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만 해도 곧잘 다가와 얘기도 하고 재롱도 피우던 손주가 장성하면서 달라졌다. 말수도 적어지고, 전보다 불편한 기색이 뚜렷하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일도 부지기수. 손주와의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시니어를 위해 손주 세대의 특성과 더불어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소개한다.
세대 갈등이 갈수록 심해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모든 연령대에서 전반적으로 세대 갈등이 심하다는 인식이 높았다. 4점 척도(1점: 전혀 심하지 않다~4점: 매우 심하다)에서 약간 심하다(3점)는 비율이 연령과 관계없이 모두 50%에 육박한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장은 “세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통과 대화법이 중요하다. 가볍게 ‘그때는 그랬지’ 하고 얘기를 들려줘야 한다. ‘나 때는 이랬으니 너희도 이래야 해!’ 하는 화법으로 아랫세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결국 세대 갈등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훈육이 아니라 지지
세월의 차이가 크게 나는 시니어와 손주 세대는 소통법이 가장 필요하다. 특히 사춘기 청소년인 손주는 대체로 시큰둥하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이 시절에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불러도 대답도 잘 안 하고, 그저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SNS를 하기 바쁘다. 공부에는 관심도 없고 성적은 갈수록 떨어진다. 이를 보는 부모는 속이 답답하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조부모도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조금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청소년들도 고민은 깊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3~18세 청소년의 가장 큰 고민은 ‘공부’다. 성적과 자기 적성을 포함한 공부 고민이 전체 고민의 47.3%를 차지한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그들은 본인 스스로가 이 문제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공부에 대한 욕심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청소년 소통 전문가는 “사춘기 청소년을 늘 앞서가며 무작정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건 좋지 않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속으로 좌절과 절망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조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국 브리검영대학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춘기 자녀 교육에서 부모의 노력으로는 부족한 영역을 조부모가 채워줄 수 있다고 한다. 만 10세에서 15세청소년 중 조부모와 친밀하게 느낄수록 친사회적 행동 성향이 높았다. 예를 들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봉사나 기부를 자주 했다.
조부모가 손주에게 실용적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학교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 도움을 줄 때 친밀함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사춘기 청소년에게 조부모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임영주 소장은 “부모는 당근과 채찍을 골고루 주는 훈육의 역할을 맡지만, 조부모는 손주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춘기는 소중한 시절이다. 그들의 사춘기가 악몽이 될지, 성장하는 시기가 될지는 주변인에게 달렸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올바른 접근과 원활한 소통이 필요하다.
배우는 자세로 소통
최근 몇 년 사이 밀레니얼과 관련된 보고서와 책이 무수히 쏟아졌다. 밀레니얼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점진적인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밀레니얼과 시니어, 실제로 이 두 세대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주로 만나고 직장 내에서는 리더와 신입사원 등으로 마주할 일이 많다. 이처럼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원활한 소통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조부모와의 관계 및 소통은 밀레니얼에게도 상당히 중요하다. 조부모와 손주의 깊은 애정 관계는 손주의 전 인생 주기에 걸쳐 심리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조부모는 손주에게 인생을 통한 경험과 지혜를 제공함으로써 보람을 느낀다. 임 소장은 “윗세대의 얘기를 아랫세대에게 들려주는 것은 세대 전수와 문화 공감 차원에서 권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달은 간접 경험의 폭을 넓히고, 더불어 이해의 폭을 넓게 한다. 다만 이를 활용하여 손주에게 강요나 지적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밀레니얼 세대를 알 필요가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들은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얻을 수 있고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스트리밍 라이프(Streaming Life)를 추구한다. 스트리밍이란 인터넷에서 음악이나 영상을 파일로 다운받지 않고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일컫는다.
또한 ‘제주도 한 달 살기’처럼 내가 살고 싶은 곳에 단기간으로 정착하는 방식의 라이프를 즐기기도 한다. 월세와 전세 같은 방식의 주거 라이프를 굳이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일하는 방식인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를 추구한다. 밀레니얼 소통 전문가는 “1990년대생은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스트리밍을 통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경험하길 원하고, 자신의 삶이 늘 자유의 연장 속에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손주로 둔 시니어는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 좋을까? 사실 이 두 세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서로 살아온 환경과 시대가 달랐기에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세대 간 쓰는 언어와 문법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 소장은 “디지털이 익숙한 밀레니얼의 생활환경은 조부모 세대와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배우는 자세로 손주와 소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
젊음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풋풋함과 설렘.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눈빛에서 간절함과 진지함이 묻어나는 사람들. 인생 중흥기를 준비하는 취업동아리 ‘세듀50플러스’를 만났다.
취업동아리 ‘세듀50플러스’를 만나러 간 곳은 노사발전재단 서울서부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이들이 모인 스터디 룸으로 들어가니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과 관련해 임순열 씨의 시범 강의가 한창이었다. 임순열 씨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 분야’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전문 강사를 준비하고자 하는 회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 자료를 준비해왔다. 세듀50플러스는 지난 6월 말 노사발전재단과 사학연금재단이 공동으로 진행했던 전문강사양성과정에 교육생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취업동아리다.
이근희 6월 25일 시작해서 5일간 수업을 받았어요. 교육이 끝나고 난 뒤 노사발전재단에서 취업과 관련한 커뮤니티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분간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모이는 장소나 스터디에 필요한 것들을 논의했죠.
교육을 들었던 30명 중 25명이 동아리에 들어와 매달 만남을 이어갔다.
김현준 처음에는 별다른 명칭 없이 말 그대로 ‘취업동아리’였습니다. 그런데 50플러스남부캠퍼스에서 ‘단체설립지원프로젝트’ 공모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어차피 커뮤니티가 형성됐으니 우리도 전문적인 목적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지원하기로 했어요. 확실하게 함께할 사람만 모이자고 해서 15명이 모였습니다. 저희에게 맞는 단체명도 필요했어요. 그래서 시니어(Senior)의 ‘Se’와 교육(Education)의 ‘Edu’를 합친 ‘세듀’에 50세 이상을 뜻하는 ‘50플러스’를 붙여 시니어 강사를 준비하는 취업동아리 ‘세듀50플러스’가 됐습니다.
단체설립지원프로젝트에 힘을 쏟았지만 뚜렷한 활동 실적이 없어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대신 50플러스남부캠퍼스 커뮤니티지원단에 지난 9월에 선정됐다.
유남열 50플러스남부캠퍼스에서 50만 원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우리 멤버들의 발전을 위해 도서구입비로 사용했습니다. ‘회사생활예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90년생이 온다’를 함께 읽고 독서토론도 했어요. 책을 통해 미래의 교육생이나 수강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전문강사 교육과정을 통해 만나기는 했지만 재취업, 창직 등도 실현하려고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이들은 노사발전재단이나 50플러스남부캠퍼스에서 모인다. 멤버를 구성하고 보니 개개인 모두 전문성을 갖고 살아온 인물들이었다.
장필규 퇴직하고 나서 힘든 상황을 다 겪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전문성과 열정 하나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전문 인력들이 모인 만큼 공유할 수 있는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활동하는 분도 있고 아직 활동을 안 하는 분도 계십니다. 일단 어디에 나가든지 강의를 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한 힘이죠. 무료라도 자꾸 해보다 보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해서 추진한 것이 콘텐츠 구축을 위한 4가지 프로젝트예요.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인성 교육 그리고 다문화 가정 교육입니다.
서미숙 주제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있어요. 오늘 시범강의를 하신 임순열 선생님이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을 맡으셨고,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은 장필규 선생님, 인성 교육은 김석현 선생님이 담당자이십니다. 다문화 가정 교육은 정하지 않았어요.
권은경 자료 조사는 멤버들이 함께합니다. 동영상 편집이나 PPT 중 각자 잘하는 분야를 맡아서 제작하고 합쳐서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콘텐츠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너무 다른 것 같아요. 일단 빨리 공동 콘텐츠를 만들어서 멤버들이 활용하도록 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임순열 선생님이 시강을 했어요. 이 교육 콘텐츠는 내부 공유만 가능합니다. 단, 기본 틀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취향에 맞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박원규 오늘 회칙도 다 정했어요. 공유한 교육 콘텐츠를 가지고 강의 나갔을 때 수입이 발생할 경우 10%는 후원금으로 동호회에 내는 것으로 했어요. 각자의 전문성을 토대로 한 공동 콘텐츠를 항상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무료로 강의해도 좋고 멤버들이 제각각 그 결실이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단단하게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세듀50플러스 활동을 하면서 점점 활동 영역을 넓히는 멤버가 늘어나고 있다. 총무 유남열 씨는 한 대학에서 청년 진로 상담을 시작했고, 임순열 씨도 강의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 장필규 씨는 사회복지사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이근희 대표의 경우 젊은 시절 본업이었던 영어 관련 강의 쪽으로 길을 열고 있다. 이들은 세듀50플러스 활동 외에 직무와 관련해 유익한 강의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찾아다닌다.
김석현 지금까지 각자 어떤 분야에 몸담아왔고 뭘 잘할 수 있는지 이야기 나눠왔습니다. 서로에게 어떤 인맥이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언제든 사람이 필요 할때 연결할 수 있는 저희만의 인맥 네트워크가 점차 형성되고 있어요. 사실 우리가 이렇게 만나 동아리를 만든 지 6개월 정도밖에 안 됐는데 꽤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서미숙 ‘천직 여행’이란 말이 참 좋아요. 젊을 때 만난 첫 번째 직업이 그냥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그다음부터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다니는 거래요. 잘할 수 있고, 즐겁고, 나한테 큰 무기가 되는 일이 천직인 거 같아요. 돈을 떠나서 진짜 내 일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죠.
장필규 시니어는 배워서 남 줘야 합니다. 그리고 죽기 살기가 아니라 즐기면서 살아야 해요. 일을 구하더라도 매일이 아닌, 유연하게 자기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죠. 중요한 것은 앞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일입니다. 영업도 하고 마케터도 되어야 합니다. 어디든 다니면서 도움도 받고 청하면서요. 다변적인 세일즈맨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준비된 강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돕겠다는 것. 강사의 길을 넓히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모체를 키울 생각이다. 앞으로도 ‘세듀50플러스’의 성장은 물론,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평범한 직장인 출신의 1963년생 정재경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은퇴자로서 제주에서 살아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15년 제주도에 내려가 한 달 살기 숙소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자연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은퇴자, 환갑을 앞둔 나이, 제주, 낯선 땅 경작하기, 한 달 살기 등 요즘 시니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키워드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한때는 제주도에 관심이 많았다.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묘한 신비감도 있어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도 있지만 수많은 오름, 올레길, 바닷가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낭만적인 은퇴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아주 내려가 살지는 못하는 형편 때문에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요즘 인기 여행 품목이 됐다. 지인 중에도 제주도에서 한 달 살고 온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롱 스테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때는 동남아, 뉴질랜드 등 그 대상 지역이 외국이었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에서 살면 서울 생활비 정도로 여러 도우미를 거느리며 왕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뉴질랜드로 가면 천혜의 자연 덕분에 매일 골프를 치며 꿈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많아 한 달씩 자리를 비우기는 무리다. 모임도 많고 멀쩡한 내 집을 한 달씩 비워둔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 한 달 살기 정도의 롱 스테이는 내게 맞는 조건이다. 그러나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혼자 가면 너무 외로울 것 같고 15일 이상 집을 비워본 경우가 없어서다.
이 책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저자가 먼저 겪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 책 말고도 제주도에 대한 여러 서적을 소개했다. 이어도, 강정마을, 제주도 특산물 등 제주도와 관련한 정보도 들어 있다. 정착 과정에 체크할 사항 등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은퇴 후 타지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제주도는 그동안 땅값이 너무 올랐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2015년 신공항 발표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은 것이다. 은퇴 후 노후보장 대책으로 제주도에 투자하기에는 이제 늦었다. 관심을 갖고 몇 년 지켜본 바로는 바람도 많고 *눈비 오는 날도 많아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 신혼여행 때 본 날씨 좋은 제주도의 풍광을 기대하면 안 된다. 어쩌면 방구석에 쳐 박혀 좋은 날씨를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적당한 나이, 가격이 오르기 전의 땅 구입 등 절묘한 타이밍에 제주도에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나는 저자를 따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변곡점이라는 심오한 시간 흐름도 깨닫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다.
한강 변의 궁전 같은 별장을 가진 친구가 있다. 부럽기는 했지만, 그 별장을 편법으로 사고 유지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는 것을 봤다. 그 친구보다 가끔 놀러갈 수 있는 내 처지가 더 나아 보인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소설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이 땅에 한 송이 꽃을 피우겠노라 다짐하며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에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는 알았다. 그 ‘화’가 ‘꽃’이 아니었음을. 낙담을 뒤로 하고 과감히 미지의 시공간으로 몸을 내던졌다. 실수라고 생각했던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할 틈 없는 과업이 됐다. 인생 최악의 오작동 사건을 통해 진정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냈다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李庭模·56) 관장. 이 세상 모든 실패와 좌절, 오해로 꼬여 삶이 불편하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천진함과 유쾌함이 가져다준 놀라운 긍정 에너지 효과를 경험할 것이다.
이정모 관장만큼 꾸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과학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쇼맨십에 언변도 좋아 매스컴에서 반기는 인물. 정통 과학 TV 프로그램이었던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KBS)는 물론이고, 이 시대 명사들만 초빙하는 ‘차이나는 클라스’(JTBC)와 ‘어쩌다 어른’(tvN) 등에 출연해 과학을 포기했던 시청자들까지 TV 앞에 끌어들였다.
눈높이에 맞춰 과학을 쉽게 알려주는 능력자
“글 쓰고 책도 출간하니 강연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글로만 과학을 설명할 필요가 없구나 했죠. 의외로 강의료도 꽤 괜찮고요. 방송에 나가 보니 영향력이 더 크더군요. 책이 제일 깊은 얘기를 하고 강연은 약간 깊이가 낮아지고, 방송은 더 낮고 표피적이지만 영향력은 엄청나죠. 보는 사람도 많고요. 처음에는 방송 출연을 경원시했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이 관장의 매력은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사박물관장에 이어 과학관 관장이라는데 낙천적이고 푸근한 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 알려진 명사라지만 아이이건 어른이건 반갑게 인사하고 만나는 ‘털보 관장님’. 과학의 범주에 있는 모든 것은 물어보는 순간 인터넷 지식 검색 수준으로 친절히 설파한다. 그는 언제부터 아는 것이 있으면 설명하고 말해주고 이해시키며 살아온 것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인생의 과정 속에서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과학자’가 아닌 ‘과학 거간꾼’의 길을 걷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교육과정을 끝까지 못 마친 경우가 많았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니까 신기해서 매번 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물어보셨어요. 어머니가 다림질하고 있으면 옆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배운 것들을 얘기해드렸어요. 너무 좋아하셨죠. 그렇게 1년간을 했더니 어머니가 양복 한 벌을 사주시며 ‘너, 야학 선생 해!’라고 하셨어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산하기관이었던 연동청소년학교에서 야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관장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과학과 수학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야학 선생을 하면서 교직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저희 학과의 경우 교직 이수가 가능했지만 상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 이룰 수 없었죠. 그런데 정작 교직 이수한 그 친구들 중에 선생님이 된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가르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못해요. 애정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보여줄까, 뭘 알려줄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애정을 가질 수 없어도 자꾸 소통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동안 사람들 만나고, 강연하고, 책 쓰고 방송 출연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물론 제게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요.(웃음)”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능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과학인” 같다고 말하니 “아주 잘 봤다”고 말했다.
“저는 실험실보다 도서관을 더 좋아했습니다. 한 개의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을 연구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요. 저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용어는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전부터 제가 써온 말입니다. 과학은 전문가 영역이니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바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우리말로 ‘과학 거간꾼’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네요. 제 바람대로 과학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실패는 당연한 것! 칭찬과 격려를
이 관장이 몸담고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설계에서부터 세밀한 것들까지 펼치고 구현했다. 무엇보다 서울시립과학관의 벽면 어디에도 과학지식 등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손으로 모래를 모으고 펼쳐 등고선의 위치 변화를 알아보고, 걸어보고, 뛰어보고, 펌프질에 자전거까지 타보면서 스스로 의미와 답을 찾도록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특별히 손주들 교육에 관심이 많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를 위한 얘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이곳은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질문을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과학관 방문객들 중 절반 이상의 친구들은 보고만 가고 절반 안 되는 친구들은 마음속에 질문을 안고 나가죠. 과학관은 과학자의 삶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이 실험이 왜 안 되지?’ 하면서 실패를 양식으로 삼아야 하죠. 과학자들도 매번 실패해요. 어쩌다 한 번 성공하는 것이죠. 실패를 해봐야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성공만 하다가 실패하는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없어요. 실패 앞에서 대처 방법을 모르면 안절부절못하면서 거짓말을 하게 돼요. 아이들에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유쾌한 관장님 고액기부자 대열 합류
재밌고 그저 신나는 명강사 관장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작년 말 통 큰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고야 말았다.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해 써달라며 푸르메재단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고 고액기부자 클럽 ‘더미라클스’ 회원이 됐다.
“포토월 앞에서 사진 찍자기에 응했는데 보도가 될 줄 몰랐습니다. 푸르메재단을 설립한 백경학 상임이사가 동네 가까이 살기도 하고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동창이에요. 전 재산 들여서 재단을 만들었는데 병원을 짓는 등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기여를 좀 하고 싶었어요. 일단 책이 좀 많이 팔렸어요. 공무원은 공무원 월급으로 살면 되잖아요. 제가 무슨 대단한 일 한 거 아니에요. 저나 제 자식들은 너무나 멀쩡하잖아요. 발달장애아들의 부모는 잘못이 없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세금으로 해결이 되면 좋으련만 안 될 때는 조금씩만 모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 월정액으로 시작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1000만 원이 내고 싶었단다. 그 뒤로도 돈이 생겨 500만 원을 또 기부했다.
“처음에는 1억 원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1억 원을 낸 사람들의 클럽이 있다더군요. 그분들께 강연을 해드린 적이 있는데 다들 좋으셨습니다. 저도 그 클럽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글도 열심히 쓰고, 특히 강연하러 갈 때 뿌듯해요. 얼마를 또 기부할 수 있겠구나 하고요!(웃음)”
1년 뒤면 관장 임기가 끝난다. 그는 어떤 자리이든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늘 다 잘됐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교육방송에서 제 이름 달고 과학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여균동 영화감독 작품에 출연해 배우로도 데뷔했어요. 배우의 꿈도 마음에 있고 말이죠.(웃음) 관장직을 마무리하면 또 뭔가를 하게 되겠죠.”
은퇴를 막막함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새삼 용기가 난다. 앞으로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이정모 관장의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
구르메 레브쿠헨(Gourmet Lebkuchen).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51)의 요리교실 이름이다. 연희동 주택가 골목을 헤매다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가다 보면 2층 집 파란 대문이 보인다. 요리 스튜디오가 있는 그녀의 집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수강생만 한 달에 200여 명, 대기자도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셰프의 딸로 태어나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산 지 20여 년. 일본어 강사, 번역가, 기자로 활동했던 그녀가 지금은 요리를 가르친다.
순전히 사람들과 만나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다.
두서없는 수다와 한숨, 투정까지 레시피가 되는 요리교실이 있다. 교실 주인은 나카가와 히데코. 우리말 독음이 ‘중천수자’라서 종종 ‘수자 언니’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연희동 자택에서 10여 년째 요리교실 ‘구르메 레브쿠헨’을 운영하고 있다. ‘Gourmet’는 프랑스어로 ‘미식가·식도락가’라는 의미이고, ‘Lebkuchen’은 세상에 다양한 맛과 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준 독일 과자 이름이다. 발음하면 구름이 연상되는 이 폭신 달달한 간판을 달고 그녀는 거의 매일 파티를 하듯 수강생들과 만난다.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걸까. 1, 2년을 기다려가면서까지 그녀의 요리교실을 탐내는 사람도 많다.
첫 연락이 됐을 때 그녀는 영국에 있다 했다. 너무 바빠 보여 거의 포기 상태로 그녀가 출판한 책들을 읽으며 귀국 날짜를 기다렸다. 요리교실을 통해 만난 수강생들과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다 보니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먹방 시대, TV만 켜면 수만 가지 레시피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카가오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의 요리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식탁 위의 이야기’. 그녀는 각국의 특별한 요리를 가르칠 때마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스페셜(?)한 인생 이야기도 식탁 위에 올린다. 모두의 스토리가 요리의 가장 빛나는 레시피가 되는 시간이다. 요리 배우러 와서 위로받고 마음 치유까지 하고 간다는 입소문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요리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녹이고 흔들어놓는 재주도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 다행히 시간을 비워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속한 날 그녀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쯤 헤매어도 좋을, 옛 정취가 살아 있는 길이었다. 도자기에 문어가 그려진, 그녀의 작은아들이 만들어줬다는 요리교실 간판은 2층 집 파란 대문 기둥 위에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연희동의 ‘킨포크’
구르메 레브쿠헨 수강생들은 요리를 배우러 왔다가 그녀의 음식 철학에 반해 아예 친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요리도 요리이지만 그녀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교실은 어느새 연희동의 킨포크(kinfolk)로 불리고 있다.
“저는 셰프라는 호칭보다는 요리 연구가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푸드 디렉터, 연구라는 말에는 문화적, 인문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잖아요. 요리 기술만 가르쳤으면 힘들어서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스토리가 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사람들과 만나 요리하고, 먹고, 마시고, 수다 떨고, 웃고, 눈물 콧물 빼는 시간을 사랑해요. 그 시간 속에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식재료를 사러 자주 들르는 ‘사러가 쇼핑센터’, 빵집, 도자기 공방, 한의원 등 동네를 오가며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고마워서 감동하고, “밥 먹었어? 우리 밥 먹자!”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지인이 운영하는 화랑에도 괜히 들러보곤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요리는 사랑이고 우주다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를 따라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지냈던 그녀는 코즈모폴리턴으로 살기를 원했다. 1994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남자를 만나 두 아이를 낳고 벌써 24년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녀만의 철학을 실천하는 ‘구르메 레브쿠헨’ 안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요리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의 직업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현재 85세인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계의 대부 무라카미 노부오(村上信夫)의 제자가 된 후 78세까지 주방에서 일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에서 요리 관련 공부를 하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 일이 싫었어요.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만 봤거든요.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있던 아버지가 독일에서 돌아와 고향 사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는데 갑갑하게 섬에 갇혀 사는 이유가 다 아버지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마음에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나는 정장을 입고 매일 출근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하며 대들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어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그녀는 그러나 20대에 동독과 스페인에서 지내면서 요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방인의 심정을 헤아려 요리를 해주고 같이 나눠 먹는 친구들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느꼈고, 음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그 관계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친구들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도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점점 중독(?)되어갔다. 결혼해서 살던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가 언제든 바비큐 파티를 하고 싶어서였다니 참 대책 없이 귀여운 여인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 경비실 인터폰이 울린 적도 있어요.(웃음)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죠. 마침내 단독주택을 샀을 때 마치 신한테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자그마한 정원과 별이 있는 밤하늘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지인들을 불러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어요. ‘그렇게 파티를 자주 하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하면서 걱정을 해주는 지인도 있었어요. 요리는 문화예요. 그리고 우주예요. 문화를 나누고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그 신비스러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남편도 그녀 못지않게 파티를 즐기고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다. 일본어 강의를 하던 시절 한 수강생을 통해 알게 됐는데 첫눈에 미각도 있어 보였고 술을 좋아하는 남자라 금세 친해졌다.
“제 인생이 시원하게 펼쳐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이런저런 지루함도 밀려와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먹었어요. 가서 학위도 따고 그동안 못한 효도도 좀 하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운명처럼 남편이 나타난 거예요. 서로 술을 좋아하다 보니 처음부터 만나는 게 어색하지 않았어요. 자주 자리를 함께하며 음식을 즐기고 대화를 나눴죠. 자연스럽게 이성의 감정이 싹트더군요. 그래서 함께 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은 중요한 일 같아요. 이유도 모른 채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그(그녀)와 즐겁게 먹었던 음식이 뭐였는지 한번 검토해볼 일이에요.(웃음) 남편은 제가 하는 일을 적극 지지해주고 때로는 가혹한 조언도 해줍니다. 물론 제 지인들과도 잘 어울리고요.”
한국 음식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한국에 사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스페인 요리 파에야를 가르쳐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그녀의 요리교실. 수강생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여자 수강생이 대부분이지만 남자도 꽤 있다. 4년째 요리를 배우는 60대 교수님도 있고, 한 치과의사는 캠핑을 다니다가 요리에 관심이 생겨 그녀의 교실을 찾았다.
“남자분들이 요리 배우는 걸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그분들은 특별한 요리를 배우러 오시는 게 아니에요. 꽈리고추멸치볶음 같은 아주 소박한 가정식 요리를 원해요. 나이가 드니까 뭘 먹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기가 점점 구차하다는 거예요. 괜스레 아내 눈치를 보시는 거죠.(웃음) 간단한 안주 요리에 대한 관심이야 다들 뜨겁죠.”
최근, 은퇴 후 혼자 지내는 남자들을 위한 요리교실을 기획하고 있다는 그녀는 한국의 내림 음식들은 매우 훌륭한데 제대로 된 레시피가 없어 국제화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한국 음식은 양념장이에요. 간장에 마늘과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넣어 맛을 낸 양념장은 어느 나라에서도 맛보지 못한 음식이에요. 결혼 후 시어머님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이거 조금 넣고 저거 조금 넣으면 된다’ 하시는 거예요. 답답한 마음에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 가서 공부도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음식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때로는 프랑스 요리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 나카가와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답게 ‘요리의 관계학’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일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ʼ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항목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서베이를 통해 시니어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여행, 취미, 관계·가족, 일·성취, 보람, 도전 등 총 7가지 주제로 나눠 알아봤다.
서베이 대상 브라보 동년기자단,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수강생, 낭랑18세 시니어 치어리더팀 등 50세 이상 남녀 140명(50대 61명, 60대 53명, 70대 이상 26명)
서베이 방법 주제별 버킷리스트 예시 항목 15가지 중 선택(중복 선택 가능) 및 그 외 항목이 있는 경우 별도로 작성
◇브라보 버킷리스트 상위 20위 목록
7가지 주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여행’이다. 상당수 시니어가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제주 올레길 투어’ 등 제주 여행과 관련한 버킷리스트를 희망하고 있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니까”, “외국어 부담 없이 여행하고 싶어서”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밖에 혼자 여행 떠나기(27),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25), 캠핑카/크루즈 여행하기(18),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9) 등
운동이나 레포츠 등 몸을 쓰고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배움, 글쓰기, 책 읽기, 전시회 관람 등 문화적, 정서적 활동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특별한 취미를 찾지 못해 ‘새로운 취미 갖기’(24)를 버킷리스트로 선택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텃밭 가꾸기(21), 그림 관련 취미 갖기(19), 수영 배우기(16), 취미 동호회 가입(14), 수화 배우기(6)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애인 같은 친구를 만드는 등 새로운 관계 확장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번호를 정리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는 등 관계 정리에 관한 항목들도 눈에 띈다.
그밖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21), 7명 용서하기(17), 휴대전화번호부 정리하기(15), 첫사랑에게 편지 쓰기(7) 등
제2직업을 향한 욕구와 더불어 전문 분야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포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고, 강연, 전시회를 여는 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이다.
그밖에 귀농하기(15), 창업하기(12), 10년 후부터는 일 안 하고 놀기(8), 자격증 10개 따기(8) 등
버킷리스트 서베이 전체 항목 중에서 ‘재능기부’가 1위에 올랐다. 단순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살린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그밖에 장기기증 신청하기(16), 아프리카 봉사활동 가기(15), 봉사활동 1000시간 채우기(13), 유기견 돌보기(6) 등
건강하고 즐거운 일상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을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등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유언장 작성 등 웰다잉 관련 항목이 상위권에 올랐다.
그밖에 드레스 입고 파티하기(17), 세컨드하우스 짓기(14), 레스토랑에서 고급 코스요리 먹기(13), 주식·펀드 투자하기(12)
아직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실행하고 이룰 수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버킷리스트 만들기’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한 가지 항목은 해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공모전 참가하기(14), 파격적으로 염색하기(13), 무인도에서 살아보기(7), 타투(문신) 해보기(6)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7가지 방법
도움말 박창수 작가
하나,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목표는 유럽 배낭여행부터 서울 나들이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정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경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면 그만큼의 비용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행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든다거나 평소 걷기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등의 세부적인 목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귀농이나 창업 등 오래 준비해야 할 목록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실천할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리스트를 차례로 적어나가자.
둘, 작은 목표는 매년 갱신하라 큰 목표가 담긴 버킷리스트와 작은 목표를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따로 마련하고, 작은 목표 리스트는 매년 갱신한다. 원대한 목표만 적어놓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욕도 저하되고, 실천 의지도 약해진다. 한 해, 한 달 정도 투자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작성하자.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나가며 얻은 자신감은 큰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셋,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목표나 유행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진정 나만을 위한 목록들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 남의 눈치 보지 마라 돈이 많이 든다거나 스스로 주책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족이나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또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남에게 보였을 때 더 그럴싸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적곤 한다. 이른바 체면치레 때문에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여행, 공부, 취미, 봉사 등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목표이지만, 그중에 한두 가지만이라도 나만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면 어떨까?
다섯, 크게 쓰고 소문을 내라 자기 꿈을 소문내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혼자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분 좋은 속박(?)을 느끼는 편이 낫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선언을 하거나 큰 종이에 적어 서재나 화장대 등에 붙여 자주 인식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진다.
여섯, 1+1을 생각하라 나를 위한 버킷리스트이지만, 그것이 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예를 들어, ‘외국어 배우기’와 같은 단순한 목표를 뛰어넘어 ‘외국어를 배워 어려운 아이들에게 방과 후 재능기부하기’ 등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뜻깊은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일곱, 버킷리스트에는 점수가 없다 목표로 정한 버킷리스트를 꼭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물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숙제나 시험처럼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인 만큼 부담 갖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길 바란다. 무엇을 이뤘느냐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발걸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독자제보 브라보 버킷리스트 랭킹 20위 안에 해당하는 버킷리스트에 도전해 이뤄내신 분들을 찾습니다. 제보할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bravo@etoday.co.kr로 접수 부탁드립니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60년 만에 돌아온 무술년, 환갑을 맞이한 ‘58개띠’ 이재무(李載武·60) 시인. 음악다방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듣고 군대에 다녀온 뒤 청년 이재무가 만난 시는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 존재였다. 자신의 20대를 무모한 소비이자 아름다운 열정의 시간이라 말하는 그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얼른 노인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순에 이른 그는 시를 통해 자아를 비춰보고, 지난날을 낭비케 했던 집착과 울컥으로부터의 도피를 바라고 있다.
햇수 나이로 60세에 펴낸 이재무의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에는 나이 듦에 대한 시인의 단상을 드러낸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시인의 회한은 시 ‘나는 벌써’에 잘 드러난다.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강렬한 시의 마지막 구절, 한탄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젊은 시절의 로망과 희망을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자조적인 시인데 공감하는 이가 많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유보하거나 죽이는 삶을 살아왔어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도 참고 다음에 더 여유가 생기면 먹자, 어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지금은 갈 형편이 아니니 나중에 가자. 내일, 다음에, 미래에… 그렇게 자꾸 현재의 삶을 미뤄왔죠. 지금 보면 오늘 행복한 사람이 그냥 행복한 사람인 거예요. 내일은 또 내일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되고요. 행복한 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가 되는 건데,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 삶은 결국 행복하지 않은데 말이죠.”
쌀 한 포대 비우듯 나이를 먹다
시인답게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다채로운 비유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인생을 두꺼운 책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기보다는 매일 그날의 행복을 만끽하며 삶의 페이지를 늘려가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충실히 더해왔음에도 쪽수(나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책의 두께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그다.
“쌀 한 포대 사면 ‘이걸 언제 다 먹지?’ 하잖아요. 의식하지 않고 먹다 보면 어느새 동이 나죠. 나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새삼 인식하고 나면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구나’ 하니까요. 하루하루는 마디게 가지만 한 달, 1년은 뭉텅뭉텅 빠지는 느낌이 들어요. 숫자를 의식하고 사는 편이 아닌데 올해가 환갑이라고 하니 나이가 실감이 나네요.”
나이 듦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만 보면 그에게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점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계단이 내 무릎을 연주하는 기분이에요. 관절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몸의 이음새가 녹슬어 계단을 오르면 소리가 나죠. 몸무게는 자꾸 늘고, 숙면을 하기도 힘들고, 새벽잠도 줄었어요. 집에서 주도권을 빼앗겨 요새는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데, 아내 목소리는 커지고 내 목소리는 작아지고. 아, 이게 늙는 건가 싶어요.”
이재무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불현듯 ‘늙는다는 건 슬픈 건가?’라는 물음이 생겨났다. 질문을 하면서도 ‘슬프지 않다’라는 답변을 슬쩍 기대했는데,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솔직한 심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요. 그게 슬프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고 초조하긴 해요. 내가 언제까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크게 이룬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는구나. 요즘은 내 아들이 부러울 정도예요. 돈이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여유롭게 즐기며 잘 살더라고요.”
건강하고 순수한 사유를 위한 움직임
그는 에세이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에 50대 이후 집착과 울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음공부에 전력을 다하리라는 글을 썼다. 60대를 사는 현재, 여전히 내면의 적들과 완벽히 헤어지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집착과 울컥이 내 안에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말과 글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의식하면서 살기 때문에 조금은 진일보했겠지만, 죽을 때까지 과제로 남을 것 같아요.”
쉽지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걷기를 통해 내면을 다스리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요히 명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묻자 오히려 몸을 가혹하게 해야 정신이 순수해진다고 대답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은 부패합니다. 몸이 한가할 때 충동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이 들어와 타락하기 쉽거든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호미가 밭에서 놀아야 하는데 허청에 오래 걸려 있으면 녹슬어요. 선박도 항해를 해야 아름답지 항구에만 묶여 있으면 밑창이 썩고 구멍이 나죠. 또 가만히 있는다고 고요한 게 아니에요. 묵언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속은 시끄러울 수 있잖아요. 고요는 내면까지 침묵하는 겁니다. 그게 꼭 몸의 정지를 뜻하지는 않아요. 걸으면서도 충분히 고요할 수 있죠. 방 안에 웅크리고 얻는 사유보다 움직이며 얻는 사유가 더 건강하게 빛난다고 생각해요.”
욕망하는 노인이 아름답다
이재무 시인은 무던히 걸으며 울컥과 집착을 비워내면서도 욕망의 고갈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자는 나이 들수록 욕망은 추한 것이라 폄하하지만 그는 욕망을 갖고 사는 노인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격려한다.
“나무가 늙었다고 피우는 꽃도 나이 든 건 아니잖아요. 고목이 만드는 그늘은 언제나 풋풋하고 피우는 꽃도 늘 싱싱해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인간에게 꽃은 욕망이라 생각해요. 주름 많은 몸이라고 해서 왜 욕망이 없겠어요. 태풍에 나무가 쓰러져도 살아 있는 한은 새 이파리를 피우죠. 사람도 죽을 때까지 욕망을 내려놓기 힘들어요. 욕망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욕망이 긍정적일 때 삶이 발전되고, 일상의 에너지로 작용하죠. 노인의 욕망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해요.”
때때로 자신의 세대를 향해 ‘노인’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아직은 입에 붙지 않는 듯 어색함이 묻어났다. 이른바 100세 시대, 예순에 노인이라는 말은 이르게 느껴지는 요즘 세상. 그는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지나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58개띠 세대가 경계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58개띠 친구들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상징적으로 우리를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모두 들어 있는 세대라 말하고 싶어요.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기차를 타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KTX를 타고 있잖아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는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숨차도록 열심히 달려왔어요.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끼인 세대로 지내는 게 안타깝죠. 오늘도 각자 현장에서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가교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을 58개띠의 무궁한 삶을 기원합니다. 2018년 힘내세요!”
흔히 투우와 집시의 정열적인 플라멩코 정도로 알기 십상이던 스페인이 황영조라는 우리의 마라톤 영웅 덕분에 바르셀로나가 내게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어쩐지 친근한 도시로 여겨졌고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 도시의 몬주익 언덕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새벽에 이스탄불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반 정도 날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만 보아왔던 스페인의 하늘에선 뜨거운 태양이 쏟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는 간단히 무너진다. 구름이 가득 얹힌 하늘 아래 잠시 서서 스페인의 공기 속에 묻혀본다.
카탈루니아 광장 부근의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이 내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그 거리를 오가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높은 콧날의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내가 왔음을 실감시켜 준다. 일단 예약해 두었던 호텔에 짐을 부려놓고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가 볼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있지만 우선 카탈루나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사람 반 비둘기 반이라고 할 만큼 사람과 비둘기가 바글바글하다.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둘기가 훨씬 많아서 수백 마리가 날개를 펴고 한꺼번에 날게 되면 여행자들에게 카탈루냐 광장의 추억을 단숨에 만들어주는 듯 한 풍경을 연출한다. 광장 옆 도로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마치 단체 여행객들을 쏟아놓은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이어서 놀랐다.
광장 지하의 여행자 정보센터에 가서 투어 브로슈어를 몇 가지 챙겼다. 긴 날짜가 확보된 여행이 아니긴 했지만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트램, 푸니쿨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하철 역에서 판매되는 교통권은 1회권이나 1일권이 있고 10회권, 50회권이 있기 때문에 계획된 동선이나 머무는 날에 맞게 구입하면 유용할 수 있다.
일단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라든지 2주 3주씩 머물 만큼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다 보니 우린 짧은 날 동안이나마 바르셀로나를 충분히 느끼기 위한 마음을 활짝 열어둔다. 그리고 카탈루냐 광장을 벗어나 가우디의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