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처럼 장롱 속을 뒤집어 정리하기로 했다. 잘 입지 않는 옷이 가득한 옷장은 한숨부터 나온다.
연례행사로 안 입는 옷을 추려내어 재활용 옷 수거함에 넣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입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옷이 한 가득하다.
한복 넣어 둔 서랍을 열어보니 곱게 싼 보자기에 보관한 우리 아들 아기 때 입혔던 옷이 나왔다.
면으로 된 흰색 쌍방울표 러닝과 팬티가 어찌나 조그맣고 인형 옷처럼 예쁜지 미소부터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아들 아기 때 입혔던 배냇저고리랑 앙증맞게 작은 첫 신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워낙 물건 버리기를 잘 못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내 옷은 수십 번 처리하며 살았어도 아기 옷 몇 가지는 꼭 갖고 있고 싶었다.
하얀색 융으로 만든 배냇저고리 2장은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때 솜씨 좋으신 시어머님이 직접 재봉질하셔서 만들고 하나씩 맡아 앞섶에 수를 놓았다.
어머님은 파란 색실로 감치셨고 나는 분홍 색실로 사슬뜨기를 해서 모양을 내었다.
사서 입혔던 많은 아기 옷은 아기가 자라면서 없어졌지만, 어머님과 내가 수를 놓아 만든 아기 옷은 버릴 수가 없었다.
가끔 장롱 속 서랍 한쪽에 넣어둔 아기 때 입혔던 옷들을 꺼내보면서 정말 우리 아들이 요렇게 작은 옷을 입을 때도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웃음이 난다.
어쩌면 필자는 손자가 생기면 “네 아빠가 입었던 옷이란다.” 하고 입혀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필자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 예쁜 손녀 손자를 갖게 되었다.
앙증맞은 팬티는 남자용이라 할 수 없지만, 필자랑 어머님이 마주 앉아 고운 색실로 수를 놓았던 배냇저고리는 손녀에게 입히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참 잘 처리한다.
연애결혼을 한 우리 아들도 결혼할 때 모든 걸 웨딩회사에 맡겼다며 필자에게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예전 필자가 결혼할 당시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가 준비해 주셨다. 예물도 그렇고 별로 필요하지 않은 그릇도 그때 유행하던 일본제 노리다케와 아리타로 한 세트씩 사주셔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쓴 그릇도 있을 정도로 알아서 준비해 주셨는데,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몇 시까지 청담동 어떤 한복집에 가서 옷을 맞추라던가 가봉을 하라고 하는 등 엄마가 신경 쓰는 일 없게 진행했다.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던 필자는 시댁으로부터 롤렉스시계와 패물로 7세트를 준비했다거나 밍크 목도리 등 당시로써는 많은 예물을 받았기 때문에 필자도 아들 결혼 준비를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예물도 둘이 알아서 골랐다 하고 함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물품도 알아서 준비했다고 해서 참 세상 좋아졌구나! 손뼉을 쳤었다.
그렇게 저희 둘이 알아서 하니 어떤 일도 참견을 할 수가 없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필자는 필자가 수놓은 배냇저고리를 꼭 입히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넌지시 “이것 봐라, 예쁘지? 네 남편이 아기 때 입었던 거란다.” 하며 보여 주었더니 예쁘다며 하하 웃을 뿐 아기에게 입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 옷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래도 옷감도 부드럽고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 입히라고 말하진 못했으며 아기용품은 이미 다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게 좋았지만 이럴 때 필자 의견을 주장 할 수 없는 게 좀 아쉽긴 하다.
필자는 꺼냈던 아기 옷들을 다시 싸서 장롱 서랍에 간직해 두었다.
가끔씩 꺼내 보면서 우리 아들이 손녀 손자보다 더 작을 때도 있었구나, 그때를 언제까지나 추억해 볼 것이다.
지난 23일, 서울시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단행본 출간 기념회가 있었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에어비앤비는 자기 집, 혹은 집의 일부분을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또 찾는 일종의 ‘인터넷 장터’다. 특히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일상생활도 하면서 자신의 집 남는 공간을 빌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에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사는 시니어 세대에게 매력적이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의 정서상 사촌이나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집을 내어주는 것이 납득 가지 않는 부분도 있을 듯. 은 에어비앤비에 관한 이해를 돕고 시니어 호스트의 참여를 바라는 마음에 나온 책으로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50세 이상의 호스트)’ 12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는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여행 속으로]라는 섹션으로 에어비앤비 시니어 호스트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본지를 통해 소개했던 4명의 시니어 호스트가 마침 12명으로도 소개돼 출간기념회에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2월 ‘여유가 흐르는 집’으로 소개했던 파주 헤이리 모티프원의 이안수씨.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촌장이자 에어비앤비에서 강력 추천하는 시니어 호스트 중 한 명이다. 흰 수염 곱게 내리고 너털너털 웃으면 함께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나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여자에게 ‘누나’라 부르지만 본인은 정작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젊은 날 잡지사 국장까지 지냈다는 이안수씨는 자유롭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자신의 집 또한 세계가 통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놓아 소통하는 중이다. 최근 (남해의 봄날)이라는 제목으로 ‘모티프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냈다.
4월 ‘도심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느끼다’에서 소개된 ‘북촌유정’의 박소자씨와 남편 이형술씨도 만날 수 있었다. 남편 이형술씨는 ‘북촌마을’의 촌장으로 ‘북촌’이라는 지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북촌유정은 종로구 계동의 작은 한옥으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뿐만 아니라 미술작가들의 갤러리로도 활용하고 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하기 전 오랫동안 하던 자원봉사를 못하게 돼 우울증세를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삶의 의욕과 활력을 되찾았다는 박소자씨. 시니어 호스트로서 건강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며 여전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5월 옥상정원에서 만났던 김향금씨는 아름다운 외모 덕에 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기자 간담회와 함께 출간 기념회에 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는 김향금씨. 곱게 생활한복을 입고 나와 책과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대표하는 표지모델로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향금 씨는 지난 3월,서울 리빙 페어에서 처음 만났다. 에어비앤비를 홍보하는 시니어 호스트로 방문객 맞이하며 활동적인 액티브 시니어의 모습을 보였다. 김향금씨의 옥상정원에서는 맛있는 커피도 내려주고 또, 타로카드도 직접 봐주기도. 취재 때 꽃이 없어 서운했는데 꽃이 지기 전 꼭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7월에 1박 2일로 방문했던 영월 앞뜰농장의 주인 장미자씨. 장미자씨의 앞뜰농장은 소프트웨어가 강한(?) 에어비앤비다. 활동할 것뿐만 아니라 먹을 것도 많은 곳. 1박 2일 동안 장미자씨를 따라가 술을 만들고,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동네 언니들과 장미자씨 뽕밭에서 오디도 따며 완벽한 시골 생활을 즐겼다. 아쉬운 점 하나! 영월 맑은 다슬기를 좀 채취를 했어야 했는데 못하고 왔다. 좀 더 추워지기 전 꼭 한 번 방문해야겠다.
는 활기차게 살아가는 시니어 세대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처럼 멋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시니어들을 를 통해 발굴하고 또 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모티프원, 북촌유정, 옥상정원, 앞뜰농장은 소개된 시니어 호스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이다.
필자는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 꽃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꽃을 꼽으라면 아마 도라지 꽃을 꼽을 것이다. 도라지 꽃은 귀품이 있어 보이고 깔끔하다. 반듯한 성품과 바른 심성을 가진 모습이다. 흩뜨러져 보이지 않고 교활하거나 사악해 보이지도 않다. 과하거나 넘치지도 않아 보인다. 녹색의 바탕 위에 보라색을 띄고 피어난 귀공자이거나 청초한 여인상이다. 왠지 도라지 꽃을 보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나 치열한 각박함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좋다.
시골 텃밭에는 도라지 밭이 있었다. 늘 그 장소에는 해마다 도라지 꽃이 피었다. 꽃이 필 적마다 필자는 도라지 줄기를 한 움큼 꺽어 책상 위 꽃병에 꽃아 두곤 했다. 환하게 활짝 핀 꽃도 있었지만 이제 막 피려 풍선처럼 자신의 몸을 부풀리는 봉오리도 있다.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몸 풀 준비를 하는 것이다. 책상 위 꽃병엔 흰색과 보라색 꽃이 어우러져 화려한 장식을 하곤 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들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도라지 꽃의 흔들림이 좋았다.
도라지의 꽃말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옛날 사랑하던 처녀와 청년이 있었는데 청년은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먼 중국으로 미래를 위하여 떠났다. 그러나 그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녀는 그를 기다리다 백발이 되어 죽게 되었는데 그곳에 도라지 꽃이 피게 되었다.” 라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도라지 꽃이며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붙여졌다.
도라지 꽃도 예쁘지만, 그 뿌리는 많은 영양소로 그득하다. 섬유질로 이루어져 위에 부담이 없으며 당질, 철분, 칼슘이 많고 사포닌이 함유되어 한방에서는 약재로도 쓰인다. 봄과 가을에 캐서 도라지 뿌리는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나물로 만들어 먹는다. 살짝 데 처서 싱겁게 먹거나 아니면 붉게 묻혀 날것으로 먹는다.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고추장 등에 붉게 묻혀 날로 먹는 것이다. 밥을 한 수저 뜨고 붉게 양념에 무친 도라지나물을 한 젓가락 먹으면 아삭아삭한 맛은 맛도 맛이지만 소리로도 먹는다. 그 씹히는 촉감도 그렇지만 입맛을 한층 북돋아 준다. 그래서 비슷한 부류의 연근, 우엉의 나물도 좋아한다, 어쨌든 도라지는 꽃과 뿌리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데가 없다
도라지 꽃은 한국적인 멋이 풍기는 꽃이다. 도도한 듯 당당하면서도 수줍은 듯 고운 자태를 뽑낸다. 한복 입은 여인의 모습처럼 멋스럽다. 그래서 나는 도라지 꽃을 사랑한다.
요즘에는 상식을 파괴하는 옷 스타일이 많은 것 같다. 겨울에 반소매 티셔츠 하나 달랑 걸치고 다니는 대담무쌍한 젊은이들도 있고 아무리 자세히 봐도 반바지라고 인정할 수 없는 짧고 얇은 팬티를 당당히 입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도 많다.
◇아내는 최고의 코디
이렇게 상식파괴의 패션이 일반화된 지 오래되었지만 사람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은 있는 것 같다. 체형과 얼굴이 한국적이어서 개량한복이 특별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엉덩이가 위로 착 달라붙고 얼굴 윤곽이 짙어 청바지에 남방 차림이 멋지게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또 평소에도 정장 스타일이 제격인 사람이 있고 캐쥬얼이 맞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자기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 입는 것도 중요하나 자리마다 어울리는 옷을 적절하게 맞춰 입는 것도 패셔니스트의 기본 조건이다. 가령 격식을 잔뜩 갖추어야 할 자리에 입는 옷과 자유로운 모임에 입고 가야 할 옷이 다른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상식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사람마다 잘 어울리는 옷 색깔을 찾아주는 컬러리스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의 중에 마침 필자가 모델케이스로 앞에 나가게 되었는데 강사는 몇 가지 색깔의 천을 필자 몸에 걸쳐 보였다. 그리고는 수강생들과 함께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고르는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필자에게는 창피스럽게도 밝은 핑크색이 잘 어울린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 강사는 왜 핑크색이 잘 어울리는지 이론적으로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강의가 계기가 되어 화사한 핑크색 넥타이를 하나 장만했다. 그러나 평소 무난한 색의 넥타이를 주로 선택하다가 파격을 추구하려니 영 신경이 쓰여 한두 번 매 보고는 옷장에 넣어 두었다.
◇헤어 스타일은 내맘 대로
필자의 경우 평소 옷이 ‘잘 어울린다’든지 ‘멋이 있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입는 것이다. 모든 옷을 아내가 골라주고 사 준다. 양복이 필요하다고 하면 백화점에 따라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적당한 것을 골라 준다. 안경에서부터 와이셔츠, 넥타이, 속옷, 잠옷, 등산복, 운동복, 구두나 운동화까지 필자가 선택해서 사 입고 다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헤어스타일만은 필자 마음대로 하고 다닌다. 약간 곱슬머리라서 좀 길게 하고 다니는 게 어울린다.
이렇게 헤어스타일 외에 모든 선택을 아내에게 맡기는 데는 확실한 논거가 있다. 아내의 패션 감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주로 동대문 시장에서 몇천 원, 몇만 원짜리 옷을 사 입는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 옷을 어느 백화점에서 구입했는지, 가격은 어떻게 되는지 무척 궁금해한다.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매우 비싼 옷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다. 아주 저렴하지만 잘 어울리는 옷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는 실패가 없는 아내의 예리한 감각을 인정하기에 필자는 옷에서 모든 선택을 아내에게 일임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아파트지만 가족 넷이 사는 데 별문제 없고, 주는 대로 먹으니 속이 편하고, 골라주는 대로 입고 다니면 되므로 옷 걱정도 없다. 이정도면 의식주가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거기다가 주위에서 패션도 좋다고 하니 기분도 좋다.
2012년 화실 모노그라프에 한 신사가 문을 두드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가 한 말은 “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였다.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윤성호(尹性浩·64)씨. 그에게 그림에 대한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화실까지 찾아올 용기가 생겼던 이유는 바로 그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마 우리 세대는 다 비슷할 거예요.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 그림은 꿈도 못 꿨으니까.”
졸업 후 시작한 사업에서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은 예기치 않게 그를 도왔다.
“한복이나 침구, 혼수 등을 직접 만들고 유통하는 일까지 함께 했었죠. 꽃무늬며, 체크무늬 같은 이불에 들어가는 원단 디자인을 제가 직접 하기도 했는데, 웬만한 직원보다 솜씨가 나았죠. 덕분에 사업도 잘됐고. 나중엔 직원 등쌀에 결국 손을 놨지만, 아직도 그 부분은 자신 있어요.”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자 욕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완성도 있는 그림에 대한 욕심. 하루에 3~4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예삿일이 됐다. 그 무아지경의 시간 속에서 그가 터득한 것은 ‘심미안’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예전에는 친구들과 음주가무에 많은 시간을 쏟고, 당구나 스키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죠. 그림을 하면서 술, 담배는 물론이고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됐지만 전 이게 싫지 않아요. 나이 들수록 친구와 만나야 한다는데, 아마 그건 취미가 없는 사람들 이야기일 거예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그림을 배운 시기도, 과정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 미대생인 딸과는 화풍도 다르고 그림에 대한 의견도 엇갈린다. 그래도 확실한 건 딸아이에게는 친구들 ‘카톡방’에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그림 그리는 아빠’라는 점이다.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작가’ 호칭이 생겼다. 화실의 추천으로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가 된 것.
“부끄럽죠. 처음엔 ‘윤 작가’라는 호칭에 붕뜬 기분이었지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책임감만 남더라고요. 그림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거나 선물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미술에 대한 선망이 있었던 분이라면 꼭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창경궁에서 숲 해설과 왕실 역사 강의가 있다 하여 갔다. 그런데 창경궁을 창덕궁으로 잘못 알고 갔다. 종로3가에서 내려 돈화문 쪽으로 10분 정도 걸었다.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창덕궁에 들어갔으나 창경궁은 창덕궁 안쪽으로 가서 다시 표를 끊고 가야 한다 하여 대략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시간이 늦어 빨리 가야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담장을 끼고 원남동 정문인 홍화문으로 갔다. 담장이 꽤 길었다. 빠른 걸음으로도 20분 정도 걸렸다.
원남동로터리가 보였다. 전철역이 멀어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보신탕에 얽힌 얘기이다. 필자가 군 입대를 1년 미루는 바람에 친구들 군대 송별회를 필자가 다 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필자가 군 입대를 할 때에는 모두 군에 있어 송별회도 제대로 못 받고 입대했다. 그래서 필자가 제대할 때 친구들이 대대적으로 신세를 갚는다며 부른 곳이 원남동로터리 보신탕집이다. 그 당시 원남동로터리에 보신탕집이 몇 군데 있었다. 인근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잘 안다며 데려간 곳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보신탕이 처음이었다. 전골로 나왔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깻잎만 건져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나중에 중소기업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일할 때 도움이 되었다. 기존 임원들이 젊은 공장장 기를 죽이자며 경기 성남시의 보신탕집에 데려 간 것이다. 두 번째 보신탕을 대하는 자리이므로 보신탕이 낯설지 않았다. 너무 맛있게 잘 먹으니 젊은 사람이 보신탕을 잘 먹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장장이었으므로 여름 피크시즌이 지나면 생산부 전원이 인근 개울가에서 보신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야유회에도 가야 했는데 거기서도 같은 칭찬 들었다.
창경궁의 추억은 필자가 군에서 제대한 바로 다음 해인 1976년에 이어졌다. 보신탕 덕분에 창경원을 생각해 낸 것이다. 복학하고 나니 1,2학년 여자 후배들과는 세대 차가 나서 같이 못 놀고 3,4학년 여학생들은 이미 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군 입대 전 가깝던 동아리 여자 후배가 근처 유치원에 배치받아 일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만나니 정도 들었는데 같이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가게 된 것이다. 인파는 북적이고 흙먼지가 날려 분위기는 부산스러웠다. 그 여자 후배는 사실 집안에서 어릴 때 정해준 약혼자가 있으며 결혼하게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살 예정이라고 했다. 시골 내려가기 싫어 마음이 움직이던 중 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전화를 사용할 때라서 전화할 때마다 원장이 받았다. 나랑 데이트하는 것을 눈치 챈 원장이 불러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조용히 타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밤벚꽃놀이 하는 날 이별장을 받은 셈이다.
세 번째 추억은 어렸을 적, 창경원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주사가 심한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어디서 호랑이 똥이 술 끊는 데 효과가 있다 하여 어머니가 여기서 어렵게 호랑이 똥을 구해 오셨다. 연탄불에 대야를 얹고 호랑이 똥을 태워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루를 걸러 그 당시 귀하던 양주병에 소주와 함께 타서 진열장에 놓아두었다. 조니 워커 병에 든 빨간 술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걸 드신 아버지는 여전히 주사가 심했고 같이 드신 작은아버지는 그 후로 이상하게 술이 안 받는다며 효과를 보였다.
그러니까 40년 만에 창경궁을 다시 가보게 된 것이다. 원남동로터리를 지나니 맞은편에 서울대 치과대학 건물과 암병동이 보였다. 창경궁 입장료는 1000원으로 창덕궁에 비해 쌌다. 화창한 봄날에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젊은 처녀들이 많이 보여 예뻤다. 알고 보니 근처에 1만5000 원 내외로 한복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그 옛날 그렇게 많던 벚꽃나무를 찾아 봤으나 안 보였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벚꽃나무들은 서울대공원과 여의도 등지로 옮겨 심어졌다는 것이었다. 창경원은 원래 창경궁이었으나 일제가 왕실 권위의 훼손 목적으로 다수의 건물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을 짓고 벚꽃나무들을 대량으로 심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09년부터 서울 시민들의 관광명소가 되었으나 역사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1986년 식물원은 그대로 두었으나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을 옮기고 다시 창경궁으로 원 이름을 찾게 되었다.
창경궁은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 숲속의 그늘이 조용한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아 보인다. 나와서 북쪽으로 20분쯤 걸어가면 혜화역과 대학로가 나온다. 저녁식사 겸 맥주 한 잔 하기 좋은 코스이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사전적 의미의 내숭은 ‘겉으로는 순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하다’다.
김현정 화가, 그녀는 청춘의 속내를 내숭을 떨지 않고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얇은 한복 속의 여인의 자태는 예쁘다기 보다는 무척 매혹적이다.
인사동에 가면 꼭 들리는 갤러리 몇 군데가 있다. 그날 갤러리 이즈에서 예정에 없던 전시를 만났다. 마치 전시장이 아니라 백화점 세일 장소처럼 관람객이 많았다. 동양화가 김현정씨가 그림 속의 한복과 같은 차림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시장을 찾았어도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전시의 타이틀은 '내숭쟁이 놀이공원'.이며 모든 그림에 작가가 들어있다. 작가는 서울대학교대학원 미술대학 동양화과 출신이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와 외국에서 수많은 전시를 열었으며 큰 상을 여러 번 타기도 했다. 어린 나이로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초대전시를 할 정도로 세계가 인정한 그녀다.
지금까지 본 전시 가운데 그림의 소재가 매우 파격적이다. 작품의 주제는 ‘내숭’이다. 내숭을 떨기는 쉬워도 드러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일상을 거침없이 자유자재로 화폭에 옮겼다고 한다.
화장하는 모습, 범퍼가를 타는, 말을타고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햄버거 배달하는, 역기를들고 운동하는,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먹는, 골프가방을 메고 가는, 당구 하는, 쇼핑하는, 자장면 먹는 등등 여러 모습이 있다.. 20대 청춘의 발랄함이 화폭마다 넘쳐났다. 이런 그림들이 전시 때마다 거의 매진된다니 대단하다.
여성은 속마음 감추고 잘 보이고 싶거나 혹은 남도다 돋보이고 싶을 때 내숭이라 하고 남성의 경우에는 허세라 한다. 내숭에 대한 뉘앙스는 엉큼함보다 귀여움이 들어있지만, 남성의 허세는 자신을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내숭이나 허세는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다. 둘 다 사회적인 틀을 벗어나기 싫어서 하는 일종의 방어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약간의 내숭과 허세를 떨 때가 있다. 그러나 자주 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내숭의 가면과 허세의 가면을 쓰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김현정의 작품은 관람객들한테 억압된 속내를 잠시나마 풀 수 있게 대리만족을 할 수 있게 한 유쾌한 전시였다.
나 또한 그녀의 발랄 유쾌함이 너무 부러웠다. 앞으로 그녀의 전시가 열릴 때 응원하러 반드시 찾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