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적인 불황 요인들이 겹쳐 수많은 기업이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아이디어 제품으로 독자적인 시장을 지키고 있는 회사가 있다. 특허를 획득한 이온생성기가 만들어지는 수전류 시스템을 세계 40개국에 수출하는 아리랑이온이 그곳이다. ㈜아리랑이온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신자 대표는 감사 경영의 대표주자로, 감사의 실천을 통해 인생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 놀라운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감사의 힘을 믿고 감사 전도사가 된 사연, 그리고 삶을 바꿔준 드라마틱한 CEO 성장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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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위 셀럽들에게 제대로 된 ‘물건’이라며 입소문이 난 제품이 있다. 바로 아리랑이온의 샤워기가 그것이다. 물 본연의 특성을 이용해 연구 개발된 이온화 장치를 통해 오직 물만으로 에너지 활성수를 만들어내는 아리랑이온의 특수한 샤워기는 강력한 세척 효과와 의료보건, 미용소염 등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세계 각국에서 특허와 ISO와 KC마크 인증 등을 이미 취득한 아리랑이온의 실력은 현재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아리랑이온의 핵심기술을 만든 사람은 바로 발명가 허성열 대표. 그리고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는 그의 아내 김신자 대표다. 사실상 시니어 부부가 합동으로 이끌어가는 아리랑이온은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기는커녕 그때 부부는 수십 년째 이어진 심각한 삶의 위기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가정은 내팽개치고 연구만 한 남편
“남편이 9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글을 못 읽었다고 해요. 그런데 팽이나 연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대요. 그래서 시아버지께서 공고에 입학시켰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남편에게 이온화가 뭐냐고 물었다고 해요. 책을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남편이 이온화에 대해 설명하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대요. 그 이후로 남편은 평생 음이온을 생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왔답니다. 늘 스승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요.”
말하자면 17세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허성열 대표는 끊임없이 이온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특허를 내는 게 그의 유일한 일이었다. 문제는 가정은 내팽개치고 오직 연구만 했던 것. 발명 특허에만 매달린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지킨 이는 음악 교사였던 아내 김신자 대표.
“남편은 실험을 한다며 매달 1000만 원 이상씩 썼죠.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월급을 타도 빚쟁이들이 가져갔어요. 빚쟁이들이 교무실에 와서 제 돈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성당에 가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쌀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어요. 집은 경매에 들어가 저녁 10시가 되면 찾아와 집 언제 비워줄 거냐며 독촉했죠. 정말 비참한 생활이었어요.”
비참의 끝을 만나다
집이 평화로울 리 없었다. 남편의 성격도 문제였다. 그야말로 불같은 성격이었던 남편은 그녀에게 걸핏하면 폭언을 쏟아내고 물건들을 부수기 일쑤였다. 부부간의 정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다.
“외롭고 슬펐죠. 남편의 마음속에는 다섯 살 아이가 있었던 거예요. 시아버지가 학대하면서 공부를 잘할 줄 알고 남편을 구박하고 때렸다고 해요. 결혼하고 나니 내가 그 아버지로 보였던 거예요. 너무 괴로웠지만 이혼을 하자니 주변 사람들이 쑤군거리면서 만족해할까봐 싫었어요.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결혼한 남편이기도 했고.”
2005년 그녀는 교직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40여 년간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 덕분에 큰 빚은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상황은 안 좋았다. 그런 데다 이제 일도 안 하게 됐으니 남편과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함께 있으면 더 싸울 것 같아 남편에게 “특허들 중 한 가지를 내놔봐라, 내가 구슬을 꿰어보겠다”고 했다. 그 말이 씨가 되었다.
도약의 계기가 된 기적의 200만 원
“이제는 돈을 구할 수도 없고 아파트는 경매에 들어가 쫓겨날 위기에 있었고 빚 이자에 먹고살기도 힘들었는데, 마지막으로 200만 원만 있으면 20번째로 낸 특허 제품을 몇 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더군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매달렸던 건 성경 말씀이었어요. 그리고 긍정에 관한 책을 읽고 실천하는 막연한 날들뿐이었어요.”
그런데 하늘이 마치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교통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200만 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 돈으로 이온샤워기를 열 개 만들어 강남 일대에 사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권했다.
“그러다 잠실에 사는 건설 회사 회장의 아내가 이온샤워기를 써본 뒤 가족들의 아토피, 무좀, 속쓰림이 없어지고 화장실 냄새도 안 나는 걸 확인했다며 이온샤워기를 사줬어요. 그래서 회사를 차리고 저희 제품들을 납품하게 됐지요.”
그녀 인생의 전환점, 아리랑이온이라는 회사가 탄생하게 된 잊을 수 없는 2009년의 일이었다.
‘감사’ 덕분에 회사가 회생하다
김 대표가 남편의 강한 성격에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다. 그를 이기기 위해 마음 공부, 심리학 공부, 기 공부, 오행 공부를 2000년부터 시작했다. 그녀의 취미이자 위안이 독서가 된 계기이기도 했다.
“걱정, 근심, 좌절, 미움, 원망이 가득한 내 몸은 망가져 갔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니 용기는 나지 않고 무서웠어요. 그 용기로 마음을 바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고 그때부터 책을 엄청나게 읽기 시작했죠.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지켜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생명의 은인처럼 나를 살린 책들은 김상운의 ‘와칭’, 이재영의 ‘모든 것은 마음입니다’, 루이스 헤이의 ‘치유’, 로렌스 크레인의 ‘러브 유어 셀프’였어요. 지금도 시간만 나면 도서관 책방에 가서 쭈그려 앉아 읽고, 좋은 말은 적어 집 안과 회사 구석구석에 붙여놓고 되새깁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책 다섯 권은 읽고 있어요.”
그녀의 버팀목이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감사’였다. 사실 감사는 그녀를 버티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꾼 커다란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는 2012년 우연히 CEO 포럼에서 감사 경영에 관한 손욱 농심 회장의 강연을 듣게 됐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던 그때, 회사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3개월간 매출이 안 좋을 때였어요. 그때 손욱 회장님 강연을 듣고 쓰레기통에서부터 화장실까지 ‘감사 미소’ 스티커를 붙였죠. 힘들다가도 그걸 보면 웃음이 나왔어요. 그러던 차에 바로 뉴욕에서 1000개, LA에서 1000개의 주문이 들어온 거예요. 덕분에 회사가 회생할 수 있었죠. 그 후로 저는 남이 믿든 안 믿든 확신을 가지고 ‘감사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사랑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기적같이 다시 일어난 뒤 ‘감사’는 그녀의 신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다.
“심리학 공부를 하니 모두가 ‘내가 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했어요. 또 하루에 다섯 가지 감사할 일을 찾기로 했어요. ‘시래깃국이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웃어줘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고함을 안 쳐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그릇을 던졌는데 하나만 깨져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를 찾고, 남편 생일에 감사한 내용을 모아 ‘100가지 감사 카드’를 만들어서 줬죠. 그러기를 네 번 했어요. 그랬더니 변하더군요. 이젠 신혼처럼 살고 있어요.”
남편은 이제 그녀에게 “당신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김치찌개를 끓여주면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일이 어딨냐”면서 감동한다고 한다.
“49년을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상대에게 감사를 하니 변화가 왔어요. 기적이에요.”
감사 습관은 ‘333법칙’으로
감사가 만들어낸 놀라운 변화들을 목격한 그녀는 감사 경영을 회사에도 적용했다.
“감사 경영은 가장 멋진 기업 경영입니다. 사원들도 감사로, 고객들에게도 감사로, 가족에게도 감사로, 화장실 청소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거리 청소를 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끼어드는 앞차에게도 감사로 대해야 해요.”
그녀는 어느 책에서 배운 감사 습관 형성 방법을 소개했다. ‘333법칙’이 그것이다.
“결심이 사흘을 넘기기 어렵기에
3일은 습관을 길들이는 첫 번째 관문을 뜻합니다. 3주는 습관이 형성되는 최소한의 시간을 뜻해요. 하나의 세계가 깨지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하죠. 3개월은 100일을 뜻하는데,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데 100일의 시간이 걸렸듯 본능의 탈을 벗고 온전히 다시 태어나는 시간을 뜻합니다. 이렇듯 확신과 신념과 의지가 중요해요. 의지가 강한 저도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이제 김 대표는 매일 새벽 4시부터 성경 구절로 감사편지를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그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풀어지고 이뤄진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다.
진짜 어르신의 조건
어렸을 적, 6·25전쟁이 막 끝난 뒤의 일이다. 김 대표는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당사주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얘가 여자인데도 장관감이다. 대단한 딸이니 잘 가르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장관이 되기 위해서였을까.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놓지 않고 살았다. 이제 CEO로서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입장이 된 그녀는 백세시대의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세워두고 있다. 그녀는 백세시대 노년의 삶에서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들로 건강, 봉사, 독서, 취미, 경영을 꼽았다.
“요즘을 어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하죠. 제가 생각하는 어르신이란 부지런해서 자기관리를 잘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과 미소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에요. 따뜻하고 어질고, 알아도 모른 체하며 잘못을 이해해주고 포근히 감싸는, 결 고운 노인이라면 참다운 어르신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자로 진정한 자신 찾기
황혼이혼·졸혼이 화제가 되는 사회 현실은 시니어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상황을 이미 겪고 마침내 극복한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듯했다.
“모멸감이 들 때 꾹꾹 억누르면 그 감정은 거세게 부글부글 끓어올라 몸과 마음의 병이 됩니다. 그러니까 억누르지 말고 관찰자로 가만히 바라봐야 해요. 남편 때문에 괴롭고 모욕감을 느끼면 남편에 대한 분노, 절망, 억울함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거든요. 괴로운 감정을 멈추고 싶을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도 안 됩니다. 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어나는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감정도 생각도 내 몸의 반응도 가만히 바라보세요. 억누르면 더 거세게 화가 나니까 있는 그대로 가만히 바라봐요. 그러면 저절로 사라지는 기적이 옵니다.”
사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아내에게 막말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응어리진 감정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말도 생각도 감정도 남편의 것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남편을 미워할 근거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정한 나는 마음의 어떤 움직임이나 감정도 생각도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는 관찰자예요. 그러면 영은 무한한 마음이 되고 응어리를 풀어놓으면 텅 빈 마음이 됩니다. 그 텅 빈 마음 안에 무한한 평화, 자비, 사랑, 연민, 근원의 감정이 차오르면 해탈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가만히 주시하는 바람 자체가 되도록 멀리 관찰자로서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500억 원 모아 세상 변화시키고파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고 그러면 가족 모두도 사랑으로 채워진다”는 믿음은 계속 확고해지고 있다는 김 대표.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나의 생이 다할 때까지 행복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믿거나 말거나 확고한 사랑과 감사의 실천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 사회에 기여하는 멋진 회사를 만들고 싶어요.”
이제 그녀의 꿈은 500억 원을 모으는 것이라고 한다. 그 구체적이고 큰 숫자에 담긴 사연은 무엇일까.
“예술의전당 같은 성격의 작은 예술센터를 어려운 동네 열 곳에 짓기 위해서예요. 5층짜리 건물을 지어 동네 사람들이 가까운 예술센터를 찾아가 전시회, 음악회, 오페라, 독서토론, 인문학 강의 등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풍부한 감성으로 지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정의 태양이 될 거예요.”
“모든 삶의 답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꾸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는 모순적인 그녀의 말에는 자신이 치른 일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큼은 확실하다며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333법칙으로 죽을힘을 다해 실천하면 부자 되기 쉬워요. 어렵다지만 실천하면 태양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소중합니다’라고, ‘감사 미소’와 함께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들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똑 부러지는 여고 시절을 보냈다. 누군가의 자랑, 반듯함을 넘어서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을 명문여고 출신.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육십이 넘어 거추장스런 무게를 벗어던지게 될 줄 말이다. 이화여고 출신 여성 시니어 록밴드 루비밴드. 그녀들의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토요일 오후, 잠실의 한 합주실. 밴드 활동을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만 64세 이화여고 동창 5인조 그룹사운드 루비밴드가 매주 자리를 잡고 합주한다. 리더이자 드럼인 박혜홍을 주축으로 문윤실(일렉 기타), 박순희(베이스 기타), 류은순(건반), 이오옥(보컬)이 루비밴드의 멤버다.
루비밴드. 붉은 빛이 강렬한 보석 루비를 뜻할 뿐만 아니라 ‘생기 있고(Refresh) 흔하지 않은(Uncommon) 아름다움(Beautiful)과 젊음(Young)을 간직한 밴드’라고 자신들을 당차게 설명한다. 시니어의 안정감 위에 신선함과 도전정신을 덧발라 세상이 없던 색깔로 거듭나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현재 이들이 완벽하게 연주하는 곡은 ‘Bad Case of Loving You’, ‘누구 없소’, ‘바운스’, ‘Keep on Running’ 등 총 8곡이고 현재 2곡 등을 더 연습하고 있다. 박자가 서로 맞지 않으면 연주를 멈추고 상의도 한다. 루비밴드의 대표 커버곡인 ‘Bad Case of Loving You’는 좀 더 완벽한 연주를 위해 반복해서 연습했다.
특히 이날은 류은순 씨가 합류하는 날이었다. 현재 부산 부경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류은순 씨는 한 달에 한 번 상경해 멤버들과 합을 맞춘다.
“루비밴드 최초 공연을 같이했고 최근에 다시 합류했어요. 마침 제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를 보고 살짝 록 음악에 대한 판타지에 빠져 있었는데 루비밴드의 건반 자리가 비었다고 들어오라더군요. 훗날 밴드 활동으로 봉사도 해보자고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매달 올라오지만 정년 후에는 밴드 활동을 더 열심히 할 수 있겠죠.(웃음)”
금강산 놀순이에서 탄생한 루비밴드
이 여성 밴드의 탄생은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화여고 개교 40주년을 앞두고 뭔가 의미있고 재미있는 것을 하자며 1974년도 졸업생 몇몇이 머리를 맞댔다고 베이시스트 박순희 씨가 말을 꺼냈다.
“동창 중에 ‘금강산 놀순이 팀’이라고 있어요. 내금강에 같이 갔다 온 친구들이 뭔가 일을 꾸며보자고 입을 모았어요.”
밴드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는 중학교 교사 출신이자 학생들과 다수의 합주 경험이 있었던 박혜홍 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때 친구들을 쓱 둘러봤습니다. 마침 클래식 기타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실이가 있었어요. 피아노를 친다는 은순이도 생각났고요. 지금은 베이시스트이지만 노래 잘하는 순희도 밴드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밴드를 구성해서 이화여고 개교 40주년 모임에서 공연했어요. 두 곡을 불렀는데 가발 쓰고 옷도 요란하게 입고 난리를 쳤어요. 기대 이상으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니 뜸해지더라고요.(웃음)”
난생처음 느껴보는 환호와 박수의 무대였지만 밴드 활동은 잦아들었다. 그 무렵 각자의 자녀들이 결혼하고, 손자손녀가 태어나다 보니 육아의 일부분을 챙기는 멤버들도 생겨났다.
시니어 밴드로 무대에 오르다
그냥 잊힐 뻔한 루비밴드의 이름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박혜홍 씨가 말했다.
“작년에 시니어 밴드를 찾는 한 기업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됐습니다. 일상에 젖어 살고 있었는데 뭔가 불끈하며 가슴을 때렸어요. 멤버들을 찾아서 의견을 모으고 이제 정말 제대로 해보자고 말했습니다. 기타 잘 치는 윤실이랑은 지속적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딱 눈에 들어왔어요.”
10년 넘게 치던 클래식 기타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일렉 기타로 전향했다는 문윤실 씨는 루비밴드를 묵묵하게 이끌어온 대표 멤버다.
“저는 클래식 기타 팀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어요. 일렉 기타를 제대로 연주하고 싶어서 학원에 다녔습니다. 물론 다들 각자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실용음악학원에는 다니더군요. 클래식 기타 연주로 봉사 많이 다녔어요. 클래식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매력이죠. 그런데 밴드 음악은 사람들에게 흥과 즐거움을 주더라고요. 박수도 치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들을 보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물 만난 보컬과 천재 베이시스트의 등장
때마침 루비밴드의 보컬이 될 인재(?) 이오옥 씨가 불쑥 나타났다. 이화여고 출신 중에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고 할까? 화장을 곱게 하고 알록달록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밴드에 적합한 인물이다.
“개교 42주년 송년회 때 행운권 당첨이 되어서 무대에 나갔어요. 노래를 부르라기에 목청껏 불렀습니다. 그런데 혜홍이가 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어요. ‘밴드를 재결성할 건데 너 보컬 할래?’ 해서 당연히 ‘OK!’라고 했어요.”
그리고 첫 공연 때 보컬을 담당했던 박순희에게 베이스 기타를 권유했다. 노력파에 박자감각이 뛰어났기에 베이시스트로서 멤버들의 몰표를 받았다.
“제가 원래 대한약사회 합창단 출신입니다. 그런데 연락이 왔어요. 베이스는 ‘둥둥둥둥’치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사실 베이스 기타는 여자가 치기가 힘들어요. 연락 받자마자 베이스를 배우려고 기타 학원에 등록했어요. 작년 4월이었어요. 학원 선생님이 이런 천재가 어디 숨어 있었냐고 했습니다.”
팀을 결성하고 멤버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연습 3개월 후 시니어를 위한 공연 무대에 올라 6곡을 완벽하게 연주했고 앙코르곡도 소화해냈다. 여고 동창들 앞에 섰던 무대를 발판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이후 방송과 언론 매체에 시니어 여성 록밴드로 소개되면서 각종 축제에 초청돼 연주 여행을 가기도 했다. 작년 말에는 보컬 이오옥 씨의 아들 결혼식에서 축하 공연을 했다고. 곱게 한복을 입고 혼주석에 앉아 있던 이오옥이 나와서 밴드와 함께 춤을 추자 결혼식장이 콘서트장으로 변했다는 후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자신들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 많은 음악을 섭렵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실력에 맞춰 록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루비밴드는 언젠가 한국 시니어 여성 밴드의 힘을 알리며 세계를 누비고 싶다고 했다. 눈부신 활약을 기대해본다.
나무를 좋아해 나무와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다. 늘 나무를 심었다. 애지중지 가꾸고 돌보고 어루만졌다. 몸뿐인가. 마음까지 나무에게 바쳤다. 그 결과 들판 가운데에 있던 황무지가 장엄한 숲으로 변했다. 거대한 정원이 태어났다. 들어보셨는가. 나주시 금천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한국화가 박태후(64).
사건? 그렇다, 가히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초대형 개인정원을 만든 게 아닌가. 정원 면적은 자그마치 14만㎡(약 1만2000평). 대략 축구장 6개를 합친 크기의 정원이다. ‘이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나와 팔자 좋게도 평생토록 정원을 즐기나보다.’ 그렇게 지레짐작을 하는 이도 있을 테지. 돈이면 무엇이건 다 해낼 수 있다는 미신이 만연한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박태후는 가난한 농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간신히 밥 먹고 자랐다. 줄곧 손에 거머쥔 것 없이 살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하게도 거대한 정원 조성에 인생을 던졌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죽설헌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으로 개성적인가? 일단 줏대 넘치는 정원이다. 전국 곳곳엔 개인이 조성한 화려한 정원이나 수목원이 많다. 대체로 서양식 아니면 일본식 정원, 또는 이도저도 아닌 짬뽕이다. 박태후의 정원은 다르다. 한국 정원의 전통과 양식을 추구해왔다는 게 아닌가. 외제와 외풍과 외래종을 얕잡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다. 본때 있는 토종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정신과 고유성을 탐구해 나름대로 구현하는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스스로 과제를 부여한 셈이며,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스스로 배웠고, 배운 대로 밀어붙였다. 줏대 아니면 푹 쓰러질 인물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특징엔 어떤 게 있죠?”
“자연을 존중하는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 게 한국식 정원입니다. 서양식 정원은 달라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서구의 사고 전통이지요. 정원의 구조에도 정복의 정신이 고스란히 서려 있어요. 성(城)을 건축하듯이 과감한 기하학적 기법으로 정원을 만들어요. 일본 정원은 자연의 최대 축소치를 추구합니다. 자연을 넘어 우주까지를 축소시켜 집 안에 끌어들이고자 해요. 그 축소 노력을 통해 발달한 게 전지(剪枝) 기술이죠. 고도의 인위를 구사하는 겁니다. 반면 전래의 한국 정원은 나무를 가급적 있는 그대로 놔뒀어요. 자연스럽게 자라 어우러지도록 존중, 인위적 변형이나 관리를 자제하는 거죠.”
“지친 마음을 나무 그늘 아래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정원이지 않을까? 굳이 한국적 정원을 한사코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지 않겠어요? 조경이건 미술이건 뭐건, 세계 속에서 최고를 구가하려면 전통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일테면, 대통령 부부가 외국 순방을 할 때 한복을 입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마찬가지로 고유의 한국적 정원이 아닌 일본풍과 서양풍 일색으로 변한 조경 관습에 개탄을 금할 길이 없어요. 오늘날의 정원 99%가 남의 나라 방식을 따르고 있다니, 이게 정상일까?”
“말하자면 죽설헌이 한국적 정원의 본보기라는?”
“아, 그렇진 않아요.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식 정원이지만, 온전히 규범적인 한국식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지향한다, 한국적 자연 정원을 지향한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만약 죽설헌을 전형적인 한국 정원이라고 내세운다면 학계로부터 쏟아지는 신랄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조경 학자들의 이론(異論)이 난무할걸요. 아마도 게거품을 물고 덤비지 않을까.(웃음)”
정원 조경의 실제 경험에 관한 한 박태후를 능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재야 조경가다. 고독한 고수다. 일쑤 삐딱한 눈총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때가 오면 ‘대한민국을 통째 디자인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박태후가 제도권 전문가들을 바라보는 태세에도 날카로운 게 들어 있다.
“이론들끼리 기탄없이 다투어야 답이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원탁회의라도 열어 토론을 해봅시다! 제가 자주 그런 얘길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이 없다는 거. 오늘 저는 또다시 토론을 제안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요점이 뭐냐면, 대다수의 학자나 이론가들은 비원 같은 궁중정원이나 사대부들의 별서정원(자연에 귀의, 유유자적하기 위해 지은 별장에 딸린 정원)을 한국 정원의 원류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저는 서민들이 누린 토속적 정원에서 원형을 봐요. 장독대와 텃밭까지를 포괄한 자연 정원에 더 흥미와 애정을 느껴요. 정원을 일부 상층부의 전유물쯤으로 국한하는 견해에 동감할 수 없는 겁니다.”
모네의 정원 답사하고 감명받아
남도에 태풍이 스쳐지나가는 날이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죽설헌 숲이 출렁인다. 둥근 야산 하나가 통째로 몸을 떠는 것 같다. 개인 정원이 어이 이토록 동산처럼 방대한가? 한국적인 걸 지향하는 데에 규모화가 기본일 리는 없을 것이다. 방대할 뿐 아니라 어느 한구석 허술한 게 없으니 놀랍다. 나무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은 걸 원칙으로 삼았다지만, 정원다운 운치와 구성과 미학이 생동하니 손길과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번듯한 정원을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게 좋아 그냥 심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심으면 자라고, 가꾸면 꽃피어나는 식물들의 질서정연한 생리와 생태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본격적으로 한국적 자연 정원이라는 것에 착안하고 올인하기 시작한 건 중년에 접어들어서였지요.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정원을 답사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서였어요. 같은 화가로서 강렬한 매혹을 느꼈어요. 비록 일본식 정원이었지만.”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 건 언제였죠?”
“제가 가정형편상 원예고등학교에 진학해 과수, 채소, 화훼 재배기술을 배웠어요. 재학 중에 이미 나무를 심는 재미를 알았지요. 저희 집 소유의 황무지에 틈만 나면 달려가 나무를 심었으니까. 그게 죽설헌의 시발입니다. 졸업 뒤엔 관공서 정원사를 거쳐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했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나무를 가꿨고요. 40대 초반엔 사표를 던졌습니다. 이후론 정원 가꾸기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죠. 낮에는 정원 일을, 밤에는 그림을. 이건 지금까지 사오십 년째 반복되어온 일상이에요.”
박태후는 제대 뒤 의재 허백련의 조카 허의득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우면서 한국화에 입문했다. 늦깎이로 미술 관련 석사학위도 받았다. 끔찍한 노력파다. 조경과 그림, 그 둘에 쏟은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자기 자신에게 입증해 보인 열혈한이다.
정원을 산책해볼까. 폭염이 살갗을 굽는 여름 한낮이지만 정원의 공기는 서늘하다. 저녁 으스름처럼 어둑한 건 나무들이 허공을 가려서다. 박태후의 몸은 대나무처럼 늘씬해 나무숲에 어울린다. 잔인한 세월이 내려앉은 머리칼은 허옇지만, 자신의 평생 동행인 나무들을 바라보는 표정엔 온정이 가득하다.
백련이 벙그러지는 연못가. 못을 빙 에두른 노랑꽃창포 군락이 싱그럽다. 또 다른 연못가엔 왕버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수면에 어린 제 그림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둘 다 박태후가 각별히 아끼는 초목이다.
“5월이면 한 달 내내 노랑꽃창포들이 꽃피어 연못물마저 노랗게 물들입니다. 장관이죠. 저는 이 꽃을 ‘습지의 여왕’이라 불러요. 왕버들과 마찬가지로 물가에서 잘 자라고 병충해에도 아주 강합니다. 뿌리의 수질정화 능력도 탁월해요. 생태조경에 적격이죠. 이 좋은 노랑꽃창포가 예전엔 너무도 흔해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어요. 그 바람에 요즘은 흔히 보기조차 힘들어졌어요.”
“정원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수종을 권한다면?”
“최상의 정원수는 유실수예요. 감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살구 등등 꽃도 즐기고 과실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열매를 쪼아 먹으려고 새들이 날아듭니다. 새들의 노래마저 즐길 수 있으니 일석삼조라 해야겠네.”
‘시행착오’가 가장 유능한 교사
죽설헌의 풍치엔 허전한 게 없다. 있을 게 다 있으니까. 200여 가지의 수종들, 수백 종류의 야생초들, 여섯 개의 인공 연못, 고와(古瓦)로 야트막이 쌓은 울, 숲의 사방으로 뻗어나간 산책로…. 가지를 잘라내거나 솎아주기를 극도로 삼갔으니 나무들은 자유롭게 자랐다. 저마다 길길이 가지를 뻗어 허공을 움켜쥔다. 나무 아래에선 꽃들이 병아리처럼 종종대며 형형색색의 물감을 짜낸다. 백련과 홍련이 맑고 고운 얼굴을 수줍게 드러내는 연못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련된 인공 정원이다. 그러나 인위가 세월에 발효되어 자연과 동화해서일까. 일부러 애써 꾸민 티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야생의 숲이라 해두자. 간섭받지 않고 성장한 나무들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 자잘한 꽃들과 키 작은 음지식물들이 도란거리는 속삭임까지 귓가에 고이는 기분이다. 이토록 천연스런 숲 정원을 만든 건 여기가 피안이라는 뜻인가.
“나무를 가꾼 지 반세기가 지났군요. 어떤 일이든 하나에 평생을 바쳐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건 영혼이 움직이고서야 가능하겠죠. 죽설헌을 만든 당신의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이라 보나요?”
“시행착오. 바로 그거예요. 저는 전문적인 조경 교육을 받은 게 없이 일체를 혼자 해결해왔어요. 당연하게도 갖가지 오류가 빈발했죠. 쉬운 예로, 초기엔 외래종 화초와 토종 화초의 구분조차 하질 못했어요. 그걸 깨닫고 공부하며 초목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수시로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쳤지요. 인생에서 시행착오보다 더 유능한 교사는 없다고 봅니다.”
“이 너른 정원을 조성하기까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겠죠? 자금 조달엔 문제가 없었을까?”
“가장 난감했던 게 바로 그 대목이었어요. 수입이라곤 얼마 안 되는 연금뿐, 부부가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왔습니다. 감자나 참깨를 농사지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어요. 그러나 빚을 얻어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무를 계속 심자면 주변 땅을 사들여야만 했으니까.”
어렵사리 터를 매입해 나무들을 심는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나무들의 키가 커지고 둥치가 불어나면 적절히 이식을 해줘야만 했다. 그러자면 다시 땅을 확보해야 했으니 주기적으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것 같다. 간벌(間伐)로 쉽게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박태후는 나무를 베어내거나 파내는 행위를 금기로 삼고 있다. 나무와 혈맹조약을 맺은 것처럼.
“저것들도 엄연한 생명인데, 저것들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베어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옮겨 심을 터 마련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 욕심을 너무 부리는 거 아니야? 라는 투로 바라보지만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나무와 함께 살다 보면 나무에게 많은 이치를 배우게 됩니다. 세상을 진정 잘 사는 길을 숲의 자연 생태에서 깨닫게 되는 거죠. 이게 자연 정원을 가꾸는 최상의 목적이자 낙이에요.”
자연에의 외경을 지닐 경우,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의 과욕과 과속은 마음속에 자연을 들여놓지 못해 생기는 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살기는 사실 어렵다. 사람이 나무처럼 살 수 있겠나. 가을마다 잎을 모조리 털어내는 나무의 허심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채 혹한을 묵묵히 견뎌내는 겨울나무를 시늉할 수 있겠는가. 박태후는 나무들의 생태에 인간사의 고통과 한계를 대입하고 그 치유책을 찾아 나선 사람이진 않을까.
“피고 지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며 과욕이란 헛된 거라는 걸 자주 느껴요.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저승까지 가져갈 길이 있던가요? 결국엔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명백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게 아닌가요?”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연예계에 처음 입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에서도 뽑히고 무용도 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도여고에서는 방송반 활동과 웅변을 하며 상도 꽤 받았고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심지어 탤런트가 뭔지도 모르던 때에 아버지가 지원 원서를 가져다줬어요.”
대부분의 가정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 ‘뭔가를 알았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를 만큼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열린 생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시작이 평탄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67년 KBS ‘실화극장’에서 간첩 두목 등 캐릭터가 강한 역할에 캐스팅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그때부터 많이 했어요. 그 시절은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얼굴에 주름 그려가며 어머니, 할머니 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연기자, 그리고 어머니 역을 주로 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30대부터 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불과 31세에 MBC 드라마 ‘새엄마’에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1977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할머니 역할을 잘하는 연예인 2위로 뽑히더니, 1978년에는 아예 1위가 되었다. 연기자로서의 첫 절정기는 1983년이었다. 마흔 즈음에는 MBC 드라마 ‘간난이’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거친 세상을 사는 80세 꼽추 할머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연기자
그녀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쎈’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인기가 많아지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때 가수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난이’ 에서 80세 할머니로 출연해서 불쌍한 손주들을 지극히 보살피는 역할로 각종 연기대상을 휩쓸었던 그해 1983년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디너쇼를 열어줬어요.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었죠. 그 재주로 디너쇼를 했다니.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별거 다 했어요.”
같은 해에 매니저 제안에 앨범도 하나 녹음했다. 잠깐 가수활동을 하며 남긴 유일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망각’. 발라드풍의 처연한 노래인데, 직접 가사도 썼다.
잊어야만 했기에 잊었노라고
지워야만 했기에 지웠노라고
너와 나의 아름다운 그 옛날 추억이 못 잊어 생각나면
아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워보리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노래 가사에 배인 슬픔과 애잔함을 증폭시키는 애절한 창법을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서른두 살에 다시 싱글이 됐죠.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지. 그 부분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해요. 여자로 태어나 남편 잘 만나 아이 행복하게 키우면서 가정 잘 이끌어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는 건 비극이에요. 물론 그동안 날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오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야.”
TV에서 보는 정혜선은 거칠고 과격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독해진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실제의 정혜선은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천생 여자의 모습이다. 담담하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 모습에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사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40대에 할머니역을 맡던 그녀는 60대가 넘으면서 카리스마와 온화함이 있는 ‘사모님’과 ‘여사님’ 연기를 주로 했다. 또 기품 있는 한복 차림으로 각인시켜주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엔 그녀만 한 배우가 없다.
그렇지만 “나도 살았는데…”
남편과의 결별은 이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빚까지 갚아나가야 했다.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기대어 신세를 질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도 채권자 분들이 순순히 기다리기로 해서 제 출연료를 3분의 2씩 가져갔죠. 그런 걸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맙죠.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단돈 100원도 안 준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급격히 높아진 자살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 같은 사람도 죽지 않고 잘 사는데 왜 자살을 하지….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죽었어요.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는 방법도 있었네.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웃음)”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퍽퍽한 웃음소리에 좀 아팠다.
나누고 베풀며 겸손하게
개인으로서,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모두의 배우로서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송활동에는 슬럼프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하며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 할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했으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이 예약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 시청률 높으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갔죠. 늘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일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내가 워커홀릭 성향도 있지만, 연출자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더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잠시 억울해했다. 요즘은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가는 유럽 여행 아닌가. 수십 년을 대한민국 국민의 어머니로 살았던 사람이 일하느라 이탈리아도 못 가봤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만 하는 정혜선이었죠. 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요즘 쉬면서 생각해보니 일이 다가 아니구나 싶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지금은 쉬면서 봉사도 하러 다녀요. 내가 나서기만 해도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 표지 한복 협찬을 해주신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20여 년 곁에서 지켜봐온 정혜선 선생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늘 수수하게 살아서 때로는 연예인인지 자연인인지 분간이 안 간다”며 뚝배기처럼 소탈하시다 거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어려운 사람 있으면 가능한 한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그러니 무언가에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연기자에겐 숙명적 성향 같아요. 그저 일만 하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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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예술을 향한 꿈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드라마와 연극은 기본이고 심지어 뮤지컬 배우도 했다. 그녀의 기억 속 뮤지컬은, 정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던 ‘사운드 오브 뮤직’. 연극은 ‘햄릿’. 무대에 세 번이나 섰다. 물론 영화도 찍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50여 작품에 출연했죠. 그것도 액션 영화에. 내가 한때 액션 스타였어.(웃음) 그때는 정말 그걸로 잘나갔어요. 지금 들으면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 테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이 베테랑 배우에게 욕심나는 작품이 있냐는 질문이 싱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없다”고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다만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픈 일에 대해 묻자 오래전 묻어버린 꿈을 아련히 기억해내며 그 시간들에 휩싸이는 듯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이 많아요. 그런데 ‘부자가 됐으면’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사업은 내 길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꿈은 있었죠. 특히 무용. 무용 선생님이 ‘영자야(정혜선의 본명), 넌 무용해야 해’라고 해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실 집이 가난했죠. 그런데 무용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 생각을 해서 안 했어요.”
아니다 싶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정혜선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것과 운동을 따로 안 하는 대신 걷는 것을 꼽았다.
“사실 이제 내일모레면 팔십이니까 걷는 것도 귀찮죠. 집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 쐬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스케줄 없을 때는 여기저기서 식사하자고 하니 사람을 만나게 되네요. 내가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에 꼭 두세 가지 일은 있더라고.”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예상 가능하듯 그녀는 남다른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 전 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파격적인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내가 거기 나가서 남을 즐겁게 해줄 용기가 없어요. 과거에는 디너쇼까지 하면서 끼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웃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오랜 세월 정혜선이란 정체성을 만들어낸 신념 그 자체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한다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온 그녀는 진정성 있는 삶으로 탄탄한 신뢰를 쌓아왔다. 초심을 지키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직함이 그녀의 힘이다. 그녀는 이번 추석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쁠 예정이란다.
“지인과의 인연으로 NBS한국농업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어요. ‘그땐 그랬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제가 내레이터를 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두 번 방송을 하는데 작업을 해야 하니까,(웃음) 어디로 움직이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요.”
작든 크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충전하는 좋은 시간으로 즐긴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처럼.
“나는 애써 관리해온 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살았던 것뿐”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다. 그녀 삶의 원동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우리가 봐왔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고향처럼,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서.
연연하지 않는 삶, 이렇게 살아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듯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 한 모퉁이에 윷놀이 연구소가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긴 윷판이 부착돼 있고 박스와 작은 선반마다 윷놀이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랑 가까워서 이곳에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월세도 싸고요.”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많이 하는 조광휘 소장은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시원한 물과 커피를 내놓았다. 그저 명절이 되면 누군가 어디선가 꺼내 달력 뒤를 펴서 도, 개, 걸, 윷, 모 윷판을 매직펜으로 그려놓고는 동전 혹은 바둑알 색으로 편을 나누어 윳놀이를 한다. 언제부터 윷판 그리는 것을 기억해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잘도 그린다. 윷판 위에 말을 올리고 놓는 것도 수준급. 다들 알고 있는 이 윷놀이에 무슨 매력이 어떤 새로운 점이 있어 윷놀이 연구소까지 열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3년생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KB국민은행에서 27년 6개월 동안 일하다가 2017년 희망퇴직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윷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그가 회자될 때 불리는 직함은 바로 우리나라 1호 윷놀이전문강사(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 전문강사 양성과정 인증). 30년 가까이 고객 응대하던 친절한 행원이 한판 흥겨운 윷놀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뭘 좀 준비하고 회사 밖을 나왔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입행할 때 130명이 들어갔는데 현재 29명이 남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많으면 빨리 퇴직하더군요. 그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들도 회사생활을 마감하고요. 지점장이 안 된 사람들은 오래 근무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아오던 임금의 반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하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퇴직을 하는 거죠. 팀원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 사연 때문에 근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지점장은 아니고 팀원으로 퇴직했습니다. 굳이 진급 못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상급자에게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웃음)”
은행의 지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영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아련하기만 했다. 어제까지 선배 대우 잘해주던 후배도 임금피크제로 보직이 변경된 선배에게 색안경 끼고 행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곳에서 일해야 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희망퇴직도 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거든요. 특별 퇴직금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니까 60세에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과도 같은 직장을 박차고 나왔으니 솔직한 마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다니면서 땄던 자격증은 금융기관이 아니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새 삶을 살려면 옛것을 버려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시험도 보러 다녔습니다. 백세시대이다 보니 제가 노노(老老)케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일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자격증의 필요함을 느꼈다면 현직에 있을 때 땄겠지만 그때는 조직에 충성하기도 바빴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되어 시간이 많아졌다지만 자기계발하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 많은 직종이기도 하죠. 돈을 다루고 고객을 대하는 일이요. 지금은 비대면이 많지만 저는 온전하게 대면하는 은행원의 삶이었죠. 아무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생각한 것이 후회스럽긴 합니다.”
은행 생활에서 윷놀이를 발견하다
윷놀이에 대한 관심은 은행원 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 있을 때 서무파트 담당을 많이 하다 보니 야유회나 체육 행사 계획을 도맡게 됐다.
“1박 2일 혹은 당일 코스로 계획을 짤 때마다 윷놀이를 포함했습니다. 소통 놀이로요. 은행에 팀이 4개였는데 토너먼트로 윷놀이를 하면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사람들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퇴직 후 보통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실질적인 구직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부에서 인가한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공덕동에 있는 노사발전재단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융전문강사 양성과정이 있었어요. 처음 1주 과정을 마치고 나니 저더러 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스피치를 준비할 때 재무관리, 은퇴설계, 노후관리 등을 대부분 고르더라고요. 저는 금융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윷놀이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마이크 잡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50세 넘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남들 앞에서 뭔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금융전문강사 강습을 받고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신경써보지 않았던 것을 배웠어요. 윷놀이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잘했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 심화과정 있다고 해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1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윷놀이가 주제였다. 반응이 또 좋았다.
“15분 스피치 마치고 나서 며칠 후에 노사발전재단 강원센터에서 2시간 강의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2017년 1월에 퇴직했는데 그해 8월 윷놀이로 첫 강의를 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에 강사로 서게 됐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강사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윷판에 우리 역사와 삶을 담다
처음에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강의할까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말을 놓는 윷판에는 29개의 밭이 있습니다. 꺾어지는 곳은 모퉁이 밭이라고 해요. 윷판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북두칠성이기도 하고, 땅위의 밭이기도 합니다. 윷판을 골똘히 보면서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인터넷 검색으로 동서남북을 잡아 배치해서 윷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와도 접목했는데 그게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였어요. 그분들 일대기의 키워드를 윷판에 담았어요.”
윷판은 세상의 이치와 역사, 지도, 절기를 적절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였다.
“첫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습니다. 스토리를 담은 윷판을 제작해 윷놀이 세트로 17개나 출시했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데 교육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주문받아서 납품해야 해요. 기자님 가시면요.(웃음)”
윷놀이연구소의 든든한 조력자는 바로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금융전문강사 과정을 들었던 동기들이라고 했다. 과정을 모두 이수한 13명 중 10명이 윷놀이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노인대학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 가면 200에서 300명 정도 되니까 혼자 가서는 감당을 못해요. 연구원 분들이 같이 가서 윷놀이 심판도 하고, 진행도 하십니다.”
물론 강사비가 발생하면 함께 나눈다. 앞으로 윷놀이 관련 강사 자격증도 만들 생각이다.
“SNS에 윷놀이 전문 강사라고 띄워놓았는데 딴지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 보니 제가 1호가 맞나봐요.(웃음) 인터넷을 쭉 훑어봤는데 예전에도 윷놀이가 너무 좋은 전통놀이니까 판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분이 좀 있었나봐요.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니 중도에 그만두셨더라고요.”
윷놀이판을 벌여놓았으니 할 일이 많기도 많다. 우리 전통놀이라고는 하지만 윷놀이에 관련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
“구한말이던 1895년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의 놀이를 정리해서 쓴 ‘한국의 놀이(Korean Game)’에 보면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이를 반박하는 논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윷놀이가 인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인도에도 윷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동물 뼈로도 많이 하고요. 윷놀이는 원래 조개로 했는데 고동으로도 할 수 있어요. 제대로만 정리하면 윷으로 대단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을 제대로 만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하는 조광휘 소장.
“몰라요. 윷에 미쳤습니다. 하루가 정말 즐겁게 갑니다. 일단 윷놀이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옛날에도 우리와 함께했고 먼 미래에도 남아 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며칠 전에 윷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천문도에 대해 강연하는 80대 강사를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도 나이 들어서 강의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그때 딱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안 본다. 윷놀이만 보자. 은퇴하고 오십 훌쩍 넘어 발견한 제 인생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윷입니다.”
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묻혀 있던 기억들이 클로즈업된다. 빙렬을 따라온 과거의 시간들은 오늘의 사연과 물들며 포개진다. 누군가의 서사를 복원해내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우리 삶의 무늬를 빼어 닮았다. 최영욱(崔永旭·55) 작가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달항아리도 그랬다. 부정형의 자태는 과묵하고 겸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지쳐 있던 그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 같았다. 위로받듯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당당한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달항아리를 그린다. 빙렬(氷裂, 도자기를 가마 속에서 굽는 과정에 생기는 균열)을 미세한 선으로 표현할 때는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한다. 무아지경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백색 돌가루와 젯소(gesso,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섞어서 올린 후 사포로 살짝 문지르기를 100여 번 반복하며 정성을 들이는 과정은 도공의 예술혼 못지않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무렵.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입시미술 학원을 접고 다시 붓을 잡았을 때다. 홍익대학교 미대 합격생의 20~30%가 그의 학원 출신일 만큼 명성이 높았지만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자 결심하고 과감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오자 뭘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작가들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저만의 표현 기법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전업 작가를 선언했는데도 입시상담 문의가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년 정도 지낼 계획을 세우고 캔버스를 150개 챙겨 갔습니다. 뭐를 그리든 다 채우고 돌아올 작정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렀다가 한국관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보게 된 거예요. 품에 안기듯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신기했던 것은 한없이 수수해 보이고 심지어 제 신세처럼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백자가 어느 순간 당당하게 보이는 거예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종이에 달항아리를 그려봤어요. 백자의 빙렬은 청자보다 많지 않지만 상상으로 표현해봤죠.”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대호(白磁大壺)의 또 다른 이름. 그 시대의 물레로는 한 번에 만들지 못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야 했기에 부정형(不定形)의 형태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비대칭의 곡선이 오히려 감식가와 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최 작가도 뉴욕 한복판에서 만난 달항아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특히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철학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품은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구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Scope Art Fair Miami’에서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세 점이나 사갔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였다.
“행사 때 제 그림은 아트페어 구석에 걸려 있었죠. 어느 날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 홍보 담당 수석이 오더니 구매하고 싶다고 했어요. 순간 ‘빌 게이츠가 평소 백자에 관심이 있었나?’ 궁금했습니다. 다음 해에 재단에서 시애틀에 지은 건물 완공 기념식에 건축가와 작가들을 초대해 저희 가족도 한복을 입고 참여했죠. 아내가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싼 백자랑 놋수저를 빌 게이츠에게 선물했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의 아버지가 40여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왔다가 경복궁 근처에서 달항아리를 사갔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백자를 곁에 두고 지낸 거지요.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집에서 봤던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후 그에게는 ‘빌 게이츠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더불어 달항아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적 표현 기법을 부여한 작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달항아리를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세계적인 소재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달항아리냐, 참신하지 않다, 메시지도 좀 더 찾아봐라” 하며 염려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냥 좋은 작품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회적 역할을 고심하며 메시지를 담는 작가는 이미 많습니다. 제 그림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벽지를 바라보듯 편안한, 문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무늬 같은 작품이길 바랐어요. 길가의 나무처럼 점점 정이 드는 풍경이 있잖아요. 어느 날은 시들어버린 것들에 시선이 갈 때도 있고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면 좋겠습니다.”
‘빙렬’에 담긴 의미
그는 “달항아리의 꾸밈없이 단순한 모습과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비밀한 내면에 자주 머무르며, 삶의 들숨과 날숨에 귀 기울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는 그의 몸속 깊이 내재된 성향으로 보인다.
“저는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어요. 속세의 잡다한 것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둥글둥글 이해하며 포용하는 삶.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달항아리를 소재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어요. 그림도 훌륭한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신적 지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그는 ‘카르마’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달항아리 연작을 발표해왔다. 그에게 카르마란 어떤 의미일까.
“처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진 않았어요. 달항아리의 빙렬을 표현하려면 며칠 꼬박 앉아 그려야 합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 시간이 좋더라고요. 실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 시절도 떠오르고, 다퉜던 친구들도 그립고, 어느 날은 내가 왜 여기 앉아 도자기를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마치 제 인생길을 되돌아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백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가 자그마한 게 예뻐서 하나 샀어요. 그러고는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어느 날 달항아리를 그리다가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그때 왜 백자를 샀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인사동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시절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지금 저는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잖아요.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우연성, 그것들이 모여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도 어쩔 수 없이 균열투성이다. 최영욱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빙렬을 그려낸다. 그리고 카르마로 이어지는 무수한 균열들은 해독할 수 없었던 존재의 운명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된다.
삶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최영욱 작가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은 그의 달항아리 그림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초기 작품인 풍경화, 추상화를 그릴 때도 즐겨 쓴 색채는 흰색 회색이 주조를 이뤘다는 것.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그리는 화풍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학교 때 흰색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흰색이 너무 좋아 노트에다가 ‘나는 하얀 테이블보가 좋다, 국화 중에서는 흰 국화가 좋다’고 끄적이기도 했지요. 아쉽게도 백자가 좋다는 말은 없었네요.(웃음) 지금 생각하니 달항아리 그림을 위해 하나하나의 우연들이 저도 모르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교와 허식이 없는 백자만의 소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무채색으로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한 표현 기법 때문일까. 그의 달항아리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제 그림은 큰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어서 어떤 분들이 관심을 가질까 궁금했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화가 된다고 하네요. 제 작품 전시장에 오신 한 할머니는 달항아리 앞에서 눈물을 훔치시더래요. 왜 우시냐고 물어보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왜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달항아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화해의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거잖아요. 어떤 분은 제 그림을 걸어놓고 차 마시고 명상하는 방을 꾸몄다더군요. 저도 작업실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그런 공간을 하나 만들어볼 생각입니다.(웃음)”
나이 들면서 그는 알게 됐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편한 결론이지만 그래서 자꾸 내려놓게 된다. 작업에 대한 강박도 버렸으니 이제 그의 달항아리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쌀가마니를 공깃돌처럼 다루고, 바윗덩이로 공차기를 했다는 기인. 축지법과 경공법으로 허공을 날다시피 한 무림 고수. 탄허 스님이 삼배(三拜)를 올렸다는 도인. 원혜상인이라고, 전설적 고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가? 162세 장생을 누렸다는 그의 기적이 믿어지는가? 뻥이라고? 증인이 있었다. 원혜상인의 수제자 박대양(2017년 작고). 그는 타오르는 존경심으로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술회했다. 박대양의 무공 역시 초절정 판타지 수준이었다지. 구름을 끌어당겨 마음먹은 대로 부렸다는 게 아닌가. 박대양은 전통무예 집단 기천문(氣天門)의 초대 문주(門主)였다.
현재의 기천문은 2대 문주 박사규(70)가 이끈다. 문주란 문파의 주인이니, 최고 지도자이자 최강 실력자다. 외양을 볼까? 단단한 몸피에 걸친 개량한복은 희어 눈부시다. 머리칼과 수염 역시 세월의 채색으로 허옇다. 전체적으로 허연 작풍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도인 티를 느낄 수 없는 형용이다. 그렇다고 티 나는 게 없는 게 아니다. 눈매와 눈길에 공력이 서려 있다. 유난히 순하고 환하고 따뜻한 눈빛이지 않은가. 풍경을 바라보듯 가만히 바라보자니 심지어 동안이다. 도가 익으면 어린애 얼굴이 된다. 나는 그게 도인 티라 믿는다.
예로부터 신선이나 도인은 늙어 어린애가 된다 했다. ‘무(無)’를 공부하는 게 도 수련이기에 내공이 붙으면 내부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세상에 올 때 붙이고 나왔던 천진이나 순진을 다시 내 것으로 삼게 되는 거다.
해서, 도인 영감님들이 모이면 소꿉놀이하는 어린애처럼 놀았다. 낄낄거리며 장난을 즐겼다. 티베트의 어떤 도인은 숨넘어가기 직전, 옷 안에 폭죽을 잔뜩 둘둘 말아 숨겨두었다. 화장 장작불이 붙자마자 폭죽이 사방으로 신나게 터졌고, 제자들은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뜨렸다지. 박 문주의 동안과 눈빛에도 장난기가 설핏 비친다.
그나저나, 기천문은 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불철주야 무예를 닦고, 기필코 도를 얻어 어디에 용하게 쓰자는 건가. 박 문주의 얘길 들어봐야겠다.
“기천이란 한마디로 몸을 단련해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몸으로, 몸짓으로 행하는 ‘반야심경’이자 ‘천부경’이라 할까. 유불선(儒佛禪)을 초월하는 공부라 해도 좋고. 우리 사부 박대양 진인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보는 눈을 얻는 공부’인 게고.”
“불가의 참선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천은 몸이라는 그릇 속에 고도의 정신을 담아내는 수행이라는 얘긴가요?”
“육신은 별것 아니라고,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을 닦으라고 선가(禪家)에선 가르치지만, 기천은 몸을 중시합니다. 몸이 어긋나면 마음도 덩달아 망가지는 게 아니던가. 활명(活命)이라, 존재의 기본인 몸의 생명력을 북돋워 도로 나아가는 게 기천의 지향이지요.”
“쉽게 말해, 몸으로 닦는 도(道)?”
“바로 그거! 그렇다면 기천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우리는 저 위대한 단군 할아버지를 기천의 시조로 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권법, 고구려의 선맥(仙脈)으로 간주되는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의 화랑도, 풍류도, 또는 현묘지도, 이 모든 고대의 수련법이 기천과 통하는 거라. 이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고요.”
단돈 10만 원 쥐고 입산하다
박 문주에 따르면, 이 나라의 하늘엔 영기와 서기가 구름처럼 흐른다. 단군의 정신을 상속한 과거의 도인들, 역대 조사들, 혹은 영명한 조상들이 죽었으되 영영 시들지 않는 정기로 살아 움직인다는 거다. 기천은 그 상서로운 에너지를 몸 단련으로 내 안에 확 끌어당기는 수련이다.
박 문주는 진도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왔다. 한때 부를 누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해 동종 업자들의 선망을 살 만큼 표나게 이루고 모았다. 돈을 쓸 시간조차 없이 들어오는 돈을 세는 데에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 IMF 때 와르르 무너졌다. 기천을 만난 건 사업을 하기 이전인 20대 때부터였다. 소싯적부터 태권도, 합기도, 복싱을 야무지게 배워 ‘맞짱’을 뜨면 누구나 고꾸라졌다. 나로다! 나랑 붙을 자, 게 없느냐! 그리 악악 외치며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시절이었다. 마침내 임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박대양. 박대양이 서울 약수동에서 선무 도장을 운영할 때였다. 박사규는 이 박대양을 찾아가 한판 붙자 청했다. 박대양은 딱 한 수만 쓰겠다며 대결에 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판이 났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볼 겨를 없이 박사규가 허무하게 나가떨어진 것. ‘아이고, 사부로 모시겠소이다!’ 박사규는 냉큼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원했다. 그 기이한 인연은 발화해 박사규를 기천의 심해로 데려갔다.
박사규는 남대문에서 사업하던 시절에도 기천을 정신의 지주로 삼고 살았다. 사랑으로 섬기고 자랑으로 닦았다. 그러다가 절호의 찬스가 왔으니 사업 부도가 바로 그것. 그는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수중엔 단돈 10만 원뿐이었다지.
“알몸 하나로 이 산에 들어왔어요. 굴러 떨어지고서야 치고 오르는 법. 고행이 있고서야 길을 보는 법. 사업을 망해먹은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요. 하하핫!”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죠?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라는 게송!”
“치열하지 않고서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있던가? 묵언 3년, 육합(六合, 내공을 연마하는 수련) 고행
3년, 총 6년의 담금질 과정을 거치자 사부께서 비로소 기천의 정수를 귀띔하더라고. 원효의 ‘대승신기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유마경’을 읽으라 하시며. 과연 그 안에 진리가 있었어요. 기천이 우주의 생성 원리까지를 깨닫게 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는 걸, 미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행법이라는 걸 관념으로가 아니고 온몸으로 느꼈어요.”
“입산하지 않고서는 도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홀연히 입산하셨나? 나 하나 좋아라고 닦는 게 도가 아닐 텐데.”
“예컨대 바다의 녹조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무엇이던가? 태풍이 아니던가? 태풍이 바다를 한바탕 뒤집어야 본색을 되찾는 게 아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탁류처럼 뒤엉긴 삶을, 욕망을, 일체를 버리는 강단으로 한바탕 뒤집어엎어야 정화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계룡산은 예로부터 민족의 성산이자 수련의 장이었으니 마음이 흘러갈 수밖에. 태조 이성계도 이 산 국사봉에서 수련을 했어요.”
세상으로 향했던 눈을 감고, 입을 닥치고, 오직 계룡산을 스승 삼아 정진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게 도.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 소식 환하게 한 도인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몸 낮추기에 능하다. 겸양은 기천이 중시하는 덕목이다.
“남들은 도사라고들 하지만 정진에 끝이 있을까. 그저 수행자일 따름이지요. 명산엔 자고로 항상 지킴이가 있었어요. 그 면면한 전통을 잇는 지킴이, 옛 도인들이 갔던 길을 등불 하나 들고 현대인들에게 안내하는 심부름꾼, 그걸 본분으로 삼고 삽니다. 세상과 남에게 누가 되지는 말자, 죄짓지 말고, 매 맞을 짓 말자, 그걸 항상 숙제로 여기며.”
“선하고 깨끗한 삶은 평범한 모든 이들도 미덕으로 압니다. 수행자라면 뭔가 더 진전된 정신으로 거침없이 사는 분들 아닐까? 심중에 바위가 들어앉아 뭐에 휘둘리는 바 없이 자유자재한 존재이지 않을까? 죄짓지 않는 생활 관습은 기본일 테고요.”
“앎을 내려놓아라! 이놈아, 앎이 곧 장애이니라! 제자들에게 자주 일갈하는 소리가 그겁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네요. 알량한 앎에 갇히지 않고, 무릇 모든 평범하고 단순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게 도라서.”
“눈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단순한 진리를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생활이란 삼엄한 것이라 먹고살기 위해 전전긍긍을 일삼다 파장을 보는 게 인생이기도 하죠.”
“그게 뭐지?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유, 그게 뭐지? 수행자는 그걸 생각하는 자라. 세 가지 사명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첫째, 전생에서 닦지 못한 걸 이생에서 한번 시원하게 닦으라는 사명, 둘째는 광구천하(匡救天下)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빛을 보태라는 사명, 셋째는 포덕천하(布德天下)라, 널리 덕을 베풀라는 사명! 기천문은 이 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행 집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고요히 반성부터 합니다. 사명을 다할 만치 정진하는가, 그런 자성(自省)을.”
투철하게 깨달아 세상과 사람들의 빚이 되겠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현란할 것 없는 언설이다. 토 달 것 없이 공감되는 선의다. 그러나 말이다, 도라는 메뉴를 파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선의를 떠든다. 흔히들 시늉으로 설레어 세상에 협찬하는 척한다. 도와 속(俗)의 경계가 자명한 현세를 넌지시 묵시함인가. 45년을 닦은 수행자 입에서 ‘자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건 예사롭지 않다.
먹고 사는 정경엔 섭섭할 게 없다
배운 게 있으면 돌려줘야 계산이 맞다. 얻은 게 많으면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박 문주는 무엇을 나누나? 이루어지는 것 없는 이 탁한 세상에 무엇을 실천으로 보태나? ‘어이, 사람들이여, 기천문에 오소! 여기에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이 있으니!’ 그는 그리 외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천 행법을 알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제자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게 그가 세상에 가담하는 방식이다. 그걸 비즈니스로 여긴다면 아마도 협량이겠지. 박 문주의 먹고사는 정경엔 이미 섭섭할 게 없다. 하찮은 물욕을 하찮게 여기는 근기가 없다면 무늬만의 수행자이겠지.
“기천 수련만 유일한 길인가? 그건 아니라. 기천문이 오직 구도자들의 전당인가? 그것도 아니라. 흔히들 달라이 라마에게서 정신을 구하고, 라즈니시를 애호하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 행법 안에 우리에게 맞는 수련 방법과 정신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 그게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이롭게 쓰여야 한다는 것. 제겐 그 사실들을 널리 알려야 할 소명이 있는 겁니다. 과욕을 부릴 일은 아니고요.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벌여놓은 것 같기도 하고.”
2003년 개천절, 남북한 인사들과 해외동포들이 평양 단군릉 앞에 모여 행사를 가졌다. 박사규는 당시 기천무(舞)를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기천 행법은 무예이자 춤이다. 기천의 예술적 성격을 직감한 많은 무용가가 박 문주에게 배우기도 했다. 김매자, 육완순, 이숙재 같은 무용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기천의 정신과 춤사위를 수용했다.
인간의 능력이란 개발하면 상상 불허의 초경지에 이른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아니한가? 박 문주가 보유한 그 뭔가 기똥찬 초능력이. 별 시답지 않는 걸 묻는다는 투로 정수리를 득득 긁으며 그가 예화를 들려준다. 내용은 이렇다. 그는 굳이 몸을 이동하지 않고서도 갈 곳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산에서 수련하던 제자들 앞에 박 문주가 턱 나타나 독려를 하더란다. 그러나 박 문주는 그 시간, 산 아래 거처에 머물렀을 뿐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게 스승의 심영(心影)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아아, 스승께서 ‘심영’을 자유롭게 구사하시는구나!
“호흡을 멈추고 외공을 써 뜻한 장소에 심영을 보내는 일은 우스울 지경으로, 옛 도인들은 갖가지 초능력을 행했을 거라 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하지만 수행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해요. 평범 속에 도가 있다는 자각, 세상에 가급적 많은 수행자가 출현하길 바라는 기원, 그런 게 더 본분에 가깝습니다.”
“산에 앉아 모호한 관념이나 낡은 정신주의에 안주한 채 도통했다 자부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 같아요. 진정한 선지식은 차라리 진흙탕 속세에 있는 게 아닐까?”
“과거와 달리 요즘은 산에 도인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는 저자거리에, 질퍽질퍽한 세속에 차라리 도인이 많아요. 일테면, 피땀 흘려 번 재산을 사회에 쾌척하는 사람들, 또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도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밭두렁 잡초를 뽑으며 어느 할머니가 하는 말씀, 야야, 미안하다 풀들아, 여기는 너희들이 살 자리가 아니구나! 그 할머니의 내공 역시 도에 가깝다 봅니다.”
“자연을 내 안에 들여놓아 매사 자연스럽게 사는 이라면 그 또한 고수죠. 스승 중에 큰 스승은 자연이고.”
어려운 문자를 쓴 게 없다. 나를 내세우는 폼도 없다. 시종일관 시원한 솔바람으로 방 안을 채운 사람. 도 타령도 이쯤이면 절창이다.
“겨울은 껴입기라도 하는데 여름은 그게 아니라 힘들다.” 여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얘기다. 덥더라도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어야 할 때가 있고 취침 시에도 아무것도 덮지 않으면 숙면이 어렵다. 땀 흡수만 생각해 ‘면’ 100%를 고집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원단이 출시되면서 땀 흡수는 물론 시원함까지 챙길 수 있게 됐다. 2019년 여름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무더위를 견디게 해줄 시원한 원단 아이템을 소개한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이브자리, 까사미아, 연희데코, 유니클로, BYC
친환경 청량감 ‘인견·모달·뱀부’
여름 원단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통기성과 흡습성, 수분 발산성과 열 발산성이다. 공기가 시원하게 잘 통과하는 통기성, 자는 동안 흘리는 땀의 흡수는 물론 말려주는 흡습성과 수분 발산성, 흡수한 열을 빨리 식혀주는 열 발산성이 좋아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인견은 100% 레이온으로 면이나 종이 등의 원료인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천연섬유다. 통기성도 좋고 시원한 촉감이 특징이라 누빔이불, 홑이불, 파자마, 여름 속옷 등의 소재로 많이 쓰인다. 원래는 삼베, 모시같이 약간 까슬한 질감이지만 워싱(고온에서 삶는 공정) 가공을 거친, 좀 더 부드러운 인견이 인기다. 시원한 촉감 때문에 50~60대는 물론 전 연령층이 선호한다고. 요즘은 화려함보다는 깔끔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더 찾는다. 침구 전문 브랜드 이브자리는 시원하고 파란 색감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더한 것과 은은한 회색빛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배치된 인견 제품을 추천했다.
최근에는 원단의 촉감을 중요하게 여겨 100% 모달 소재도 많이 이용한다. 모달(modal)은 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원료를 사용한 친환경 소재. 실크 같은 부드러운 느낌은 물론 흡수성이 뛰어나 민감성 피부에 좋다. 60수로 평직한 아사 원단 조직으로 얇고 부드럽게 직조해 여름철에 사용하기 알맞다. 촘촘하게 누빈 여름 이불, 에어컨 바람에 보온성을 유지하기 좋은 얇은 차렵이불로도 선호한다. 원래도 부드럽지만, 더 고운 질감을 위해 워싱 가공했다. 모달 소재도 여름용에 맞게 파란색과 남색 계열의 색감 디자인이 많다.
뱀부는 대나무(bamboo)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친환경 소재다. 마, 린넨 소재와 같이 흡습성과 수분 발산성이 뛰어나고 촉감이 상당히 부드러워 자극적이지 않다. 대나무 자체에 항균, 항취효능이 있기 때문에 민감한 피부에 적합하다.
모시와 리플 가공 원단
모시와 함께 아마가 원재료인 린넨도 여름철에 자주 쓰이는 소재다. ‘라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모시는 삼베(대마)나 린넨(아마)에 비해 결이 곱고 치밀하다. 직물의 강도가 마 섬유 중 가장 높고 튼튼하다. 전통적으로 여름 한복에 자주 사용된 소재로 시원하며 통기성이 뛰어나다. 린넨은 은은한 광택이 있고 구김이 잘 가기 때문에 침구류나 의상에는 면 혼방으로 사용한다. 모시와 마찬가지로 통기성이 좋고 피부에 닿았을 때 감기지 않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소재다. 유니클로도 2019년 여름을 겨냥한 린넨 소재 제품을 선보였다. 가벼움과 자연스러운 구김이 인상적인데 부드러운 감촉은 물론 땀을 빠르게 흡수해주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도 쾌적하게 입을 수 있다. 시니어가 선호하는 차분한 색상은 물론 분홍과 노랑 등 발랄한 색상과 스트라이프, 체크 등 다양한 무늬와 디자인이 있다.
이 외에도 원단 표면에도 엠보싱 효과를 주어 몸에 달라붙지 않게 하는 리플 가공법이 있다. 주로 면이나 린넨, 모달 소재가 리플 가공을 통해 상품화된다. 단, 이 과정에서 가공을 위한 화학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리플 원단을 선택할 경우 자연 소재 원단인지 따져봐야 한다. 리플 가공 원단은 피부에 닿는 면적이 적고, 몸에 감기지 않아 여름 침구는 물론 블라우스 소재 등으로 애용되고 있다. 까사미아의 모달 리플 소재 중에서도 연한 하늘색과 아이보리색 배치로 은은하고 시원한 감촉을 주는 제품이 인기가 높다.
옷 사이로 바람길 내는 냉감 의류
바깥 활동을 하는 동안 땀 흡수뿐만 아니라 통기성을 겸비한 기능성 원단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하나가 BYC 제품인 ‘보디드라이’다. 2019년에 나온 보디드라이는 시원한 성질의 냉감 원사에 땀과 습기를 빠르게 흡수하는 흡습기능과 건조기능, 그리고 자외선 차단기능을 강화해 활동성을 높였다.
유니클로도 최근 ‘에어리즘 심리스 V넥 브라 캐미솔’을 내놓았다. 봉제선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디자인으로 얇은 겉옷을 입을 때 유용하다. 특히 ‘브라탑’은 따로 속옷을 착용할 필요가 없고, 소재와 디자인이 다양해 이너웨어부터 패션 아이템까지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고, 신축성이 뛰어나 활동하기도 편안하다. 단, 여성 심리스 제품의 경우 바지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서 단단히 보정하며 입을 것을 권한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지난 6일 세종문화회관으로 뮤지컬 ‘영웅 안중근’을 보러 갔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는 떠올리면 가슴 아프고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다.
공연을 보기도 전부터 마음이 경건해지고 아려왔다.
‘1909년 서른 살 청년 안중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았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울컥하고 가슴이 저리다.
뮤지컬은 러시아 자작나무숲에서 조선 청년들이 모여 ‘단지 동맹’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작나무숲에 모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그들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군무와 합창이 가슴을 울렸다.
안중근 의사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첫마디를 자르고 대한독립이라 혈서를 쓰는 순간부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고 감옥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독립운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잘 표현하였다.
화려한 군무와 특수효과로 웅장한 무대가 살아났고 아크로바트처럼 무대 전면에 세워진 기둥을 타고 이쪽저쪽 아래위로 활약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긴박감을 느끼게 했다.
높은 무대 위까지도 날렵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그들의 연습이 치열했음을 알게 해준다.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의 배우가 안중근을 연기했다.
내가 관람한 날은 정성화 안중근이었다. 예전에 개그맨으로 또는 드라마의 조연으로 보았던 정성화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당당하고 멋지게 안중근 의사를 연기했다. 목소리도 어찌나 멋있는지 합창과 독창 모두 감동적이었다.
단아한 한복차림의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수의를 전하며 부르는 절절한 아들 사랑과 신념을 지켜주려는 마음, 아들을 위해 끝까지 힘을 북돋워 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후벼 파듯 나를 울게 했다.
일본 법정의 재판하는 장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외친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대한의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이고 조선을 말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인 나는 사형이라니 대체 일본 법은 어찌 이리도 엉망이냐”고 호통을 친다.
마지막 장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처형대에 선 안중근 의사, 그리고 1945년 그가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 되었는데도 일본이 감추어 그의 시신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에필로그가 뜬다.
공연이 끝난 시간에도 여전히 꽃샘추위가 나를 웅크리게 했고 한동안 가슴은 먹먹했다.
낡고 늙음이라는 고정 관념을 끊어내고 시니어 모델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두 사람을 만났다. 시니어 모델 최초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소은영(제이액터스·75) 씨와 최근 핫한 모델 김칠두(더쇼프로젝트·64) 씨다. 늦은 데뷔이지만 내공 가득 담아 시니어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두 사람. 그들만의 패션 포인트와 패션 피플로서의 삶을 엿봤다.
인생, 이러니 참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최근 SNS를 보다 보면 신인 모델이라는데 하얗게 세어버린 긴 머리와 수염 덥수룩한 사나이가 눈에 띈다. 패션모델 데뷔 1년차 김칠두. 시니어 모델이라기보다는 아주 늦게 데뷔한 신인 모델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우 16만 명이 훌쩍 넘은 지도 오래. 그의 SNS에 쓰인 젊은 팬들의 댓글을 보면 중후함에서 나오는 특별한 스타일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원래부터 내가 제일 잘나갔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면 머리에 ‘잘생겼다’란 네 글자가 박힌다. 환갑이 훌쩍 넘었고 조만간 어르신 교통카드도 나온다는데 멋짐 폭발은 감출 수가 없다. 호피 무늬 아우터에 챙 넓은 중절모, 긴 수염 휘날리며 압구정 거리를 걸으니 런웨이가 따로 없다. 모델 워킹 수업 세 번 만에 2018년 F/W 헤라서울패션위크 키미제이(KIMMY.J) 모델로 섰다는데 어느 별에서 왔는가.
“젊었을 때는 집에서 혼자 포즈 연습 좀 했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알고 보니 20대 초반 무교동의 한 의상실에서 2년여 일했던 경험이 있다고. 옷에 대한 관심 혹은 옷 잘 입게 된 계기를 물으면 그 시절로 자꾸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당시 패션 스타일을 배우면서 일했어요. 앙드레 김 선생님이 나오신 국제복장학원도 좀 다녔고요. 그때가 기성 제품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의상실 경기가 하락세여서 2년만 하고 일을 그만뒀죠.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정 형편상 복장학원을 더 이상 못 다녔지만 관심은 늘 패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패션 쪽 일을 그만두고 나니 그 후로 모델에 관심이 생기더군요. 모델 경연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했죠. ㈜태창 전속모델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패션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이번에도 그는 꿈을 접어야 했다.
“먹고사는 게 바빴거든요. 그 당시의 모델은 돈 없으면 못하는 직업이었어요. 결혼하고 나서 여유가 생겨서 남대문 커먼플라자에서 여성의류 도매 장사를 했어요. 제가 직접 디자인을 해서요. 그때만 해도 전문모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옷 잘 입는 비결 따로 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품고 있었으니 패션 센스는 자연스레 장착됐을 뿐이다. 옷이건 액세서리건 김칠두 씨가 고르고 찾아서 입었다. 대부분 가정에서 남편 옷 고르는 임무가 아내 몫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저는 저만의 코디를 합니다. 주로 흰색을 좋아해서 입고 말이죠. 옷 잘 입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 감각을 키우는 거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요? 저는 잡지나 영화를 많이 봐요. 요즘은 인스타그램에도 정보가 많이 올라오니까 눈길이 가는 스타일은 한참 보면서 숙지합니다. 트렌드를 체감하려고요.”
TPO(시간·장소·상황)에 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옷을 맞춰 입는 거도 중요하죠. 모델하기 전에 식당을 할 때는 머리도 길고 해서 주로 개량한복을 입고 일했습니다. 고깃집이나 한식당을 주로 해왔으니 분위기를 맞춘 거죠. 지금과 같은 캐주얼은 입기 힘들었어요. 마른 체격을 고려해서 풍성한 옷을 자주 입습니다. 바지는 통은 넓지만 밑이 좁아지는 것을 고릅니다.”
환갑 넘어 패피에 합류하다
그의 패션 화보를 보면 나이가 무색할 정도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인터넷 쇼핑몰, 여성 잡지 등에서도 그의 이미지를 원한다.
“원래 옷 선택할 때 시니어용, 주니어용 가리지 않아요.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입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입어보는 게 아니라 제 스타일의 옷들이니 새로울 게 없죠. 화보 촬영 전에 콘셉트 등에 대해 사진작가와 얘기를 나눠요. 또 작가들이 뭘 원하는지 저 스스로 콘셉트를 찾고 빠르게 숙지하려고 합니다. 룩북(화보) 촬영이 너무 좋아요.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은 좋은 것들뿐입니다.”
‘패완얼’ 김칠두
최근 건강관리를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는 김칠두 씨. 먹어도 찌지 않는 체질이기에 특별히 운동을 해본 적은 없단다.
“몸 관리라는 거 안 해봤어요. 소속사 아카데미에 일주일에 두 번 나와서 워킹과 동작 등을 반복해서 연습하고요. 소속사 대표님과 지인들이 요가를 권해서 배우게 됐죠. 제 나이에 피트니스센터에서 무거운 거 드는 거보다 훨씬 좋겠더라고요.”
모델 일과 몸 관리를 하면서 쇼핑도 꾸준히 한다. 평택에서 살다 재작년 말 서울로 이사 오면서 동묘 지역을 선택했다.
“그곳에 옷들이 많잖아요. 제가 워낙 좋아하니까 이사도 그곳으로 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스스로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
“네.(웃음) 잘생겼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연배에 나만큼 잘생긴 사람 별로 못 봤어요. 너무 자화자찬했나요?”
그렇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