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년의 고개 숙임, 호텔의 얼굴이 되다
- 권문현(70)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36년간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근무하고 2013년 정년퇴직했다. 같은 해 콘래드서울호텔에 채용돼 총 45년을 호텔에서 근무하며 인생을 배웠다. 하루 9시간씩 서 있고, 1000번 이상 허리를 숙인다. 그는 오늘도 문 뒤에서, 혹은 앞에서 묵묵히 고객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평생직장’,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드물어진 시대. 권문현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여전히 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건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어느 날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공사 현장에서의 일이 너무 힘들고 벅차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응했다. 호텔에서 면접을 본다는 말을 듣고 긴장됐다. 영어를 쓰는 곳이라는데 영어라면 한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면접장에 들어가 뭐든 맡겨주면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조선호텔 임시직 페이지 보이가 됐다. 어쩌다 호텔에 들어와 40년 넘게 일했고 아직도 출근하고 있다.” 살아 있는 호텔의 역사 페이지 보이는 전자결제 시스템이 없던 시절, 각종 서류에 승인을 받은 후 해당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다. “그 시절에 만보기가 있었다면 하루에 2만~3만 보는 족히 찍혔을 거다. 입사 초기에는 온종일 호텔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나면 퇴근 후 다리와 발바닥이 너무 아파 매일 뜨거운 물에 발 마사지를 했다.” 당시 그가 가진 가장 큰 콤플렉스는 영어였다. “가끔 영어로 표기된 서류를 잘못 전달해 혼이 나기도 했다. 당시 조선호텔 고객은 외국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나한테 말이라도 걸까 두려워 목례만 하고 지나가기 바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월급을 받은 뒤 바로 종로1가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ABC부터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2~3년 동안은 퇴근하면 바로 영어학원으로 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정직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였을까. “외국인과 마주 보기만 해도 울렁증을 겪던 시기를 지나 서서히 외국인 고객들의 말이 조금씩이나마 들렸다. 정말 간절했다. 다른 회사는 갈 곳도 없고, 무조건 여기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어 공부도 못 할 게 없었다. 물론 배우는 속도는 더디고 발음도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벨보이로 정식 발령이 났다. 발령 후 대기할 때의 자세나 표정 등을 하나하나 지적받았다. “호텔 직원은 특히 자세가 중요한데, 고객이 눈앞에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기 일쑤여서 초반에는 많이 혼났다. 웃는 얼굴이 아니라며 고객에게 한 소리 듣고는 거울 앞에서 매일 몇 시간씩 표정과 자세를 연습한 적도 있다.” 의전이 전부였던 그때는 도어맨과 벨맨을 대상으로 차 번호 암기 시험을 봤다. “지금도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습관적으로 숫자를 중얼거린다. 특히 대통령, 기업 CEO, 장관 등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차의 번호판 네 자리 숫자는 최대한 많이 외워야 했다. 가장 많이 외웠을 때는 350개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교관 차가 들어오면 차에 달린 국기만 보고도 어느 나라 외교관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국기도 외웠다. 자동차 번호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그때 외운 국기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가끔 손주들이 보는 책이나 TV에 다른 나라 국기가 나올 때면 자신 있게 맞힐 수 있다.” 권 지배인은 국가적인 행사가 많이 열리는 특급 호텔에서 일하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을 시작으로 전·현직 모든 대통령을 봤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겉모습에서부터 힘이 들어가 딱딱한 분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곤 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언젠가 흰 봉투 속 손 글씨가 적힌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관광 산업을 위해서 노력하는 호텔 직원들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격려였다.” 그는 매일 아침 조간신문 세 개를 정독하고 장·차관, 대기업 임원 인사는 꼭 챙겨 메모한다. “인물 정보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래전 장관을 역임했던 분이 행사 참석차 호텔을 방문했는데, ‘○○○ 장관님 잘 지내셨지요?’라고 인사했더니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냐며 깜짝 놀라신 적이 있다. 한 끗 다른 정성의 차이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틈날 때마다 메모해둔 걸 보고 또 본다.” 진상 고객은 애정 고객 신입 시절 선배들에게 배운 노하우와 권 지배인의 경험이 매일 더해져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의 택시가 도착했을 때 문을 벌컥 열면 안 된다. 요즘은 카드 결제 후 영수증을 받기까지 몇 초 걸리기 때문에 잠시 기다렸다 고객이 영수증을 받을 때 여는 것이 좋다. 고객이 타고 온 택시 번호를 기억해두면 물건 잃어버렸을 때 빨리 찾을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설정이 잘됐는지 체크해야 한다. 서비스의 질 차이는 디테일이다.” 권 지배인은 항상 고객들이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고객들의 성향이 다양하니 응대에 신경 쓰다 보면 하루에 한두 가지라도 경험과 노하우가 쌓인다.” 더불어 그는 진상 고객을 애정 고객이라 부른다. 무언가를 지적하고 불편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그만큼 호텔이 발전할 기회, 애정을 주는 사람이라서다. 그 불만을 귀 기울여 듣고 해결해준다면 다시 방문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라 본다. “나는 불만이 가득 쌓인 고객의 말에 우선 귀를 기울인다. 10분이고 20분이고 고객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내 이름의 ‘문’이 들을 문(聞)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노련한 그에게도 어려운 손님은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쉽게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손님을 만나면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경청을 위한 관계 형성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것은 투명해질 때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명함을 받고 고객과 잠시라도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 관계가 한 겹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또 고객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보이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선배가 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텔 종사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나를 깔보는 사람이 주변에 더러 있었다. 결혼하겠다고 처가에 인사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고객들은 호텔 직원을 ‘어이’라고 부르고 다짜고짜 반말을 하기도 했다. 손님이 왕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90년대로 넘어오며 호텔리어라는 말이 쓰이면서 호텔의 황금기가 열렸다. 자존심 상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는 직원을 대하는 고객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친척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으며, 입사 경쟁률도 높아졌다.” 점차 호텔이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사내 교육이 늘면서 그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선배로서의 사명감이 커졌다. “내 일에 내가 가치를 부여하고, 내가 한 번 더 웃고, 내가 더 친절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주 오는 고객들의 자동차 번호와 고객의 성함, 나이, 직장, 특이사항 등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수시로 업데이트했다. 벨맨과 도어맨의 자세나 인사하는 법,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에게 대응하는 법 등도 차근차근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가끔은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나 싶은 표정을 짓는 후배도 있고, 자동차 문 닫는 힘과 소리 등의 세세한 것을 새롭게 배우면서 뭔가 깨닫는 듯한 후배도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어쩌다 아들보다 어린 직원들의 멘토가 돼 있었다.” 교육하다 보면 권 지배인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후배들에게 많이 받는다. “그만두고 싶은 위기마다 가족들이 반대해서 버티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내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뒤돌아보면 그만둘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게 또 죽을 만큼 호텔 일이 싫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하기 싫거나 지겹다는 생각도 할 틈 없이 달려왔으니, 알게 모르게 이 일이 내 천직이라고 여겼던 게 아닐까. 내 이름에는 문(文)자가 들어 있다. 항상 문(門) 앞을 지키며 고객들에게 묻고(問) 고객들의 말을 듣는(聞)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싶다.” 45년의 비결은 배려와 인내심 권 지배인이 업계 장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단 직원들을 향한 배려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후배들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들딸보다 어린 동료들과 같이 일하며 조심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희롱이 난무하는 세상을 지나왔고, 나이를 훈장처럼 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세상이 이제 변했다. 나 같은 세대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제일 좋은 소통법으로 ‘말수 줄이는 것’을 꼽았다. “필요한 말만 하면 된다. 생각 없이 흘러넘치는 말이 없게 해야 한다. 회식 같은 술자리에서는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한다. 나는 회식 때 보통 1차만 참석하고 집으로 간다. 요즘 말로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를 줄여 이르는 말)라고 하던가. 나이는 벼슬이 아니다.” 또 하나는 인내심이다. “언젠가부터 인내심이나 버틴다는 말이 구시대의 상징처럼 돼버린 듯하다. 40년 넘게 호텔에서 실습생이나 파트타임 직원들을 보면 반나절 근무하다 밥을 먹고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학생일 때 호텔로 실습 나와 성실하게 일하고 지금은 동료가 된 직원도 분명 있다.” 호텔은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화려함에 이끌리지만 업무 강도가 높고 버티기가 쉽지 않아 실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신입 사원들의 임금도 높은 편이 아니다. “힘들겠지만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호텔에 취업할 것이라면 한 직장에서 몇 년 일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좋은 평판을 쌓고 선배들의 노하우를 최대한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켜나가면 어떨까. 물론 호텔에서 오래 일한 사람으로서 이 업계가 더 일하기 좋은 직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후배들이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선배로서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노력한다. 후배들에게는 또 다른 잔소리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일했던 45년. 그의 직장 생활에는 자부심이 묻어났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는 따뜻했다. [TIP] 시시콜콜 호텔 이야기 ●욕실에서 쓰는 샴푸, 린스, 보디워시 따위의 어메니티는 가져가도 된다. 슬리퍼와 머리끈 같은 일회용품도 무료다. 호텔마다 어메니티의 디자인과 브랜드가 제각각이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호텔에 간 날이 생일이라면 체크인할 때 적는 것이 좋다. 서비스가 좋은 호텔에서는 소정의 선물을 제공하기도 한다. ●객실 뷰 이외에 에어컨이 약하다거나 담배 냄새가 나는 등 객관적인 어떤 이유로 객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고객은 방을 바꿀 수 있다. ●주변 맛집이나 교통 정보, 예약 등이 필요하면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해보자. ●짐이 많을 때 배기지 다운 서비스를 요청하면 짐을 로비까지 옮겨준다.
- 2022-01-28 08:52
-
- "홀몸노인 설 챙겨야"… 지자체 명절나기 나서
- 설 연휴를 앞두고 지자체에서 홀몸노인을 비롯, 기초수급자와 장애인 등 소외된 이웃에게 명절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는 서초어르신행복e음센터·방배노인종합복지관에서 독거어르신 1080분께 손 편지와 명절 복(福)꾸러미를 직접 전달한다. 복꾸러미에는 떡국세트와 한과, 털모자, 마스크 등이 담겨 있어 취약 어르신들이 따뜻한 설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결식 우려 어르신을 위해 무료급식 및 밑반찬을 제공한다. 방배·양재·서초중앙 노인종합복지관 3개소는 무료급식 어르신 330명에게 명절 특식을 전달할 예정이다. 양재노인종합복지관에서는 전통시장 소상공인들에게 저소득 어르신 500명에게 쌀, 떡국 떡, 유과, 과일 등을 담은 선물을 설 연휴 전까지 전달할 계획이다. 한편 홀몸노인이 명절에도 외롭지 않도록 ‘AI(인공지능) 스마트 맞춤형 돌봄서비스’ 등 맞춤형 돌봄 서비스가 제공된다. 지난해부터 서초구에서 도입한 돌봄 로봇 ‘서리풀복동이’에 만족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올해는 100대를 추가로 지원할 예정이다. 천정욱 서초구청장 권한대행은 “코로나 장기화로 힘든 독거 어르신들을 위한 세심한 지원으로 따뜻한 설 명절을 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왕시내손2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지난 20일 김 세트와 떡국 떡이 담긴 설명절꾸러미를 홀몸노인,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 50가구에 지원했다. 지영숙 내손2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은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며 “작은 정성이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혼자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도 26일 관내 취약계층 30가구에 ‘설맞이 선물꾸러미 나눔’에 나섰다. 지역 희망이웃 후원금으로 구입한 곰탕, 떡국 떡과 유과를 포장해 각 가정에 안부인사와 함께 전했다. 윤장식 선부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은 “설맞이 선물꾸러미 나눔을 통해 홀몸노인, 장애인가정 등 어려운 이웃들도 행복한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충주시 용산동행정복지센터에서는 25일과 26일 양일간 경로당 13곳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지역 노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건강과 안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수정 용산동장은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경로당 운영 축소로 혼자 계신 시간이 많아진 어르신들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충북 충주시노인복지관 역시 설 연휴를 앞둔 26일 홀몸노인 600명과 선별진료소 의료진 100명에게 한과와 식혜를 전달했다. 홀몸노인의 따뜻한 명절나기를 기원하고,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최전선에서 힘쓰고 있는 선별진료소 의료진을 응원하기 위함이다. 김웅 충주시노인복지관 관장은 “설을 맞아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어르신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 2022-01-27 13:58
-
- 만화가 권영섭, 타고난 이야기꾼의 입담은 계속된다
- 오전 9시와 오후 7시. 만화가의 안부 인사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다. ‘봉선이’는 매일 다른 사진을 배경으로 아침저녁마다 인사를 건네온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150명에게 5년째 꾸준히 보냈다고 하니 내심 기대하는 마음마저 든다. 내일은 어떤 안부 인사를 받게 될까. 좋아하는 만화책 시리즈의 다음 편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팬의 마음이 바로 이런 걸까. 만화가의 상징인 빵모자와 검정색 긴 코트 차림. 만화박물관 로비에서 마주친 권영섭 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은 ‘만화가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호쾌하게 주먹 악수를 건넨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는 대신 만화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로 향했다. 기획전시 ‘만화, #시대를 담다’가 진행 중인 1층 전시관에는 시대의 얼굴로 자리 잡은 만화가들의 이름과 대표작이 짝 맞춰 걸려 있었다. 한국전쟁 후 삶의 애환이 담긴 캐릭터 봉선이가 붉은 섬에 갇히고, 이를 구하러 가는 방울이 아빠의 여정과 봉선이를 둘러싼 사건사고를 다룬 작품. 만나뵙기 전부터 받았던 안부 그림 속 봉선이가 전시 액자 속 흑백 만화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캐릭터를 채색하는 스타일이나 말풍선 속 대사는 달라졌지만 1960년의 봉선이와 2021년의 봉선이, 둘의 그림체만큼은 한결같았다. 성실함을 타고난 그림 이야기꾼 60년이 훌쩍 넘는 꾸준함의 원천은 역시 만화에 대한 오랜 애정이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화를 처음 접했다. 친구들이 만화책을 한두 권 들고 다니는 것을 눈여겨본 그는 집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주고 친구들의 만화책을 빌려 읽었다. 감으로 빌린 만화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그 만화책이 교회에서 빌려준 것임을 알았다. 이에 교회를 다니며 교회의 만화책을 모두 읽은 그는 만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학생 권영섭은 만화의 근간인 이야기와 그림, 두 가지 모두 곧잘 했고 좋아했다. 신문 보기를 즐겼고 혼자 남아 그림을 연습했다. 수업을 마친 뒤 쉬는 시간마다 교실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어렵잖게 이야기를 덧붙일 때면 친구들과 선생님께 ‘만화가 해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책과 신문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지역신문 ‘대구매일’에서 주최한 만화 작품 공모전에 덜컥 입선하면서 만화가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가 자란 영주 시골 동네에서는 학생 신분으로 큰 신문사 만화 공모전에 당선돼 원고료를 탔다는 사실이 크나큰 자랑이었다고 한다. 꿈이 확고했던 그는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동아일보 편집국 문화부장을 만났다. 신문에 연재 만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조르기 위함이었다. 원하던 대로 바로 만화를 그리지는 못했지만, 인쇄 조수로 일하면서 만난 김경언 만화가로부터 만화에 대해 배울 기회를 얻었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1959년 연합일보 아동만화 공모전에 당선된 그는 과학만화 ‘우리들의 척척박사’로 연재를 시작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연재는 3년간 이어졌다. “만화에 나온 그대로 시험이 출제돼 도움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내가 진짜 과학박사인 줄 알고 박사님, 박사님 하며 과학에 관해 묻는 편지도 받고요.” 아이들을 위하여 그를 당대 인기 만화가 반열에 올린 작품은 ‘오손이와 도손이’다. 고아로 자란 형제가 헤어졌다가 검사와 도둑이 되어 만나는 내용의 만화는 당시 아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60년대 만화계 3대 출판사 중 하나였던 부엉이문고가 소년만화에 두각을 드러내는 그를 알아보고 새 작품을 의뢰해왔다. 생각해둔 작품은 있었지만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정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교회에서 알게 된 김천애 전 숙명여대 음악대학장이 전국을 다니며 불렀던 가곡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듣고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당시 준비하던 작품의 제목은 ‘울 밑에 선 봉선이’, 주인공의 이름은 봉선화에서 본떠 봉선이가 됐다. 봉선이 만화의 이야기는 집안 형님을 보며 구상해냈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장교가 될 만큼 성공했지만 질 나쁜 친구들의 꾐에 넘어가 사업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불행해진다는 기구한 사연을 닮았다. “형에게 직접 충고하기가 어려워서 만화에 경고의 의미를 담았는데, 나중에 만화책을 받아본 형님이 자신에게서 착안된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에 불같이 화내시더군요.” 가족 내의 실랑이는 있었으나 만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권영섭은 여세를 몰아 ‘봉선이 시리즈’를 이어서 발표했다. 시리즈 중에서 ‘울 밑에 선 봉선이’ 이후 발표한 ‘봉선이하고 바둑이’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1960년대 당시 남자아이들은 만화 ‘산호의 라이파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봉선이하고 바둑이’ 만화를 보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신문 만화를 연재했는데, 봉선이 만화가 인기가 많으니 다음 이야기를 내달라고 독자들이 성화였어요. 출판사 사장이 한 달에 책 두 권을 그리면 집을 사주겠다고 부추겼지만 불가능했죠.” 당시 서울의 일반 가정집은 밤 12시면 전깃불이 나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촛불을 켜놓고 새벽 4시까지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루에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작업을 했다. 모두가 잠들었어야 마땅한 새벽을 노려 침입하려던 도둑을 깜짝 놀라게 한 뒤 내쫓은 경험은 그에게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게다가 최초의 순정만화라 당시 여성 독자들로부터 하루에 팬레터를 스무 통씩 받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진지한 고민을 적어 보낸 편지에는 일일이 답장을 써주었다. 만화 작업에 편지 답장까지 쓰니 이틀에 한 번은 밤을 새워야만 했다. 바빠도 그만두지 못한 이유는 보람 때문이었다. 한 번은 안 좋은 선택을 하려던 독자가 봉선이 만화 시리즈를 읽고 위로를 받았으며 용기를 갖게 됐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 소녀 시절 만화로 접한 봉선이 덕분에 용기를 얻고 새 삶을 살게 됐다며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이들이 아직도 종종 있단다. 먹고살 만큼은 돼야 하지 않겠나 1960년대 만화 대본소는 2만여 개가 넘었는데, 이곳에서 얻은 만화책은 한 번 읽고마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는 질이 좋지 않은 선화지를 사용해 출판 만화책 자체의 질도 떨어졌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만화가를 하겠다고 몰려들어 만화의 수준에 악영향만 미쳤다. 만화책은 사회의 악으로 규정당해 질타를 받았다. 여성단체 등 여러 단체가 모여 어린이날만 되면 남산에서 만화책 태우기 운동을 할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군부 정권은 만화자율심의위원회를 세우지 않으면 만화를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해왔다. 하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 1968년 창립한 한국아동만화가협회다. 그는 이때부터 부회장 세 번, 회장 세 번을 역임하며 협회라는 큰 단체를 운영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외에도 어린이전도협회 부회장을 지냈던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원로만화가협회를 만들고 12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원로만화가협회는 만 60세 이상 작품 경력이 20년 넘는 원로 만화가들로 이뤄진 비영리 법인이다. 경로사상과 이웃사랑, 국민화합과 상생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거나 만화 자서전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등 재능기부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원로만화가협회 일을 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하나 더 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데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적어도 손자들이나 그 자손들이 ‘할아버지 나 뭐 먹고 싶어요. 저 장난감 갖고 싶어요’ 할 때 당당히 사줄 수 있는, 그런 체면 유지하는 정도로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는 한국원로만화가협회를 이끌며 원로 만화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누구보다 힘쓰고 있다. 한국 만화 발전에 힘쓴 협회 회원들이 손주 앞에서 당당하길 바란다. 그래서 한국원로만화가협회의 신년 목표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 ‘NFT’ 사업의 성공이다.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인 NFT는 블록체인 기술로 생성되어 교환과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는 원로 만화가들의 그림과 기술을 NFT에 접목해 원로 만화가들에게 고정적인 수입처를 만들어주려 한다. 그는 NFT 관련 스타트업 직원들과 만나 계약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39년생 아니라 39세 현역 만화가 스스로 ‘39년생’이 아닌 39세라 말하고 다닌다. 그만큼 바쁘게 살고, 미래를 계획한다. 우선 100권짜리 성경만화 전집을 내는 것이 목표. 현재는 40권가량만 완성하고 출판사의 사정으로 더 이상 작업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어린이 성경 주석 전집 완성’이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많으며 누구보다 어린이를 중시한다. 어른에게는 지금 현재의 가치뿐이지만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동 정서에 맞는 만화가 없어 순정만화를 그렸듯, 그는 3년 동안 수원시 어린이집을 돌며 유아를 대상으로 만화교실을 열었다. 자기 얼굴을 그리게 하고, 가족이나 사물을 그리게 하면서 창의력을 개발하는 30여 분의 수업에 집중한다. 다음에 또 와달라며 붙잡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고 한다. “어린이는 박사가 될 수도 있고 과학자가 될 수도 있죠. 심지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봉사는 언제든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의 봉사는 어린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원로만화가협회는 그를 필두로 노인들을 위한 만화교실을 열기도 했다. 여러 경로당을 돌며 일주일에 세 번, 두 시간 수업 동안 과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표현하게 하고, 책자도 제작하게 도왔다. 그는 이외에도 교육부나 문화관광부 측 인사에게 제안해 여러 재능기부 만화교실을 열고자 계획하고 있다. 매일 밖에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그는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지하철 타고 오가는 시간에는 휴대폰을 꺼내 아침저녁으로 보낼 안부 그림을 그린다. 이 역시 5년째 빼먹지 않고 해오는 일. 적지 않은 나이에 현역 만화가로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그의 원동력은 지치지 않는 도전정신이었다. 5060세대에게 던지는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막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더라도 문제는 없다. 그가 운영하는 실버만화교실에서 솜씨 좋은 이들은 만화가로 데뷔하기도 했다. 꼭 만화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숨겨진 장점이 있거든요. 그걸 죽이지 말고, 나를 보면서 희망을 갖고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건강만 하면 노인이라고 못 할 게 뭐 있겠어요?”
- 2022-01-11 10:34
-
- 남원골의 간이역 구 서도역과 혼불 문학관
- 지금은 방송 종료되었지만 '간이역'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그마한 소도심을 지나는 기차역의 아련함이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추억처럼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간이역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였다고 한다. 이제 간이역은 시간 속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민 폐역이 되어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달리지 않아 녹슨 철길은 때론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 샷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남원의 구 서도역은 전라선 기차역이었다. 1934년에 역무원 배치를 시작해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로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했던 서도역이 차츰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폐역이 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에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 서도역 목조건물의 간이역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영화 동주, 미스터 선샤인, 해어화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뮤직비디오 촬영과 유명 모델들의 화보 촬영으로 부쩍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서도역은 그 이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문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시대적 묘사에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서도역이라는 하트 표지판을 지나 역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역 대합실에는 그 시절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기차역의 이야기를 필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복장과 촬영장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와 영화의 추억이 스멀스멀할 것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면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애신과 행랑아범, 함안댁이 걸어 나오고 철로 목조 위에 앉은 구동매가 아기씨와 나누던 대화,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기씨. 이 새벽 기차역에서... 절에 다녀오는 길이네. 그들의 당당하거나 애잔했던 눈빛. 이곳이었구나... 드라마의 힘은 아주 세다. 그 옆 서도역 역사관의 옛 책을 한번 뒤적이고 풍금도 눌러보고 나오니 젊은 커플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돌렸다. 서도역이 소설 혼불의 첫 배경이다 보니 작품 속의 내용을 표현한 정크 아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잠깐 작품 속의 몇 줄씩을 읽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마음 놓고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오래전 기차가 멈춘 녹슨 기찻길은 직선과 곡선과 원형의 철길이 독특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등나무의 짧은 터널 옆에는 흰색으로 잘 단장된 역무원 관사가 있다. 그 옆의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의 하숙집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영화 촬영은 물론이고 체험학습도 하는 곳이다. 요즘 들어 옛 모습에 손을 대어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생경함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적어도 구 서도역의 겉모습은 약 90년 전 모습을 살려둔 듯해서 정겹다. 서도역은 전라선이 신설되어 이전할 때 철거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때 남원시에서 서도역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고즈넉한 아날로그 감성의 문화공원이 된 것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철도 관련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몫 역시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차역, 고요한 이른 아침 운해가 몽글몽글하면 간이역과 더 잘 어울린다. 철길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고목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심었던 벚나무들이다. 눈부신 봄날의 서도역이 미리 그려진다. 바삐 걷다가 잠깐 다리를 쉬는 곳처럼 구 서도역은 남도 여행길에 빠뜨리면 서운할 그런 곳이다. ☞Info 구 서도역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구 서도역영상촬영장. ♤문의처: ☎063-620-6165 ♤교통: 남원역에서 523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대중교통 접근 불편. 택시나 자동차 이용이 편리하다. ♤휴무일 없이 연중무휴 방문 가능. 주변 1.4km 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최명희 작가의 숨결을 담다. 혼불 문학관 구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5분 거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혼불’의 첫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푸르고 문학관은 평온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19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종부 3대(代)와 그들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최명희의 소설 '혼불'.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문학관이 자리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방문객들에게 쉼을 안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생전의 모습이 군데군데서 맞는다. 작가의 집필실로 재현된 방에는 유품으로 작품 일지와 만년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펼쳐진 육필원고를 들여다보노라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숙연해진다. 실내를 빙 돌다 보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디테일한 사진이나 모형으로 전시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어느덧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채로 보여주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작가의 면밀한 내면이 스친다. "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배워 이제 글씨는 안 쓰겠는데...... 나는 경향신문에 만년필을 쓰는 기쁨, 이라는 글을 썼단다. 나는 참 더딘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책도 이제야 부치고 내 살아온 생에 대한 자각도 이제 생기니 장자의 말이 절감이 된다. 行年 五十而知 四十九非.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마흔아홉 가지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 는 이 한 절, 요즘은 이 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나의 非들. 얼음장처럼 가슴이 서늘해지지. 하지만 오십에 새 눈(芽)이 트이지 않았다면 어찌 四十九非를 말할 수 있으며 새 눈(眼)이 뜨이지 않았다면 제 그릇됨을 볼 수 있으랴... 그 芽와 眼이 새 희망을 준다." 약 6,000평의 문학관 건너편의 꽃심관이라는 한옥 쉼터에는 사랑실과 누마루가 있다. 건물 모퉁이의 정자에 올라 혼불문학관을 바라보며 소설 속 삶의 한 자락을 느껴볼 만하다. 살아생전 우리말을 사랑하던 작가 최명희 작가의 혼불. 작품의 어휘 하나하나 직접 취재하고 토속어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정신을 문학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한다. 혼불 속의 청호저수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있는 솟대들은 길게 목을 빼고 노봉마을을 건너다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기억 속의 간이역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학관에 들어 이 땅에 서린 삶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는다. 전라도 남원고을에 가면 이렇게 쉬엄쉬엄 산책하듯 둘러볼 곳들이 기다리고 있다. ☞Info 혼불문학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입장료 무료) ♤문의처 :☎ 063-620-5744~46 ♤운영시간 평일 : 09:00~18:00(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7월~8월) 09:00~18:0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
- 2022-01-04 10:28
-
- 어른의 자격, ‘꼰대’와 ‘깐부’의 차이
- 요즘 서로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인간의 품격을 훼손하는 크고 작은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더욱이 ‘어른다움’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부재(不在)한 세상, 존경할 어른이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말 안녕하십니까? ‘꼰대’와 ‘깐부’ 오래전 특정 세대에서만 통했던 은어이자 속어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어느 날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그 첫 주자가 ‘꼰대’라면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유행어가 바로 ‘깐부’입니다. ‘꼰대’라는 말은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어린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습니다. 요즘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속어로 쓰입니다. 꼰대가 주는 어감과 부정적 의미 탓에 너나 할 것 없이 기성세대라면 꼰대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내가 과연 꼰대일까, 밖에 나가면 나를 꼰대로 보지는 않을까 자문하고 젊은이들 눈치를 보기까지 하니까요. 이를 반영하듯 2020년 MBC에서 ‘꼰대인턴’이라는 드라마를 선보였습니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타령 덕에 드라마 주제가(OST) ‘꼰대라떼’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 그만해 오늘도 시작되는 꼰대라떼 (중략) 뻔뻔하게 뻔하게 반복되는 하루가 지나간다 왕년에 내가 말하신다면 오늘도 시작이구나 니까짓 게 뭘 알아 궁금하시면 라떼를 한잔 드세요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아침부터 시작되는 꼰대라떼 적나라한 노랫말처럼 온갖 진부하고 부정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늙은 사람, 나이만 많이 먹은 선생질만 일삼는 사람이 ‘꼰대’라면, 그 반대편에 ‘깐부’가 있습니다. 꼰대 소리 듣기 싫다면 진정한 내 편, 내 맘을 알아주는 ‘찐친’, 깐부가 되고 싶다면 함께하실까요. 어른이 없고 아버지가 부재하다고 세상 탓을 하기 전에 찬찬히 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 세계 언론에서 극찬과 호평 일색인 ‘오징어 게임’이란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한 ‘오일남’(오영수 분)이란 배역이었습니다. 9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좋은 평가와 감동을 안긴 편이 바로 ‘깐부’라고 합니다. 극 중 ‘오일남’이 ‘깐부’가 뭔지 알려줍니다. 지는 즉시 게임에서 탈락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내줄 구슬치기에서 짝꿍이 된 두 사람-오일남과 성기훈(이정재 분). “우리 깐부부터 맺어야지. 구슬이랑 딱지랑 같이 쓰는 친구.” 어린 시절 놀이 자산의 전부였던 형형색색 구슬과 크기도 두께도 모양도 달랐던 딱지를 함께 쓰고 관리하던 제일 친한 친구를 일컫는 남자아이들의 은어가 ‘깐부’입니다. “기억 안 나? 우리 손가락 걸고 깐부 맺은 거.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가 맡은 역할보다는 대사가 주는 울림이 국경을 넘어 세계적 신드롬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라는 갈림길에서 결정적 순간 ‘내 편’이 되어주는 어릴 적 놀이 속 ‘깐부’라는 말이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호스트인 ‘오일남’이라는 극 중 인물보다 오히려 저는 그를 연기한 ‘오영수’라는 배우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들려주고 보여준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바라 마지않던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하던 평행봉으로 체력을 유지하며 200편 넘는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 오영수. 60년 가까이 평행봉이야말로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그는 이사할 동네에 평행봉이 있는지가 우선순위라고 말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에게도 사악함이 있고, 단지 그 차이가 얼마냐일 뿐이지. 드라마 속 인물과 저는 비슷합니다.” 수백 편 극 속에서 수백 가지 인물을 연기해온 그에게 인간처럼 복잡다양하고 다중다층적인 역할이 있을까 싶습니다. 선함과 악함, 추함과 아름다움을 버무린 인간 군상을 무대에 올리다 보니 인간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서 나온 말로 여겨집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가족끼리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이야기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자기 이야기해가면서 그렇게 사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해요, 얼마 안 되는 식구지만 같이”라고 답하는 그에게서 한 끼 밥을 같이 나누는 일상의 소중함을 엿보게 됩니다. 때문에 그가 가진 염려라면 그저 가족과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말에서도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2등은 패자가 아니라 3등한테 이긴 승자가 아니냐고 되물으며 우리는 모두가 승자라고 얘기하는 오영수. 진정한 승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과 세상에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이에게 제 인생 드라마 순위를 바꾼 JTBC의 ‘인간실격’. 여기서 주인공 아버지 이창숙(박인환 분)이란 인물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또 하나의 어른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폐지를 주우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아버지. 세상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남기지 않고 딱 선물 같은 때론 기적 같은 사람. 아버지 없는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그렇지만 어리지 않은 마흔이 다 된 딸 부정(전도연 분)은 죽기로 결심하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보다 더 가난하게 살 것 같아요. 길에서 고생하며 키워준 아버지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려 했는데,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못 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요.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요, 아버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좌절과 상처, 배신을 겪으며 울부짖던 주인공 부정은 자살 카페에서도, 아버지가 살던 오피스텔 옥상에서도 결국 죽지 못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을 읽어주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닫히고 다친 마음을 꺼내 보이고 온기를 채우면서 아버지한테 다시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 마음을 품으면서 비로소 살기로 결심합니다. 살아내기로 마음먹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이제야 아버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지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미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아버지 마음속에 법도, 문학도, 철학도 다 들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아버지한테 차곡차곡 쌓여 있던 삶의 지혜와 내공은 시집이 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집입니다. 수많은 생각 가운데 아끼며 꺼내는 아버지 말이, 고르고 고른 몇 개 말이 시가 되어 나온다는 걸 깨달은 딸은 편안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를 보내드립니다. 왜 마음 미장공인가? 어른의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이자 아니 사실 처음부터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제 아버지입니다. 박성옥 선생이 제 아버지입니다. 젊었을 땐 경북 왜관 등지를 누비며 숱한 병자를 치료해주셨지요. 면허가 없는 탓에 어머니 김초자 여사를 만나 저를 낳은 뒤론 의업을 접고 미장일을 배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사 가운에 반해서 결혼하셨는데 새하얀 가운 대신 흙떡이 되곤 하는 작업복만 연신 빨아대셨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어린 저는 아버지 일하시는 데 따라다니거나 종종 새참을 갖다드렸습니다. 거친 사면 벽을 아버지 흙손으로 매끄럽게 만드는 마술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울 아버지 정말 멋지다!” 봄에서 가을까지 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분주하시던 아버지는 겨울이면 온돌방 틈새로 이산화탄소 샐까 봐 연탄보일러 수리하며 또 생계를 꾸려가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과학자요 만능 ‘맥가이버’셨지요. 그런 아버지 마음 따라가려 저도 배운 재주 모아서 마음치유, 분노조절, 감정관리 강의하면서 낯선 분들 마음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장일을 부끄러워하셨지만 저는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보고 있어도 그립고 애달픈 못난 딸내미입니다. 아버지한테 배운 붓글씨로 글씨깨나 쓰는 재주를 가진 저는 용돈봉투 드릴 때 짧은 손 편지를 쓰곤 했는데 아버지 역시 제 아이들, 당신 손주에게 용돈봉투마다 손 편지를 써주십니다. “위대한 사람보다 참된 사람이 되어라. 잘 커줘서 기쁘다. 할아버지가.” “우리 ○○이도 안아보니 품 밖에 나는 구나. 부모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제는 그 두 아들이 성인이 되어 취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는 젊을 때 체면 따지다가 좋은 기회도 놓치고 잘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너희 애들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밥 벌어먹고 일했으면 좋겠다.” 취업 앞둔 아니 취업이 절벽인 손주들한테는 차마 말 못 하시고 저희 부부한테 넋두리처럼 해주신 울 아버지 말씀이 귓전에 자꾸 울립니다. 아, 울 아버지! 최근에는 ‘젊은 꼰대’, ‘역꼰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꼰대는 이제 더 이상 나이를 기준으로 불리는 호칭이 아니라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에서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사람, 함께 얘기하고 싶은 사람, 나아가서는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 그런 어른이 우리 서로에게 되어주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 없다고 투덜대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고, 귀 기울여주는 새 맘, 새 삶, 새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크든 작든 혜택을 무척 많이 받아왔습니다. 하늘, 햇볕, 바람, 비 같은 천지가 베푼 은혜뿐 아니라 부모님과 선생님, 세상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인데, 이제는 돌려주고 좋은 것은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우 오영수가 방송에서 했던 얘기처럼 말입니다. “산속에 꽃이 피어 있으면, 젊었을 적엔 그 꽃을 꺾어왔다면 이 나이쯤 되면 그냥 그대로 놓고 오죠. 그리고 다시 가서 보죠. 뭐 그게 인생이죠. 그냥 있는 그 자체로 놔두는 것. 그게 쉽지가 않죠.”
- 2022-01-04 08:34
-
- '60대 67개국 여행자' 신명숙 "늦은 나이란 없다"
- 서울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푸른 자연 속을 뛰놀면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간직한 꿈이 있다. 바로 ‘지구별 여행자’가 되는 것. 그녀는 오늘도 레코드숍에서 세계 각국의 음악들을 들으며 음악의 본고장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이는 어떤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도서 ‘여행을 수놓다’의 저자 신명숙 작가(68)의 이야기다. 신 작가는 ‘늦었다 싶을 때가 이르다’는 생각으로 60대의 나이에도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신명숙 작가에게 받은 에너지를 시니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신명숙 작가는 2007년 50대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해 67개국을 다녀왔지만, 아직도 갈 곳이 많이 남았고 힘닿는 데까지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는 편하게 크루즈, 패키지 여행을 즐겨야 할 나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왜?’라고 반문한다. 신 작가가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2016년 미래에셋 수필부문 공모에 당선됐고, 2018년 계간지 ‘주변인과 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2018년 나온 여행 에세이 ‘지구본 위를 거닐다’, 2020년 나온 시집 ‘웅이와 라넌큘러스’가 있다. ‘여행을 수놓다’는 지난 8월 출간됐다. 담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레코드숍, 그리고 여행 섬세한 글을 쓴 그녀가 여행 작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실제 만난 신명숙 작가는 예상보다 더 호탕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신 작가는 무려 23년간이나 레코드숍을 운영했고, 그러면서 늘 여행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분명한 것은 레코드숍을 하면서 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의 본고장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꾼 것 같아요. 힘들기도 했죠.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고, 서울에서 분당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매일 밤 12시에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호황도 겪었지만, MP3가 나오고는 사양 산업이 되어 결국 가게를 정리했지요.” 2004년 레코드숍 문을 닫았다. 매일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었기에 쉼표는 어색했다. 일상이 무료했고, 우울증 비슷한 것도 겪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 신 작가는 기분 전환을 위해 성남문학원에 다녔고, 여행자의 삶도 시작됐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에 가까워졌다. 첫 여행은 딸과 함께한 중국 패키지 여행이었다. 이후 몇 차례 패키지 여행을 경험한 뒤 신 작가는 여행의 참맛을 맛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에 2007년 패키지가 아닌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혼자 타국을 여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여행 동아리에 가입했고, 사람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책 소개에도 적혀 있듯이, 이 인도 여행은 신명숙 작가가 여행자의 삶을 사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두 명씩 현지 가정에서 숙박 체험을 했어요. 저는 한 총각과 아잔타 석굴 뒤편에 있는 집에 가게 됐어요. 거기가 정말로 더러워요. 화장실 하나 없는 곳이더라고요. 제가 간 집은 애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곳 사람들 주식이 짜파티라고 부침개처럼 생긴 것에 달밧이라는 것을 앙금처럼 부어서 먹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그거를 한 일곱 식구가 7~8장을 놓고 먹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모자란 양인데, 거기서 또 한 장을 제게 주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18세 아기 엄마가 있었는데, 내가 아이섀도 바르는 걸 그 큰 눈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쓰던 것을 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저를 보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사람들이 인도에 갔다 오면 인생관이 바뀐다고 하던데 저도 그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애들이 반찬을 남기면 ‘너네들은 인도 한 번씩 갔다 와야 해’라고 말했어요.” 이후 2008년부터는 남편과 함께 여행했다. 여행 동반자가 된 부부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여전히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과거 펜팔로 만난 사이라고. 신명숙 작가는 예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 기본에 연애편지와 일기가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일기는 지금도 매일 쓴다고. “제가 남편한테 같이 여행 다니자고 꼬셨죠.(웃음) 여행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오는데 남편과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얼마나 서글퍼요. 그래서 제가 나이 들어 공감하면서 얘기할 수 있게 같이 여행 가자고 했죠. 2008년에 중국 장자제에 갔는데, 남편이 반한 거예요. 2009년에는 북인도에 갔고, 그렇게 주기적으로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갔어요. 지금은 제가 우리를 ‘2인조 시니어 여행단’이라고 불러요. 저는 바람잡이, 남편은 행동대장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다 리드했거든요. 지금은 역전되어 남편이 어디 가자고 예약도 다 하기 때문에 전 신경도 안 써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웃음)” 발칸, 중동, 시베리아 여행을 수놓다 ‘여행을 수놓다’는 2017~2018년의 여행기다. 신명숙 작가는 책에 나온 순서와 반대로 발칸, 중동, 시베리아 순으로 여행을 했다. 책에 실린 여행지는 러시아, 발칸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포르투갈이다. 책을 읽으면 신명숙 작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설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이는 신 작가가 태블릿 PC에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했기에 가능했다. 그 메모들이 쌓여서 여행기가 됐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까지 나왔다. 신명숙 작가는 ‘여행을 수놓다’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과는 다르기를 바랐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낀 것까지 쓰자면 아마 책 몇 권은 되겠지만, 그런 책들은 시중에 이미 많죠. 저는 그것들을 전부 배제하고 진솔하게 긴장된 부분을 이겨낸 후 제 자신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부각하려고 했고, 의도한 부분을 함께 여행하는 분위기로 공유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문학을 가까이하다 보니 말장난을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닌 산문식으로 썼고, 차별화하려고 했어요.” 신명숙 작가는 여행지 중에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곳을 가게 될 때가 있는데, 두 국가가 그랬다. 사전지식 없이 갔지만 좋았고 인상에 남는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특히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보면 신 작가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도움도 받았다. 그 수많은 인연 중에서 신 작가는 알바니아에서 ‘저주받은 산’으로 통하는 세스산을 같이 트레킹한 사람이 제일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물네 살의 프랑스 아가씨인데, 처음에는 배낭 큰 거 메고 당당했거든요. 그런데 한산한 산장에 내리니까 기가 확 죽는 거예요. 혼자 무서우니 계속 우리한테 따라붙는 거죠. 그래서 트레킹을 같이 했는데, 그녀의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계속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했죠. 겨울 산행은 빨리 올라가고 빨리 내려와야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놓고 갈 수도 없고, 정말 책에 표현한 대로 내버리고 싶더라고요. 그 아가씨 부모님이 의사예요. 우리나라 정서를 생각하면 돈이 많겠다 싶은데, 두 분이 공공기관 의사라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자립심을 키우고자 혼자 6개월 동안 여행을 하는 건데, 1달러에도 벌벌 떨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책에서 ‘깍쟁이’라고 표현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배운 게 많아요.” 반대로 시베리아 여행은 예상보다 잔잔했다고 기억되는 듯하다. 시베리아 여행 후기는 횡단 열차 탑승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바이칼호를 보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2시간을 내리 기차 안에 있어야 한다. 때문에 책 내용 또한 기차 안과 밖의 풍경,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신명숙 작가는 기차처럼 달리고 싶었나 보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신 작가다. 코로나19, 다시 열린 여행길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나가야 견딜 수 있었다”는 신명숙 작가.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혀 답답했을 터. 그래도 남편과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캠핑을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단다. 또한 언젠가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매일 등산을 포함한 운동을 1시간 이상 한 지도 30년이 됐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등산을 많이 해본 신 작가는 안나푸르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녀온 67개국 중에서 가장 좋았던 나라를 묻자 어떻게 한 나라만 꼽을 수 있겠냐고 고심하더니 칠레라고 답한다. “칠레를 바람의 땅이라고 하는데, 호수가 정말 많다. 그런데 호수 빛이 다 다르고, 라마들이 능선에서 돌아다니는데 정말 아름답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해외여행길이 다시 열리고 있기에, 그녀는 다음 목적지로 중앙아시아를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는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상반기에 안 되면 또 6개월을 기다려야겠죠. 중앙아시아,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을 가보고 싶어요. 아직 안 가보기도 했고요. 비행기로 5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남겨뒀어요. 일부러 먼 곳만 갔죠. 중남미 쪽은 비행기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하루라도 어릴 때 멀리 다녀온 거죠. 아, 유럽도 나중에 가도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남겨뒀어요. 노후에도 심심하면 여행을 가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건강 관리하고 여행을 가야죠.” 신명숙 작가는 여행 외에 글쟁이, 그리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목표도 있다. 그것은 신 작가에게 ‘제2의 인생’ 희열을 느끼게 해준 손주들과 관련 있다. 손주들, 그러니까 두 딸의 자녀들은 각각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이다. 신명숙 작가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부터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모두 기록해뒀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서 선물해줄 계획이다. 과거 바쁘게 사느라 엄마로서는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로서는 다르고 싶은 마음이다. “저는 손주들을 정말 사랑하고, 그애들을 잘 데리고 다녀요. 이번 여름에도 제가 자진해서 수영장, 해수욕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요즘 애들은 정서적으로 시골 이런 것에 너무 고갈되어 있어요. 우리 애들도 호텔이나 가려고 하니까, 그거를 제가 대신 해주는 거죠.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심성도 악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손주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나중에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할머니의 흔적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 애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두 딸에게 속죄하는 마음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내 빈자리를 매정하게 다그치는 것이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곁에 없어 어릴 적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비가 온다’고 전화하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뛰어서 가라’고 했던 말이 그렇게나 서운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요. 그래도 그런 흔들리는 날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두 딸에게 고백하는 마음도 전하고 싶어요.” 신명숙 작가 인생의 좌우명은 ‘리드하는 삶을 살자’다. 누군가한테 끌려가거나,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내 삶은 내가 키를 잡고 살자는 생각이다. 평생 활기차게 진취적으로 살아온 신 작가는 늦은 나이에 꿈 또한 실현하고 있다. 그녀는 인생에서 늦은 것은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배낭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배낭여행을 못 떠나는 이유는 안정적인 현시점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굳이 배낭 메고 힘들게 가야 여행이냐, 패키지로 얼마든지 편하게 갈 수 있는데…. 그거에 갇혀서 못 나가는 거예요. 내 주위 사람들만 봐도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오히려 패키지만 열심히 찾아다니더라고요. 제가 만든 말이 있어요. ‘삼잘’이라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라는 뜻이에요. 너무 ‘삼잘’에 연연하지 말고, 여행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많은 시니어분들이 내 책을 보고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2021-12-22 10:38
-
- 혁신과 인의가 완성시킨 위스키 대부, 김일주 회장
- “Within the budget?” 짧은 한 문장이 갑자기 날아들었다. 영화 속 표현같이 비수 같았다. 깊숙이 새겨진 상처는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제대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변의 키득거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표현으로는 “자리까지 돌아오는 길이 멀어 보이고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평범했다면 나중에 술자리용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며 초심자의 실수로 넘겼겠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의 기억은 그가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기업 대표로 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한국 위스키 대부’라 불리는 사나이, 김일주(62) 드링크인터내셔널 회장의 이야기다. “외국인 부사장과 처음 독대하는 자리였어요. 해외파 직원의 도움까지 받은 품의서를 들고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덜덜 떨었죠. 그 짧은 한마디를 못 알아들은 것이 얼마나 창피한지…. 자리에 돌아와서는 좀 진정하고 나서 회사 못 다니겠다고 뛰쳐나왔어요. 집같이 편안했던 영업부서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죠. 하지만 상사들의 집요한 설득 끝에 마케팅 부서에 눌러앉았는데, 결과적으로 제게 큰 도움이 됐죠.” 김일주 회장이 두산씨그램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백화양조에 입사해 베리나인골드 영업을 맡았던 그는, 1986년 패스포트의 큰 인기를 등에 업고 백화양조를 인수한 두산씨그램에서 영업직 업무를 계속했다. 최우수 영업사원의 고난 당시 두산씨그램에서는 명칭마저 생소했던 ‘마케팅’ 부서를 만들고 유학파 사원으로 채워 넣었는데, 시작은 좋지 않았다. 현장과 동떨어진 아이디어가 먹힐 리 없었고, 한국 정서와도 맞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선 ‘최우수 영업사원 김일주’를 마케팅 부서에 배치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때부터 그의 고난은 시작됐다. “매일 쏘다니던 사람이 앉아만 있으려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일부러 화장실도 들락거리고, 휴게실에 들러 줄담배를 피워댔죠. 그러다 적응되면서부터는 제대로 된 마케터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막 시작됐던 한국생산성본부 마케팅관리사 과정을 듣기도 했고, 우리 사회가 아직 마케팅에 대한 저변이 넓지 않아, 관련 서적 저자나 대학교수를 찾아다니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야 했어요. 당시 주요 기업 중 마케팅 부서가 있던 회사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를 괴롭혔던 영어 역시 정복 대상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영어 학습 테이프는 있는 대로 사 모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민병철 생활영어’나 ‘잉글리시900’ 같은 것들을 닳도록 들었다. 집에 와서는 주한미군 방송인 AFKN만 틀어놓고 살았다. 아내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먼저 영어가 들리는 것이 숙제였다. 그는 “그렇게 꼬박 6년 정도 했더니 조금씩 들리더라”고 말했다. 혁신을 즐기는 그의 성향은 영업사원 시절부터 드러난다. 주류업계에서 그가 남긴 영업과 관련한 일화는 후배들에게 신화이자 교과서가 됐다. 본사 직원이 대리점이 아닌 업소를 직접 방문하고 제품을 소개하는 일도 그가 만든 문화다. 업주들 입장에선 ‘메이커’ 직원이 직접 술을 나르는 모습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는 큰 회사 직원이라는 신분 자체가 계급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는 도매상의 가능성만 보고 부도를 막아준 것이다. 보증에 필요한 금액은 3000만 원. 이 정도 금액이면 당시 강남 아파트 전세를 얻고도 중형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다. 월셋방을 살던 영업사원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친분 때문은 아니었어요. 탄탄한 영업망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회만 부여받으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죠. 큰 고객으로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부도 직전에 몰렸던 그 사람은 6개월 만에 그 돈을 다 갚았어요. 그리고 그 지역에서 아직도 명성을 갖고 활동하는 도매상으로 자리 잡았어요. 지금도 안부를 물으며 만나는 사이로 지내고 있죠.” 혁신이 만들어준 수식어, ‘대부’ 그에게 ‘위스키 대부’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술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양주 ‘발렌타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여러 분야에서 자유화가 이뤄졌는데 수입 양주의 유통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존재감이 없었던 발렌타인은 김일주 회장이 브랜드 매니저를 맡으면서 날개를 달았다. 아시아에서는 생소했던 브랜드 발렌타인은 한국 내에서 급성장해, 한때 전 세계 판매량의 대부분을 한국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17년산은 75%, 21년산은 85%, 30년산은 90%가 한국에서 팔렸다. 21년산의 경우 지나치게 부담 주지 않는 접대용 선물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17년산 500ml는 한국만을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00년 2월 15일 진로발렌타인스라는 조인트벤처 기업이 탄생했고, 이 회사는 대표적 국산 양주 임페리얼까지 더하며 위스키 업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됐다. 이 회사에서 김일주 회장은 외국인 사장과 부사장을 보좌하는 마케팅 임원을 맡았다. 김 회장의 손을 통해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술로는 글렌피딕과 발베니가 있다. 2013년 외국계 회사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피딕’을 국내 1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발베니가 업계에서 인기를 얻은 과정 역시 혁신에 대한 그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당시 업소의 바텐더들이 위스키나 싱글 몰트에 대한 설익은 지식을 설파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발베니의 전설적인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함께 ‘발베니 마스터 클래스’를 만들었다. 처음엔 6명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나중에 50명 넘는 바텐더들이 참여할 정도로 업계를 주목시켰다. 발베니의 지명도와 인기는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사람 얻어야 세상 얻어” 김일주 회장이 진로발렌타인스 마케팅 임원으로 자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회의에서 고성이 오갔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놓고 벌어진 대립이었다. 영어 욕설까지 난무했다. 당시 부사장이었던 데이비드 루카스와 견해차가 있어 거친 공방을 벌였다. 주제는 술의 입구에 장착해 혼입을 막는 장치 ‘키퍼’의 도입에 관한 것. 김 회장은 당시 가짜 양주가 판치던 주류업계의 악습을 깨고 임페리얼을 국내 1위로 올려놓기 위해 이 키퍼의 도입을 주장했고, 루카스 부사장은 비용을 이유로 반대했다. 일정 수량 이상의 판매량이 보장되어야 모험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으니까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사장님은 결국 제 손을 들어주었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얼마 안 가 벌어졌어요. 사장님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데이비드 루카스가 사장이 되었죠. 견원지간처럼 싸움을 벌였던 사이라 ‘회사를 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제게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변하면 나와 일을 하겠느냐’고 말이죠. 몇 가지 조언을 했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알았으니 네 말대로 당장 고객을 만나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날로 저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녔고, 주류업계에서 푸른 눈의 영업사원은 유명세를 갖게 됐어요. 제가 루카스 사장을 존경하게 된 계기죠.” 루카스 사장과의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김 회장이 설립한 드링크인터내셔널의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바탕에 있고, 현 루카스 고문의 국제적인 감각은 신제품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사례로 윤다훈 부회장이 있다. ‘세친구’의 주인공, 그 탤런트 윤다훈이 맞다. 현재는 드링크인터내셔널의 상근 부회장으로 다양한 마케팅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별도 소속사가 있지만,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회사로 출근한다. 김 회장과 그의 인연은 벌써 30년이 넘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났죠. 당시는 무명 배우여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단역이라도 맡게 되면 술자리에서 대사를 하며 연습한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 열정을 보고 언젠가는 대성할 거라 생각했죠. 윤 부회장에게 감탄한 것은 스타가 되고 나서였습니다. 술자리에서 술값 계산을 못 하게 하니 종업원 한명 한명에게 봉투에 용돈을 주고 가더라고요. 그런 겸손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다른 연예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줬어요. 그 인성에 반해서 지금은 제가 놓지 않는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소중히 하기 위해 ‘손해 보듯 살자’는 구절을 가훈처럼 여긴다. 스스로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화낼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갑자기 청첩장을 전해도 시간 손해, 돈 손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응하는 식이다. 물질적 손해보다는 사람을 아끼는 데 노력한다는 그의 철학은 그가 거쳐온 인생의 주요 기점마다 빛을 발했다. “사람에 대해 노력하면 주변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소한 손해가 선한 영향력으로 되돌아오는 거죠.”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회사의 상품 판매가 급감했을 때도 이러한 태도는 리더십이 됐다. 회사 내부에서 인원 감축이나 임금 삭감 등의 대책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충성심과 팀워크를 다지는 계기로 만들었다. 김 회장의 이런 태도는 단계적 일상회복을 통해 회사의 판로가 열리자마자 직원을 열성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 그는 인생을 통해 얻은 경험들을 최근 한 편의 글로 정리했다.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며느리가 손주 돌잔치 때 편지를 써서 읽어주시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하고 나니까 제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정작 행사에서 낭독할 때는 눈물이 나서 혼났죠.(웃음)” 손주에게 전하는 건강의 중요성, 손해가 주는 기쁨, 노력의 필요성, 가족에 대한 사랑, 사내가 가져야 할 의리 등을 담은 글은 병풍으로 만들어져 집 안을 장식하고 있다. 손주에 대한 사랑을 담은 ‘가보’가 된 셈이다. 손주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고픈 김 회장의 사랑이 담겨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승부수 ‘골든블랑’ 그는 현재 또 다른 혁신을 준비 중이다. 바로 정통 샴페인 ‘골든블랑’이 그것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업계는 빠르게 변화했다. 혼술과 홈술이 늘면서 위스키 판매량은 줄고 와인이 대세가 됐다. MZ세대의 입맛은 가볍고 부담 적은 술을 원했다. 드링크인터내셔널도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남들처럼 적당한 제품을 수입해 적당히 판매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정통 샴페인이다.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것만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행정구역처럼 아주 명확히 관리하죠. 그 외 지역에서 생산된 것은 크레망이라 부르는데, 크레망을 만들 수 있는 지역도 정해져 있습니다. 단순히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한국의 브랜드로 제조하고 싶었죠. 그래서 프랑스 볼레로 샴페인 하우스와 계약을 맺고, 프랑스 샴페인협회의 공식 라이선스를 얻어 골든블랑을 탄생시켰습니다.” 럭셔리 샴페인 골든블랑은 가장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을 의미한다. 번쩍이는 황금색 병은 김 회장만의 컬러 마케팅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브랜드 뮤즈로 선택했는데,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김 회장은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면 페가수스는 붉은색 적토마가 됩니다. 이때 함께 ‘자! 달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라며 웃었다. 골든블랑은 그가 시장에 내놓았던 많은 제품 중 그에게 가장 특별하다. 코로나19라는 업계의 ‘전쟁통’에 낳아 기른 자식인 셈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힘든 업계 상황보다 더 힘들 국민에게 골든블랑이 위로가 되기를 기대했다. “샴페인은 잘 알려진 것처럼 기쁠 때 마시는 술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분들이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어요. 하루빨리 대유행이 종식돼 함께 잔을 들고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골든블랑으로 말이죠.”
- 2021-12-14 08:34
-
-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하여, 가수 임지훈
-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가는 너를 지키고 있네/ 어느새 굵은 눈물 내려와 슬픈 내 마음 적셔주네/ 기억할 수 있는 너의 모든 것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너의 사랑 없인 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은데/ (…)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혼자 외로울 수밖엔 없어/(…)” 1985년 내가 겪었던 처절한 이별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당시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고 만든 노래를 임지훈에게 들려줬고, 이 노래가 그의 히트곡이 됐다. 이별을 잘하는 것은 어렵다. 어린 시절의 바보 같은 나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날카로운 이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별은 늘 난제(難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문세의 노래처럼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기도 한다.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1987년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당시의 청춘들은 이별의 말을 날카로운 비수로 비유한 노랫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사람들은 늘 수많은 이별의 슬픔과 상실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래나 이야기를 원한다. 그것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노래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하며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는 듯한 위로를 받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랑 혹은 머물고 싶은 순간들을 지키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한 상처를 앓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매듭이 필요한 이별 풀린 신발 끈을 묶듯 이별에도 매듭이 필요하다.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이창호 9단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든다”라고 했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헤어져야 할 사람과 관계를 잘 정리하고, 새로 맞이할 관계와 삶의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꼼꼼하게 매듭을 묶으면 적어도 끈 때문에 넘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 이별이라고 했나? 예기치 못한 이별일수록 아픔이 더 크다. 제대로 된 정리를 못 하고 남겨진 사람은 허탈하다.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혼란만 가중된다. ‘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었나?’, ‘그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 남는다. 결국 상대에 대한 분노 혹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뎌지거나 아예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해서는 나름의 의식이 필요하다. 후회 없는 이별이란 원만하고 균형 잡힌 마무리다. 감사함을 서로 전하고 받을 기회를 갖기 위해, 우리는 이별하기 전에 만나고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교환하고 배웅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치른다.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행복했던 순간을 서로의 일부로 각인시키는 마지막 과정을 치르는 것이다. 사진을 같이 찍어 남기고, 편지를 보내서 손에 쥐고 기억할 수 있는 소위 ‘기념품’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이별 방법이다. 만날 수 없다면 최소한 통화라도 해서 좋은 감정을 직접 전달해야 한다. 이별은 첫 시작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함께 나눴던 감정에 대해서 다시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종의 정서적 준비가 필요한 셈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해도 모자라겠지만 아낌없이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에 대한 명확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긍해야 더 좋은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별은 이별하지 못한 이별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별을 할 때도 이별의 의식이 필요하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후회하며 신년에는 달라질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잘했던 것들, 보람 있었거나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1년, 올해도 우리는 꽤 잘 살았다. 사랑의 썰물-임지훈 임지훈은 1980년대 6인조 포크 그룹 ‘김창완과 꾸러기들’ 출신의 포크가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 중 하나다. 이 노래는 내 작곡 데뷔곡이자 그의 솔로 데뷔곡이었다. 이 곡을 계기로 산울림의 김창완으로부터 가수 권유를 받아서 이듬해 동물원으로 데뷔했다. 참고로 김광석을 김창완에게 소개해준 이도 임지훈이다. 소설가 이외수가 이 앨범의 속지에 적은 글도 인상적이다. 그는 임지훈의 목소리를 “포유동물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절실한 그리움이 실린 서정시”라고도 했다. 김창완도 임지훈의 솔로 데뷔에 도움을 줬다. A면 타이틀곡 ‘기다리면 대답해주시겠어요’는 그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 2021-12-08 10:22
-
- KTX 강릉선 타고 가을 여행, 가 볼 만한 곳은?
-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 2021-11-12 08:39
-
- 이퇴계의 생활 습관
- 습여성성(習與性成)이라는 말이 있다. 곧 습관이 천성을 이룬다는 말이다. 습관에는 마음의 습관과 몸의 습관이 있다. 두 습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큰 스승 퇴계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 고결한 성품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이 나온다.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익힌다는 습(習)의 뜻은 몸으로 실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퇴계는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사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유학의 큰 별이 되었다. 그의 생애와 생활 습관을 살펴봄으로써 퇴계의 인품이 습관을 통해 어떻게 가꾸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죽는 순간까지 타인을 향한 겸양과 섬김의 자세,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퇴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두 학자가 있는데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은 퇴계에 대해 이르기를 “공정한 인물평, 흐트러지지 않는 수양 공부, 겸양의 태도, 연구와 진리 추구, 순수하고 지극한 정성, 바르고 곧고 엄격하고 과단성 있는 점, 이러한 것들이 퇴계를 사숙하고 흠모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퇴계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부친은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나이로 죽고 모친 박 씨는 남은 7남매를 키우느라 농사일과 양잠 등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훈계할 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를 경서 공부로 이끌었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의 언행록에 그의 습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으셨다.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뵐 수 없었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책 읽는 모습을 본 형이 옷을 벗고 시원하게 앉아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있어도 천 사람, 만 사람의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의 독서법은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이었으며, 공부의 목적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공부는 ‘중용’에 나오듯 철저하고 독실하게 했다. 첫째 넓게 공부하고(博學), 둘째 자세히 묻고(審問), 셋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넷째 바르게 분별하고(明辯), 다섯째 돈독하게 행동하는(篤行)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는 항상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자세, 곧 경건함 가운데서 사물의 이치를 찾으려고 했다. 퇴계가 평소에 좌우명으로 삼고 지키려 한 내용이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전해지는데, 먼저 간사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思無邪),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 홀로 있을 때도 늘 삼가는 것(愼其獨),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것(毋不敬) 네 가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퇴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닦은 후 이를 근거로 이웃을 편안하게 하고자 했다. 학문을 통해 퇴계가 추구한 것은 경쟁에서 승리도 아니요 지식으로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닌 오직 사람다운 삶, 향기를 지닌 난초와 같이 인격을 갖춘 모습이었다. 사람에게 부여된 성(性)은 인의예지다. 유학에서 공부란 바로 감정의 발현이 치우치지 않도록 가다듬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중용을 유지하며 앎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군자이고 성인이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성리학을 연구한 성리학자다. 주자는 성리학에다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태극과 음양의 이론을 구체화해서 성리학의 우주론, 이기론을 완성한다. 태극은 이고 음양과 오행은 기에 속한다.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만물이 태생한다는 이론이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론을 연구하여 이를 상위 개념인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로 규정하고, 기를 하부 개념으로 분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완성했다. 퇴계는 이기론에 근거한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의 인의예지와 칠정의 발현을 깊이 연구하고 윤리와 도덕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꿈꾸었다. 퇴계의 부부관은 서로 공경하되 친밀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를 손님처럼 대하는(相敬如賓)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와 존경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퇴계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 허 씨는 다섯 살과 한 달 된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둘째 부인 권 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부인을 정성껏 보살피고 공경했다. 순천에 사는 제자 이함형이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혼인하고도 동침하지 않았는데, 순천 집에 가는 제자를 불러 아침 식사를 대접한 후 부부의 도리에 관한 서간을 써주어 부부 금슬을 좋게 하고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지내게 했다고 한다. 퇴계는 편지 3154통을 남겼는데 거의가 60세 이후의 것으로 평균 3일에 두 통의 편지를 쓴 것이다. 손자 이안도의 혼인 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라며 부부의 바른 도리를 전하고 있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배우고 깨달은 경서의 내용을 좌우명 삼아 덕행일치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나라 유학의 큰 스승으로 우뚝 선 퇴계 선생의 인품의 향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 2021-09-05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