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살 만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터널을 지나면 결국 밝은 빛을 만나기도 한다. 때론 눈, 비 내리는 처절한 시련을 겪기도 하고 말이다. 명암의 시대를 지나 다시 한 번 뜻깊은 삶에 도전하는 박연재(朴連在·69)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9년에 탈옥수 신창원 검거사건을 특종보도한 후 KBS 서울 본사로 가서 홍보실 차장으로 2년간 근무했어요. 그때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광주까지 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박연재 변호사는 방송사 시절 이야기로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기자를 상대로 하는 홍보팀뿐만 아니라 KBS 광주방송총국 심의위원으로 정년을 마칠 때까지 방송사에 젊음을 바쳐 일해왔다.
정년과 함께 사법연수생 되다
방송사에서 정년퇴임이 임박했을 무렵, 박 변호사는 법무부로부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과거 국가 권력에 맞서 시위에 나섰다가 억울하게 사법시험 면접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사업연수원 입소 기회를 부여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박 변호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70년 전남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박 변호사는 유신시대, ‘독재타도’를 외치다 무기정학생이 됐다. 그래도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사법시험을 봤다. 그러나 1981년과 82년 1, 2차까지 합격했지만 최종 면접의 관문은 넘어설 수 없었다.
“1981년에 사법시험 면접에서 떨어진 뒤 방송기자 시험을 보고 KBS에 들어갔어요. 미련이 남아서 다시 사법시험을 봤는데 또 붙었어요. 그런데 그때 누가 저에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기자로서 종횡무진 일했다. 은퇴 인생을 앞두고 평생 소망이었던 꿈을 육십이 다 되어 이뤄낸 박연재 변호사. 사법시험에 합격한 지 근 30년 만인 2010년, 까마득히 어린 미래 법조인들과 사업연수원에서 함께 생활했다.
“내 앞뒤 좌우가 1987년생으로 나랑 26~7년 차이가 났어요. 아들보다 더 어렸어요.(웃음).”
연수원의 어린 동기생을 대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2년 후배인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연수원장이었다. 김 연수원장은 박연재 변호사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밥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사업연수원에 들어간 지는 올해로 10년, 변호사 사무실을 연 지 8년이 됐다.
열혈 변호사 박연재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서울이 아닌 광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대학과 방송사 생활까지 그곳에서 했기에 생활 터전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을 열고 2년 정도는 사무장을 고용했는데 점점 기자로서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써야 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 혼자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불안했어요. 어떤 로펌을 보면 변호사가 아니고 사무장이 소장을 쓰던데 나는 그게 참 신기해요.”
변호사를 만나러 왔으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왜 사람들이 사무장과 상담하고 가는지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광주지방법원 앞에 마련된 박연재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마을 변호사’라고 쓰인 벽보가 붙어 있다. 마을 변호사로서 어떤 사건을 가지고 법원에 출입하는지 궁금했다.
“의뢰인 중에 영수증도 없이 돈 빌려줘 놓고 그거 받아 달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민사에서 영수증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받아줘요. 참 답답하지만 해결하기 어렵죠. 그래도 변호사 초기 국선 변호사로서 음주운전으로 걸렸던 피고인의 음주 측정 수치를 분석해 무죄를 선고받게 한 적도 있습니다.”
황당한 일도 겪었다. 승소하고도 돈을 떼였다는 것.
“수임료를 지불하지 않고 변호사협회에다 강요에 의해 계약서를 썼다면서 투서한 사람이 있었어요. ‘설명은 변호사가 한 것 같은데 고지를 안 들었다’, ‘바빠서 도장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등등 내용도 다양해요. 강제집행하려고 주소지를 쳐봤더니 논두렁인 적도 있고요.”
최근에는 중국 단동 출신 동포가 박 변호사를 찾았다.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구속됐다.
“제가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썼는데 다행히 피고인 측에서 제 상고이유서를 읽고 대단히 감동했다더라고요. 판결이 파기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억울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다양한 사건을 맡아 변론해왔지만 그가 중점적으로 다뤄온 사건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6·25전쟁 때 양민학살이 많았어요. 무고한 학살이었다는 것이 국가배상 청구를 통해 입증되고 승소하면 국가가 배상해줬습니다. 2010년까지 한시법으로 끝났습니다. 대상자들 가운데 영암에서 시신을 찾지 못하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진실규명 불능이라고 했는데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국가 배상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먼저이지요.”
지금도 가끔 이와 관련한 문의가 오지만 한시적으로 끝난 일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다
그는 기자와 변호사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변호사가 더한 세상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부나 부자간의 갈등, 재산상속 문제는 가족 간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줍니다. 기자로 30년을 살면서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있더군요.”
법정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사건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는 의뢰인에게 파고드는 질문을 했다가 싫은 소리도 들었다.
“왜 심문하듯 따져 묻느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불리한 상황도 변호사인 제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길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공격하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삶을 살다
시니어가 되어 제2인생으로 맞이한 변호사 생활. 그에게 삶의 활력소는 단연코 ‘일하는 삶’이다. 퇴직 이후에 흐트러지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면 건강도 해치고 삶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일이 없으면 생활의 윤기가 떨어지죠. 봉사건 뭐건 사회활동을 해야 해요. 물론 용돈을 벌면 좋겠지만, 수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는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판례를 보고 소장 등을 챙긴다.
“그전에는 골프도 치고 무등산, 월출산도 가고 그랬어요. 방송기자로 지낼 때는 낮술을 좀 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해요. 외부 활동이 많은 변호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하려면 눈코 뜰 새도 없거든요.”
박 변호사는 이 시대를 사는 시니어로서 독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너무 비판적으로만 현실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감정을 유연하게 표출했으면 합니다.”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세에게 개선할 역할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니어의 경륜과 진중함을 잘 활용해야 참 시니어 아닐까요?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풍금으로 전해지는 선율은 환상적이었다. 화음의 오묘함에 매료된 소년은 깊고 깊은 예술의 체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숨은 예술가, 이종열(李鍾烈·82)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를 만났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무대 뒤로 들어갔다. 크고 작은 무대 장비들 사이에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문패가 달린 방 하나, 이종열 조율사가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개인 공간이다.
“1995년 1월부터 예술의전당으로 출근했습니다. 원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오페라단, 발레단 등 예술 단체들이 상주해 있었어요. 조율사 공간은 없었지요. 우면산 중턱에 건물 새로 짓고 다들 그쪽으로 이전하고 나니 방이 생겨 하나 얻었습니다.”
올해로 피아노 조율만 64년. 수천 명의 연주자를 만났다. 2003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나고 이종열에게 경의를 표하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헝가리의 안드라스 시프, 이탈리아의 미켈레 캄파넬라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 인정받은 조율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종열의 손을 거치면 음에서 빛이 난다”며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저는 국위선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조율사가 있구나 하고 말이죠.”
세종문화회관에서 15년. 그리고 예술의전당에서 25년.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 1호 조율사다. 2007년 피아노 조율사로서는 처음으로 명장 1호가 된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시간 음악 안에서 살아왔다. “평생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하니 행복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어떤 직업이든 다 스트레스가 있어요. 집에서 레코드판을 들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 뭔가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제 직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명한 연주자와 악수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겠다’고 해요. 그런데 연주자마다 추구하는 소리와 음색이 다르죠. 어떤 연주자는 ‘피아노 소리를 브라이트(밝게)하게 해주세요’ 또 누구는 ‘이쪽 소리가 너무 쨍쨍거려요. 줄이면 안 될까요?’ 합니다. ‘건반을 눌렀을 때 건반이 저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어제는 조율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날에는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게 제 일입니다.”
우리 가락을 통해 음을 알다
이종열 조율사는 전주 출신으로 전주 이 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행동거지와 언어, 옷매무새에 제약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공구를 다루고 피아노와 가까이 사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했다.
“양반은 뛰면 안 된다고 해서 조용조용 걸어 다녔습니다. 제사도 크게 지내는 집안이었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시조창을 참 잘 부르셨어요. 할아버지가 선창하면 동네 분들도 따라서 노래 부르곤 했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른들이 기분 좋으니까 풍악을 한 거예요.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는데 다 외워지더라고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거죠.”
학예회 때 친구들은 독창을 하거나 무용을 했는데 이종열 조율사는 무대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 시조창을 했다. 돈 벌어 제일 먼저 산 것도 클래식 음악이 아닌 시조창 레코드라고 말했다. 우리 가락에 귀가 열리더니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교복을 입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풍금소리는 너무 좋은데 학교 비품이라 만질 수 없었어요. 여유 있는 집 자식들이 기타를 사서 배울 때 저는 달밤에 반딧불이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어요. 할아버지가 단소를 자주 부셨는데 ‘궁상각치우’ 5음계였어요. 저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서양 음계가 필요해서 대나무를 뚫고 구멍 크기를 조절해가면서 직접 만들어 썼습니다.”
먼 훗날 생각해보니까 그 자체가 관악기 조율이었다. 불어보고 소리가 잘 나면 악기 하나를 완성해갔다.
조율을 만나다
풍금을 원 없이 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사촌이 끊임없이 전도를 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야 했던 명분은 바로 풍금. 페달을 밟으면서 풍금을 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회 집사라는 분이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데 멜로디에 옥타브를 첨가하는 정도였어요. ‘아, 저걸 내가 배워?’, ‘그럼 열심히 교회에 다니자’ 했어요. 오르간 교본을 사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음악 통론’을 펼쳤죠.”
오르간 교본을 떼고 난 뒤에는 580개가 넘는 찬송가 전곡을 쳤다. 그런데 풍금을 치는 게 너무 좋아지자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단소와 하모니카를 불 때는 몰랐는데 똑같은 장조의 3음계라도 건반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다. 집에 있는 공구를 교회로 가지고 가 풍금을 뜯어보고야 말았다. 풍금은 놋쇠 철판을 깎아서 조율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소리는 제 소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스스로 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풍금이 일본 제품이니까 어딘가 문원이 있을 것 같았어요.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니 ‘피아노 구조, 조율, 수리’라는 책이 일본에 있었어요. 장남으로서 농사 일구고 동생들 보살피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제가 이런 책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렵게 사정해서 용돈을 받아 책을 주문했어요.”
해방 후 일본과의 국교가 닫혀 있던 시절. 책이 한국으로 오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문제는 일본어였다. 해방이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일본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게 된 것. 해방 후 처음 발간된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교본이 오기 전 열심히 독학하며 글자를 익혔다.
“기다리던 책이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샛길로 접어들어 논두렁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피아노 구조 도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율을 시작한 거죠.”
풍금 조율을 시작하면서 피아노와 쳄발로와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피아노를 조율해도 쳄발로 등 다른 건반악기까지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조율의 인생을 정리하다
작년 말 이종열 조율사는 60여 년 조율사로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조율의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백전노장의 이야기는 담백했고 진솔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사람들은 조율사 인생에 주목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책을 읽다 보니 마치 판소리의 아니리가 연상되는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와 인터뷰를 해보니 확실히 알았다. 어려서부터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으니 자연스레 리듬이 말하는 습관으로 밴 것. 박자처럼 글 속에도 묻어 있었다.
이종열 조율사는 말초신경을 보호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고 했다. 술은 모임에서 맥주 반 잔 정도, 담배는 피운 적 없다. 귀가 나빠지면 높고 낮은 음을 구별할 수 없다.
“조율 자체는 기계를 보고 해도 되지만 조율의 최고 생명은 ‘보이싱’입니다. 음색을 고르게 음량 크기를 같게, 밸런스를 제대로 맞춰야 하거든요.”
아무리 조율이 잘되어 있어도 보이싱이 안 좋으면 피아노를 못 치겠다며 일어나는 연주자도 있다고. 그는 앞서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지만 인생 끝까지 조율에 매진할 생각이다.
“지금도 할 게 많아 보입니다. 학문은 끝이 없잖아요. 죽기 전날에도 궁금한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들이 들리고 보입니다.(웃음)”
그는 한 차원 높은 피아노 조율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서 발간한 기술 서적 중 보이싱 파트는 이종열 조율사가 집필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튜닝아트가’라는 모임도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튜닝아트, ‘조율은 예술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면서 조율에 관해 토론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서로 조언도 해줍니다. 지금 예술의전당에 새 공연장을 짓고 있는데 훌륭한 후배가 대기 중입니다. 이제 서서히 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줘야죠. 100년, 200년 할 수 없잖아요.”
그는 피아니스트 뒤에 선 조율사로서의 자부심을 조심스럽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관객은 조율하는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요.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박수치고 소리 지르잖아요? 그런데 연주자들은 공연장에 오면 저한테 매달립니다. 조율사의 손에 멋진 공연이, 연주가 달려 있으니까요.”
먹고살 만한 일을, 그리고 한 잔의 커피와 낭만적인 음악을 즐길 여유만 있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할 땐 그런 가상한 생각이 찾아든다. 그러나 ‘평온’은 흔전만전하기는커녕 희귀종에 가깝다. 위태로운 곡예를 연상시키는 게 생활이지 않던가. 광장시장의 빈대떡처럼 수시로 뒤집어지는 게 일상이다. 이 난리법석을 피해 흔히 주점을 찾아 소주병을 쓰러뜨린다. 그게 용한 대책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미술관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이라 썼지만 정확하게는 충전을 위한 행차, 또는 옹골찬 감성여행이다.
미술관은 창고에서 태동했다. 과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창고에 쟁이길 즐겼다. 이 저장공간은 개인전시실로 진화했으며 뮤지엄(museum)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 자체가 뮤지엄이었다. 이후 절대왕정의 붕괴와 산업혁명으로 상층부가 몰락하면서 뮤지엄은 시민사회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엄한 권위를 칭칭 두른 왕궁 루브르가 대중적인 뮤지엄으로 전환된 게 또렷한 사례다. 뮤지엄은 원래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미술관의 유전자도 뮤지엄에서 유래했다.
정신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미술관이 없는 공공사회를 생각해봤는가. 그런 게 없더라도 지구는 돌고 인간의 삶은 무사히 흘러가겠지만, 미감을 누릴 성좌 하나가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이란 우리의 둔한 정신을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이지 않던가.
삶은 일쑤 속되고 진부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사람의 감성을 슬쩍 흔들어 잠시나마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카오스로 미만한 세상에서도 미술관을 찾는 발길은 더욱 늘고 있다.
미술작품이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고 믿는 애호가들의 향유 욕구. 이에 부응한 미술관의 진화와 변신은 이미 하나의 추세가 됐다.
이제 미술관은 미술품을 소장하고서 그저 작품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듯 바지런히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외공간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은 물론, 자못 우아한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도맡고자 하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예전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부대공간의 비율은 9대 1이었지만 요즘은 1대 2로 역전됐다는 게 아닌가. 도서관, 체험관, 교육장, 카페, 식당, 아트숍 등을 설치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건축 자체를 예술적으로 기발하게 디자인하고 있으며, 정원 조성에도 공을 들인다. 도시의 안통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미술관도 많다. 이른바 전원형 미술관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만큼 매력적인 호객 매체가 다시 있겠는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
나는 지금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시 엑스포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와 있다. 경주시에 열린 첫 공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76)이 평생토록 그린 작품 83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에 착수, 2015년에 개관했다.
기부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산의 화통한 쾌척은 의표를 찌른다. 어차피 작품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생으로 떠날 방법은 없는 법. 그간에 신세진 세상에게 돌려주는 게 순리라 여겼으리라.
솔거미술관은 전형적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야트막한 야산이 푸근하게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거머쥔 미술관이다. 토함산 슬하의 막내둥이에 속할 야산의 이름은 대덕산. 1921년, 당시 남한 땅에 생존했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산 갈피에서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하니 애석하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의 모든 ‘마지막’은 애잔한 기분을 일으킨다.
미술관 뒤편 산 아래엔 자그마한 자연호수 아평지(阿平池)가 있다. 옷을 훌훌 벗고 늘어선 호숫가의 겨울나무들이 물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그림이라 눈길이 한참 거기에 머문다.
초록빛 수면을 노니는 물오리들은 오늘도 기쁜가. 생동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또는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미술관을 산자락 호숫가에 들어앉힌 게 아니겠는가.
‘빈자의 미학’ 스민 건축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나를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로 살겠다”고도 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삶과 건축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인간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봐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집다운 집은 어떤 것인가. 그가 말하는 요점은 ‘가짐보다 쓰임을, 더함보다 나눔을,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해 지은 집’을 짓고 사는 게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데 있다.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솔거미술관을 보면 그의 건축적 지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초목들을 곁에 둔 미술관의 외관은 들썩이는 구석 없이 수굿하다. 건축과 자연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없는 말을 두런거리나? 숲은 묵연하고 미술관은 겸손해 불화 없이 조응한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운 벽과 벽 사이엔 나무쪽을 켜켜이 채워 콘크리트의 투박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나무도 콘크리트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티끌과 이끼가 틈서리마다 배어 세월이 흐를수록 음영이 짙어지겠지. 마침내 잘 늙은 집으로 변모할 게다. 깊은 운치를 풍기며 미술관의 역사를 웅변할 게다.
미술관 내부 역시 승효상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회랑엔 계단과 함께 슬그머니 휘어지는 경사로를 조성해 물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했다.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흥미마저 자아낸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년층 관람객을 위한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전시공간마다 적절히 배분된 자연광과 인공광. 싱그럽게 자란 대나무와 열린 허공으로 흐르는 구름이 보이는 중정(中庭). 차경(借景, 외부 자연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기)을 위해 제3전시관의 벽을 뚫어낸 통유리 프레임의 이채. 전시작품이라는 주체를 효과적으로 북돋우는 객체들의 조합과 질서가 정교하다. 전시관의 천장이 매우 높은 건 미술관의 방장에 해당할 소산 선생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고려한 방책이다.
관람 인원 해마다 급증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이미 두둥실 떠올랐다. 인기 작렬! 솔거미술관 말이다. 개관 5년 차 신생 미술관이지만 관람 인원이 해마다 급증했다. 어느 하루는 자그마치 2000여 명이 관람했단다.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관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라니 통쾌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거미술관의 매력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동거하는 미덕, 그리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는 강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매혹은 소산 선생의 작품이 뿜는 아우라. 전시관 벽에 걸린 선생의 수묵화 앞에 선 심취한 표정들을 보라. 거무튀튀한 건 먹빛이요, 허연 건 화선지 맨살이구나, 그저 그리 여겨 심드렁히 스쳐 지날 것만 같은 젊은 관람자들이 눈을 끔벅이며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본다. 와우! 그런 찬탄을 터뜨리며.
전시장에 가득한 소산의 수묵화들은 실로 압권이다. 자유자재한 작풍으로 먹의 향연을 펼쳤다. 바위를 후벼낼 듯 거침없는 운필로 산수를 그리고 화조(花鳥)를 찍어냈다. 10m 너비의 대작을 예사롭게 그려내는 괴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거장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서양화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 게 한국화다. 수묵화단의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다. 서양화의 진격에 맥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소산이라는 거목이 떠억 버티어 현실을 일갈하고도 남을 수작들을 그려냈다.
미술관을 나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장쾌한 수묵 세례를 받아서겠지, 마음 기슭에 밝은 달덩이 하나 떠오르는 이 기분은.
솔거미술관 탄생시킨 소산 박대성 화백
“나에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소산 선생 말하길, 예닐곱 살 때부터 붓을 노리개 삼았더란다. 집안 제사 때면 펼쳐지는 사군자 병풍, 그걸 보고 그림이라는 걸 끼적이기 시작한 게 외골수 화업(畫業) 인생의 싹눈이었다. 마냥 붓질을 놀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들일을 해야 했으니까. 뒷산에 뛰어올라 땔감을 져 나르거나, 똥장군 짊어지는 일도 소싯적의 다반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일찌감치 양친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머니는 병으로, 아버지는 끔찍한 변고로 타계했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아버지를 반동 지주로 몰아 낫으로 살해했다니 참혹하다. 당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던 그의 몸에도 낫날이 들어와 팔 하나를 앗아갔다. 현재 소산의 왼팔은 의수다.
어린아이 때부터 겪었을 시련과 캄캄한 고독을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붓을 내던지지 않았다. 외팔로 삶에 가담해 밥을 벌기엔 그나마 지필묵이 상책이라 본 친척 어른들의 독려 덕이기도 했다.
“몸에 핸디캡이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었지. 그러나 불편한 조건들이 결과적으로 내겐 복이었어요. 부족함과 불편함이 오히려 행운이었던 거요. 나를 무쇠처럼 담금질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예전 작업실엔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불편이 차라리 길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불편을 통해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수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도 불편과의 동행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걸 당호로 다짐했던 셈이다. 이 ‘불편의 사제’의 붓놀림은 성정처럼 쾌활해 일필휘지에 능란하다. 깊고 아득한 먹색이 내려앉으면 그윽한 산경이 화폭에 아롱진다. 분출하는 화산의 기세로 묵을 써 화선지를 한바탕 희롱하고 나면, 거기에 웅장한 대자연이 꿈틀거린다. 정밀한 필선의 운용에 물이 올라 극사실화로도 이미 극치에 이르렀다. 서예는 또 어떻고? 김생과 추사를 진즉에 섭렵한 소산의 서(書)는 빼어나, 듣느니 늘 명필 소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생태계는 다중변주로 비옥하다.
“동양의 필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완벽한가. 소필, 중필, 대필로 구분되는 필(筆)을 좌우사방, 맘대로 돌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서양화 붓은 이게 안 되거든. 우리의 필은 자유로워 걸림이 없지. 대 그림자가 물에 스치듯 평화롭단 말여.”
830점의 작품을 기증한 이후 소산은 고향의 외진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작품량은 더 늘어났고, 대작을 그리는 습(習)도 깊어졌다.
“내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은 창작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으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추사를 때려잡겠다!”
“하하핫! 선문(禪門)에 전해오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추사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인데 감히 넘볼 수 있을까. 그러나 추사는 했는데, 나는 못한다? 그럴 리가. 내가 필묵을 닦기를 추사 못지않을 만큼은 하고 있소.”
소산에게 추사는 서화의 이상적 아이콘을 상회하는 존재다. 그는 선지식으로서의 추사를 타넘고 싶은 것이다.
인생에 영감을 준 도서 - by 금난새
생활의 예지 (해리 골든 저)
지금은 절판된 수필집이지만, 수십 년 전 금난새에게 아버지 금수현 선생이 준 지혜와는 또 다른 영감을 불어넣어준 책이다. 저자가 내밀하게 바라본 인간의 모습과 그만의 인생철학을 통해 삶의 방향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전쟁과 평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저)
1800년대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러시아 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실존 인물을 포함해 등장인물만 500여 명이 나오는데, 이들을 통해 사회를 향한 풍자를 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윤리적 문제까지 아우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저)
사랑과 전쟁을 소재로 쓴 마거릿 미첼의 단 하나뿐인 작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는 명대사로 유명하다.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영화와 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소재로 사랑받고 있다.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숱한 음모와 복수의 상황 속 한 인간의 번뇌를 그린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들끓는 복수심, 생사의 기로에 선 불안한 내면 등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내변산 탐방센터를 기점으로 삼는다. 여기에서 직소폭포까지는 약 2km. 약간의 언덕길이 있으나 소풍길처럼 가뜬하게 오를 수 있는 코스다. 직소폭포에서 내소사나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도 있다.
걷기 좋은 산길이다. 숫제 수묵화로 펼쳐지는 겨울 내변산의 숲길이다. 내딛는 발길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그러자 몸이 환호하며 깨어난다. 산 기운일까, 기분 좋게 엄습해온 어떤 에너지가 근육과 관절,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낀다. 몸이라는 탄성체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걸 깨닫는다. 이는 산길걷기로 얻어지는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깨어나는 게 몸만은 아닌 모양이다. 찬물에 씻긴 듯 정신마저 깨어나는 느낌이다. 이렇게 완연히 말끔해진 심신으로 자연과 만나는 즐거움이라니. 이를 무상(無償)의 행복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오늘은 좋은 날이다.
내변산은 아름다워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남쪽의 금강산이라 해 남금강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알아 소금강이라 불렀다. 부처가 설법했다는 능가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기 산기슭 둔덕에 절이 보인다. 실상사(實相寺)다. 너른 터에 법당과 산신각만 덩그러니 앉아 있다. 과거엔 큰 절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모두 스러졌고, 그걸 근래의 불사로 다시 일으켰다. 연혁은 스산하고 꾸밈새는 허전해 시주하는 불자도 드물겠지. 요즘은 절도 크고 화려해야 인기가 있다. 이게 파행이다. 전각들이 산을 덮고, 불탑이 하늘을 찔러야 부처에 가까워지는가. 아닐 것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화엄의 바다라는 게 부처의 가르침이었다. 절이 작으면 적폐도 적다. 이렇게 보면 작은 절 실상사가 오히려 미덥다.
길은 이제 산의 안통으로 스며든다. 평지 길이 끝나고 소 잔등처럼 부드러운 언덕길이 이어진다. 어느덧 으슥한 첩첩산중이라 풍치도 일변해 어디나 볼 만하다. 눈을 멀리로 던지면, 저마다 우뚝하고 훤칠한 산봉들이 미모 경쟁을 펼치는 걸 볼 수 있다. 도무지 승부를 가르기 어려울 부질없는 경연은 산 아래에서 한결 질탕하게 펼쳐진다. 산의 몸을 어루만지며 교태를 부리는 계곡물과 호수가 경연에 가세한 게 아닌가.
산중의 경연엔 가장이나 성형이 없다. 아귀다툼이나 주먹다짐이 없다. 저마다 순리의 힘과 미덕을 아는 참가자들이 운집했을 뿐이니까. 이 아리땁고도 웅장한 경연을 우리는 ‘조화로운 자연’이라 일컬으며 경이를 느낀다.
선녀탕을 지나 다시 언덕을 오른다. 숨이 차오를 수밖에 없는 비탈과 아슬아슬한 벼랑 가엔 나무나 철로 만든 계단이 설치돼 있다. 덕분에 노약자들까지 쉬 오를 수 있으니 이기(利器)다. 그러나 산중의 지나친 인위여서 생뚱스럽다. 그렇더라도 직소폭포의 허연 물기둥을 바라보느라 투덜거릴 겨를이 없다. 내변산 풍광의 절정으로 꼽히는 폭포이지 않은가. 이 폭포는 바위 벼랑을 거의 수직으로 쏟아져 내려 통쾌한 맛을 선사한다. 수량이 풍부한 철엔 한층 호방한 굉음으로, 세상의 모든 잡음마저 삼켜버릴 기세로 산중을 쿵쿵 울리며 포효하겠지.
직소폭포를 뒤로하고 등산로를 끙끙대며 올라 쌍선봉에 닿는다. 쌍선봉 꼭대기엔 ‘달 보기 좋은 암자’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그리고 명기(名妓) 매창(1573~1610)의 숨결이 서려 있다. 내변산이 있는 부안에서 태어나 일생을 부안에서 살다 떠난 그녀는 조선 기녀사의 전설이었다. 비록 천민 신세였지만 가무는 물론 시에 능한 교양인이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유교적 윤리의 냉동고에서 벗어난 자유인이기도 했다. 이런 매창이 37세 이른 나이로 죽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애통해한 건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1569~1618)이었다. 두 사람은 10여 년에 걸친 교제를 했던 것이다.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허균의 시가 현존한다.
나는 지금 한겨울의 얼어붙은 공기 속에 있는 월명암에서 매창을 생각한다. 매창이 곧잘 찾았던 암자이기에. 매창은 ‘등월명암’(登月明庵)이라는 시를 통해 구도의 마음을 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불가에 귀의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일찍이 기방 자체가 절집에 맞먹을 도장임을 깨달았을 듯하다. 경박한 세태를 야유하고 내생의 피안을 노래한 매창의 시편들을 보면 그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하니 매창은 사랑스러운 여인. 고인을 향한 팬들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 현재진행형이다.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우리의 전통주는 주정에 물과 조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주다. 몸에 부담을 덜 줄 뿐 아니라, 맛과 고상한 운치가 남다르다. 달콤한 감칠맛, 쓴 듯 아닌 듯 쌉싸름한 맛, 묵직하면서도 쾌청한 알싸한 맛….
프랑스 와인의 지역 고유 맛에 영향을 주는 테루아가 있듯 전국 팔도 고유의 특산 농산물로 지역의 맛을 보여주는 우리의 전통주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술의 빛깔, 맛, 향, 스토리, 그리고 곁들임 음식 등은 외국의 유명 술인 와인, 위스키, 사케 등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아쉬움에서 정부 차원의 전통주 지원 정책에 대한 요구가 이어져 우리 술의 가치를 더욱 높일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의 전통주 제조업체들과 원료 공급 농민, 주류연구 전문학자, 유통업자들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진흥협회는 장인들의 혼이 담긴 전통 명주의 역사와 맛,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아울러 보다 과학적이고 정교한 테이스팅을 통한 세련된 맛 표현, 사실적이고 흥미로운 스토리 개발, 전통주에 어울리는 마리아주 개발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설날맞이로 달콤한 맛, 쌉싸름한 맛, 은은한 맛의 대표 주자인 전통 명주 3인방에 대해 알아본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명주의 역사를 알고 우리 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달콤한 맛 ‘감홍로’
제조원 농업회사법인(주)감홍로
유형 일반 증류주(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40%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70%, 조(수입산)30%, 정제수·용안육·계피·진피 ·정향·생강·감초·지초(자초)
Story
감미로운 맛, 황홀한 붉은 빛, 맑은 이슬의 의미를 담은 술. 감미롭고 붉은 빛, 강렬하고 독특한 향이 미각, 시각, 후각을 만족시킨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이강주,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증류주로 꼽을 만큼 명성이 높은 술이다. ‘별주부전’에서 자라가 토끼를 감홍로로 유혹하고 ‘춘향전’에서는 춘향이 한양으로 떠나는 몽룡에게 이 술을 내어놓는다.
감홍로는 고려시대 때 평안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3대 명주 중 하나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대대로 감홍로를 빚어온 가문의 주조 비법을 후손인 이기숙 명인이 섬세하게 복원했다.
누룩과 쌀로 빚은 술이 발효하면 1차 숙성시킨 후 두 번의 증류 과정을 거친 다음 한약재를 침출한다. 이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까지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도수가 높아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며 묵힐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색, 맛, 향이 조화를 이룬 조선시대 최고의 명주. 다른 음료수와도 잘 어울린다. 술에 약한 사람들이 칵테일을 만들어 마셔도 무리가 없는 격조 높은 술이다.
Taste
패션으로 치면 한복 두루마기에 걸친 모피 숄처럼 고급스럽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향기와 계피향이 어우러지면서 내는 풍미가 일품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혀끝에 살짝 감도는 단맛과 함께 스파이시한 향이 입안에 확 퍼진다. 높은 도수와 강렬한 향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목을 넘어간 후에도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입안에 계속 머물며 여운을 남긴다. 섬세함과 중후함을 동반한 고급스러움이 가히 한국의 위스키라 불릴 만하다.
Food
맵고 자극적인 음식보다 담백한 안주가 어울린다. 지방이 적은 육포나 대구포도 감홍로의 맛과 향을 잘 살려주는 안주다. 스테이크, 숯불이나 그릴에 구운 돼지고기, 양꼬치구이 등 육류와도 즐길 수 있다. 해산물 샐러드, 신선한 허브로 마리네이드한 연어 등의 해물요리와도 궁합이 맞는다. 초콜릿, 블루치즈, 견과류와 함께 가볍게 마셔도 좋다.
쌉싸름한 맛 ‘진도 홍주·백주’
제조원 대대로 영농조합법인
유형 일반 증류주
용량 750ml, 375ml (진도백주 375ml)
알코올 함량 40%, 38% (진도백주 38%)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 99%, 지초(국내산) 1%, 진도백주 쌀(국내산) 100%
Story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이로 잘 알려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맛에 반해 읊은 노래다. 지도 제작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다 각지의 전통주를 접했을 터. 김정호 선생은 흥선대원군에게 완성된 대동여지도를 바칠 때 마치 붉은 눈물이 방울방울 모여 술을 이룬 것 같은 진도홍주를 함께 올렸다고 한다.
진도홍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지역 세도가들이나 살림이 넉넉한 민가에서 전통비법으로 빚어온 토속 명주다. 쌀이나 보리에 누룩을 넣어 숙성시킨 뒤 증류한 순곡 증류주. 마지막에 지초(芝草) 침출 과정을 거치면 붉은 빛을 띤다. 지초 뿌리에는 산삼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예로부터 이 약초를 넣어 빚은 술은 음용뿐 아니라 치료 목적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효능도 좋지만 무엇보다 지초 뿌리에서 우러난 붉은색이 황홀하다. 입술을 갖다 대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조선시대에는 ‘지초주’라 불렸는데, 임금에게 올리는 최고의 진상품으로 꼽힐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도는 한양에서 먼 남쪽 끄트머리에서도 뭍에서 떨어진 섬인지라 유배지로도 적지(適地)였다. 자연스레 귀양살이하러 온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가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문장이나 글씨, 그림, 노래 등 수준 높은 문화에 술이 빠질 리 없었다. 시 한 수 읊으며 한 잔, 붓 한 획 긋고 한 잔, 노래 한 자락에 화답하며 또 한 잔. 이렇듯 유배지에서의 시름을 잊게 했던 술이 진도홍주 아니었을까.
진도백주에 붉은색을 띠게 해주는 지초를 침출하면 홍주가 된다. 백주는 국내산 쌀을 이용해 만든 밑술을 발효시킨 뒤 증류한 전통 소주다.
Taste
예상을 뒤엎는 맛.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깨끗하고 단아하고 견고한 느낌이다. 황홀한 비단노을 빛 아래 남성성이 숨어 있는 듯하다. 화끈하면서도 묵직한 맛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단맛이 짧은 대신 향의 여운은 오래간다. 다시 말하면, 양면성을 지닌 개성이 분명한 독주. 스트레이트로 혹은 얼음을 채워 음미해도 좋지만 술에 약한 사람은 맥주나 탄산음료에 섞어 칵테일로 마셔도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서가 한 귀퉁이에 놓아두고 가끔 한 모금씩 마시면 김정호 선생이 말한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진도백주는 알코올 함량이 38%. 꽤 높은 도수이지만 순곡주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살아 있어 마치 무엇을 그려도 되는 빈 도화지 같은 느낌이다. 목넘김이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끝 맛이 입에 맴돈다. 온더록스로 즐겨도 좋다. 화이트 스피릿(White Sprit)으로 활용하면 칵테일 맛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Food
육류, 생선과 두루 잘 어울린다. 다만 도수가 높고 향이 강해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식이 좋다. 어란, 굴튀김, 진도 특산물인 구기자를 이용한 구기자갈비찜, 전복탕 등은 진도홍주에 잘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 큼직하게 썰어 노릇노릇하게 구운 두부스테이크, 쫄깃하고 담백한 문어숙회도 술맛을 돋운다. 기름진 중화요리를 곁들이면 부드럽고 알싸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호두, 아몬드, 대구포 등 가벼운 안주도 무난하다.
진도백주는 생선회나 전류, 산적, 쇠고기구이 등 다양한 한식 메뉴들과 잘 어울리며 육포나 땅콩 등 마른안주와 곁들여도 좋다. 매콤한 겨자 맛이 매력적인 냉채족발이나 샐러드도 궁합이 잘 맞는 안주다.
은은한 향 문배주 명작
제조원 문배주양조원
유형 증류식 소주 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25%, 40%
원재료 및 함량 조(국내산), 수수(국내산), 쌀(국내산), 효모, 정제수
Story
평안도 지방 전통주인 문배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임금에게 진상했던 술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문배주 기능 보유자 4대손인 이기춘 명인에 의해 재현돼 1986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1990년도에 상품화됐다.
문배주에 사용되는 누룩은 밀, 술은 조와 수수를 이용한다. 수수와 조는 계약 재배를 통해 수매하고 있어 철저하게 품질이 관리된다. 순수 곡물로 만들어지는 술에서 문배나무의 과일 향이 은은히 풍긴다 해서 ‘문배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배주는 빚어서 바로 마시지 않는다. 증류한 후 봉인해서 서늘한 곳에서 1년간 숙성시켜야 은은한 향과 깨끗한 맛을 자랑하는 명주로 완성된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을 대접하는 외교주로 쓰였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사용되는 등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았다.
Taste
25% 부드럽고 편하다. 향긋하고 여리지만 강함도 느껴진다. 곡물로 만든 술인데도 싱그러운 과일 향이 느껴져 기분 좋은 취기가 가시질 않는다.
40% ‘문배주’라는 이름답게 한 입 머금으면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난다. 높은 도수이지만 정갈하고 깨끗하다. 강렬함도 느껴진다. 순곡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소함과 달콤함도 있다. 목을 넘긴 뒤에는 기분 좋은 풍미가 오래도록 남는다.
Food
리코타 치즈와 아몬드 등 견과류를 뿌린 샐러드와 즐기면 좋다.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를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민어 등 흰살생선에 달걀옷을 묻혀 고소하게 지져낸 전이나 지리 같은 깔끔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9월 말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해 같은 기간 5% 가까이 상승한 코스피 수익률을 크게 하회했다. 하지만 최근 올해 전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석이 나오는 등 약세에서 벗어날 조짐이 보인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항공엔진·방산·정보통신기술(ICT)·폐쇄회로(CC)TV 등 주력사업의 안정된 성장이 지속되고 매크로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성장모델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지난해 4분기는 잠시 쉬어가되 올해는 실적 개선이 유력한 것으로 기대된다.
◇쉬어가는 4분기, 도약하는 2020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지난해 4분기 실적은 시장기대치에 다소 못 미칠 수 있다. KB증권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 증가한 1조6893억 원을 기록할 전망이나 영업이익은 21.8% 감소한 428억 원이 예상된다. 인수·합병(M&A) 관련 후속 비용과 개발비 증가 등의 영향 때문이다.
기대에 못 미친 자회사 한화시스템의 공모가 및 상장 후 주가흐름과 기대했던 한화디펜스의 방산수주 이월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양호한 수주와 실적에도 주가를 끌어내렸다. 하지만 한화시스템의 주가 약세는 이미 충분히 반영됐고 한화디펜스의 방산수주 모멘텀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동익 KB증권 연구원은 “한화디펜스의 방산부문 수출계약은 입찰경쟁에서 탈락하거나 프로젝트가 취소된 것이 아니라 결과 발표가 지연되는 상황”이라며 “이런 측면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올해 모멘텀은 여전히 유효하다. 비호복합 인도 및 사우디아라비아 수출(각각 3조 원, 4000억 원), K9 자주포 아랍에미리트 수출(5000억 원) 등이 그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NH투자증권이 분석한 핵심 투자 포인트를 살펴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국제공동개발사업(RSP)의 적자 축소와 보잉의 B737맥스 생산 중단에 따른 최신형 항공기 엔진 GTF 적용 기체 A320네오의 수요 개선이 기대된다. 또 한화디펜스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해외수출 확대로 이익 개선이 예상된다.
한화시스템은 전술정보통신체계(TICN) 사업 본격화에 따른 방산부문 매출 성장과 한화그룹의 대규모 전산설비 투자로 낙수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한화테크윈은 지속되는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북미지역 중국산 CCTV 퇴출로 한국산 제품의 반사이익 확대가 기대된다.
최진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항공엔진·방산·ICT·CCTV 사업 위주로 매출 성장세가 지속될 전망”이라며 “지난해 재편한 사업구조의 시너지가 같은 해 2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지속적인 주당순이익(EPS) 성장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동한 대신증권 연구원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올해 매출액은 전년 대비 18.6% 증가한 6조3794억 원, 영업이익은 51.2% 증가한 2645억 원으로 추정된다”며 “지난해 영업이익 추정치 1749억 원에서 일회성 개선 300억 원, 항공엔진, 디펜스, 테크윈, 시스템의 고른 개선 600억 원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대신증권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대한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5만 원을 제시했다. 신한금융투자도 목표주가 5만 원을 제시하고 기계업종 내 최선호주로 꼽았다. KB증권과 NH투자증권은 각각 목표주가 4만5000원과 4만4000원을 내놨다. 지난 8일 종가기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주가는 3만4100원이다.
프로메테우스에 관해서는 네 가지 전설이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신의 비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고 신들이 독수리를 보내 자꾸 자라는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 때문에 고통스러워 점점 깊이 자신의 몸을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에 따르면,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 그의 배반은 잊혀 신들도 잊었고, 독수리도, 그 자신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네 번째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에 대해 지쳤다고 한다.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고, 그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바위산이었다.
-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프로메테우스’ 중에서
제우스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인간의 창조성을 위해 주신(主神) 제우스에게 반항한 프로메테우스가 좋았다. 그가 묶여서 끝내 바위가 되어버린 이상한 바위산이 보고 싶었다. 좀 더 알아보니 노아의 방주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아라라트 산도 그 지역에 있었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코카서스 산맥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곳. 고대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가 흐르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초원의 산맥 지대. 그곳으로 떠났다.
문명과 종교의 충돌 지역
코카서스 지역은 인류 문명의 충돌과 종교 간 대립으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팽창하려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저항과 지배에 늘 시달려왔다. 이런 아픈 역사와 상처 때문에 코카서스 산맥 하늘에는 안식하지 못하고 떠도는 학의 무리가 아직도 날아다니고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OST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대중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이 노래한 ‘백학’의 배경도 이 지역이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최고봉 엘브루스 산(5642m)과 아라라트 산(5137m) 사이의 평원에 자리한 이곳에서 유럽계 백인들의 조상인 코카서스 인종과 수많은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다양한 민족이 다국가,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과 투쟁을 벌여온 것이다. 코카서스 산맥은 크게 ‘볼쇼이캅카스(大코카서스, 북코카서스) 산맥’과 ‘말리캅카스(小코카서스, 남코카서스) 산맥으로 구분한다(코카서스는 영어식 표현, 캅카스는 러시아어식 표현).
‘북코카서스 산맥’은 유럽의 동쪽, 아시아의 서북쪽 경계다. 전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전체 산맥이 아시아에 속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러시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 접해 있다.
‘남코카서스 산맥’의 길이는 600km. ‘북코카서스 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접해 있다.
북코카서스 산맥과 남코카서스 산맥을 연결해주는 길은 ‘조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Highway)’다. 러시아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해 1799년 완공되었다. 도로는 해발 3000m 이상의 가파른 낭떠러지로 이어지며 쉽게 접할 수 없는 자연 풍경을 선사한다. 조지아의 수도 티빌리시(Tibilisi)에서 러시아의 블라디카프카츠(Vladikavkaz)로 이어지는 214km의 거리다.
이 길을 통해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했고, 코카서스 지역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반대로 오스만튀르크의 힘이 강해지면 이 도로는 러시아 영토로 쳐들어가는 통로가 됐다.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된 후 이 지역에 있는 3개 공화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다. 북코카서스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있던 10여 개 소수민족들도 분리 혹은 독립을 했거나 요구하고 있다(체첸공화국, 다게스탄, 북오세티야, 남오세티야, 잉구셰티야, 압하지야 등으로 전쟁 위험이 있고 치안이 불안하므로 여행을 가지 않는 게 좋다).
코카서스 3국의 역사
요즘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코카서스 3국은 남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다. 남북으로 이란, 터키,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아제르바이잔에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 세 나라는 각각 고유의 문자와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다. 종교도 다르다.
노아의 후예들이 사는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301년)해 ‘신이 선택한 나라’로 불리며 ‘아르메니아 사도회’를 믿는다.
조지아는 과거 러시아명으로 ‘그루지야’로 불렸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후에는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 국민의 대다수(85%)가 ‘조지아 정교회’ 신자다.
‘불’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아자르’와 나라의 의미를 지닌 아랍어 ‘바이잔’을 합쳐 국가 이름을 지은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같은 종족으로 국민의 93%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공존한다. 서로 접해 있는 이들 사이에 분쟁은 계속 있어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적대국이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무력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또한 신냉전 질서와 석유 자원을 둘러싸고 강대국들의 개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이 욕심을 낼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하지만 대립과 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코카서스 3국은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사람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땅이다.
웅장한 코카서스 산맥은 만년설과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는 야생화를 비롯해 6400여 종의 식물이 살아 있는 생태의 보고다. 또 빙하 지역 트레킹과 야생화 천국의 고산지대 트레킹, 하이킹 등을 할 수 있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의 땅이다.
산악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척박한 땅 목초지 언덕에 서서 두 팔을 벌리면 BC 4000년경부터 시작된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바람에 실려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골목길 바닥에 깔린 돌들은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세월에 둥그렇게 마모되어 반짝반짝 윤이 난다. 그 위로 하루에 다섯 번, 절대자를 향한 인간들의 애절한 구애의 선율이 울려 퍼진다.
신이 살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던 땅을 인간에게 준 곳이라는 이야기가 허투루 전해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신의 마지막 땅을 받게 된 카르트벨리(Kartveli). 그들이 조지아인들이고, 그 땅이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불렸던 지금의 조지아 땅이다.
이곳 사람들은 비행기의 무사 착륙에 손뼉을 치며 신에게 감사할 줄 안다. 8000여 년의 와인 역사를 가진, 인류 최초로 와인을 만든 나라답게 방문자에게 최대의 배려를 하고 와인을 함께 나눈다. 그것이 하나의 생활이다. 9월이 되면 포도송이들을 신에게 바치는 하비스트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중앙선이 없는 도로, 그 길을 점령한 소와 양떼들 앞에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 풍경이 그곳에 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문화가 있는 땅
생소한 곳을 여행할 때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음식을 불평 없이 먹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지역 음식은 한국 음식과 묘하게 통하는 친밀감이 있다.
야채와 고기류를 쇠꼬챙이에 끼워 포도나무 장작에 구운 샤슬릭(Shashlyk) 므츠바디(Mtsvadi), 요구르트의 일종인 마초니(Matsoni), 다진 고기와 야채와 밥을 포도 잎에 싸서 찐 돌마(Dolma), 한국의 왕만두랑 비슷한 힝칼리(Khinkali), 치즈 피자 맛의 하차푸리(Khachapuri) 등 코카서스 3국 여행은 맛있는 음식을 함께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조지아의 음식 하나하나는 마치 시와 같다’고 극찬을 한 걸까.
이뿐만이 아니다. 코카서스에는 사랑과 강인함, 낭만적 기질의 예술문화도 있다.
어디에서든 두 사람 이상 모이면 자연스럽게 화음을 맞춰 다성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의 폴리포니(Polyphony)를 듣고 있으면 성(聖)스러움이 느껴진다. 전쟁에서 죽은 연인의 무덤을 찾는 이야기의 조지아 민요 ‘술리코(Suliko)’에서는 연민의 정이 우러나온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등장했던 아르메니아 관악기 ‘두둑(Duduk)’의 구슬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면 눈이 저절로 감긴다. 코사크족 이야기인 ‘대장 부리바’에서 배우 율 브리너가 췄던 춤처럼 격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동작에 혼을 뺐기기도 했다.
안전한 치안, 가성비 높은 매력적인 여행지
이토록 경이로움과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 신과 순박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 오랜 세월 지탱해온 종교와 문화, 맛있는 음식이 있는 코카서스 3국은 치안도 안전한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잘 몰라야 더 감동적일 수 있다. 가성비 높은 물가도 놀랍다. 달고 향기로운 복숭아가 10개에 800원 수준이다. 이들도 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때가 덜 묻어 있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여행의 맛이 분명히 다르다. 화려한 감동은 아니지만 풍미가 더 깊게 느껴지는 곳이다. 누군가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사진에서 포토샵으로 인공적인 요소들만 지우면 코카서스가 된다고 말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여정이 끝난 뒤에도 그곳을 생각하면 설레는 마음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코카서스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떨린다. 많은 이야기와 감동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설레는 그 기억들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