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 김진수 선생님의 오랜만의 역작 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사 북오션 대표가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을 함께 잘 아는 분을 알아보다가 화원 선생님에게 제의를 해 3년여의 과정을 거쳐 출판이 되었다. 역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저자 김진수는 현대그룹의 핵심인 현대자동차(주)의 부사장을 지냈으며,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을 집약하고 구현해 ‘현대인’을 육성하는 기관이었던 현대인재개발원 원장을 역임했다. 생전의 정주영 회장과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을 가까이에서 만났던 경험과 두 사람의 마지막 장례를 찾아봤던 인연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현재 ‘한글과 선비 리더십 세계화 포럼’, ‘선비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의 상징적 경영인 고 정 회장과 경박단소(輕薄短小) 산업의 상징적 인물인 마스시타를 서로 비교하면서 더 깊이 이해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걸출한 당대의 두 경영인을 소개하는 책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몰락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을 조명함으로써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두 경영인은 비록 20년 차이를 두고 태어났으나 격변기의 시대에 창의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며 난국을 극복하고 국가 정치, 경제, 사회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애국한 점은 유사했다. 일본은 개국 정책으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가면서 나라의 운명은 틀을 달리했지만 두 기업가의 롤 모델 사카모토 료마와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마스시타의 정책 싱크탱크 창설 및 일본 미래를 위한 투자 마쓰시타 정경숙 개설,
수돗물 경영철학과 250년 사업계획은 시대를 앞서가는 구상이었고 정 회장의 전 국 민에게 의료복지혜택을 주고 북한으로 하여금 금강산을 개방하게 하고 개성공단을 개설함으로써 남북통일을 구상하고 실천했던 일은 먼 훗날 두고두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스시타 회장의 주 5일제 근무, 임금인상계획, 사업본부제도, 정가판매제도 고객제일주의 등 경영기법은 경영의 신으로 추앙될 만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기업가의 공통된 점은 “기업은 사람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영의 신을 읽으면서 필자는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은 느낌을 받았다. 경영의 신 마스시타, 불굴의 인간 정주영, 그리고 동아시아 (선비)리더십이 그것이다. 저자는 두 경영의 대가를 통해 동양사상의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셀프 리더십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서번트 리더십을 완성시킨 것이다.
굳이 옥의 티를 지적하자면 정 회장의 네 번의 가출을 네 번의 도전으로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모든 경영자들이 본받아야 할 한국과 일본의 ‘경영의 신’을 통해 21세기 ‘동양의 새로운 리더십’이 전 세계의 평화를 구가하는 기틀이 되길 기원해본다.
다리(橋)로 유명한 곳은 많다.
건축공법이나 조형미로, 또는 긴 길이로, 휘황한 조명으로, 전통미나 주변의 멋진 풍광으로, 전설 또는 유명한 사연이 있거나 하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 오키나와 북부의 고요한 섬에 바다색이 이쁘고 길고 긴 다리로 알려진 코우리 대교 (古宇利大橋)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내가 보았던 고우리 대교는 1960m의 기다란 길이가 여행자들을 달려보고 싶게 한다.
그런데 코우리지 섬과 본 섬을 잇는 중요 역할도 있었고, 오르막 내리막의 언덕이 있는 약 2Km의 다리여서 시원하고 멋진 풍경을 바라보기에 최상이라는 면도 많이 어필된 것이다. 게다가 근래에는 공효진과 조인성의 드라마에서 멋진 드라이브 씬으로 유명해져서 한국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리 아래 펼쳐진 양쪽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마치 남태평야 어딘가를 연상하게 한다.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서 푸르른 하늘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는 청정한 색감의 여름바다였다.
이제는 다리(橋)가 예전의 강 건너 저 편으로 건너는 수단에서 보고 즐기는 감성의 역할도 포함된 지 오래다. 코우리 대교도 그런 이유로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교량의 미적 감각과 현대인들의 심리를 어루만지는 스피드나 풍광이 빠질 수 없는 중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 남부에 숙소를 두고 북부로 두 시간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남국의 어느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자동차로 달리면 2분 정도의 거리인 코우리 대교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 속 깊은 곳의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듯하다. 야자수 나무가 가로수길이기도 하고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과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햇빛 느낌도 우리의 여름과는 다른 뜨거움이 있다.
다리를 건너 차에서 내려보니 해변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그 바닷가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어딜 가나 셀카놀이도 흔하게 본다. 젊은 청춘들의 발랄한 모습들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덥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간간히 바닷바람이 분다. 아직은 조용한 바닷가, 연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 좋은 곳이다.
근처엔 파인애플이나 곡류, 비치웨어 등을 파는 가게도 있고 푸드트럭엔 먹음직한 시푸드들이 군침 돌게 한다. 약 1000엔 조금 넘는 새우요리가 유명하다고 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근처의 풀빌라나 전망 좋은 숙소에서 며칠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을 힐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거길 나오며 천천히 돌아보고 나오니 길고 긴 다리는 막 시작된 여름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쭉 뻗은 다리 위를 달리며 양쪽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언제든 다시 한번 달려보고 싶은 고우리 대교다.
코우리 섬 古宇利島(고우리도)는?
일본 오키나와현 나키진 무라[今歸仁村]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3.12㎢다
일본 오키나와 섬의 북부, 모토부 반도[本部半島] 동안(東岸)에 있는 운텐항[運天港]에서 연락선으로 약 10분이 소요되는 시오야만 [塩屋灣] 입구에 위치한 섬이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 정도.
아름다운 동반자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조안 우드워드, 폴 뉴먼
제작연도; 1990년
상영시간; 126분
명망 있는 변호사 월터 브리지(폴 뉴먼)는 한여름에도 조끼와 넥타이를 갖춘 정장 차림을 고집하고, 행진곡풍 음악만 들으며, 극장에 가면 잠을 자고, 태풍이 시속 75마일로 불어와 모두 지하실로 대피하는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풀코스 정식을 마치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젊은 여성과 재혼한, 자유분방한 정신과 의사 친구 알렉스 사우어(사이먼 캘로우)는 성적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브리지에게 “정열이라는 단어를 알아?”라고 다그친다. 20년을 근속한 노처녀 여비서는 무심하다고 원망한다.
브리지의 아내 인디아(조안 우드워드)는 남편 의견이 곧 내 의견이라 여기며 남편 그늘 아래서 곱게 살아왔다. 주변 친구들의 진보적 의견과 자식들의 자기주장에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해보지만, 브리지는 “나한테 얘기하면 되오”라며 일축한다.
장녀 루스(카이라 세드윅)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배우가 되겠다며 뉴욕으로 떠난다. 차녀 캐롤린(마가렛 웰시)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배관공 아들과 결혼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툭하면 친정을 찾는다. 아들 더글라스(로버트 숀 레오나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끔찍하게 싫어하며 남몰래 누드집을 본다.
전 세계 중·상류층 가정에서 누구나 겪을 것 같은 이야기 는 에반 S. 코넬l의 소설 (1959)와 (1969)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브리지 부인과 브리지의 입장에서 본 가정생활을 그린, 100여 편의 삽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두 소설을 통합하여 1930년대 말 미국 캔자스 시의 상류 가정사를 안정적으로, 재치 있게 시나리오화한 이는 ‘인도의 찰스 디킨스’로 불리는 루스 프라워 자브발라다. 에피소드 중심의 산만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시키지 않고, 유머 감각과 인물 성격을 잘 살려낸 점이 돋보인다.
는 브리지 부인의 세상 인식, 남편과 자식을 대하는 생각의 변화와 자각을 조심스럽게 그린 온건한 영화다. 일상과 감정 묘사가 섬세해서 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브리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 탓에,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심장에 이상을 느낀 그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아내를 은행 금고로 데려가 보험증과 증권 서류를 설명해준다. 물질적 기반보다는 남편과의 정신적 교류를 원했던 인디아는, 결혼 전 시를 읊어주었던 남편을 상기시키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은행 금고까지 데려오지 않았소”라고 말하는 브리지. “그럼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라고 아내가 말하자 그는 “나는 변호사지 시인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은 싫어요”라고 말하며 이혼하겠다고 앙탈을 부리던 인디아는 남편의 뜨거운 키스에 그만 모처럼의 용기를 잃는다.
자식들은 엄격한 아버지보다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가 의존적인 삶을 살아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든 참견하고 돌봐주려 하자 불편해한다.
남편과 다투고 친정으로 쫓겨온 둘째 딸에게 “여자가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아는 “어머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어요”라며 쏘아붙이는 딸의 말에 상처 입고는 기껏 “핫초콜릿 타줄게”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보이스카우트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 키스를 해드려라”는 단장의 말에 머뭇거리고, 아들로부터 키스를 받지 못한 인디아에게 브리지가 대신 키스를 해준다.
인디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끝내 자살을 택한 친구 그레이스 바론(블리드 대너)이다. 은행가 남편의 앞날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레이스에게 인디아는 “나도 인생이 무언지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잘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그걸 생각해봐”라고 말한다. 그레이스의 죽음에 오열하는 인디아를 브리지는 이렇게 달래준다. “그녀 남편은 무엇이든 해주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소. 그녀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생각이나 했는가?” 자아가 뚜렷한 아내를 둔 보통 남편 바론의 심경을 대변해준 셈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사랑, 존경, 인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브리지. 뭔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는 남편 그늘과 자식들에게로 향한 맹목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디아.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토록 갈망했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알고 결국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자식들.
브리지 가족의 옛날 흑백 기록 필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족사와 이후 이야기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끝나는 는, 이상적인 혈연 공동체를 희구한다. 이상의 구심점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라는 것. 거친 세상을 휘젓고 다녔어도 마음 내키면 언제나 돌아와 쉴 수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품. 그래서 그 아내와 어머니는 세상의 세파를 맞받지 않고 순결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속삭인다. 여권 운운하는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차는 영화이겠지만, 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장수 프로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비난할 거리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같은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눈이 몹시 내리던 날, 인디아는 외출을 위해 차고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차고 문이 자동차 문을 꽉 막아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배기가스가 가득 차 호흡이 곤란해지자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가냘프다. 차창 위로는 눈만 가득 쌓인다. 혼자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아내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듯하다. 브리지가 시간 맞춰 와준 덕분에 인디아는 무사했지만 화가 난 브리지는 그 자동차를 폐기처분시킨다.
불안이 없지 않지만 남편과 아이들 속에서 행복한 노년을 맞이한, 세파를 모르는 귀여운 어머니상을 연기한 조안 우드워드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폴 뉴먼의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는 에서처럼 아까운 배우 인생을 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연기력이 나무랄 데 없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영화 출연이 뜸했기 때문이다. 1958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폴 뉴먼이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미국 출신이지만, 인도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 출신 작가 루스 프라워 자발라와의 협업으로, 300만 달러 내외 제작비로 품격 높은 작품들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도의 거장 사타야지트 레이와 프랑스 고전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품들은 영국과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질적 문화 충돌을 다뤘다. (1965), (1970), (1893)이 이에 속한다.
고전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남다른 열정과 재능도 발휘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원작인 (1970)와 (1984)와 (2000),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소설이 원작인 (1985)과 (1987)와 (1992), 일본계 영국인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1993), 가 그러하다.
예술가를 꿈꾸는 현대 뉴욕 젊은이들 이야기인 (1989), 여성 편력을 중심으로 한 피카소 일대기 (1996),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파리 대사 시절을 그린 (1995), 다이앤 존슨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2003)도 삼인방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새벽 댓바람에 그곳에 닿으려면 밤새도록 달려야 한다. 자정 무렵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그곳에 도착해 우리를 어둠 속에 내려놓았을 때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버스에서 내려 세량지까지 걸어갈 때 코끝에 스치는 새벽 공기는 마치 박하 향기 같았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길을 걷다 보니 어둠이 서서히 풀렸다. 멀리 저수지가 보이자 일행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 탄성은 산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감탄사가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저수지 언덕 위에 수백 명의 사진 애호가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인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기 위해 그들은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우거나 자동차 안에서 이슬 내리는 새벽을 맞았으리라.
사진 인구가 천만이 넘고 바빠진 카메라 시장 이야기가 필자의 귀에까지 들리고 이렇게 직접 눈으로도 확인된다. 필자도 이전엔 사진을 찍기 위해 먼 곳으로 달려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까운 곳으로 잠깐씩 나가는 정도다. 이번엔 우리 지역 사진가들과 함께 하는 출사여서 한동안 못 보았던 분들도 볼 겸 오랜만에 참여했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린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삼각대 세울 자리조차 없어 이리저리 틈새를 찾아 잠깐씩 카메라를 들이밀고 셔터를 누른 뒤 얼른 빠져나오곤 했다. 어떤 사람은 이날 모인 인원이 천 명 가까이는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량지의 모습은 수천 점의 사진에 담겼을 것이다. 실소가 나왔지만 어차피 필자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럼에도 사진의 대중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기록물로 사진은 빠질 수 없는 장르다. 예술작품으로 남지 않아도 개개인들의 감성과 여가활용 측면에서 사진은 순기능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는 건강도 좋아지고 감성도 자극된다. 또 이런 열정들이 차츰 프로페셔널한 개성을 만들고 사진 예술의 경지를 이루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튼 수많은 군중 속에서 세량지의 새벽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벚꽃과 복사꽃이 물안개와 함께 이루어내는 반영이 신비로웠던 날이었다.
세량지(細良池)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69년 준공되었다. 봄이면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산벚꽃과 초록의 나무들이 수면 위에 그대로 투영되는데, 햇살이 비칠 무렵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이국적 풍광을 빚어낸다. 또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산과 어울려 경관이 아름답다. 이 때문에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출사지(出寫地)로 알려져 있다. - 네이버 지식 in
그렇게나 화사하고 황홀하게 아름답던 꽃이 한때 내린 비바람에 떨어져 이제는 마당 한쪽에 예쁜 연분홍의 꽃잎 융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꽃이 지면 연초록에서 진초록 세상으로 변하며 봄은 우리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다.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예술의 전당으로 연극을 보러 갔다.
꽃이 져서 우울한데 연극도 우울한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필자가 대학생일 때도 무대에 올랐고 지금까지 수많은 공연이 펼쳐진 작품이다.
수많은 공연이어도 출연진에 따라 분위기가 달랐을 텐데 이번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어떤 느낌일지 기대하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을 찾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 연극계의 일인자인 ‘아서 밀러’의 작품으로 1949년에 뉴욕드라마 비평가협회 상과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다.
‘아서 밀러’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사람인 ‘마릴린 먼로’와 결혼하고 이혼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 연극은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좌절하고 패배하는 미국의 소시민인 한 세일즈맨을 통해 인간소외 현상과 산업사회의 비정함을 고발하고 있다.
연극이 시작되자 어두운 무대 한편에서 무거운 가방을 든 초로의 남자가 지친 어깨와 발걸음으로 힘없이 집에 돌아오고 있다. 63세의 늙은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다.
그 모습을 보니 벌써 그의 비극적인 인생이 감지되어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세일즈맨으로 성공해 자기 사업체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정적이고 착한 아내 ‘린다’와 사랑하는 두 아들 ‘비프’와 ‘해피’가 있으며 대출을 받기는 했지만 집 한 채도 있다. 대출을 갚아가며 몇십 년이 지나면 그 집은 자기 소유가 될 것이다.
자식들의 미래에 희망을 품은 그의 가정은 항상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로먼’의 이런 꿈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무너져만 간다.
처음 창업했던 사장이 죽고 아들이 사장이 되자 젊은 사장은 점점 실적이 떨어져 가는 ‘로먼’을 탐탁지 않아 한다.
나이가 들어 세일즈하기가 힘들어진 그가 내근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자 젊은 사장은 비정하게 해고해 버린다.
자존심 강한 ‘로먼’은 자신의 실직을 가족에게 말하지 않는다.
희망을 걸었던 아들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엇나가기만 하니 기대를 배신당한 슬픔과 피로, 늙은 육체로 인한 절망감, 잃어버린 인생의 회한은 그를 광기로 몰고 간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좋은 시대였던 과거의 환영과 현재의 힘든 생활이 교차하며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현실과 자식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던 완고한 ‘윌리’는 늘 다투던 큰아들 ‘비프’와 화해하던 날,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줄 생각으로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자살한다.
그의 죽음으로 나온 보험금은 집의 마지막 대출을 갚는 정도의 액수였다.
연극을 보는 동안 느낀 건 가족과의 갈등과 대화 단절이 무서웠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아버지도 자존심만 생각하지 말고 고민을 아내와 자식들과 나누었다면 그런 비극적인 결말은 맞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아버지의 기대에 짓눌렸던 큰아들 ‘비프’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둘째 아들 ‘해피’도 가엾다. 항상 온화하고 순종적이던 아내도 안쓰럽고 무엇보다도 평생 외로운 고집쟁이였던 아버지가 안타깝고 슬프다.
냉혹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모품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려고 발버둥 쳤던 세일즈맨의 가족들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사람 사이에서 사랑과 소통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깊이 느끼게 해 준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감동적이었지만, 필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해서 슬픈 마음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좀 무거웠다.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Paul Cézanne)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아이템인 피규어. 그런데 시니어 대부분은 잘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기자가 3000여 점의 피규어가 전시된 마니아들의 성지 피규어뮤지엄W를 방문하게 된 것은 한 시니어 독자의 제보 덕분이었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감식안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규어뮤지엄W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피규어와 그리고 피규어에 친숙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동원(金東元·54) 피규어뮤지엄W 관장을 만나 피규어 가치에 대해 그리고 캐릭터 문화에 대한 식견을 물어봤다.
몸은 중년, 마음은 초등학생. 어릴 적 좋아했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며 동심에 빠져 사는 오타쿠적 기질의 아재들이 늘고 있다. 구매한 피규어를 개봉하지 않고 박스째로 나란히 차곡차곡 쌓아둘 정도로 피규어를 모으고 즐기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살뜰히 챙긴다.
“평소 그다지 대화가 없던 부자가 함께 와 캐릭터를 매개로 ‘말문’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손주 손잡고 온 시니어가 오히려 키덜트족이 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피규어를 좀 안다는 분들이 이곳 뮤지엄에 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죠.”
피규어 소장의 즐거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고 여기는 김동원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지난 10월 마니아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일에 합류했다.
그에게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 부의 상징인 레어 아이템, 즉 희소성 있는 피규어가 있냐고 짓궂게 물었다.
“어지간한 피규어는 다 구경해봤는데 여기 뮤지엄에 와서는 제가 아는 피규어는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사실 피규어 가격은 크기에 따라,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건담 시리즈를 진열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간혹 사람들이 놀러 와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해요. 장난감 하나만으로 사무실 공간이 위트 있고 재미있게 변한 것 같아 좋아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와 토이를 통한 테마파크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다. 전시공간은 6층의 총 6개 테마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카페가 있는 그랜드홀, 직접 피규어를 구입할 수 있는 마니아 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프라모델, 히어로 액션 피규어, 자동차 다이캐스트 등 3000여 점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를 자랑한다. 영화 촬영에 실제 쓰인 자동차 모형, 에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제로 입었던 가죽 의상, 리샤오룽 타계 40주년 기념 특별 피규어 등 진귀한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감정가 2억원을 호가하는 건담 모형’, ‘순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트 오브 골드’까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보물창고, 누군가에는 꿈과 희망이 되는 곳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예상치 못했던 그 시작처럼 기존 뮤지엄과는 다른 발상과 사고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적 취향을 가진 영화감독 김동원 감독을 관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김동원 관장은 , , 등의 영화들을 감독한 바 있다.
피규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
“주변에서는 의아스럽다는 반응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방향을 튼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규어의 상당수가 미국의 마블, DC코믹스에서 나오는 히어로를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피규어들은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감독으로서 김동원 관장이 피규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수익을 관객으로만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릭터 산업을 병행해 나 처럼 관객 동원에 캐릭터 판매가 플러스돼서 거기서 창출할 수 있는 수익이 있다면 영화 산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영화 관객을 통한 수익보다 몇백 배 더 많은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있고 거기서 또 다른 고부가가치들이 창출되는 상황입니다.”
김 관장은 처음 피규어를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과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그 피규어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이 피규어 시리즈로 나오고, 각 피규어들이 노멀 버전, 파이팅 버전 등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 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캐스팅이 바뀌어가면서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이제 우리도 그런 한국적 캐릭터가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감독과 관장 그리고 나
김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이 문화예술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놀이와 문화를 함께 담은 박물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를 테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줌으로써 박물관의 개념을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문화예술을 종합적으로 보 여주는 박물관인 만큼 전시, 교육뿐만 아니라 캐릭터 발굴과 개발을 넘어 그래픽 노블, 영화 등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뮤지엄 관장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규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걸 다시 만들고 추억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저로선 영화감독의 길을 가면서 피규어라는 좋은 재료를 영화에 접목시켜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피규어가 결합된 한국의 마블 스튜디오를 꿈꾼다
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확장시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한류 관련 콘텐츠 사업의 차원으로까지 넘나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피규어를 단순히 아이들 장난감, 키덜트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큰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와 예능과 애니메이션을 아울러서 기존의 한류 문화처럼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죠. 이제는 예능도 처럼 미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봤던 , , 등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미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심형래 주연의 인기 시리즈물이었던 영화 의 판권을 구매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과거 우리가 가졌던 캐릭터를 현대에 더 발전시켜 만들자는 생각은 왜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못했던 걸까?
“한국적 캐릭터가 미약해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TV가 활성화되자 TV드라마 시리즈로 만화 원작인 히어로 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 성장해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정교하게 만든 히어로 물을 만들고 시리즈로 만든 거죠. 그러면서 히어로 물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작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판권을 가진 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면서 디테일하게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
김 관장이 토로하는 우리나라 캐릭터 제작 현실의 후진성은 놀이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문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를 소중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취급했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현장에 있는 김 관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흔히들 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은 기본적인 얘기들이에요. 저희들의 구상이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 위의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책임감을 갖고 돌파하면 된다는 거죠. 피규어뮤지엄W와도 그런 부분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니어 중에서도 동심이 그립거나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시니어들이 손자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시니어들은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추억의 캐릭터를,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해보고 컬러링해서 완성해보는 ‘피규어아티스트’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라모델, 석고, 클레이 등 다양한 재료로 피규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만화가, 캐릭터디자이너, 큐레이터, 피규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들
히어로 물을 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젊게 늙어가는 비법은 뭐냐고 물어봤다.
“저는 그냥 막 놀 때가 행복했어요(웃음). 작품을 만드는 건 일이죠.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얘들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고… 굳이 재밌었던 시절을 말하라면 그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젊게 늙어가는 비법이요? 비법은 전혀 없고 캐릭터 좋아하고 철없이 살다 보니(웃음) 어렵게 생각 안 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덜 노화되는 비결인 듯해요.”
그는 향후 계획을 중국이나 홍콩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구상하는 데 두고 있다. 당장은 피규어뮤지엄W를 태국에 개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좀 더 진행이 되어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요. 이곳과 같은 규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중요하겠죠. 그 과정 중에 캐릭터 산업으로서 하는 시도들이 영글어져야겠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충무로 감독이라는 명함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느낌을 연거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에 제 인생까지 다 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요. 30대, 40대 때는 선배님들 인터뷰를 보면서 멋있는 말만 하시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게 나이가 드는 것이겠죠.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되는 거죠.”
시간은 철없는 사람도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요? 누가 날 기억해주냐가 중요하겠죠.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동원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가 얼마 전 판권을 구입한 영화 버전을 기획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피규어뮤지엄W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오픈도 계획 중이다. 현재 태국 파타야에 ‘피규어뮤지엄W 파타야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84-9번지)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500원, 어린이 1만2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