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나만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년들에겐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망이다. 굳이 ‘님과 함께’ 가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때문에 내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시선을 사로잡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직접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고제순(高齊淳·57) 원장의 흙집학교가 바로 그런 곳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고제순 원장은 애초에 농촌이나 건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곳에서 그는 ‘비판적 합리주의’로 잘 알려진 칼 포퍼(1902~1994)를 전공했다 .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원주에 자리를 잡고 연세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쯤 되던 시기였다.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 그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죠.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어요. 원주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때는 ‘새집증후군’이라는 단어도 몰랐으니까 대처할 방법도 알 수 없었죠. 아토피와 천식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도 얻었습니다.”
대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의식주를 공부하고,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衣) 식(食) 주(住)가 아니다. 의(醫) 식(食) 주(住)이다.
“현대사회에서 옷은 충분히 해결된 문제니까요. 우리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돌보는 것과 무엇을 먹는가, 어디에 사는가인데, 현대인들은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잖아요. 제도권에서 수십년 교육을 받았음에도 말이죠. 이런 삶의 기초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귀농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주 외곽 지금의 자리, 현재는 흙집 학교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 터를 잡았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선생이 생을 마친, 지금의 토지문학관이 있는 자리 인근이다.
터를 잡는 것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집에 대한 공부다. 그 전까지 못질 한 번 제대로 해본적이 없던 그였기에 공부를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공구도 조금씩 사 모았다. 황토로 벽돌을 만들 수 있게 유압식 장비까지 구입했다. 그런 준비과정을 통해 3년 만에 흙집을 완공했다.
왜 흙집이었을까? “다양한 형태의 집들 중에서 흙집을 선택한 것은 우선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많이 사용하는 참숯을 비롯해서 흙과 나무, 돌 등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이 이로운 에너지를 주거든요. 황토는 조직이 느슨해 온도와 습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집을 원했던 것도 이유입니다. 집의 수명이 다했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도 흙집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뒤끝이 고약해요. 폐기물로 변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니까.”
물론 흙집을 짓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집을 지을 당시 흙집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틈 날 때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옛집들을 살펴봤다.
가족과 함께 낙안읍성이나 용인민속촌, 안동 하회마을 등 옛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설계도 모눈종이를 사다가 직접 그려가면서 수정했다. 몇 번이나 수정해야 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물론 전기나 수도와 같은 전문적인 분야나 준공검사를 위한 행정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은 혼자 해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해냈다. 2000년 5월부터 11월까지 반년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흙집은 여전히 아름드리나무처럼 그가 기대고 쉴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두 딸을 위해 만들었던 다락방부터 볕이 잘 드는 거실, 일하기 편해 보이는 부엌 등 집안 곳곳에 그의 정성이 배어 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좋은 것을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학교였다. 이야기 도중 그는 책을 한 권 소개했는데, 후나세 스케(船瀨俊介)의 이다. 그 책의 부제는 ‘콘크리트에 살면 9년 일찍 죽는다’인데, 다소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다. “흙집에서 사니 너무 좋더라고요. 4년 동안이나 앓고 있던 질환들도 싹 나았어요. 나는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은 평생 일하고 돈을 모아 몸에 좋지 않은 아파트를 장만한다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누군가 이 흙집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건축 전문가라는 분들은 대부분 콘크리트 전문가들이니 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래서 경험은 짧지만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포털 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개설하고 ‘흙처럼 아쉬람’을 시작했죠.”
이름에 ‘흙처럼’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의 호 여토(如土)에서 따온 것이다. 자연 속에서 흙처럼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 또 다른 단어 ‘아쉬람’은 인도 힌두교도들의 명상을 위한 수행처, 즉 기거하는 집이나 촌락을 뜻한다. 인도 전역에는 수행자들을 위한 아쉬람들이 곳곳에 있고,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지냈던 간디 아쉬람은 수행자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꼽히기도 한다.
고 원장이 학교 이름을 아쉬람으로 지은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노동을 넘어 정신 수양과 자기 공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수행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육을 위해 그는 그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흙집 건축이론을 보완하고 체계화해야 했다. 어떻게 흙집을 지어야 이상적인 구조가 되는지, 구조적으로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튼튼한 집을 얻는지, 단열과 건축공법, 디자인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이다. 문득 이런 이론적 정리를 위해 그가 찾았던 스승이 궁금해지는데,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저에게 집 짓기를 알려 준 스승이 있습니다. 바로 새와 벌이죠. 풀숲에서 새의 둥지를 살펴보다 그 구조적 완벽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벌집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집 짓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배워야 할 점들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자연 소재로 직접 짓고,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을 튼튼하게 짓는다는 점이죠.”
그가 말하는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은 방의 형태를 뜻한다. 대칭 형태의 원형이나 육각형, 팔각형 형태의 방 구조를 갖는 집. 세계적인 명상 공간들도 비슷한 구조다. 이런 구조는 에너지가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흙집학교 ‘흙처럼 아쉬람’의 교육과정에서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철학, 그중에서도 생명철학을 토대로 한 구체적인 기술과 함께 생태적인 삶에 대해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는 말 그대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어요. 나와 남, 나와 사물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분리의식이죠. 하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나만 잘되고, 나만 행복한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생명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은 분리될 수 없고,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합일 의식을 통해 생태학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죠.”
그의 흙집에 대한 철학은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아 명지대학교에서 건축과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적도 있다고. 그가 운영하는 흙집학교를 건축과 교수나 건축사들이 찾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2004년 시작한 학교는 벌써 초급과정은 103기, 종합과정은 94기까지 배출했다. 인원으로 따지면 2700명 정도 되는 적지 않은 숫자다. 한 기수에 15~20명으로 운영되는 데, 초급과정은 이론 중심으로 3일 동안 진행되고, 종합과정은 13일간 이론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실습과 함께 가르친다. 학생은 주로 40~50대가 많고, 60대도 적지 않다. 30대나 여성도 기수마다 한 명씩은 있다고 한다.
“종합과정은 공구 사용법 같은 기초 지식에서부터 거푸집 설치, 구들이나 골조의 구성, 설비나 전기까지 모든 부분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함께 배운 동기끼리는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하게 되는데, 안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집 지을 때 서로 품앗이를 하는 전통이 생겼어요.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도 줄이고, 아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집을 지은 졸업생의 수는 적지 않다. 학교 쪽에 알려진 것만 따져 봐도 30% 정도 직접 지은 것으로 추산된다고. 숫자로 따지면 900채 정도 되는 셈이다. ‘흙처럼 아쉬람’의 다음 카페(cafe.daum.net/mudhouse)를 방문하면 졸업생들이 직접 건축한 흙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짓으면 실제로 어느 정도 건축비를 절약할 수 있을까. 흙집학교에서 알려주는 방식의 단단한 집을 시공사를 통해 지으려면 토지 매입가를 제외하고 3.3㎡당 약 6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인건비를 제외하고 자재비만 따지면 약 250만원이 소요돼 절반 이상 절약이 가능하다고 고 원장은 설명했다. 예를 들어 165㎡(50평) 정도의 흙집을 짓는다면 1억2500만원에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사에 의뢰했을 때에 비해 1억7500만원을 절약한 금액이다. 물론 모든 건축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 하는 수고로움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해야 한다.
흙집에 대한 그의 또 다른 꿈은 무엇일까? 그는 현실 속에서의 ‘흙집 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저처럼 자연으로 들어와 흙집을 짓고 사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자연 속 흙집으로 올 수 없다면, 흙집이 그들에게 가는 것이 맞지 않나하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파트를 흙집공법으로 짓는다든가, 연립을 흙집으로 리모델링하는 형태의 일들 말이죠.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는 못 해보고 있지만, 충분히 사업성도 있고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흙집 알리는 일을 더 열심히 하다보면 충분히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3월 넷째 일요일인 23일 포근한 날씨 속에 봄꽃이 만개하면서 전국의 유원지는 나들이 인파로 북적거렸다.
원동매화축제가 열린 경남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일대에는 가족과 연인 수만 명이 찾아 활짝 핀 매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며 봄 추억을 만들었다.
매화와 산수유 등 봄꽃이 활짝 핀 하동 섬진강변과 거제 외도, 통영 장사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에도 봄꽃 정취를 느끼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잇따랐다.
'미선나무 꽃 전시회'가 열리는 충북 청원군 미동산수목원에는 많은 가족 단위 행락객이 찾아 꽃향기에 취했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로, 이번 전시회에는 200여점의 분화가 전시되고 있다.
이미 진달래와 개나리 등 봄꽃이 만개한 제주도에도 주요 관광지마다 봄꽃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경기도 과천 서울랜드에 2만여명, 용인 한국민속촌에 4천여명이 찾아오는 등 전국의 유원지에도 봄기운을 느끼려는 시민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
3ㆍ15 마라톤대회가 열린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각지공원에서는 3천여 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해 건강을 다졌다.
산악자전거대회와 족구대회가 열린 경남 사천시 삼천포대교공원과 김해 가야대 운동장에도 각각 1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산행으로 봄맞이하는 등산객도 많았다.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에는 6천여명의 등산객이 찾아 산행을 즐겼고 평창 오대산과 원주 치악산에도 7천여명이 몰렸다.
전북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과 무주 덕유산, 정읍 내장산 등에는 1만여명의 행락객이 찾았고 인천의 대표적 산인 강화도 마니산에는 평소 주말보다 1천여명이 많은 4천여명이 몰렸다.
농촌 들녘에서는 농민들이 복분자 가지를 치고 밭갈이를 하는 등 한 해 농사 준비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