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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여행
- 크루즈 여행의 현지투어로 로마를 갔다. 로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많이 알려진 곳이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로마의 휴일」의 배경이기도 하다. 2000년 가까이 보존되어 있는 콜로세움이 눈에 들어 왔다. 이곳은 독립하기 위해 로마 지배에 반역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끌려 온 포로들에 의해 8년에 걸쳐 세워졌다고 한다. 포로들의 피와 땀의 결실물이다. 시민의 불평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용된 원형경기장이다.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을 신앙 때문에 맹수의 밥으로 희생되었고 검투사는 시민의 오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맹수와 대결하였다. 관람하고 싶었으나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입장을 포기했다. 대신 로마가 세워진 언덕과 시가지를 관람했다. 시가지에는 로마의 옛 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파리의 개선문이 로마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이고, 시저는 러시아 쟈르, 나폴레옹, 히틀러가 닮고 싶어한 우상이었다. 그는 모든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전쟁의 신이라고 한다. 로마는 도로, 법률, 건축에서 실용적인 모범을 보였다. 길에 남겨진 단단한 돌에서도 실용성을 엿볼 수 있었다. 로마는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존된 유적과 유물과 거리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니. 옛 건물과 유적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에 시민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독재자 무솔리니조차도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는 시민의 힘이 전통 보존의 토대가 되었다고 여겨졌다. 오래 된 건물에 진열되어 있는 유명 회사의 명품은 왠지 가치가 더 있게 느껴진다. 문화의 가치에 명품의 가치가 혼합되어 상승효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영화 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데이트 하던 계단이 보인다. 이곳에서 유명 패션쇼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관광객이 오드리 헵번을 흉내내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너무 많이 걸어다녀 흘린 크림으로 인해 파손되어 현재는 보수 중이었다. 조금 더 가면 분수 중 최고의 걸작이자 가장 인기 있는 분수인 트레비 분수가 나온다. 세 갈래 길(Trevia)이 합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동전을 던졌다. 분수를 뒤로 한 채 오른손에 동전을 들고 왼쪽 어깨 너머로 1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고, 2번 던지면 연인과의 소원을 이루고, 3번을 던지면 힘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영화 에서 오드리 헵번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이곳을 한층 낭만적인 장소로 기억하게 한다. 로마는 문화유적으로 인해 천문학적 관광수입을 얻는 반면 상당 부분을 문화재 보존에 재투자한다. 서구화, 근대화를 위해 문화재와 유물을 포기한 나라들과 대비가 되었다. 전통과 문화는 뿌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창조가 가능하다. 행복은 물질이 아닌 문화적인 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인 풍요는 어느 정도 이상 되면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있다. 문화의 시대에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힘이다.
- 2016-08-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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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타-자신만의 코디법] 외국처럼 우리 시니어도 화끈한 코디를
- 어렸을 적 한땀 한땀 바느질해 곱디고운 옷을 지어 인형에게 입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이옷 만들어 입힐 때는 예쁜 무늬를 그려 넣고 색칠해가며 한껏 재주를 피워댔다, 특히 헝겊으로 인형 옷을 지을 때는 어머니가 모아 놓은 일본 잡지들을 꺼내 신식 스타일의 원피스를 만드느라 고심했었다. 길에 다니다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잡지 쪼가리가 패션에 관한 거라면 무조건 집으로 가져와 깨끗하게 걸레로 닦아서 모았다. 그 지저분한 것들을 결혼해서도 이사할 적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고이 모셔 뒀는데 잡지 모델같이 변신하는 건 단지 꿈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60세 되었을 때 죄다 태워버렸다. 이 잡지 태우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모른다. 마음 비우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다. 결혼하고서도 눈은 묘한 것들을 찾으려 반짝였다. 외국에라도 나가면 발발거리며 여자들의 차림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1970년대에 영국에 갔다가 알아낸 것은 호호 할머니가 돼도 매니큐어 짙게 칠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다이애나비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에 예쁜 꽃 모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시니어가 됐을 때 차림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 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긴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런 시니어의 모습을 교훈 삼아 발목 걸이까지 자신 있게 걸고 다녔다. 요즘 가끔 젊은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발목걸이를 무척 오래전부터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할랑대는 원피스를 입은 시니어들에게 꽂혔다. 이어 1996년엔 스페인에서 한 달 보름을 지냈는데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모피를 걸친 채 앞을 트고 다니는 멋쟁이 시니어들에 반했다. 그리고 획기적인 쫄바지에 푹 빠져 귀여운 판다 곰 무늬가 들어간 쫄과 검은색 쫄을 두 개나 사게 되었고 지금까지 즐겨 입는다. 한국에는 언젠가 대유행했지만 그 당시엔 쫄 바지가 없었다. 필자가 쫄바지의 원조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1년간 일할 기회가 있었던 어느 아줌마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일본 여성은 늙어도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 보는 내 눈이 황홀해질 정도다”라고 했다. 필자는 동의의 의미로 깔깔 웃었다. 그가 일본 시니어 여성이 예쁘다고 한 것은 진짜 겉모습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들의 패션이 그들을 눈부시게 만든 것이다. 필자도 이 아줌마처럼 일본에서 시니어 여성들의 패션에 눈이 갔다. 시니어가 되면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순진하고 귀여워진다니까 차림새도 밝고 깔끔하게 챙겨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아주 눈에 나지 않는 한 인형처럼 곱상하게 차려입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한국 아줌마의 전형처럼 돼버린 뽀글파마는 거부하는 대신 긴 생머리를 한다. 너무나도 파마를 안 해서 길이 안 든 탓에 이젠 파마도 안 나온다. 다만 긴 생머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흩어져 산발이 돼 버리니 모자도 꼭 가지고 다니며 쓴다. 프랑스 파리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바게트 한 봉지를 끼고도 끼리낌 없게 걷는 자신만만함을 시니어들도 배워야 한다.
- 2016-08-0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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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론강의 별밤’ 추억을 함께…아를에서 ‘손주사랑’ 꽃피우다
- 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7-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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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란사
- ‘독립운동가’하면 총칼로 맞서 싸우거나 옥고를 치른 인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고종의 통역관이자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으나 그의 후손조차 활약을 뒤늦게 알 만큼 잊혀왔다. 성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말기에 여성해방을 논하고 실천한 여인 김란사는 누구일까? 1872년(고종9년) 평양 출생으로 남편의 성 ‘하’를 따르고 난사(Nancy)는 이화학당 입학 후 지은 영어 이름이다. 하란사는 외교관 남편을 통해 일찍부터 신문물을 접했고, 기혼자는 안 된다던 이화학당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그녀는 당시 당장인 프라이 여사에게 가지고 온 등불을 끄고는 자신의 삶이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교육받기를 간청했다.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결국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육아, 가사, 학업을 병행하며 열정을 불태운 하란사는 1년 뒤, 일본 대학에서 1년 그 후 자비로 미국으로 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문학사를 받는다. 한국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그녀의 집념과 과단성 있는 행동력과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란사 등 외국의 신문물을 깨쳐 돌아온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귀국한 하란사는 이화학당 등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학생들을 계몽하였다. 또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모아 자모회를 구성, 육아법, 가정 의학 등을 가르쳤고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에게 감화 받은 학생 중에는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하란사는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비밀 연락도 담당했는데, 특히 고종의 밀사로 활약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참석해 조선 독립을 호소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이 폭로되고 하란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45세. 그녀의 시체를 확인한 남편 하상기는 독살 당해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가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독살설이 전해질 뿐이다. 그녀가 뜻을 펼치기에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그녀의 놀라운 활약상도 많은 여성 선각자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수려한 언변, 지성미와 뛰어난 패션 감각,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신여성 하란사. 학생들에게 그녀가 늘 했던 말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건네진다. “꺼진 등불을 켜라.”
- 2016-06-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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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장지에서 생긴 에피소드
- 30대 초반 중공업 부문 회사의 플랜트 화공설비 부문 해외영업 팀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대 초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과 제철은 겨우 기초를 마련하였고 자동차도 현대 포니를 시작으로 국산 소형차가 출고되어 인기리에 주문받던 시기였다. 회사에서는 새로이 중화학 분야의 플랜트를 일괄수주 방식이나 주요설비의 부문별 주문방식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에게는 플랜트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거의 없어 국제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회사 경영진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유명 엔지니어링 회사와 접촉하여, 우선 우리 회사의 생산제조 기술과 경쟁력, 그리고 상세 설계 능력 등을 홍보하여 그들 하청 형태로 납품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기본 설계와 엔지니어링에 경험이 많은 그들의 협조 하에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국제 입찰에 참여하여 그들의 기술도 습득하고 동시에 공사에도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하였다. 필자와 화공설비설계부장, 그리고 뉴욕주립대학교 공대 학장을 역임한 미국인 고문(어드바이저)으로 기본추진킴이 구성되었고 필요에 따라 현지 지사장과 본사 임원진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우선 일본지역으로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등 10여 개의 유명 엔지니어링 업체와 약 보름 정도의 일정으로사전에 회의 일정을 마련하여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상대 회사의 참석자가 상당한 나이와 직급의 고위급 인사들이었으나 무척 긍정적이어서 우리의 거의 다 받아들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특히 회의 후에는 출입문까지 배웅하며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에게 끝까지 몇 번이고 응대 인사를 하여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2차 미팅은 미국과 캐나다 지역으로 면적도 넓고 회사도 많아 약 한 달 반 정도의 일정을 갖고 회사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회의 일정은 현지 지사의 도움으로 주로 필자가 결정하였는데 두 번 세 번 방문하기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아 한 번으로 정했는데 일정이 빠듯하니 중반 이후부터는 상당한 피곤함을 느꼈다. 출장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멸치, 김, 고추장과 라면 등을 준비해 갔는데 호텔 방을 함께 사용했던 설계부장과 커피용 더운물을 요청하여 가끔 몰래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지냈다. 가져갔던 음식물도 떨어지고 넉넉하게 준비했던 양말과 내의도 부족하여 저녁 늦게 돌아와서 빨아서 말려 입기도 하였다. 주로 주 중에 회사들과 회의하고 주말에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도록 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쇼핑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겨우 휴일에 시간이 있어서 내의를 사러 미국 디트로이트인지 피츠버그인지에 있는 현지 백화점에 가서 내의를 몇 장인가 사고 50달러 짜리 현금을 냈더니 점원이 위조지폐인지 확인을 하러 계산대로 가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별로 큰 액수도 아닌데 그곳에서는 주로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금 50달러는 큰돈이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카드를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해외 출장을 갈 때는 매번 미화 100달러 짜리 여행자 수표나 현금, 그리고 방문국가의 현지 화폐를 준비해 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휴스턴과 뉴욕에서는 현지 주재원의 안내로 라이브 쇼를 구경했는데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성행위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무척 놀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밖에 댈러스 등 텍사스 지역은 같은 영어지만 끊지를 않고 계속이어서 응얼응얼 발음하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대도시에는 대부분 한국음식점이 있어서 가끔 한식을 즐길 수 있었으며 한국과 비교하여 값도 비싸지 않으면서 맛도 좋은 집이 많았다. 특히 미국 동부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의 회사들과 회의 후 식사 때에 바다가재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초대받은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렇게 크고 맛있는 바다가재 요리는 그후 별로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방문했던 회사들과의 회의 시 상담했던 사항들에 대한 후속 조치들을 약 한 달 여에 걸쳐 처리한 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지역 엔지니어링 업체 방문 계획을 세웠다. 유럽 지역 업체는 스냄프로게티 등 이탈리아 회사부터 상담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직항노선이 없어 홍콩, 싱가포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로마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기본 팀원인 3명이 함께했는데 당시 로마에는 우리 회사의 지사가 없어 공항에서 우리가 방문할 회사의 주소를 공항 안내카운터의 직원에게 알려주고 방문할 회사 근처의 호텔로 어떻게 가면 좋을지 조언을 부탁했다. 그 직원이 운전기사를 한 명 소개하면서 도움을 받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운전기사는 친절하고 싹싹하며 영어는 잘 못 하지만 무척 명랑하고 낙천적이였다. 운전하면서도 연신 휘파람으로 노래하곤 했다. 그는 약 1시간 반 정도 달려서 원형경기장 옆의 호텔로 친절하게 인도해 주었으며 내일 아침 다시 그가 와서 우리를 회사로 안내하기로 약속하였다. 택시 요금이 상당히 많이 나왔으나 주행거리가 많아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다. 호텔이 약 150년 전에 지어져서 거의 문화 유적지 같은 그런 형태였으며 엘리베이터는 없고 도르래 같은 리프트의 쇠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겨서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형태였다. 방을 배정받은 후에 제일 먼저 약속한 엔니지니어링 회사에 전화하여 다음 날 회담 시간 등을 다시 확인하였다. 우리 호텔 이름과 주소를 물어서 알려주니 자기 회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단다. 약간 황당하였으나 다음 날 아침에 운전기사와 약속한 사항이 있어서 그대로 이용한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조금 후에 욕실에서 샤워하려고 하니 온수가 나오지 않아 호텔카운터로 전화를 하니 샤워를 한다면 자기들에게 미리 전화하면 온수를 가져다준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많은 나라 많은 호텔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행인 점은 호텔 식당에 직접 갓 구운 빵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 식사 시 맛 좋은 빵과 신선한 치즈와 우유, 채소 등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웃기는 일은 다음 날 운전기사가 우리를 회사로 데려다 주는 데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우리가 공항에서 회사 주소를 주면서 그 주소 근방의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따지자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척하면서 능청을 떨어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 회사가 자기들이 자주 거래하는 택시를 불러주어서 타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요금이 타고 갈 때와 비교하여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웃고 친절하게 하면서 여러 가지로 바가지를 씌운 것 이였다. 로마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주말에 거리를 산책하는 데 젊은 아가씨들이 일광욕을 위해서인지 상체를 완전히 벗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 안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먼저 파리에서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본사의 설계담당 상무가 한 분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분이 도착하자마자 사고가 발생했다. 호텔 안내대에서 입실 등록을 하는 매우 짧은 순간 서류가방을 훔쳐가 버려서 여권과 돈 등을 모두 잃어버렸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파리였다. 후에 대사관에서 서류 재발급 받고 주변에서 돈 빌리고 해서 겨우 출장을 마칠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기는 일은 우리 일행이 네 사람인데 한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전기사 옆에는 보통 커다란 개를 태우고 다니며 뒷좌석에만 손님을 태우는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의 미국인 일행이 영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자기는 영어 잘못 한다고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대꾸하며 상대를 잘 안 해주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 백화점 등에서 쇼핑할 때는 어떻게든지 영어를 잘하는 젊은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다. 이때 내가 아내를 위해서 멋진 가죽 치마와 점퍼를 사다 주었는데 옷은 사다 줄 때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나중에는 포기하고 돈을 갖다 주니 좋아해서 그때부터 아내가 돈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필자가 독일어 전공이라는 점이 빛을 발했다. 밤에 호프집 등 음식점 갈 때 꼭 필자와 동행을 하려고 해서 약간 우쭐댈 수가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많았는데 보행자가 있으면 차들이 반드시 정차해서 보행자가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운행하여 당시 우리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엔지니어링 회사 방문 상담 이후 점차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어 약 10여 년 후부터는 조선이나 단순 구조물 생산보다 일괄도급 형태의 공사 수주가 더 많아졌다. 물론 최근에는 경쟁적으로 저가 공사 수주를 많이 하여 대부분의 중공업 업체들이 부실 위험에 처해 있어 무척 안타깝게 생각된다.
- 2016-06-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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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중세 모습 그대로, 루마니아 브란성
- 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고 여행객들로 북적댄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는 고성을 만난다. 계단 초입에 감시탑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관람하게 되어 있다. 뾰족한 성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멋진 성이다. 건물은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실내는 좁은 계단을 따라 층별로 전시관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쇠창살, 철도끼 등 중세시대 고문기구 등도 있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그렇다면 이 성은 실제로 드라큘라와 연관이 있을까? 브란성은 독일 기사단의 요새(1212년)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그 무렵 드라큘라가 이 성에 잠시 머문 것(1450년대)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이 성은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드 여왕에게 헌정(1920년)되었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성 소유권을 박탈(1948년) 당했다. 그 이후 브란성은 방치돼 파손됐다. 루마니아 정부가 1956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 개보수를 거침에 따라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 후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후손들은 흡혈귀 성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흡혈귀가 된 속사정 그렇다면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이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영웅이었던 드라큘라가 왜 흡혈귀가 되었을까? 드라큘라가 흡혈귀가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소설 때문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괴기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우리는 역사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큘라의 일대기를 들여다보자. 드라큘라(1431~1476)의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2세다. 아버지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기에 사용된 문장(紋章)이 ‘드라큘’이다. 루마니아어인 드라쿨(Drakulić)은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 크네아지아다.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시기쇼아라(Sighişo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곳에는 생가가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는 그 당시 루마니아인이 아닌 게르만족 후손인 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상권을 장악했다. 루마니아 현지민들은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당시 드라큘라의 아버지는 이들과 무역 협정을 맺고 도시 내부에 살 수 있었다. 형제는 형(미르체아), 본인(블라드), 남동생(라두) 3남이었다. 드라큘라는 어릴적(11살 경) 오스만 제국에 동생(4살)과 함께 볼모로 보내졌다. 드라큘라는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른 종족에 의해 암살(1447년, 드라큘라 16살 경)되었고 형은 뜨거운 인두에 눈을 잃고 생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드라큘라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가 된다.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왈라키아 타르고비스테(Targoviste)를 수도로 삼는다.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여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고 영주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툭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을 죽여 버리는 하극상은 끊이질 않았다. 드라큘라는 왕궁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나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정적인 보야르(boyar, 당시 최상층의 귀족) 계급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활절 날(1457년), 그들을 왕궁으로 초대, “지난 50년간 몇 명의 군주를 모셨냐‘고 질문했지만 너무 많이 갈아치워 그들의 답변을 못하자 전부 다 죽였다. 대략 500명 정도가 말뚝에 박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방법이 하도 잔혹해 체페시(Ţepeş,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다. 브란성 근처 산정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할 때 보야르 계급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을 인부로 이용했다. 이 포에나리 요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어 드라큘라는 색슨족에게 전면전을 통보한다. 이 길을 상업로로 이용하려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한다. 하지만 색슨족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블라드의 정적들을 지원했다. 드라큘라는 군대를 이끌고 색슨족의 거점도시였던 브라쇼브(Brasov)로 진격했다.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포로들을 다 꼬챙이에 꽂아 죽였고 그대로 방치했다. 드라큘라가 그곳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숫자였다. 드라큘라의 피의 장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시탐탐 서방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결심한다. 오스만제국의 사절단이 왔을 때, 터번을 벗지 않자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터번 쓴 머리에 못을 박아 죽였다. 1461년, 오스만과 왈라카이는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이듬해(1462년)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들 전부 코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3배 이상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드라큘라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는 몰리기 시작한다. 포에나리 성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부인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수많은 수하 장군들을 잃었다. 드라큘라는 편자(말발굽형의 쇠붙이)를 역 방향으로 이용해 겨우 탈출한다. 하지만 오스만 군과 맞서 싸우다 술탄의 친위부대 예니체리들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목이 잘렸다. 향년 45세. 서기 1476년의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요한 여행지들 유럽 발칸 반도에서도 동유럽 쪽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선 여행지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반대하는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는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라 칭하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진 국회의사당(1984년) 등 공산당 정권이 만든 유명 건축물들. 그것 말고도 도심 속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은 여행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킨다. 또 ‘시나이아(Sinaia)’, 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를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Carpathian)의 진주’라 불린다. 왕가의 여름 별궁인 펠레쉬(Peles, 루마니아 국보 1호), 펠리쇼르 성이 인기다. 또 시기쇼아라에는 드라큘라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 등, 올드 타운은 마치 중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좀더 사실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직항은 아직 없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경유해 가는 방법이 있다. 그 외에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를 거쳐 부쿠레슈티로 갈 수 있다. 도하까지 약 10시간, 부쿠레슈티까지 약 5시간 걸린다. 현지교통 수도 부큐레슈티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 외 시외 이동은 열차, 버스 등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브란성을 가려면 부큐레슈티에서 열차를 이용해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브라쇼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2, 16번 버스를 타고 Stadionul Tineretului에서 하차 후 브란성 가는 버스(4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에서 버스나 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음식정보 음식이 제법 맛이 좋다.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 있다. 그 외 옥수수를 재료로 이용한 음식,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 등이 있다. 루마니아 전통 도넛인 파파나스(Papanas)도 있다. 특히 부큐레슈티에서는 전통 깊은 건축물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구시가지 왕궁 옆에 있는 마눅 여인숙(hanul lui manuc, 1808년)은 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또 1879년에 오픈한 카루 쿠 베레(Caru cu Bere)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이다. 원래는 왕족의 만찬장소였던 이곳은 차우셰스쿠의 큰아들이 자주 파티를 열던 곳이란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다. 루마니아 문화 루마니아 민속 예술, 전통음악과 춤, 목공예, 도자기 공예, 건축, 뜨개질, 자수, 보석가공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스포츠 중에서는 체조를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가해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아직도 유명하다. 루마니아가 체조에 강한 이유는 신 식초 성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그들의 식생활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미인들이 아주 많다. 화폐정보 레이(LEI)를 쓴다. 1유로가 4.4레이 정도다. 환전할 필요 없이 ATM기를 이용하면 된다. 주류 정보 포도주(VIN), 추이카(TUICA)라는 특유의 과실 증류주가 유명한데 자두가 좋다. 포도주는 아주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이미 서구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다. 루마니아 포도주 박람회(VIN-EXPO)가 열린다. 그 외 보드카, 위스키, 럼, 다양한 맥주 등이 생산되고 있다. 포도주는 겨울철에는 데워 먹는 특징이 있다. ‘뜨거운 포도주(Vin fiert)’는 겨울 추위나 감기 등을 이기기 위한 민간요법이다. 숙박 정보 가격이 비싸지 않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유명한 숙박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포인트 수도는 걸어서 다니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 간 이동은 시설이 열악한 편이다. 서두르지 말고, 관광도시마다 1~2일 정도 지내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이 키 포인트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원하는 음식과 술은 멋진 레스토랑을 골라 먹도록 하자. 싼값에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방법이다. 관광지는 생각보다 눈요기를 할 곳들이 아주 많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6-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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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 여행] 와인의 ‘주민증’ 레이블
- 와인의 레이블은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이다. 와인의 출생을 비롯한 정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마음대로 위조하거나 변경할 수 없듯이, 레이블에 기입하는 사항들은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민등록증의 경우 한 번 기입된 내용에 대해서는 임의로 고치거나 가감을 할 수 없지만, 와인 레이블의 경우는 시음 조건이나 음식 매칭에 관한 내용과 같은 법적 규제를 받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생산자나 네고시앙들이 임의로 첨가할 수 있다. 레이블은 1760년경 보르도에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는 병목에다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이전 시대에는 레이블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병도 없어, 오크통째로 판매를 하든지, 아니면 소비자가 2~3ℓ짜리 작은 나무통을 들고 와 양조장이나 매장에서 와인을 받아갔다. 우리 어린 시절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던 것과 흡사하다. 레이블은 1818년 보르도에서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며, 지금처럼 병에다 직접 붙이는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레이블에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법적 의무규정이 실시된 것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서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이 기입해야 하는 의무규정에 포함되는가? 여기서는 와인 레이블의 원조국이자 그 밖의 모든 와인 생산 국가에서 기본 모델로 받아들인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을 살펴본다. 레이블에 의무적으로 기입해야 하는 항목은 총 8가지다, 그중 하나(납세필증)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등급에서 사라질 우등 한정 와인(AOVDQS)에만 적용되니, 7개 조항이라 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 하겠다. ▶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 ① 병입한 사람이나 양조장 이름과 주소 ② 알코올 도수(%) ③ 양(ml) ④ 와인의 법적등급(AOC, 뱅 드 페이, 테이블 와인) ⑤ 생산국가 ⑥ 생산 일련번호(No du Lot) ⑦ 보건과 위생관련 사항(아황산함유 여부나 임신부에 대한 경고 등) 모두가 와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들이다. 특히 ①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법적 책임의 소재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밖에도 레이블에는 법적 의무규정이 아닌 다른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흔한 것으로 생산년도(빈티지: 포도수확 년도 기준), 샤토, 도멘느, 크뤼, 세빠주 등의 명칭과 메달 수상 내용 등이다. 모두가 와인의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사용한 세빠주의 경우는 향, 맛, 산도, 타닌 등 그 와인의 특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빈티지는 그 해 생산한 와인의 일부 특성과 보관기간 등에 대한 암묵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샤토, 도멘느, 크뤼 등도 와인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보르도보다는 메독이, 메독보다는 뽀이약이, 그리고 뽀이약보다는 샤토 라투르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와인의 특성과 등급을 일러준다. 그러나 레이블에는 소비자를 현혹하는 내용도 많으니 읽을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메달의 경우가 그러하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수상하는 메달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와인 경연대회에 출품한 30% 이상의 와인에 메달을 수여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파리 와인 경연대회, 마콩 와인 경연대회, 세계 리슬링 경연대회 정도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참고로 와인 경연대회는 그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또한 ‘상급의’(supérieur), ‘예약된’(réservé) 등에다 ‘특별한’(spécial)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도 하는데, 대부분 상업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으니 무시해도 된다.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다 좋지 않은 문구를 붙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지 병입에 대한 정보는 주조에서 숙성은 물론 병입까지 동일한 와이너리에서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의 질, 특히 원생산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 밖에도 와인의 특성, 즉 향과 맛 등에 대한 내용을 하나같이 미사여구로 설명해 놓은 두 번째 레이블을 병 뒷면에 붙이는 것도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데, 마시기에 적정한 온도나 매칭이 잘되는 음식 그리고 마시기에 적절한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소설이나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와인에서 레이블은 얼굴이다. 화장을 잔뜩 하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도 있고, 수수한 맨얼굴을 지닌 것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와인의 레이블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와인이 등장하면서 레이블의 내용은 물론 디자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원산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주로 수수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는 떼루아 와인에 비해, 브랜드 와인은 와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으로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So Fruity’, ‘부드러우며 꽃 향이 나는’ 등의 문구를 레이블에 눈에 띄게 크게 넣어 소비자로 하여금 와인의 맛이나 향에 대한 선택을 쉽게 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는 팩이나 알루미늄 캔에 담아 판매하는 와인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와인은 팩이나 캔 위에 우유나 맥주처럼 화려한 레이블을 직접 인쇄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르고뉴의 다이내믹한 네고시앙인 장-클로드 부와세(Jean-Claude Boisset)는 ‘French Rabbit’이란 상표 와인을 다분히 희화적인 디자인을 한 팩에다 담아 판매해서 성공한 경우다. 여성들의 와인 구매가 급증하면서, 당연히 여성들 취향에 맞춘 병이나 레이블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무통-로칠드의 레이블은 그것 자체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생길 만큼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해마다 세계적인 유명 화가의 그림을 레이블에 붙이는 호사를 누리기 때문이다. 레이블은 와인의 얼굴이고 ID다. 그래서 와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소비자의 변화하는 취향에 맞춰 새로운 와인이 탄생하는 것처럼, 새로운 레이블도 탄생한다. 조금 깊이 음미하면서 레이블을 쳐다보면, ‘와인이 가득찬 병 위에서는 비자처럼 희망적이고, 텅 빈 병 위에서는 유공자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처럼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와인의 레이블은 마시기 전에, 즉 ‘구두시험을 통과하기 전에 치러야 하는 필기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 장홍와인누리 대표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 2016-06-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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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머코드] ‘재치 코드’의 힘
- 이 시대에는 ‘재치 코드’가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건 비즈니스에서건, 공익 캠페인에서건, 댓글 하나에서건, 방송에서건, 재치 코드가 있어야 호감과 각광을 받는다. 비즈니스 마케팅에서나 방송에서나 공익 캠페인에서나 재치 코드의 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재치와 위트가 있다는 것, 이건 모든 능력에 플러스 알파로 작용한다. 기본 능력 플러스 재치 코드가 있으면 더 빛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재치 코드가 ‘억지로 유머를 외워서 말해주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억지로 웃는 유머도 아니다. 억지스러운 유머는 오히려 비호감이다. 재치 감각과 재치는 이제 경쟁력이다. 재치는 지금의 시대 코드가 되었다. 재치는 메시지의 마지막 2%를 채우는 힘이다. 핵심 메시지를 정통으로 날려주는 마지막 2%의 힘이다. 재치로 마지막 2%를 채운다면, 메시지의 설득력에 날개를 달게 된다. 다른 사람의 웃음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협력과 지지도 쉽게 끌어낸다. SNS에서 재치와 촌철살인은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다. 지루한 설교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유머 감각을 갖춘 촌철살인이 없이 주목받을 수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도 재치를 섞은 메시지로 전달하면 부드럽고 친밀감 있게 전달된다. 그리고 재치가 섞인 메시지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밋밋한 메시지를 생생하게 만드는 것이 재치다. 주제와 관련된 촌철살인의 재치를 던질 때,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속이 시원해진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구사하는 재치는 전체 메시지를 기억에 오래 남게 만든다. 예전에 무상급식 서울시 주민투표 찬반 투표율이 25.7%여서 오세훈 시장이 사퇴했다. 이때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이를 두고 ‘사실상 승리’라고 언급하자 이후 ‘사실상 ~’ 패러디가 인터넷에서 봇물 터지듯 나왔다. “25.7% 세일이면 사실상 공짜” “에베레스트 25% 올라가면 사실상 정복” “25.7% 투표율이 사실상 승리라면 파리도 사실상 새라고 봐야 한다”. “앞으로 선거 2등도 ‘사실상 당선’으로, 고득점 대학 불합격자도 ‘사실상 합격’으로, 최종면접에 떨어지면 ‘사실상 취업’이라 부르며 살자” “등록금도 25%만 내면 사실상 완납한 걸로 합시다”등이었다. 사회 이슈에 대한 이런 촌철살인의 비유는 매일 수없이 나온다. ‘재치’의 반대 개념은 뭘까? ‘뻔함’, ‘구태의연함’이 되겠다. 으례하는 말씀, 흔히 듣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구태의연한 메시지다. 길고 지루하게, 요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써놓은 글이나 말을 접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당사자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유머의 힘은 크다. 연설을 하거나 강연,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일단 청중을 웃도록 만들면 반은 성공이다. 웃음으로 하나가 된 후에 사람들은 경계심이나 반감을 누그러뜨린다. 같이 ‘하하하’ 웃고 나면 친밀감은 급속도로 증가한다. 미국의 CEO나 정치인들의 강연이나 연설을 들어보면 늘 유머가 등장한다. 유머가 없는 연설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유머를 구사할 줄 모르는 CEO나 정치인들은 좋은 평을 듣지 못 한다. 연설에서 유머가 빠지면 김빠진 맥주같이 생각한다. ‘무슨 무슨 시리즈’를 읊으라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가벼운 조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들은 한 CEO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연설은 여성의 미니 스커트와 같아야 합니다. 적당히 길어서 중요한 주제를 커버해야 하고, 적당히 짧아서 주목을 끌어야지요. (Speeches are like women's mini skirts. It should be long enough to cover the important subject, but short enough to keep it interesting)” 이 말을 들은 청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그 CEO에 대한 호감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들어도 별로 성차별적인 언사라기보다는 ‘연설’에 대한 가벼운 조크로 받아들여지는 유머였다. 그는 적절하게 짧은 연설로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연설이 성공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정치가의 말. 한창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는 이슈에 대해서 기자가 의견을 물었다.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어떻게든 대답은 해야 하는데, 입장을 밝히기가 곤란했던 이 정치인은 유머를 던졌다. “제 친구들 중 일부는 찬성합니다. 제 친구들 일부는 반대합니다. 저는 제 친구들 편입니다. (Some of my friends are for it. Some of my friends are against it. I'm for my friends.)” 난감한 순간을 유머로 슬쩍 피해 가는 것도 능력이다. 정치인의 권모술수라고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귀여운 유머 아닌가. 메시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힘있는 메시지’이고 다른 하나는 ‘힘없는 메시지’이다. 힘있는 메시지를 듣고 나면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힘없는 메시지는 듣고 나도 무엇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들으나 마나 한 메시지다. 공허하고 추상적인 거대한 단어의 나열은 대부분 힘없는 메시지가 된다. 힘있는 메시지는 단숨에 와 닿는 메시지다. 구구절절 오랫동안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 문장으로 핵심이 전달된다. 이런 것이 파워 메시지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한 줄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짧은 메시지이지만 그 속에 긴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길고 복잡한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해서 가슴에 쏙 와 닿게 전달하는 것이 파워 메시지의 힘이다. 촌철살인의 재치는 그래서 필요하다. 상품 마케팅이나 정치 캠페인은 다 불특정다수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핵심 메시지가 짧고 명확해야 한다. 상품이나 캠페인이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재치 코드를 키우기 위해서 가장 쉽고 좋은 방법, 그것도 아주 쉽고 돈 안 드는 방법은 신문 기사의 제목을 유심히 보는 것이다. 매일 읽는 신문 기사로 훈련이 가능하다. 촌철살인의 재치 코드를 감으로 익히고 싶다면 신문 기사를 읽은 다음에 기사의 제목을 꼭 다시 한 번 보라. 가장 쉽게 재치 코드를 익히는 방법이다. >> 강미은 교수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미시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박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저널리즘 석사.
- 2016-06-0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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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오스트리아 빈
-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5-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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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아프리카 쇼나 조각을 한국서도 즐길 수 있다
- 총선투표로 공휴일이었던 날(4월 13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차츰 개이면서 화창한 날씨가 봄바람을 부채질했다. 필자는 일찍 투표를 마치고 파주 헤이리마을로 봄나들이 갔다가 쇼나 조각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합정역 1번 출구로 나와 2200번 광역버스를 타고 헤이리 1번 출구 앞에서 내린 뒤 맨처음 둘러본 곳이 '레오파드락갤러리의 쇼나 조각 갤러리 & 숍'. 건물 바깥에 전시된 조각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갤러리 여사장님의 손짓에 따라 들어갔다가 아프리카대륙의 강한 생명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쇼나(Shona) 조각’을 만난 것이다. 쇼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부족의 명칭인데,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독특한 석조 문명을 이룩한 조각의 나라로 알려졌다. 쇼나 조각가들은 스케치나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로지 정과 망치, 끌, 불, 사포 등 전통적인 도구만으로 자연석에 깃들어 있는 형태를 쪼아내고 연마해 조각한다. 특히 이 조각은 작업할 때 들리는 돌의 내면의 소리 때문에 '혼의 예술'이라 부른다. 쇼나 조각은 짐바브웨에서 싹텄지만 현재는 대표적인 제3세계 미술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 조각은 신비감과 생동감을 자아내며 자연스러운 질감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머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록펠러, 로스차일드가, 찰스 왕세자 등은 쇼나 조각의 대표적인 애호가이며, 피카소도 쇼나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파리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대표적인 미술관들이 쇼나 조각을 전시를 하고 있으며, 비평가들로부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쇼나 스톤즈(SHONA STONES)’은 짐바브웨에서 나는 사문암 종류이며, 2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색상이 있다. 무늬가 표범과 닮았다는 레오파르드락, 아프리카의 녹색 금으로 알려진 버다이트, 보랏빛 운모 라피도라이트,지구 최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버터제이드, 귀한 코발트스톤과 오팔스톤 등이 있다. 돌 속에 녹색, 갈색, 보라색, 하얀색, 에메랄드색 등 저렇게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돌을 깎아서 이토록 아름답고 능숙하게 조각을 하는 솜씨도 놀라웠다. 이런 희귀한 돌을 채굴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울까? 여러 가지 빛깔의 쇼나스톤을 붙인 ‘파라오 조각’도 유명하다. 너무도 실감 나게 만들어진 호박조각, 앙증맞은 부엉이들이 대표적이다. 여사장님은 궁금해하는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한 연유로 우리 발음이 좀 특이했던 사장님이 아름다운 보라빛의 라피도라이트 하마를 선물로 줬다. 앙증맞은 게 장식하거나, 독서하며 책장을 넘기다 고정할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라피도라이트는 리튬이 함유되어 있어서 진정효과가 나며,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것을 산 사람이 구입하던 날로 바로 큰 계약도 체결했다며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길 거라 했다. 헤이리예술인마을 초입에서 쇼나 조각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그날의 나들이는 대박이었다. 헤이리에 가시는 분들은 꼭 한 번 들러서 작품감상 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지인들에게 쇼나 조각을 선물한다면 받는 분들에 매우 특별한 선물이 되리라 생각하며 갤러리를 나왔다. 헤이리예술인마을은 1998년 파주의 15만 평 부지에 꾸며진 복합문화예술 마을로, 다양한 창작 공간을 비롯해 전시, 공연, 축제, 교육, 교류 등 새로운 것을 계속 개발 중이다. 점포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서 볼거리가 많은 게 강점. 각종 매체를 통해서 알려져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찾는 참 좋은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 2016-05-16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