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관광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발트 3국의 중간에 위치한 라트비아로 들어갔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나름대로 국경을 넘을 때 입국 수속이나 검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싱겁게도 버스가 그냥 지나쳤다. 검문소가 있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국경선 개념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첫 방문지는 바우스카의 룬달레 궁전이었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만들었다는데 규모만 작을 뿐 정말 비슷했다. 아름다운 궁전도 그랬고 뒷마당의 정원도 그랬다. 댄스를 알고 나서 보니 과연 궁전 내부가 그 옛날 귀족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없다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이 오렌지 나무를 심어 놓은 정원에 숨어 볼일을 봤겠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유르밀라 해변이었다. 발트해가 바로 보이는 휴양지라서 근사한 집들이 많았다. 다만, 큰 기대를 했던 발트해는 모래는 아주 작은 입자라서 좋은데 굴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해변을 걷다가 곧바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아직 낮 기온이 22도 정도라서 수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다음에 가본 곳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피터 대성당, 상인들이 700년간 사용했다는 검은 머리 전당,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정복자 스웨덴의 문, 돔 성당, 구 시청사 등을 돌아 봤다. ‘한자동맹’이라 하여 학창시절에 얼핏 들었으나 ‘한자’의 뜻이 ‘상인의 친구’라는 뜻이란다. 상공업이 발달한 무역도시라서 무역상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리가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 한쪽의 구 시가지, 반대편의 신 시가지를 감상하는 코스도 있었다. 우리 일행 30명만 타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라트비아의 스위스라는 시굴다, 라트비아의 허파라는 체시스를 둘러 봤다.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독일기사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독일과 발트 3국 사이에 폴란드가 위치해 있는데도 독일은 틈만 잇으면 폴란드를 침공했으니 발트 3국도 독일의 영향력이 컸다는 얘기이다.
발트 3국의 특산품으로 호박이 있다. 소나무의 송진이 열과 압력을 받아 굳어져 만들어진 천연 보석이란다. 자연산이라 조금씩 색이 달랐다. 싼 것은 10유로 목걸이부터 크기와 모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옛날 소나무가 많던 육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가라앉은 소나무들이 호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발트 3국의 호박은 바닷물에 뜨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열이 나도록 문지르면 한약재 냄새가 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이날 밤은 변두리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방이 넓고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세미나 실이 있었다. 낮의 룬델라 궁전을 떠올리며 귀족들 춤을 춰보자며 모였다. 30명 중 남성들은 피곤하다며 빠졌고 여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비엔나 왈츠를 가르쳤다. 전진하며 회전하면서 발 모으고 후진하며 역시 회전하면서 발을 모으면 되는 간단한 춤이다. 전진 스텝은 잘 했다. 그러나 후진 스텝이 조금 어려웠는지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 것만 빼고는 모두 무난히 소화했다.
2017년 5년30일부터 8월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올해 열리는 전시 중 손꼽히는 주요 전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하는 필자의 전시 도슨트를 원고로 옮겨,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글 옥선희 동년기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의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끼르티에 현대미술 재단의 공동 기획전입니다. 즉 까르티에 재단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까르티에 측 제안을 받고 2015년부터 전 과정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참여하여 기획된 전시입니다.
카르티에 현대 미술재단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은 까르티에라는 명품 기업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100% 독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미술을 지원하는 첫 기업 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설립자이자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알랭 도미니크 패랭이 프랑스 문화부 의뢰로 만든 기업의 미술 후원 보고서 초안 ‘레오타르법’이 현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예술 후원법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업 메세나의 혁신적 모델인 재단은 1984년 베르사이유 궁 근처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10년 간 운영했다. 젊은 작가 발굴 - 지속적 지원 - 세계적 작가로 키우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페이 다웨이, 후 한루 같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배출/ 학제적(學際的) 접근, 즉 다양한 분야 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꾀했는데요. 전시 디자인을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이 그것입니다. 이번 서울전은 이세영 -논 스탠다드 스튜디오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재단이 출범한 1984년은 백남준 작가가 3부작 위성 시리즈 첫 작품 을 선보인 기념비적 해입니다. 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생방송 중계되어, 비서구권 미술, 타자가 서구에서 가시화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비 유럽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전시를 갖지 못했던 젊은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온 재단 출범 년도가 1984년이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 사태 발생 등으로 젊은 작가의 분출은 가속됩니다.
재단 건물 1994년 몽빠르나스14구 라스파일 대로에 재단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설계한 재단 건물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절제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나무가 무성한 중정을 품은 강화 유리와 메탈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로, 1층은 정원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천정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모듈 형식이라, 프로젝션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서는 공간을 어둡게 조정할 수도 있고, 대작 전시도 가능합니다. 유리로 된 구역을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트이게 만들면, 건물이 정원 쪽으로 열린 경사로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로 변형됩니다. 건물의 유리 표면을 통해 전시 중인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구름이나 도시 공간을 반사시켜 시간대에 따라 건물이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밤까지› 전시의 경우 건물 전체가 검게 덮였고, ‹자연으로 존재하기› 전시 기간에는 완벽하게 투명함을 유지했으며, 이세이 미야케는 건물을 거대한 디스플레이 윈도우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인공과 자연과 변환 가능한 건축미를 높이 사 1995년,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이어 독일 중견 빔 벤더스가 완성한 옴니버스영화 에서 장 르노의 저택으로 등장했습니다.
1994년 부임한 에르메 샹데스 Herve Chandes 관장이 현재까지 관장 직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긴 재임이 말해주듯 큐레이팅도 직접 하는 문화 권력이자,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나 주제를 선택해 작가에게 시각화해달라고해서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탄생시키고 전시 기획, 최종 소장 결정까지 하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시각화해달라고 주문하는 커미션(commission) 방식은 까르티에현대미술재단의 특징입니다. 작품 의뢰에서 완성품까지 3년 정도 기간을 주고 5억원정도를 지원하는 등, 기간과 제작비 구애를 받지 않도록 자유를 주며,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가족 개념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즉 경매를 통한 구입이 아닌, 직접 작가 발굴과 작품 의뢰를 통해 수집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1년에 다섯 번 정도 큰 전시가 있는데요. 개인전과 기획전을 번갈아 여는 데 디자인, 사진, 회화, 비디오아트, 조각, 설치 , 미디어아트, 패션, 퍼포먼스 등 현대 예술의 창조적 분야와 장르를 아우릅니다.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학, 경제, 생태, 이주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시 청각화하므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음악가, 도시학자, 생태음향가, 디자이너,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인류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유지합니다. 1층에서 보게 될 작품 처럼, 도시학자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건축가 그룹이 시각화하는 식입니다.
30년 간 200회 전시를 열어 전 세계 350여명 작가의 1,5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작품 소장 기준은 엄격함과 탁월함의 결합/ 풍부한 독창성과 위험 감수 성향 고려/ 평범하고 예견가능하며 상식적인 가치 대신 전 방위적 개방성을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현대 예술 작품으로 전시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질문 던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디렉터 그라치아 콰로니 Grazia Quaroni의 전언입니다.
서울 전시작은 사라 지, 론 뮤익, 뫼비우스 등 재단을 대표하는 작품은 물론 국가, 인종, 젠더를 초월하는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을 다룬 100점을 골랐습니다. 한국을 위한 특화된 선택 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장 미셀 알베롤라와 마크 쿠르티에 등이 내한하여 직접 벽면 작업을 했습니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게 되었고, 내년 초 상하이, 홍콩을 거쳐 도쿄 올림픽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동네에 먹자골목이 있다. 길 좌우로 200m 정도 각종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잘되는 집은 손님들이 줄을 서지만, 안 되는 집은 파리만 날리다가 몇 달 못 가 없어지고 다시 다른 업종이 들어오는 일이 반복된다. 한 달에도 몇몇 점포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음식점이 문을 연다. 개업 화환들이 화려하게 입구를 장식한 개업 음식점들을 보면 희망이 가득해 보이지만, 상례로 보아 몇 달 못 가 또 문 닫을 거라는 예상이 되면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새로 문을 연 호프집 옆에 얼마 안 가 새 호프집이 생긴다거나, 치킨집이 있는데 또 치킨집이 생기면 둘 중 한 집은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지금의 자영업 시장은 인테리어 업자만 돈을 버는 구조다.
강남의 잘 꾸며놓은 고깃집에 갔었다. 손님보다 종업원 수가 더 많아 보였다. 2층이 경관이 좋아 2층으로 가려고 했더니 2층은 서빙이 안 된다며 그냥 1층에 앉으라고 했다. 넓은 1층에도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몇 테이블 안 되었다. 월세는 꼬박 내야 하는데 이렇게 장사가 안 되니 주인은 속이 바짝바짝 탈 것이다.
손님이 많기로 소문난 강남 대형 쇼핑몰은 젊은이들이나 몰려가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요리하는 음식점들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주 가는 쇼핑몰인데도 이런 음식점들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 장사가 잘될 리 없다. 시설은 깨끗하게 잘해놓았으나 한창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도 손님이 얼마 안 되었다.
잠실의 한 삼계탕 집은 한때 손님이 벅적였는데 최근 문을 닫았다. 삼계탕 한 그릇에 1만5000원을 받아 돈을 좀 버는가 했더니 적자라며 문을 닫은 것이다. 겉으로는 손님이 많아 남는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큰 시설을 유지하자니 관리비에 인건비에 카드 수수료까지 떼이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계탕 집을 정리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김밥 등을 파는 분식집을 차렸는데 현금 장사에 손님이 많아 오히려 낫더란다. 음식 값이 싸서 손님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들은 권리금을 내고 점포를 확보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봐야 성공 확률은 10% 정도다. 20~30%는 문도 못 닫고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적자란다. 외식 산업 성공률은 매우 낮다. 잘되는 업소라 해도 끝까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줄을 서다가도 손님들의 취향이 바뀌어 어느 순간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여기에 건물주가 집세를 올리거나 자기가 운영한다며 내보내는 일도 발생한다.
건물주들은 가만히 있어도 해마다 건물 값이 오른다. 현재 금리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집세도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장사가 잘되면 집세를 올리는 건물주도 많다. 자영업자들은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를 쉬지 않고 일한다. 그래야 겨우 살아남기 때문이다. 반면 건물주들은 골프나 치러 다니면서 앉아서 거저 돈을 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세상살이가 쉽다. 하루 종일 일해도 남는 게 없는 자영업자들에 비하면 뭔가 불공평해 보이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이런 정도의 현상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러나 모순은 모순이다. 공평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새 정부가 이런 문제들을 직시하고 합리적인 조정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여의도에서 마라톤 대회가 끝나고 체력을 보충하겠다며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강 건너 유명한 고기집을 필자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 동네가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어디로 옮겼는지 몰라 일단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도 모른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과연 그 집의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장사가 잘돼 번듯한 건물을 짓고 간판도 크게 달아놓았다.
그런데 좀 일찍 가기는 했지만,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데이트 족 한 팀이 더 왔을 뿐 손님이 안 오는 것이었다. 다른 한 팀은 종업원과 언쟁이 벌어졌다. “서비스업을 하는 음식점의 종업원이 손님을 이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주문하면서 몇 마디 건넸을 때 담당 종업원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마치 ‘잡소리하지 말고 고기나 먹고 빨리 가라’는 투였다. 음식 값이 비쌌지만 맛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든 것이다. 문전성시를 이뤘던 이 음식점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마 옛날 맛을 잃고 가격도 많이 올랐으며 이런 불친절한 종업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은 주인이나 종업원의 태도에 따라 손님들이 금방 알아챈다. 불친절한 음식점은 당연히 손님들이 기피한다. 동네에도 비슷한 업종의 두 집이 바로 붙어서 영업을 한다. 한집은 손님이 넘치는데 그 옆집은 파리만 날린다.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을 경우 옆집이라도 가자고 했더니 일행 중 여러 명이 그 집은 가지 말라며 말렸다. 우리가 가던 음식점에 손님이 넘쳐 밖에 상차림을 했는데 그 음식점 주인이 투덜대더라는 것이다. 만약 웃는 인상으로 대했다면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그 음식점도 이용했을 것이다.
음식점 주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싼 메뉴를 주문했을 때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생선회집에 갔는데 비싼 생선회는 주문 안하고 간단한 멍게 해삼을 주문하면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들어갔을 때는 반색을 하더니 싼 메뉴를 시키자 돌변하며 주방에 대고 실망스러운 표시를 한다. 그러면 그 음식점은 안 가게 된다.
욕쟁이 할머니 음식점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겉으로 말은 거칠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기에 감수하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가격에 비해 푸짐하고 맛도 좋았기에 거친 말을 들어도 웃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더 이상 그런 음식점에는 가지 않는다. 요즘이라면 갔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것이다.
손님 중에는 갑질하는 진상들도 있다. 종업원들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상식적으로는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면 안 된다. 옛 성현의 일화중에 그 집에 갔을 때 하인이 문을 열어주기에 존댓말을 했더니 그 집 주인이 하인인데 굳이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당신에게는 하인이지만, 내게는 내 하인이 아니고 초면이니 존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음식점이나 카페 주인, 종업원들이 아들이나 딸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초면인데도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들딸 뻘이니 말을 낮춰서 되지?”하면 싫더라도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싫은지 좋은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식을 자주 하게 되면서 음식점이나 손님이나 서로 접할 기회가 늘어난다. 서로 기분 좋게 대하면 서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쪽이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다른 한 쪽은 상처를 입는다. 외식문화의 수준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는데서 올라간다.
그해 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10시, 목동 파리공원에서 우리들은 작은 모임을 가졌다. 연령도 20대에서 60대요, 직업도 틀리지만 쇠귀 신영복(牛耳 申榮福, 1941~2016) 선생의 책과 신문 칼럼 이야기를 듣고,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기탄없는 자유토론의 시간이 즐거웠다.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토론이 격해지면 인근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신 선생은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경제학을 강의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고, 1988년 8월 15일 만기 출소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더니 11월 말엽,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 건물 지하 ‘세실레스토랑’에서 40여 점의 서예 작품으로 첫 서예전을 열었다. 옥중에서 20년을 정진한 그 서예 작품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과 큰 감동이 가시지 않았다. 연말에는 이라는 옥중 서신들을 책으로 출간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 1889년 1월에는 결혼을 해 서울 목동에서 가정을 이루고, 성공회대학교에서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가히 생활인으로서 새 출발을 했다. 1993년에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엽서들을 모아 를 출간했고, 1995년 11월부터는 중앙일보에 를 기고했다.
1995년 3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인사동 학고재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학고재 사장의 소개로 처음 선생을 상면하고, 50여 점의 서예에 대한 소회를 직접 들었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선생을 돕고자 하는 여러 지성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마음에 정해둔 작품이 금방 팔려 기회를 잃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다가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은근히 휘호를 받고자 하는 속내도 있었다.
그의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은 누구의 청(請)도 거절 못했다. 필흥(筆興)이 솟아 경오(庚午, 1990)년 황화(黃華, 가을)에 써두었던, 편의 한 구절인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에서 취한 ‘夜深星輝’와 임신(壬申, 1992)년 성하(盛夏, 한여름)에 시필(試筆)한 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있는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에서 뽑은 ‘觀海難水’의 예서체(隸書體) 두 작품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다. 소위 ‘신영복체’, ‘어깨동무체’라는 한글 휘호도 받고 싶었으나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해 섣달그믐께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그토록 소망하던 ‘어깨동무체’의 를 말아서 들고 계셨다. 펼치니 먹 향이 그윽하고 관지(款識)의 인주 빛이 선명했다. 이후 선생은 대학 강의와 신문 기고가 늘어나며 일정이 바빠져, 주 1회 모임에서나 잠깐씩 상면했다. 나도 바쁜 일이 생기면 서너 주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내를 비롯해 친구들이 선생의 전력(前歷)을 들어 모임 참여를 말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의미의 ‘야심성유휘’는 선생이 아주 즐겨 썼는데, 남다른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어온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맹자(孟子, BC 372~BC 289 추정)가 공자(孔子, BC 551~BC 479)를 언급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의 ‘관어해자난위수’는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깊은 함의(含意)가 있는 들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선생만의 독특한 서체다. 두 줄의 굵고 납작한 글자들은 서로 부딪치고 얼싸안으며 힘찬 기운을 발한다. 옥중에서 받았던 노모의 한글 글씨체에서 골격을 찾아 변용했다고 말하지만, 한글 서체의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대 교수인 김태호(1967~)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Carara) 국립미술학교로 유학 떠나기 전에 부인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1996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식사를 대접하려고 불고기집으로 안내했으나 한사코 냉면만 먹겠다고 하여 조촐한 송별이 되고 말았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의 깊은 속내가 대견했다. 부인이 종교음악을 전공했기에 바흐의 음반을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김태호의 조각작품과의 인연은 1993년으로 되돌아간다. 인사동 어느 화랑에 놓여 있던,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을 눈 깊게 만났다. 까까머리의 동자가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작품이었는데, 기교 없는 순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화랑의 큐레이터도 ‘동자상’에 반해 매일 한두 번씩 쓰다듬는다며 화랑의 ‘지킴이’라 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막 군대를 다녀온 풋풋한 조각가의 작품이었기에, 몇 주 동안 드나들며 “누구에게 팔지 말라”고 이르고 관찰만 했다. 화랑 주인은 ‘중진 조각가의 작품과 견줄 만한 수작(秀作)이라서 값싸게 팔 수 없고, 상당한 가격에 구입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화랑에서 소장한다’며 애를 태웠다. 아내와 상의해 통장을 비워, 기어이 혼자 들기 버거운 을 택시에 싣고 와 온 식구가 쓰다듬으며 한 가족으로 삼았다. 조각작품 수집의 시작이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다. 지치고 고달픈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예술혼은 얼음처럼 차가운 대리석을 헤집고 인애(仁愛)의 형상을 쪼아낸다. 샐러리맨의 고독과 실직자의 아픔도 용해해 젊은이들에게 힘찬 형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은 2010년 벽두에 서울 서촌의 ‘갤러리 자인제노’ 전시회에서 만난 작품이다. 좌대까지 하나의 대리석으로 깎아낸 수작이다. 어린 남매를 배 위에 얹고 있는 따뜻한 모정이, 작품의 안정감과 리듬감을 균형 있게 전달한다. 세파(世波)에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가족사랑’이 위대한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한낱 돌덩이에 맥이 돌고,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된다. 누구나 성(城)에 안주하려 들지만, 그 성을 쌓아가는 고뇌의 노정(路程)을 잊지 말진저.
>>이재준(李載俊)
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어느 날, 배우자가 나의 괴팍한 면까지 닮아버린 걸 보고 심장이 덜컥할 때가 있다. 하물며 옷 입는 스타일까지 비슷해지는 건 부부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여기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 커플들이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벌의 패션으로 부부애를 과시하는 커플룩의 선구자들.
글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사진 instagram.com/bonpon511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에서 중년 부부로 분한 고두심과 장용의 대화가 떠오른다. 사기를 당할 뻔한 이 시대의 대표 중년남 장용이(극에서의 이름도 ‘신중년’이다) 고두심에게 용서를 구하자, 고두심이 눈물을 흘리며 친 대사다. “욕해달라고? 뭐라고 욕해줄까? 부모님은 당신을 낳았지만, 40년 넘게 살아온 건 나야. 내 거울이 당신이야. 당신 거울이 나고. 끼리끼리 산다는 게 맞아. 나 당신한테 돌 못 던져”라며 그를 용서했다. ‘당신은 나의 거울’. 이 말처럼 입맛이 같아지고, 취향이 비슷해지고, 심지어 외모나 패션까지 자연스레 닮아가는 것이 부부의 숙명이다. 애정이 깊은 부부는 자연스레 서로를 공유한다. 20대의 불타오르는 커플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광고하고 증명하기 위해 커플룩을 입는다면, 중년은 다르다.
한창 젊은 시절에는 똑같은 옷을 입는 게 ‘커플룩’의 정석이라 여겼지만, 나이가 지긋해지면 같은 ‘옷’이 아니라 같은 ‘느낌’으로 입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좋은 예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화제가 된 60대 일본인 부부다. ‘bonpon511’이라는 아이디로 활동 중인 이 부부는 1980년에 결혼해 올해로 37년째 부부로 살고 있다. 백발의 부부는 작년 12월부터 100여 벌의 커플룩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는데 그 인기가 어마어마하다. 팔로워 수만 이미 43만여 명! 웬만한 연예인도 울고 갈 숫자다. 그들이 업로드한 사진에는 보통 4만 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린다. “저흰 완벽한 커플룩보다는 색상과 무늬, 패턴 면에서 통일성이 있는 패션을 즐겨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부부는 커플룩의 노하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유니클로나 GU 같은 SPA 브랜드에서 주로 쇼핑을 하며 쇼핑 취향이 비슷해 자연스레 커플룩을 입게 되었다는 부부. 부인이 굵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으면, 남편은 그보다 얇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부인이 빨간 원피스를 입으면 남편은 빨간 니트로 분위기를 맞춰준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으로 부부애를 과시하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패션의 힘 아니겠는가.
커플룩의 또 다른 사례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를 들 수 있다. 앞서 만난 일본인 부부와는 또 다른 리듬감으로 커플룩을 완성한다. 70세를 넘긴 이 노년의 커플은 연출이 1%도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커플룩을 선보인다. 부인의 머리를 남편 백건우가 직접 잘라줄 정도로 애정이 깊은 부부는 공식석상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비슷한 분위기의 옷을 입는다. 한때 화려한 여배우의 길을 걸었던 윤정희는 남편 백건우를 만나 소박하게 변했다. 머리 손질은 남편이 해주고, 어떤 자리에 가든 메이크업 역시 자신이 직접 한다. 미니스커트와 베레모를 즐기던 패셔니스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백건우, 윤정희 부부로서는 완벽한 패션을 보여준다. 백건우가 하얀 터틀넥에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서면(이 또한 얼마나 백건우스러운가), 윤정희는 검정색 롱 드레스에 그레이 스카프를 하고 옆을 지킨다. 어깨선을 한참 벗어난 오버사이즈의 코트를 입고 파리 거리를 걷는 부부의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지다. 앞에서 고두심이 말한 ‘당신은 나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이 사진의 캡션으로 딱 어울린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커플룩의 또 다른 사례는, 영화 의 주인공들. 76년째 함께한 부부는 주로 고운 한복을 같은 컬러로 맞춰 입는다. 꽃분홍에서 쪽빛 한복까지, 그들은 눈부신 컬러들로 부부임을 강조한다. 둘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몸이 된 부부의 모습이 옷에서도 읽힌다.
젊은 커플들에게는 커플룩은 어떻게 연출해야 멋지며, 어떤 아이템이 제일 낫다는 식의 스타일링 팁이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 서로를 비춰온 시니어 부부들에게는 그런 팁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커플룩을 만들지 모른다. 이미 많은 것들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는 부부들은 옷장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나의 남편과 함께, 나의 부인과 함께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고 옷을 고르는 시간마저 함께한다면 커플룩은 자연스레 완성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매력적인 팁은 없다.
아름다운 동반자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조안 우드워드, 폴 뉴먼
제작연도; 1990년
상영시간; 126분
명망 있는 변호사 월터 브리지(폴 뉴먼)는 한여름에도 조끼와 넥타이를 갖춘 정장 차림을 고집하고, 행진곡풍 음악만 들으며, 극장에 가면 잠을 자고, 태풍이 시속 75마일로 불어와 모두 지하실로 대피하는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풀코스 정식을 마치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젊은 여성과 재혼한, 자유분방한 정신과 의사 친구 알렉스 사우어(사이먼 캘로우)는 성적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브리지에게 “정열이라는 단어를 알아?”라고 다그친다. 20년을 근속한 노처녀 여비서는 무심하다고 원망한다.
브리지의 아내 인디아(조안 우드워드)는 남편 의견이 곧 내 의견이라 여기며 남편 그늘 아래서 곱게 살아왔다. 주변 친구들의 진보적 의견과 자식들의 자기주장에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해보지만, 브리지는 “나한테 얘기하면 되오”라며 일축한다.
장녀 루스(카이라 세드윅)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배우가 되겠다며 뉴욕으로 떠난다. 차녀 캐롤린(마가렛 웰시)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배관공 아들과 결혼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툭하면 친정을 찾는다. 아들 더글라스(로버트 숀 레오나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끔찍하게 싫어하며 남몰래 누드집을 본다.
전 세계 중·상류층 가정에서 누구나 겪을 것 같은 이야기 는 에반 S. 코넬l의 소설 (1959)와 (1969)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브리지 부인과 브리지의 입장에서 본 가정생활을 그린, 100여 편의 삽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두 소설을 통합하여 1930년대 말 미국 캔자스 시의 상류 가정사를 안정적으로, 재치 있게 시나리오화한 이는 ‘인도의 찰스 디킨스’로 불리는 루스 프라워 자브발라다. 에피소드 중심의 산만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시키지 않고, 유머 감각과 인물 성격을 잘 살려낸 점이 돋보인다.
는 브리지 부인의 세상 인식, 남편과 자식을 대하는 생각의 변화와 자각을 조심스럽게 그린 온건한 영화다. 일상과 감정 묘사가 섬세해서 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브리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 탓에,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심장에 이상을 느낀 그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아내를 은행 금고로 데려가 보험증과 증권 서류를 설명해준다. 물질적 기반보다는 남편과의 정신적 교류를 원했던 인디아는, 결혼 전 시를 읊어주었던 남편을 상기시키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은행 금고까지 데려오지 않았소”라고 말하는 브리지. “그럼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라고 아내가 말하자 그는 “나는 변호사지 시인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은 싫어요”라고 말하며 이혼하겠다고 앙탈을 부리던 인디아는 남편의 뜨거운 키스에 그만 모처럼의 용기를 잃는다.
자식들은 엄격한 아버지보다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가 의존적인 삶을 살아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든 참견하고 돌봐주려 하자 불편해한다.
남편과 다투고 친정으로 쫓겨온 둘째 딸에게 “여자가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아는 “어머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어요”라며 쏘아붙이는 딸의 말에 상처 입고는 기껏 “핫초콜릿 타줄게”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보이스카우트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 키스를 해드려라”는 단장의 말에 머뭇거리고, 아들로부터 키스를 받지 못한 인디아에게 브리지가 대신 키스를 해준다.
인디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끝내 자살을 택한 친구 그레이스 바론(블리드 대너)이다. 은행가 남편의 앞날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레이스에게 인디아는 “나도 인생이 무언지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잘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그걸 생각해봐”라고 말한다. 그레이스의 죽음에 오열하는 인디아를 브리지는 이렇게 달래준다. “그녀 남편은 무엇이든 해주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소. 그녀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생각이나 했는가?” 자아가 뚜렷한 아내를 둔 보통 남편 바론의 심경을 대변해준 셈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사랑, 존경, 인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브리지. 뭔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는 남편 그늘과 자식들에게로 향한 맹목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디아.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토록 갈망했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알고 결국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자식들.
브리지 가족의 옛날 흑백 기록 필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족사와 이후 이야기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끝나는 는, 이상적인 혈연 공동체를 희구한다. 이상의 구심점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라는 것. 거친 세상을 휘젓고 다녔어도 마음 내키면 언제나 돌아와 쉴 수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품. 그래서 그 아내와 어머니는 세상의 세파를 맞받지 않고 순결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속삭인다. 여권 운운하는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차는 영화이겠지만, 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장수 프로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비난할 거리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같은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눈이 몹시 내리던 날, 인디아는 외출을 위해 차고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차고 문이 자동차 문을 꽉 막아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배기가스가 가득 차 호흡이 곤란해지자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가냘프다. 차창 위로는 눈만 가득 쌓인다. 혼자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아내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듯하다. 브리지가 시간 맞춰 와준 덕분에 인디아는 무사했지만 화가 난 브리지는 그 자동차를 폐기처분시킨다.
불안이 없지 않지만 남편과 아이들 속에서 행복한 노년을 맞이한, 세파를 모르는 귀여운 어머니상을 연기한 조안 우드워드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폴 뉴먼의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는 에서처럼 아까운 배우 인생을 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연기력이 나무랄 데 없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영화 출연이 뜸했기 때문이다. 1958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폴 뉴먼이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미국 출신이지만, 인도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 출신 작가 루스 프라워 자발라와의 협업으로, 300만 달러 내외 제작비로 품격 높은 작품들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도의 거장 사타야지트 레이와 프랑스 고전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품들은 영국과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질적 문화 충돌을 다뤘다. (1965), (1970), (1893)이 이에 속한다.
고전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남다른 열정과 재능도 발휘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원작인 (1970)와 (1984)와 (2000),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소설이 원작인 (1985)과 (1987)와 (1992), 일본계 영국인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1993), 가 그러하다.
예술가를 꿈꾸는 현대 뉴욕 젊은이들 이야기인 (1989), 여성 편력을 중심으로 한 피카소 일대기 (1996),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파리 대사 시절을 그린 (1995), 다이앤 존슨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2003)도 삼인방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싶다.
또한 파리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 얽힌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정도다. 그중 기억나는 일화는 1963년 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대형 여객선으로 미국 나들이에 나설 때 전 유럽이 떠들썩했던 일이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발생할까봐 온통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를 얼마나 소중히 아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아무리 열심히 봐도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눈썹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필자의 직업적 본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다빈치와 가깝게 교분을 나누던, 순결·사랑·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을 그린 화가 라파엘로(Sanzio Raffaelo, 1483~1520)의 작품 막달레나(Maddalena Doni) 초상화와 비교해보기로 했다.
살펴보니 라파엘로 역시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을 아주 흐리게 처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당시 상류층 여인들 사이에서 ‘눈썹 제거하기’가 상당히 성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유추(類推)를 가능하게 했다.
그 후에도 여인을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 없는 여인’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초상화를 남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초상화들을 보면, 경우에 따라 눈썹이 짙게 그려지기도 하고, 옅게 그려지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면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 를 감상해보니 초상화의 중심이 되는 소녀의 아름다운 눈초리에 매료되면서도 소녀가 머리에 쓴 ‘터번(Turban)’형 머리덮개가 화려하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원작을 다시 보았을 때 ‘속눈썹’ 역시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소녀가 ‘전신성 무모증(全身性無毛症, Alopecia totalis)’에 시달렸을 거라는 임상적 진단을 내렸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 유명한 ‘북유럽의 모나리자’를 본다는 기쁨은 잠깐, 소녀가 겪어야만 했던 가슴앓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애잔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