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거리 홍대. 개성 넘치는 오색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유자적 걷기 좋은 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핫’한 장소로 떠오른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그런데 겉만 보면 그냥 사람 사는 평범한 동네다.
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용기 내어 뒷골목에 발 디디라. 바로 그곳에 동진시장이 숨어 있다.
연남동 동진시장(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8)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만 서는 7일장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액세서리를 비롯해 생활한복, 디퓨저(방향제), 가죽 제품, 잼 등이 판매된다. 평일 내내 조용하던 공간은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정을 나누는 다정한 장소로 변한다.
동진시장은 원래 연남동 주민들이 애용하던 작은 재래시장이었다. 채소를 비롯해 소소한 생활필수품을 팔던 곳.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 흘러 이웃하던 홍대 상권은 포화 상태가 됐고, 옆 동네로 상권이 번지다 연남동까지 카페와 술집들이 밀고 들어왔다. 그 사이에도 동진시장은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로 먼지만 쌓여갔다.
이곳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사회적 기업이 모여 만든 ‘모자란 협동조합’이 동진시장을 찾아냈다. 싸늘한 감은 있었지만,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따뜻한 시장 모습 그대로였다.
공정무역이나 농산물 유통, 재활용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협동체 ‘모자란 협동조합’은 애초에 자신들의 물건들을 팔기 위해 이 장소를 임차했다. 또한, 지역 예술가나 홍대에서 밀려난 작가들과 협업해 재미난 장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종 채소 재활용 물건을 판매하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젊음의 거리 한편에서 농산물을 팔아 이익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좀 달리했다. 시장에서 일할 판매자 이른바 ‘셀러’들을 모집했고 플리마켓(벼룩시장) 형태를 갖춘 지금의 동진시장으로 모습을 바꿨다. 대신 재래시장 원형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젊은 취향의 제품을 채워 넣었다. 처음 취지처럼 예술가들의 전시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한동안 열지 않았던 농산물 판매는 4월 말 재개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엔 ‘팜 페스트’라는 이름의 농산물 판매장이 선다. 문화와 사람이 어울려 매일이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 바로 이곳 아닐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5월, 에코팩 하나 들고 동진시장으로 향해보라.
어쩌다 수십 년 전 결혼식 사진을 볼 때면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부부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날의 설렘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재현할 수 있다. 바로 리마인드 웨딩(Remind Wedding)이다. 요즘은 30·40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거나, 환갑·칠순잔치를 대신해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소박하게 부부 기념사진을 찍는 것부터 지인들과 함께 즐기는 소규모 웨딩 파티까지. 빛바랜 사진 속 신랑·신부를 핑크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리마인드 웨딩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아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우아한웨딩(wooawedding.com) 장지현 이사
사진 우아한웨딩, 모노페이퍼, 포마이시스, 모먼츠 마켓, 한복 짓는 복나비 제공
메인사진 오철환·권경희 부부(결혼 30주년 기념 리마인드 웨딩 촬영 사진)
리마인드 웨딩을 위한 ‘스·드·메’ 가이드
요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 사이에서는 ‘스·드·메’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웨딩 준비에 필요한 필수 요소 3가지를 뜻한다. 많은 웨딩 업체에서도 ‘스·드·메 패키지’, ‘스·드·메 할인’ 등의 상품을 내놓고 있다. 리마인드 웨딩 역시 바로 이 ‘스·드·메’가 중요하다. 웨딩 디렉터와의 미팅 전 살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스·드·메’ 팁을 살펴보자.
△ 스튜디오&스폿(Studio & Spot)
웨딩 사진만 찍을 때나 웨딩 파티를 겸하는 경우나 장소 선정은 중요하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콘셉트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 사진 촬영만 하는 부부라면 리마인드 웨딩의 의미를 살려 과거 결혼식을 올렸던 예식장이나 신혼여행을 갔던 곳, 프로포즈했던 장소 등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특별한 파티를 기획하고 있다면 골프장, 리조트, 호텔, 펜션 등과 연계해 1박 2일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
△ 웨딩드레스 또는 웨딩한복 & 턱시도
웨딩드레스는 몸매가 드러나는 슬림한 라인보다는 에이(A)라인으로 퍼지는 모양의 드레스가 부담스럽지 않다. 대부분 중·장년 여성은 어깨를 드러내는 탑 드레스는 꺼리는 편이고, 어깨선을 감싸주거나 얇은 천이 덧대어진 스타일을 선호한다. 한복스타일의 웨딩한복도 체형을 보완해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낼 수 있어 찾는 이가 늘고 있다. 턱시도는 딱딱한 느낌보다는 꼬리가 달린 연미복을 입는 것이 중후하면서도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화려한 색의 행거칩과 보타이를 매치하면 위트 있고 발랄하게 연출할 수 있다. 웨딩 파티의 경우, 자녀들도 파티 드레스를 함께 입으면 멋진 파티 스타일 컷을 찍을 수 있다.
△ 메이크업&헤어 스타일
촬영장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비추기 때문에 되도록 반짝이는 펄이나 물광 연출은 피해야 한다. 번들거려 보이지 않도록 매트하게 피부톤을 맞추고, 하얀 드레스에 맞게 밝은 핑크톤으로 메이크업하는 것이 좋다. 평소 어두운 계열의 눈 화장으로 눈매를 강조하는 편이라면, 은은한 골드와 브라운 톤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것을 권한다.
중년 여성의 경우 단발머리가 많기 때문에 굵은 웨이브를 약간 주거나 깔끔한 올림머리 스타일로 연출하는 게 잘 어울린다. 티아라와 베일 등을 곁들여 연출하면 탈모나 흰머리 등 결점을 보완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현재는 맏딸인 한복려(韓福麗·69) 궁중음식연구원장과 둘째 딸인 한복선(韓福善·67) 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들에게 궁중음식이란 어머니의 삶이자, 한국 식문화의 큰 줄기, 그리고 곧 자신들의 삶과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복려 원장과 한복선 원장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다. 자매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인 황혜성 선생에게 전수 받았는데, 셋째 딸인 한복진(64) 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과 교수도 같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현재 한복진 교수는 일본에서 연구 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식문화라는 큰 줄기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곁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한복선)각자의 성품이나 재능을 살려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언니는 맏딸로서 엄마의 연구원을 맡아 기능 전수와 교육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저는 해외 생활과 TV 프로그램 경험 등을 살려 실생활 궁중음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죠. 셋째는 대학 교수니까 전문적인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며 인재 발굴에 힘쓰고요. 어머니가 활동하실 적에는 ‘요리 연구가’라는 말도 잘 안 쓰이던 시절인데, 요즘은 요리 분야도 아주 다양해졌잖아요. 어머니가 일궈놓으신 것들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게 우리 식문화를 알려야죠.”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 아닌 정신
가업을 이어가는 형제들 사이에는 다툼이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자매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처럼 정답고 사랑이 넘친다.
“(한복려)우리는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당신의 정신과 배움을 우리 자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요. 저도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만큼은 이어주기 위해 집안일에 어느 정도는 참여시키고 있어요.”
그렇다고 황혜성 선생이 유형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전수나 손재주에 그칠 수 있는 궁중요리라는 분야를 글과 책을 통해 역사적 산물로 탄생시킨 것은 가보인 동시에 우리 식문화의 보물과도 같다.
“(한복려) 내 어머니의 것이라 해서 지키고 물려주는 것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책만이 아니라, 물건들도 있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황혜성 자료관 등의 이름으로 내려고 해요. 어머니는 한국 궁중음식 역사의 큰 표적과도 같으신데 우리가 무언가를 정립해서 다독거려 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요. 어머니 제자들도 많기야 하지만, 자식이자 제자인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얼마가 걸리더라도 해내려고 해요.”
자매가 뜻을 모아 하는 일에 한복선 원장의 딸인 정라나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도 합세했다. 강 교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현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복선)할머니가 손주 진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죠. 딸이 미대를 다닐 때 담당 교수가 미술 쪽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뉴욕에 있는 요리 학교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조리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죠. 그때 손주의 입학식에도 같이 가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역시 피는 못 속여~
가장 좋은 스승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덕일까? 자매가 일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습에는 황혜성 선생의 면모가 배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손길만 닮는 것은 아니었다.
“(한복선)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모아 여행도 다니고 먹을 거며 뭐며 다 대접해주셨어요. 연로하셔서 몸도 힘들고 하실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내가 자리를 만들고 베푸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돼요.”
황혜성 선생의 따스함을 닮은 이가 한복선 원장이라면, 어머니의 단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한복려 원장이다. 이는 맏이로서 느낀 책임과 부담감을 숙명으로 여긴 데서 나온 성품이기도 하다.
“(한복려) 동생들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산다고 얘기해요. 대를 이어가는 자식으로서 사람들이 ‘어머니는 훌륭한데 딸들은 그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동생들보다 어깨가 더 무거운 것 같아요. 제가 잘 이끌고 우리가 노력해야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복은 참 아름답다. 가지런히 역삼각형으로 내려오는 새하얀 동정 깃에 고운 빛의 저고리와 치마가 이루는 조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 드레스에 비할 바 없이 멋지다. 예쁜 색상과 날렵한 선도 멋지지만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감춰지는 치마의 풍성함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 입으면 행동하기에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 상용하는 옷이 되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으로 명절 때나 찾아 입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리에서 한복 입은 아가씨가 눈에 띄인다. 특히 서울 삼청동부터 광화문까지 거리엔 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많이 보인다. 삼청동, 광화문뿐 아니라 인사동 근처에서도 한복 차림의 젊은 여성을 자주 볼 수 있다.
일본 지자체가 관광지에서 일부러 기모노(着物)를 입고 다니게 해 그곳의 명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한국의 한복 아가씨도 특별히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한복을 선보이려고 서울시가 진행하는 행사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정 지자체가 입혔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한복 차림엔 큰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 한복 아가씨가 단정하게 머리도 땋고 댕기도 들였으나 그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머리는 산발한 듯 풀어헤치고 치마의 뒷부분은 여미지 않은 채 벌어져 속에 입은 청바지가 훤히 나타났다. 이렇게 입을 거면 입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자는 당연히 이 일을 벌인 곳이 서울시라고 여기고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보았던 보기 싫은 모습에 대해 주의해 달라고 건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산콜센터에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부 소속 어느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곳에 문의해 봐도 거리의 한복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한다.
그러면 거리에서 보이는 수많은 한복 아가씨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던 중 인사동에 갈 일이 생겨 창덕궁 앞 정류장에 내렸는데 마침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눈에 보였다. 앞쪽에 즐겁게 깔깔대는 예쁜 한복 아가씨 세 명에 다가가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하며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한복 입고 다니는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자기들은 강원도에 사는 대학생인데 서울에 놀러 와 한복 체험을 하는 중이라 한다. 안국역 근처에 한복 대여해 주는 집이 있어 돈을 내고 한복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고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재미있다고 웃는다.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한복을 빌려 입고 하루를 즐기는 당당하고 멋진 젊은 여성들이었다.
기왕 빌려 입고 즐길 것이면 단정하게 입고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복을 입은 것도 고맙고, 이상하게 입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지적질 대신 칭찬만 해줬다. 아울러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 세 명의 예쁜 대학생이 즐거운 한복 체험을 했기를 바란다. 흔쾌히 포즈도 취해 준 학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오늘의 나들이를 마쳤다.
[경봉궁 부근서 한복대여점 삼삼오오 운영하는 정병훈 대표 일문일답]
-젊은이들이 한복 입기에 열광하기 시작한 시기는.
“3~4년 전부터다. 한복을 입고 에펠탑을 비롯한 유명한 여행지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는 것이 인기를 끈 것이다.”
-대여 비용만 30만원은 넘는데 한복을 왜 굳이 가지고 가는 걸까.
“일종의 놀이다. 재미있으니까 돈을 기꺼이 낸다.”
-외국인 여행객과 한국 학생 중 어느 쪽이 더 큰 고객인가.
“못 믿겠지만 한국 학생이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이 눈보라를 몰아 발을 치는데
永夜無眠正若何 긴 밤에 잠 못 드는 그 마음 어떠할까.
塚上他年人不到 내 죽으면 무덤을 찾는 사람 없으리니
可憐今世一枝花 가여워라 이 세상의 한 가지 꽃이여.
조선조 평양기생 소홍(小紅)이 지은 것으로 전해 오는 한시(漢詩)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새긴 김상유(1926~2002)의 판화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한겨울 밤, 눈보라가 닥쳐와 사립문은 절로 벌어지고, 뜰 앞 버드나무, 단풍나무 위에도 눈이 얼어붙었다. 초당 뒤편 소나무 잎은 어느새 얼음 별송이로 반짝이고, 아득한 산자락은 눈이 내려 마치 이승의 피안(彼岸) 넘어 고적(孤寂)한 저승의 정경이다. 방 안으로 단아한 기녀(妓女) 소홍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 긴 긴 밤을 어이하리.
판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김상유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고보 재학 중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월남하여 연세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 하차, 인천의 중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의 미술책을 탐독하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특히 판화에 매료되어 동판화(銅版畵) 연구에 매진했는데, 동판에 밑그림을 새기고 그걸 찍어낼 프레스기가 없어 국수틀을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1963년 그의 ‘동판화전’이 우리나라 동판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국제 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동판화 작품 ‘NO EXIT’가 대상을 차지하며 판화가의 길로 정진하였다. 세 장의 판화 연작 형태로, 사방이 깜깜한 먹빛 가운데 사각의 좁은 공간에 사람이 혼자 누워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형체는 조금 부스러지더니 세 번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사라진다. 1970년대 혼돈사회의 암울함을 형상화한 작가의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판화의 기법에는 목판화, 석판화,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이 있는데 나무에 새기거나 스크린에 밀어내는 것과 달리 동판화는 동판 위 밑그림을 따라 흔적을 내고 염산으로 부식시켜야 하는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정이 있다.
김상유도 시력이 낮아져서 1970년대 중반부터 목판화로 화업을 바꾸게 되는데 이 작품 ‘소홍절구(小紅絶句)’는 그즈음 동판에 새긴 것 중 걸작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동판에 그라운드(산에 안 녹는 용제)를 입히고 송곳 같은 도구로 밑그림을 그린 후 염산 등으로 판을 부식, 선을 살려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에칭(etching) 기법이지만, 목판에 새긴 듯 칼 맛이 엿보여서 더욱 매력적이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낸다는 복제성 때문에 수집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작품 값도 대개는 한 점에 비싸봐야 50만원을 넘지 못해 판화가들은 겸업을 하지 않고는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김상유도 1980년대 이후로 목판화와 함께 유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 세계가 가히 탈속(脫俗)의 경지에 이르니 수집가들에게는 호재가 되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어쩌면 자화상 같은 한복차림의 선비(혹은 도인)가 가부좌 자세로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거나 바람을 쐬며 한아(閒雅)의 정취에 젖어 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고독한 몸부림일 것이다. 2002년 이 작가가 운명하기 직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상유 1960~1999 전작전’은 한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의 헌정이었다.
동판화 작가하면 바로 떠오르는 또 한 분이 황규백(1932~ )이다. 이 작가는 동판화 중에도 아주 정치(精緻)한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판화를 찍어낸다. 이탈리아어 mezza tinta(중간 색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기법은 동판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고 판화를 찍으면 구멍 속에 있던 잉크가 나와 번지면서 색면을 이루어 부드러운 명암을 잘 나타낸다.
에칭처럼 판을 부식시키지 않으나, 일일이 구멍을 뚫고 메우고 하는 작업이 길 뿐 아니라 다색일 경우 밑그림의 구도나 색상에 맞추려면 작은 동판일지라도 온종일 세심한 사전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1954~1967년 ‘신조형’, ‘신상회’ 그룹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SW 헤이터의 아틀리에 17’이라는 판화제작소에서 판화 공부를 했다. 1970년에는 뉴욕으로 옮겨서 1990년까지 메조틴트 판화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2000년에는 영구 귀국하여 판화뿐 아니라 회화작업도 하여 유화작품만의 전시로도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판화는 대부분 20cm x 30cm 이내의 작은 화면이지만, 오랜 명상과 사색으로 짜인 구도의 조밀함, 깊고 우아한 색상이 감탄을 자아낸다. 잔디밭 위에 놓인 손수건이나 팽이, 실패, 부러진 성냥개비, 조약돌 하나, 날아가는 기러기의 물빛 날개 등 어쩌면 오랜 외국생활 동안 고향이 연상되는 하잘것없는 소품들 모두가 밀도 높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판화 ‘Rose’는 몇 해 전 경매회사에서 시행한 5월의 경매에서 120만원에 낙찰 받은 작품이다. 판화는 50만원 전후에 낙찰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작품은 경쟁자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올라갔다.
잔잔한 잔디 위로 푸르른 달빛 가득 내린 들판에, 여섯 그루의 향나무 같은 침엽수가 늘어섰다. 하늘 위로 부푼 상현달이 안개를 뿜으며 떠 있다. 바로 그 아래 잔디 위로 여느 풀꽃 하나 없이, 다만 장미 줄기 하나가 달 가까이 치솟아 올연하다. 잎 그물도 선명하고 빨간 꽃 한 송이는 달에 빛바래 핑크의 요염을 뽐내고 있다. 달과 장미의 사랑의 밀어가 시작되었다. 잔디와 잇닿은 풀밭과 숲의 경계가 달그림자와 안개에 몽롱하게 묻히고, 하늘빛마저 옅은 구름 사이 푸릇한 휘장을 신비롭게 드리워 야릇한 여름밤은 무르익고 있다. 수묵화의 물감이 종이에 스미어 번지듯 동판의 수많은 미세구멍에서 흘러나온 물감이 침엽수 가지와 그 떨기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서양화에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는데, 이 말은 이탈리아어 스푸마레(sfumare, 연기처럼 사라진다)에서 유래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경계가 희미하게 그려지고, 그 희미함이 선명함을 만들어 내는데, 황규백 판화에서 그 환상적 기법을 보게 된다.
달이 이울고 새벽이 오면 오롯이 이슬 머금고, 그러나 다시 밤을 기다릴 장미의 설렘이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여운을 즐길 수 있으니.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오랜 집주인이 버리고 떠난 적산가옥(敵産家屋) 조흥상회. “쓰레기더미니 버려 달라” 했던 집안 물건에는 우리네 살아온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월세 15만원에 내놓아도 외면받던 옛날식 창고는 요일마다 주인이 바뀌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이 됐다. 인천 배다리(인천시 동구 금곡동의 옛 지명)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과 요일가게 다 괜찮아(이하 요일가게)는 이렇게 우연한 발견으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을 거슬러 동인천 끝자락에 다다르면 잊고 지냈던 시절의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90년대 이전까지 인천 배다리의 마루지(랜드 마크)였던 조흥상회 건물은 부자 삼대를 넘기지 못하고 경매에 넘어갔다.
비밀스럽던 부잣집 대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에는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다. 쓰레기 치우는 데만 두 달 넘게 걸렸다. 집안을 청소하고 묵은 때를 벗겨내고 나니 옛 부잣집 티라도 내는 듯 조흥상회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집 여인네들이 손수 지은 한복과 배냇저고리, 수만 번은 사용했을 것 같은 끝이 닳은 밥주걱, 속이 가득 찬 전지분유와 미제 주스, 양주, 분쇄기 등 근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수백 점의 물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찾아낸 물건을 모아서 2014년 3월, 배다리 안내소로 사용하고 있는 조흥상회 건물 2층에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을 열고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은 ‘1인칭 박물관’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곳이다. ‘1인칭 박물관’이란 나(1인칭)와 가까운 사람의 것, 혹은 멀지 않은 과거 물건들을 나름의 이야기를 담아 전시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반드시 그곳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의 전시품들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조금씩 바뀐다. 아직도 꺼내놓지 않은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숨어 있다. 하지만 전시를 서두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온 만큼 찬찬히 제 빛깔을 찾으면 이야기와 함께 관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연애라는 기나긴 여정을 뚫고 마침내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할 때 어떻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경우가 많다. 또 대다수의 커플이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에 가장 다툼이 잦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결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신한은행 WM사업부 김희경 팀장에게 들어봤다.
1. 커플매칭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부유층 고객은 자녀뿐 아니라 부모의 기대치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다 맞추어야 합니다. 때문에 미팅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죠. 하지만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는 양가 부모의 동의 하에 교제가 진행되기 때문에 편하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보통은 만난 지 3개월 즈음 상대방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6개월이 되면 상견례가 이루어집니다. 대부분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 1년 정도 걸리는 셈이죠. 이렇게 커플 매칭을 통해 성사된 결혼이 올해 11월까지 총 34건입니다.
2. 결혼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날을 잡고 혼수가 진행되는 과정에 파혼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파혼 케이스는, 여성은 프리랜서였고 남성은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는데 만난 지 6개월 만에 날을 잡아 예물도 오가던 상황이었어요. 여성 측에서 남성에게 중형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했는데, 남성 측에서는 이왕이면 외제차면 좋겠다고 해서 틀어지기 시작했죠.
그 후에도 사소한 부분에서 마찰이 있더니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쪽의 욕심이 과할 때 파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만큼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우선돼야 할 것 같습니다.
3. 성혼커플의 공통된 사항은?
- 다양한 소개팅 경험으로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알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성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차고 차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야 이성에 대한 눈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눈높이가 조절돼야 결혼할 확률이 높으니 소개팅도 많이 하고, 나이에 걸맞은 연애를 꼭 해보라고 권합니다.
- 누구나 선호하는 스펙의 소유자. 희망상대 조건은 단순하다
좋은 학벌과 직업, 빼어난 외모, 어린 나이 등 누구나 선호하는 조건을 지닌 사람은 소개팅 기회도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경우는 그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개팅이란 누군가 나를 위해 대가 없이 애를 써 주는 것이니만큼, 상대를 추천해 주면 불만을 갖기보다는 일단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요. 조건 때문에 만남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보다 만나서 싫으면 ‘NO’를 외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죠.
- 성혼커플 90%가 남성이 첫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한 커플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요즘 젊은이들은 대화가 통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많이 찾는데 첫 만남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라면 최소 3번은 만나본 후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 집이나 직장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유리하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자주 만날 수 있고, 자주 만나야 정이 드니까, 거리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 성혼커플 평균 연령. 남성은 32~34세, 여성은 28~29세
남녀 모두 적령기를 넘기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워집니다. 여성은 자신을 만나 줄 상대가 부족해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들고, 남성은 만남의 기회는 많아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은 적령기에 짝을 찾아야 하는데, 남성은 30세쯤부터 시작해서 35세 전에, 여성은 28세 전후 시작해서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4. 꼼꼼 결혼 준비 150일 가이드
D-150 상견례, 결혼 날짜 택일
상견례 날짜는 2~3주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으며, 결혼 날짜는 신부 측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D-100 결혼식장 예약, 예물과 예단 상의 및 신혼 여행지 결정
결혼식장은 양가 중간 지점으로 하고, 예단은 현금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단을 받은 후 신랑 측에서는 봉채비를 보냅니다.
D-80 ‘스드메’ 결정하기
‘스드메’란 웨딩사진(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예식과 관련된 본격적인 사항을 정리합니다.
D-60 청첩장 주문, 한복 맞추기
청첩장은 한 달 전에 발송합니다.
D-50 주례와 사회 부탁하기, 신혼여행 준비하기
주례는 신랑 신부가 함께 아는 지인이나 어른에게, 사회자는 보통 신랑의 친구에게 부탁합니다.
D-30 예단과 함 보내기. 혼수 구입
예단에는 편지와 은수저, 반상기, 이불과 같은 현물 또는 현금(신권) 중 선호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신랑은 예단을 받은 후 신부 측에 함을 보냅니다. 함에는 예물과 혼서지, 한복, 예복 등을 넣습니다.
D-10 폐백음식 준비(2주 전에 주문),
각종 우편물 주소 변경, 드레스 가봉
D-5 주례와 사회자 연락(예식 시간 30분 전 도착 안내), 예약 사항 점검
신랑 신부를 도와 줄 도우미, 본식 사진 및 영상 촬영, 부케 및 코르사주, 연주, 축가, 메이크업 등 당일 필요한 사항을 점검합니다.
D-1 예식 당일 최종 점검
드레스, 부케, 한복, 차량, 폐백음식 등 최종 점검. 당일 신혼여행을 떠날 경우 짐과 여권을 준비하고, 컨디션 유지를 위해 휴식을 취합니다.
커플매칭 서비스가 결혼까지 관여한다?
커플매칭 서비스는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주된 업무로, 주선자의 말 한마디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교제가 시작되면 잘 만나고 있는지 중간에 알아보면서 성혼 날짜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자녀 혼사를 위해 어떠한 부분도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한복(韓服)
詩人 박목월
품이 낭낭해서 좋다.
바지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치면
그 푸근한 입성.
옷 안에 내가 푹 싸이는
그 안도감(安堵感)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 박목월의 시 한복(韓服)처럼 푸근함과, 안도감을 주는 우리의 옷 한복...
이혜미 한복디자이너가 설 명절을 맞아 아이에게 한복의 의미와 예법을 가르치고 있다.
한복디자이너 이혜미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박광훈의 이수자로, 숙명여대 의류학 박사이다.
㈜삼청각 유니폼 디자인 제작, KBS사극 ‘최강칠우’의 아트디렉터를 지냈으며,
2014년 문화관광부 주관 ‘新한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사임당 by 이혜미’의 대표이자 숭의여대 패션디자인과 외래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