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통해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시절, 사회에서 한몫 제대로 하던 시니어들이 뭉쳐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고 했다. 앉아서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대와 이념, 종교를 떠나서 터놓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이 모였다. 열정만큼은 청춘인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축인, 이름하여 ‘한반도평화만들기 1000인 은빛순례단(이하 은빛순례단)’이다.
갈등을 넘어서 마주 보다
“걸으면서 세상과 나누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자.”
이런 의견이 모인 것은 작년 9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있었던 연찬 모임에서였다. 남북에 불어온 훈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이 땅을 물려받을 미래 세대를 위해 뭔가해보자며 의견을 모은 것이 ‘은빛순례단’을 탄생시켰다. 지난 3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성대하게 출발 행사를 치르고 난 뒤 은빛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국립 현충원 참배였다.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은 엄숙한 장소이면서도 정치 대립이 극명한 곳이다. 소위 내 편의 영령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은빛순례단으로 발을 떼면서 난생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민주당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 그가 박정희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하면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이부영 이사장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서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뿐이라 생각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인해 마음속 무엇인가가 씻겨나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 현재의 과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일생 지켜왔던 자기 원칙을 깨기란 쉽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은빛순례단의 운영단장을 맡고 있는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도 현충원 방문이 꽤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임정요인(臨政要人) 묘역에서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역 말고도 신돌석 의병장, 홍범도, 김규식 등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지킨 분들 또한 잠들어 있는 곳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새해 어떤 정당인이 누구의 묘소에 참배했는지 그 사실에만 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부정적 시각으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인정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은빛순례단의 생각이다. 이후 은빛순례단은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4·19 기념탑을 참배하고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등 비교적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 충북 음성, 옥천, 영동 등지에서 걷기 순례와 연찬, 방문 순례를 했다. 5월에는 전남 일대를 돌며 평화의 소중함을 알렸다.
도법 스님과 느리게 함께 걷는다
인천 지역에서 은빛순례단 걷기 모임이 있던 날, 도법 스님과 수지행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으며 개항의 역사를 비롯해 한국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역사 탐방으로 꾸며졌다. 60세 이상을 은빛, 이하를 금빛이라 칭하는 은빛순례단.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신구 세대가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걷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은빛순례단은 3·1운동 100주년인 내년까지 연찬 모임, 방문 순례, 걷기 모임 등을 통해 세상과 경계 없이 나누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이날 모임에는 도법 스님 외에도 이삼열(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손이덕수(디자인 아티스트) 부부, 정세일(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 씨 등 은빛순례를 함께하고자 하는 50여 명이 동참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든 것은 20여 년 전. 지리산 댐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시절이었다. 2004년에는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탁발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깨달음과 가르침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과 마주했다. 수지행은 도법 스님을 도와 일정을 짜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수지행이 일정을 짜주면 도법 스님은 따져 묻지 않고 순례길에 응했다. 매일같이 10km를 걷는 강행군을 계속해온 순례의 달인들이다.
인천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궁금해 도법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길에서만 사시냐?”고 말이다. 도법 스님은 “나는 할 줄 아는 게 걷는 것밖에 없다”며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을 하다 “순례, 즉 걸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순례는 꼭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있는 활동도 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경청 순례’라고 했다.
“우선 각 종교계를 먼저 만나고 있어요. 천주교 주교회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은빛순례단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종교계가 우리 사회 통합에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단체들도 만나볼 생각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마음을 잇고 벽을 허물어 넘어설 것인가가 화두이자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연찬 순례다. 대중을 상대로 평화의 한반도로 만들려면 과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현장을 찾아가는 걷기 순례를 한다. 걷게 되더라도 많이 걷지는 않는다. 시니어가 주축이다 보니 걷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있다고. 매일 8km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으나 좀 더 시니어 세대의 상황에 맞게 계획을 바꿨다.
도대체 왜 걸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걷지 않고 편히 쉬면 그만 아니냐? 걷는 행위를 거스를 수 없는 순례길. 다리도 성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길 위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장수시대인 만큼 환갑을 넘겼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안주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도법 스님은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해 뭔가 할 일이 없는 세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할 게 많은 시대인데 그것을 못 찾고 있는 것이죠.”
은빛순례단 중심에서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이부영 이사장에게서 들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불안이 고조되니 자녀들 입에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부영 이사장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뭘 한다고 설치고는 다녔는데 결국 내 손자, 손녀들한테 전쟁 불안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이구나.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헛살았나? 하는 자괴심이 컸다더군요.”
이부영 이사장은 남은 세월이라도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순례가 시니어에게 더욱 적합한 사회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고 했다.
세대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다
도법 스님 눈에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포착됐다. 은빛순례단이 출범식을 하던 날, 태극기와 함께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한쪽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과 적개심을 표출하던 모습.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이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모든 종교와 이 편과 저 편이 벽을 넘어서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리는 날 후손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개심을 표출했죠. 독립선언을 했던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 반목하는 모습, 이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려면 누군가가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바로 어른들이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든 다 만날 겁니다.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도법 스님은 사회를 좀 더 종합적으로 균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새의 날개 이야기를 했다. “흔히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온몸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아요. 대한민국이라는 새도 온몸으로 날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좌우 갈등만 있었는데 지금은 세대 갈등도 있습니다. 어른과 젊은이들 사이가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죠. 모든 관계가 소중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그런 마음들이 깨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삶의 모든 과정을 평화롭게 다뤄갈 수 있는 실력과 방법, 정화의 체질화, 문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이 돼야 한다. 평화운동은 통일이 돼도 지속돼야 한다. 일상의 평화. 결국 은빛순례단이 미래 세대를 위해 다지고 싶어 하는 기본이란 일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평화가 아닐까.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에 연재되는 김형석 교수님의 ‘100세 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사건이나 흥미로운 주제는 찾아볼 수 없고 문체도 특유의 잔잔한 흐름이지만 읽고 나면 늘 묵직한 여운을 가슴에 남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의 하루하루 삶 자체가 우리가 못 가본 미지의 세계가 아닌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미지의 시간 속에서 경험한 특별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번 주 게재된 글의 소재는 사제간에 일어난 일화였다. 상대는 유독 김 선생님을 따랐던 중앙학교 시절의 제자이다. 만난 시점은 김 선생이 28세이고 제자가 18살 시절이다. 열 살 차이의 사제간은 그 후 70여 년 동안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제자도 충북대 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지 오래였지만 늘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그 제자의 귀가 어두워져 전화도 어려워졌다.
마침 충주에 문상을 가야 한다는 제자의 따님과 동행하여 오랜만에 상봉키로 했다. 제자는 무척 반가워하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상경할 시간이 되어 따님 차가 도착하고 작별하려는데 그 제자는 운전석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더란다. 딸도 몰라본 그 제자는 몇 달 후 별세했다는 연락을 딸로부터 받았단다. 무심코 읽어가다 그 제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90세가 아닌가. 90세 먹은 제자라!
이 글이 주는 충격은 글의 내용에서라기보다 늘 제자는 어리고 싱그러운 존재라는 이미지의 고정관념이 깨진 데서 왔다. 흔히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나이를 먹어도 항상 어린애로 보는 것처럼 필자도 오랜 교사 생활 동안 만났던 제자들을 지금도 보면 피차 같이 늙어감에도 불구하고 늘 애로 보였다. 그런데 90살 먹은 제자라니. 이미지에 혼란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 김 선생에겐 90살 먹은 제자도 어려 보였겠지?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과거에 없던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삶의 공식들이 무참히 깨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환갑잔치가 없어진 지 오래고 주변에 자식에게 기대 살아가는 노인을 찾아볼 수 없다. 새파란 청년 같은 외모인데 정년으로 퇴임했다는 사람도 주위에 많다. 사실 어쩌면 일차 직장생활보다 더 긴 시간을 새로운 일과 함께 보낼지도 모른다.
필자도 교사생활을 접은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동네 복지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 70대부터 80대 초반의 분들이다. 아직 90세 넘은 분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제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80세 되신 할머니 학생이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 없다. 요즈음 영어를 잘하는 손주들과 한마디라도 섞어보려는 야무진 요량으로 오늘도 어려운 발음을 열심히 따라 하신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의 제자가 90세가 넘었다는데 놀라움과 이미지의 혼란을 느꼈는데 나의 80세 제자는 귀엽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사제지간이라는 특별한 관계의 오묘한 특성일 것이다. 남에게 어려 보이고 싶다면 무조건 그에게 배우려 들면 될 듯도 하다. 조선 시대부터 영정 신위에 쓰는 최고의 헌사가 ‘학생’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주름진 예쁜 우리 학생들이 빨리 보고 싶다.
새봄잔치는 시작됐다. 일흔 잔치다. 69세로 10년을 그냥 살고 싶다. 돌이켜보니 10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학생시절에 읽은 어느 여류작가의 ‘29세 10년’이라는 글귀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25세부터 노숙미를 자랑하려고 29세 행세하였으나, 막상 그 때가 되니 불효하는 노처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나이가 겁나서 35세까지 29세로 10년을 살았다’는 줄거리다.
샛별보고 출근하고 초승달을 벗 삼아 집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았다. 날마다 삶은 희망이 있었다. 사회은퇴 후에 생활이 안락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장년생활의 문제점을 제일 많이 안고 있다. 아들세대 청년들과는 취업전선에서 맞서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사회에서 조기은퇴가 시작되지만, 국민연금 지급은 오히려 늦춰지는 어려움에 처했다. 평균수명은 매년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지공거사 65세, 사회에서 은퇴한 이때부터 생각이 깊어졌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다.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친구가 있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더욱 좋다. 희망사항은 많은데 해결방법이 쉽지 않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사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머리 싸매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몇 해 전까지 없던 나이제한이 보편화 되었다. 고령자는 수강이 제한되고 젊은이 위주의 취업과 창업이 성행하고 있다.
지하철을 타면 어느새 경로석 앞에서 서성인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젊은 세대에 대한 배려라는 이야기에 공감한다. 곤란하지 않게 알아서 처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가고 행동은 굼떠졌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증표가 되었다. 사회은퇴 전에는 현업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회은퇴 후에는 자원봉사와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보람차게 살고 있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면서 즐겁게 자원 봉사하는 분들도 만났다. 그들에게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평생사회교육에 참여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제는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사회에 되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사회교육 참여는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사회평생교육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얼마 전까지는 취미·여가 활용 등 장년의 사회은퇴 후 생활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어느 틈에 일자리 창출·창업 위주로 청장년 교육처럼 교육과정이 변하고 있다. 장년도 새 삶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사회은퇴가 엊그제인데 눈 깜작 할 사이에 5년이 지나 70대로 훅 뛰어 넘었다. 멈추고 싶은 지점이다. 관악문화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하고 신문원고 작성을 하면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지낸다.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손주 돌보기를 한다. 나이 먹기를 멈추고 젊은 오빠인양 10년을 살아 갈 터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새 삶을 떳떳이 맞이할 것이다. 안락한 은퇴생활만 기대하기는 너무 젊었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나태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일과표를 작성하고 꾸준히 실행하여야 한다. 휴일 이른 아침, 몇 번이나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친구들과 산행하려고 집을 나섰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비가 올지 걱정하지말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눈이 오면 방한복 하나 더 입고 아침부터 집을 나서자. 망설이면 하루를 헛되게 보내고 만다. 은퇴 전보다 더 엄격한 일정관리를 하여야 한다.
69세 10년! 자식을 기르면서 한 세대를 다시 살고, 환갑동갑 손주를 돌보면서 또 한 세대를 다시 산다. 절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노래 교실에 갈 때마다 앞자리의 K 회장은 늘 필자의 커피까지 한잔 사 온다. 백화점에서 파는 커피이므로 한잔에 5천 원 정도 한다. 혼자 마시기는 미안하니까 사는 김에 한 잔 더 사오는 모양이다. 양도 많아서 다 마시기에는 벅차지만, 성의를 봐서 다 마신다. 사실 저녁 시간에 마시는 커피는 자칫 불면증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오지 말라고 하기도 어렵다.
노래 교실에 결석하는 날은 그래서 미리 K 회장에게 결석을 알린다. 한번은 깜빡 잊고 결석한다는 문자를 못 보냈다. K 회장은 커피 두 잔을 사 왔다가 혼자 다 마셨고 카페인 때문에 그날 밤 잠을 설쳤다고 했다.
사람들은 K회장이 커피 두 잔을 사오면 한잔은 자기가 마시고 다른 한잔은 노래 교실 강사가 우선일 것 같은데 필자에게 주는 이유를 물었다.
강사에게 커피를 주면 아부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회원 중 다른 여자에게 주면 둘의 관계를 곱지 않게 본다는 것이었다. 30명 정원에 남자라고는 우리 둘 뿐이니 필자가 가장 무난하다는 해명이었다.
자리 배치도 그랬다. K회장은 맨 앞자리에 앉고 필자는 그 다음 줄에 혼자 앉는다. 각각 2사람씩 앉는 자리이다 보니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으면 곧바로 한 마디 씩 한다. 뒷자리가 모두 차서 앉을 자리라고는 필자 옆 자리와 K 회장 옆자리 밖에 없는 경우에는 난감해 한다. 그럴 때는 노래 강사가 와서 앉으라고 할 때까지 에 서 있는다.
회식을 갈 때도 필자를 꼭 옆 자리에 앉혔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흑심이 있거나 여자들 관심 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도 어느 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다른 여자들 공격이 곧바로 들어 왔다. 그러나 필자가 같이 있으면 그냥 무난한 회식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꼭 필요한 들러리였다.
필자가 오디션을 통해 합창단 활동을 할 때도 그랬다. 여자 회원 39명에 남자라고는 필자 혼자였다. 총무가 간식으로 빵을 사오면 누군가가 간식을 먹으라며 빵과 주스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곱지 않은 시선과 둘 사이가 수상하다며 쫑코가 들어 왔다. 그러므로 모두가 보고 있으면서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었다.
여자들 속에 둘러싸인 남자들은 처세를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둘 사이를 갈라놓을 여러 가지 얘기를 만들어낸다. 나중에는 구설을 넘어 퇴출 대상이 된다.
나이가 대부분 환갑을 넘어 70을 향해 가는 나이인데도 이런 분위기는 고쳐지지 않는다. 문화화계에는 남자가 귀한 모양이다. 노래 교실에 남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것인가보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돈암동과 이후 이사하여 오랫동안 살고 있는 정릉을 지나는 길로 아리랑 고개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2차선 도로로 좁은 길이었는데 4차선 넓은 길로 확장되면서 아주 깔끔하고 시원한 길이 되었다.
4차선으로 넓히면서부터 심은 벚꽃나무가 아직은 그리 크지 않아서 꽃잎이 풍성하진 않지만 봄이 되면 돈암동 초입부터 1.5킬로미터에 이르는 아리랑 고개에 벚꽃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나다니며 본 벚꽃축제는 좀 안타까울 만큼 꽃잎이 빈약해서 웃음이 났지만, 시간이 갈 수록 든든하고 멋진 벚꽃나무가 되어 언젠가는 어느 곳의 벚꽃보다 풍성한 예쁜 꽃으로 명실공히 아리랑 고개 벚꽃축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리랑 고개 중간쯤에는 예전부터 환갑잔치하는 장소로 유명한 신흥사라는 곳도 있었지만 지금은 개발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필자는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그 근처에 있는 보현사라는 절 옆의 독서실에 자주 공부하러 다니기도 해서 친밀하게 느껴지는 동네이다.
아리랑고개라는 명칭을 갖게 된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는데 1935년 일제 강점기 때 그곳에 있던 고급요정의 이름으로 민요 아리랑의 곡명을 사용했다는 것과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영화인 아리랑을 촬영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민족영화인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 선생의 항일정신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일제 강점기에 국가를 찾겠다는 구국일념으로 보아 아리랑고개의 유래로 더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영화 아리랑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감옥생활을 한 나운규 선생이 25세 때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아 만들었으며 민족의 아픔과 굽히지 않는 항일정신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26년 10월에 종로의 단성사에서 흑백 무성영화로 개봉되었으며 구성진 변사의 설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는데 영화를 통해서 민족혼을 불살랐던 아리랑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는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내용 중에서 오빠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며 부르는 아리랑이 하이라이트라 하는데 바로 그 장면을 촬영한 장소가 이 아리랑 고개라 한다.
영화 아리랑의 극적인 장면을 촬영한 배경인 이곳을 1997년 영화의 거리로 지정하였다.
그 거리를 걸으면 인도 바닥에 설치된 동판을 볼 수 있다. 10미터 간격으로 박혀있는 네모난 동판은 세어보진 않았어도 166개나 된다는데 헐리우드처럼 손도장이나 발 도장 같은 게 아니라 방화 (국산영화)와 외화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어느 것은 영화배우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밟다가 깜짝 놀라며 좀 미안해진 경험도 있으며 ‘서편제’나 ‘미워도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한국영화 포스터와 ‘벤허’ ‘죠스‘같은 외국영화의 포스터가 동판으로 박혀있다.
테마공원으로 ‘나운규 소공원’도 있고 아리랑 고개 정점에는 아리랑 시네마극장과 정보도서관이 있어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거리로 동네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인기 좋은 거리가 되었다.
스카이웨이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한 아리랑 고개는 조금 심하게 경사가 진 도로이다.
필자는 기어를 조작해야하는 수동 차를 운전하고 있어서 경사진 그곳의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면 뒤로 미끄러질까봐 항상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그래도 수십 년을 지나다닌 아리랑 고개 이거리가 필자에겐 친숙하기도 하고 역사적인 배경도 있는 곳이라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동네이다.
모르고 지나다닐 때보다 거리의 명칭에 대한 유래를 알고 나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앞으로 아리랑 고개가 봄이면 벚꽃도 더욱 탐스럽게 피어나고 사계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몇 해 전, 세계태권도연맹(ITF) 부총재를 비즈니스차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인데 처음엔 필자보다 몇 살 연하로 봤다. 얼굴이 맑고 귀티가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살이나 연상이었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술, 담배는 물론 고기와 우유도 안 먹고 생선, 조개류 등 해산물까지 전혀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다. 살면서 식도락이 얼마나 중요한데 동안을 위해 그걸 다 포기한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채식주의자로 살려면 애로 사항이 많다. 까탈스럽다고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단체로 모이는 회식자리는 고기 종류와 술이 빠지질 수 없다. 그러면 뭘 먹는다는 것인가.
주변에서 고지혈증, 뇌경색 등 지병으로 술은 물론 고기를 못 먹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빈대떡도 기름으로 튀겼다며 못 먹는다. 메뉴를 한참 고르더니 결국 두부 김치 주문해놓고 두부만 먹고 필자는 김치와 돼지고기를 먹는다.
대학로의 한 술집 사장도 동안이었다. 피부가 여자 같았다. 나이를 물어 보니 필자보다 한 살 어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바르는 화장품을 같이 써온 게 비결이라고 했다. 지금도 여자 화장품을 열심히 바른단다. 남자 화장품은 종류가 몇 개 안 되어 미흡하다는 것이다.
MBC 탤런트들의 연극 시연회에 간 적이 있다, 연극이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다. 여자 탤런트들은 나이가 들어도 분장을 하면 어느 정도 먹히는데 남자 탤런트들은 그게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남자같이 보여야 좋다. 무엇을 위한 동안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제 나이로 안 보이면 대우를 못 받는다. 대학로 술집 사장도 올해부터 지공선사인데 동안이라서 전철 경로석에 앉았다가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필자는 경로석에 앉아도 그만큼 나이 들어 보이니 느긋하다.
10년 전만 해도 동안인 후배들이 많았지만 환갑이 가까워 오니 탈모도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제 나이가 보인다. 역시 탈모가 가장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여자들도 나이 들면 어느 정도는 나이가 들어 보여야 한다. 나이에 비해 너무 젊어 보이면 징그럽다. TV에서 한창 젊을 때 우리 세대와 나이가 비슷한 가수들이 나왔는데 성형수술로 너무 젊어 보이는 경우가 그렇다. 미니스커트까지 입고 나오면 무섭다.
반면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것도 문제다. 동창생들을 만나면 그런 사람이 간혹 있다. 같이 다니면 상대적으로 젊어 보여 그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외모를 가꿔야 한다. 탈모가 심하면 모자를 쓰는 것이 좋다. 경제적인 능력이 된다면 가발도 용기 내어 써보면 좋을 듯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가수 남궁옥분 님이 선배 가수 송창식 님에게 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자연인 송창식!
참으로 맑고 하얀 웃음이 아름다운 당신!
소년처럼 순수하고 맑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당신!
30년을 넘게 가까이서 바라보며 지내오는 동안
일관성 있었던 당신의 행동들로 미루어볼 때
그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독특하고 기이한 그 모습들도
당신 그 자체임을 인정합니다.
그러하기에 존경하는 마음을 조금도 늦춰본 적 없는 열혈팬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당신은 마치 인간계와 신선계를 넘나드는 도인처럼
눈빛으로 일단 압도하시며 마음속을 훤히 읽고 계신 것 같아서
늘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했기에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심안(心眼)을 통해 제 안의 크고 작은 때 묻은 마음들을
당신께 들키는 것도 행복입니다.
언제나 고요한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는 큰스님의 법문처럼
울림이 있었고 사랑이 쌓여 천사의 경지에 계신 수도자들의 무언의 가르침 같은 걸 경험하게 하시며 어떠한 조바심도 흐트러짐도 없이 눈을 맞춰주시고 최선을 다해 얘기를 들어주시니 당신을 만나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렇게 평화로운 당신 곁에서 얼마나 편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노래!
당신의 노래는 근본부터 다른 곳에서 오는 듯싶습니다.
깊은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붉은 목소리는
만년설을 녹이고도 남습니다.
당신의 몸 가장 깊은 곳에서 공명이 되어 터져나오는 소리는
세상 어떤 악기에도 비유할 수 없이 언제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 주옥같은 노래들을 기타 하나에 실어 엄청난 가창력으로 토해내는 당신!
그 노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입니다.
어찌 그리 많은 장르의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어찌 그리 많은 노래들을 소화해낼 수 있는 건지,
자신이 만들고 불러서 알려진 노래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가수는
당신이 유일하기에 당신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반백 년을 그리 지켜주신 그러한 당신이기에
천년이 지나도 대한민국 가요사에 전설로 남을 것입니다.
왜 밤에만 당신이 깨어 있어야 하는지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밝은 시간 태양 아래서 당신을 만났던 게 언제였던가?
1980년대 중반쯤이었으니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밤에만 당신이 다니는 까닭은 나름대로의 수행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까다로울 때도 있는 당신!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게 금전이 아니라는 것쯤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신께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아는 사람들 중에 제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특별한 당신의 옷들만 봐도 당신의 정신세계를 짐작할 수 있고
얼마나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 함인지 알 수 있지요.
당신의 독특하고 신비한 삶이 빛나는 이유는
당신의 영혼이 맑고 순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은 지금을 살면서도 지난 몇 생(生)과 앞으로 올 세상을 모두 알며 가는 사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1970년대에 만든 노래들이 3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혹시 당신이 지구인보다 훨씬 앞선
어느 행성의 외계인(?)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당신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히트곡들 때문에 더러는 배가 아프기도 하지만
당신의 노래가 제 무대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하고 있는 한
당신을 미워하기는 힘들 듯싶습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당신 노래들만 꺼내 불러도 며칠 밤은 새워야겠지요?
당신이 씨 뿌리고 다져놓은 옥토에서 당신의 노래를 지켜내고 부르며 자라온 많은 사람들!
당신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시작하게 된 또 다른 무리들!
그 속에서 제가 당신을 향해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게
가수로 살면서 누리는 엄청난 특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래오래 당신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말 오래오래 당신의 영혼을 깨우는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환갑날!
지인들과 여럿이 달려간 미사리 카페!
다시 한 살 되셨다며 기뻐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직도 미사리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겐 축복이지요.
한편으론 귀한 당신이어야 하는데
누구나 달려가서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현실이 싫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지 않으시는 당신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함께 옵니다.
모두의 청춘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원한 친구 송창식!
그러한 당신을 제가 감히 사랑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당신이기에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세배 받을 나이가 되었지만
이번 설날 당신을 찾아뵙고 응석부리고 싶습니다.
>>가수 남궁옥분
1979년 ‘알게 될 거야’, ‘보고픈 내 친구’를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1981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가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1982년, 1983년 최고 인기 가요상을 수상했다. 네이버밴드 ‘남궁옥분과 수다’, ‘남궁옥분 가수다’를 통해 그녀의 수다를 들을 수 있다.
그냥 개띠가 아니다. ‘58년’ 개띠라야 진짜다. 개띠 앞에 ‘58년’이 붙으면 마치 대단한 인증 마크를 받고 태어난 것만 같다. 전 세대를 아울러 태어나면서부터 기 쎈(?) 아이콘으로 살아가고 있는 58년 개띠가 올해 벌써 환갑을 맞이했다.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 사회 속 이야깃거리이자 사회 현상 지표가 됐다. 이들의 특별했던 인생 이야기와 지금의 모습을 담기 위해 58년 개띠 모임 현장에 찾아가 봤다.
58년 개띠 형님들 문 좀 열어주세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58년 개띠 모임은 많아 보였지만 저마다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완벽 수비. 58년 개띠가 아니면 접근 불가였다. 빗장을 열어젖히는 게 쉽지 않았다. 모임 운영자에게 쪽지라도 보내봤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불허(不許). 그래도 기다림 끝에 낙이 있다고 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에서 연락이 왔다. 네이버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국 58개띠방’이다. 작년 1월 개설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들어 밴드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채팅방도 6개로 나눠져 300명 넘는 개띠 남녀가 온종일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게 바로 개판(?). 동갑 친구들은 이름을 트는 순간 반말을 하고 다짜고짜 이름을 부른다. 처음 들어온 회원이 당황하는 시간은 5분이면 충분하다고 모임의 리더를 맡고 있는 박지양 씨가 말했다.
“이 방은 말 그대로 전국 모임방입니다. 각지의 58년 개띠들이 모여 있어요.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당연히 주부도 있습니다. 전국 58개띠 친구들의 친목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화도 하고 서로 알고 지내자는 개념이죠.”
전국 58개띠방의 공개창 대화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새로운 친구들이 오면 반기고 마음속 깊이 잘 왔다며 안아주는 모습이 정답다. 대화창에서 자주 보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실제로 만나 인사를 해도 금방 알아보고 쉽게 말을 놓는다고 한다. 옛 친구를 만난 느낌처럼 말이다.
2017년 12월 15일, 대망의 수도권 송년모임
마침 얘기를 나누고 정식으로 인터넷 밴드 모임에 들어가 보니 수도권에서 송년 번개모임을 갖는다는 소식! 그럼 어디 한번 급습해볼까? 염치불구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기분 좋게 반겨주신다. 서울·경기 지역에서 스무 명가량의 58개띠 친구들이 모여 친목을 다질 예정이라고 했다. 잠시 잠깐 느낀 인터넷 속 활기찬 느낌이 실제 얼굴을 봤을 때도 똑같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약속 당일, 시간에 맞춰 사당동의 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연말 송년모임이 많은 기간인 만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띠 모임과의 만남. 벌써부터 고기를 굽고 술을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다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까? 한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날 첫 만남이라고 인천에 사는 최선희 씨가 귀띔해준다.
“친구 영림이가 우리 가게에 와서 재밌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여기 들어온 지 한 달 보름밖에 안 됐는데 만난 지 1년도 더 된 느낌이에요. 58년 개띠들은 이런게 좋아요.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인 줄 몰랐어요.”
이때 전라도 지역 총무를 맡고 있는 김미정 씨가 등장.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미정 씨는 수도권 모임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완주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유자차를 가지고 왔다.
“예전에 수도권 친구들이 호남 지역 모임에 참석했어요. 서로 이렇게 오고가는 거죠. 58년 개띠라는 것 하나만으로 부담이 없는 거 같아요. 진짜 친구를 만나는 거죠. 그리고 2018년은 우리 58년 개띠들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개띠 해이고, 또 우리 모두 환갑을 맞이하고요, 삼재도 나가는 삼재라고 하더라고요. 58년 개띠들 모두 행복한 한 해가 될 것 같아 좋습니다.”
‘베이비부머’, ‘무시험제도’
어찌됐든 ‘58년 개띠’. 무슨 때만 되면 세상의 화젯거리다. 그 어떤 연도에 태어난 이들이 환갑이 됐다고 집중조명 받은 적이 있던가? 자신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왜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지 신성애 씨에게 물었다.
“(한국)전쟁 끝나고 생활이 좀 안정될 때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은 것 같아요. 1958년에 나라 재건하느라고 바쁘게 살면서도 어르신들이 집중적으로요.(웃음)”
무엇보다도 58년 개띠 하면 나오는 얘기가 중·고등학교 무시험 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곽기복 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입학할 때 무시험 제도로 바뀌었어요. 그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이어서 공형복 씨가 할 말 많은 듯 끼어들었다.
“우리가 어떤 세대냐 하면 한문을 배웠다가 안 배웠다가 했었어요. 박지만이 한문 싫다고 해서 한문이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중학교도 무시험으로 갔어요. 고등학교도 평준화가 됐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가고 싶었는데 발이 묶였어요. 미쳐버리는 거죠. 우리 58년 개띠만큼 웃긴 세상을 산 세대도 없을 것입니다. 피해자죠. 내 인생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과거의 경쟁 상대, 지금은 얼싸안고 절친
역사적으로 척박했던 시절, 하필이면 같은 해에 많이도 태어나 피곤하고 힘든 삶을 함께 이겨낸 58년 개띠 사람들. 안양에서 온 박태관 씨는 나이가 들어 나름의 여유가 생겼기에 이렇게라도 안부를 묻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58년 개띠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입니다.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살았어요. 자식들 다 키우고 여유가 생기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온 거죠.”
모임에서 만나는 58년 개띠 친구들은 지역, 사회, 지위를 초월해 서로 교감하고 만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도 같은 시대를 산 너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처음 만남에도 불신 따위는 접어놓는단다. 뜨겁게 살아온 58년 개띠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각종 포털 사이트에 ‘58’만 쳐도 줄줄이 나오는 58년 개띠들의 모임들. 왜 그들이 모이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56년 개띠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60년 만에 돌아온 무술년, 환갑을 맞이한 ‘58개띠’ 이재무(李載武·60) 시인. 음악다방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듣고 군대에 다녀온 뒤 청년 이재무가 만난 시는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 존재였다. 자신의 20대를 무모한 소비이자 아름다운 열정의 시간이라 말하는 그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얼른 노인이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순에 이른 그는 시를 통해 자아를 비춰보고, 지난날을 낭비케 했던 집착과 울컥으로부터의 도피를 바라고 있다.
햇수 나이로 60세에 펴낸 이재무의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에는 나이 듦에 대한 시인의 단상을 드러낸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시인의 회한은 시 ‘나는 벌써’에 잘 드러난다.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강렬한 시의 마지막 구절, 한탄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젊은 시절의 로망과 희망을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자조적인 시인데 공감하는 이가 많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유보하거나 죽이는 삶을 살아왔어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도 참고 다음에 더 여유가 생기면 먹자, 어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지금은 갈 형편이 아니니 나중에 가자. 내일, 다음에, 미래에… 그렇게 자꾸 현재의 삶을 미뤄왔죠. 지금 보면 오늘 행복한 사람이 그냥 행복한 사람인 거예요. 내일은 또 내일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되고요. 행복한 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가 되는 건데,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 삶은 결국 행복하지 않은데 말이죠.”
쌀 한 포대 비우듯 나이를 먹다
시인답게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다채로운 비유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인생을 두꺼운 책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기보다는 매일 그날의 행복을 만끽하며 삶의 페이지를 늘려가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충실히 더해왔음에도 쪽수(나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책의 두께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그다.
“쌀 한 포대 사면 ‘이걸 언제 다 먹지?’ 하잖아요. 의식하지 않고 먹다 보면 어느새 동이 나죠. 나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새삼 인식하고 나면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구나’ 하니까요. 하루하루는 마디게 가지만 한 달, 1년은 뭉텅뭉텅 빠지는 느낌이 들어요. 숫자를 의식하고 사는 편이 아닌데 올해가 환갑이라고 하니 나이가 실감이 나네요.”
나이 듦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가만 보면 그에게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점이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
“계단이 내 무릎을 연주하는 기분이에요. 관절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몸의 이음새가 녹슬어 계단을 오르면 소리가 나죠. 몸무게는 자꾸 늘고, 숙면을 하기도 힘들고, 새벽잠도 줄었어요. 집에서 주도권을 빼앗겨 요새는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데, 아내 목소리는 커지고 내 목소리는 작아지고. 아, 이게 늙는 건가 싶어요.”
이재무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불현듯 ‘늙는다는 건 슬픈 건가?’라는 물음이 생겨났다. 질문을 하면서도 ‘슬프지 않다’라는 답변을 슬쩍 기대했는데,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솔직한 심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요. 그게 슬프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고 초조하긴 해요. 내가 언제까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크게 이룬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는구나. 요즘은 내 아들이 부러울 정도예요. 돈이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여유롭게 즐기며 잘 살더라고요.”
건강하고 순수한 사유를 위한 움직임
그는 에세이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에 50대 이후 집착과 울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음공부에 전력을 다하리라는 글을 썼다. 60대를 사는 현재, 여전히 내면의 적들과 완벽히 헤어지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집착과 울컥이 내 안에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말과 글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의식하면서 살기 때문에 조금은 진일보했겠지만, 죽을 때까지 과제로 남을 것 같아요.”
쉽지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걷기를 통해 내면을 다스리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요히 명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묻자 오히려 몸을 가혹하게 해야 정신이 순수해진다고 대답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은 부패합니다. 몸이 한가할 때 충동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이 들어와 타락하기 쉽거든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호미가 밭에서 놀아야 하는데 허청에 오래 걸려 있으면 녹슬어요. 선박도 항해를 해야 아름답지 항구에만 묶여 있으면 밑창이 썩고 구멍이 나죠. 또 가만히 있는다고 고요한 게 아니에요. 묵언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속은 시끄러울 수 있잖아요. 고요는 내면까지 침묵하는 겁니다. 그게 꼭 몸의 정지를 뜻하지는 않아요. 걸으면서도 충분히 고요할 수 있죠. 방 안에 웅크리고 얻는 사유보다 움직이며 얻는 사유가 더 건강하게 빛난다고 생각해요.”
욕망하는 노인이 아름답다
이재무 시인은 무던히 걸으며 울컥과 집착을 비워내면서도 욕망의 고갈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자는 나이 들수록 욕망은 추한 것이라 폄하하지만 그는 욕망을 갖고 사는 노인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격려한다.
“나무가 늙었다고 피우는 꽃도 나이 든 건 아니잖아요. 고목이 만드는 그늘은 언제나 풋풋하고 피우는 꽃도 늘 싱싱해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인간에게 꽃은 욕망이라 생각해요. 주름 많은 몸이라고 해서 왜 욕망이 없겠어요. 태풍에 나무가 쓰러져도 살아 있는 한은 새 이파리를 피우죠. 사람도 죽을 때까지 욕망을 내려놓기 힘들어요. 욕망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욕망이 긍정적일 때 삶이 발전되고, 일상의 에너지로 작용하죠. 노인의 욕망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해요.”
때때로 자신의 세대를 향해 ‘노인’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아직은 입에 붙지 않는 듯 어색함이 묻어났다. 이른바 100세 시대, 예순에 노인이라는 말은 이르게 느껴지는 요즘 세상. 그는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지나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58개띠 세대가 경계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58개띠 친구들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상징적으로 우리를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모두 들어 있는 세대라 말하고 싶어요.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기차를 타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KTX를 타고 있잖아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는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숨차도록 열심히 달려왔어요.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끼인 세대로 지내는 게 안타깝죠. 오늘도 각자 현장에서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가교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을 58개띠의 무궁한 삶을 기원합니다. 2018년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