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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 강형구 씨
- 지난 2월 4일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이후 8개월 만에 연명의료를 안 하거나 중단한 환자의 수가 2만 명이 넘었다고 보건복지부가 10월 9일 밝혔다. 이 제도의 핵심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의 숫자는 8개월간 5만8845명.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의 보급과 연명의료결정법이 자리 잡은 이면에는 제도의 정확한 내용을 알리고 작성을 돕는 등록기관과 상담사들의 활약이 있다. 그중 죽음준비교육, 호스피스 완화의료와 관련해서 초창기부터 활약해온 상담사 강형구(姜炯求·60) 씨를 만나봤다. “처음엔 저도 죽음준비교육이라는 분야가 생소했죠. 하지만 국내 상황이 고령화 사회로 급속하게 기울면서 수요도 늘고,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형구 씨는 20년 넘게 생명보험회사에서 교육과 영업을 담당했던 보험맨 출신. 이후 치킨 프랜차이즈에서 직원과 점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다 그는 죽음준비교육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배경에는 한국싸나톨로지협회 임병식 이사장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그는 “워낙 개인적으로 믿는 분이라 마음이 흔들렸다”고 말한다. 또 오랜 기간 보험업계에서 쌓아온 감각도 긍정적인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2013년 싸나톨로지스트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협회가 배출한 첫 번째 기수다. 이후 이 분야에 관심이 생긴 강 씨는 각당복지재단의 죽음준비지도자 과정도 심화과정까지 수료했다. 2년간 죽음 준비와 관련한 교육에 매달린 셈이다. 정책 초창기 강사 12인에 선정돼 “그러다 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아름답고 존엄한 나의 삶 전문강사를 모집했어요.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해 죽음 준비나 호스피스에 관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인력을 뽑았던 것이죠. 총 12명을 선발했는데 다행히 합격해 전문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죠.” 이 사업은 지금의 완화의료나 연명의료 관련 정책의 씨앗이 됐다. 선발된 강사들은 2017년까지 전국을 돌며 죽음 준비 등 관련 교육을 진행했다. 전국의 노인복지관 등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진행했지만 상당수 교육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실무자 등을 상대로 이뤄졌다. 당시만 해도 이 분야에서 정책을 실행하는 기관 실무자들도 이해의 폭이 넓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으니까요. 특히 치매에 걸리거나 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해요. 또 죽음의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에 대한 걱정도 있고요. 호흡기 문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해소할 수 있고, 죽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하면 안심하십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도파민이 통증을 막아주거든요. 그 외에 죽음을 준비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지 알려드리면 무척 좋아하십니다.” 전국을 돌며 다양한 계층 대상 교육 그는 3년간 40여 개 기관을 돌며 교육을 진행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로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을 꼽았다. “일반적으로는 준비된 자료 화면을 통해 교육을 하는데 그분들은 볼 수가 없으니까요.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그렇지 않은 일반인에 비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큽니다. 그래서 꼭 교육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구술로만 설명이 가능하도록 사례를 엮은 뒤 스토리텔링을 통해 꼭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했는데, 다행히 호응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렇게 3년간 전국을 돌고 난 강 씨는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 활동 중이다. 말 그대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교육을 하고, 작성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류 기재와 등록 등의 과정을 돕는 역할이다. 현재 전국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등록할 수 있는 곳은 총 86곳(지역보건의료기관 19곳, 의료기관 46곳, 비영리법인·단체 20곳, 공공기관 1곳)이다. 또 전국 238개 국민건강보험공단 본부와 지사, 출장소에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강 씨가 활동 중인 곳은 비영리 사단법인인 희망도레미. 보람과 의무감이 움직이게 해 “의향서 작성이나 교육에 대한 신청이 들어오면 상담사가 2인 1조로 나가 교육을 진행하고 서류 작성을 도와줍니다. 이때 더러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상담사들이 절대 서류 작성을 유도하지 않습니다. 의향서 작성은 무조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진행되며, 저희는 관련 내용 안내만 할 뿐이에요. 건당 할당량이 있거나 수당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안내를 하다 보면 그런 오해들을 받고, 간혹 어르신이 의향서 작성 후 자녀분들이 항의를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또 기관끼리 의사소통이 안 돼 문전박대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상담사들이 받는 돈이 많은 것이 아니다. 각 등록기관마다 내규를 통해 교통비를 지급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담당하는 기관인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산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측 관계자는 “상담사의 활동비는 각 등록기관의 재량으로 정해지며, 정책적으로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강 씨가 상담사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다른 상담사들과 마찬가지로 ‘봉사활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고, 본인 의사와 관련 없이 연명의료로 연장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막연히 무서워만 할 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요. 특히 지방에 계신 어르신들은 상담사를 만날 기회가 많지 않고, 한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안 되시는 분들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때문에 저와 같은 상담사들의 활동이 그분들에게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간절함이 제게는 원동력이 되고요. 막연히 두려워만 하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시곤 ‘후련하다’고 말씀하실 때 보람을 느낍니다.”
- 2018-11-0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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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의 은퇴 교육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 평생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며 하나의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이들에게 두 번째 삶, 은퇴 후 인생설계는 그저 막막한 일일 뿐이다. “후배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잔소리했지만, 정작 회사 밖으로 나오니 눈앞이 캄캄하더라”는 어느 공기업 정년퇴직자의 소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자사 임직원의 은퇴 준비, 노후 준비를 돕기 위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선명한 미래가 업무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 아닐까. 이런 기업 중 모범 사례로 꼽히는 포스코를 찾아 인생설계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본지 제호와 비슷해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 이름은 포스코의 퇴직 후 인생설계 프로그램명이다. 교육 참여는 50세 이상의 포스코 임직원이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은 2001년부터 포스코인재창조원이 운영해온 정년퇴직 예정자 대상의 교육 과정인 ‘그린 라이프 디자인’이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교육 진행 과정 중 정부의 정년퇴직 연장 정책에 따라 2016년과 2017년에는 정년퇴직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면서 프로그램 운영에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준비기간’에 대한 의견도 반영됐다. 교육 시점이 정년퇴직 3개월 전부터 시작되어 인생설계에 제대로 반영하기엔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린 라이프 디자인 교육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약 30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여했다. 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정년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그린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이 퇴직이 임박한 이들을 대상으로 실제적으로 필요한 서류 처리나 연금 문제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퇴직 후 생활에 대한 마인드 변화, 방향성 제고와 같은 포괄적인 부분이 중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래가 명확해야 근로의식 높아져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에 참여 예정 인원은 330명. 포스코의 주된 사업장인 포항과 광양의 임직원 300명과 서울 근무자 30명이 참여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인원만 13명. 포스코인재개발원의 교수 외에 다양한 분야의 사외 강사들이 각 전문 분야의 교육을 담당한다. 포스코인재창조원 김일수 교수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50대를 넘어선 직원들이 퇴직 후 삶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포스코에 몸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의 삶에 겁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가 나서서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생애설계와 퇴직 준비를 지원해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근로의식도 고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또 퇴직 후 삶의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고요.” 2016년과 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에는 총 7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했다. 본인의 생애설계에 대한 진단과 자산관리, 생애관리, 건강관리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뤄졌고, 관심 분야와 관련한 현장 탐방과 체험 학습도 이뤄졌다. 참여자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5점 만점에 평균 4.88점의 반응이 나왔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올해 변화를 줬다. 초기 프로그램이 1일 8시간 포괄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교육시간 부족, 교육 내용 전문성에 대한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직업형 트랙과 자산형 트랙으로 나눠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산형 트랙의 경우 자산관리는 결국 부부 공동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임직원의 배우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원한다면 두 프로그램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재무관리 교육과 달리 특정 금융상품의 밀어주기가 없다는 점도 참여자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다.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까지 직업형 트랙은 1인 창업이나 프랜차이즈 창업의 특징과 차이점, 창업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위험 요소, 재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구직 목표 설정, 자격증 취득 등과 같은 현실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자산형 트랙은 수익형 부동산이나 부동산 경매 또는 공매에 대한 정보, 세금과 관련 법률에 대한 소개, 각종 금융상품이나 상속·증여와 관련한 교육도 실시한다. 또 각 프로그램에선 즐거운 여가를 위한 본인의 여가 유형 진단에서부터 여가 활용 방법과 건강관리를 위해 지켜야 할 사항 등도 함께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구성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흥미로운 부분. 포스코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이렇게 주제가 넓어진 것에 대해 “직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임직원들의 관심이 많은 건강과 재무, 인간관계, 여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단순한 재테크 활동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후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나 준비사항에 대한 교육도 진행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개인별로 성격검사와 적성검사도 실시한다. 여기에 직원에게 재취업 장애요인은 없는지 체크한다. 오프라인 교육과 별도로 사이버학습을 사전학습 형태로 진행하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다. 인생설계, 창업, 귀촌과 같은 커리어 디자인과 재무 디자인, 라이프 디자인을 온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은퇴 대비에 ‘눈치 보기’는 없어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의 참석률은 전체 대상자의 20% 정도.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년퇴직을 10년 앞둔 임직원까지 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고려하면 꽤 높은 편이다. 혹시 회사가 먼저 나서서 ‘퇴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사측에서 퇴직을 권하는 것처럼 비춰지진 않을지, 또 프로그램 참여가 퇴직 의사를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참가자들은 “사내 분위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갖는 의문”이라고 일축한다. 한 프로그램 참석자는 “포스코라는 기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정년 때까지는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런 문화 때문에 정년퇴직 후 생애설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사내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 2018-06-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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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심당(聖心堂), 세상의 빵과 같은 존재가 되다
- 이제 우리는 ‘대전’ 하면 바로 ‘빵집’ 성심당을 떠올린다. 그만큼 대전을 대표하게 된 아이콘 성심당은 지역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착한 기업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성심당의 고집은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눔과 환원을 통한 가족 같은 공동체의 선을 향한 고집에도 적용된다. 아들은 빵을 굽고 딸은 요리를 하며 아내는 홍보를 맡는 등 온 가족이 빚는 성심당의 아름다운 가치와 그 원동력, 聖心堂 가족의 세상을 향한 희망의 얘기를 임영진 대표를 만나 들어봤다. 성심당은 철저히 ‘대전 프리미엄’을 지킨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지점을 내지 않아 성심당의 신선한 빵을 맛보려면 무조건 대전을 가야 한다. 그나마 대전역, 롯데백화점 대전점 등 대전 안에는 몇 군데 지점을 마련해서 운영하고 있기에 예전보다 접근성이 좋아졌다. 대전역에 내렸을 때 고소하고 달콤한 튀김소보로 냄새와 함께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따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게 성심당 대전역점이다. 엄청난 인기 덕분에 전국 곳곳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어오는 수많은 유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성심당이 대전이라는 지역성을 꿋꿋이 지키는 것은 그로 인해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대전까지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성심당 빵을 사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담기는 기쁨. 그 모습이야말로 성심당 빵이 만드는 기적이죠. 100년 가업(家業)으로 오래가려면 여기저기서 다 먹을 수 없는 간절함과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올해로 62년째 대를 이어 성심당을 경영하고 있는 임영진 대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의 소탈함만큼이나 소탈한 인상으로 성심당이 대전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지론에는 성심당의 오랜 세월에서 얻어진 단순하고도 단단한 논리가 있었다.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빵은 음식이니까, 무슨 일이 날지 매일 불안하죠.” 성심당은 얼마 전 큰일을 겪었다.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인 부추빵에서 이물질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중앙지에서 크게 내용을 다뤘고, 성심당에서는 사과문을 발표한 후 후속 조치를 취했다. 식품 기업에서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기업에 미치는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완전 비상이었죠. 그래서 음식은 폭탄이라고도 해요. 하루에 빵 몇만 개를 만드는데 그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성심당에는 전국에서 견학을 와요. 빵 만드는 과정은 모두 공개되고 있고요. 그런데도 이런 실수가 벌어진 거예요. 직원들에게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정신 차리자고 얘기를 했어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또 불을 꺼주는 일이 있었다. 개그맨 이영자가 나오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성심당 빵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러자 성심당 빵은 불티나게 팔렸고 논란도 다소 잠잠해졌다.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구나, 내 계획대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구나 싶었죠.” 성심당 역사의 가혹한 순간들 임영진 대표가 삶을 롤러코스터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성심당을 운영하면서 겪은 온갖 우여곡절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대전을 대표하는 명물로 정착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62년의 성심당 역사에는 잔인한 운명의 생채기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성심당의 모든 것을 태웠던 화재 또한 그렇다. 2005년에 일어난 화재는 심각했다. 성심당 운영 48년째 되던 해,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이 겹쳐서 경제적인 문제가 회사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던 차에 화재가 일어났다. 임 대표는 성심당을 부동산에 내놓기까지 했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때 직원들이 큰 도움을 줬죠. 한창 추울 때였는데 찬물로 재를 닦고 중고 빵 기계를 구입해서 빵을 만들고.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살리자’라는 구호로 단합하여 위기를 극복해보자고 나섰어요.” 화재를 딛고 일어난 성심당이었지만 그 후에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임 대표의 동생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 것도 그중 하나다. 동생이 시작한 프랜차이즈 사업은 실패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성심당이 떠안게 되어 또다시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전 시민들과 직원들은 성심당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줬고 일으켜 세웠다. 성심당은 대전이 키운 빵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가 성심당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 시민과의 가족과 같은 연대감, 이것이 성심당이 대전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이자 성심당이 추구하는 사회 환원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성심당 같은 회사 100개가 있으면 한국이 바뀐다” 성심당은 최근 독특한 기업 모델로도 인정받고 있다. 바로 사회적 화두인 공유경제의 사례로서다. ‘성심당과 같은 기업 100개가 생기면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회 환원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성심당은 매년 회계, 납세 명세서를 직원에게 공개하며 이윤의 15%를 성과보수로 지급한다. 인사고과의 40%를 차지하는 기준은 동료 직원 사랑이다. 임 대표는 미래 기업은 공유의 개념이 아니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모두 자기 걸 챙기기만 하면 전부 싸움이 되고 빈부격차도 커지고 좋아질 게 하나도 없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의 파멸을 막기 위해선 뭔가 내놓고 같이 가자고 해야죠. 크게 보면 그게 행복한 삶을 위한 해결책이 되리라고 봐요.” 기업 경영의 목표가 오로지 돈이면, 단순히 돈이 좀 안 벌린다 싶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러나 행복이 목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접근하는 방법도, 기업 경영도 달라진다. 임 대표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후 인류의 행복을 위해 원했던 바가 아니었겠냐고 되물었다. 어떻게 보면 성심당은 가장 높은 사람의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기쁠 때마다 생각나는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 성심당이 지금의 문화를 갖게 된 근원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성심당을 만든 임 대표의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에 대해 물었다. 임 대표는 아버지가 단순하고 우직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한 자신의 성정을 기업 경영에 그대로 투영했다. 빵은 신선도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전은 좁은 지역이다. 임 회장은 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찌거나 튀긴 게 아닌 방금 만들어낸 빵만을 팔았고 그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성심당 전설의 시작은 그렇게 매우 소박하고 아주 기본적인 장사의 정신에서부터 만들어진 셈이다. 임 대표는 자신이 그러한 부모님의 철학과 논리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62년을 운영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죠.” 아버지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기본을 지켜라’였다. 거래처와의 관계, 대전시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 아버지가 추구했던 것은 철저히 기본을 지키는 예의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믿음 속에서 성심당이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해요. 새로운 경영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라는 거죠. 그렇게 나누다 보니 나눈 것들이 되돌아와서 성장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임 대표는 안타까워지는 마음이 있다. “사실 아버지는 이북에서 사셨는데, 한국전쟁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피란길에 오르셨어요.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상황이어서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남은 인생은 남을 도와야 한다고 자신과 약속하셨죠. 그걸 지키신 겁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것만 보고 가셨어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지금 성심당이 대전 브랜드 1위가 되었으니 이걸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기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요. 이걸 보셨어야 하는데 싶어서.” 임 대표는 아버지를 하늘에서 만나도 욕먹지는 않겠다 싶어 다행이라며 웃었다. 자신에게 돈이 아니라 정신을 물러주셔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감동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이 없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안 했을 거예요. 그리고 혼자 할 때보다는 가족과 함께할 때 가치가 더 커집니다.” 임 대표는 4남매를 두었었다. 그러나 그중 아들 한 명을 어린 나이에 지병으로 잃었다. 그런 아픈 경험은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희로애락이 깊어지고 삶과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러한 깨달음은 가족적인 기업으로서 성심당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진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실천이다. 아무리 좋은 말과 방법이라도 ‘그 손해 보는 걸 왜 하느냐’라고 생각하는 순간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동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요”라는 임 대표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성심당과 다른 회사들이 구별되는 것은 그 지점이다.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차이 말이다. “기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모방해야죠. 그래야 오래가는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오래가기 위해서는 이익보다는 가족과 같은 직원들의 행복이 우선이죠.” 성심당의 경영 철학은 다른 제과점은 물론 중국에서도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그렇게 성심당의 생각이 퍼져나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에 거창하게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씩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빵으로 돈을 벌지만 궁극적으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일이 성심당의 목표다. 나는 직원의 조력자 물론 성심당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가족 친화 기업이라는 추구가 항상 행복한 결과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임 대표 또한 배신감도 느껴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일들도 겪기를 반복했다. 세상의 모든 경영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임 대표는 자신이 좇는 가치가 옳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뚝심과 확신이야말로 성심당 성공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실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90%는 나가서 자신의 빵집을 차리고 싶어 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지원하는 건 손해 아니냐고도 말하죠.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의 꿈인 걸요. 그래서 저는 조력자 역할을 하기로 했어요.” 성심당은 동료애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매주 사보 형태로 내놓는 한가족신문은 10여 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성과를 공유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기술인이라는 특성상 서로 살갑기가 어려운 제빵인들의 특성상 이런 자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의 실천 성과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보상이 따른다. 그래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싸웠지만 화해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례들도 늘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62년, 세상이 답하다 빵을 만드는 것은 일 자체가 어렵고 돈을 벌기도 쉽지 않다. 새벽부터 준비해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며 사람들이 예약을 하지도 않는다. 예약이 없으니 수량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안 만들거나 부족하게 만들어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빵을 만들어놓고 무작정 기다리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음의 불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임 대표가 제빵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전생에 무슨 죄를 졌는지…” 하고 웃음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구조적으로 빨리 돈을 벌 수 없는 구조, 기다림이 체질이 되어야 하는 직업. 그 체질이 곧 마음이 된 것이야말로 임 대표의 힘이 아닐까. 수많은 시련과 실망 속에서도 그는 나눔과 사랑을 계속 말한다. 오로지 믿음 하나에 자신을 맡겨 구도를 거듭하며 정진하는 수도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불확실에 대해 믿으면서 정성을 담아야 하는 일을 62년 동안 한 회사라면, 지금의 성공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임영진 성심당 대표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임 대표는 그런 사람이고, 그가 경영하는 성심당은 그런 회사다. 그 뚝심을 느꼈기에, 성심당 가족이 만들 미래와 희망을 기대해본다.
- 2018-04-2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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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 핫(嫌HOT·핫한 것을 혐오하는 것)’ 신드롬
- 필자가 사는 동네 후미진 곳에 일본식 선술집이 하나 생겼다. 도무지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 상권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안에 들어가 보니 4인용 테이블 2개에 주방과 바로 마주보고 앉는 1인용 의자 4개가 전부였다. 젊은 사장이 주방 일을 겸하고 있었다. 메뉴도 일식집에 가면 최하 3만 원 이상 줘야 하는 메뉴 대신 1만 원 대 메뉴가 주류이고 주인이 알아서 내 놓은 모듬회가 그날의 메인 메뉴로 2만원이었다. 동네 구석진 곳인데다. 외관도 허름해서 처음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손님들끼리 얼굴이 익다 보니 말도 섞는 재미가 있었다. 주로 혼자 오는 동네 젊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주인에게 블로거 명함을 줬더니 인터넷에 소문 좀 내달라며 특별대우도 받았다. 그때 다른 손님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알려지고 나면 정작 동네 단골손님들이 밀려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끼리 속닥하게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과연 필자가 오랜만에 귀가 길에 들러 보니 자리가 없었다. 그날 만 그런 것도 아니고 빈자리가 있는 날은 행운이라도 잡은 것 같았다. 핫(HOT)한 장소가 된 것이다. 예약도 안 받고 4인 이상 손님은 받지도 않았다. 테이블이 4인용이라 다른 테이블 의자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팀이 단체로 오면 시끄럽다는 것이다. 한 사람 씩 오면 조용하게 즐기고 갈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단체로 오는 것보다 한 사람이 오면 회전도 빠르다는 것이다. 얼마 전 지인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미리 유명한 맛집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끼니 때 마다 순례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사는 지인을 만나 리스트를 보여 주니 대부분 만류했다. 비싸기만 하고 맛도 고만고만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넘치니 친절도도 떨어졌다. 그래서 제주도 지인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들을 소개 받았다. 전통 시장에 있는 간판 없는 음식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 해 전 필자의 자서전을 만들어준 대학생들이 있다. 그 당시 10여 차례 만나며 그때마다 필자가 아는 맛집들에 데려 갔었다. 단가가 좀 비싼 음식점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만나니 그때 유명 음식점들은 기억을 못하고 이름 없는 음식점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양재시장 골목의 실내 포장마차 갈치 찜, 낙원동 골목의 아귀찜, 신당동 떡볶이 집이 특히 좋았다는 것이다. SNS가 발달 하면서 사람들은 인증 샷을 좋아한다. ‘선찍 후식’이라고 음식이 나오면 사진부터 찍고 나중에 먹는다. 그걸 모르고 음식이 나오자마자 젓가락을 댔다가는 음식 모양이 망가지므로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 이런 행위는 “나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또는 이런 숨은 맛집을 알고 있다”는 ‘자랑질’ 심리이다. 사람들은 이제 방송에 나왔다는 유명 음식점은 기피하는 풍조도 있다. 어지간한 음식점들은 방송 출연 장면을 사진으로 내걸고 영업하는 곳도 많다. 여러 곳에 있는 프랜차이즈 점인데 마치 자기네 집에서 촬영한 것인 양 눈속임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서 맛을 보니 손님이 많아 복잡하기만 하고 맛도 그저 그랬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옆집에 간다. 혐핫 신드롬이다. 그래서 어느 음식점은 “TV에 한 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밖에 붙인 곳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 2018-02-1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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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즈 공방’으로 은퇴 후 인생 숙성 어때요?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치즈 시장은 어디일까? 와인이나 참치 등 다양한 식품을 소비해내는 세계 시장의 블랙홀 중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주인공은 한국이다. 우리나라 치즈 시장은 2011년부터 6년간 56%가 성장했다. 한국인의 입맛이 치즈에 길들여지는 상황에서 시니어의 두 번째 직업으로 치즈 공방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은퇴자의 새로운 직업으로 적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귀농과 결합한 생활 설계가 가능하고, 소자본으로도 시작해 볼 수 있다. 농촌 토착민들과 경쟁해야 할 가능성도 낮다. 굳이 시골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치즈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가 임실 사람들에게 자급자족할 수단을 만들어주기 위해 산양 두 마리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프랜차이즈 피자 식당이 대중화하면서 치즈 소비는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한국 낙농가들이 치즈를 제조하기 시작한 계기는 1998년 7월이다. 국립순천대학교에서 낙농가를 대상으로 한 유제품 제조 교육을 최초로 시작한 것이 시초가 돼 생산이 본격화됐다. 국내에서 개인이 유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직접 젖소를 키워 생산한 원유로 유제품을 만드는 목장유가공장과 원유를 외부에서 공급받아 제조해 유통하는 소규모 유가공장 그리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이 있다. 목장유가공장과 소규모 유가공장은 식품위생법에 따라 식품제조가공업에 속하지만, 치즈 공방은 즉석제조판매가공업으로 분류 신고 대상이다. 큰 욕심내다간 ‘낭패’ 여러 가지 형태 중 은퇴자들이 교육을 받고 유제품을 만들어 수입을 낼 수 있는 형태로 전문가들은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을 꼽는다. 국내에서 최초로 목장유가공 교육을 실시해온 배인휴 국립순천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 교수는 낙농업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무리해 사업화하기에는 넘어야 할 기술적, 제도적 장벽이 높다고 설명한다. “국내에선 완전히 정착된 산업 분야가 아니어서 도전해볼 만합니다. 유제품으로 식품제조가공업을 하기 위해선 고도의 유가공 기술뿐만 아니라 위생을 위한 시설도 갖춰야 하고, 까다로운 해썹(HACCP) 인증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수준이라면 치즈 공방으로도 충분해요. 큰돈 바라지 않고 친척이나 자녀, 손주에게 건강한 먹거리 나눠주며 할 수 있는 사업을 원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거예요.” 만약 유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원유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국내 낙농가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남아서 문제가 될 지경이지만, 관련법상 살균 상태에서만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관련 시설을 갖춘 목장을 찾아야 한다. 국내 원유의 품질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어서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목장의 수배가 마땅치 않다면 대형 유가공 회사의 저온살균유나 유기농시유를 구입해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제조시설을 갖추는 데도 큰돈이 필요하지는 않다. 3중 재킷 솥의 일종인 치즈 배트(vat)와 발효탱크, 숙성고, 냉장고에 상온을 유지할 냉·난방장치 정도면 가능하다. 10평 내외의 공간에서 이런 장비를 갖추려면 약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위치는 공간 확보만 가능하면 도심에서도 가능하다. 관련법상 시설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만 지키기 까다로운 수준은 아니다. 몇 가지 절차만 따르면 백화점 설치도 가능하다. 만약 규모를 키워 식품제조가공업 수준으로 확장하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경고한다. 관련 규정이 까다로워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은 낙농업계의 숙원사업이 됐을 정도다. 가공 기준과 성분 검사도 매달 받아야 하고, 품목별로 자가품질검사도 필요하다. 각종 농장일지도 철저하게 작성해야 한다. 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지켜야 할 규정이 더욱 많아진다. 관련 규정이 대기업형 유가공 공장을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생산 인원이 일정 규모가 되지 않으면 교육 이수 규정을 지키기도 어렵다고 낙농가들은 말한다. 국립축산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 목장형 유가공 사업을 통해 낙농가는 총 103여 개소로, 유제품 제조와 판매를 하고 있는 목장은 목장 42개소, 낙농체험목장은 13개소, 유제품 판매와 낙농체험목장을 겸한 곳은 48개소로 추정된다. 신선치즈로 틈새 노려야 치즈는 크게 가공치즈와 자연치즈로 나뉘고 자연치즈는 신선치즈와 숙성치즈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먹는 슬라이스 치즈는 가공치즈에 속하고, 피자 위에 뿌려지는 슈레드(shred) 치즈나 리코타 치즈같이 만들어 바로 먹는 것을 신선치즈, 15일부터 3개월 이상 숙성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것이 숙성치즈에 해당한다. 국내 치즈 시장을 살펴보면 피자용 치즈로 사용되는 모차렐라가 60%로 압도적이다. 이어 가공치즈가 35% 정도이고 신선치즈나 숙성치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내외에 불과하다. 국내 치즈 자급률, 즉 국산 치즈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4년 기준 4.5%에 불과하다. 시니어들이 치즈 공방을 통해 창업에 도전한다면 신선치즈가 적당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배 교수는 “신선치즈는 냉동 상태로 수입되기 때문에 신선하게 만들어 판매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이 고급화·서구화하고 있어 향후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와인이나 빵처럼 치즈와 어울리는 식품과 함께 판매하면 상품성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인 되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 겪어야 국내에서 유가공 관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충남대학교 동물자원연구센터에서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과정과 경북대구낙농농협이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서울에서 진행하는 교육과정으로는 한국낙농유가공기술원이 건국대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유가공기술 기초과정이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순천대학교의 경우 지난해 교육과정이 폐지됐다.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에코드림치즈연구소가 운영 예정에 있다. 교육비는 대부분 60시간 교육과정 기준 75만 원 내외이며 일부 교육과정은 우유자조금에 의한 낙농가 대상 비용 일부가 지원되고 있다. 해외 교육기관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한때 김정은의 입맛을 위해 북한 공무원의 입학신청에 퇴짜를 놓은 프랑스의 국립유가공기술학교(ENIL)도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다. 캐나다의 구엘프대학교(University of Guelph)의 치즈 제조 단기 교육과정도 유명하다. 치즈는 인류사에서 역사가 오래된 식품인 만큼 유럽과 아메리카 등지에도 다양한 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물론 교육 한 번으로 유제품 장인이 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교육 후 생산하는 유제품이 일정한 수준 이상 오르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숙성과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험과 감(感)이 필요하다. 실제로 각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서 수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론만큼이나 실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치즈에 미쳐 뉴질랜드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제조한 치즈를 와인과 함께 판매하고 있는 이태원 치즈플로의 조장현 셰프는 치즈를 너무 쉽게 생각하면 낭패를 보기 쉽다고 경고한다. “치즈 분야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또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려면 오랜 기간 공부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고요.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큰 숙제입니다.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많은 분이 도전하신다면 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 2018-01-3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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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탈출카페, 스스로 갇히고 탈출하는 사람들
- 눈을 가리고 밀폐된 방 안으로 들어가면 문이 자동으로 잠기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주어진 시간은 단 60분. 탈출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가상(?) 목숨이 달려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는 방탈출카페를 최은주(56), 박정하(53) 동년기자와 체험해봤다. ‘방탈출게임’은 원래 PC게임의 한 장르로 게임 속 숨겨진 도구와 단서를 이용해 방을 탈출하는 ‘방탈출’게임에서 유래됐다. 이런 게임을 모니터 속이 아닌 현실로 고스란히 옮겨둔 새로운 놀이문화가 바로 방탈출카페에서 즐길 수 있는 방탈출게임이다. 국내에서 201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방탈출카페는 홍대 및 강남, 대학가를 중심으로 현재 100여 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다. 알맞은 난이도와 테마 선택은 필수 방탈출게임을 하기 위해선 방탈출카페를 방문해야 한다. 한 지점마다 4~6개의 다른 테마의 방을 보유하고 있는데 선택하기에 앞서 난이도와 주제를 잘 살펴봐야 한다. 난이도가 높은 테마인 경우 탈출 성공률이 10% 미만이다. 만약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어려운 난이도를 선택한다면 한 시간 동안 아무 문제도 풀지 못하고 직원에 의해 구출되는 수가 있다. 19세 이상만 이용 가능한 19금 테마, 피와 잘린 신체 모형이 널브러진 공포 테마, 온갖 수수께끼로 도배된 미스터리 테마 등 다양한 주제가 있다. 여기에 어울리는 배경음악까지 깔리니 몰입감이 더해진다. 방을 선택했다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게 된다. 혼자서 체험할 수도 있지만 주로 2~6명이 한 그룹을 이뤄 입장한다. 그 전에 방 안에서 펼쳐질 내용과 문제를 절대 외부로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방탈출카페 입장에선 한 번 테마를 정하면 한동안은 수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탈출카페의 방에 대한 정보는 그들의 자산이다. 방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단서가 된다. 단서를 조합하면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이 나오고 그 답을 이용해 자물쇠, 전자장치를 풀면 된다. 왜 방탈출게임에 열광하는 걸까 방탈출게임의 인기로 2016년 이를 모티브로 한 JTBC 예능 프로그램 ‘코드-비밀의 방’이 주목을 끌었다. 한 시간 안에 방에서 빠져나오면 성공, 못하면 실패다. 방탈출카페 이용료는 지점마다 다르지만 평균 2인 기준 1인당 2만 원 선이다. 한 시간 체험으로 지출하는 비용치고는 다소 비싸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탈출에 도전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방탈출 마니아로 구성된 한 동호회는 각 지역의 방탈출카페를 돌아다니며 일명 ‘도장 깨기’를 하기도 한다. 방탈출카페 프랜차이즈 ‘셜록홈즈’ 홍대점 매니저는 방탈출카페가 젊은 층에게 호응을 얻는 이유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몰입감 있는 테마와 짜임새 있는 스토리, 그리고 시간제한에 따른 스릴감은 방탈출만이 가진 매력입니다. 또 탈출에 성공했을 때의 쾌감과 실패했을 때의 아쉬움은 또다시 방탈출에 도전하게 만들죠.” 시니어, 방탈출게임에 도전하다 최은주, 박정하 동년기자가 방탈출게임에 도전하기 위해 셜록홈즈 홍대점에서 만났다. 이들이 선택한 방은 난이도 4, 공포도 1의 ‘마법사의 세계’다. 도전을 앞둔 두 동년기자의 표정에선 자신감과 기대가 넘쳤다. 안대를 쓰고 방으로 들어가자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기고 타이머가 작동됐다. 어두운 방에서 의지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의 작은 손전등뿐. 방 안에서 찾은 단서를 가지고 문제를 풀기 위해 두 동년기자가 머리를 맞댔다. 영어로 써보기도 하고 온갖 이론을 생각하며 문제를 풀어보지만 쉽지 않다. 결국 무전기를 들어 힌트를 요청한다. “방금 찾으신 숫자를 순서대로 자물쇠에 입력하시면 됩니다”라는 무전기의 허탈한 대답.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푼 게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두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어머, 나 손이 두꺼워서 자물쇠 번호를 잘 못 돌리겠어!” 결국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물쇠 열기에 성공한다. 한 문제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문제를 풀자 숨겨진 비밀의 방이 열리면서 다음 문제가 나왔다. 다소 지쳐 보이는 동년기자가 20대 기자에게 “뭐 좀 알겠어요? 아는 거 있음 어서 말해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단순하게 생각해보라며 힌트를 줬다. 한 20분 정도 씨름을 했을까. 자물쇠 열기에 성공하고 마지막 방문이 열렸다. “아직도 남았어?”라고 소리치는 박정하 동년기자. 시작할 때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의 첫 방탈출게임의 결과는 아쉽게도 마지막 방 문제를 풀지 못해 실패! 방에서 나오자마자 이들이 한 첫마디는 “야휴, 당 떨어져”였다. 동년기자 체험 후기 최은주 동년기자 한 시간이 정말 금방 갔어요. 그래도 마지막 방까지 왔으니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시니어도 그냥 와서 즐기면 될 것 같아요. 어려울 때 힌트를 요청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한 기분이랄까요? 제가 젊었을 땐 경양식집에서 돈가스 썰어 먹고 경춘선 타고 당일치기로 여행 다녀오고 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한다니 색다르네요. 게임을 하다가 의견이 안 맞아서 서로 싸우면 어떡하죠?(웃음) 집에 가서 제가 먼저 자식들에게 방카페 예약했는데 갈래? 하면 좋아할 것 같아요. 재미★★★☆☆ 난이도★★☆☆☆ 가격★☆☆☆☆ 박정하 동년기자 젊었을 때 이런 곳이 있었다면 연인이랑은 모르겠고 친구랑은 올 것 같아요. 지금은 당이 좀 떨어지네요.(웃음) 쉽게 생각해도 되는데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봐요. 패턴만 파악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에 오면 성공할 것만 같은 느낌?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놀랐어요. 끝났다 싶으면 다음 방이 열리고… 개인적으로 제 자식들이 공포나 잔인한 테마의 게임은 안 하면 좋겠어요. 너무 사실적이라 좀 놀랐거든요. 재미★★★☆☆ 난이도★★☆☆☆ 가격★★☆☆☆
- 2018-01-0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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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 앤티크의 매력에 푹 빠지다
- 앤티크는 세월과 함께한 흔적을 통해 멋을 발한다. 대대손손 물려받은 가보로서 또한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한 사람들 곁에서 100년, 200년의 시간을 이어간다. 취미로 앤티크 제품을 수집하기란 쉽지 않다고들 한다. 백정림(白瀞林·53) 대표는 앤티크 물건들을 모아 이고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는 앤티크의 멋에 푹 빠졌다고 한다. 자연과 어우러져 더 빛나는 ‘이고 갤러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엔 꽤 큰 별장촌이 숨어 있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을 따라 근사한 별장이 들어서 있는데 그중 맨 위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백정림 대표가 운영하는 이고(以古) 갤러리다. 이곳은 그가 20여 년간 모아온 앤티크 컬렉션을 일부 전시해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개인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좀 더 특별하다. “이고 갤러리를 차린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아진 작품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어요. 지금 와서 수집을 그만둘 수도 없고…(웃음). 그래서 이왕에 만드는 거 상업적인 공간보다는 앤티크를 좋아하는 사람, 관심 있는 사람이 모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자 해서 하우스 갤러리 개념의 공간으로 꾸미게 됐죠.” 대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정원에서부터 그의 앤티크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 주위로 물확, 석등, 항아리 등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골동품으로 정원을 꾸몄다. 통유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거실과 부엌을 장식한 앤티크 컬렉션을 비추며 갤러리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갤러리를 마련할 장소를 찾기 위해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러다가 이곳을 알게 된 거죠. 무엇보다 자연 속에 위치해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이라 좋았어요.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한눈에 조망하고 그때마다 어울리는 앤티크 물건으로 갤러리를 꾸며 새로운 분위기의 공간으로 탄생시키기도 하죠.” 알수록 빠져드는 앤티크의 매력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앤티크 컬렉션의 향연이 시작된다. 주방, 거실, 침실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화병 제품은 18세기 세브르 화병이고 아르누보 시대의 화병도 있어요. 그리고 19세기 초의 저그, 빅토리안 시대의 티 캐디… 아! 탁자는 조선시대 교자상입니다. 쿠션은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방석을 재해석해서 만들었고요. 2층으로 가면 크리스털과 은으로 된 빅토리안 시대 디캔터도 볼 수 있어요. 거의 다 100년의 세월을 거친 아이들이죠.” 집 안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앤티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뿜어져 나왔다. 백 대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대학생 때 본격적으로 앤티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엔 7년 동안 서양 앤티크를 공부하며 홈 인테리어나 커트러리 위주의 수집을 시작했다. “어머님이 상당히 상류층 분이셨어요. 그 당시 유행했던 제주도 연자방아를 활용한 테이블과 조선시대 반닫이를 집에서 볼 수 있었죠. 덕분에 일찍 앤티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앤티크 물건은 들여놨을 때 집 안 전체를 우아하게 마무리해주는 문화의 힘이 있어요. 정리정돈을 해준다고 해야 하나? 그게 바로 앤티크가 갖고 있는 세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한 점도 안 사는 사람은 있지만 한 점만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하죠. 그 매력에 빠지면 그야말로 중독되는 거 같아요(웃음).” 재력가들이 앤티크 물건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이태원에 앤티크 가구거리가 조성되면서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반 앤티크 열풍이 한차례 불었다. 사실 진짜 골동품이기보다는 그 모양새를 흉내 낸 ‘앤티크풍’의 가구가 유행한 것이다. “앤티크가 주는 고급스러움과 멋스러움도 한몫했겠지만 상류층 사람들이 즐긴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더 많은 모조품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다수의 사람이 앤티크는 다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누구나 취미로 할 수 있는 게 앤티크 수집인걸요. 단 소비를 어느 정도의 선에 둘 것인가의 문제죠. 취미로 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고 싶어요. 제발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시작하면 좋겠어요!” 앤티크를 잘 아는 사람이 워낙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관련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섣불리 다가가면 예상치 못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백 대표는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사는 것 또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며 추천했다. “고려청자로 만든 기와를 뭐하러 사겠어요. 가치는 있겠지만 박물관에 있어야 더 잘 어울리겠죠(웃음). 저 같은 경우 테이블에 세팅해둔 빅토리안 시대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어요. 깨지면 어때요! 깨질 수 있는 DNA인걸요. 무서워서 쓰지 못한다면 앤티크를 최상으로 즐길 수 없어요.” 앤티크 강연 펼치며 제2인생 시작 젊은 시절 영어 강사로 유명했던 백 대표는 남편과 함께한 교육사업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전국 프랜차이즈 망까지 갖춘 사업을 대기업에 넘긴 백 대표는 그 후에도 강의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했다. 앤티크 물건을 수집하면서 차곡차곡 배운 지식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강의를 시작했다. “이고 갤러리에선 한 달에 한 번씩 앤티크 인문학 강의가 열려요. 또 반얀트리에서도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죠. 강의하면서 행복해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역시 나는 강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해요(웃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집안일을 도와주는 남자, 살림하는 남자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백 대표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품격 있는 홈 문화를 퍼뜨리는 게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tvN의 를 보니 남자가 다 일하고 그러는 모습… 에휴. 요즘 여자가 너무 중성화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아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정말 중요한데 말이죠. 품격 있는 홈 문화를 가르쳐 가족에게 정성껏 대접하고 그럴 때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고 싶습니다.”
- 2017-11-0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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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 수선집이 보이면...
- 며칠 전 미국에서 십 년쯤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기로 한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지낼 집을 함께 둘러보는데 동행해 주었다. 몇 군데의 집을 살펴보고 나와서 함께 걷는데 주변에 시장과 골목이 있고 갖가지 풍물스러운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친구가 말한다. “오옷...역시 한국이 좋아, 저렇게 오밀조밀하고 익사이팅한 것들이 정말 흥미로워~” 지금껏 한국에서 나고 살아온 필자도 그런 구멍가게나 재래시장을 지날때면 괜스레 친근한 맘에 고개를 돌려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녀는 얼마나 더 새삼스러울까 싶었다. 그 길을 나오며 또 한 마디 한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 조런 구두 수선집이 있으면 괜히 반갑고 좋아” 필자도 동네 가까운 곳에 구두 수선집이나 옷수선 가게, 방앗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이나 만두, 그리고 오래된 동네빵집들이 눈에 들어오면 무척 반갑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지금껏 잘 유지시켜온 사람들에게 친근감과 함께 참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물론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아직 개발이 덜되고 발전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동네에 들어서면 저절로 푸근해지고 정감어린 마음이 된다.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다 보니 요즘 더욱 그럴 수 있다. 또한 다행인 것은 언제부터인가 거대 자본에 밀려 몫이 좋지 않은 뒷골목으로 쫓겨났던 동네 빵집들이 하나둘씩 인기를 얻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본다. 표준화된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빵맛보다 정직한 재료로 가내 수공업식으로 만들어낸 빵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사라진 것들이 다시 그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반갑고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저 변모해가는 현대사회의 자본의 힘을 꿋꿋이 잘 버텨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래된 것들의 매력뿐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서 따뜻하고 진솔한 이들의 사람 사는 맛을 오래오래 느끼고 싶다.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에게도 그런 삶의 현장에서 그립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또 나이 탓이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사람을 정겹게 하고 마음의 여유를 즐길 시간을 주기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듯 반가운 풍경들이다. 특히나 감정이 기우뚱거리고 마음이 어수선할 때면 더욱 그렇다.
- 2017-10-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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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은퇴 후 직업으로 목공 분야에 관심 커져
-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7-10-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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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식에 대한 추억
- 올해 77세로 미수를 맞는 남편과 필자는 다섯 살 차이다. 남편은 6․25전쟁 때 아버지가 납치된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가끔 아버지가 납치되기 전 자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다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즐겁게 하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필자는 남편이 6.25전쟁 전에 자장면을 먹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도 없고 또 오토바이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배달을 시켰으며, 중국집이 있기나 했냐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하신 필자의 아버지는 주말에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의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살았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다른 집 아버지들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걸로 알았을 정도다. 어쨌든 그 당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필자의 외식에 대한 추억은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사먹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고 시절에도 빵집이나 광화문 근처 국수집에서 외식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를 했던 남편과 함께 OB`s Cabin’ 같은 명동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사먹었다. 다진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 당시 남편 사준 메밀국수를 먹다가 고추냉이(와사비)에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요즘은 아들네 식구가 주말에 오면 일하기가 싫어 외식을 하곤 한다. 메뉴는 주로 손주 입맛에 따라 결정한다. 손주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피자나 자장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전히 토종 식성이다. 밖에서 식사를 한 후 커피는 집에 와서 마신다. 일요일인 어제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어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손주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 겨자를 얹어주었더니 그건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이 다음에 연애할 때 겨자 못 먹으면 그 옛날 할머니처럼 쑥스러울 거라며 겁을 주며 먹어보라고 해도 손주는 먹어볼 시도도 안 한다. 제 엄마인 며느리의 토종 식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이다. 요즘 식당이나 커피 집은 거의 프랜차이즈다. 외국엔 몇백 년 된 식당이 많다. 몇 대에 걸쳐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인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브랜드의 음식들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그래서 누가 별다방(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따라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에는 각 가정마다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커피콩도 다르고 커피 내리는 방법도 달라서 당연히 획일화된 맛의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 잘될 리 없다. 우리나라도 그 도시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으러 여행도 하고 관광사업으로도 연계되어 지방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2017-08-23 1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