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외식 창업 중 커피집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도 우후죽순 카페가 여럿 생겼다. 국립공원 등산로 밑에도 이전에는 없었는데 어느 날 카페 두 곳이 문을 열었다. 그래도 등산하는 사람들의 약속장소로 유용하니 생길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동네마다 들어서는 커피숍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커피 마시러 그렇게 많이 드나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주말에 집에 놀러온 예쁜 손녀가 제 어미에게 커피숍을 가자고 졸랐다. 아직 어린아이가 커피숍이라니?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커피숍이 뭐하는 곳인지는 알아?" 했더니 거기 가면 커피숍 이모가 초콜릿도 주고 사탕도 준다며 웃는다.
아들네가 이사 가기 전 동네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들여보내놓고 엄마들끼리 카페에서 브런치도 하며 즐겁게 지냈다는데 하원 후에도 아이들과 엄마들이 카페에 들르는 일이 많아서 손녀에게 커피숍이 마치 키즈카페처럼 인식된 모양이다.
이렇게 커피집이 많이 생겼는데 그중 시장통에 새로 생긴 커피숍 한 곳이 내 눈길을 끌었다. 외국어로 만든 멋진 상호가 대부분인데 이 커피숍의 간판은 ‘옥다방’이었다. 좀 촌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는 ‘옥다방’ 간판에는 귀여운 아가씨 얼굴 사진도 붙어 있었다. 흘깃 들여다보니 다방 종업원과 닮은 듯도 하다.
비슷비슷한 커피숍들이 많아서 그런지 정감이 묻어나는 이곳이 특별하게 보였다. 한번 들어가 다방 커피 한잔 마셔보고 싶었는데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요즘 체인점으로 유명한 '빽다방'이 들어섰다. 커피 값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다는 소문이어서 시장 다녀오는 길에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 사 들고 오는 게 유행처럼 되었다.
우리는 다방 세대다. 그때도 지금의 수많은 카페처럼 한 집 걸러 다방이 있었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쪽으로 카운터가 있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마담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마담들은 예복처럼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마담의 미모나 수완에 따라 매상이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마담들은 대부분 인물이 좋았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로 주요섭의 ‘아네모네 마담’이 있다. 아네모네 다방에 인기가 많은 마담이 있었다. 어느 날 잘생긴 대학생 손님이 들어와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늘 괴로운 표정으로 같은 곡을 부탁했는데 가끔 마담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마담은 자기에게 관심 있는 줄 알고 예쁜 귀고리도 달고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 손님이 발작하듯 울부짖으며 뛰쳐나가는 일이 생겼다. 잠시 후 그의 친구가 들어와 죄송하다면서 친구가 교수님 부인을 사랑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면서 카운터 뒤 모나리자 그림이 교수 부인을 닮아 너무 좋아했다고 말한다. 마담은 잘생긴 학생이 자기를 본 것이 아니고 카운터 뒤편의 모나리자 그림을 바라본 것을 알고는 무안해서 귀고리를 뺀다.
나도 젊은 날 착각깨나 해봐서 마담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잘생겼던 신성일이 대학생 역, 엄앵란이 마담 역을 맡았다. 어린 손녀가 커피숍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 생각났다. 그 시절 다방에 얽힌 추억들이 문득 정겹다.
전에 알지 못했기에 몇 년 전에 발표된 줄도 몰랐는데 요즘 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온 노래가 있다. 나는 음악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젊을 때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로트를 들으면 무식해 보일 것 같은 편견까지 있었다.
당시 어른들이 말했다. 나이 들면 음악 성향도 다 바뀐다고, 그러나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는 말처럼 나이가 드니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그렇게 무시했던 가수 남진, 나훈아가 지금은 너무 섹시해 보이고 노래도 멋지게 들리는 것이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한 영상에 눈길이 꽂혔다. 선남선녀의 결혼식에서 우아한 한복 차림의 친정어머니가 축가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신나는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노래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려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노래 제목은 바로 ‘아모르파티(amor fati)’. 아모르파티에서 파티는 우리가 흔히 아는 ‘party’가 아니라 ‘fati’로 운명이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어서 축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노래다.
역주행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에는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다시 유행이 되는 역주행 노래가 있다.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파티’도 그렇다. 리듬이 경쾌해 들으면 이토록 신이 나는데 왜 이제야 듣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가사도 의미 있다.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울린다.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 같다. 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가슴 아파 슬프게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유행가 가사는 어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지 놀랍다.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매력적인 친정어머니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선 딸과 사위를 향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 뛰는 대로 살라”고 노래했다. 신혼부부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하지만 장면이 재미있어 웃으며 감상했다. 그 영상을 본 후 나도 아모르파티를 배워 멋지게 불러보고 싶어졌다. 한때 가수가 되려 한 적도 있으므로 금방 배워 잘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휴대폰을 켜놓고 따라 불러보니 만만치 않은 노래였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가수 김연자처럼 감칠맛 나게 부르기가 힘들었다. 리듬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잘 불러보려고 열심히 연습 중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써가며 산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되고 인생은 지금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트로트 가사에 다 녹아 있다.
아모르파티! 우리 모두 운명을 사랑하고 지금을 멋지게 살아보자.
카리스마,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그리고 아버지 故 박노식으로부터 이어지는 3대째 배우 가족의 가장인 배우 박준규(56)를 만난 것은 박술녀 한복연구소에서였다. 새해를 맞이해 생애 처음 그가 아내 진송아 씨, 장모(정갑숙), 어머니(김용숙)와 함께 한복 나들이를 한 자리였다. 촬영 현장에서 가족들을 대하며 보여줬던 즐거운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에너지가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무엇이든, 실제의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모든 것에 우선해서 두는 사람이다. 그의 남다른 가족 사랑, 그리고 숨겨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준규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보여준 그의 자연스러운 유쾌함이 계속 궁금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긍정적 마인드죠. 저는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연기만 하고 차 안에 있다가 나가고 하는 그런 건 제겐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쉴 때가 되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거나, 유럽에서 혼자 한 달 동안 지내다 온다는데, 저는 해본 적 없고 그런 생각도 든 적 없어요.”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의 긍정적인 마음은 오롯이 가족을 향해 있었다.
“집안 돌아가는 게 모든 것의 우선이죠. 어디 투자도 못하고 꾸준히 먹고살 정도로만 살고 있어요. 빌딩 하나 사도 될 만큼 번 적도 있지만 집에서 놀고먹다가 까먹고.(웃음) 여행도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요. 혼자 있는 거 싫거든요.”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인 박종혁 군과 박종찬 군은 둘 다 배우다. 박준규의 아버지인 액션스타 박노식 씨까지 아우르는 3대 배우 가족이다. 그리고 아내 진송아 씨 또한 배우다. 그야말로 가족 전부가 연기 전문가다.
“아이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죠. 쉽지 않은 직업이고 잘 이겨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제가 되도록 아이들과 같이 TV에 안 나가려고 해요.”
어째서일까? 그 이면에는 연예인 가족이라는 입장이 주는 부담이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쓰는 수많은 ‘악플’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받는 근거 없는 조롱과 멸시도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고, 특히 요즘 사회를 경악케 만든 소위 ‘2세들의 갑질’에 대해 민감해하는 대중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 탓도 있다.
“‘네 아버지가 쌍칼이라 잘되는 거지’, ‘애 연기자 시키려고 저러나보다’라는 말들이 큰 상처가 돼요. 그런데 종혁이, 종찬이는 드라마, 뮤지컬 전부 다 스스로 알아서 오디션을 봐서 통과한 거예요. 지금도 계속 오디션을 보고 있고요. 요즘 세상에 어떤 제작자가 아무나 캐스팅하겠습니까. 대충 지인 꽂아서 만들지 않아요. 사실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물론 그런 과정은 다 겪어야 하는 거지만… 속상하죠.”
‘3대째 하고 있는 칼국수집은 믿음이 간다’ 하면서 ‘3대째 연기자 집안은 끼리끼리 해먹는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편견 아닌가, 어쩌면 연기를 전문적인 기술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정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늘 함께하는 가족
그러나 같은 일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이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분명히 있다. 연기에 대해 얘기하자 그의 침울했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따로 연기 공부를 시킨다든지 하는 건 없어요. 종찬이가 뮤지컬 공연할 때 포즈나 행동, 액션에 대해 잠깐 보여주면 ‘이게 낫다’ 하는 정도로만 조언해요. 와이프도 배우이다 보니 네 명이 앉아서 연기나 음악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집중되죠. 우리 가족은 대화 자체가 해피해요. 같은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대개 가족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박준규의 집에서는 연출이나 연기 등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밖에서 따로 도는 일도 없다.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가족 전부가 모여서 같이 마신다.
“저 같은 경우는 금수저로 태어났다가 흙수저가 됐다가 다시 금수저가 되어가는 중이고, 우리 얘들은 금수저죠. 그런데 금수저면 스스로 금수저답게 행동해야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게 아니라고 봐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도 맞는 말이지만 좀 늦게 정신 차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1년이 지나 걷는 아이도 있는데 억지로 걷게 해서 더 안 좋아지는 것처럼요.”
박준규의 교육 방침은 기본적으로는 ‘내버려둬’이다. 자기가 살다 보면, 단체 생활을 하게 되면, 때 되면 알게 된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은 가르치고 버르장머리 없고 이기적인 습관들은 지적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것만큼은 지키고 살았죠. 아빠가 일하고 들어왔는데 방에서 공부하느라 인사도 안 한다면, 그런 건 잘못됐다고 봐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서 인사해야 하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한 게 있으면, 약속 전날에 밤을 새든 말든 상관 안 하지만 그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그의 교육적 방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책임질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행히 아이들은 단체 생활인 드라마 제작 현장을 어렸을 때부터 봤기 때문에, 자기들이 잘못된 게 있으면 스스로 고치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게 고맙다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제 아이들이 잘한다는 얘기들을 듣게 되는데, 너무 기분 좋죠. 바쁜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 아들들한테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박노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됐지요.”
난데없이 떨어진 7억 빚
그는 사람들에게 “박준규가 나오니 작품이 재미있네”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항상 그렇게 믿음이 가는 배우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은 그가 가진 연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꾸준한 연극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2년 이후부터는 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공연 쪽에서 큰 문제가 난 적이 있었다고 사실을 밝혔다.
“2016년에 뮤지컬을 제작했어요.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때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굉장히 잘돼서 ‘음, 역시 박준규는 제작이면 제작, 연출이면 연출 못하는 게 없어’라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해 12월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관객 수가 급감해서 망했어요. 그리고 파트너였던 사람이 개인파산을 신청하면서 제작비 전부가 제 빚이 되더군요. 서류상으로 할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저 혼자 갚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일로 그가 갚아야 할 빚은 약 7억 원.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채권자 중에는 지인도 있는 만큼 그들에게 도의를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으로 1, 2년 더 고생하면 갚을 수 있을 듯해요. 그동안 아이들도 잘되면 좋고. 나도 좋은 작품 한 번 또 열심히 하게 되면 좋고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인생사에 새겨진 굵직한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배우가 아닌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잘한 일은 지금의 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잘한 일이라면 진송아와 결혼한 거죠. 진송아가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해서 쓰레기 인생을 살았을걸.(웃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지금의 아이들이 있어줘서 고맙고요.”
그가 보는 아내의 장점은 ‘괴롭히지 않고 잔소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오래 함께 잘 살아온 비법은 아이들을 ‘내버려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을 보면 케미가 좋은 동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부의 인연을 오래 고스란히 유지하려면 상대가 바뀌길 바라면 안 돼요. 있는 그대로 둬야죠.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상대를 자기화하려고 해서 일어나요. 가르치려고 들고, 서로 몇십 년간 살아온 습관이 있는데 그걸 바꾸라고 강요하다가 다투게 되죠. 와이프와 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유지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박준규, 깨달음을 만나다
박준규의 강점은 솔직함이다. 그의 이름이 몇 년 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방송에서 아침은 며느리가 차려주는 걸로 먹어야겠다고 말했던 일 때문이다. 요즘처럼 페미니즘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는 더 화제가 될 발언이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침을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정주부라면 자기 할 일은 해야지. 그런 말 몇 마디 했다가 ‘망언이네, 간 큰 시아버지네’라며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돼서 며느리 밥 먹겠다는 게 이상한가? 전 지금도 그걸 바라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뭔가를 힘들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것이 진짜 희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 발언을 한 후 동네 약국에서 한 사람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내게도 아들이 있는데, 고맙다”라고 말해주더란다. 아마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러나 말할 처지가 못 되다 보니 그의 솔직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족도 그의 솔직함을 약간(?) 걱정하는 눈치다. 솔직함이 때로는 까칠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와이프는 ‘제발 그런 얘기가 나와도 말 좀 가려라, 여성 비하 발언은 조심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살다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부들을 많이 봐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 보면 뭐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제하고 있어요. 아내가 ‘그런 얘기를 들어도 뭐 그런 것도 좋겠네 하면서 대꾸하지 마라’ 해서 그럴려고요.(웃음) 정말이지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걸랑요.”
I’m the best, so you
2019년의 박준규도 지금까지처럼 바쁘게 움직일 생각이다. 봄이 되면 우선 지난해 방영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드라마 ‘검법남녀’ 시즌2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혼자가 될지 여럿이 될지는 구상 중에 있다고. 인터뷰 끝에 앞으로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는 그에게 신년 덕담을 주문했다.
“요즘은 자신은 안 돌보고 자식들만 돌보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임 더 베스트, 소 유(I’m the best, so you), 내가 최고고 당신도 최고다. 우리는 항상 베스트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베스트라는 것도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거죠.”
조용했던 뜨개질 방이 술렁거렸다. 이제부터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다니. 잠시나마 당황했다. 손녀뻘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알록달록 형형색색 끈을 펼쳐보였다. 막상 눈앞에 놓아둔 것을 보니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랑 할머니랑 도란도란 앉아서 우리네 옛 매듭을 엮어 만들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샘솟았다. 전통매듭과 함께 소녀시대로 돌아간 송파시니어클럽의 술술맵시단을 찾아갔다.
전통매듭이 뭐길래?
“작은 선생님, 이리 좀 오셔봐요. 나 길을 잃어버렸어. 요놈 가져다가 넘기지? 하나는 잘 넘어왔는데 하나가 영 안 되네.”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상에 바짝 앉아 ‘오벌가락지매듭’을 만들고 있던 한미자 씨였다. 매듭이 제 길을 찾아 잘 가나 싶었는데 결국 헤매고 말았다며 최현숙 선생을 불러 세운다.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이용해 끈과 끈이 오가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전통매듭이 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송파시니어클럽에는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8명의 여성 시니어가 모여 매듭을 배우느라 열기가 가득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1월이면 전통매듭을 만난 지도 5개월째다. 기초 매듭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니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젊은이들처럼 손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아가 예술성과 함께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시니어 취미를 넘은 수익활동 영역으로까지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전통매듭을 시니어와 함께 해보겠다며 송파시니어클럽에 노크를 한 이들은 30대가 주축인 문화예술사업단 술술공작소다.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시니어의 자세가 남달라 새삼 놀랐다.
“기초적인 매듭부터 하나하나 지어나가면서 완벽하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가 수업입니다. 저희가 매번 와서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 하루는 교육하고 그다음 시간은 숙제로 내드린 것을 해오게 합니다.”
매듭을 배우기 위해 시니어 학생들이 교실 안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좌석 배치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본매듭을 배우는 단계와 만들어진 매듭을 적당한 색상으로 배합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단계로 나눠서 일사분란하게 구성원들끼리 호흡을 맞춘다.
술술맵시단, 젊은이와 전통을 공감하다
전통매듭이라는 분야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고 보급할까 고민했다고 강순주 대표는 말했다.
“다른 지역의 시니어 관련 기관에도 가봤습니다. 마침 송파시니어클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셨어요. 이곳에서 뜨개질하는 시니어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전통매듭을 하는 시니어는 송파시니어클럽의 사업단 중 하나인 한코한코손뜨개사업단 소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주방용 아크릴 수세미 상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해왔다.
“뜨개질도 하는데 전통매듭을 만들어보시라고 제안을 드린 것이죠. 아무래도 손뜨개를 하는 분들이니까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거나, 집에서 만드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80대 시니어가 적지 않았다고. 30대 젊은 강사가 전통매듭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시니어에게 옛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것이 연봉매듭이에요. 왕의 곤룡포를 비롯해서 한복이 쓰이는 단추매듭이죠. 한 어르신이 옛날에는 시집가기 전에 옷감 자투리를 말아서 단추를 해가지고 가는 것이 혼수품이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만들어 쓰던 매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매듭이 생각 안 나면 어른들이 그러셨대요. 내가 이제 갈 때가 됐구나.(웃음)”
세대 간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이렇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세대 공감 프로젝트로 보였다. 5개월쯤 함께 활동한 후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도 신중한 고민을 거쳐 내놓았다. 바로 술술맵시단. ‘매듭을 만드는 시니어 모임’이라는 뜻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잖아요. 설명해드려도 모르는 게 있다 하시면 옆에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없을 때도 작업을 꽤 잘하십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이분들이 정식으로 자격증을 따고 더 나아가 또래 시니어는 물론 다양한 분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매듭을 가르쳤으면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작고 아담한 작업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눈과 손은 예리하게 반응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뜨개질을 오래도록 해왔던 이희자 씨는 “전통매듭이 생소한 분야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들면서 가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 초반 ‘오벌가락지매듭’으로 고생하던 한미자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던 모습만 봤는데 젊은 선생님에게 배우게 됐다”며 좋아했다. 술술맵시단 고령자 중 한 명인 김정애 씨는 “손을 많이 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지역 행사 때 어린아이들한테 매듭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보람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80대인 김을용 씨는 “너무 못 따라가고 민폐일까봐 고민을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셔서 만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다가와 새로운 걸 가르쳐줍니까.” 술술맵시단 시니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여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진지하게 매듭을 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술술맵시단의 멋진 미래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
클래식 소녀 국악을 만나 전통예술을 깨치다
“추계예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전통매듭을 가르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35세의 클래식 전공자였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교수들과도 격 없이 지냈다는 강순주 대표에게 국악과 교수들은 “클래식 작곡 전공자가 국악을 하면 더 가치 있지 않겠냐”며 조언했다. 그때의 강한 끌림으로 졸업과 함께 락음국악단(예술나눔청년사업단)에 들어가 3년 여 활동했다. 뜻 맞는 음악 친구들과는 전통예술단 ‘호연(浩演)’을 만들어 11년째 활동 중이다.
“예술 분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원금이 없으면 예술 단체는 힘들거든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잖아요. 지원도 걱정이 되고 자립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국악기에 달린 매듭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악기는 애지중지 닦고 조율하면서 매듭술은 악기 처음 샀을 때 있던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꼬질꼬질해졌다. ‘매듭술 만드는 곳 어디 없나?’ 하다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 선생님한테 제 전공부터 시작해서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말씀드렸어요. 상황을 들으시고는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사범증을 따고 나니 뭔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술술공작소다. 작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스타트업센터 예술 분야 업체로 선정돼 입주했다. 다양한 축제에 전통매듭으로 참여하다 보니 협업이 가능한 동반 집단이 있으면 좋을 듯싶어 다양한 계층을 만났다.
“다문화가정 여성들도 가르쳐보고 보호관찰소 여학생들도 만나봤어요. 꼼꼼하고 실력은 좋은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시니어에게는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전통이나 매듭을 생각하면 시니어를 떠올리게 되니 진부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모를 얘기, 특히 매듭과 관련한 추억을 들려주시는 시니어 덕이 컸다. 최근엔 조금씩 수익도 내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과 작업했던 작품이 면세점에서 판매됐다.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전통을 시니어와 함께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스토리를 담은 음악극도 훗날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음악가로서 포부도 밝혔다.
“우리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매듭이 자리를 잡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원활하게 돌아가면 음악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난 요즘 활동도 안 하는데… 왜 저를 인터뷰를 하시나요?” 50대 후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외모와 수줍은 표정 그리고 말투. 그녀의 글과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4차원적이지만 차분하고 내공이 느껴졌다. 밝고 예쁜 표정 뒤에는 그녀만의 강한 카리스마도 엿보였다. 그러면서 연약해서 바람만 불면 무너질 것도 같다. 아니다!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너무나도 약해 보여서 그녀를 보호해주려다가도 한량 이봉규마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서정희의 크고 맑은 눈은 세상의 어둠을 다 품을 것같이 해탈한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세상은 시시해서 저 별에서 온 여인 같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고 종잡을 수도 없는 묘한 마력의 여인이다. 어두운 시절을 겪고 난 뒤에 오는 작은 평화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원래 욕심이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천성 때문에 그런 느낌을 주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자신도 지난 과거를 회상해보면 ‘고립무원’이 떠오른단다. 어린 나이에 세상 밖에서 남들과 같이 살았더라면 오늘 서정희의 마력은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녀의 엄청난 재능이 발견되거나 개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고립무원의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몰입할 것을 찾기 위해 기도하면서 혼자서 뭐든 해야만 했다. 살림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꽃꽂이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고립무원의 시간들이 오늘의 서정희의 마력과 내공을 만들어준 듯하다. 이렇듯 서정희는 뒤늦게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랑은 다시 못할 것 같다”는 그녀의 한탄스런 말에 이봉규가 “충분하다. 나도 몇 년 전에 늦게 재혼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신도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그녀, 이제 자유를 알았다
서세원과는 그 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 연락도 안 한다고 한다. 그는 딸과도 만난 적이 없다. 아이들도 엄마가 혼자 살기를 원했다. “애들은 내 편이다. 서세원 씨도 잘 살면 좋겠다. 지금은 불편한 마음도 없다.”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알았다. 자신을 알아가는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며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모든 시간을 나만을 위해 쓸 수 있어서 좋다. 내 삶을 추적해보면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이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내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면서 “그동안 순응하며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본분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전부 극복한 편안한 얼굴이다.
“지금은 내가 중심이다.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여자이고 왜소해서 내 안에 강함이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요즘에야 느낀다.”
서정희의 충만한 표정은 오라(Aura)가 되어 그녀를 감싼다. 그래서일까? 글 쓰는 솜씨도 대단하다.
나는 ‘필’이 중요하다
느닷없이 그녀에게 ‘이봉규tv’(유튜브 방송)에서 영상 에세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원래 내성적이라 혼자 조용히 있을 때 행복해하는 일상을 영상으로 표현하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요즘 이구동성으로 “느리게 살자!” 하면서도 바쁘게 난리치며 산다. 서정희는 진정으로 느리게 살고 있다. 그 모습을 이봉규가 영상에 담고 싶은 거다.
서정희는 “낮 12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느리게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낮 12시까지 새벽기도, 글쓰기, 인테리어, 도면 그리기 등 시간을 쪼개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오후에는 철저하게 느림의 삶을 실천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핸드폰에 메모해놨다가 새벽기도 갔다 와서 정리하며 글을 쓴다.
“사람들이 외적인 것만 보려 한다. 나는 내적인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글쓰기를 좋아한다.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책을 낼 때는 원고 수정 없이 나만의 문체로 남기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고집도 있다. 서정희는 필(feel)을 중요시한다. 그녀는 최근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곡을 쓸 때 많은 것을 버리면서 시작했다. 나도 글을 쓸 때나 인테리어를 할 때 내 안에 저장해놓은 것들을 버리면서 시작한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평소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하고 사물과 건축물을 탐미하고 그런 것들을 많이 담아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나만의 성안에 있었다. 세상의 고정관념이 불편했다. 나만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고, 생각하고, 활동하면 사람들이 내게 개량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다소 흥분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예를 들어 내가 발레를 하면 ‘그 나이에 무슨 발레?’ 하면서 시비를 걸어온다”고 억울해한다. 그녀는 남들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감정, 글로 표현하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게 편해졌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점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다. 첩첩 갇혀 있던 소녀가 이제 어른이 되어 자유를 찾은 것이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내공이 깊어 보이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영화 노트가 따로 있다. 영화를 보고 줄거리, 평점, 배우 호감도뿐만 아니라 “두 번 봐야 한다. 세 번은 봐야 한다” 등 서정희식으로 메모를 한다. ‘요리 노트’도 있다. 어린아이 같은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즉석에서 표현하는 어린아이같이 그 즉시 떠오르는 표현들을 간직하려 글로 남긴다.
“어설프지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녀의 글은 훌륭하다. 아이처럼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성악도 배우고 있다. 이봉규가 놀라서 “성악도 배워요?”라는 질문에 “꼭 자질이 있는 사람만 배워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는 좋아하면 뭐든지 한단다. 서정희의 자기 탐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차원적 마력의 소유자 서정희를 한 차원 낮은 이봉규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봉규 특유의 짓궂은 질문에 “혼자 있는 게 주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혼자 살기에 주력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라고는 애들 아빠밖에 없었다”고 믿기 힘든 고백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말도 안 돼!”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서정희는 양면성이 있다. 이슬만 먹을 것 같은데 뭐든지 잘 먹는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욕먹을 것 같다”고 깔깔대며 웃는다.
털털하게 아무거나 잘 먹고 한 번 먹으면 거하게 먹는 스타일이라니 점점 종잡을 수가 없다. 조용한 스타일 같은데 수다스럽게 재잘재잘 말도 잘한다. 뜬금없이 이 주제 저 주제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런 점은 내 아내와 비슷하다. 나는 소프라노인 아내에게 서정희를 무료로 레슨해 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했다.
서정희는 관심 없는 것은 아예 무시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산다. 세상을 대하는 체감온도는 낮다. 누구나 재미있어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들을 좋아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면 그녀 혼자 울곤 한다. 그러면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장면에서 울음이 나왔나?” 하며 의아해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독특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훗날 내 가족만이라도 소녀 엄마로 기억하고 내 캐릭터대로 인정해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유럽의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면 그곳 중심에 광장과 함께 고풍스러운 건물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대부분 ‘시청 청사’다. 그리고 그 청사 건물 중앙 높은 곳에 있는 한 여인의 조각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劒]을 거머쥐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바로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다. 라틴어 Justitia는 영어 ‘Justice’의 어원이기도 하다.
문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die Göttin der Gerechtigkeit)’는 손에 칼만 쥐고 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들어와 ‘정의의 여신(Justitia)’상에 ‘칼과 저울’이 등장했고, 이런 형상의 조형물이 유럽 관공서 건축의 외장 조형물로 크게 자리매김했다.
요컨대 정의를 구현하는 데 엄한 힘[權勢]인 칼만 갖고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상징하는 ‘저울’을 여신에게 준 것이다. 아울러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 ‘눈가리개[眼帶]’도 등장한다(사진 1).
얼마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 광장인 ‘뢰머 플라츠(Römer Platz)’는 1년여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정의의 여신상’을 세웠다. 일견 다른 ‘여신상’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조각상이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눈가리개’가 없는 ‘정의의 여신’임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여신’이 시 의회 건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은 시 의회가 공정하면서도 공평하게 의무를 다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사진 2).
사실 유럽 고도(古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의의 여신’ 중에는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여신상이 더러 있다. 국내 법원이나 법조계 관련 건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대부분 ‘눈가리개’가 없는, 눈을 뜬 여신상이 주종을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대법원 건물에 있는 한국적 ‘정의의 여신’이다. 여기서 ‘한국적’이라 함은 여신이 무엇보다 우리 한복 차림에 강한 집행력을 상징하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또한 그 ‘여신’은 ‘눈가리개’ 없이 눈을 멀쩡히 뜨고 있다.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물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국내의 높고 낮은 법정의 판례와 관련해 종종 회자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 같은 표현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공평성이라는 잣대가 ‘눈 뜨고 내리는 판단’과 ‘눈 감고 내리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는 없는 법이기에 우리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올수록 밖에서 노닐기보다는 따뜻한 집 안에서 즐길 만한 것을 찾게 된다. 뜨개질로 목도리나 장갑을 만들거나, 책을 읽으며 여가를 보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프랑스 자수, 보태니컬 자수, 꽃 자수 등 다양한 형태의 자수가 주부들의 취미로 사랑받고 있다. 아기자기한 야생화 자수와 더불어 풀꽃 시인 나태주의 아름다운 시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야생화 자수, 시가 되다’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야생화 자수, 시가 되다’ 글·자수 김주영, 시 나태주 자료 제공 웅진리빙하우스
한 땀: 야생화 자수, 시와 만나다
책의 첫 장인 ‘한 땀’에서는 ‘개망초’, ‘수수꽃다리’ 등 나태주 시인의 대표 시 30여 편과 김주영 작가의 야생화 자수 작품을 나란히 보여준다. 수록된 시 중
9편은 시인이 책을 위해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어는 알록달록한 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야생화와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중간마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실제 꽃 사진도 엿볼 수 있다. 촘촘한 실의 짜임과 섬유의 질감을 살린 이미지가 자수의 매력을 더욱 잘 드러낸다.
두 땀: 야생화 자수, 일상이 되다
한복이나 보자기 외에도 다양한 소품에 야생화 자수를 응용해볼 수 있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는 일상에서 적용해볼 만한 자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손주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짓거나 셔츠를 리폼할 때 올망졸망한 자수를 놓아 포인트를 줄 수도 있고, 리넨으로 집 안에서 쓸 룸슈즈나 앞치마 등을 만들며 좋아하는 패턴을 넣어도 좋다. 평범한 소품에 야생화 자수를 더한 꽃송이 티매트나 매화다포, 장미파우치 등은 선물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세 땀: 처음, 자수를 시작하다
야생화 자수는 손재주가 좋거나 세심한 성향인 이들에게 적합하리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품의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수정 작업도 가능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즐길 만한 취미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수에 도전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준비 과정을 정리했다. 재료와 원단을 고르는 방법부터 자수가 완성되기까지 전 과정을 다룬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직접 마음에 드는 야생화 도안을 그리고 수를 놓는 노하우를 전수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 plus 1
나태주 시인의 시와 함께 나온 자수 작품들의 도안과 그에 대한 설명이 부록으로 담겼다. 먼저 색감을 알 수 있도록 컬러 일러스트로 크게 작품을 보여준다. 그 아래 실선만 따로 그려 러닝 스티치, 롱앤드쇼트 스티치, 체인 스티치 등 스티치 기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달았다. 완성 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도록 실제 자수 이미지를 작게 첨부하는 등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 plus 2
자연에서 만난 야생화를 보고 자수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겠지만, 책에서 보여주듯 시 한 편이 영감을 주기도 한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신작 ‘나태주 육필시화집’에는 그가 직접 쓰고 그린 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손끝에서 자수가 피어날 준비를 하는 듯 하다. 꼭 자수 아이템을 찾지 않더라도 찬찬히 시집을 읽으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plus 3
책에 꼼꼼하게 설명이 잘 나왔지만 손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보니 간혹 이해가 덜 되는 부분이 생긴다. 그럴 땐 동영상의 힘을 빌려보자. 구독자 4만2000여 명의 선택을 받은 유튜브 채널 ‘뭐든지 바느질 프랑스 자수’에는 200여 개가 넘는 다양한 자수 관련 동영상이 있다. 자수의 기초 매뉴얼부터 다양한 소품 활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Tip
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Tip
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Tip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LP플레이어, 검정 교복, 불량 식품, 필름 카메라, 만화 잡지 등 ‘레트로(retro)’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문화적 소품이나 콘텐츠를 지칭한다. 예능과 다큐는 물론 영화, 드라마에서도 이런 소품이나 콘텐츠를 마치 레트로의 본질적인 것인 양 부각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지엽적이다. 그것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인 코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사치일 수도 있겠다. 레트로가 제대로 복권(復權)된 것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복고는 온갖 비난과 폄하를 당해왔다. 특히 고성장기에는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한때 레트로는 단순 복고로 여겨져 세 가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런 시선을 밟고 나가야 레트로의 본질에 닿을 것이다. 우선 문화 지체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복고는 취향과 선택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다고 진단되었다. 복고 소재를 다루는 문화 콘텐츠의 경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답습하고 우려먹기 식으로 제작한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현실 도피로 보는 시선이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로 퇴행한다는 비판이었다. 이 때문에 정신병리학적 측면의 진단이 내려지기도 했다. 미래 전망이 불투명할 때 매번 복고 열풍이 일어난다는 규정이었다. 마지막은 복고를 일시적 트렌드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복고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묻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복고는 항구적이다. 다만 시기와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1970~80년대 문화가 1990년대로 이동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줬다. 얼마 안 있으면 2000년대가 레트로의 시공간으로 등장할 것이다.
레트로에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본질적인 맥락은 복고풍에 있다. 즉 복고 스타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레트로가 단순히 옛날에 사용하거나 즐겼던 대상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에 쓰던 물건이나 즐기던 문화 활동이 다시 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똑같은 음악이나 옷, 가구가 아닌 과거의 스타일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옛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차별화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 레트로는 재발견의 대상이다. 필름 카메라와 현상 사진은 새롭게 재발견되어 개인 취향이 된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는 단순히 옛날에 쓰던 물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지털의 장점을 결합시켜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준다. 궁궐이나 한옥마을에서 입는 한복도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젊은 세대가 입는 한복은 기성세대가 입던 한복보다 더 화려하고 블링블링하다. 중년 세대에게 레트로는 추억이다. 그것도 아름답고 애틋함을 자아내게 만드는 황금 같은 기억들을 담고 있다. 친숙한 것들은 인지심리학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되어 뇌의 활동이 거의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레트로는 자기진화를 하는 경향이 있다. 중년 이후의 세대가 복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청춘기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과거의 시간을 데려와 현재의 시간과 융합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라도 추억과 향수의 대상은 재창조되어야 한다.
젊은 세대의 재발견과 중년 세대의 추억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뉴트로(new-tro)다. 이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향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과거 스타일로 보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져 기성 세대에게는 익숙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이러한 뉴트로 제품은 새 것이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빈티지한 느낌을 하나의 스타일로 가전제품, 가구, 포장지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유행, 즉 뉴트로 트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물품이나 콘텐츠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뭔가 보편적 가치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뉴트로’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리메이크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일반 생활용품에만 적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나 음악작품의 리메이크는 과거의 콘텐츠를 새로운 감각에 맞게 재창작하는 것이다. 이때 레트로는 새로운 창조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세대 교감과 통합의 매개 역할도 한다. ‘불후의 명곡’이나 ‘히든 싱어’에 나오는 노래들은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작품으로 자리매김됐다. 이것들은 더 이상 낡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유행의 시작이다.
중년 세대만이 친숙하게 생각할 것 같은 복고는 레트로를 통해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레트로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경험의 문을 열어준다. 또한 가벼운 트렌드가 아닌 깊이와 품격을 지닌 고급문화를 알게 해준다. 신구 세대의 만남이 레트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 간의 문화적 갈등은 줄고 미래지향적 흐름이 존재하게 된다. 레트로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분명 젊은 세대의 감각과 융합 기술이 있기에 가능하다.
다만, 한국의 레트로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창조되지 않는 면이 있다. 대중매체와 대기업이 대형 마케팅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레트로의 창조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유명 장소, 유행 콘텐츠를 따라 하거나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레트로 스타일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레트로의 생명력이 세대 간을 가로질러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