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엘레강스’. 내 옷차림 콘셉트다. 나는 ‘패션’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한다. 새 옷을 입는 날은 가슴이 설레 밥을 못 먹을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 수수하고 편한 것을 추구한다. 나는 절대 아니다. 좀 불편해도 예쁘고 멋진 의상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옷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장난 아니게 많다. 남보다 튀려고 작심하고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의상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가 다르니 다른 사람과 차별이 될 수밖에 없는 게 내 옷차림이다.
“너도 제발 남들처럼 수수하게 입고 다녀라.”
결혼 전, 출근할 때마다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엄마는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결혼 후에는 남편이 그랬다. 너무 튀는 옷을 입고 다닌다며 타박하듯 말해 티격태격하는 날이 많았다.
198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평택여고 교무실을 들어서는데 동료 교사들이 미디 기장의 타이트한 옥색 원피스를 입은 나를 보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케이프 디자인의 어깨에 앞면에는 같은 색의 커다란 오간자 실크 리본이 달려 있는 옷이었다. 옷감은 모직 개버딘. 고급스런 느낌에 피부에 닿는 감촉이 포근했다. 우아한 아이보리색 진주목걸이를 매치하고 같은 색 계열 아이보리 톤의 진주귀걸이도 달았다. 하얀 레이스 장갑은 신의 한 수였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동료 교사들은 내 옷을 보며 봄을 상상한 걸까? 예상외의 반응에 부끄러웠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옷을 사놓고 빨리 입어보고 싶어 며칠을 안달했다. 아무래도 봄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2월 중순 무렵이었고, 속옷으로 슬립 하나만 입었던 터라 그날의 쌀쌀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옷을 입는 행위도 일종의 예술로 생각한다. 옷을 예쁘게 입는 데 목숨 건 내게 그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기 며칠 전, 평택 번화가를 지나다가 J브랜드 매장 쇼윈도 마네킹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옷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좋은 옷은 색감, 질감, 디자인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마네킹이 입은 원피스가 그 조건들을 다 갖췄다는 판단이 서자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너무 젊은 애들 스타일 아닐까? 나한테 과연 저 옷이 어울릴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쉽게 구매결정을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옷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봐 이삼일에 한 번씩 가서 확인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고, 갖고 싶은 물건은 반드시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패션은 도전’이다. 결국 며칠 만에 용기를 내어 매장에 들어가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일단 입어보고 어울리지 않으면 포기하면 됐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 옷은 마치 손님이 맞춘 옷처럼 딱 맞네요.”
매장 직원과 그곳에 온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이즈는 55였는데 내 몸에 맞춘 듯 잘 맞았다. 어디 하나 손댈 곳이 없었다. 그 옷을 사 입은 후 한국 사람들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옥색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참 많이도 들었다.
잘 맞는 옷은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된다. 옥색 원피스를 입고 교무실 앞 복도를 걷는데 남자 영어 선생님이 한마디 툭 던지며 지나갔다.
“그녀는 내게로 나비처럼 날아왔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품성도 좋은 그가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가던 나를 보고는 싱글벙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완벽한 패션을 추구하는 나는 어지간한 옷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눈에 들어온 옷은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든다. 구입 후에는 아끼고 또 아껴가며 입는다. 옥색 원피스도 10년 이상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나를 가장 빛나게 해주고, 숨이 막힐 만큼 좋았던 옷은 내 평생 그 원피스뿐이다.
몇 년 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젊은 여성이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평택여고 나왔어요. 학교 다닐 때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 옷 구경하곤 했어요.”
직접 가르치지도 않은 학생이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해서 수시로 교무실에 가서 몰래 훔쳐봤다는 고백이었다. 하긴, 평택여고에서 내 별명은 ‘공주 선생님’이었다.
뒷모습이 청년 같았다. 낡은 청바지에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중간 톤의 체크무늬 셔츠. 햄버거 주문을 하며 서 있는 남자의 옷차림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의 앞모습도 궁금해졌다. 그 순간 그가 햄버거와 커피를 받아들고 뒤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반전이었다. 그는 허리가 금방이라도 휘어질 것 같은 나이로 보였다.
굽은 나무는 멋스럽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옷매무새가 좋아 보이려면 일단 몸이 곧아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인다. 패션쇼에 나오는 의상들을 일상에서 입는다면 소화 못할 옷이 많다. 그러나 그 옷을 걸치고 모델이 당당하게 자신감 넘치는 스텝으로 걸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다리도 벌어지고 무릎도 구부러진다. 젊음을 포기하면 몸도 따라간다. 탄탄한 근육과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싱싱하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반짝인다. 무얼 입어도 근사해 보인다. 늙는다고 멋까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중후함과 우아함이 있다.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생기고 행동도 달라진다. 잘 다듬은 세련미를 무기로 나이보다 젊게 옷을 입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
패션 감각도 세대에 따라 많이 다르다. 우리 세대는 3가지 색 이상으로 옷을 코디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보색에다 튀는 색깔의, 좀 정신없어 보이는 패션을 하고 다닌다. 고정관념의 파괴를 일으키는 세대다. 자유롭고 과감한 패션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물감을 갖고 노는 기분이랄까.
나이가 드니 어두운 색이 싫다. 얼굴이 컴컴해 보일 것 같아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밝은 색의 옷을 입는다.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으면 스카프나 브로치 등으로 포인트를 준다. 옷 잘 입는 요령은 때와 장소에 맞게 갖춰 입는 것이다. 아무 때나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가끔은 특별한 사정도 있겠지만 마치 불감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고 성의도 없어 보인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남자들의 패션은 마치 군복 같다. 하나같이 우중충한 색깔에 신발도 거무튀튀한 색이 많다. 남자는 코트에 목도리만 잘 걸쳐도 멋이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해 옷을 입던 시절의 얘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다양한 패션 문화에 적응해보자. 비 내리면 레인코트, 가을엔 바바리코트, 눈 내리는 겨울엔 털 달린 파카, 늦겨울 봄 눈 트는 따스한 날엔 좀 화사한 재킷, 연말 모임이나 축하 파티에서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장신구는 보기에도 좋고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나이 든 당신들, 이제 허리 펴고 멋진 노년을 맞이하면 좋겠다. 마사지를 하고 화장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의 패션 감각을 적극 배워볼 때다.
“당신이 조깅 바지를 입는다면, 삶의 통제를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다.”
올백 포니테일, 진한 선글라스 그리고 거침없는 발언까지. 존재만으로 브랜드가 되었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2010년 문화적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겐 ‘패션계의 거장’, ‘패션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항상 뒤따랐다.
그가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International Wool Association) 콘테스트에 출전해 코트 부문 1등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이후 피에르 발망, 장 바투를 거쳐 1964년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다.
무엇보다 ‘칼 라거펠트’ 하면 샤넬을 빼놓을 수 없다. 1982년 샤넬에 공식 영입된 그는 1983년 샤넬 오뜨꾸띄르(고급 맞춤옷)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 독일인, 기성복 디자이너라는 그의 경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편견을 뒤집는 계기로 만들었다. 그는 한물간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았던 샤넬의 기존 아이템에 대중적인 문화 요소를 결합해 젊은 층의 팬을 확보하며 다시 한번 샤넬의 부흥을 이끌었다.
지난 1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 피날레에 그가 나타나지 않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건강 악화설, 은퇴설 등 그가 샤넬을 맡은 35년 동안 피날레에 서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이슈가 됐다. 그로부터 4주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췌장암. 샤넬은 SNS를 통해 “1983년 이후 샤넬 패션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커펠트의 서거를 발표하게 된 것은 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며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명 패션계 인사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왜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어차피 내가 죽을 때 모두 끝날 것을.”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샤넬(Chanel), 펜디(Fendi), 칼 라거펠트 등 유명 브랜드를 지휘했다. 건강이 악화된 최근까지도 오는 3월에 열릴 여성복 패션쇼를 준비할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많았다. 한평생 패션에 몸 받치며 트렌디한 패션을 보여준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4)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1954~1992년)
화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공연예술가, 에이즈 인권활동가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6세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했다.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서 몇 달간 살다가 1978년에 이스트 빌리지에 정착했다.
이스트 빌리지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첫 멤버로 1980년대 초에 시빌리안 워페어, 클럽 57, 그레이시 맨션, 패션 모다, 림보 라운지 같은 전설적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그라피티 쇼’를 했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등지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8세에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투병 중에도 도발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5) 쳉 퀑 치(Tseng Kwong Chi, 1950~1990년)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파리 명문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1년 공부한 후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해 에이즈로 40세에 사망하기까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키스 해링의 ‘절친’인 그는 해링의 부탁으로 4만 장의 ‘키스 해링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챙 퀑 치는 뉴욕에서 경험한 다민족주의, 대량 소비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애매모호한 외교관’을 예술적 페르소나로 설정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업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작업한 ‘서양과 만난 동양’ 또는 ‘탐험 연작’은 서양이 아시아에 품는 순진무구한 선입견과 무지를 조롱하고, 서구라는 근대적 구성물이 동양과 어떤 연관 속에 구성되는지, 서구라는 상상 개념이 상징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동양을 신비화하고 배제했는지를 묻는다. 챙 퀑 치는 중국인임을 적극 강조했지만 중국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6)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년)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를 가리켜 “흑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 검은 피카소”라 표현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3대 팝 아티스트로 불리며, 한때 마돈나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인정해줬던 앤디 워홀 사망 후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미술 전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15세 때부터 가출을 반복하며 거리 생활을 했다. 뉴욕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화를 하며 이스트 빌리지의 신표현주의 경향을 주도했다.
노숙자들과 공원 벤치에서 숙식하고 구걸하고 마약을 거래했다. 작업 초창기에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뉴욕 거리와 상점에서 1~3달러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7장의 엽서 시리즈 ‘무제(안티프로덕트 엽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스키아의 엽서 시리즈는 앤디 워홀이 구매했는데, 당시 워홀과 함께 있던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엽서를 사지 않았다가, 훗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7)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 1947~1998년)
소호 거리에서 우표 크기의 콜라주 작품을 판매하다 리무진을 빌려 소호 거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리무진 쇼’를 열어 유명해졌다. 가난과 무명이 창조력을 발휘한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 후드 장식품 등 일상 재료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메일아트’가 그것이다. 메일아트는 가난한 예술가가 기성 제도권 전시 공간인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대안 네트워크 공간에서 대중과 소통하면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자, 국가나 기관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가 애용한 재료는 미술잡지 ‘아트포럼’ 표지였다. 또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제품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재료 특성에 따라 변주됐는데, 누구든 월 구독료 100달러 혹은 평생구독료 1000달러를 내면 우편으로 그의 작품 ‘Art For Um’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월요일 휴관한다. 현대미술은 도슨트 설명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길 권한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전시기간: 2018년 12월 13일~2019년2월24일)
‘반항의 거리, 뉴욕’(전시기간: 2018년 12월 21일~2019년 3월 20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전시기간: 2018년 11월 24일~2019년 3월 17일)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전시기간: 2018년10월 3일~2019년 3월 3일)
작년 겨울 한 유명 백화점에서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롱 패딩은 없어서 못 팔았다. 이 상품을 사려고 고객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등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롱 패딩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그야말로 롱 패딩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런데 롱 패딩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는 보도가 들려왔다. 살 만한 사람은 대부분 샀을 테고 올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탓도 있다는 분석도 따랐다.
내가 한때 일하던 회사에서 1996년 ‘UMBRO’라는 영국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달러 환율이 800대 1까지 가던 시절이었으니 수입해서 팔 만했다. 그때 상품 품목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롱 패딩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 옷을 입고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추리닝 정도가 주종이던 스포츠 패션에서도 멋스러웠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패션이라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나는 그 무렵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했는데 롱 패딩 가격을 놓고 사장과 갈등을 빚었다. 수입 원가 1만5000원 상당의 품목이었으니 9만 원 정도로 팔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요즘처럼 오리털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인조 솜으로 만든 패딩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비싸게 정가를 매겨야 팔릴 품목이라며 판매가를 놓고 고집을 피웠다. 더 올리면 안 팔린다고 강하게 조언했는데도 사장이 내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12만 원, 15만 원, 18만 원으로 가격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롱 패딩이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판매는 부진했다. 결국 1997년 1월이 돼서야 사장은 내게 가격 책정을 맡겼다. 하지만 이미 판매 기회를 놓친 상황이었다. 이런 상품은 추운 겨울에 잘 팔리고 첫 추위 때가 적기다. 11월이 적기이고 날씨에 따라 12월까지도 판매가 이어질 수 있지만, 1월에 겨울 상품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년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이 100만 원을 훌쩍 넘었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린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롱 패딩 가격으로 사장이 책정한 가격은 너무 비쌌다.
롱 패딩의 유행이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작년에서야 시작된 셈이다. 나나 사장 모두 너무 앞선 시기에 롱 패딩에 큰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유행에 민감한 편이고 유행 주기도 짧다. 롱 패딩 하나를 사면 더 이상은 사지 않는다.
롱 패딩을 입어보니 과연 따뜻했다. 무릎까지 덮어주니 당연하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무릎에 옷이 닿아 걸리적거렸다. 이를테면 멋을 포기한 패션이다. 마치 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형상이다. 패딩 옷에 붙은 모자에 털이 달린 것도 있다.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보온 효과는 거의 없다. 털이 붙었다는 이유로 비싸기만 하다. 따로 따뜻한 모자를 사서 쓰는 편이 더 실용적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롱 패딩을 가져가려 했다. 고산에 올라가면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부피 때문에 포기했다. 숙소에서는 입을 수 있으나 트레킹 때는 입을 수 없다는 조언도 작용했다.
모두들 제 갈 곳으로 나간 후의 현관에 서서 이리저리 흩어진 신발들을 정리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네 명이건만 좁은 현관에 신발들이 가득 차 있으니 볼 때마다 정리하지 않으면 가히 잔칫집 현관이다. 특히 작은아들은 매일 입는 옷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신발 때문에 갖가지 구두와 운동화들이 현관과 신발장으로 들락인다. 내가 현관 신발정리를 자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다행히 큰아이는 한두 켤레로 해결되기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남편의 신발이 하나 더 늘었다. 출근할 때 신는 구두 두세 켤레와 운동이나 산책 나갈 때 신는 운동화가 전부였는데 낡아서 바꾸자 해놓고 미루고 미루다 최근 새 운동화를 샀다. 헌것은 버리자 했더니 비가 올 때 질척한 산길을 걸을 때 딱이라며 그냥 두라고 한다. 새로 장만한 운동화가 현관에 얌전히 놓여 있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애잔하다.
새 운동화가 마음에 드는지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신고 다닌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작은아들은 패션에 따라 바꿔 신는 고가의 운동화와 구두가 신발장에 넘쳐난다. 그런데 아들 운동화 반값도 안 되는 운동화 하나 겨우 사 신고 좋아라 하는 것이다. 물욕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남편은 물건을 살 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어야 구입한다. 본인을 위한 지출은 여간해서 하질 않는다. 그래서 가끔씩 답답할 때도 있는데 그 모습에서 가장의 무게도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남편의 양복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경기가 좋으면 아이들 옷, 자기 옷, 애견용품, 그다음으로 남편 옷을 산다는 내용이 있었다. 가장이라는 존재는 가족들을 뒷받침해주는 넉넉함이 DNA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염치없이 해본다. 한 가정의 우선순위에서 스스로 밀려난 이 땅의 남편들이다. 그 가장의 모습을 오늘 아침 남편의 운동화에서 본다.
‘주님 위의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니어의 로망을 넘어서(?) 이제는 모든 세대가 인생의 마지막 꿈처럼 여기는 듯한 건물주라고 하면, 흔히 일반 상가 소유자나 빌라, 빌딩 주인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좀 독특한 건물주가 있다. 김현우 씨, 주한 외교관들에게는 ‘피터 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주한 외교사절들을 대상으로 주거공간 렌트 사업을 하고 있는 흔치 않은 건물주다. 사업을 한 지 어언 30여 년이니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난 생활 또한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를 만나서 쉬이 볼 수 없는 삶을 들여다봤다.
동빙고동에 위치한 모로코 대사관 Owls Avenue에서 만난 김현우 씨의 나이는 거의 40대로 보였다. 아무래도 주한 외교사절들과 접촉해야 하는 업의 특성이 그를 젊게 만든 것일까? 외교관들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연예인들, 셀럽들 또한 그의 집을 빌리기도 했었다. 특별한 이들을 손님으로 모시는 건물주로서 살아야 했던 그의 감각 또한 계속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0여 년 전에 시작된 거죠. 남대문에 대한화재 건물이 있었는데, 독일대사관이 그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독일대사관 사람들에게 저희 집을 내주면서 일을 시작했죠. 그 후로 계속 대사관과 주재원들에게 집을 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글로벌 회사가 인정한 인테리어 감각
그는 손님의 니즈에 맞게끔 인테리어를 짠다고 말한다. 최근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인 추세는 컨템포러리, 미니멀리즘이란다.
“주거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롱패딩이 유행하면 모두가 롱패딩을 입지만,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이 다 달라요. 특히 독일 사람들을 25년간 겪었는데 굉장히 합리적이에요. 헤어질 때도 나이스하고. 독일 사람들이 인간으로 치면 명품이라고 봐요.”
요즘 그에게 가장 재밌고 즐거운 일 또한 인테리어다. 그는 자신의 감식안에 대한 모종의 자부심도 있다.
“덴마크에서 온 레고 코리아 대표님이 저희 집에서 사실 때가 있었어요. 그분이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제가 코디한 가구와 그림을 그대로 다 계약서에 넣어 달라고 요청하시더군요. 유러피언 미니멀리즘적인 인테리어로 한 거였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정말 희열을 느꼈죠.”
젊게 살려면 가구 공간부터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인테리어에 대해 물어볼 차례였다. 과연 젊게 보이는 인테리어는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을까? 그가 볼 때 한국 주거문화의 문제점은 ‘너무 많이 갖다 놓는다’는 것이었다. 가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컨템포러리하고 미니멀하게 해야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제발 오래된 가구 버리고 요즘 디자인의 가구를 들이는 게 젊게 사는 비결이에요. 앤티크하거나 바로크적인 디자인의 가구는 나이 들어 보이거든요. 좀 더 모던하게 꾸밀 필요가 있어요.”
그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인테리어 조건은 컬러를 많이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주로 화이트와 그레이, 우드색을 활용한다. 한 집에 컬러를 서너 개 이상 쓰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은 패션 쪽에서 말하는 ‘세 가지 색 이상을 입지 말라’는 말과도 통용된다.
“집은 자기가 평생 살 수 없어요. 반드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죠. 그래서 보편성에 맞춰야 해요. 맞춤에 있어 가장 좋은 것은 화이트예요. 화이트에는 그림을 걸어도 되니까 일종의 캔버스라고 생각하면 되죠. 그래서 저는 화이트를 많이 써요. 자기만의 컬러를 그 안에 넣어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독일의 포용력에서 많은 것을 배우다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사업가로서의 그의 첫 인연이 독일이었고 지금도 그 연을 이어가는 만큼, 그는 독일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지금까지 중국을 육십 번을 갔어요. 아이 공부 때문에도 그렇고 가구 수입 등의 일이 있어서. 그런데 그때가 20년 전이었는데, 모든 대도시의 택시가 폭스바겐이더군요. 다른 회사택시는 하나도 없었어요. 차만 팔았을까요? 차가 팔리면 부속적인 파트들이 얼마나 많이 팔리겠어요.”
그가 본 독일 사람들은 계약이 끝나면서 안 좋을 수 있는 관계라도 끝까지 매너 있게, 상대를 배려하며 합리적으로 마무리 짓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이 주재원이라는 엘리트여서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그는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가 직원들에게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쳐요. 분쟁이 생긴 후부터는 여러 가지 쌓이는 문제점들이 나오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게 되거든요. 분쟁은 최종적으로는 소송으로 가죠. 그러면 변호사 고용해야지, 서류 검토해야지, 증거 서류 준비해야지…. 내가 다 해줘야, 변호사는 그걸 보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양보해라, 보듬어라’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그의 사무실에는 ‘Sue Zero(소송 제로)’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소송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미국의 유능한 엘리트들은 소송을 피하는 기술을 알아요. 그게 필요해요. 정신적으로나 건강 면에서 너무 좋은 것이니까. 포용은 무섭고 강한 힘이 있지요.”
좋은 공기가 행복이다
그는 차에서든 집에서든 에어컨과 히터를 쓰지 않는다.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망가뜨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제주로 보냈다. 서귀포와 서울의 미세먼지 차이가 어마하게 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다.
용인 세컨드 하우스에서 사는 것도 공기 때문이다. 용인의 산속에 자리한 그 집은 큰 도로에서 1000m 더 들어간 곳에 있는 숲으로 둘러싸인 트리 하우스다. 봄부터 가을까지, 금·토·일의 주말 동안은 그곳에서 난방을 하지 않은 채 지낸다. 봄과 가을은 춥지 않냐는 말에 그는 구스다운 이불과 두꺼운 잠옷 그리고 러시아 친구가 준 솔잎가루 베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다.
“공기의 소중함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와 닿습니다. 차가 미세먼지의 주범이에요. 특히 디젤차. 최근에 판매된 승용차 대부분은 디젤차죠. 디젤차가 인센티브가 있고 연비가 좋으니 사람들이 많이 샀잖아요.”
그래서 그는 은퇴한 사람들이 도시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디젤차로 가득한 서울 도심은 그에게 있어선 미세먼지 공장 같아 보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하니까 이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에 너무 중심을 두죠. 은퇴 후 여유가 되면 근교로 옮기는 게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흙냄새가 올라오는 집, 별과 하늘이 가까워 일상에서 마음의 치유도 가능한 곳입니다.”
월·화·수·목은 서울에서 금·토·일은 자신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용인 세컨드 하우스에서 힐링을 하는 그는 워라밸과 함께 휴양, 문화, 여가를 향유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용
그는 건물 관리를 하며 여유로운 인생 후반기를 지내는 중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시니어의 일상을 유유자적 보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30, 40대에는 일에 미쳐 있었다.
“일을 하면 미친 듯이 하던 시절이었죠. 이른 아침 논현동 건축자재상인들이 안 나왔다해도 일찌감치 가 있기도 하고 점심은 차에서 사과나 바나나만 먹으면서 지내고…. 그러다 독일 사람들의 삶을 보며, 저의 멘토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그가 선호하는 단순하고 절제된 감각은 그의 삶의 법칙과도 연결되고 있었다. 젊어 보인다는 말에, 그가 ‘젊어 보이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고 대답한 것도 사진의 취향이나 감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자가 한 중용이란 말을 중요시합니다. 사람 관계도, 먹는 것도 밸런스가 중요해요.”
김현우 씨는 일과 취향, 삶까지 일치시킨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일치는 그에게 ‘지지부진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세운 법칙에 따라 자신을 오롯이 정렬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과 행복 덕분 아닐까. 그 쉽지 않은 길에 도착한 그의 모습이 부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한다. 인스타그램은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이다.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하며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주로 활용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에 도전장을 내민 시니어가 있다. “62세 새로운 인생 시작.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인생은 길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스타그램의 고수 김석재(63) 씨다.
“‘그레이네상스’라는 표현처럼 시니어가 지는 꽃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같은 새로운 채널을 통해 다시 피는 꽃이 되길 희망합니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며 그레이네상스를 맞이한 김석재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는 ‘그레이(grey)’와 ‘르네상스(renaissance)’를 합친 용어로, ‘노인 전성기’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김석재 씨가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녀들과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도 자녀들과 격의 없이 지내지만, 더 많이 소통하려면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8년 10월 9일 자택인 한옥 앞에서 찍은 사진을 게시하며 그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반응은 놀라웠다. 첫 게시물을 올린 후 단 두 달 만에 25만4000여명의 팔로워(소통망 서비스에서 특정한 사람, 업체 등의 계정을 즐겨 찾고 따르는 사람)가 생겼다. 팔로워 연령대도 10대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전 연령대를 사로잡으며 인스타그램 스타로 떠오른 비결은 뭘까.
“‘희소성’ 때문인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이 20~30대 젊은 세대들이 주로 소통하는 SNS잖아요. 외국에는 꽤 많은 여성 시니어가 인스타그래머(인스타그램 사용자)로 활동하지만, 국내에는 시니어, 특히 남성이 인스타그래머로 활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인스타그래머로 활동하는 시니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그가 인스타그램 시니어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저는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패션’에 관심이 많아요. 오래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몸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김석재 씨의 패션은 남달랐다. 세련된 검정색 코트에 붉은색 머플러로 포인트를 주고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멋을 연출했다. 모델 경력이 있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그는 모델 활동을 해본 적은 없지만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고수로서의 자기계발 비결을 묻자 ‘고수’라는 명칭은 부담스럽다며 “인스타그램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굳이 비결을 꼽자면 자신만의 콘셉트를 만들어나가면서도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볕이 잘 드는 집 앞마당에서, 동네 돌담길 앞에서, 여행지에서의 사진 등 일상에서 틈틈이 기록한 모습들을 꾸준히 업로드한다. 그래서일까, 김석재 씨 인스타그램 게시글엔 ‘일상’과 관련한 해시태그가 많다. 해시태그란 단어나 문구 앞에 ‘#’ 기호를 써서 다른 사용자들과 정보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다. 그는 매일 소소하게 일상을 공유하며 팔로워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도 두려움보다는 흥미로움이 더 컸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스마트폰 사용도 어려워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들과 소통하며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즐겁습니다.”
김석재 씨는 인스타그램에 입문하는 중장년층에게 자녀들 또는 젊은이들과 자주 소통하는 게 SNS 활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라고 조언했다.
“SNS 같은 새로운 문화에 대해선 당연히 젊은 세대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유튜브’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제된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유튜브에서는 좀 더 활동적인 매력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오랜 기간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건설’을 주제로 영상도 제작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으로 진정한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그의 새해 소망은 노년층을 대표하는 ‘트렌드리더’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시니어가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2019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레이네상스’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더 소통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연말 서울시50+재단에서 진행한 ‘패션人스타’에 응모했는데 덜컥 뽑혔다. 설마하면서도 시도한 것이 행운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내게 어울리는 색은 뭘까 궁금했다. 내게 맞는 최고의 색을 찾는 일은 스스로를 좀 더 돋보일 수 있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전문 컨설턴트 사무실에서 내게 맞는 퍼스널컬러를 찾기 시작했다. 화장하지 않은 피부로 검사를 해야 한다기에 세수를 한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머리색도 가려야 해서 하얀 두건을 쓰고 어깨에도 하얀 가운을 둘렀다. 그러고 나서 다양한 색깔의 천을 하나씩 어깨에 얹어보며 얼굴이 화사해 보이는 컬러를 찾았다. 피부색이 누렇고 붉은 기가 있는 내게 어울리는 색은 따뜻한 가을 색이었다.
너무 튀지 않으면서 적당히 색이 빠진 자연스러운 컬러가 내게 어울린다고 전문가는 말했다. 그 색들은 튀지 않는 밤색, 카키색, 회색, 아이보리, 오렌지 등등이었는데 회색은 스님들이 입는 승복 색깔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특별한 날 즐겨 입는 검은색도 두 번째로 잘 어울린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퍼스널컬러를 모를 때도 내가 이런 색깔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옷 색깔도 내 퍼스널컬러와 비슷하다. 화려하고 튀는 옷차림은 부담스러워 피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전에 퍼스널컬러 공부를 했다는 분과 잠시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도 정확히 알려면 검사를 제대로 해봐야겠지만 내 퍼스널컬러는 아마 가을 느낌이 나는 웜톤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자신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색과 어둡게 만드는 색이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변화를 위해 염색도 해보라고 권하며 어울리는 머리카락 색도 알려줬다. 잘 어울리는 색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레드브라운이었다. 피부는 건성이라며 내게 필요한 화장품도 알려주었다. 상황에 따라 가끔 하게 되는 파운데이션이 21호인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파운데이션 21호가 내게는 너무 밝다고 했다. 잘 맞는 색은 23호. 어쩌다 화장을 하면 뭔가 얼굴이 떠 보이는 것 같았는데 색이 안 맞아서 생긴 일이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평균연령 100세는 이제 평범한 얘기가 되었다.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인생 후반기, 이왕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으로 가꾸면서 멋지게 채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퍼스널컬러 경험을 해보니 한 번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알아보고 자신감을 더 상승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다짐과 희망으로 가득한 1월 한 해를 시작하며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딸기색 립스틱을 바른 에이코 할머니 (가도노 에이코 저ㆍ지식여행)
30년 넘게 전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원작자인 아동작가 가도노 에이코의 에세이다. 2018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그녀는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책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기 위한 에이코 할머니만의 비법들을 담았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빛나는 자신만의 멋과 철학, 나이가 들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패션, 오랜 세월 즐겨온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그릇들, 딸기색 벽을 가득 채운 수많은 책 등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마흔 이후 빨간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 한마디에 ‘딸기색’을 자신만의 색깔로 삼은 저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예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채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옷장 속을 살피고 싶다”며 아름다운 삶의 비결과 꾸미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 같이 읽고 함께 살다 (장은수 저ㆍ느티나무책방)
10대 여고생부터 80대 할머니까지,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30년 넘게 맥을 이어온 ‘할머니 독서모임’, 귀촌자가 모여 만든 ‘남원북클럽’ 등 저자는 전국 독서공동체 24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 (노신화 저ㆍ포레스트북스)
말기 암과 치매를 앓는 시한부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딸의 마지막 76일을 그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가족의 질병이 갈등과 붕괴가 아닌 치유와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저ㆍ다산책방)
‘뉴욕타임스’, ‘가디언’이 추천하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유럽 소설의 새로운 목소리’로 주목받는 톰 말름퀴스트의 소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으로 평범한 일상이 파괴된 한 남자의 비극을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냈다.
◇ 왕초보 책과 글쓰기 도전 (가재산 외 공저ㆍ노드미디어)
100세 시대를 맞아 시니어들이 쉽게 도전해볼 수 있는 책과 글쓰기 방법에 대해 정리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등 글쓰기에 효율적인 스마트폰 활용 노하우를 친절하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