐나간 그가 어느 대학 반핵 행사장에서 플로렌스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아버지가 변두리 시골 초등학교 교장이고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지만, 뇌 손상을 당한 사건으로 정상이 아닌 에드워드 가정에 비해 전기회사를 경영하는 중상층 가정으로 돈을 중시하는 플로렌스의 환경은 애초 어울리기 힘든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부모를 존중하고 에드워드는 플로렌스 부모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지만, 참아내면서 사랑을 키운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키워왔던 사랑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배경에는 이런 환경과 계층 간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욱하는 성격으로 싸움을 즐기던 에드워드의 거친 감성이 플로렌스의 차분하고 예술적인 감성을 포용해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의 헤어짐이 찰나의 행동에서 유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감정의 누적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가지런하게 뻗어 있는 조약돌 해변도 자세히 보면 작은 돌 해변과 큰 돌 해변으로 구분되어 서로 섞이지 못한다.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도 플로렌스의 클래식과 에드워드가 좋아하는 로큰롤로 양분된다. 결국 이언 매큐언은 모든 운명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해석을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 동료 첼리스트와 결혼한 플로렌스가 45년간의 연주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연주회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아낸 에드워드가 일찍이 그녀와 약속했던 C 5번 좌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엇갈린 삶의 회한이 응축되어 있다.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단골로 가는 치킨 전문점이 있다. 전통시장인 대전 중앙시장 안에 있는 집이다.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에 고작 7000원이다. 가격이 이처럼 착해서인지 언제 가도 손님들로 북새통이다.
그제도 이 집에 들러 전기구이 통닭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었다. 셈을 치르려 보니 메뉴판 위에 ‘외상사절’이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맞아! 외상을 주기 시작하면 버릇이 되고 결국엔 단골손님마저 아예 단절되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전 시장 어귀에서 순대 전문 식당을 했다. 먹는장사이다 보니 가끔 외상을 청하는 손님도 있었다. 박절하게 거절하기 뭣해 외상을 줬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이듯 외상 손님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우리 가게를 찾지 않았다.
식당이 생각만큼 안 됐기에 일찍 처분을 했다. 그러곤 슈퍼마켓을 차렸다.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고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닫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단골손님이 느는 만큼 외상 손님도 시나브로 증가했다.
‘다시는 외상을 주지 말아야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갖다 주겠다며 소주와 담배를 사간 이웃은 한 달이 돼도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자정이 넘도록 가게 밖 파라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문을 닫아야 하니 계산을 하고 드시든가 하시죠” 해도 셈은 나중에 치르겠다며 맥주를 한 병 더 주고 문을 닫든가 말든가 하라며 적반하장이었다.
이미 만취한 사람과 드잡이를 할까 싶어 함구하며 문을 닫았지만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선친께선 생전에 술을 물처럼 드셨다. 아내 없는 홀아비라는 자괴의 신세타령에 덧붙여 경제적 고립무원이었던 당신을 자학하며 침면(沈湎, 술에 절어서 헤어나지 못함)으로 사셨다.
가장이 돈은 안 벌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면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술은 담배처럼 중독성이 심각하다. 그래서 이미 취했음에도 더 취해 아예 인사불성이 되길 원하는 게 알코올 중독(자)의 특성이다.
뿐만 아니라 상습적 외상까지 필자에게 강권하셨다. 외상으로 술과 담배 따위를 가져만 갔지 도무지 갚지 않았던(사실은 갚을 능력이 못 되었던) 우리 부자(父子)에게 동네에 하나뿐이던 구멍가게 주인은 점점 냉담해졌다.
“밀린 외상값을 다 갚기 전에는 우리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나는 뭐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니?” 당시엔 자정부터 통행금지였다. 필자는 자정이 임박해 시키는 술심부름, 그것도 외상으로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술 채근(採根)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의 집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새우잠을 청하는 등의 풍찬노숙을 점철했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로 필자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외상’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을 뜻한다. 외상이 잦으면 단골손님마저 잃게 되는 외상(外傷)을 반드시 입는다. 이게 바로 필자가 경험한 외상의 경제학(經濟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