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체가 독립의 외침으로 물들었던 3.1절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3.1절에는 각종 지자체 및 공공기관에서 각종 기념행사를 열곤 했지만, 올해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거리에서 만세 삼창을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나마 기념하고 싶다면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시대적 정신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3.1절에 볼 만한 가슴 벅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항거:유관순 이야기 (A Resistance, 2019)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인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가. 누구나 그러하듯 ‘유관순’이라는 이름 석 자는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서대문 감옥 8호실에 갇힌 유관순 열사(고아성)와 여성 독립운동가의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30여 명 가까이 되는 여성 수감인의 투옥 생활은 처참하다. 세 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서 다리가 부을까 다 같이 빙글빙글 돌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하고, 모진 고문과 핍박도 이를 깨물고 견뎌낸다. 그럼에도 “하나뿐인 목숨 내가 바라는 것에 맘껏 쓰다 죽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영화는 유관순 열사의 삶과 함께 유관순 열사의 선배 ‘권애라’(김예은), 산모 ‘임명애’(김지성), 다방직원 ‘이옥이’(정하담), 기생 ‘김향화’(김새벽) 등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서사도 재조명한다. 극적인 연출, 혹은 흥행을 위해 3.1운동 당일의 내용을 담을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그날의 뒷이야기만을 과장 없이 정직하고 묵직하게 담았다. 그래서 더욱 깊고 진한 울림을 남긴다.
2. 박열 (Anarchist from Colony, 2017)
건들건들한 걸음걸이에 정리되지 않은 머리, 무엇 하나 두려운 것 없다는 표정. 겉모습만 보면 패싸움을 하며 온갖 사고를 칠 것 같은 이 남자는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가 아닌 항일운동단체 ‘불령사’의 리더 박열이다. 진짜 건달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긴 한다.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서다. 영화 ‘박열’은 관동대지진 후 발생한 조선인 대학살에 정면으로 맞선 청년 박열(이제훈)과 그의 동지 겸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이야기를 다룬다. 박열이 일제에 저항하는 방식은 거친 외양처럼 저돌적이다. 끔찍한 현실에서는 감옥이 더 안전할 거라며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고,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국왕 암살 계획을 자백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자살폭탄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던 그는 재판대에 서는 순간까지 한복을 입고 등장하며 독립에 대한 기개와 의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성냥처럼 활활 타올랐던 박열의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불의에 맞설 정의와 용기가 있는지 반문하게 만든다. 배우 이제훈의 밀도 높은 연기가 몰입도를 더한다.
3. 허스토리 (Herstory, 2017)
과거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것만큼 현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모든 국민의 역사적 숙제이다. 영화 ‘허스토리’는 이 같은 메시지를 평범한 인물 ‘정숙’(김희애)의 시선으로 풀어나간다. 영화는 1992년부터 6년간 일본과 부산을 오가며 힘겨운 법적투쟁을 벌인 위안부 할머니와 승소를 위해 함께 싸운 정숙의 이야기를 다룬다. 부산에서 큰 여행사를 운영하는 정숙은 역사보다는 먹고사는 일, 혹은 눈앞의 현실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여행사 사무실에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설치하면서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분노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기로 나선다. 자신밖에 몰랐던 그녀가 재산을 털어 할머니들의 조력자가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혼자 잘 먹고 잘살았던 게 부끄러워서”다. 영화는 주변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고, 지워질 수 없는 아픔에 귀 기울이며 연대할 것을 호소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새삼스레,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영화다.
글 정순옥(제1회 브라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여기 이 쇼핑 봉투에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보나마나 작아. 이건 너무 크고, 어쩐다?”
아이가 건네준 서너 개의 쇼핑 봉투는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차례로 옆으로 놓였다. 내 앞에는 아이가 가져갈 옷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담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양이 어중간해서 쇼핑 봉투로 한 번에 담으려는 손길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 길을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기에는 번거로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무언가 떠올라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갑 속에서 두둑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꺼낸 것이 바로 보자기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조각보로 만든 보자기들, 그중에서 제법 넉넉한 크기로 골라 짐을 싸니 한 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때? 좋다. 손에 들기도 편하고 예뻐서 보기에도 좋고.”
“응? …으응.”
아이의 얼굴에는 마뜩치 않은 웃음이 흘렀다.
“됐어. 어차피 내가 들고 갈 텐데.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제 짐을 쌌으니
나갈 준비해야겠다.”
하긴 나도 보자기를 서슴없이 손에 들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공부 중인 아이에게는 영 어색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는 쇼핑 봉투가 나오기 전에는 짐을 옮기는 일을 전담했고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썼다. 내 기억 속에도 생전에 엄마가 볕 좋은 날 툇마루에 앉아 보를 만드는 모습이 있다. 주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크기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가며 만들었는데 특히 한복은 화사함이 좋아 조각보로 이어 붙이며 상보나 베갯잇. 보자기 등으로 탄생하곤 했다.
조각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고, 홑겹이기 때문에 시접을 서로 맞물려 고정시켜 나가는 쌈솔로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한 번에 ‘뚝딱’이 아닌.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어 붙여가는 부분은 홑겹이 두 겹으로, 바탕보다 진한 부분으로 드러나고, 그렇게 도드라진 선은 다시 이어지며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자칫 설렁설렁 바느질을 했다가는 모양이 엉성해지는 것은 물론 이음 부분이 벌어져 제 기능을 못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일그러지고 만다.
삯바느질로 자식 넷을 키워낸 엄마는 시내에서 꽤 이름 있는 한복집에서 일을 맡아 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이나 바지런했던 것처럼 바느질 솜씨도 좋아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에 단골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늘 화사한 한복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 곁에서 어쩌다가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세모난 눈길로 바늘을 놓게 했다.
“엄마는 한복을 만들지만 너는 한복을 맞춰 입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특히 한복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나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고 조각보로 이어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시간은 뿌듯함마저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보자기에 짐을 싸면 특별함이 더해져 참 좋았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러운 질감도.
지금 돌아보면 조각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탕이 되는 기본 조각보에 덧대어지는 크고 작은 조각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던 서러움으로 채워진 조각보 하나,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덤벼들 기세로 마음의 날을 세웠던 조각보 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힘을 얻었던 조각보 셋….
처음에는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이리 삐죽, 저리 툭, 이음 부분이 삐져나오고 시접 부분이 불거져 풀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힘듦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내 삶의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고 은근한 배짱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 내 삶은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조각들로 이어질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소소함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이 풀어내는 것들로 조각보는 이어져가고,
한 숨 쉬어갈 때쯤이면 상보가 되고, 보자기가 되어
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이 되어준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앙증맞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상 위에 놓인 상보가 전해주던 맛있는 즐거움으로. 자식의 나이에서 벗어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싸주던 보자기가 품어주던 설렘으로,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 이제 나가야 해요. 버스 도착 10분 전이에요.”
“그래. 가자.”
나는 아이의 짐을 싼 보자기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음으로 전해져 왔다. 삶의 너울로 울퉁불퉁한
내 삶을 한 번에 안아주는 든든함으로.
조각보자기를 통해 내 삶을 마주한다. 빳빳한 쇼핑백보다는 조각보자기가 더 좋은 만큼 그 어떤 감정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의 여유로움을, 색도 크기도 다른 조각보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이 소중함을, 조각보를 바느질하며 남아 있는 내 삶을 담아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쥐어본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이노우에 가즈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50대부터 덧셈과 뺄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안 쓰는 물건이나 지나간 관계에 대한 집착은 빼고, 비운 공간을 필요한 것들로 채워나갈 때 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빼고, 잘 더할 수 있을까?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인생에 필요한 여러 정리법을 3회에 걸쳐 안내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우리가 사는 집, 주거 공간이다.
추억의 물건에 집착하지 말자
나이가 들면 지나간 세월만큼 추억도 많아진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흘러가버리기 마련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건으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간만에 대청소를 하기 위해 집을 한바탕 뒤집었다가도 결혼할 때 입었던 예복, 10년 전에 사용한 휴대폰,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 등 빛바랜 물건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 보관함으로 집어넣는다. 자녀들을 위해 사둔 이런저런 철지난 혼수품도 아까워서 끼고 사는 중장년층 부모도 많다.
소중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이해도 되지만, 사소한 추억까지 다 안고 살면 오히려 현재의 삶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청소할 때마다 일일이 쓸고 닦을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은 물론이고, 체력적으로도 모든 물건을 관리하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오래되고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공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으면 그 집은 현재의 내가 사는 공간이 아니라 과거를 사는 곳이 된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원한다면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물건만 남기라는 얘기다. 당장 필요한 물건을 정하고,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해 통제할 수 있는 만큼만 소유해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집 안의 물건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체력을 고려해 가벼운 물건 위주로 써야 한다. 그릇이나 컵 하나를 고를 때도 예전과는 다른 기준과 시선으로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거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처럼 큰 변화가 있을 때 물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리는 언제든 해도 된다. 특히 요즘같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을 땐 집 안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보는 게 좋다. 기분이 산뜻해지면서 답답함도 해소된다. 큰맘 먹고 대청소 한번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면, 정희숙 정리컨설턴트가 제안하는 공간별 정리 팁을 참고하자.
아늑한 침실의 비결은 ‘옷장 정리’
침실을 정리할 때 가장 처리하기 힘든 ‘빌런’(악당)은 다름 아닌 옷장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구매하는 옷들이 생기지만, 옷장 공간이 한정돼 있어 걸어둘 데가 없다. 이런 상황에는 침대나 의자 위에 어수선하게 옷과 물건을 쌓아두게 되고, 침실은 자연스레 난장판이 된다. 따라서 아늑한 침실을 만들려면 옷장 정리부터 해야 한다. 정리 방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먼저 침실의 구조부터 살핀다. 별도의 드레스룸이 있는지, 옷장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다. 그다음 어디에 무엇을 넣을지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본다. 평소 입을 일이 없는 한복이나 민방위복 같은 옷들의 자리도 정해두면 좋다.
그다음 옷장에서 옷을 전부 꺼내 입을 옷과 입지 않을 옷을 가려낸다. 10년 전에 유행하던 원피스, 사이즈가 맞지 않는 바지 등 자주 입지 않는 옷들은 모두 버린다. 아깝더라도 오늘의 나를 돋보이게 해줄 옷으로 옷장을 채워나가는 게 중요하다.
남겨진 옷들은 종류별로 나눈다. 우선 상의, 하의, 세트복(등산복·운동복 등), 원피스로 분류하고 계절별로 나눈다. 그리고 현재 입는 옷 위주로 옷장에 건다. 지금은 겨울철이므로 두툼한 옷을 앞에 배치한다. 옷을 걸 때는 두꺼운 옷걸이를 피하는게 좋다. 옷장의 공간이 금세 줄어들기 때문이다. 니트는 세로로 반을 접어 겨드랑이 부분에 옷걸이를 놓고 양팔 및 몸통 부분을 옷걸이 안쪽에 넣어 고정하면 늘어나지 않게 보관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얇은 옷걸이를 사용하자.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
거실은 가족의 소통 공간으로
이상적인 거실의 기능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일을 공유하는 데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말없이 TV를 보는 공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아 마치 창고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떤 공간이든 잡동사니로 어수선해지면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거실을 소통의 장으로 되돌려놓으려면 먼저 잡다하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도 품목에 따라 분류해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어린 손주와 함께 사는 집이라면 거실이 매일 장난감으로 어질러져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럴 땐 TV 서랍장 한 칸을 손주 장난감 등을 넣어두는 수납장으로 쓰면 좋다. 평소 아이가 자주 갖고 노는 장난감과 적정량의 책만 두고 나머지 물건은 손주 방에 보관한다. 손주 방이 없다면 학습 관련 물품이나 장난감을 수납하는 장소를 따로 지정해두고 쓴다.
책이 많은 집은 거실 여기저기에 읽다 만 책을 쌓아두는 경우가 많다. 책 놓을 공간이 부족하면 책장을 가로로 눕힌 뒤 책을 꽂고 그 위에 수납함을 올려보자. 공간 분할 효과가 생긴다. 이런 방법들로 비좁은 거실을 정리해 사용 범위를 넓혀나가면 가족들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주방은 청결이 핵심
주방은 식생활을 하는 공간이므로 어떤 곳보다 청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방 정리의 핵심은 청소인데, 요리 도구와 주방 물건들이 잘 정리돼 있어야 청소가 쉽다. 주방은 크게 싱크대, 조리대, 가스대로 구성돼 있다. 요리가 펼쳐지는 이 세 곳을 중심에 두고 정리를 하면 깨끗하면서도 효율적인 주방을 만들 수 있다.
우선 싱크대 옆 조리대에 펼쳐져 있는 잡다한 물건부터 정리한다. 주방 가전 필수품인 밥통과 전자레인지 정도만 놔두고 조리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한다. 비타민 같은 건강보조식품은 정수기 가까운 곳에 두면 매일 잊지 않고 챙겨 먹을 수 있다.
상부장과 하부장으로 나눠져 있는 수납부도 정리할 물건이 꽤 많다. 개수대 바로 위 상부장은 설거지한 그릇이 물기가 마르면 넣고 다시 꺼내 쓸 수 있도록 가급적 비워둔다. 상부장에 그릇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와이어 랙(철사 선반)에 그릇이 가득 쌓여 싱크대 주변이 혼잡해진다. 따라서 이곳엔 식사를 할 때 사용하는 그릇들만 놔두고 나머지는 상부장에 올린다.
하부장은 미어터지는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이다. 개수대 아래 파이프가 지나가는 경우는 선반을 만들기 어렵지만, 파이프가 없다면 선반을 설치해 냄비, 프라이팬 등을 보관하면 좋다. 단, 개수대 쪽은 물을 많이 사용해 습하므로 양념 종류는 놓지 않는다.
신발은 구성원별로, 눈높이에 맞춰
현관은 집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곳이다. 또 풍수지리학적으로 외부와 내부의 기운이 만나는 곳이므로 가급적 깔끔한 게 좋다. 현관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신발장만 잘 정리해도 넓고 쾌적한 현관을 조성할 수 있다.
신발도 옷과 마찬가지로 계절에 따라 분류한 뒤 가족 구성원별로 나누고, 종류별로 정리한다. 크게 운동화, 단화, 하이힐, 등산화로 구분하면 된다. 이때 치수가 맞지 않거나 잘 신지 않는 신발들은 버린다. 이렇게 과감하게 정리해야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신지 않는 신발은 따로 보관하거나 세트로 정리해둔다.
관리가 가장 까다로운 신발은 부츠다.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모양도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지 않을 때는 작은 생수통이나 신문지를 넣어둔다. 투명 케이스 등 사이즈가 맞는 수납공간이 있으면 그곳에 보관한다.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부츠 살 때 받은 박스에 보관해도 된다. 신발장은 가득 채우기보다 손님이 방문할 때를 대비해 한 칸 정도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게 좋다. 쇼핑백이나 상자, 우유팩, 커피 캐리어 등 소품을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
도움말 정희숙 정리컨설턴트
자료 및 정보 제공 가나출판사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창간 5주년을 맞아 열린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산문‧미니자서전‧국문 서예 등의 분야에 시니어를 비롯한 초등학생, 청년 등 전 세대가 지원했다. 9월 1일 홈페이지를 통한 당선작 발표에 이어, 10월 16일에는 시상식이 마련돼 영광의 얼굴들과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역 지침 준수 하에 소규모로 진행됐다. 자리에 함께한 임혁 이투데이PNC 대표는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에 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청춘이다”라며 수상자들을 독려하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나이 듦의 품격’, ‘대한민국 시니어로 산다는 것’, ‘새로운 시니어의 정의’ 등 세 가지 주제로 펼쳐진 이번 공모전을 통해 우리 중장년 세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다. 전 연령대가 참여한 수많은 작품은 윤정모 소설가를 비롯한 문인, 서예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상에는 산문 부문의 ‘울퉁불퉁 삶을 품어주는 보자기’가 올랐다. 대상 수상자 정순옥 씨는 “50대 중반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정을 표출할 통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글이었다”며 “60대에 들어서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자꾸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번 대상을 계기로 큰 자신감을 얻었고,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써서 내 이름이 박힌 수필집을 두 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아울러 “공모전의 주제를 고민하며 나이 듦의 소중한 가치에 눈 뜰 수 있었다. 단순히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뒷걸음치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부문별로는 시 이춘실(다시 피고 있었다), 산문 윤여임(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미니자서전 이호권(마늘이 잘 마르듯 그렇게 나이가 든다), 국문 서예 이은희(한글 판본체) 씨가 수상했다.
이춘실 씨는 “떫은 감처럼 덜 익은 시를 뽑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100세 시대에 앞으로 20~30년을 어떻게 살까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이번 공모전 당선이 ‘나이 들어도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라는 희망과 용기를 줬다”며 제2청춘을 잘 살겠노라는 다짐을 내비쳤다.
“최근 뜻하지 않게 생업을 접게 돼, 글로써 마음을 정리해보고 싶었다”는 윤여임 씨는 “한때 글을 쓰다가 3년 정도 절필했는데, 이번 계기를 통해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이 라이프가 브라보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다”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남편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한복을 입고 고운 자태로 참석한 이은희 씨는 “붓을 잡은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동안 숱한 공모전에 참여했지만 낙선이 허다했다”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으니 제2인생에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붓을 내려놓지 않고 앞으로도 나만의 개성과 생각을 알리는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다지기도 했다.
이날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이호권(43) 씨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노후 대비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이번 공모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2인생을 고민하고 그릴 수 있었다. 이런 계기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전화로나마 소감을 들려줬다.
수상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주춤했던 마음이 공모전을 통해 활짝 열리며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내놓았다. 이들이 그러했듯, 수많은 시니어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할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의 다음을 기대해본다.
같은 것을 찍더라도 어떤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피사체를 향한 사진가의 진심과 애정이 깃들었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온기 어린 시선으로 온정을 담아 따뜻한 사진을 찍는 이들이 있다. 바로 ‘따사모’ 커뮤니티다.
사진 ‘따사모’ 제공 취재 협조 서울시50플러스재단
요즘은 취미뿐만 아니라 봉사를 위한 모임도 늘고 있다. ‘따뜻한 사진 활동가 모임’의 준말인 ‘따사모’는 그 이름처럼 사진 촬영 재능기부를 통해 따뜻한 행보를 이어가는 커뮤니티다. 2018년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사진 활동가’ 교육을 받은 이들 일부가 모여 사회 공헌을 취지로 처음 결성했다. 그렇게 1기를 시작으로 올해 3기까지 이어오며, 현재 9명의 회원이 함께하고 있다.
따뜻한 마음 더해져 보람은 배로
따사모는 주로 비영리단체 등의 행사에 참여해 사진 촬영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식대나 교통비도 자비로 해결할 만큼 거의 무급으로 일을 진행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사진은 준프로급이다.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해온 조창섭(58)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적으로 관련 교육을 받고 공부하며 현재의 실력을 쌓아온 것이라고. 디자인 회사 대표인 이태호(55) 씨는 “아마추어로 각자 활동할 때는 조금씩 부족했지만, 이렇게 커뮤니티를 통해 모이니 시너지 효과가 난다”라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니 함께할 땐 프로 못지않은 결과물이 나온다”라고 이야기했다.
회원들은 평소 촬영한 사진을 공유해 조언을 주고받고, 전문가를 초빙해 함께 교육을 들으며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물론 사진 실력이 우선이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수요처를 발견하는 일이다. 아무리 무료봉사를 한다 한들 찾아주는 곳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터. 따사모의 경우 라파엘클리닉, 서울시 그룹홈지원센터·한부모지원센터, KCOC(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 통일과나눔 재단 등과 MOU를 체결해 왕성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특히 ‘라파엘클리닉’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국내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의료봉사 기관인데, 총무인 조병희(63) 씨가 물꼬를 트며 현재까지 따사모가 가장 핵심적인 활동을 이어오는 곳이다. 올해 초엔 조창섭 씨가 대표로 미얀마 의료봉사 현장까지 동행해 라파엘의 주요 활동을 담아오기도 했다. 최근의 해외 활동과 더불어 커뮤니티 회원들이 가장 보람을 느꼈던 프로젝트 중 하나도 미얀마와 관련이 있다고.
조병희 “교사 출신들로 구성된 ‘세아시’(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라는 커뮤니티가 있어요. 한국에 온 미얀마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그곳 선생님들의 프로필 사진을 요청하더군요. 그런데 그 사진만 찍기보다는, 기왕이면 청년들이 다시 고국에 돌아갔을 때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했으면 싶더라고요. 그들에게 한복을 입혀 고궁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그날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했죠.”
취지도 좋았지만, 다른 커뮤니티와 합심해 회원들이 행사 전반을 기획, 진행한 것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들의 프로젝트는 귀감이 되어 서울시50플러스캠퍼스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모범 사례로 소개됐고, 따사모를 더욱 알리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따사모 협동조합을 꿈꾸다
따사모의 캐치프레이즈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들이 촬영하는 대상은 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들. 훈훈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내려면 그들 역시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창섭 씨는 “라파엘클리닉에서 수많은 사진을 봐왔지만, 따사모의 사진이 가장 따뜻함이 느껴진다고 해서 보람이 컸다. 덕분에 여러 해에 걸쳐 우리를 불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실력 있고 젊은 사진 재능기부자도 많지만, 대부분 스펙 쌓기로 시작하거나 직장생활 등에 치여 오래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1기부터 따사모와 함께해온 김형구(61) 씨는 “그런 점에서 시니어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재능기부 활동이 더 유리하다”라며 “젊은이들 중에는 채워야 할 어떤 점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봉사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시니어는 자발적 봉사라 진정성을 갖고 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커뮤니티 대표인 박태규(64) 씨 역시 “시니어의 융화력도 큰 장점”이라며 “사진 대상자와 쉽게 친해지고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진심을 다해 봉사를 하는 이들에게 때때로 수입이 생기기도 한다. 따사모는 수익 발생 시 촬영자가 70%를 갖고, 나머지 30%를 공용 통장에 보관하는 방식으로 관리한다.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최근 그들은 ‘착한 수익을 내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박태규 “따사모 브랜드를 강화하고 수익사업을 발굴해 지속적인 사회공헌 활동이 가능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해요. 그래서 협동조합을 구상 중입니다. 오래전부터 얘기는 나왔지만, 무턱대고 만들어 어설프게 운영하느니 좀 더 탄탄해진 뒤에 설립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죠. 올해는 그 계획이 구체화될 듯합니다. 많은 응원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사진을 좋아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는 시니어들에게도 많은 애정과 관심 가져주셔요.”
△따사모와 함께하려면?
우선 서울시50플러스캠퍼스에서 사진 관련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후 촬영 작품을 제출하면 기존 회원들과의 인터뷰를 거친 뒤 가입 여부가 결정된다. 사진 촬영 기술도 중요하지만 봉사정신으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온도’로 오랜 시간 뜻을 함께할 사람은 언제든 문을 두드리면 된다.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입성, ‘사랑의 불시착’ 등 드라마의 세계적 성공과 K방역 선전 등이 새로운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는 요즘이다. 생활한복의 대명사인 ‘돌실나이’ 김남희(53) 대표는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모습으로 기자를 마주하며 최근 우리 문화에 대한 해외의 호의적 반응에 발맞추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문화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뛰어들어 27년을 버틴, 그리고 마침내 온몸으로 피워낸 돌실나이와 김 대표의 역사와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활한복의 대명사인 돌실나이의 인사동점 매장에서 김남희 대표와 인터뷰를 하기 전, 그녀가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얘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느낌을 전하자 김 대표가 웃으며 “대표라는 생각 별로 안 하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돌실나이의 역사와 함께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팀장들은 모두 근속 연수가 20년을 넘었고, 30여 개 매장 직원들도 10년 이상 일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혼자 했겠어요. 이 황무지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소박한 문화를 일구자
김 대표가 황무지라고 표현한 것처럼, 돌실나이는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자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회사다. 그 시작은 오래전, 김 대표의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이어야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식용으로만 정착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의상학과 전공을 살려서 우리 옷 일꾼으로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었죠.”
김 대표는 의상학과를 다니며 ‘우리입거리연구회’를 만들었다. 한복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규합총서’ 같은 고서를 뒤지며 원료 염색하는 법을 익히고 실제로 만들었다. 그 일을 다섯 명이 시작했는데 끝까지 남아준 사람이 정경아 씨였다.
“그래서 경아와 돌실나이를 만들어 3년을 같이했죠. 회사 이름은, 함께 한 마을에 간 게 계기가 돼서 지었어요. 전남 곡성에 있는 석곡마을인데, 거기서 나는 삼베 이름이 돌실나이였죠. 다 사라져가는 문화가 그 마을에 남아서 이어지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저런 일을 하자고 마음먹게 되었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소박한 문화를 이끌어가는 일 말이죠.”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끝까지 뜻이 맞은 두 사람이 시작한 돌실나이였지만 예상대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환경오염을 하지 않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소색 의류를 만들자고 했어요. 소색은 염색하지 않은 흰색과는 다른 본디의 색을 이르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광목색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한 시즌 제품을 만들고 나니 이걸로 먹고살 순 없겠다고 판단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염색을 조금만 하자.(웃음) 환경을 오염하지 않는 자연 염색이나 소소한 파스텔 계통의 연한 색을 쓰자고 했죠. 그렇게 점점 먹고살려다 보니 강한 색을 쓰게 되고 화학섬유도 쓰게 되고 변질되어 갔어요.(웃음) 월세도 내야 하고 직원도 생기고 물건도 만들어야 하고 재고회전율, 영업이익율도 신경 써야 했으니까요.”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거칠었다. 김 대표의 ‘타협’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IMF 금융위기가 도움의 손길이 되었다.
“사실 생활한복은 IMF 덕분에 큰 종목이에요. 1996년 12월에 우리 옷 입기 발족식을 문체부에서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한복 입고 출근하는 걸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하자는 거였죠. 그런데 특별한 행사 또는 결혼식할 때 입어보는 한복을 매번 입기는 불편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공무원 사회도 생활한복에 눈을 돌리게 됐죠.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인식과 함께 한복 붐이 일었어요. 매일 대리점 내달라는 전화가 올 정도였죠. 생활한복 브랜드가 눈만 뜨면 생겼는데 그해 2000개 가까운 브랜드가 생겼어요.”
포기하고 싶었던 숱한 시간 이겨내다
생활한복 업체들이 갑자기 난립하면서 민감한 사안이 생겼다. 바로 카피 문제였다.
“저희는 연구개발 비용을 많이 쓰면서 공을 들여 한복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데서 저희 걸 베낀 제품을 팔더군요. 그런데 유행이라는 게 폭풍처럼 왔다가 거품처럼 꺼지잖아요? 3년 차 되니까 그 사람들은 돈 챙겨서 떠나더라고요.”
한탕주의가 망친 시장은 냉정하고 무서웠다. 상당수의 저품질 생활한복이 소비자에게 큰 실망감을 남겼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한복의 생활화라는 순수한 뜻을 갖고 시작한 다른 문화 단체들이 하나씩 파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재고를 사주고 하면서 돌실나이도 역경에 처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소비자들의 인식에 ‘생활한복은 천박한 것이야’라는 생각이 박힌 거였어요. 한철 장사를 한 사람들이 팔다 남긴 재고들이 한 2~3년 시장에 계속 돌더라고요. 볼 때마다 창피했어요.”
김 대표는 생활한복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활한복의 고급화를 위해 ‘아회’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해외 패션쇼와 박람회 활동을 추진했다. 론칭할 때는 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아회 한복을 입고 상견례하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4년가량 추진한 아회는 결국 정리했다.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맞았어요. 고가 의류는 성공하는 비법이 있더라고요. 비싼 옷을 소비하는 이들의 마인드와 문화에 대한 어울림이 있어야 했는데, 제가 못 어울리겠는 거예요. 결국 내 정서에 맞는 일을 해야지 싶어서 담백한 생활한복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며 돌실나이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기로 했죠.”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
그 시점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사업이 갑자기 커졌다가 줄어들면서 감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뽑는 일보다 줄이는 일이 열 배 더 힘들어요. 퇴사 예정자 중에 출근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고요. 30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한때는 화보 촬영할 돈이 없어서 마네킹에 옷을 입히고 인화해서 매장에 붙이고… 별짓 다 했죠.(웃음)”
지금이야 겨우 웃으며 할 수 있는 얘기이지만 김 대표의 심신에 깊이 새겨진 씁쓸한 흔적들이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아파서 꼭 해야 할 일 외엔 못했다고 한다. 갱년기 같은 증상들을 겪었다. 수면장애 때문에 항상 졸렸고 저체온증에 시달렸으며 악몽도 꿨다.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동시에 팀장급 직원들이 개인 사정들이 생겨 휴직에 들어가면서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작년부터 하는 일이 원활해졌어요. 내가 덜 아프게 됐고 휴직 들어갔던 책임자급 직원들이 다 돌아왔어요. 자리가 하나하나 채워지고 연말연초 계획도 끝내고 나니 일주일에 두 번 점심시간 운동도 가능해졌어요. ‘아, 나 이제 이렇게 살 수 있나봐’ 했는데 딱 2주밖에 못했어요. 코로나 터지면서 도루묵.(웃음) 내 인생에 뭘 노냐, 그냥 일해야지.(웃음)”
왜 이렇게 미련한지 자신도 이해 못해
들으면 들을수록 김 대표와 돌실나이의 역사는 거친 현실에서 계속 깨지면서 앞으로 전진한 역사처럼 보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활한복 브랜드이지만 이렇게 상처가 가득 새겨져 있음을 아는 이 누가 있을까.
“주어진 내 밥그릇이란 없는 듯해요. ‘너희는 자리 잡았잖아’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회사가 부동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번 건 다 연구개발에 투자하거나 회사에 있고. 저는 통장관리도 해본 적 없어요. 재무관리실에서 다 하고 월급만 받아요. ‘시즌 기획을 잘못했다, 고객들에게 외면받았다’ 하는 일이 두세 번만 일어나도 회사가 휘청이기에 실상 굉장히 피가 말라요.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서.”
한 번 잘하기도 어려운데 계속 잘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어제까지 잘했어도 한 번 실수하면 소비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업은 그렇게 냉정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죠.(웃음) 그래도 그냥 가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첫사랑과 결혼했고, ‘이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한 삶을 지금까지 살고 있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도 아직 만나고 있는 걸 보면 한 번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인가봐요. 돌실나이도 그래요. ‘계속 가보자,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 있자’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왜 이런 미련한 생각을 하며 사는지 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런 DNA가 있나보죠.”
한 해에 600~700개 새로운 아이템 제작
김 대표에게 의상학과는 재수하기 싫어서 점수에 맞춰 들어간 학과였다. 그런 그녀가 27년 동안 계속 한복만 만들게 된 것은 이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제가 돈으로는 안 움직이거든요. ‘그럼 내가 사는 힘이 뭘까?’ 생각해보니 스스로 정한 사명감일 듯해요. 나를 그 안에 가둬놓고 살고 있었다는 걸 중년이 돼서 깨달았죠. 한심하고 답답한 부분도 있긴 한데, 그 묵직한 무게감으로 여기까지 온 거죠. 무언가를 만지고 그리는 창의적인 일이 제 적성에 맞아요. 계속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버릇과 완벽주의가 옷 만드는 일에 적용이 돼서 오늘의 돌실나이가 있게 된 셈이죠.”
그녀의 말처럼 돌실나이의 옷 디자인은 매번 바뀐다. 철저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다. 김 대표는 차라리 새로운 걸 하는 게 낫다고 웃으며 말했다.
“25년간 둥근 깃을 변형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조금 다르면 ‘똑같다’고 하고, 많이 다르게 하면 ‘어색하다’고 하는 그 사이에서요.(웃음) 대신 똑같은 옷은 안 만들기에 회전속도가 빨라요. 2016년에는 1년에 1000여 개의 새 아이템을 만들었고 지금은 좀 줄어서 600~700개의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어요. 계속 신상품을 내놓고 회전율과 품종 관리도 철저히 합니다. 물론 100% 자체 개발이고요. 외부 사람이 보면 ‘이 정도 매출이 나오는 회사가 개발비를 이렇게나 써?’ 하며 놀라요.”
떳떳하고 당당하게 우리 문화 만들어가겠다
마침 정부가 우리의 한복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나섰다. 지난해부터 문체부와 교육부, 한복센터는 협업 아래 한복 교복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맞춤형 한복을 학생들에게 교복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돌실나이는 2019년 한복의 전통과 멋을 살리면서도 학생들이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도록 실용화한 교복을 디자인해 ‘한복 교복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총 30여 가지의, 학생들이 스타일링하기 좋은 디자인으로 개발된 교복은 한복 특유의 곡선미와 세련된 색감은 물론 활동성까지 최대한 살렸다. 올해부터 20여 곳의 전국 학교 학생들이 돌실나이가 제작한 교복을 입게 된다.
김 대표는 최근 한복업계가 침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이라는 장르를 유행 이상의 가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요즘 고민이다.
“우리의 자존심으로 당당하게 한복을 지켜내고 싶어요. 그러려면 매출도 키우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한류문화에서 한복이 뒤처지지 않게끔 해야겠죠.”
돌실나이는 다양한 문화운동도 기획하고 있다. 인사동점 3층에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강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시험 삼아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그녀는 돌실나이가 소비자들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하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구차하게 살지 않을래요. 자존심도 끝까지 지킬 거고요. 그리고 ‘버젓한 한복 브랜드가 일반 의류 브랜드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으니 젊은이들이여, 한복에 뜻을 가지고 오라, 도전하라’고 말할 수 있는 롤 모델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의 한복을 자랑스럽고 번듯한 브랜드로 꼭 키우고 말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내밀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냉철해 보이지만 따뜻한 뚝심으로 걸어가는 김남희 대표. 그녀의 손끝에서 우아함과 실용성이 함께 닿게 될 우리 옷 문화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종교를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기에. 그 어떤 권능에도 휘둘리거나 꼬리치지 않는 자율적 행위이기에. 그러나 자유 혹은 자율을 근간으로 삼기가 쉽던가. 매사 스텝이 꼬이고 뒤엉겨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게 사람이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위안을 구하고서도 돌아서면 외로워 보채는 게 사람이다. 도돌이표처럼 자주 되돌아오는 자문은 하나. 나는 누구인가?
경주시 남산 자락 소나무 숲속에 사는 정미연(65)은 성화(聖畫)로 이름을 얻은 화가다. 얻을 만하기에 얻은 이름이다. 무겁지 않을까, 이름이라는 것. 얻으면 얻을수록 어깨에 얹히는 하중도 커지는 게 이름이다. 더구나 성화란 성(聖)을, 지고지순을, 염결(廉潔)을 구현하는 그림이니 속세에 몸을 둔 화가로서는 얻는 게 있을수록 버거워 불편감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게다. 그림은 고결하나 삶은 어이 부박한가? 이런 의문이 들솟아서.
그러나 그는 세속을 어지간히 건넜다고 한다. 신앙으로, 기도로, 그림으로 부박한 삶의 때를 어지간히 헹구어 이젠 마음의 소란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 어지간히 건넜다는 안도감, 그게 때로 순간의 착시처럼 흩어지는가. 그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갈증을 해 저물기 전에 처리하고 싶다. 살면서 내내 움켜쥐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더 옹글게 타야 할 필연을 느낀다는 거다.
“어떤 선각자가 말했다. 인생은 선반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 것과 같다고. 잠시라도 닦지 않으면 먼지가 쌓인다고. 실로 그렇다. 잠시만 방심하면 유혹이 스며드는 게 인생이지 않던가.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줄곧 그런 물음을 품고 살아왔다. 신앙으로 그 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갈등이 도사려 있다. 갈등과 자주 싸운다.”
“당신이 알아낸 당신은 누구인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여기엔 아무런 회의가 없다. 신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내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깊어져서다. 그러나 여전히 삶에 서툴다. 나는 누구인가 파고들어 매번 깨닫는 또 하나의 진실은 내가 부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달자 시인은 정미연의 성화가 ‘천상의 모습은 물론, 천상의 평안마저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고 극찬했더라. 성화가 지닌 감화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작가의 기량? 태도?”
“나에게 성화 그리기는 기도다. 신앙이 무르익기를 염원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지. 절실한 신앙으로 영성을 갈구하는 마음, 정신, 그런 게 그림에 담기기를 희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작으나마 성취가 있었다면 그건 주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다.”
“화가란 천성적으로 일탈자일 수 있다. 어떤 규율에 길들여지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지 않던가. 종교생활에서 오는 구속감이 따분하진 않나?”
“초기엔 구속감이 싫었다. 아이고, 나 늙으면 열심히 믿을래! 그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웃음) 그러나 모든 게 운명처럼 돼버렸다. 성화 작가로 자리매김이 되면서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들어가게 되더라. 그 역시 신의 사랑이었다. 결국은 신앙의 진정성,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생래적으로는 좀 도발적이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하는 기질이 다분했거든.”
“가령 어떤 싸움?”
“나의 아버지는 완고해 딸의 미대 진학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법대에 가 법관이 되길 바라는 일념으로. 그러나 난 삐딱선을 탔다. 미술에 품은 뜻을 굽힐 수 없어 정면으로 맞붙어 결국은 고집쟁이 아버지를 꺾었다. 그 시절의 기질대로 살았다면 성화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묵주기도책과 성화
아비들은 흔히 살아온 공력으로 현명하나 고루하다. 외눈으로 자식을 바라봐 일방적인 통제와 선동을 일삼기 십상이다. 사막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수영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랑이 아니라 할 것도 없다. 모순이 없는 사랑이 있던가. 신의 사랑으로 사는 정미연의 눈은 광각렌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하니 완고했던 아버지를 두고서도 사랑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랴. 어머니는 온전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성모님’이라 불린 분이었다지. 결혼 전 가톨릭에 입문했으나 ‘한동안 날라리 신자로 살았다’는 정미연이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그 어머니가 남긴 묵주기도책 때문이었다.
“심한 관절염으로 30여 년을 걷지 못한 채로 지내면서도 8남매를 어엿하게 길러낸 어머니였다. 노년엔 촛불을 밝히고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로 일관하셨지. 어머니의 표정도 기운도 얼마나 맑았던지, 어린 내 가슴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갈증이 일렁이곤 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일도 잦았다. 그런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묵주기도책을 펼쳐들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어머니가 남긴 성스러운 이미지에서 성화 그리기를 착상했다는 얘기?”
“그것만은 아니다. 묵주기도책을 만들어 어머니 영전에 봉헌하고 싶었다. 묵주기도책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일생을 그린 성화와 묵상기도문들로 이루어지는데 성화를 내 손으로 그리고 싶었던 거다. 완성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을 만치 앓기도 했다. 기도문은 신달자 선생이 맡아주셨다.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주목했다. 가톨릭 성도들에게 묵주기도책은 흔히 후손에게 상속할 신앙의 유산이자 가보로 간주된다.”
성화로 방향을 바꾸기 이전, 정미연의 그림은 사뭇 달랐다. 아름답거나 미묘하거나, 억눌리거나 튀어나오거나, 인간이 지닌 복잡한 내면을 자유분방한 혹은 고즈넉한 작풍으로 표출하기에 능했다. 그러다가 기도와 관조를 실은 성화로 이행했던 것. 그런데 묵주기도책을 위한 성화를 그릴 때 정미연은 한 가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기존 성화들이 답습해온 서구적 양식에서 좀 벗어나 한국적 전통 양식을 가미하자는 착안을 했더란다. 그는 예수의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혔으며, 성모에겐 잔주름 곱살한 한국 어머니의 얼굴을 부여했다. 석굴암 전실이나 에밀레종 비천상을 성화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불안했다. 이거 제대로 그리는 거 맞아? 혼자 고민하다 정교회 한국대교구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님(91, 그리스 태생)이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감수를 청했다. 그림을 본 대주교님께서 흡족해 이러시더라. ‘나를 아버지로 여기라!’ 이후 각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분의 소박한 삶과 실천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떤 분이기에?”
“하염없이 높은 분이 늘 하염없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다. 생활부터 극도로 검소해 입은 옷은 바늘로 꿰맨 자국투성이였다. 조용한 눈빛과 절제된 언어엔 자비와 존엄이 서려 세상 사람 같지가 않을 지경이었지. 신령스럽다, 그런 표현이 맞을라나?”
“깨달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천진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삶에 대한 모든 욕심과 의문이 사라져서.”
“영성으로 충만한 존재. 대주교님은 그런 분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빙긋이 웃어주시는 표정만으로도 깊은 위안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제가요, 당뇨도 있고요, 약도 한 움큼씩 먹고요, 저 앞으로 어떡해요?’ 그렇게 내가 방방거리면 ‘오늘 하루의 걱정거리는 오늘 하루로 족해!’ 하시더라.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내 안의 근심이 순간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 특별한 분과 함께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한 달간 순례하기도 했는데 실로 값진 여행이었다.”
“수도원 순례라. 문외한들은 생각하기 힘든 여행이다. 정결하고 엄숙할 수도원의 무거운 공기부터 연상돼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머물기도 했다. 대주교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지. 며칠씩 머무는 곳마다 나를 사로잡더라. 고뇌와 기쁨으로 신을 찬미하는 수도자들, 헌신을 다투고 사랑을 경쟁하는 수녀들, 성스럽고 아름다운 미사, 놀라운 성화들, 고요한 밤에 은총처럼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 성모님의 음성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곤 했다. 무지렁이 같은 나를 보듬는 예수님의 손길을 깨닫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평화신문에 순례기를 연재했지. 대주교님께선 글을, 나는 성화를 맡았다.”
고통은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기회
민첩한 거동, 자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분위기에 생기를 집어넣는 순간순간의 센스. 돌돌돌 명랑하게 흐르는 시냇물쯤? 그의 언동엔 거침이 없어 청명한 물살을 연상시킨다. 기도로 진리를 간구하고, 성화 그리기로 영성에 찬 삶을 갈구해왔으니 파란만장 세상사야 이미 관통해 가뿐한가?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믿음과 실감으로 기쁘다지. 기쁘기에 평화로운 내부엔 에너지가 샘물처럼 고인단다. 흔히들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진을 빼며 그림과 씨름하지만 그는 색과 선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에세이도 많이 썼다. 그간 여러 권의 서화집을 출간했다.
“내가 다작을 한다. 일단 구상을 하고 나면 작업에 속도가 붙어 손쉽게 그림을 완성한다. 남편의 적절한 통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몰입이 지나쳐 건강을 해쳤거든.”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기념관엔 당신이 만든 성상(聖像) 조각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성화 작가로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이름이나 위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미술계에선 성화를 쳐주지도 않는다. 외도로 여긴다. 한때 이름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게 본분임을 알고선 부끄러웠다. 성화는 순수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영혼을 다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성화가 나올 수 없거든.”
“사람이 순수할 수만 있겠는가? 진정으로 순수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던걸. 신의 숲, 그 안전지대에 들어간 당신은 어떤가?”
“아집과 불순에 휘말린 마음이 망둥이처럼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 자는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는 걸 알기에 믿음의 힘으로 망둥이놈을 수월하게 밀어내지. 진실한 신앙인들은 안다. 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한다는 걸. 기적은 성경 안에만 있지 않다. 삶이란 온통 기적이지 않던가? 그렇지 아니한가? 날마다 이어지는 우리의 들숨과 날숨 자체부터가 기적이지 않은가. 세상엔 위선과 탐욕이 횡행하지만 삶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엔 부정적인 마인드라는 게 들러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인도의 어떤 수행 무리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신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이토록 외롭죠? 왜 이토록 괴롭죠?’ 천사가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선 홀로 고통스럽게 계속 노를 저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초라한 숙명이지 않나?”
“삶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경로이자 기회로 삼는다. 신을 섬기는 자에게 극복하지 못할 고통은 없다. 있다면 그건 신의 소관사항이지. 신에게 맡기면 그만이지. 그렇다면 삶을 통째 긍정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부족한 나는 부끄러워 성경 한 구절의 말씀이나마 실천으로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젠 더 먼 길을 떠나고 싶다. 삭발 수도자로 살고 싶다. 그렇게 될 거다. 가족은 어쩔 거냐고? 부부가 함께 간다. 남편도 공감하니까.”
그는,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삶에 올인하는 거다. 내 삶이 꼬였다 느껴지는 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걸 알 때다. 어라,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네? 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괴롭지만 문제를 풀 실마리? 정미연의 드라마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해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간다.
우리의 전통주는 주정에 물과 조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주다. 몸에 부담을 덜 줄 뿐 아니라, 맛과 고상한 운치가 남다르다. 달콤한 감칠맛, 쓴 듯 아닌 듯 쌉싸름한 맛, 묵직하면서도 쾌청한 알싸한 맛….
프랑스 와인의 지역 고유 맛에 영향을 주는 테루아가 있듯 전국 팔도 고유의 특산 농산물로 지역의 맛을 보여주는 우리의 전통주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술의 빛깔, 맛, 향, 스토리, 그리고 곁들임 음식 등은 외국의 유명 술인 와인, 위스키, 사케 등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아쉬움에서 정부 차원의 전통주 지원 정책에 대한 요구가 이어져 우리 술의 가치를 더욱 높일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의 전통주 제조업체들과 원료 공급 농민, 주류연구 전문학자, 유통업자들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진흥협회는 장인들의 혼이 담긴 전통 명주의 역사와 맛,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아울러 보다 과학적이고 정교한 테이스팅을 통한 세련된 맛 표현, 사실적이고 흥미로운 스토리 개발, 전통주에 어울리는 마리아주 개발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설날맞이로 달콤한 맛, 쌉싸름한 맛, 은은한 맛의 대표 주자인 전통 명주 3인방에 대해 알아본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명주의 역사를 알고 우리 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달콤한 맛 ‘감홍로’
제조원 농업회사법인(주)감홍로
유형 일반 증류주(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40%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70%, 조(수입산)30%, 정제수·용안육·계피·진피 ·정향·생강·감초·지초(자초)
Story
감미로운 맛, 황홀한 붉은 빛, 맑은 이슬의 의미를 담은 술. 감미롭고 붉은 빛, 강렬하고 독특한 향이 미각, 시각, 후각을 만족시킨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이강주,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증류주로 꼽을 만큼 명성이 높은 술이다. ‘별주부전’에서 자라가 토끼를 감홍로로 유혹하고 ‘춘향전’에서는 춘향이 한양으로 떠나는 몽룡에게 이 술을 내어놓는다.
감홍로는 고려시대 때 평안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3대 명주 중 하나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대대로 감홍로를 빚어온 가문의 주조 비법을 후손인 이기숙 명인이 섬세하게 복원했다.
누룩과 쌀로 빚은 술이 발효하면 1차 숙성시킨 후 두 번의 증류 과정을 거친 다음 한약재를 침출한다. 이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까지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도수가 높아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며 묵힐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색, 맛, 향이 조화를 이룬 조선시대 최고의 명주. 다른 음료수와도 잘 어울린다. 술에 약한 사람들이 칵테일을 만들어 마셔도 무리가 없는 격조 높은 술이다.
Taste
패션으로 치면 한복 두루마기에 걸친 모피 숄처럼 고급스럽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향기와 계피향이 어우러지면서 내는 풍미가 일품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혀끝에 살짝 감도는 단맛과 함께 스파이시한 향이 입안에 확 퍼진다. 높은 도수와 강렬한 향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목을 넘어간 후에도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입안에 계속 머물며 여운을 남긴다. 섬세함과 중후함을 동반한 고급스러움이 가히 한국의 위스키라 불릴 만하다.
Food
맵고 자극적인 음식보다 담백한 안주가 어울린다. 지방이 적은 육포나 대구포도 감홍로의 맛과 향을 잘 살려주는 안주다. 스테이크, 숯불이나 그릴에 구운 돼지고기, 양꼬치구이 등 육류와도 즐길 수 있다. 해산물 샐러드, 신선한 허브로 마리네이드한 연어 등의 해물요리와도 궁합이 맞는다. 초콜릿, 블루치즈, 견과류와 함께 가볍게 마셔도 좋다.
쌉싸름한 맛 ‘진도 홍주·백주’
제조원 대대로 영농조합법인
유형 일반 증류주
용량 750ml, 375ml (진도백주 375ml)
알코올 함량 40%, 38% (진도백주 38%)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 99%, 지초(국내산) 1%, 진도백주 쌀(국내산) 100%
Story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이로 잘 알려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맛에 반해 읊은 노래다. 지도 제작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다 각지의 전통주를 접했을 터. 김정호 선생은 흥선대원군에게 완성된 대동여지도를 바칠 때 마치 붉은 눈물이 방울방울 모여 술을 이룬 것 같은 진도홍주를 함께 올렸다고 한다.
진도홍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지역 세도가들이나 살림이 넉넉한 민가에서 전통비법으로 빚어온 토속 명주다. 쌀이나 보리에 누룩을 넣어 숙성시킨 뒤 증류한 순곡 증류주. 마지막에 지초(芝草) 침출 과정을 거치면 붉은 빛을 띤다. 지초 뿌리에는 산삼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예로부터 이 약초를 넣어 빚은 술은 음용뿐 아니라 치료 목적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효능도 좋지만 무엇보다 지초 뿌리에서 우러난 붉은색이 황홀하다. 입술을 갖다 대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조선시대에는 ‘지초주’라 불렸는데, 임금에게 올리는 최고의 진상품으로 꼽힐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도는 한양에서 먼 남쪽 끄트머리에서도 뭍에서 떨어진 섬인지라 유배지로도 적지(適地)였다. 자연스레 귀양살이하러 온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가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문장이나 글씨, 그림, 노래 등 수준 높은 문화에 술이 빠질 리 없었다. 시 한 수 읊으며 한 잔, 붓 한 획 긋고 한 잔, 노래 한 자락에 화답하며 또 한 잔. 이렇듯 유배지에서의 시름을 잊게 했던 술이 진도홍주 아니었을까.
진도백주에 붉은색을 띠게 해주는 지초를 침출하면 홍주가 된다. 백주는 국내산 쌀을 이용해 만든 밑술을 발효시킨 뒤 증류한 전통 소주다.
Taste
예상을 뒤엎는 맛.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깨끗하고 단아하고 견고한 느낌이다. 황홀한 비단노을 빛 아래 남성성이 숨어 있는 듯하다. 화끈하면서도 묵직한 맛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단맛이 짧은 대신 향의 여운은 오래간다. 다시 말하면, 양면성을 지닌 개성이 분명한 독주. 스트레이트로 혹은 얼음을 채워 음미해도 좋지만 술에 약한 사람은 맥주나 탄산음료에 섞어 칵테일로 마셔도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서가 한 귀퉁이에 놓아두고 가끔 한 모금씩 마시면 김정호 선생이 말한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진도백주는 알코올 함량이 38%. 꽤 높은 도수이지만 순곡주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살아 있어 마치 무엇을 그려도 되는 빈 도화지 같은 느낌이다. 목넘김이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끝 맛이 입에 맴돈다. 온더록스로 즐겨도 좋다. 화이트 스피릿(White Sprit)으로 활용하면 칵테일 맛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Food
육류, 생선과 두루 잘 어울린다. 다만 도수가 높고 향이 강해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식이 좋다. 어란, 굴튀김, 진도 특산물인 구기자를 이용한 구기자갈비찜, 전복탕 등은 진도홍주에 잘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 큼직하게 썰어 노릇노릇하게 구운 두부스테이크, 쫄깃하고 담백한 문어숙회도 술맛을 돋운다. 기름진 중화요리를 곁들이면 부드럽고 알싸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호두, 아몬드, 대구포 등 가벼운 안주도 무난하다.
진도백주는 생선회나 전류, 산적, 쇠고기구이 등 다양한 한식 메뉴들과 잘 어울리며 육포나 땅콩 등 마른안주와 곁들여도 좋다. 매콤한 겨자 맛이 매력적인 냉채족발이나 샐러드도 궁합이 잘 맞는 안주다.
은은한 향 문배주 명작
제조원 문배주양조원
유형 증류식 소주 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25%, 40%
원재료 및 함량 조(국내산), 수수(국내산), 쌀(국내산), 효모, 정제수
Story
평안도 지방 전통주인 문배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임금에게 진상했던 술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문배주 기능 보유자 4대손인 이기춘 명인에 의해 재현돼 1986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1990년도에 상품화됐다.
문배주에 사용되는 누룩은 밀, 술은 조와 수수를 이용한다. 수수와 조는 계약 재배를 통해 수매하고 있어 철저하게 품질이 관리된다. 순수 곡물로 만들어지는 술에서 문배나무의 과일 향이 은은히 풍긴다 해서 ‘문배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배주는 빚어서 바로 마시지 않는다. 증류한 후 봉인해서 서늘한 곳에서 1년간 숙성시켜야 은은한 향과 깨끗한 맛을 자랑하는 명주로 완성된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을 대접하는 외교주로 쓰였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사용되는 등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았다.
Taste
25% 부드럽고 편하다. 향긋하고 여리지만 강함도 느껴진다. 곡물로 만든 술인데도 싱그러운 과일 향이 느껴져 기분 좋은 취기가 가시질 않는다.
40% ‘문배주’라는 이름답게 한 입 머금으면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난다. 높은 도수이지만 정갈하고 깨끗하다. 강렬함도 느껴진다. 순곡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소함과 달콤함도 있다. 목을 넘긴 뒤에는 기분 좋은 풍미가 오래도록 남는다.
Food
리코타 치즈와 아몬드 등 견과류를 뿌린 샐러드와 즐기면 좋다.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를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민어 등 흰살생선에 달걀옷을 묻혀 고소하게 지져낸 전이나 지리 같은 깔끔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설을 앞두고 영등포 전통시장을 찾아갔다. 설 대목이라서 시장 전체가 깨끗하게 정리됐다. 옛날 상품들이 거의 모두 갖춰져 있는 게 영등포 전통시장의 특징이다.
상인들은 영등포 전통시장을 “서민들의 쉼터와 같은 곳” 또는 “옛 시골 시장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장 골목이 오래되기도 하고 아직 리모델링도 안 돼 허름하고 다소 복잡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정감을 느끼게 하는 시장이다.
현장에서 느낀 영등포 전통시장의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다른 곳에서 팔지 않는 독특한 물건을 판다. 옛날 제주도에서 목욕할 때 발뒷꿈치의 각질을 제거하는 데 쓰던 귀중한 돌을 팔고 있었다. 현무암으로 작은 구멍이 나 있고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가벼운 돌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그 돌로 발뒷꿈치의 굳은살을 없애는 데 쓰곤 했다. 지금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과거 제사를 지내던 제사용 도구도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옛날 모습 그대로 제작을 해서 팔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옛날 촛대, 잔, 그릇 등이 보였다.
둘째 물건 대부분이 싸다. 서민들이 찾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옷 종류, 신발, 가구, 주방용품, 음식 등이 모두 싼 값에 팔리고 있다.
콩국수 2000원, 고급부추 5000원, 대형머플러 3000원, 고급장갑 3900원, 티셔츠 5000원, 이발 5000원, 염색 5000원, 세발(머리를 감고 다듬는 것) 2000원 등이었다.
셋째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상품 종류가 다양했다. 다른 곳에서 구하기 힘든 것도 영등포 전통시장에 가면 구할 수 있다.
각종 약초, 옛날 방한복, 군 전용 잠바, 세계 주류 할인점, 옛날 술, 개량 한복, 각종 털실, 만물상회, 올갱이 해장국, 인삼, 옛날 고향 순댓국집 등을 볼 수 있었다.
넷째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물건들이 많았다.
옷을 짜던 편물짜집기, 이름 짓는 곳, 모시 전문, 자수, 옛 방앗간, 메밀가루, 전통식품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장이다. 그러나 시장 건물이 너무 오래돼 안전문제 등이 염려된다. 리모델링이라도 해서 전통시장으로 맥을 이어가게 했으면 좋겠다.
대구 청라언덕으로 가는 길에 가곡 ‘동무생각’을 흥얼거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어릴 적 배운 노래인데도 노랫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근대 풍경을 묘사한 벽화 골목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정원으로 가꾼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그림처럼 자리했다. 청라언덕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걷기 코스
동대구역▶ 버스▶동산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 계단▶ 계산성당▶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마당깊은집▶ 교남YMCA▶ 대구기독교역사과(구 제일교회)▶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진골목(종로)▶ 화교협회(화교소학교)▶버스▶ 김광석골목
청라언덕에서 부르는 연가
1890년대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산언덕을 사들여 주택, 교회, 병원을 지었다. 푸른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을 휘감았다. 대구읍성 동쪽 언덕이었던 동산은 이때부터 푸를 靑(청)과 담쟁이 蘿(라) 자를 써 ‘청라언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1910년경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남아 있다. 선교사 이름을 딴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이 그것. 미국식 방갈로 형태로 지은 주택 둘레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이 건물들은 각각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대 전후의 서양 의료기기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3·1운동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서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0~1986)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 노래비를 찾았다. 이 노래에 작곡가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을 줄이야. 박태준이 고교생 시절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훗날 이 사연을 들은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을 써줬다고 한다. ‘동무생각’의 ‘동무’는 동성 친구가 아닌 이성이었던 것.
청라언덕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간다. 좁고 가파른 이 계단은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 당시 고교생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집결지로 이동했던 통로였다.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니 가로수 위로 우뚝 솟은 계산성당 쌍탑이 보인다.
대구의 예술가를 만나는 골목길
계단을 내려와 큰길을 건너면 곧 계산성당 앞이다. 계산성당은 100여 년 동안 이 터를 수호하듯 하늘을 향해 뾰족한 쌍탑을 얹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 눈에도 멋있어 보이는지 성당을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성당 뒤쪽에는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1850~1913)의 고택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상화는 1934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항일 시를 남겼다. 그가 해방된 조국을 보았다면 자신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대한 답시를 짓지 않았을까.
두 고택 앞을 지나는 골목에는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등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예술가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 이 골목에 한국전쟁 직후 대구를 배경으로 한, 한 소년의 성장소설 ‘마당 깊은 집’(1988)의 문학체험공간이 들어섰다. 이 소설은 김원일(1942~)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데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으면 3·1만세운동 때 주요 지도자들이 회의했던 대구 구 교남YMCA 회관과 1893년에 지은 대구기독교역사관(구 대구제일교회)을 만난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이다.
한약재 향 머금은 약전골목
대구기독교역사관 옆에는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자리했다. 2층에서는 사상체질 진단, 무료 한방차 시음, 족욕 체험, 한방비누 만들기 등의 다채로운 한방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의약박물관 골목 일대는 한약재상이 밀집한 약전골목이다. 카페에서도 한방차를 판다. 이 골목에선 늘 한약재를 달이는 냄새가 달달하게 풍겨온다.
약전골목을 빠져나와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 영남대로를 걷는다. 대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약재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담장 벽화가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벽화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 칼국수집이다. 대기하던 손님이 “이 집이 유명한 원조 칼국수집인데요, 빵게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 맛이 기가 막혀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김이 펄펄 솟는 칼국수 찜통을 아쉽게 바라보며 다음 대구 여행을 기약한다.
넓은 종로 긴 진골목
영남대로에서 한 블록 위로 올라가면 열십자 모양의 대로인 종로가 있다. 종로 인근에 부자 동네였던 진골목과 약전골목이 있어 요정, 권번 같은 유흥 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상과 음식점, 전통시장, 백화점 등이 자리한 대형 상권을 이루고 있다. 종로에는 화교의 역사도 공존한다. 근대에 화교들이 정착해 요식업, 포목업 등을 하며 살았다. 이들은 대구 갑부 서병국의 저택을 매입해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했고, 그 앞에 화교 소학교를 세웠다. 근대건축물인 화교협회 건물은 예약(053-255-0561)한 후 관람할 수 있다.
차와 사람이 뒤섞여 지나다니는 종로를 걷다 진골목으로 숨어든다. ‘진’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도 있던 골목이며, 근대에는 재력가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진골목 명소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에 지은 서양식 주택으로 소설 ‘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한다. 노인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미도다방도 이곳 터줏대감이다. 한때 유학자가 많이 방문해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골목이 긴 만큼 옛이야기도 끊이지 않는다.
또다시 김광석다시그리기길
진골목까지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방천시장 인근 김광석골목을 찾아간다. 대구에 오면 왠지 꼭 들러야 할 것 같다. 애잔한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계절, 늦가을엔 더욱더 그렇다. 김광석(1964~1996)이 방천시장 골목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이 골목이 조성됐다. 350m쯤 되는 골목 입구에서 김광석의 기타를 본뜬 대형 조형물이 반긴다. 골목 담벼락에는 한몸 같았던 기타를 품에 안고 하회탈처럼 웃음 짓던 김광석과 그의 노래들이 벽화로 되살아났다.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은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실감난다.
그가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건네는 벽화 앞에 앉아 골목으로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오늘도 그의 노래에 위로받는다.
주변 명소 & 맛집
안지랑 곱창골목
안지랑 동네의 넓고 긴 골목 양옆으로는 곱창집이 늘어서 있다. 식당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상가 규모가 크다. 안지랑에서 곱창을 주문할 때는 1인분, 2인분 단위로 주문하지 않는다. 꼭 한 바가지, 두 바가지로 주문할 것. 한 바가지는 500g이다. 매운 양념을 한 불곱창과 곱창, 막창 등의 메뉴가 있는데 숯불에 한 번 더 구워 불맛을 더한 불곱창이 인기다. 메뉴를 고르기 어려울 땐 반반 주문을 해보자.
동인동 매운찜갈비 골목
대구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여름에 너무 더워서란다. 이열치열로 더위를 이기겠다는 전략 음식인 셈이다. 서문시장에 매운양념어묵이 있다면, 동인동에는 매운찜갈비가 있다. 굵게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새빨간 양념이 갈비를 뒤덮고 있다. 보기보다 맵진 않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조화롭다. 양은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양푼에 찜갈비를 내놓는 것이 특징이다. 낙영찜갈비, 봉산찜갈비, 싱글벙글찜갈비 식당이 유명하다.
별난 먹을거리 천국 서문시장
대구 최대 시장인 서문시장에는 5000여 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대구가 패션 섬유 도시로 이름난 만큼 원단, 한복, 의류 관련 제품을 파는 매장이 많다.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납작만두, 칼제비, 삼겹살자장면, 매운양념어묵 등 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음식을 판다. 납작만두는 당면으로 만든 엄지손톱 크기의 만두소를 얇은 만두피로 감싸 지진 것이다. 매운양념어묵은 맵게 조린 어묵 위에 콩나물을 수북이 올린 것인데 아귀찜과 흡사하다. 자장면에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열 조각을 올려주는 삼겹살자장면이야말로 서문시장의 독보적 아이템이다.
여행 정보 걷기 Tip
• 중구 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걷기 코스 ‘근대로의 여행’은 총 5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본문에 소개한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매주 토요일 10:00, 14:00 두 차례 무료 정기해설을 진행한다. 신청은 대구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 서문시장은 2코스 걷기 전후에 가면 좋다. 걷고 난 뒤 들를 경우 김광석골목을 먼저 둘러보고, 2코스 근대문화골목길을 역순으로 걸으면 된다. 청라언덕에서 서문시장까지는 도보 10분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