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백꽃 뚝뚝 떨어지는 겨울 제주 숲, 곶자왈 동백동산
- 선흘리 동백동산은 습지를 품었다. 비가 내려도 고이지 않고 그대로 땅속에 스며든 지하수 함량으로 사계절 보온·보습 효과가 높다. 제주에선 이런 독특한 숲 또는 지형을 곶자왈이라고 한다. 수풀을 의미하는 ‘곶’,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서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 ‘덤불’에 해당하는 ‘자왈’, 곶자왈이다. 생태계의 보고인 곶자왈 동백동산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 1리에 있다. 겨울 동백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름부터 동백동산인 선흘마을에서는 동백꽃 보기가 쉽지 않다. 이곳이 보호림으로 지정되면서 모든 수목이 고스란히 쑥쑥 성장한다. 그에 비해 성장이 더딘 동백나무는 큰 나무들 틈에 가려서 햇빛을 보기 어려워 꽃 피울 여력이 없기 때문. 제주의 여느 동백꽃 군락지처럼 흐드러진 꽃동산은 아니지만 이곳 동백동산만의 태곳적 매력과 그윽한 은은함을 듬뿍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제주 남쪽보다 꽃피는 시기가 늦어서 3~4월에도 드문드문 동백꽃을 볼 수 있다. 선흘리 마을길을 앞에 두고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널찍한 방문자 센터가 친절하다. 안내 내용을 훑어보면서 동백동산의 숲과 습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챙기고 시작할 수 있다. 약 1만 년 전 형성된 용암대지 위에 뿌리내린 숲, 곶자왈.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길에 낙엽이 수북수북하다. 덩굴식물이 뒤엉키고 촘촘한 나무들로 겨울 숲은 여전히 푸르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독특한 식생의 숲이다. 숲길 군데군데 다양한 형태의 숯막터가 남아 마을 주민들의 살아온 생활상이 엿보인다. 밀림과도 같은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적막함에 슬그머니 두렵기까지 하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암석 사이로 아름드리나무가 굵직한 뿌리를 드러냈다. 얽히고설키어 서로 손을 잡고 팔짱을 낀 듯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연의 숲은 이렇게 방법을 찾아간다. 맑은 새소리까지 들린다. 숲의 운치가 절정이다. 태곳적 제주의 풍경일까. 알 수 없는 신령스러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원시림 속을 헤매는 듯하다. 제대로 된 제주의 곶자왈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이곳은 제주 역사의 아픈 과거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제주 근대사의 뼈아픈 4.3사건 광풍이 몰아쳤던 도틀굴이 숲길에 있다. 당시 지역 주민들의 은신처였던 곳인데 발각되어 억울하게 현장에서 몰살되거나 모진 고문을 당한 피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주 동백은 4월이 더 붉다더라’라고도 말했다. 겨울이지만 사계절 피워내는 상록수림으로 숲은 울창하고 아늑하다. 걷다 보면 중간쯤에서 만나는 먼물깍.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의 ‘먼물’과 끄트머리라는 뜻의 ‘깍’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011년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는 먼물깍 습지다. 생활용수나 가축들이 먹었던 물로, 용암대지의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에 빗물이 채워져 만들어졌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먼물깍은 희귀 생물들의 서식지로도 생태적 가치가 크다. 동백동산 습지는 먼물깍을 중심으로 0.59㎢ 지역이 2010년에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원시의 숨결 속에 비밀스럽게 자리 잡은 듯 먼물깍 주변은 온통 고요하다. 동백동산 숲길은 총 5.1km. 걷기에 따라 1시간 30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숲길이다. 동백동산의 나무는 그동안 이 터를 지켜온 선흘리 주민들의 집을 짓거나 생활 도구가 되어왔다. 습지에서 먹을 물을 긷고 일상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던 생명의 못(池)이다. 이제는 이 모든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곳에 가면 마을 공동체의 따뜻한 자연 지킴 모습을 보며 삼촌 해설사의 진솔한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흔히들 제주 하면 섬을 둘러싼 바다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제주 본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제주 땅에 자리 잡은 다양한 생태의 숲들이다. 제주의 숲은 이 터를 지켜온 현지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자부심이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겐 치유라는 위로의 선물이 되어주는 곶자왈 숲이다. 사계절 울창한 숲 동백동산이 뿜어내는 청량한 생명력 또한 그렇다. 동백꽃 뚝뚝 떨어지는 겨울 동백숲으로 제주의 겨울 여행이라면 호사스러운 동백꽃 구경을 하고 볼 일이다. 제주 서귀포 위미리에 가면 동백꽃 명소가 몇 군데 있다. 위미리는 제주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동백꽃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위미리 마을의 돌담길을 걷다 보면 머리 위로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인 듯 레드카펫을 이룬 동백꽃길도 쉽게 볼 수 있는 동네다. 제주에선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붉은 동백을 푸지게 볼 수 있다. SNS에서 제주 동백이라는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여러 군데의 동백 군락지가 나온다. 그중 동백수목원은 붉은 애기동백이 솜사탕처럼 타원형으로 붉은 꽃을 피운 모습이 아름다워 겨울이면 포토 스폿으로도 인기 있다. 남원읍의 위미리 동백군락지는 백여 년 전만 해도 황무지 돌밭이었다. 열일곱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 온 고 현맹춘 할머니가 제주의 모진 해풍을 막아내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으면서 현재의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만들어냈다. 제주 고유의 토종 동백나무 숲과는 달리 부근의 동백수목원은 할머니의 증손자가 만들어낸 숲이다. 4대째 이어온 동백 사랑이다. 500여 그루의 애기동백을 심어 조성한 것으로 또 다른 제주 동백의 명소가 되고 있다. 애기동백과 토종 동백의 차이를 본다면, 토종 동백은 1월 엄동설한에 피어나 3월까지 피고 지고를 거듭하는 붉은 동백이다. 반면 애기동백은 11월부터 피우기 시작하는데 꽃 색감이 짙은 분홍빛이다. 뿐만 아니라 꽃 한 송이가 비장하게 통째로 툭 떨어지는 토종 동백에 비해 애기동백은 꽃잎을 분분히 흩날리며 떨어진다. 애기동백의 색감은 유난히 핑크빛이다. 러블리한 핑크빛 동백숲에서 웨딩 촬영을 하거나 연인들의 인생샷을 담기 위한 포즈를 곳곳에서 본다. 봄날처럼 온화한 기후 속에 행복 넘치는 공간이다. 판타지 동화 속에 나올 듯한 미로의 숲처럼 빽빽한 애기동백 숲을 누비다가 수목원 2층 전망대에 오르면 건너편에 펼쳐진 제주의 시원한 바다가 이국적이다. 붉은 애기동백이 올망졸망 피어 있는 동백숲. 꽃망울을 터뜨리는 11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지역에 따라 피고 지고를 달리하는 모습을 초봄까지 볼 수 있다. 겨우내 피어 있어 지긋하게 만날 수 있으니 제주의 겨울 여행 중 새하얀 눈 속에서 선홍의 동백꽃을 찾아가 봄 직하다. 이름부터 ‘겨울 동’(冬)에 ‘나무 이름 백’(柏)이다. 허나 꽃이 이미 속절없이 떨어졌으면 어떠랴. 동백꽃은 역시 낙화한 모습 아니던가. 풍성하게 만개했을 때의 멋과는 달리 선혈 낭자하게 뚝뚝 떨어져 있는 모습도 겨울 동백의 풍경이다. 제주 동백동산 & 제주 동백수목원 제주 동백동산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 12 •문의처 : 064-784-9445 •이용 시간 : 09:00~18:00 제주 동백수목원 •주소 :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929(주차장 931-1) •문의처 : 064-764-4473 위미동백나무군락(기념물 제39호) : 위미리 904-1 11월 이후 겨울 시즌 동안만 영업. 유선 확인 필요
- 2022-02-25 08:23
-
- 묵신(墨神)이 머물다 간 자리
-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로 꼽았다. 그 여파는 컸다.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런데 진도를 젖혀두고 남도 문화의 끌텅과 태깔을 논하는 건 좀 어폐가 있다. 진도야말로 노른자다. 시(詩)·서(書)·화(畵)·창(唱)·무속의 곡간이기 때문이다. 2013년 정부에 의해 전국 최초의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돌올하고 뜯어보면 찬연한 문화지구 진도에서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빼어나다. 운림산방은 전통회화의 한 본산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창작 산실이며, 5대에 걸친 그의 직계 화맥(畵脈)이 박힌 곳이다. 진도의 진산 점찰산 아래 둥지를 튼 품새는 또 어떻고? 널찍한 터는 호방한 맛을 준다.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안온하다. 산의 푸른 치맛자락을 거머쥐어 수려하고 청신하다. 겨울이 좋다고 혹한에도 얼싸절싸 피어나는 동백꽃 무리는 꾹 눌러 점점이 칠한 붉은 물감처럼 흥건해 기발하다. 원래 이곳엔 소치의 화실과 침식을 위한 초가 하나, 그리고 소치가 만든 연못이 있을 뿐이었다. 단출해서 오히려 그윽했으리라. 꾸밈없이 적막해 한갓졌으리라. 이후 현대에 이르러 보탠 구조물이 많아졌다. 그래도 본색이 어디 가겠나. 진도의 어떤 이들은 운림산방 일원을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른다. 이곳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맞먹을 실경산수를 연상하는 거다. 소치가 뉘신가? 이름을 좀 날린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소치는 묵신(墨神)이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걸 보면, 그림으로 달통한 게 많은 기재(奇才)였다.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을 주름잡았던 걸사(傑士)다. 헌종의 호감을 사 어연(御筵)에 먹을 풀어놓는 영예를 누리고, 함께 서화를 논하기도 했다. 임금을 패트론으로 삼았던 셈이다. 소치의 집안은 변변치 않았다. 허균의 후손으로 한때는 양반 가문이었지만 여러 대에 걸쳐 거듭된 영락으로 어디다 명함을 내밀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소치에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자청해 그리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낮잠과 끽다(喫茶)로 충분해 그렇다고 일취월장이 절로 가능했으랴. 화가의 창의적 상상력은 기초가 부실한 채로는 터져 나올 리 없다. 그리고 기초라는 건 확장과 성숙에 대한 본능이 추동한 탐구심으로 다져진다. 소치에겐 이 탐구 정신이 내장돼 있었다. 과연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궁구가 깊었던 청년기에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 갔다가 본 공재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통해 소치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는 기록했다. ‘비로소 나는 그림 그리기에 법(法)이 있음을 알았다.’ 복 가운데 최고는 인연 복이라 한다. 난데없이 떠올랐다 간데없이 사라진 그림쟁이들이 숱했지만, 소치는 인연 복이 많아 비상을 거듭했다. 해남 두륜산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맺은 선연은 돛을 밀어주는 순풍이었다. 초의는 구도(求道)라는 이름의 양탄자를 타고 세사의 모든 영역을 비행한 인물이다. 일지암은 그 비범한 이착륙의 베이스캠프였다. 28세 때 초의의 문하에 들어간 소치는 이 작은 암자에 머물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웠다. 소치는 자서(自敍)에 이렇게 썼다. ‘초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어찌 고고하고 담백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소치의 생애에 녹아든 개결한 풍정은 초의에게서 얻은 지성과 화엄정신의 발현이었던 셈이다. 초의가 소치의 정신적 아비였다면, 추사 김정희는 예술적 푯대였다. 소치에게 추사를 소개한 건 초의였으니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천재는 준재를 척 알아보는 법. 소치의 작품을 본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다”고 탄복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찬사만 능사로 삼을 추사가 아니다. 소치여! 그대가 서격(書格)을 터득했는가? 신운(神韻)을 익혀 구사하는가? 그쯤의 깐깐한 일갈로 갈 길 먼 예술 항로를 통찰하게 했다. 이른바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으로 예술혼을 돋우길 주문했다. 추사의 지향은 대상의 형상화보다 정신세계를 끄집어낼 수 있는 관조의 깊이를 중시하는 데 있었다. 소치는 추사의 이 고고한 예술철학에 감명을 받아 길을 교정하거나 노정했을 테다. 그러니 스승을 선망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는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를 번번이 찾아갔다. 버들잎처럼 작은 배를 타고 사나운 바닷길을 건너가 배움을 청했다. 소치가 제주에서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은 추사의 지엄한 풍모를 오마주한 초상화다. 이제 소치의 그림을 볼까. 운림산방에는 소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소치기념관이 있다. 그저 풍경을 즐기려 운림산방을 찾는 관광객이 즐비하지만 알짜배기는 소치의 그림들에 있다. 소치기념관은 한옥 건물 하나로 꾸린 미술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념관치고는 자그마하고 치레 없이 조촐하다 못해 밋밋하다. 소치의 담박한 성정을 고려한 구조라 봐야 할까? 전시실엔 산수화, 병풍 그림, 묵죽도, 모란, 괴석 등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걸렸다. 물기를 배제하기 위해 붓에 먹을 살짝 찍어 바르는 붓질로, 마치 긁힌 자국 같은 필선을 연출하는 갈필(渴筆)에 능했던 소치의 개성을 직감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소치 허련은 ‘허모란’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모란 그림을 즐겨 그려서다. 전시실에서도 모란이 흔하게 눈에 띈다. 걸작이란 평판을 얻은 작품은 운림산방의 전경을 부채에 그린 ‘운림각도’(영인본. 원본은 서울대 소장)다. 소치 만년의 작품이다. 근골이 거칠게 드러난 점찰산과 억실억실한 노송들, 푸른 연못과 소박한 산방 두 채가 어울려 써늘한 정취를 자아낸다. 눈길을 붙잡는 건 지팡이를 짚고 연못가를 거니는 노인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산야의 은자로 사는 이의 고독한 심회를 풀어냈을까? 늙어서는 산천이 스승이다. 말 없는 산야에서 음양의 조화를 읽는다. 여백에 쓴 화제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나의 집에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린다. 소로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솔 그늘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솔가지 모아 차를 달여 마신다.’ 산림에 사는 이의 영일(迎日)이 완연하다. 인간사에 대한 관심일랑 안으로 거둬들였나? 낙화와 낮잠과 끽다(喫茶)면 그만이었다. 숫제 선풍(仙風)이 비친다. 그래도 긴가민가 늘 궁금한 건 그림이었을 테다. 말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후손에게 남긴 유지에도 그림 소식이 난무해 두고두고 새길 만하다.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마라! 먹을 항상 입에 물고 다녀라!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서린 뜻이 여러 겹이다. 그림을 밥 먹듯이 그리되 통 크게 밀어붙이라는 독촉이다. 웅장한 메시지다. 소치 허련이 남긴 저작과 화맥의 아우라 소치실록 자서전 성격의 문집으로 소치의 생애와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정밀한 자료다. 소치 연구의 핵심 텍스트이기도. 1867년에 쓴 ‘몽연록’(夢緣錄)과 1879년에 집필한 ‘속연록’(續緣錄)을 합본해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 이름 붙였다. ‘몽연록’은 운림산방에서 완성했다. 소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황량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은 물론 모든 것을 버렸다.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는데 이걸 엮어 책을 만들었다.’ 문답식의 다소 특이한 유형의 자서전을 쓴 정황을 밝히고 있다. 대화체 문집이라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조선의 화가 중 소치 외에 자신의 화필 생애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긴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소치실록’이 현대의 대중에게 알려진 건 1974년 한 매체를 통해 한글 번역 연재물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연하게도 소치 연구자와 애호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소치는 스스로 밝혔듯 ‘조실부모해 의지할 곳이 없었고 견문도 넓히지 못한 채로’ 성장기를 통과했다. 이 불우한 과거를 보상받고 싶었을까? 남종화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그는 당대 명망가들과 적극적인 교유를 했는데, 사교 일화와 의미심장한 예술적 교감의 내용을 낱낱이 책에 담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군주 헌종, 고명한 선사 초의, 광활한 예술 세계를 구현한 추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술회한 대목들이 특히 재미있다. 소치의 생애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진면목과 삶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5대로 이어진 소치 화맥 진도에는 이런 얘기가 돌아다닌다.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 몽둥이만 들어도 걸작이 나온다.” 소치 가문에서 화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생긴 우스갯소리다. 소치의 화맥(畵脈)은 직계 후손 5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화업의 행진이다. 소치의 화업 2대를 전수한 이는 넷째 아들 미산 허형이다. 소치는 원래 큰아들 허은의 재능을 높이 쳤다. 그러나 허은이 요절하는 바람에 허형이 맥을 이었다. 허형이 그린 묵모란과 묵매는 부친을 능가한다는 평판이 있다. 3대를 이은 건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이다. 허건은 갈필로 그린 필선의 생동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동상 걸린 다리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장애를 오히려 창작의 화톳불로 삼는 강골의 근성을 과시했다. 소치의 운림산방을 복원하기도 했다. 허림은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로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4대 맥은 임전 허문에게 이어졌다. 그는 수묵의 농담(濃淡)을 활용한 독창적 화법인 ‘운무산수화’에 능하다. 임전 이후 현재의 5대째 화맥은 허건의 손자 허재와 허전, 허건의 조카 허청규와 허은에게 이어지고 있다. 물보다 진한 피가 5대째 그림으로 이어져 가문을 통째 수묵의 바다로 밀어 넣었다. 그 바다의 아우라가 휘황하다.
- 2022-02-23 08:33
-
- 전 재산 몽땅 쏟아붓는 건 미련한 귀농이다
- 귀농 생활을 근사한 쪽으로 끌어가기 쉽지 않다. 물이야 고수라서 거침없이 순행하지만, 그래 물을 스승으로 삼아보지만, 정작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르기 십상인 게 귀농이다.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고, 예상보다 더 까다롭다. 기대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계획대로 수익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폭풍 속의 질주다. 광주광역시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여장부’로 살았던 박선주(50, ‘들꽃다물농장’ 대표)의 귀농 경력은 올해로 6년 차. 그는 비바람 속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가 믿은 건 자신의 야무진 근성 하나였으며, 그걸 아낌없이 꺼내 썼던 것 같다. 덕분에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산을 무척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산에서 살기를 꿈꾼다. 박선주가 그랬다. 산 아니고 다른 데서 살까 보냐! 동갑내기 남편 고광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촌 귀농을 염두에 두고 살던 중에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부부의 건강에 상당히 심각한 이상이 생겼던 거다. 옳다구나! 이제 지리산으로 가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귀농에 시동을 걸었고, 지체 없이 일을 서둘러 드디어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산자락에 살게 됐다. “지리산 근처에 경치 좋은 터를 잡고 살며 부부의 건강을 되살리고 싶었다. 지리산을 수시로 오르내리고, 산나물들을 가꿔 먹고, 정직한 노동으로 땀 흘리고, 그러면 까짓것 뭐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귀농을 하고 보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 펑펑 눈물을 쏟은 날이 많았다. 어라, 이게 왜 이런 거야? 이러자고 내가 귀농했나?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귀농을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리산은 자주 올랐고?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이지만 일에 치어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2019년 내 생일날 천왕봉을 한 번 올랐을 뿐이니까.(웃음)” 박선주는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농장으로 가꾸었다. 2만 6000평에 달하는 너른 규모다. 허리 휘어질 신역이 실로 자심할 걸 짐작할 만하다. 건강은 좋아졌나? 때로 위중한 사람도 살리는 게 산인데. “좋아지는 것 같더니만 더 나빠지더라고.(웃음) 남편은 허리디스크에 시달렸고,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게 다 스트레스 탓인 것 같다. 농사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몸이 아프더라도 작물이 성장하는 걸 바라볼 때면 행복하니까. 문제는 역시 스트레스의 강도다. 도시에서보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욕심을 줄이면 스트레스 관리가 좀 쉬워진다고 한다. 과중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과욕? 외부의 횡포? “스트레스 유발인자가 한둘이 아니다. 난 욕심 많은 여자는 아니다. 기질적으로 어지간한 상처엔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민과 갈등하면서 오는 상처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더라. 예를 하나 들어볼까? 귀농 초기에 지방신문 기자의 고발로 곤욕을 치렀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훼손했다는 죄목이었다. 이 가당찮은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상처가 컸다. 무섭기도 했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지역 일각의 풍토를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지역에 귀농인이 등장하면 주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를 바라보듯 주시하기 마련이다. 이 무대에서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일단 자세를 낮추는 게 현명하다고들 한다.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돌아오는 대가는 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귀농 초기부터 친목과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갖가지 단체에서 열심히 뛰었다. 리더로도 활동했다. 지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에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탱크처럼 과감하게 밀고 나가다 박선주 부부는 광주에서 그들의 전공인 기계설비업을 지속해 기반을 잡았다. 남편에 이어 그 역시 ‘기계가공 기능장’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여성 3호’ 기능장을 받았다. 아마도 뭐 하나에 꽂히면 들입다 파고들어 끝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일 게다. 두둑한 배짱을 장기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산을 정리해 만든 13억 원쯤의 자금을 임야 구입과 토목공사에 썼다. 그리고 ‘탱크처럼 매사 과감하게’ 밀고 나갔단다. 그 저돌적인 행진으로 ‘성공한 강소농’이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원주민과의 관계에선 한숨이 폭폭 터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지경으로 겪은 애환이 많았다. 세태란 원래 어딜 가나 사특한 것. 저기는 안 그런데 여기만 그럴 리야 있겠나? 저기는 낙원이고 여기는 지옥일 리 있겠나? 그저 내가 처신하기 나름이거니, 그리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박선주가 귀농으로 경험한 세태는 얄궂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제2의 삶을 위해 도시에서 찌들었던 마음을 미리 내려놓고 온다. 대부분 순수한 마음으로 농촌의 정과 인심에 녹아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지역 현실은 차가웠다. 거의 모든 게 토박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더라.” 토박이 그룹이 먹이사슬의 상위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은연중에 발동하는 텃세. 이건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 흔히 고착된 폐습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한답시고 단체에 슬쩍 발을 담근 채 영악하게 혜택만 찾아 누린다. 이기적이며 순수하지 않다. 귀농인에겐 좋은 정보나 마땅한 권한조차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원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결론이 그렇게 나더라고.”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토박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이들도 많으니까. 그들의 우정에 힘을 얻으니까. 그러나 별수 없다. 발을 빼는 수밖에. 이젠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건 귀농하려는 이들이 참고하길 바라서다. 성급하게 귀농지를 정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 거다. 지역의 인심과 풍토부터 미리 파악하는 게 그 무엇보다 앞서 중요하다.” 부부가 부업에 나서기도 겨울바람이 맵차다.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 잠들어 고즈넉한 나무들. 외진 산기슭의 외딴 거처에 감도는 적막감. 농장의 겨울 풍경은 잠잠해 고독해 보인다. 그러나 수려한 산간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낸 길에선 과도한 인위가 느껴지지만 생산의 기지로 변환한 노고는 더 큰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 산에 사는 텃새들은 알까? 박선주 부부가 야산 개간에 과연 몇 톤 분량의 비지땀을 쏟았는지. 산에 심은 주 작목은 호두나무다. 어린 것들을 심었으니 여러 해가 더 흘러야 수확을 볼 수 있다. 박선주는 당장 생산이 가능한 작목들도 재배했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따위를.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용케도 잘 팔려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촉매가 됐다. 현재까지 각별히 공을 들이는 건 비타민 C 함량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블랙커런트. 즙, 잼, 곤약젤리 등으로 가공해 유통한다. 이 농장의 모든 작물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된다. 해섭(HACCP,식품위생안전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경험을 살리고 식견을 돋워 일궈낸 성과다. 농업 공부도 그 기반이 됐다. “귀농 이후 건축법이나 산지관리법 등을 배워 숙지했다. 전국 곳곳의 수많은 농업 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이론과 기술도 습득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무상 교육의 경우 대형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결 실속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익 상황은 어떤가? “2018년 총매출은 2400만 원이었다. 2019년엔 6800만 원, 2020년엔 9800만 원이었고, 2021년엔 1억 원을 넘어섰다. 순수익은 매출의 60% 정도다. 연도별 증가율로 보면 고속 성장이다. 그러나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한참 미달한 상태다. 워낙 많은 자금을 초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지속적인 재투자가 필연이라 버겁다. 그나마 좀 안도하는 건, 처음엔 지니고 온 자금을 털어 투자했지만 지금은 소액이나마 돈을 벌어 투입한다는 점이다.” 귀농인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농사로 먹고살기 쉽지 않다는 거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먹고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물정 모르고 덤볐다가는 파탄 나기 딱 좋은 게 농사다. 문제는 판로다. 우리는 공격적인 SNS 마케팅을 구사해 그나마 수입을 거둔다. 그러나 농사일에 정신없이 바빠 SNS에 충실을 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열악해 때로 눈물 나는 것이지.(웃음)” 어떤 방법으로 현실을 타개하지? 무슨 수가 있기는 있나? 귀농의 명암이야 이미 또렷이 인식했을 텐데. “멀리 보고 긴 호흡을 하며 달려간다. 미래적 비전은 사회적 농업이나 치유 농업에 두고 있다. 당장 급박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농외소득을 벌어들인다. 우리 부부가 농사만 짓는 건 아니라는 얘기지.” 농사 외에 어떤 일을 하지? “내가 알바를 뛰곤 했다. 광주시에 가서 전공인 기계설비 분야의 수업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식으로. 남편은 더 많은 일을 한다. 오늘도 그는 인근 양계장에서 병아리 입출 일을 도와주고 일당을 받아왔다. 이런 식의 부업으로 부부가 매월 벌어들이는 수입이 200만 원 정도다. 농업소득에만 의존하는 귀농은 낡은 방식이다.” 귀농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각도로 모색하며 멀리 넓게 보라! 박선주가 털어놓는 언설의 행간에 비친 메시지가 그렇다. 이런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귀농을 한다면? 답은 이렇다. “돈 들이지 않고 귀농 생활을 시작하겠다. 300평 정도의 농토를 임대해 농막에 살며 농사 경험부터 쌓을 것이다. 농외소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필수고. 자금을 왕창 쏟아붓는 귀농은 미련한 귀농이다.” 박선주 씨가 주는 귀농 Tip •승률 높은 농업을 원하면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자. 판로 확보가 용이하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유리하다. •대규모 농업도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 지역 특산물을 규모화할 경우엔 승률이 더 높아진다. •농촌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은 깨끗이 버려라. •농업정책자금을 함부로 받지 말자. 자립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지원금 운용은 빚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농사만 믿지 말고 농외소득 획득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하자. 찾으면 일은 얼마든지 있다.
- 2022-02-18 08:35
-
- "봄을 기다리며" 2월 문화 소식
- ●Exhibition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예술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출품작은 174점으로 박수근 전시 사상 최대 규모다.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됐다. 유화 7점, 삽화 원화 12점도 최초로 공개된다. 특히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박수근 작품 33점 중 31점이 출품됐는데, 그중 ‘세 여인’, ‘마을풍경’, ‘산’ 등 3점은 최초 공개작이다. 미국 미술관에 소장됐던 ‘노인들의 대화’(1962년), ‘귀로’(1964년)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박수근의 은사인 오득영 유족이 소장해온 ‘초가’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 ‘웅크린 개’, ‘노상의 소녀’ 등도 첫 공개 작품이다. 2007년 5월 경매에서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된 이후 8년간 한국 미술 최고가 자리를 지킨 ‘빨래터’도 만날 수 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데뷔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서구의 추상미술이 급격히 유입되어 화단을 풍미했지만, 박수근은 시종일관 서민의 일상생활을 단순한 구도와 거칠거칠한 질감으로 표현한 그림을 고수했다. ◇가야인, 바다에 살다 일정 2월 6일까지 장소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가야 유물 57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1부 ‘남해안의 자연환경’, 2부 ‘관문: 타고난 지리적 위치’, 3부 ‘교역, 가야 제일의 생업’으로 구성됐다. 관람객은 각종 유물을 통해 바다에 깃든 가야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은 특히 바다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가야인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했다. 또 옛 김해만의 자연경관 복원에 대한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남해안 일대에 축적된 고고학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해상왕국’으로도 불리는 가야 문화의 특성을 관람객이 쉽고 재밌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Book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동양북스) 저자 에디 제이쿠는 1920년생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그의 인생을 집약해놓은 회고록으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에디 제이쿠는 19세이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약 7년 동안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폴란드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겼다. 부모를 가스실에서 잃고, 나치 간수가 되어 수용소를 관리 감독하는 대학 동기도 만나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며 민가에 도움을 청하다 다리에 총을 맞기도 했다. 특히 수용소 안에서 친구와 동료가 날마다 죽어나가고, 부모를 학살한 자들을 위해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면서 날마다 모멸감을 느꼈던 하루하루가 책 안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참혹한 일을 겪었지만 에디 제이쿠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운이 오더라도 자신의 삶을 사랑해보세요”라고 메시지를 전한다. ‘오늘 집에 가서 당신의 어머니를 꼭 안아주세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등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얘기한다. 이 책은 그가 100세가 되던 해인 2020년에 출간된 후 호주 아마존 1위에 올랐고 미국, 영국 등에서도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면서 전 세계 37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2021 올해의 자서전상, 2021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유럽에서 대한민국만세(송일국·상상출판) 배우 송일국이 유럽에서 삼둥이 아들 대한·민국·만세를 직접 찍고 글로 쓴 유럽 여행 화보 에세이다. 1년간 생활한 프랑스부터 스위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아이슬란드까지 총 8개 나라의 여행기가 실렸다. ◇오십부터는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다(오츠카 히사시·한스미디어) “50대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고민한다.” 저자는 수십 년간 50대 1만 명의 이야기를 듣고 ‘후회하지 않고 50대를 사는 법’을 정리했다. 50대는 ‘인생의 디톡스 기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일, 업적, 인간관계를 결산하고 앞으로의 50년을 계획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스필버그의 말(스티븐 스필버그·마음산책)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74년부터 2021년까지 48년 동안 그의 인터뷰 스물한 편을 소개하는 책에는 ‘죠스’, ‘쉰들러 리스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유명 영화의 제작기도 포함돼 있다. 또한 그동안 공개된 적 없는 그의 개인적 삶까지 담았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프렌치 오리지널 일정 2월 25일 ~ 3월 13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질 마으 출연 안젤로 델 베키오, 막시밀리엉 필립, 엘하이다 다니, 젬므 보노 등 프랑스 3대 뮤지컬 중 하나인 ‘노트르담 드 파리’가 대구, 부산 공연에 이어 서울 앙코르 공연을 펼친다. 지난해 세종문회회관 대극장에서 유료 점유율 99%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노트르담의 꼽추’가 원작이다. 추한 외모의 꼽추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대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의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그 안에서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시기의 사회상과 이교도들의 갈등, 부당한 형벌제도, 인간의 욕망, 삶과 죽음까지 다각도로 담아내며 시대를 뛰어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특히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뤄진 ‘성스루’(Sung-through) 작품의 백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뮤지컬로, 낭만적인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안무, 30톤의 거대한 무대 세트가 감동을 전해준다.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전 세계 23개국, 1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난 세기의 역작이다. ◇프리다 일정 3월 1일 ~ 5월 29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추정화 출연최정원, 김소향, 전수미, 리사, 임정희, 정영아 등 ‘프리다’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선보이는 첫 중소극장 작품이다. 제14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멕시코의 위대한 여성 화가이자 혁명가인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액자 형식으로 그린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았지만, 자신의 지난한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에게 세리머니 같은 최고의 쇼를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추정화 극작가는 프리다의 마지막 생애를 쇼라는 독특한 콘셉트와 형식으로 풀어낸다. 또한 주인공 프리다 칼로 역에 배우 최정원, 김소향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높였다. ◇B클래스 일정 2월 25일 ~ 5월 15일 장소 브릭스씨어터 연출 오인하 출연 최정헌, 이지현, 지호림, 김찬종, 노태현, 류찬열, 한선천 등 2017년 초연 이후 매 시즌 관객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연극 ‘B클래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연극의 배경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만 갈 수 있는 예술인 양성학원 ‘사립 봉선예술학원’이다. B클래스에 속한 학생 네 명이 실력이 아닌 능력과 조건만으로 평가받는 봉선예술학원의 기준을 넘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합동 졸업 공연’을 준비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는다. 청춘의 자화상이 큰 울림을 안겨줄 예정이다.
- 2022-02-10 08:33
-
- 생명의 기운 스미는 신비로운… 제주 서귀포 치유의 숲
- 모든 게 멈춘 듯하지만 바람결에 흐르는 숲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과 뚝 떨어진 듯한 고요함은 적적하기까지 하다. 서귀포 치유의 숲에 깃든 한낮의 햇살은 방문객에게 여유로움까지 준다.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며 숲속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 온전히 자연에 맡기는 시간으로 이보다 편안한 곳이 있을지. 치유 인자가 가득한 편백 숲길과 삼나무 숲속을 내어주던 서귀포 치유의 숲이다. 올레길이나 둘레길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사람들은 나선다. 그렇다고 보통 5시간 이상 마냥 걷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서귀포 치유의 숲은 무리하지 않고 꼬닥꼬닥(천천히를 뜻하는 제주어) 걸으며 숲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두 시간 남짓이면 편백과 삼나무의 피톤치드를 받으며 숲의 기운을 온몸 가득 담을 수 있다. 숲길은 총 11km 길이로 10개의 테마 길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약 1.9km의 ‘가멍오멍숲길’에서 나머지 9개의 길이 뻗어나간다. 그 길에 쉼터인 쉼팡이 군데군데 있어서 편백 의자에서 쉴 수도 있다. 피톤치드와 테르핀, 음이온 등이 발산되는 환경에 쉬면서 치유의 힘을 얻게 된다. 또한 산림치유지도사의 치유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예약만 하면 풍부한 숲 이야기와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예약은 입장료만 내고 자유롭게 숲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느영나영 힐링숲 탐방 예약과, 해설사와 동행하는 세 시간 정도의 궤영숯굴보멍 코스 예약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 바람이 불고 있어서 숲길로 가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숲속에 야자매트가 쭉 깔려 있어서 걷기 편할 겁니다. 천천히 15분쯤 걸으면 쉼팡이 나옵니다. 편백나무 숲인데 그쯤에서 쉬어가는 게 좋아요.” 산림치유지도사의 말이다. 큰길 옆의 숲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가멍숲길이다. 중간쯤 가면 가베또롱숲길, 가멍오멍숲길이 나타난다. 요즘 길이 난 곳이라면 걷기 시합이라도 하는 양 그저 열심히 걷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걷다가 가만히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간간이 쉬어가는 게 좋다고 일러준다. 60년 된 편백나무 숲 쉼팡의 긴 편백나무 의자에 몸을 맡기고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계속 오르다 보면 가뿐하다는 뜻의 가베또롱숲길을 지난다. 걸으면서 드러나는 숲의 풍광에 감탄사를 멈출 수 없다. 숲속에선 맑은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잠깐 멈추어 두리번거리다 다시 걷다 보면 조선시대 국영목장의 울타리 담인 잣성길을 옆에 끼고 지나는 숲길이 나타난다. 벤조롱 치유숲길은 편백나무의 피톤치드가 상쾌하고 산뜻하다는 뜻의 길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각기 다른 숲을 걷는 듯한 느낌은 치유의 숲이 주는 매력이다. 각 숲길은 0.6~2km 내외의 길이로 조성되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숲길은 대체로 완만해서 오르는 동안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노약자는 물론이고 어린이와 함께하는 가족들의 나들이로도 문제없다. 잠수하던 해녀가 내뱉는 숨소리라 하는 숨비소리 치유숲길을 지나 오고생이길엔 돌이 많아서 더러 불편할 수도 있다. 오고생이는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의 제주어로 돌길을 밟는 발걸음마다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역시 제주답다는 생각이 든다. 돌길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고즈넉함이 보존된 오고생이 치유숲길을 나서면 눈앞에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원시림의 숲과 하늘과 바람과 햇살만으로 가득 찬 풍경, 청명하다. 숨통이 트이는 게 느껴진다. 이어서 가멍오멍숲길을 다 만나고 엄부랑숲길(‘엄청난, 큰’이라는 뜻)을 지나 힐링센터까지 가면서 100년 된 거대한 편백과 삼나무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삼나무 숲의 위용이 압도한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찬 숲이다. 피톤치드를 내뿜는 길을 걸으며 오감을 열고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편안하다. 이쯤에서 비로소 숲의 신비로움에 스며든 자신을 보게 된다. 순수한 자연 속에서 그 숲의 신령스러움에 감싸이는 듯한 기분이다.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자연이 주는 위안으로 뭉클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숲 쪽으로는 군데군데 작은 오솔길이 있어서 숲속으로 들어가 파묻혀봐도 좋을 듯하다. 옆으로는 2km 정도의 하천이 흐르고 있다. 다 오른 곳에 산도록(‘시원한’이란 의미의 제주어) 치유숲길이 있다. 숲속 야외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고, 참여자들의 맨발 족욕이나 산림교육도 이루어지는 곳이다. 명상과 복식호흡을 하며 차분한 시간에 잠겨보는 것도 좋다. 산책로에는 치유의 샘이 흐르고, 숲길 쪽으로 한참 걸으며 시오름 정상에 올라 한라산을 볼 수도 있다. 상쾌함의 최고조다. 경관 좋은 하늘바라기 숲길을 걸어보는 여유도 가져볼 만하다. 그러고는 아무 데나 멍하니 걸터앉아 숲이 일렁이며 내는 바람 소리에 고단했던 세상의 먼지들이 씻겨나가는 듯한 경험을 할 것이다. 숲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오소록 숲 주변에 자리 잡은 힐링센터는 주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다. 건강측정을 하거나 다담(茶啖)을 나누며 마무리하는 공간이다. 코로나 시국이라 때때로 개장이 불확실하므로 미리 확인해보는 게 좋다.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에 자리한 치유의 숲은 해발 320~760m에 위치한다. 사람이 가장 쾌적하다고 느끼는 높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이었던 이곳에 100년 전쯤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현재 엄부랑 숲에는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있다. 그들마저 떠난 후 척박했던 삶의 흔적이 사라지고 덤불과 숲으로 뒤덮인 것이다. 그런 숲의 생태계를 그대로 보전해 지금은 편백과 삼나무 군락으로 치유의 숲이 되었다. 한라산의 다양한 식생과 조류, 야생동물들과 나무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산림의 환경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 복합 휴양형 치유 공간인 셈이다. 하루 적정한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있으며, 무장애 데크 시설 덕분에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2019년과 202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열린 관광지’로도 지정되었다. 차롱 바구니에 담긴 제주의 로컬푸드 숲을 내려오면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차롱밥상이 기다린다. 차롱은 제주에서 음식을 담기 위해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던 제주의 전통 바구니다. 주로 밭에 나갈 때나 제사음식 담을 때 통풍이 잘 되어 신선하게 음식을 보관하던 용도였다. 차롱 도시락은 호근마을 주민들이 숲과 마을의 상생을 꿈꾸며 프로그램에 접목했다. 제주에서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 당일 만든 도시락으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각자 배정된 힐링하우스의 편백 테이블에 차롱치유밥상이 차려져 있다. 즉석에서 담아주는 따끈한 국과 김치, 그리고 동고량이라는 밥 차롱 바구니에는 한라산 표고버섯전, 빙떡, 브로콜리, 채소와 과일꽂이, 톳 주먹밥, 곰치 쌈밥, 고구마 등 푸짐하면서도 정성 가득 담긴 건강한 음식이 가득 차 있다. 제주의 음식문화와 향토의 맛을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서귀포 치유의 숲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 산 4 •문의처: 064-760-3067 •운영시간: 평일 매일 08:00~17:00 (하절기) 4~10월 18시, 매일 09:00~16:00 (동절기) 11~3월 17시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산림치유 프로그램: 성인 2000원, 어린이·청소년 1000원 •차롱치유밥상: 3일 전 예약해야 가능. 1인용 차롱치유밥상 이용금액은 1만 7000원. 계절이나 식재료 또는 행사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다. 064-760-3067〜8
- 2022-01-28 11:10
-
- 나이 든 여자의 혼자 남겨진 사랑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2021년 12월,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폐암 진단을 받고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그렇게 떠났다. 그와 내가 사귄 지 10년째 되던 해이기도 했다. 나의 지난 한 해는 벽두부터 그의 병간호로 시작됐고, 소생과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떠나며 한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해가 희망 없이 밝았다. 장례를 치른 후, 간호를 하느라 1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의 대전 집을 나와 다시 서울 내 집으로 돌아왔다. 환자를 돌보는 도중 간간이 들러 옷가지 등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곤 했지만 그가 떠나고 나니 내 집 풍경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칫솔이나 면도기 등 내 집에 두었던 그의 소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제는 영원히 주인 잃은 것들, 그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아프니까…. 그와 나는 20년 전 어느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다. 나도 그도 나름 단단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혼한 상태였지만 10년을 서로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10년 동안 썸을 탔냐고? 그건 아니고 좋은 사람이니까, 좋아 보이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사귀는 사람이 있겠거니 서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12월 중순의 첫눈 내리던 날, 첫눈치고는 늦었고 첫눈치고는 제법 눈송이가 실했다. 모임이 끝난 후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연히도 그와 나의 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도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천년의 사랑이 시작되고 다소 어색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기울여 그가 먼저 나가도록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또 그대로 내게 먼저 차를 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서로 그렇게 배려의 몸짓을 하다가 내가 먼저 차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시선까지 느껴져 더 당황스러웠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내게, 무슨 일인지 잠시 지켜보던 그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별수 있나. 고장의 원인을 찾지 못한 데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니 내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그가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깜깜한 밤하늘에 흰 눈이 별처럼 쏟아졌다. 우리 만남의 서곡이자 팡파르처럼. 나란히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시간이 의외로 편안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천생연분이란 촌스럽고 진부한 표현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이혼 후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만난 그 사람, 이제야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짝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와는 모든 것이 잘 통했고 모든 것이 좋았으니까. 가치관, 취미, 식성, 관심사, 대화는 물론,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몸까지 잘 맞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리라. 국내는 물론이고 코로나 이전에는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다녔고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섭렵했다. 전시, 공연, 독서 등 문화생활도 알뜰히 했다. 우리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각자 둘씩 있었지만 모두 독립해서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 문제로 신경 쓸 일도 없이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관계였다. 느긋하게 나이 들어갔고 다가올 노후를 함께 설계하며 행복한 노년을 꿈꿨다. 사랑의 보험이 깨지고 그러던 그와의 화려했던 세상이 불과 10년 만에 흑백의 암전을 맞았고 그는 영원히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떠나도 삶은 지속되는 거라지만, 환갑도 한참 지난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가 없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두망찰 길을 잃었다. 그가 없는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까. 혼자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와 나는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성혼 선언문의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견고한 우리 사랑 한가운데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젊지 않은 나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미 노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가 없는 나의 노년, 그 막막한 길을 홀로 걸어갈 수 있을까. 나는 요즘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다. 지난 1년간 그의 병간호로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랑을 잃은 슬픔과 삶의 막막함 때문이리라. 홀로 늙어감,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이 든 여자의 사랑은 사랑을 하는 중에도 버겁다. 더구나 우리는 동갑이 아니었나. 여자로서, 그것도 젊지 않은 여자로서 같은 나이의 남자에게 위축되지 않는다면 약간은 거짓이리라. 내 경우 역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관하게 문득문득 내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아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젊은 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와 나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와 만나는 동안엔 오히려 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가 가고 나니 내 나이가 갑자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여자’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은 보험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상대를 찾는다는 뜻이란다. 더는 다른 상대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실한 보험 납세자처럼 꼬박꼬박 애정을 쏟고, 서로를 챙기다 보면 보험의 만기가 도래하듯 안온한 노후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들린다. 노년의 원만한 부부가 전형적인 그 모습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정성스레 부어가던 보험이 중간에 깨져버린 것 아닌가. 새로 들 가능성, 새로 들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다. 탈 수 있는 보험금 없이 홀로 노후를 맞는 대열에 내가 동참한 것이다. 만날 사람을 다 만났다면 어느 종교계 방송에서 환갑이 지나면 인생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라 할 때 소위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되면 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은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배우자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맺어져 있는 인연을 일부러 끊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혹여 기존 관계에서 자리가 비어 새 인연을 들인다 한들, 관계 맺기를 통한 성장판은 이미 닫혔다는 의미다. 마치 빠진 치아 자리에 임플란트나 틀니를 해 박는다 해도 치아 본연의 성질과는 무관하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성장하고 누리고 진화할 수 없다면 더는 살아도 산 게 아니란 의미일까. 물론 그건 아닐 테지. 이제 저 너머의 존재, 신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겠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알아도 제약적이며 한계가 있었던 관계의 장막을 거둬내고 영성에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겠지. 그래야만 성장을 지속할 수 있고, 실상은 그러한 성장이 참 성장이라는 의미일 테지. 세속적 희로애락 속에서 울고 웃던 나를 관찰자, 주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교정하고 회복되도록 하는 과정일 테지. 내 경우라면 그의 빈자리를 하나님 혹은 부처님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일 테니 교회나 성당, 절에 나가 위로를 구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 얼마나 진부하고 맥 빠지는 소린가. 나는 지금 그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간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외로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릴 지경인데, 눈에 그 존재가 보이지도 않고 귀에 그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신을 통해 위로를 구하라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공기를 뻐끔거리며 배를 채우라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위로받기는 고사하고 왜 그를 내게서 빼앗아갔냐고, 이제 겨우 64세,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나이의 그를, 자기 분야에서 드물게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를, 무엇보다 나와의 변함없는 애정으로 행복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를 무슨 이유로 데려가야 했냐고 따지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다. 신도 질투를 하냐고, 그렇다면 신도 아니지 않냐고. 차라리 그와 혼인을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그의 아내였다면 세상 떠난 그를 대신해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가족 내의 위치에서 자리를 지키며 감당할 역할들로 사별의 아픔을 추스를 여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껏’ 그의 연인이 아닌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그 상실감과 무력감만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빛을 찾아서 슬픔에 겨워 탈진하는 하루하루 중에도 간간이 빛을 느낄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내적 안온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실은 나는 그가 떠난 이후 성당에 다닌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리 공부도 한다. 신앙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 그저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왠지 성당에 가면 영혼이나마 그가 내 옆에 앉아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올해로 나는 65세가 되었다. 10년 전 55세에 만난 그가 떠나고, 2022년의 출발선에 혼자 오도카니 섰다. 혼자라고 하지만 어쩌면 내 옆에는 신이 서 계실지도 모른다. 신은 무언의 침묵을 통해 나와 동행할 채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왜 신은 굳이 내 옆자리에 서려고 하시는지. 나는 그 사람 하나로 행복했건만. 하긴 연일 눈물로 어룽져 시야가 흐려진 내 눈엔 생의 완주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신의 손길에 의지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인도가 절실하다. 그러나 앞서 방송 내용처럼 나 또한 이제 더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반자를 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 대신 신’이란 결단에서가 아니라 또다시 그 존재를 잃고 슬픔의 늪에 빠져 허둥대거나 흐느적거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 한 번으로 족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과 그리움, 그것은 너무나 혹독하기에.
- 2022-01-17 09:01
-
- 백제의 숨결 숨쉬는 익산 왕궁리 유적지
-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 2022-01-14 08:26
-
- 인도네시아의 보석 발리 내셔널 CC
- 발리 내셔널 골프클럽(파72, 7134야드)은 로빈 넬슨(Robin Nelson), 로드니 라이트(Rodney Wright)가 디자인한 골프클럽으로 1991년에 오픈했다. 이후 넬슨 & 하워스 골프설계팀(Nelson & Haworth Golf Course Architects)에 의해 2012년 리모델링에 들어가 18개월의 공정을 마친 후 2014년 3월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골프장은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다. 현재 300여 개의 룸을 갖춘 5성급 샹그릴라 호텔과 33동의 럭셔리 빌라가 17번 홀과 18번 홀 주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크 홀랜드(Mark Holland) 총지배인은 Best Renovated Course in Asia 2014에서 1위, Best Renovated Course Worldwide 2015에서 3위, Best Golf Resort Asia 2015에서 5위, 그리고 Best Golf Resort Indonesia 2015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지속적인 서비스와 골프장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발리는 일 년 내내 25~30℃를 유지하며, 특히 7월부터 10월 사이 비가 내리지 않아 골프 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또한 배수 시설이 잘되어 있어 한여름 스콜성 비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캐디는 130명 정도로 18홀 규모에서는 많은 수에 해당된다. 그만큼 고객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곳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2억 6000만 명에 달해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대 인구대국이다. 전 인구의 80% 이상이 이슬람교도이며, 기독교도와 힌두교도 등이 있다. 발리 본토 사람들은 모두 힌두교도들이다. 골프장 캐디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 50%, 힌두교가 50%, 그리고 기타 10%라고 한다. 무슬림 여성이 히잡과 긴 옷을 입는 이유는 남성들의 성적 폭력이나 성적 충동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서양식 의복보다는 덜 섹시해 보이거나 실제로 몸매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리 있어 보인다. 젊은이들은 주로 서양식 옷을 입지만 전통 제례 기간인 라마단(Ramadan) 동안에는 한 달간 엄격한 금식을 하며 전통적인 이슬람 복장을 한다. 이색적인 캐디 복장 눈길 캐디의 복장은 지금까지 필자가 보아온 수많은 골프장 중에 최고로 아름답다. 챙이 넓은 모자는 보라색과 하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옅은 보라색 치마와 하얀색 블라우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쾌하고 즐거운 라운드를 보장해주는 듯했다. 일부 캐디는 옅은 분홍색 모자와 하얀 바탕에 분홍색 꽃이 피어 있는 치마, 그리고 분홍색 옷에 하얀 레이스가 있는 매혹적인 복장이다. 아마 복장도 경쟁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한국이나 중국 어디나 긴 바지에 익숙해져버린 나에게 새로운 감흥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예부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듯이 동가홍상(同價紅裳)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아침부터 강렬한 발리의 태양을 받으며 힘찬 티오프를 시작했다. 일찍부터 더워지기 시작하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덥지 않다. 발리 기후의 큰 특징은 조석과 한낮의 기온차가 5~6℃ 내외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까지 더해 골프하기에는 천국이란 생각이 든다. 발리내셔널 코스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하고 화려한 꽃들이 매 홀마다 식재되어 있으며, 그린의 난이도는 크지 않지만 그린 스피드만은 발리의 6개 코스 중 최고다. 그린은 티프이글(Tiff Eagle), 페어웨이와 티박스에는 패스팰럼(Paspalum)을 식재했다. 10피트를 넘는 스피드로 아마추어 골퍼들은 쉽지 않은 퍼팅을 해야 한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 & 링크스 1번 홀(파4, 437야드) 페어웨이 왼쪽 벙커 240야드를 넘어야 하며, 페어웨이 중앙 오른쪽이 안전하지만 슬라이스면 숲속행이다. 푸른 하늘과 하얀 벙커 그리고 링크스풍을 느끼게 하는 풀들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긴 파4여서 투온은 매우 어렵다. 4번 홀(파3, 147야드) 약간 오르막에 그린 오른쪽 앞으로 4개 층의 멋진 돌계단 벙커가 있다. 페어웨이 왼쪽 카트길로 보이는 멋지고 화려한 꽃나무 부겐빌레아가 이색적이다. 4번 홀과 14번 홀 그늘집(Halfway Houses)에서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 16번 홀(파5, 467야드) 챔피언티 바로 앞부터 페어웨이를 따라 왼쪽으로 이어지면서 그린 왼쪽 앞 55야드까지 475야드의 길고 긴 모래땅(벙커)이 이어진다. 필자는 2016년 8월 중국 장쑤성 쑤에 있는 락마호(LUOMA LAKE) 골프장 C6번 홀(파5, 541야드)의 오른쪽부터 C7번 홀(파4, 405야드) 그린 오른쪽까지 480야드 길게 이어진 벙커에 이어 두 번째로 긴 벙커를 경험했다. 참으로 멋진 듄스 풍경이 아닐 수 없다. 17번 홀(파3, 155야드) 완벽하게 멋진 아일랜드다. 본래 파4였는데 주변에 호텔을 지으면서 파3로 변경했다. 그린이 전후좌우 각각 30야드로 거의 원형에 가까우며 에지가 1~2야드도 안 되고 바로 물속행이다. 그린 왼쪽 앞의 벙커도 티 샷에 영향을 준다. 물 왼쪽으로 300여 개 객실을 보유한 샹그릴라호텔이 신축됐다. 18번 홀(파4, 355야드) 페어웨이 왼쪽으로 벙커와 함께 길게 이어지는 물길이 그린 앞 100야드에서 페어웨이를 가르며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홀이다. 그린 오른쪽에 큰 물을 형성하며 바로 멋진 클럽하우스가 앉아 있다. 그린 주변과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별장들이 멋지게 이어지고 있으며, 모처럼 야자나무를 볼 수 있다.
- 2022-01-06 08:30
-
- 남원골의 간이역 구 서도역과 혼불 문학관
- 지금은 방송 종료되었지만 '간이역'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그마한 소도심을 지나는 기차역의 아련함이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추억처럼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간이역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였다고 한다. 이제 간이역은 시간 속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민 폐역이 되어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달리지 않아 녹슨 철길은 때론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 샷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남원의 구 서도역은 전라선 기차역이었다. 1934년에 역무원 배치를 시작해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로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했던 서도역이 차츰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폐역이 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에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 서도역 목조건물의 간이역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영화 동주, 미스터 선샤인, 해어화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뮤직비디오 촬영과 유명 모델들의 화보 촬영으로 부쩍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서도역은 그 이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문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시대적 묘사에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서도역이라는 하트 표지판을 지나 역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역 대합실에는 그 시절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기차역의 이야기를 필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복장과 촬영장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와 영화의 추억이 스멀스멀할 것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면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애신과 행랑아범, 함안댁이 걸어 나오고 철로 목조 위에 앉은 구동매가 아기씨와 나누던 대화,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기씨. 이 새벽 기차역에서... 절에 다녀오는 길이네. 그들의 당당하거나 애잔했던 눈빛. 이곳이었구나... 드라마의 힘은 아주 세다. 그 옆 서도역 역사관의 옛 책을 한번 뒤적이고 풍금도 눌러보고 나오니 젊은 커플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돌렸다. 서도역이 소설 혼불의 첫 배경이다 보니 작품 속의 내용을 표현한 정크 아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잠깐 작품 속의 몇 줄씩을 읽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마음 놓고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오래전 기차가 멈춘 녹슨 기찻길은 직선과 곡선과 원형의 철길이 독특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등나무의 짧은 터널 옆에는 흰색으로 잘 단장된 역무원 관사가 있다. 그 옆의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의 하숙집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영화 촬영은 물론이고 체험학습도 하는 곳이다. 요즘 들어 옛 모습에 손을 대어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생경함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적어도 구 서도역의 겉모습은 약 90년 전 모습을 살려둔 듯해서 정겹다. 서도역은 전라선이 신설되어 이전할 때 철거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때 남원시에서 서도역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고즈넉한 아날로그 감성의 문화공원이 된 것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철도 관련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몫 역시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차역, 고요한 이른 아침 운해가 몽글몽글하면 간이역과 더 잘 어울린다. 철길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고목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심었던 벚나무들이다. 눈부신 봄날의 서도역이 미리 그려진다. 바삐 걷다가 잠깐 다리를 쉬는 곳처럼 구 서도역은 남도 여행길에 빠뜨리면 서운할 그런 곳이다. ☞Info 구 서도역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구 서도역영상촬영장. ♤문의처: ☎063-620-6165 ♤교통: 남원역에서 523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대중교통 접근 불편. 택시나 자동차 이용이 편리하다. ♤휴무일 없이 연중무휴 방문 가능. 주변 1.4km 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최명희 작가의 숨결을 담다. 혼불 문학관 구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5분 거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혼불’의 첫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푸르고 문학관은 평온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19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종부 3대(代)와 그들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최명희의 소설 '혼불'.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문학관이 자리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방문객들에게 쉼을 안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생전의 모습이 군데군데서 맞는다. 작가의 집필실로 재현된 방에는 유품으로 작품 일지와 만년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펼쳐진 육필원고를 들여다보노라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숙연해진다. 실내를 빙 돌다 보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디테일한 사진이나 모형으로 전시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어느덧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채로 보여주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작가의 면밀한 내면이 스친다. "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배워 이제 글씨는 안 쓰겠는데...... 나는 경향신문에 만년필을 쓰는 기쁨, 이라는 글을 썼단다. 나는 참 더딘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책도 이제야 부치고 내 살아온 생에 대한 자각도 이제 생기니 장자의 말이 절감이 된다. 行年 五十而知 四十九非.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마흔아홉 가지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 는 이 한 절, 요즘은 이 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나의 非들. 얼음장처럼 가슴이 서늘해지지. 하지만 오십에 새 눈(芽)이 트이지 않았다면 어찌 四十九非를 말할 수 있으며 새 눈(眼)이 뜨이지 않았다면 제 그릇됨을 볼 수 있으랴... 그 芽와 眼이 새 희망을 준다." 약 6,000평의 문학관 건너편의 꽃심관이라는 한옥 쉼터에는 사랑실과 누마루가 있다. 건물 모퉁이의 정자에 올라 혼불문학관을 바라보며 소설 속 삶의 한 자락을 느껴볼 만하다. 살아생전 우리말을 사랑하던 작가 최명희 작가의 혼불. 작품의 어휘 하나하나 직접 취재하고 토속어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정신을 문학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한다. 혼불 속의 청호저수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있는 솟대들은 길게 목을 빼고 노봉마을을 건너다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기억 속의 간이역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학관에 들어 이 땅에 서린 삶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는다. 전라도 남원고을에 가면 이렇게 쉬엄쉬엄 산책하듯 둘러볼 곳들이 기다리고 있다. ☞Info 혼불문학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입장료 무료) ♤문의처 :☎ 063-620-5744~46 ♤운영시간 평일 : 09:00~18:00(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7월~8월) 09:00~18:0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
- 2022-01-04 10:28
-
- “내 고민과 번민, 공감 기대하며 노랫말에 녹이지요”
-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 2021-12-31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