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은 독립적으로 할 수도 있고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를 선택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맹점 창업이 편리하다고 해서 잘 알아보지 않고 계약을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 한국 공정거래조정원 주최로 상공회의소 공정원 강의장에서 창업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설명회가 열렸다. 많은 정책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새 정부가 중점 추진할 예정인 ‘골목상권 활성화’ 정책 관련 ‘가맹거래’를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실 골목상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집과 가까운 곳에 마트가 있지만 두세 정거장 아래 대형 마트가 생겨 걷기 운동도 할 겸 걸어가 그곳에서 장을 볼 때가 있다. 아무래도 동네 마트보다 물건도 많고 싱싱한 상품을 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으니 이용은 하지만 동네 마트의 상권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도 한다. 이렇게 다들 대형 마트만 찾는다면 동네 골목의 영세한 가게들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웬만한 건 동네 마트를 이용하려고 한다.
오늘의 주제는 가맹점 창업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창업할 때 장소나 재료 등 본사가 가진 노하우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브랜드를 통해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고 계약을 한 뒤 문제가 생기면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계약서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가맹점의 갑과 을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최근 호식이 두 마리치킨의 경우처럼 본사의 잘못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 가맹점이 피해를 보게 되었을 때, 본사의 횡포로 영업을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중간에서 협상해주는 곳이 공정거래조정원이라고 한다.
공정위 산하 공정거래조정원은 소비자 간 분쟁이 아닌 사업자 간 분쟁을 해결해주는 곳이다. 조정을 통해 해결하며 90% 정도 성립률을 보인다고 한다. 분쟁 조정이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을 통하지 않고도 분쟁 당사자들끼리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도움을 주는 제도다. 이러한 해결 방법으로 공정거래조정원은 연간 2000건 이상의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맹 본부는 4200곳이 넘는다고 한다. 본사 하나가 업종별로 여러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 숫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가맹본부가 있으니 문제도 그만큼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공정거래조정원은 을의 처지인 가맹점주의 입장에 서서 분쟁을 해결 조절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맹점 계약을 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례도 들었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엉겁결에 가맹 계약을 한 후 마음이 바뀌어 해약하려 할 때 해지를 해줄 수 없다며 점포 입점을 위해 들인 비용까지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맹 본부는 가맹 희망자에게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한 정보공개서를 계약 체결 또는 가맹금 수령 14일 전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는 서로의 정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단다. 위의 사례의 경우 도장을 찍기까지 충분한 설명과 자료 제공이 없었으므로 ‘정보공개서 미제공시’ 해약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공정거래조정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약을 할 수 있었다.
가맹점 계약을 체결시키기 위해 본사가 거짓말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커피 프랜차이즈 가맹 본부의 말대로 한 달 매출 1200만원을 기대하며 커피 전문점을 차렸는데 첫 달만 반짝 호응이 있었을 뿐 이후 기대 매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자 사업안내서의 예상 수익표 아래 상권 매장 입지나 매장 환경에 따라 실제 매출액이 다를 수 있다는 문구가 있다며 본사에서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단다. 속았다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공정거래조정원의 분쟁조정제도를 알게 되어 상담을 한 후 ‘허위, 과장 정보 제공 시’ 보상해야 한다는 조항 아래 조정을 받았다.
도시락 매장 가맹점 사례도 소개되었는데 본사에서만 받아야 하는 재료를 친구를 통해 고기를 따로 납품받아 사용한 것이 적발되어 가맹 해지를 당하게 된 경우다. 계속 사업을 하고 싶었던 사장은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도 강제로 해지를 권해 공정거래조정원에 조정을 신청했고, 해지는 무효처리되었다. 2개월 동안 시정 명령이 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 해지가 되지만 이 사례의 경우 ‘잘못을 인정했으므로’ 해지 통보가 부당하다는 조정 판단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맹점주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조정 중재해주는 기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창업을 하게 된다면 오늘 배운 대로 꼼꼼한 체크를 하겠지만 그래도 억울한 일이 생기면 중재해줄 공정거래조정원이 있어 마음이 놓인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수입, 일과 직결되는 인기의 부침이 심한 연기자, 가수, 개그맨 등 많은 연예인은 다양한 부업을 통해 고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나 음악 등 연예활동을 지속해서 펼쳐나간다. 연예인 마케팅 분야와 방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연예인의 명성이 수입으로 직결되면서 연예인의 부업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탤런트 김종결의 고기 음식점 ‘주신정’, 개그맨 부부 김학래-임미숙의 중국식당, 배우 선우재덕의 스파게티 전문점, 황보의 음식점 등 그동안 연예인 부업은 고깃집 등 음식점이나 카페, 유흥주점 등 요식업이 주를 이뤘다.
연예인 부업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요식업은 여전히 수많은 연예인이 부업으로 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배우 홍석천이 서울 이태원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타이음식점, 퓨전 중국음식점을 잇달아 오픈하며 이전과 다른 부업 형태로서의 요식업 모습을 드러냈다. 프랜차이즈화하며 요식업의 부업을 확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패션 분야, 연예인 부업 텃밭
요식업 다음으로 연예인들이 많이 하는 부업은 바로 인터넷 쇼핑몰이다. 백보람, 백지영, 유리, 김준희, 이혜영, 황혜영, 박탐희 등 수많은 연예인이 의류 관련 쇼핑몰 등 다양한 인터넷 쇼핑몰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연예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은 부침이 심해 생기는 업체도 많지만 망해서 사라지는 곳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인기가 많은 스타를 중심으로 스타의 이미지나 이름을 특정 상품화에 사용하는 라이선스 사업을 부업으로 하는 연예인들이 늘고 있다. 배우 하지원은 자신의 이름을 건 화장품 브랜드 ‘제이원(J.ONE)’을 론칭했고, 배우 고현정은 소속사 아이오케이컴퍼니와 함께 화장품 브랜드 ‘코이’ 상품을 출시한 데 이어 패션 브랜드 ‘에띠케이’를 선보였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전 멤버 제시카는 선글라스 브랜드 ‘블랑(BLANC)’을 론칭한 데 이어 브랜드 이름을 ‘블랑&에클레어’로 바꾸고 여성의류 브랜드로 부업 영역을 확장했다. 고소영, 엄정화, 황신혜 등 일부 스타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 등을 출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예인들이 자신의 취미, 관심사를 부업으로 연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김나운과 홍진경은 김치 사업을 시작으로 부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머리숱이 적은 박명수는 탈모 관련 사업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몸 관리와 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훈은 헬스센터를 운영하고, 만남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박수홍은 웨딩업체를 이끌었다. 자동차 레이싱이 취미인 류시원은 레이싱팀을 만들어 연예인 부업의 새 영역을 개척해 눈길을 끌었다.
이색적인 연예인의 부업도 적지 않다. 개그맨 유세윤은 바이럴 광고를 만드는 소규모 광고 제작사를 경영하고 있고, 개그우먼 이세영은 웹에 19금 소설을 쓰는 작가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스타 최민수는 공방을 차려놓고 가죽공예를 하고 있고, 개그맨 정형돈은 웹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일을 부업으로 택했다.
‘인지도=부업성공’ 공식 없어
부업을 하다가 전업으로 삼는 연예인도 있다. 가수 김태욱은 성공한 연예인 출신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2002년 웨딩업체 아이웨딩네트웍스를 설립해 수백억원대 매출액을 자랑하는 규모로 성장시켰다. 김태욱은 현재 가수활동을 접고 웨딩업에 올인하고 있다.
스파게티, 고깃집 등 다양한 부업을 갖고 있는 선우재덕은 “연예인들은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 직업이다. 인기가 높을 때는 일이 많아 수입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1년 내내 작품 하나 못해 수입이 전혀 없을 때도 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불안정하고 인기의 부침이 심하므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 연예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부업을 많이 한다”며 연예인이 부업을 갖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부업을 갖고 있는 연예인들 중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부업 실패로 연예활동을 접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단란주점, 커피전문점, 매니지먼트, 삼계탕집, 연기학원, 프로덕션 등 다양한 부업을 가졌다가 모두 실패한 개그맨 이봉원은 “우선 특정 분야에 경험이 없는데도 돈벌이가 된다는 그럴듯한 말에 이끌려 부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연예인이 동업하자는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했다. 연예인들에게 부업이나 동업을 권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인지도만을 이용할 뿐 사업 파트너로 대접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투자금이 바닥나고 나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연예인 이미지에 영향도
연예인이 부업에 성공하면 연예활동도 지속해서 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그 영향이 심해 연예활동에 지장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견 연기자 김해숙은 “음식점을 한 번 크게 했다가 길에 나앉을 정도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지하철 탈 차비도 없을 정도였다. 현실을 이겨낼 수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게 됐다. 한동안 연기활동을 중단했다”고 말하며 앞으로 부업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연기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사용후기 조작 등 물의를 일으킨 일부 연예인과 유흥주점을 운영하며 청소년 접대부를 고용한 연예인 등 안정적인 연예활동을 하기 위해 선택한 부업이 오히려 연예인의 생명인 이미지와 인기를 훼손시키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물론 선우재덕, 김종결, 김나운, 홍진경 등 부업의 성공을 발판삼아 연예활동을 더 왕성하게 전개해나가는 연예인도 많다. 김종결은 “연예인의 인기만 믿으면 부업은 반드시 실패한다. 연기에 최선을 다하듯 부업에서도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뭐든지 척척,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잘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뭘 해도 저렇게 운이 잘 따르나’ 싶다. 부럽다가도 얄밉고, 성공 비법이 뭘까 궁금할 때도 있다. 막걸리 전문 주점 ‘가제트 술집’은 8년 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변두리 골목에 7평 남짓한 좁디좁은 공간에 문을 열었다.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맛집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매스컴도 꽤 탔다. 현재까지 전국 12개 ‘가제트 술집’이 매일 밤 손님맞이를 위해 불을 밝힌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가제트 술집’의 ‘가제트 오빠(?)’ 김경범(45) 대표. 그의 인생역전 운빨 성공기를 좀 들춰보자.
6년 전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지인을 따라 나섰다가 ‘가제트 술집’을 알게 됐다. 그런데 막걸리 집이라니. 홍대 옆 합정동이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을 때였다. 막걸리도 지금처럼 즐겨 찾는 이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술집 안은 빈틈없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술집이다! 회전율이 빠른 국수집, 밥집도 아닌 술집 대기 줄이 길기도 길었다.
“그때는 그랬어요. 요새는 경기가 안 좋은 것도 있고 본점과 2호점이 인근에 있어서 기다리지는 않아요.”
안경 쓴 얼굴,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이 바로 가제트 술집 김경범 대표다. 왜 굳이 술집 이름이 ‘가제트 술집’이냐고 묻는다면? 사진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가제트만큼 낯이 익다. 소소하게나마 TV 드라마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현역 배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2016 무한상사’에도 얼굴을 내비쳤고, SBS 드라마
과 영화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막걸리집 사장님이라는 직함은 배우의 삶이 이끌어준 또 다른 삶 중의 하나인 셈이다.
배우 인생에 막걸리 들어오다
인기 배우가 아닌 이상 배우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 들어올지 모를 캐스팅 기회 때문에 일정한 일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 배우인 김경범 대표도 술집을 열기 전 여러 직업을 섭렵했다. 연기 선생은 기본이고 오징어 장사, 목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카타르 현장 취업을 며칠 앞두고 양국 간 마찰로 해외 일자리를 포기했고, 중국 내 유통 사업도 생각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단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이 막걸리 아이템이었다.
“2009년 9월이었는데 막걸리 박람회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고 기록해놓았어요. 그런데 마침 박람회 날이 이사하던 날이더라고요. 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삿짐 차를 몰고 갔어요. 막걸리 붐이 일어나기 전이었죠. 그런데 막걸리 맛이 정말 다 다른 거예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막걸리 파는 술집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 없는 결정이었다.
올(all) 빚, 올(all) 도움으로 가제트 술집 문 열다
“그때 어떻게 시작했나 몰라.”
잠시 회상에 젖은 김경범 대표. 이 사업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난한 배우에게는 대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출이 되겠어요? 고맙게도 후배 중 주차 요원이었던 놈 하나가 전세자금담보대출로 1000만원을 꿔줬어요. 그리고 지인한테도 1000만원을 꿨고요.”
오로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부 다 빚이었고 도움이었다고 했다.
“당시 홍대 근처 상권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권리금이 어마어마했어요. 물어보는 곳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갈 수 없었어요.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름하고 작은 부동산 하나가 보였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부동산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더라고요. 그곳에서 지금의 가제트 술집 본점 자리를 안내해줬습니다.”
체계적인 상권 조사도 없었다. 가끔 가는 근처 닭집이 월 800만원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게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관건이었다. 당시 빈티지 인테리어로 꽤 유명했던 시나브로 자매가 가제트 술집의 대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메일을 보냈어요. 구구절절했죠. 시골에서 상경해 연극을 하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겠고,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감히 여쭤보겠다면서 인테리어를 부탁했어요. 솔직히 한 명은 반대, 한 명은 찬성했다더라고요. 결국 저랑 만나고 난 다음에 해주기로 하셨어요. 솔직히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해주셨어요. 빈티지 핸드메이드라는 것이 작품과 상업의 중간인데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웠습니다.”
한 달에 80만원만 벌면 좋겠다
2009년 11월, 가제트 술집이 드디어 오픈했다. 열자마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도 전화가 와요. 웨이팅(대기) 시간 얼마나 걸리느냐고요. 신기해요, 옛날 생각하면. 그런데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잘된 거 같아요.”
한 달에 딱 80만원 벌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다. 돈 욕심이 없었다. 80만원 벌려고 한 사람이 150만원 버니까 너무 좋았다.
“손님이 앉아서 죽치는 거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즐겁게 하니까 잘된 거예요.”
김경범 대표는 1년 반 만에 지인에게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자기처럼 창업한다고 하면 뜯어 말린다. 본인은 운이 좋았던 것이지 빚은 원래 못 갚는 것이 빚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김경범 대표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 부인이 생겼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을 이뤘다. 창업을 열망하는 후배, 현역 은퇴자의 조언자로 나서 창업을 도왔다. 그래서 10개의 가맹점과 2개의 직영점을 가진 이른바 프랜차이즈 가제트 술집으로 거듭났다.
평균대 위를 오르다, 배우와 가제트 사이
반면, 김경범 대표는 무대와 촬영 현장을 그리워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배우로서의 삶이 까마득히 멀어져 간 것 같아 부쩍 아쉽다. 그래서 요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인터뷰가 잡혀 있던 날도 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어는 솔직히 반반이에요. 배우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 측면이 있어요. 솔직히 내 생활에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오디션보다는 감독, 작가, 스태프를 자주 만나야 해요. 지금 사드문제 때문에 한류가 단절됐다지만 언젠가 다시 좋아질 거잖아요. 그때 김경범이라는 배우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캐스팅에서 유리하지 않을까요(웃음)? 그리고 사업적인 면에서는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내가 전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제트가 계속 승승장구할 거란 보장도 없고 말이죠. 블루오션인 중국에 치킨도 삼겹살도 아닌 막걸리 전문점은 어떨까. 강남이 아닌 합정동 뒷골목에 막걸리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들어왔던 것처럼요.”
물론 사업을 하면서 배우로서의 센스가 다양하게 발휘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경범 대표가 맛으로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꼭 무대 위 배우의 모습과 닮아 있다.
“대다수 음식점 주인이 자기 음식은 다 맛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관객이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건데 우기면 무슨 소용이에요. 관객에게 연기로서 만족감을 주듯, 납득할 만한 맛으로 손님에게 다가가야죠. 계속 손님의 입맛을 맞춰간 것이 주요했던 거 같아요. 최고의 맛이 아니라 만족감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공연할 때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처럼 손님이 과연 맛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속적으로 고민해요.”
그렇다면 김경범 대표의 앞으로의 계획은? 커가는 아이와 화가인 부인을 위해 사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발짝 다가서고 싶다고 한다.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굳이 배우를 하지 않더라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계획이라고.
“지금도 차 안에 유튜브에 관한 책이 있어요. 예전에는 돈을 좀 무시했는데 이제는 더 열심히 벌어보려고요. 배우가 꼭 아니어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밑바닥 배우 인생에서 우리 동네 뒷골목 세련된 막걸리 집으로 손님 취향 제대로 저격한 김경범 대표. 이제 다시금 꿈의 무대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운빨을 모으고 모아 또 한 번 날려보겠다는 홈런 한방! 그럼 두 손 모아 기다려볼까?
아파텔, 호피스텔, 벅세권, 맥세권, 스세권, 알파룸, 베이, 팬트리, 갭투자, 깡통주택 등의 신조어가 등장한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현재 부동산 시장에서 쓰이는 말들이다. 부동산 관련 용어는 주로 건축법 등에서 자주 쓰이지만 새로 등장하는 표현 중 일부는 건축업계 등의 주거용 부동산 마케팅 전략에서 만들어져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신조어는 현 세태를 반영하는데, 들여다보면 나름대로의 시사점도 있는 부동산 풍속도다. 오피스텔(Officetel), 아파텔(Apartel), 호피스텔(Hofficetel) 등의 신조어에는 호텔(Hotel)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고급화를 지향하는 최근의 부동산 트렌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패스트푸드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 지역을 뜻하는 부동산 용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지하철 역 주변 지역을 의미하는 역세권 개념을 모방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배달 가능 지역을 맥세권, 스세권 등으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이러한 신조어는 역세권에 위치한 집을 선호하듯 특히 1인가구의 젊은 세대가 프랜차이즈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중시해서 생겨난 말이다. 이는 도시 외곽의 주택보다 도심 주택을 선호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알파룸(α room), 베이(Bay), 팬트리(Pantry) 등 주택 실내공간과 수납공간 디자인을 지칭하는 신조어와 함께 갭투자와 깡통주택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깡통주택의 피해자는 세입자들이다. 요즘은 부동산 투자 개념 변화 등에 따라 주택 구입과 전세 또는 월세에 대한 생각들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 집값 상승이 확실하지 않으면 목돈을 투입해 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부담이라고 생각한다. 건물 감가상각과 함께 수리 유지비용만큼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파텔(Apartel) 건축업자들이 만든 신조어로 주거용 오피스텔을 말한다. 아파트의 편리함에 오피스텔의 장점이 결합된 형태로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합성어다. 발코니가 없고 욕실에 욕조 설치를 할 수 없다. 그 외는 아파트와 비슷하다. 주로 상업지역에 지어지기 때문에 고밀도로 짓는 양상을 보인다.
체크포인트 : 아파트와의 전용면적 비율 비교
오피스텔(Officetel) 오피스(Office)와 호텔(Hotel)의 합성어다. 오피스텔은 업무용 오피스텔과 주거용 오피스텔로 구분된다. 건축법에서는 오피스텔을 업무시설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주민등록 전입신고가 되어 있으면 취사시설 등 거주시설 구비 및 실제 사용하는 용도 등을 종합해 주거용 오피스텔 여부를 판단한다. 주거용 오피스텔일 경우 이외에 다른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 다주택자로 인정되어 처분할 때 양도소득세가 중과될 수 있다.
체크포인트 : 세금과 관리비, 주차문제, 시설수리 부담, 임대수요와 회전율
호피스텔(Hofficetel) 오피스텔(Officetel)과 호텔(Hotel)의 합성어로 숙박시설을 의미한다.
체크포인트 : 지분형 숙박시설, 숙박시설 운영과 관리 부담, 고객 수요
벅세권 버거와 역세권의 합성어다. 처음에는 맥세권이라 하여 맥도날드 같은 외식업체들이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 지역을 뜻했는데, 맥도날드 이외 다른 패스트푸드점들도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어 보다 포괄적 개념인 벅세권이란 용어로 바뀌었다. 스세권은 스타벅스와 역세권의 합성어다.
체크포인트 : 역세권, 주변 유흥시설, 정서문제
알파룸(α room)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공간을 의미하며, 아파트 평면을 설계할 때 남은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다. 입주자 선택에 따라 오픈형 서재로 만들거나 벽을 올려 방이나 수납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보통 드레스룸, 서재 등으로 활용한다.
체크포인트 : 자투리 실내 공간 활용과 편리성
베이(Bay) 아파트의 전면부 거실 쪽 공간을 말한다. 베이는 전면 발코니를 기준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이다. 전면부에는 대개 거실과 안방이 각각 한 개씩 위치하는데 이를 ‘2베이 구조’라고 한다. 3베이란 거실과 방 2개가 발코니를 통해 외부로 배치되는 구조이고, 4베이는 방 3개와 거실이 전면에 노출되는 구조다. 전면부 공간수가 많으면 집 전체가 밝아지는 장점이 있다.
체크포인트 : 실내공간 규모와 배치
팬트리(Pantry) 팬트리는 다양한 물건을 수납하는, 창고처럼 사용되는 공간을 말한다. 붙박이장을 대신해 대형 팬트리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는 식료품을 보관하는 작은 방을 의미한다. 주방 옆에 설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에는 복도나 작은 방에도 설치한다.
체크포인트 : 고객수요 반영 정도, 실내공간 활용
갭투자 아파트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의 차이(Gap)가 최저치로 줄어든 상황에서 전세가율이 높은 지역 급매물을 매입한 후 기존 전세 가격보다 높게 임대해 투자 자금 회수는 물론 시세 차익을 추구하는 방식을 말한다.
체크포인트 : 주택가치 판단, 시장분석, 담보대출
깡통주택 집주인이 집을 매매해도 대출금이나 세입자 전세금을 다 갚지 못하는 주택을 말한다. 주택담보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이 주택 매매 가격의 80%가 넘을 경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체크포인트 : 전세가격 비율, 등기부등본, 시장분석
부동산 시장,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 수요자들은 도심 역세권의 소규모 실속형 임대를 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시장의 지역 차별화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또한 주택 공급과 세금, 금융정책 등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 가격 상승과 주거문제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신혼부부, 소외계층 임대주택 제도도 도심 주택 공급의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복합 시장이다. 경제를 말하고 문화를 보여주는 시장이다. 부동산 트렌드와 신조어를 살펴보면 사회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건설사와 부동산 개발 업계는 이런 수요와 분위기를 감안해 마케팅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 미봉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으로서의 부동산 정책과 주거용 부동산 개발과 공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양질의 도심 부동산 공급의 지속성, 환경과 에너지를 고려한 개발 환경 조성이 숙제가 되었다. 주택정책은 어렵더라도 늘 기본원칙이 중시되면서 공감과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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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임대 수익률을 계산할 때 실수하는 것은 무엇일까?
해설과 답
임대수익률=연간 임대료(월 임대료×12개월)-대출이자/분양가격-보증금-대출금
재임대 상황 발생 시 소요시간을 생각해야 하고, 이러한 임대 공백으로 인한 월 임대료 감소는 연간 총임대료 중에서 통상 한 달 치로 추정한다. 시설 수리비용, 월세 수납관리에 따른 부담, 관련 중개수수료, 세금, 임차인이 지급하는 관리비도 적정성 등을 판단해야 한다. 오피스텔 적정 임대수익률은 보통 정기예금 금리보다 3% 내외를 더한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건물, 토지 등 자산가치도 물론 중요하다. 토지의 크기, 지분비율, 모양 등과 연관된다. 오피스텔 투자에 있어, 입지와 시설에 강점이 있는 좋은 오피스텔은 주변 공급물량이 많아도 매력적이며, 반대로 겉으로 나타나는 임대수익률만 높은 오피스텔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좋은 오피스텔은 주변 공급물량이 많아도 매력적이며, 반대로 겉으로 나타나는 임대수익률만 높은 오피스텔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수십 통의 전화도 이젠 스팸 문자 달랑 세 통. 식탁 내 자리는 아내가 차지했네. 아이고 내 신세. 장롱 속에 철 지난 옷들, 통 넓은 양복바지 저 주인이 누구였었나 이젠 짐 덩어리. 아~ 지나간 시간, 아~ 그리운 시간, 있을 때 잘할걸, 퇴근 후 2시간’ 정기룡(鄭基龍·59) 미래현장전략연구소 소장 겸 삼성에스원 충청 상임고문이 작사한 노래 ‘퇴근 후 2시간’의 가사다. 노래 속 그의 어깨는 처져 있지만, 이제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현역 때 못지않은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다. 지금의 행복한 시간이 있기까지, 그의 두 번째 인생 시계는 10여 년 전부터 돌아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0년 그가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전 보문산에 경찰 서류 800건이 버려져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 관내가 아니니 문제없다”고 보고했던 그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자신이 소속된 대전 서부경찰서의 수사과 서류였다. 한 직원이 사무 감사를 앞두고 업무에 부담을 느껴 서류들을 산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담당 직원은 구속되고, 당시 서장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가자 그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내가 걱정하면서 ‘중징계 먹으면 퇴직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라’ 하더라고요. 정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거예요. 뭘 해야겠다는 답도 없고.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언젠가는 정년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퇴직 후를 생각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 떠올리면 그때 그런 마음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는 정 소장이다. 사건 이후, 그가 대전 정부청사 경비대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확실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후배 경위가 어딜 바쁘게 가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학원에 요리 배우러 간다더라고요. 언제까지 경찰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정년 이후를 생각해서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한다면서요.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동안 뭐하며 시간을 보냈나 싶었죠. 퇴근하고 나면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가면 티브이 보고 쉬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찾아 시작하기로 했어요.”
제과·제빵, 떡, 두부 배우기에서 노무사 준비까지
그가 근무하던 대전에는 ‘성심당’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근처 성심당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그는 퇴직 후에 근사한 빵집 주인을 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1년 3개월을 투자해 자격증까지 따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에게 ‘제가 빵집을 차리면 빵이 잘 팔릴까요?’라고 물어봤죠. 근데 ‘요즘은 프랜차이즈 빵집이 대세라 개인 빵집은 문을 닫는 추세다’라고 하는 거예요. 미리 알려줬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래도 한번 해보고 나니 다른 것도 해볼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떡집에 찾아가서 떡도 배우고, 손두부 가게에 가서 두부 만드는 법도 배웠죠. 콩 가는 기계도 사고 솥도 걸었는데 집에서 하려니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 지금까지 했던 것들로는 전혀 승산이 없겠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사’자가 들어간 직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노무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말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에 다니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영어 점수 때문에 결국 그만둬야 했다. 빵을 배우기 시작해 노무사 자격증을 내려놓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자격증을 따느라 들인 돈만 해도 수천만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격증만 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얼마고 쓴 돈이 얼마인데. 근데 그거보다 더 속상한 게 이런 고민을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멘토가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다 아내가 데일카네기연구소에서 하는 리더십 강의를 받으라고 권유했죠. 3개월에 24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야 해서 망설였는데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도 투자 못 하느냐’고 해서 결국 마음먹고 등록했어요.”
3개월간의 리더십 과정을 이수하고, 4회 코치를 하고 나면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코치 마무리 과정까지 총 2년이라는 시간을 들이고도 강사 실습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 그때 나이 쉰,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포기하는 순간 이혼이야. 지금 과정 수료 못 하면 당신 평생 후회할 거야!”라는 아내의 협박(?) 덕분에 강사 과정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년퇴직 후 ‘이제 강사로 활동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공무원 교육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진행자가 저를 ‘프리랜서 정기룡씨’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전에는 명함 한 장이면 나에 대한 소개가 끝났는데, 퇴직하고 나니 한 30분 정도 내가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야 했어요.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니 아내가 차라리 연구소를 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렇게 ‘미래현장전략연구소’를 만들고 새 명함과 직책이 생겼어요. 소속감, 명함 등 현역에 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인데 퇴직하고 나니 그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침마다 하던 ‘다녀올게’라는 평범한 인사도 그런 것 중 하나였죠.”
아내의 꿈을 키워주는 것도 은퇴 준비
정 소장은 퇴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가 앞으로 어떤 명함을 쓸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떤 명함이 나의 얼굴이 될지 상상하면 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에 은퇴 후 계획을 세우는 데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다고. 물론 그에게는 ‘아내의 강력한 조언’ 역시 동기부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인생 2막을 준비한 것은 정 소장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뭘 해도 같이 배우고 함께하자고 약속했어요. 아내는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제가 은퇴 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를 하면 아내도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했죠. 분야는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도 같이하고 석사, 박사 과정도 동시에 이수했어요.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죠. 최근에는 사회복지사를 준비했는데 부부가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아내의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노후의 삶은 경제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닌 아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꽃을 좋아한다면 꽃꽂이를 배우거나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서 꽃가게를 차리도록 도울 수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면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활동하게끔 지원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보다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그만큼 성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반대로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시간을 할애하는 게 벅찰 수 있다. 야근과 회식이 잦은 우리 직장인들에겐 더욱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 소장 역시 이러한 이유로 ‘퇴근 후 2시간’ 투자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은퇴 후 직업을 찾는다고 해서 현재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죠. 맡은 바 업무를 다 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면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해요. 나는 경찰서장이 되면 절대로 회식이나 무리한 야근으로 직원들의 저녁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축하할 일이 있거나 논의할 문제가 있으면 점심시간을 활용하고, 퇴근 후엔 각자 취미활동을 하라고 권했죠. 그렇게 11년을 생활했는데 오히려 직원들도 업무시간에 더 충실한 태도로 임하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수혜자는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나였죠.”
퇴직 후 20년 준비 완료, 이제는 나이 드는 준비 중
수많은 수험서와 빵 굽는 오븐, 두부 가마솥 등은 지난 꿈의 산물로 남아 있다. 은퇴 설계 전문 강사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실패의 잔상과도 같지만, 그때의 경험은 그가 하는 강의의 좋은 재료로 쓰인다.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그이기에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도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그가 고군분투하던 시절 필요로 했던 ‘멘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보람도 더욱 크다. 직장생활에 한계가 있듯, 지금의 삶 역시 유한할 터. 그는 이제 노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롭고 너그러운 노인이 되기 위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있어요. 첫째는 내려놓는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이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거죠. 둘째는 의존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배우자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식 또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준비를 해야죠. 마지막으로는 신앙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두려워하죠. 이를 초월하고 소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하려면 무엇이든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강사로 활동하며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는 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년 3월이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는 그는 이전부터 롤모델로 삼은 이찬수 목사의 설교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노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골고루 하고 있는 셈이다.
“은퇴 준비 하면서 피아노도 배웠거든요. 시골 교회에 가서 직접 반주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복지사랑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땄으니 어려운 중·장년을 위해 직업상담을 하는 것도 좋겠고요. 사실 아들이 신학대학을 다닌다고 하니 아내가 ‘당신은 신학대학원이라도 다녀서 아들에게 도움을 줘야지’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아들이 진로를 바꾼다지 뭐예요. 그래도 덕분에 또 다른 꿈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투데이 뉴스 화면에 관심 가는 기사가 떴다. 바로 우리 동네 경전철 이야기이다.
‘난항 겪는 서울 경전철, 우리 동네 경전철 어디까지 왔나?’라는 제목으로 위치를 보니 필자가 사는 동네를 지나는 우이~신설동 노선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북한산 국립공원이 있는, 서울에서도 개발이 덜 되고 자연적 환경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풍치지구로 지정되어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주변 환경보호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개발이 안 되니 아마 강남의 어떤 곳처럼 집값이 폭등하는 일은 절대 없을 동네이다.
몇 년 전 온 동네가 들썩이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 동네 코앞에 경전철이 생긴다는 뉴스였다. 우리 동네는 강남 어느 곳에 비해 집값 땅값이 매우 저렴한 곳인데 당시 이 일로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 아들의 결혼을 대비해 집을 구하는 중이었는데 경전철 소식으로 필자는 막차를 타서 평소보다 매우 비싸게 아파트를 장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경전철 앞에 위치하진 않지만, 경전철로 인해 편리해질 교통으로 역세권에 든 이곳에 집값 상승이 있었던 것이다.
경전철이 지나는 역이 될 장소엔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커피집이 생기고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좁은 도로에 공사가 시작되어 매우 혼잡하고 시끄러웠는데도 아마 공사 후의 상권을 생각하고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예정대로 공사가 끝나지 않으니 커피숍은 문을 닫았고 지금은 프랜차이즈 돈가스 집과 유명브랜드 치킨집이 깔끔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이 가게들도 경전철 개통 후의 프리미엄을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출발해 수유동~미아동~정릉~돈암동~보문동을 거쳐 신설동에 이르는 10.7㎞ 구간의 경전철은 소형 객차를 2~3량만 이어 운행하는 일종의 '미니 전철'이다. 대형 객차를 6~10량 연결해 운행하는 기존 지하철보다 건설비와 운영비가 적게 들어서 교통 병목 지역이나 특수 목적의 산업. 주거 단지 등 수송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전철이 꼭 필요한 구간에 주로 설치된다고 한다.
서울시에서는 지하철이 멀고 도로가 좁아서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취약지구로 꼽히는 이 일대에 신교통수단인 지하 경전철을 도입해 교통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우이~신설 경전철은 서울시 최초의 경전철로서 완성되면 우이동 지역에서 도심까지의 접근이 편리해짐은 물론 소요시간도 많이 단축될 것으로 예상한다. 서울시는 기존 4호선 성신여대 입구 역, 6호선 보문역, 1호선과 2호선 신설동역에서 환승이 가능하여 기존 지하철의 이용 효율성을 더욱 높일 것이고, 수요의 분산으로 출퇴근 시 혼잡한 지하철 4호선의 이용 불편도 많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도 경전철 개통 후의 기대감으로 복잡한 공사현장을 몇 년째 참는 중인데 도무지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몇 번의 공사 중단 끝에 올 9월엔 개통식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렸었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끝났어야 하는 공사가 서울시와 사업자 간에 이견이 있어 자꾸만 늦춰진다고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잘 마무리되어 빨리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역 주변은 산뜻하게 변모할 테니 우리 동네가 한층 깔끔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예전에 둘이 누비고 다녔던 종로로 정했다. 클라우드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으로 빌딩 꼭대기 층 유리로 된 구름다리에 서면 발아래로 거리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바깥 모습도 차가 달리는 모습도 모두 밟고 있는 유리 아래로 보이니 아찔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종로2가 사거리는 많은 추억이 담긴 동네이다. 보신각 건너편의 이제는 종로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는 이 빌딩은 예전 화신백화점 자리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화신백화점은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움직이는 계단이라며 별 볼 일 없이도 중 고교 시절 친구들과 어지간히 들락거렸다. 우리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움직이는 계단인 에스컬레이터를 보려고 온 관광객도 많았다고 한다.
종로에는 화신백화점과 건너편 신신백화점이 있었다. 화신은 높은 고층백화점이었고 신신은 단층의 상점이 이어진 아케이드 형식의 백화점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친구들과 ‘신난다, 신난다, 신신백화점, 화난다, 화난다, 화신백화점’이라고 운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지금은 모 은행이 된 신신백화점은 참으로 아기자기했다.예쁘게 단장한 가게가 줄을 이어서 동대문에 있는 여학교에 다녔던 필자는 방과 후 이곳에 들러 가운데 분수도 감상하고 예쁜 가게를 들여다보며 구경하는 게 일과일 정도였다. 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일식 초밥 스시를 사러 신신백화점에 다니기도 했다. 돈암동이 집이었는데 엄마의 취향을 맞추려고 아버지는 언제나 필자에게 종로 신신백화점에 있는 스시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신신백화점 뒤편의 한일관이라는 한식집은 우리 가족의 단골 음식점이었고 엄마의 계 모임을 따라서 자주 가 본 곳이다. 엄마의 계 모임에서 갈비탕이나 냉면 불고기를 먹었던 맛있는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던 한일관이 몇 년 전 재개발 때문에 문을 닫고 압구정동으로 궁전 같은 건물을 짓고 이사했다. 맛을 잊지 못해 찾아간 우리는 옛날 그 맛이 아니라며 발길을 끊었다. 엄마는 예전 종로의 한일관이 그립다고 하셨다. 추억이기 때문에 예전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일 게다.
화신백화점에는 삼류 극장도 있었다. 학생 불가인 영화를 보려고 선도부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드나들었었는데 걸리면 정학인 그 시간이 어찌나 스릴 있고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놀기만 한 종로통은 아니었다.종로엔 유명한 학원도 많아서 여고 시절 EMI 등 여러 학원에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YMCA 건물은 당시로써는 고층건물에 속했다. 그곳에서 실내수영을 즐겼고 대학생일 땐 쿠키 만드는 강습도 받았던 멋진 곳이다. YMCA 건너편에는 복 떡방이라는 떡집과 고려당이라는 큰 빵집이 있었는데 약속장소로 꼽을 정도로 맛있고 인기 있는 장소였다. 프랜차이즈 유명 제과점이 성행하면서 떡집이 없어지고 고려당이 문을 닫았으니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후에 다시 복떡방 가게가 문을 연 걸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종로통에는 음악감상실도 많았다. 요즘 뜨고 있는 쎄씨봉 이나 디세네, 고 아나운서 이종환 씨가 운영했던 쉘부르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곳이다. 종로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모든 게 예전처럼 변함없으면 좋으련만 발전을 위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필자만의 추억을 위해 옛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부터 무지개처럼 피어났던 젊은 날의 추억이 곳곳에 스며 있는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종로통이다. 신나는 일도 많았던 종로에서 반가운 친구와 만나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남편을 잃은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두 딸과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던 그때 집 안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빈정거림을 참아가며 모았던 그 그림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 다시 찾아온 인생의 위기에서 그림은 또다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판교에서 만난 하효순(河孝順·66)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녀 나이 41세였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녀 곁에는 아이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생활력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고향인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뜻에 따라 상경해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 제의가 들어왔다. 막연히 꿈꿔왔던 큰 회사의 비서 자리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던 인천제철은 인천시청 근처. 자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곳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지인의 친구였고,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됐다. 그리고 결혼했고 아이 셋을 얻었다.
빈정거림 속에서 수집한 그림들
느닷없는 남편의 죽음. 하늘이 무너졌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았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니 돕겠다는 다른 이들의 선의도 악의로 느껴졌어요. 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건 딱 하나 제대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 바르게 키우겠다는 결심이었죠.”
생계는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를 도우며 유지했다. 오직 아이들의 공부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유일한 그녀의 버팀목이 된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했어요. 남편과 백화점에 가면 늘 들르던 곳이 있는데 맨 위층이었어요. 그곳에 갤러리와 분재 매장이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분재를, 저는 그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한 점씩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림을 산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화랑이냐는 핀잔은 양반이었다. 어떤 친구는 돌았냐고도 했다.
동향 사람이라 더 애착이 갔던 박생광(朴生光·1904~1985) 화백의 작품은 할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밖에 배정례(裵貞禮·1916~2006),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문봉선(文鳳宣·1961~ ) 화백 등 내로라하는 작가의 그림들로 집안을 채워나갔다. 남편을 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삶의 낙은 갤러리를 찾는 것이었다. 갤러리 직원들은 그녀를 ‘청담동 지영이 엄마’로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였다.
“문봉선 화백은 그가 대학원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작품에 관해 묻자 수줍어하던 문 화백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그 이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더 살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상 다시 돌려드려야 했어요. 그때도 절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은 단지 작품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작가와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큰딸 한마디에 정신 번쩍, 생계현장 속으로
어느 날 “엄마 우리 괜찮아?”라는 큰딸의 질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는 꺼져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 7년째, 아이의 지적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광명의 프랜차이즈 피자 매장이었다. 젊은이들과 계속 만날 수 있고, 일찍 끝날 수 있는 일을 찾다 발견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죠. 잘 돼야만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왕복 34km 거리를 출근했어요. 시장도 직접 다니고, 주방에서 설거지도 도맡아 했죠. 그 매장을 시작하면서, 본사 회장에게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죠. 덕분에 빚도 갚고 세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떵떵거릴 수 있게 됐다. 첫째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모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둘째 딸은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11년째 비서로 근무 중이다. 막내아들은 국내 은행을 다니다 뉴욕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미국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짧게 보낸 두 번째 결혼과 맞닥뜨린 지옥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쯤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재혼이다. 54세가 됐을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큰애 결혼시키고, 막내 군대 보내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가고, 밥 한 끼 함께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고요. 자식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친구들의 소개가 있었어요.”
차관까지 지낸 관료 출신에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았다. 둘 다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는 결심도 했고, 집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10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식도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고 남겨진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었다.
“지옥 같았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어요. 계속해서 숨고만 싶었고, 실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숨어 있었죠. 건강도 순식간에 악화됐고요.”
그래서 미국 뉴욕에 있던 아들에게로 갔다.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림이었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 작은 화랑들이 많아요. 그곳에 출근도장 찍듯 매일 가서 종일 그림만 보고 살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는 아들이 함께 관광지에 갔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2년을 더 그렇게 살았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큰 소리도 못내고 그렇게.
고희(古稀)에 개인전 통해 인생 되돌아볼 터
집 안에만 머물다 인생의 활기를 찾은 계기는 두 권의 책이었다. 부산의 친구가 선물한 컬러링북과 며느리가 가져다준 흔한 잡지 한 권.
무채색의 컬러링북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다 보니 그림은 소유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색을 입히고,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지금 그림 인생의 원천이 된 갤러리 겸 커뮤니티인 ‘아트담’이다.
“살면서 4B연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어요. 그냥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졸랐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한 명 가르친다는 기분으로 가르쳐 달라고. 그 이후로 2년 가까이 한 번도 결석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둥이 된 그림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관계들과 자신감, 재발견한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무작정 피하려는 삶,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건강도 되찾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몇 잔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인사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케치하러 이곳저곳 다니고, 마음을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손주들한테도 피자 할머니가 아닌 화가 할머니로 설 수 있어 더 좋고. 앞으론 손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효순씨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개인전이다. 개인전은 아마추어에서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위치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단순한 전시 이상의 무엇이다. 그동안 아트담 회원들과 함께했던 두 번의 그룹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 나이 일흔 살을 기념해 그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지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리다 보면 그 결과물들을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생기겠죠. 나이가 많더라도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내보인 자신의 작품의 제목은 ‘내 인생의 오후’였다. 그림 속에서는 곧 황혼을 앞둔 슬픔보다는 행복한 오후의 한순간이 느껴졌다. 이미 전해들은 인생의 굴곡이나 어려움이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늙는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불필요하게 의식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면 해요. 밝은 면만 보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아름다워져 있을 겁니다.”
“한 번 선택하면 18년을 좌우합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만난 후 내내 온화한 의사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였는데, 이야기 주제가 동물 입양으로 옮겨지자 갑작스레 진지해졌다. “사람을 입양하는 것과 같죠. 개와 고양이 모두 최근 수명이 길어져 평균 18년 정도 사는데, 함께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굉장히 긴 기간입니다. 신중해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박효철(朴孝哲·55) 대표는 국내 최대의 애견 프랜차이즈의 최고경영자이자 진료도 함께하는 대표원장 역할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동물병원 프랜차이즈 쿨펫(Cool Pet)은 전국에 150여 개 가맹점이 있고, 전국의 롯데마트나 이마트 등 대부분의 대형마트를 선점하고 있다. 이 밖에 호텔이나 놀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려동물 서비스 전문의 프랜차이즈 위즈펫(Wizpet) 등 그가 론칭한 크고 작은 애완동물 브랜드는 모두 5개나 된다.
수명 얘기가 나오니,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순환이 빠른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의 진중한 태도에 얄팍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한다.
박효철 대표의 말에 따르면 애완동물, 반려동물 시장은 최근 급속도로 커지며,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최근 혼자 사는 인구가 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애견인(愛犬人), 애묘인(愛猫人)들이 늘었어요. 최근에는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빈자리를 반려동물로 채우려는 시니어들이 늘어났습니다. 동물별 비중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개를 선택하는 인구가 90% 정도를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고양이의 인기가 늘어나면서 20% 이상을 차지합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애묘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이 추세라면 30%를 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니어 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고 있는 것은 선진국의 사례에 비춰보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반려동물을 키우는 독신인구 중 70% 정도가 시니어층이라고 한다. 시니어들이 개보다 고양이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도 한국과는 다른 특징이다. 시니어의 반려동물로 선택되는 개와 고양이의 비율은 4대 6 정도다.
생활공간 등의 문제로 망설였던 반려동물의 사육을 이제라도 시작하려는 시니어들에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그의 사업영역인 동물병원이나 관련 매장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지인 중에서 이미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실제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밥은 어떻게 주는지, 훈련은 어떻게 시키는지, 그 외의 관리상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미리 듣고 학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사육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현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 이후에 본인이 기르고자 하는 동물의 특징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입양은 맨 마지막 단계입니다.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입양을 하다보니 유기견의 증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유기견의 입양도 캠페인처럼 펼쳐지지만, 사육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 시니어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유기견의 경우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상태에서 구조되는데, 관련 기관에서 육체적인 상처는 치료해도,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둔 채 입양을 보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의 준비가 몇배 더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입양된 유기견들이 파양(罷養)되어 돌아올 확률은 절반에 육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니어에게는 어떤 동물이 키우기 좋을까? 물론 개인의 취향이 우선시되어야겠지만, 개와 고양이 중에서 선택하라면 고양이가 편하다고 조언한다.
“개는 의존적이어서 항상 곁에서 돌봐줘야 하지만, 고양이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물과 음식만 준비된다면 며칠 동안 집을 비워도 문제없을 정도죠. 배변 훈련도 모래만 준비하면 됩니다. 가르칠 필요가 없죠. 그래서 키우기 편한 쪽은 당연히 고양이입니다. 만약 강아지 중에서 추천하자면 몰티즈나, 요크셔테리어, 푸들, 시추 같은 소형견이 적합하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몸집을 줄인 아주 작은 견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최근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확대되면서 관리에 대한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 등이 늘어났지만, 지나치게 과잉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너무 병원을 자주 찾거나, 보호에 힘쓰는 것보다는 산책을 하는 등 같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 중요 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처럼 반려동물도 병원을 가 버릇하면 계속 탈이 나게 되어 있어요. 병원은 큰 문제가 없으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예방접종하러 가면 되고, 먹는 것도 그냥 사람 먹는 것을 함께 먹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인류는 그동안 그렇게 동물들을 키워왔고, 동물들은 그렇게 살아남았으니까요.”
입양할 동물이 결정되고 집에 들이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라고 조언했다.
“개든 고양이든 한 일주일 정도는 일부러 만지려 들지 말고, 먹이를 줄 때를 제외하고는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적응이 되면 먼저 가까이 다가올 겁니다. 산책할 때도 목줄을 조금 여유 있는 길이로 맞춰, 가고 싶은 곳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면 상대도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을 통해 얻는 장점을 박 대표는 ‘교감’으로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람은 말로 교감을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원초적 감정을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일부에선 동물이 수명을 다할 때의 상실감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 동물을 한 마리 더 입양해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나이 많은 동물에게도, 그를 잃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식구가 힘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니어가 동물을 키우게 되면, 동물이나 사람의 수명을 고려할 때 평생을 함께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반려동물이라는 말 그대로 남은 생을 함께 할 식구를 찾는다는 마음으로 입양에 임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