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란사

기사입력 2016-06-29 09:05 기사수정 2016-06-29 09:05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김란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학해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경숙 동년기자)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김란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학해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경숙 동년기자)
‘독립운동가’하면 총칼로 맞서 싸우거나 옥고를 치른 인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고종의 통역관이자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으나 그의 후손조차 활약을 뒤늦게 알 만큼 잊혀왔다.

성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말기에 여성해방을 논하고 실천한 여인 김란사는 누구일까?

1872년(고종9년) 평양 출생으로 남편의 성 ‘하’를 따르고 난사(Nancy)는 이화학당 입학 후 지은 영어 이름이다. 하란사는 외교관 남편을 통해 일찍부터 신문물을 접했고, 기혼자는 안 된다던 이화학당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그녀는 당시 당장인 프라이 여사에게 가지고 온 등불을 끄고는 자신의 삶이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교육받기를 간청했다.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결국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육아, 가사, 학업을 병행하며 열정을 불태운 하란사는 1년 뒤, 일본 대학에서 1년 그 후 자비로 미국으로 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문학사를 받는다. 한국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그녀의 집념과 과단성 있는 행동력과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란사 등 외국의 신문물을 깨쳐 돌아온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귀국한 하란사는 이화학당 등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학생들을 계몽하였다. 또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모아 자모회를 구성, 육아법, 가정 의학 등을 가르쳤고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에게 감화 받은 학생 중에는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하란사는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비밀 연락도 담당했는데, 특히 고종의 밀사로 활약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참석해 조선 독립을 호소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이 폭로되고 하란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45세. 그녀의 시체를 확인한 남편 하상기는 독살 당해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가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독살설이 전해질 뿐이다.

그녀가 뜻을 펼치기에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그녀의 놀라운 활약상도 많은 여성 선각자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수려한 언변, 지성미와 뛰어난 패션 감각,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신여성 하란사. 학생들에게 그녀가 늘 했던 말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건네진다.

“꺼진 등불을 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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