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산으로 들로 봄꽃 나들이도 좋지만, 풍성하게 마련된 전시도 즐길 겸 갤러리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올 한 해 눈여겨봐야 할 5가지 미술전시와 더불어 연간 일정을 함께 정리해봤다.
◇ 빔 델보예 개인전
장소 갤러리현대 일정 2월 27일~4월 8일
신개념주의(neo-conceptual) 예술작품들로 주목받는 벨기에 작가 빔 델보예의 국내 첫 전시다. 돼지 몸에 문신을 새긴 작품들을 선보이며 ‘돼지 문신’ 작가로도 불리는 그는 드로잉, 조각, 사진 등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며 독특한 소재로 구현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문양의 미학적 요소를 사물에 응용한 작품들과 일반적인 형태와 개념의 맥락을 비트는 작품 30여 점을 보여준다. 고딕 양식으로 레이저 커팅한 스틸, 손으로 조각한 타이어, 살라미 햄으로 구성한 대리석 문양의 바닥 사진 등 작가만의 유머러스한 작품세계와 전통적 요소가 맞물리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빔 델보예 (Wim Delvoye, 1965~)
박제된 돼지의 몸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으며 경악과 흥미로움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세계로 유명해진 빔 델보예는 스위스 팅겔리 미술관(2017),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무담(2016),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2012), 로댕 박물관(2012), 베니스 구겐하임 컬렉션(2009), 리옹 현대 미술관(2003), 파리 퐁피두 센터(2000)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시드니비엔날레, 상해비엔날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독창적인 예술관을 펼치고 있다.
◇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장소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일정 5월 6일까지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계의 선두주자이자 1970년대 대표 여성 작가인 정강자의 회고전이다. 정 작가는 개인전을 위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지난해 7월 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이번 전시는 그의 유고전이자 최초의 회고전이 됐다. 올해 1월 31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월 25일까지)과 천안(5월 6일까지)에서 동시에 개최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을 기리고 그의 50여 년 화업을 미술사적, 사회적으로 균형 있게 재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작가의 최근작과 더불어 아카이브 자료를 배치해 자신의 삶을 여성상과 자연물,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한 작품들을 아울러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정강자 (鄭江子, 1942~2017)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후 ‘키스미’(1967)처럼 파격적인 조형작업을 비롯해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1970)과 같은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1960~70년대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도전이 응집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신전(新展)’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여러 경계와 틀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작업에 대한 선정적인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 니키 드 생팔 개인전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일정 6월 30일~9월 25일
프랑스 여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작품 12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특별 전시다. 프랑스 파리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공공미술로 잘 알려진 그의 대담성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입체조형물 및 회화, 판화 등으로 구성된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 그의 후기 입체작품들을 폭넓게 전시할 계획이다.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여성지 ‘보그’와 ‘엘르’, 사진 주간지 ‘라이프’의 사진 모델로도 등장했을 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니키 드 생팔은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슈팅 페인팅’(1961) 등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며 여성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많은 편이다. 그가 만들어낸 뚱뚱한 여성 조각인 ‘니나’ 시리즈를 비롯해 여성의 몸을 과장해 표현한 작품에는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고발 의식이 담겨 있다.
◇ 윤석남 개인전
장소 학고재갤러리 일정 9월 예정
2013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I’m Not a Pine Tree)’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윤석남의 개인전이다. 홍콩 아트바젤(세계적인 미술품 아트페어) VIP 책자 전면에 소개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큐레이터들의 극찬을 받은 설치미술 ‘핑크룸’(1998)이 갤러리 한 층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기법을 통해 제작한 그의 신작 발표가 예고돼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윤석남 (尹錫男, 1939~)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1919)의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윤백남의 셋째 딸로 태어나 해방 이전까지 만주에서 살았다. 1954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6남매를 홀로 키우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줄곧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고 있다. 40대에 늦깎이 화가로 데뷔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1995), ‘부엌’(1996), ‘허난설헌’(2005)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 마르셀 뒤샹 전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일정 2018년 12월~2019년 4월 예정
국내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의 전시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주요 작품 및 아카이브는 물론, 마르셀 뒤샹을 소재로 한 사진, 드로잉,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의 관련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소개한다. 특히 변기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뒤샹의 대표작 ‘샘’(1917)을 이번 국내 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이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 화가 자크 비용(Jacques Villon, 1875~1963)과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1876~1918)의 동생으로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입체파의 균열된 형태, 사진과 영화의 스톱 모션 등 자연의 시공간에 관한 지배적 관념을 뒤엎는 아방가르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2’(1912)는 당시 예술평론가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을 만큼 독특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여성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 ‘로즈 세라비’(1921),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1923) 등 파격적인 예술세계를 보였으며,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 2018 상반기 전시 일정
3월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월 8일~7월 1일
'예술가 (없는) 초상'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3월 20일~5월 20일
김용익 개인전 ‘Endless Drawing’ 국제갤러리 3월 20일~4월 22일
'한국서예사특별전: 명재 윤증'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3월 29일~5월 20일
4월 이반 나바로 개인전 'THE MOON IN THE WATER’ 갤러리현대 4월 19일~5월 27일
5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5월 3일~10월 14일
'강요배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5~6월 예정
6월 육근병 개인전 ‘생존은 역사다’(가제) 아트선재센터 6월 15일~8월 5일
◇ 2018 하반기 전시 일정
7월 '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7~12월 예정
'조선민화걸작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월 5일~8월 26일
'이창수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7월 예정
8월 '프란시스 알리스 개인전' 아트선재센터 8월 31일~11월 4일
9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9월 6일~11월 18일
11월 아키 사사모토 ‘항복점(Yield Point)’ 아트선재센터 11월 23일~2019년 1월 13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1월~2019년 2월 예정
12월 '한국현대미술대가: 한묵'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2월 4일~2019년 3월 10일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요즘. ‘방콕’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들 계신가? 부부가 혹은 가족끼리 또는 동성 친구끼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 게다가 ‘먹방’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볼까 한다.
경춘선 기차여행[김유정역]_실레마을 이야기길 따라 점순이를 만나다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만남의 장, 상봉역. 춘천 가는 기차는 대성리, 가평을 지나 출발한 지 72분 만에 멈춘다. 내린 곳은 근대문학 ‘봄봄’, ‘동백꽃’의 산실, 실레마을이 있는 김유정역. 역사 맞은편으론 ‘비단으로 병풍을 두른 산’, 금병산이 포근하게 안아준다. 역사를 빠져나와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 ‘점순이’를 만난다.
“그새 좀 컸는가? 반갑단 말보다 다짜고짜 키부터 재 보는데 잘 봐야 내 겨드랑 밑에서 넘을락 말락. 또 고갤 숙일밖엔 도리가 없다. 딸이 더 자라야 성례를 시켜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일만 시키는 장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면서 나를 충동질해대는 점순이, 반발하다가도 끝내 이용만 당하는 나는 정말 어리석은 머슴이던가. 빙장님, 올가을엔 꼭 성례를 시켜줘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장인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뒷골 콩밭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로 안 그래도 고즈넉한 잣나무, 소나무 숲 사이 길은 더없이 폭신폭신. 그 순간이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결코 머물 수 없는 눈웃음의 그녀들이.”
아주 치명적이었던 들병이들 ‘눈웃음 길’을 스치듯 빠져나오면서 그 들병이 꾐에 빠졌던 근식이가 걷던 그 ‘한숨사연 길’을 돌아본다. 오죽하면 자기 집 솥을 훔쳤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겹겹이 쌓인 잣나무 가지들을 밟고선 심호흡 여러 번에 팔다리도 죽죽 펼쳐본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뿜어낸다지 아마. 이윽고 마주한 두 갈림길. 어느 쪽을 택할 텐가? 동백꽃(생강나무) 길 따라 정상도 좋겠고 산골나그네 길 따라 터벅터벅 걸어도 좋겠고. 오늘은 기어코 산골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끌고 사라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가볼 텐가?
김유정역 실레마을에선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고 난 다음 둘레길인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반드시 한 바퀴 산책해야 한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그곳, 인쇄박물관이 지척에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유정 선생이 귀향해 야학을 일으켰던 곳, 금병의숙(錦屛義塾)에서의 인증샷도 의미 있겠고 기차카페로 개조된 폐김유정역에서 타임킬링도 가성비 있다. 인근엔 레일바이크 장도 있고. 또 '먹방'도 빠질 수 없으리. 춘천 하면 닭갈비 아닌가? 역전에서 ‘점순네’를 찾으시라.
꽃 피고 새 우는 고궁 산책[창덕궁]_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메모를 찾아서
4월 어느 날. 마침 하늘빛은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바깥 기운도 그리 차갑지 않다. 어제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더 어려운 숙제라고?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반겨주는, 다리품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어떨까.
1405년 태종 때 제2의 왕궁으로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한 곳.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한 곳. 그나마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시크릿 가든’인 후원이 있어 자연과의 조화미와 전통의 조경미를 만끽한 적 있으신지.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낙선재! 경복궁의 건청궁이 그러하듯 창덕궁 내 단청을 하지 않은 유일한 곳. 여인의 '비운' 같은 게 서려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곳(정확히는 낙선재의 우측 끝에 있는 수강재). 두리번두리번 돌아서 드디어 만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어쩌면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편지(메모)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옹주는 1989년 4월 12일, 향년 77세로 이곳 낙선재에서 운명한다. 새들이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올봄에 방문하신다면 한 가지 추가할 곳이 생겼다. 작년 말에 재개관한 창경궁 대온실이 바로 그곳. 후원 쪽으로 가면 이웃한 창경궁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는데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면 ‘엄지 척’ 장담할 수 있다.
세종마을 도보여행_이 골목 저 골목 헤매기 좋아라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 지역을 말한다.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북촌에 대비해 ‘서촌’으로 소문난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입구를 나와 대로를 따라 걷노라면 이윽고 우리은행 건물이 나타난다. 도보여행은 여기서부터 ‘딱’이다.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세종마을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이상의 집(터)’이 나온다. 백부의 권유로 건축과에 입학한 시인은 1929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화가의 꿈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얼핏 카페 같은 이곳엔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하면 잠시나마 그와 호흡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올라선 다음 이내 날개를 펼쳐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훨훨 날아올라보라. 이걸 놓치고선 여길 다녀갔다 말할 수 없으리.
할머님과 며느님께서 푸근한 미소와 여유로 차근차근 귀엣말하시듯 이곳저곳 소상히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이 다음 코스다. 고인이 된 창업주 할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부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상호로 정했다는 곳, 대오서점이다. 분수를 아는 즐거움 정도로 해석되는 가훈 이야기, 다락방 사연, 풍금 이야기, 드라마 ‘상어’의 주인공(손예진과 김남길) 뒷담화(둘은 흥행작 ‘해적’에서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까지 줄줄 풀어놓으셨는데 그동안 세월이 좀 흘렀나보다. 없던 액세서리 진열대도, 사진 촬영금지 팻말도 보이고 그새 입장료(2500원)도 훌쩍 인상됐다. 오늘따라 주인장도 안보이고 대신 시니어 알바께서 맞이해준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사진을 찍었다는 상업적 내음 물씬 나는 설명엔 노코멘트할밖에.
좀 걷다 보면 공통으로 생각나는 건 뭐? 때맞춰 신기하게 나타난 곳이 ‘통인시장’이다. ‘골라먹는 맛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잡도리 쉼터 파라솔 아래에서 ‘셀프’로 즐기기도 편하다. 먼저 1인 5000원 하는 도시락을 구입하면 되는데 엽전 열 냥을 제공하니 하나에 500원인 셈. 그 복잡한 골목길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박노수미술관을 지나서 수성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기린교를 건너는 상상도 분명 힐링이다. 다리품을 팔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북한산은 물론 북악산 아래 청와대, 경복궁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 편리한 역세권에 세종대왕, 정철을 비롯해 수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이 이리도 집약된 곳 또 어디에 있을까? 종로구에 신청하면 해설사와의 동반 투어도 가능하니 봄날엔 놓치지 마시라. 서촌에 바람이 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봄날은 가고 있다.
요즘 TV 속은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의 전성시대다. 한국어를 잘하면 나라를 대표해 발언권을 얻거나 친구까지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이 늘면서 달라진 풍속도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어 강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족의 증가도 이러한 수요 폭발을 유발했다. 한국어 강사는 언어와 함께 문화를 전한다는 면에서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 학생들과의 교류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어 강사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국인의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 추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은 지난 1월, TOPIK의 응시자가 1회부터 지난해 11월 제55회까지 212만168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년 만에 무려 108배나 늘어난 것이다.
한국어 강사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자격제도인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자격취득 현황을 보면 2007년 790명이었던 심사 신청자는 2016년 6304명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698% 증가한 셈이다.
강사의 시작은 한국어교원 자격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려면 한국어교원 자격은 필수로 꼽힌다. 문화체육부장관이 부여하는 한국어 교육에 관한 자격제도로 심사와 발급 등의 실무적인 부분은 국립국어원이 맡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한국어교원에 대해 “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교원은 1, 2, 3급으로 나뉜다. 2급은 학위과정으로 한국어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과목을 이수한 사람에게 부여되며, 3급은 양성과정으로 학위가 없어도 100시간의 이론과 20시간의 실습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위와 자격증이 동시에 필요하거나 학사학위 소지자의 경우는 비교적 쉽게 2급 지원이 가능하다.
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16과목(48학점)을 이수해 학위를 받으면 별도의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보지 않고 한국어교원 2급 신청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자격 취득까지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학위가 없는 경우에도 사이버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학위 취득과 함께 한국어교원에 도전할 수 있지만 3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사이버대학 한국어학과의 경우 시간과 비용 면에서 불리한 대신 졸업장, 학위와 함께 독서논술지도사나 다문화사회전문가 등 관련 자격에도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급은 조금 더 간단하다. 학위가 없는 사람도 12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하기 때문에 경험자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교육비에도 차이가 있다. 시중 교육기관에서 3급 과정을 위한 교육비는 총 50만~90만 원 선. 이에 반해 2급 획득을 위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의 비용은 일반적으로 과목당 15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과목을 수료하려면 250만~450만 원가량 든다.
3급은 자격 취득 5년 후 경력 1200시간이 지나면 2급으로 승급 가능하며, 2급은 다시 5년 후 경력 2000시간이 지나면 1급으로 승급할 수 있다. 교육기관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자격 과정을 관장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국어교원 홈페이지(kteacher.korean.go.kr)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대학부설기관이나 학점은행제, 양성과정 등 기관 성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공인된 교육기관을 찾을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도 수요 많아
한국어교원 자격을 획득하면 활동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각보다 많다. 국내외에 설치된 대학 한국어학당 같은 부설기관이 대표적.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을 위한 정부기관 한국유학종합시스템(www.studyinkorea.go.kr)에 등록된 대학부설 한국어 교육원 수는 192개에 달한다. 또 사설 한국어학원도 한국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주요 기관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화상교육이 발달하면서 이를 전문으로 한 교육기관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외에도 최근 급증한 다문화가족을 위해 설치되고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대부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민이나 자녀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민자통합센터,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기관 등에서도 각각의 설립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거주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강사에 대한 수요가 있다.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주요 기관들은 강사를 선발할 때 경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경험삼아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거나 경력을 쌓고 싶다면 무료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 있는 대표적 무료 한국어 교육기관은 서울글로벌센터, 한국이주노동자복지회,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가 꼽힌다.
해외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방법은 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가 대표적이다. 코이카에서는 해외봉사단을 통해 한국어 강사를 세계 여러 곳에 파견하고 있다. 50세 이상의 시니어 단원의 파견도 진행 중이다. 코이카의 해외봉사단 중 한국어 강사 부문은 인기가 매우 높아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한국어 강사 선발이 가장 많은 기관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이 꼽힌다. 세종학당재단은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전 세계 54개국에서 17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수요가 늘면서 세종학당도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국감에서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세종학당재단의 한국어교원 파견 인원은 2013년 24명에서 2017년 110명으로 매년 증가해왔다.
이밖에도 일부 대학이 해외에 설립한 한국어 학당이나 해외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선교기관 등도 한국어 강사의 수요가 있는 곳으로 꼽힌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문화교류를 위해 한국어 강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일본의 JET프로그램(The Japan Exchange and Teaching Programme: 어학 지도 등을 행하는 외국 청년 유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는 매년 각 국가에서 국제 교류를 위한 인원을 선발하고 있는데, 선발된 한국어 강사는 각 학교의 외국어 수업 보조나 특별활동, 지역 교류활동 등을 돕게 된다.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은 ‘외국어 능력’이다. 아무래도 교육 대상이 한국어가 서툰 학생이라 다른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 그래서 일부 기관에서는 자격증 유무, 경력시간과 함께 영어, 중국어, 일본어 회화 능력을 선발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국내외 한국어 강사 구인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홈페이지의 구인정보 게시판을 활용하면 된다.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그렇다면 실제 시니어 한국어 강사의 취업 시장 상황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만만치 않다. 수요는 계속 늘고 있지만 청년층의 유입도 점점 많아지면서 취업 시장이 좁은 문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원 자격을 취득 후 활동 중인 중년의 한 한국어 강사는 “한국어 강사를 찾는 교육기관 중 나이제한을 두는 곳도 적지 않고, 학위 소지자나 경력자를 중심으로 뽑기 때문에 양질의 일자리는 시니어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수입 대신 보람을 우선시하고 눈높이를 낮추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진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에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의 경우는 청년층 선호 현상이 뚜렷하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니어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체력이나 질환 등에 대한 염려가 있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해야 하는 교육기관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젊은 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어 강사에 대한 인적 수요는 해외에서의 한국어 인기, 온라인 교육 시스템의 대중화로 인해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세이글로벌 조연정 대표는 “한국어에 대한 인기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이글로벌은 2014년 용산노인복지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와의 봉사활동 교류가 계기가 돼 설립된 스타트업 기업으로서 한국어 학습을 원하는 전 세계 외국인들과 한국어 강사를 온라인으로 매칭시키는 사업을 지난해 4월 부터 시작했다. 서울시 50플러스 서부캠퍼스와 함께 한국어튜터되기 과정 수업을 운영 중이며, 수료생 중 일부를 선발해 한국어 강사로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조 대표는 “10대에서 60대까지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층도 넓어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단순한 애정에서 취업을 위한 것까지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다양해지고 있어 한국어 교육시장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많고 은퇴 후 시간 활용이 쉬운 시니어에게 한국어 강사는 적합한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공자(BC551~BC479)는 ‘논어’ 양화편(陽貨篇) 26장에서 “마흔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고 설파한다. 스스로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으니 마흔 살을 인격이 형성되는 때로 본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도 “태어날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다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서 공자는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뒤에야 군자다운 것이다(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쓰고 있다. 사람의 얼굴과 인성을 언급한 예는 얼마든지 더 많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화상’이나 ‘자소상(自塑像)’ 작업이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 거울을 보고 스케치하자면, 극사실의 사진처럼 묘사할 수는 있겠으나, 얼굴 내면의 깊은 속내를 표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성인이 되고 한 20여 년 지나오면서 가정적으로 일가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역경을 체험하며 얼굴도 그 과정을 따라 변할 수밖에 없을 터다.
박근자(朴槿子, 1932~) 화가는 영화감독 유현목(兪賢穆, 1925~2009)의 아내로 잘 알려진 여성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입문하며 유 감독과 결혼. 그러나 자녀가 없어 마음의 빈 공간을 그림 그리기로 채워나갔다.
“현미경 사진을 보면 확대된 자연 속에 이미 추상화가 존재함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인간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고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있어요. 자연은 확대해 볼수록 정교하고 조화가 있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거칠어지고 부조화가 나타나요.” 추상화의 변이다. 1973년 이래 1979년까지는 “내 자신에 내재 된 ‘속 얼굴’을 캔버스에 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였다”고 ‘얼굴’ 전에 쓰고 있다. 얼굴만을 주제로 서너 차례 개인전도 열어 호평을 받았다.
박 화가는 1969~1970년에는 한 일간지의 임시 해외 특파원으로 글·그림 취재차 세계여행을 하며 유려한 문체와 수준 높은 드로잉으로 신문 지면의 격을 높였다. 1977년에는 에세이집 ‘얼굴’을 출간하기도 했다.
“50년대 초반 미술대학 시절부터 ‘얼굴’이란 소품은 하나의 습작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얼굴’이라는 소품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뜻을 지니고 계속 구현되고 있는 변치 않는 유일한 화제(畵題)이다.” 에세이집에 있는 박 화가의 글이다.
[그림1]은 1979년의 전시회 출품작 ‘푸른 눈의 소녀’ 이다. 박근자 화가의 그림은 너무 귀해서 실물을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 규모가 작고 작품들도 적어서 화랑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품 수집가이면서도 학술적 연구의 궤적이 큰 분에게서 두 점의 드로잉을 입수했다. 마치 큰 보물을 얻은 듯 가슴에 꼭 안고 돌아오는 길이 행복했다.
종이에 수채와 크레용으로 단숨에 그린 ‘얼굴’의 반쪽은 파란 유리 빛에 물들어 있다. 두 눈은 연녹색으로 크기와 각도가 어긋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어 깊은 사색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슬며시 맑고 투명한 속내가 엿보인다.
신양섭(申養燮, 1942~)은 언필칭 발군의 화가다.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8~1981년 연 4회 국전 특선을 하고 1981년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국전 대통령상은 화가 지망생에게 최고의 영예이며 해외 견학의 기회까지 주어져 견문과 식견을 넓히는 디딤돌이 된다.
신 화가는 50여 년 미술활동을 하면서도 350여 점의 작품만 남겨 과작(寡作)의 작가로 유명하다. 또 다른 별호는 ‘흰색의 화가’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흰색 바탕에 흰색의 질료로 고향의 산천, 오두막, 소, 새와 들 등을 묘사하며 두터운 마티에르로 평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1989년 ‘하얀 추억’이라는 타이틀의 전시에서 그가 출생해 유년을 보낸 충청도 시골의 소소하고 칙칙한 풍경들을 마음으로 정화해 흰색을 주조로 한 환원의 작품세계를 나타냈다면, 2010년 인사동 노화랑에서 8년 만에 연 초대전에서는 ‘내 안의 풍경’이라는 주제를 통해 흰색을 주조로 하되 캔버스에 면섬유나 종이부조 등을 붙이고 채색도 좀 더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작품세계를 성찰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선 시간과 수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잖아요.” 과작의 변이다.
“신양섭의 작품은 마치 흙벽의 푸근한 질감을 연상케 한 바 있으며 시골의 담 벽이나 부엌의 연기에 그을린 아궁이처럼 정감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마음의 풍경‘은 자기 속에 걸러진 것, 물고기와 사람, 나무와 새, 여인과 교회 등 아무런 맥락도 갖지 않는 사물들이 서로 비집고 자리함으로써 또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범신(汎神)적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라 평론가는 정의했다.
[그림2]는 1989년 ‘하얀 추억’ 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유년의 부친 얼굴이거나, 사십 중반의 작가 자화상일 것이다. 흰 바탕에 두터운 물감을 덧바름으로써 질박한 얼굴을 표현했다. 머리며 이마, 눈, 코, 입 모두 범상치 않다. 입술의 연붉은 채색은 언어로 그 무엇인가를 소통하려는 메시지로 읽힌다. 내면에 관류하는 복잡한 사유가 뒤엉켜 흘러넘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구름을 그릴 수 없듯, 마음속 희로애락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을 그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그 마음결의 한 끝이라도 그리고자 애써왔다. 살아오면서 ‘더럽혀지기 이전의 순결한 마음’을 찾을 수 없게 황폐해진 현대인들의 얼굴에서도 한 자락 맑은 빛을 엿보려는 줄기찬 노력이,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정화(淨化)의 경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국 미술, 서양 미술을 아우르기도 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듯한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맑게 정제되어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자신의 기준들이었다. 이상용 작가가 만나고 만든 운명들에 대해 들어봤다.
충남 공주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은 평택에 위치해 있다. 누나가 사는 곳을 지나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순박한 농부 같은 모습이 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생산에 있어서만큼은 금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1만2000여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은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숫자는 그가 평택의 외진 곳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명적으로 만난 작품 소재들
“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덮치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인은 등대지기와 같죠. 바쁘게 새로운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발맞춰가는 시대에 느림 속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소중하고 깊은 운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품을 시작했어요.”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면회화 드로잉 작품 이외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폐철제로 만든 페달 작품이었다. 왜 폐철제를 소재로 삼은 걸까?
“사용하다 버려진 물건들,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쇠. 쓰다 버린 물건이든 새로운 물건이든 저와 찰나의 운명적 만남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쇠는 좀 무겁고 아파 보인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작가의 대답은 간단했다.
“철제의 묵직한 무게와 차가운 성질이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날마다 달라지는 운명과 기억, 그 내밀함이 어떠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죠.”
이상용 작가는 소위 ‘예술가다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뭔가 흐트러지고 난삽하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일할 것 같은 도취된 작가의 이미지가 없다. 작품이 보관된 창고는 그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작품에 먼지가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추구한다. 작업실이 곧 집인 이곳에 보관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술은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작가의 모습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에게서 맑은 영혼을 느꼈다. 오롯이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벼루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람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그가 그토록 사람을 자신의 작품 속에 자주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한탄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빨리빨리’가 입에 배고 생활에 밴 한국인은 세상의 속도를 더욱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에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가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잊혀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물질적인 것은 빨라도, 마음은 천천히
이상용 작가는 소재를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고 순리적으로 발견한다. 그가 벼루(inkstone)를 소재로 쓰고자 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일환이었다. 벼루는 단단한 물건이다. 백 년 전, 사백 년 전에 벼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쓰이고 시간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결국 한 작가의 손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서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면 버려졌을 수도 있는 벼루는 그의 손에서 다시 생명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쓰다 만 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벼루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버려진 골동품 같은 한국 전통의 얼이 담긴 것들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소재들이 운명과도 같다. 그렇게 만난 작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참 곤란해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부속품들조차도 운명이고 만남이므로 어떤 게 의미가 크다 작다 논할 수가 없단다. 이러한 일관된 그의 작품세계조차도, 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통일감이 생겨 그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제도권 내에서 학습된 예술적 역량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발판 삼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실험작가답다.
39세 나이에 떠난 뉴욕
이상용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뉴욕에서 6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뉴욕. 그곳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였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을 터. 그런데도 그가 뉴욕이라는 새로운 출발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삶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국의 입시 교육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입시학원 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술학원 일은 제법 잘돼서 대전에서 큰 학원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맡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져서 계속해야 했던 학원이었다. 그러나 입시에 대한 혐오가 강했던 만큼, 아이들을 그 틀에 맞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틀을 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최대한 독특하게, 똑같이 하지 않고 개성 있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라는 그의 자조 섞인 한마디에서 많은 좌절과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열두 시에 학원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작업하고 잠깐 자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했다. 그의 방대한 작업량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뉴욕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르칠 나이에 대학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하게 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다
이상용 작가는 뉴욕에 처음 갔을 때 3년 내내 매일매일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보고 또 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본 그림들과 자신의 작품을 접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흐름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후 3년 동안 외부 출입 안 하고 작업만 계속했다.
옆에서 보면 무언가 홀린 듯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는 그의 지론이 있다. 바로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보고 하는 것은 안 좋아했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하는 그의 작업관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매번 자신이 ‘원시시대에 태어난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말한다. 그림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마음가짐과 노력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의 동력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과 같은 끌어당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그토록 운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억지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있는 소재에 맞춰 작품을 만들 뿐이다. 그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회화, 조각, 설치, 그림, 시까지 아우르다
젊을 때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용 작가의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이제 그는 조용히,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미술관들과 단원미술관, 관훈갤러리, 간송미술관 등에 걸렸고 코오롱그룹과 한국문화원,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은둔 고수의 아우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양도 많지만 분야 또한 방대하다. 회화, 조각, 설치, 그림과 같은 미술 작품 외에 시와 사진까지 아우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가 얽혀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라고 말한다. 소위 ‘권위’를 위해 한쪽으로 장르를 정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사람이 맨날 한 가지만 먹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시는 그의 미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6000편 정도 썼고, 2000편 정도를 공개한 상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들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부터 땅바닥에 그린 그림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소나무로는 목상을 만들고 빨래비누로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잡동사니로 척척 만들어낸 작품들이 쌓여 그의 집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고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은 시적 감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린 시절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감성들과 연결된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 말했듯 말라가는 잎을 파랗게 유지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은 내면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흐트러지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시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가 중심을 잡아준다. 흐려지거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 다시 본질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할 작품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품 소재는 상여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상여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상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면 왕과 못지않은 마지막 길을 서민들에게도 제공해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샤머니즘 관점에서 상여를 소재로 한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현대적으로 해석된 이상용 작가식의 상여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어렸을 때 상엿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무섭잖아요.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이게 아름다운 상여 문화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인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상여라는 게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편하게 봤음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스튜디오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러한 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연결해주는 그런 작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작품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고 베끼며 영향을 받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작가의 모습이란 인연과 이어지는 것이고, 그 인연은 다소 희미한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운명의 길과도 같은 무언가다.
그의 마음을 읽는 사람은 그의 인연이 되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작가의 맑게 정제된 사상과 순박한 마음이 간결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살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산다는 이상용 작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자의 심정을 그의 작품에 공감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기자로서는 이상용 작가의 운명 같은 작품이 세상 밖에서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짐짓 이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필자는 어릴 때 한옥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대문 앞에 있던 한 그루 대추나무 때문에 대추나무집이라 불렸던 아현동 집과 반듯한 서까래가 아름다웠던 돈암동 집 등 한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늘 넘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북촌 탐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날씨. 이런 날은 여행이나 산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안국역 3번 출구로 갔다.
필자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 번째로 도착했는데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필자 앞에서 외국인 여자 한 사람이 큰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끙끙대고 있어서 서툰 영어이지만 방향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can I help you?"라고 말을 걸었다.
여자는 매우 기뻐하며 동대문 마켓을 가려 한다고 했다. ‘역시 한국에 여행 왔으면 동대문시장은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미소가 일었다. 교통편보다는 걸어가고 싶다 해서 방향을 알려주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더니 두바이에서 왔다고 한다. 필자는 여자 혼자 그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준 것이 고마운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를 방문해줘서 감사하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오늘따라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필자의 영어 실력은 기초 회화를 할 정도임). 그녀는 옥토퍼스(octopus) 푸드를 먹었는데 무척 스파이시(spicy)했다는 말을 했는데 아마도 매운 낙지볶음을 먹었나보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추천하고 싶은 다양한 한식이 있다며 몇 가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한국이 참 아름답다며 가방을 뒤적여 봉지를 꺼내더니 다 식은 국화빵을 두 개 필자에게 건넸다. 그 마음이 예뻐서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감사하다며 떠나는 그녀를 보며 필자로 인해 우리나라가 친절한 나라로 인식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문화해설사와 일행 8명이 도착해서 북촌 탐방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돈암동에서 3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북촌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북촌에 8경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 그중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한옥마을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곳은 왕가 사람들이나 권문세가, 양반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경에서 8경까지 탐방을 하기로 했다.
1경은 창덕궁 담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담 옆을 끼고 왼쪽으로 가면 북촌 문화센터가 있다. 이 집은 조선시대에 재무관을 지낸 양반집을 창덕궁 연경당을 모델로 복원해 사람들에게 북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우수상’을 받은 곳이라 한다.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사랑방도 개방해놓았고 정자에도 앉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우리 일행도 툇마루에 앉아 인증사진을 찍었다.
2경은 원서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가옥에서 시작되었다. 참으로 아담하고 예쁜 정취가 느껴지는 한옥이었다. 그러나 한때 친일파였다는 일로 폐가가 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어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서화전도 열리고 있다 한다. 이곳에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세 명의 친구의 글, 그림,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한삼우란 각자의 분야에서 민족계몽과 근대화를 이끈 춘곡 고희동, 육당 최남선, 위창 오세창 세 분을 말한다.
노 시인(老詩人)은 우이동 솔밭공원을 거닐며 청여장(靑黎杖, 지팡이)을 한 손에 꼭 부여잡고,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시공 속에 있으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 물방울
너 황홀히 존재하고 있음이여
소멸 직전에 아슬아슬함을 지니고 있건만
거뜬히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꿰뚫린 빛과 그림자
소멸과 생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번갈아 이어지는
유무상통의 존재의 비의(秘儀)
그것을 투시하는 눈이 있는 한
너의 아름다움은 늘 영롱하고
신선할 수밖에 없다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댁을 자주 왕래하던 2011년 초봄 최근 습작한 시라며 ‘팔순을 넘긴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소묘’ 두 장의 습작 노트를 보여준 일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방울 소묘’다.
박 시인은 1990년에 발간한 수상집 ‘투명한 기쁨’의 표지도 김창열(金昌烈, 1929~) 화백의 물방울 그림으로 장식한 바 있다.
“1972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 살 때, 작업하다 뒤집어놓은 캔버스 위에 튄 물방울,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져 햇빛에 반사되는 순간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었어요. 나는 그걸로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평생을 살아왔어요. 가끔 그 물방울이 영혼과 닿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요.”
노 화백은 술회하고 있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의 화업 50여 년은 영롱한 물방울 태어남과 스러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익혀온 한학과 접목하여 캔버스나 한지에 한자를 쓰고 그 위에 물방울을 얹은 ‘회귀(回歸)’ 시리즈로 작품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주옥같은 작품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제주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착공, 2016년 9월 개관했다.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물방울 그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10호 이내의 소품이 아주 귀해서 그 희귀성이 작품가를 올려놨다. 최근 경매에서 1975년에 그린 3호 작품이 무려 47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작품[사진]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700만 원에 낙찰받았다. 13개의 크고 작은 물방울이 X자로 배열되어 긴장감과 역동성을 주고 있다. 얼룩진 물 자국 위에 맺힌 방울방울에 빛이 부서져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고, 가슴 가득 푸르른 영혼이 일렁이게 한다.
형진식(邢鎭植, 1950~) 화백은 일반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예술인들과는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분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모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1976년부터 2006년 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길러냈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즘에 반대해 무심사 미술전람회로 통칭되는 ‘앙데팡당(independent)’ 전에 출품함으로써 정형화된 그룹 활동을 벗어나 자유로운 추상의 세계를 지향했다.
“호흡하는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인식하는 일, 순수함에 환원되어지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작업이 아닐까, 얼음은 투명하고 맑아야만 얼음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불투명한 대상을 세척 정화하는 순수함만이 남기 위한 인식인 것이다. 뭉친 가운데서 흐트러짐,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의 일관성, 입체에서의 평면적 접촉, 평면 속에서의 입체적 구조의식, 이러한 것은 서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애매한 속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열려진 상황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체의 지향성만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 작가는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작가가 아니라 제시하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몇 회의 개인전에서 종이 위에 연필, 크레용 등으로 손 가는 대로 그려 낸 드로잉을 보면, 활기찬 생기(生氣)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선 하나하나가 마치 충전(充電)된 것처럼 공(空)을 가로지르며 또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그 공을 긋는 행위의 궤적을 흰 종이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 선생이 개인전 머리말에 쓴 글이다.
이 그림[사진]은 13년 전 ‘아름다운 가게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받은 작품인데, 같은 크기의 네 작품이 한 세트로 나와 바로 구입했다. 장방형의 캔버스 중앙에 파란 유화 물감을 떨어트리고, 자연스런 반동으로 물감이 튄 상태에서 최소한의 드로잉으로 마무리했다. 마치 만년필에서 푸른 잉크가 흩뿌려진 것처럼 자연스런 무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네 작품을 한데 모으거나 종횡(縱橫)으로 늘어놓아도 그 또한 아름답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의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은 기교나 힘을 뺀 아이들의 붓장난 같아서 순진함이 배어나왔다고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말년 작품들도 ‘아이들의 손짓 같다’고 한다. 순수로 회귀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된 것이리라.
물방울처럼 금방 소멸되어도, 찰나의 순수가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지난해 12월 26일 '서리풀 문학회' 문우 최선옥 님의 수필집 출판기념회와 송년회가 있었다.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였다.
서리풀 문학회 지도 선생님은 상지대 학장님으로 퇴직하신 신길우 교수님이다. 문학박사이자 국어학자이신 신 교수님은 수필가, 시인이다. 평생을 국어 연구와 문학 사랑에 헌신하신 신 교수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자제분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단다.
"퇴직금 중 1억 원은 문학에 쾌척하겠다. 아무도 말리지 마라."
이 말씀을 들은 필자는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버렸다. 이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문학의 강'이라는 계간지를 발간하고 있다. 교대역 부근 오피스텔에 문학 동지들의 아지트도 만들어놓으셨다. 신 교수님도 필자 못지않게 책 욕심이 많으셔서 아담한 오피스텔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신 교수님은 길이도 짧고 문장도 간결한 걸 추구하신다. 만연체나 화려체를 멀리 하고 간결하고 함축된 문장을 쓰도록 지도하신다.
필자는 퇴직하던 해인 2012년 가을부터 서초문화원 수필 창작반에 발을 담갔다. 햇수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10여 명의 문우들이 수필가로 등단했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엉성한 문장들이 시간이 갈수록 짜임새 있고 의미 있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문우들이 하나하나 수필가로 등단할 때 필자는 뭘 했나? 문제는 욕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수필에 매달릴 때 필자는 패션디자인 공부에 왈츠 배우기, 발레 수강, 패션모델, 서초문화 해설사, 시 낭송, 영어 회화에 때때로 오페라 감상, 발레 감상, KBS ‘명견만리’ 서포터스 활동까지 하고 싶은 걸 몽땅 다 하려고 취미활동 영역을 마음껏 펼쳐놓았다.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2017년에는 세 곳에서 기자활동까지 했다.
최 수필가는 막내로 태어나 장남하고 결혼했다. 시누이들과 시동생의 어머니 노릇에 홀시아버지를 23년간이나 모셨다. 상황이 이쯤 되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해도 힘들어서 도망갔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녀의 낭군님은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엄청 좋아한단다. 너무 좋아서 그녀의 수필집 출판 비용도 기꺼이 내줬고 서리풀 문학회 송년회 비용도 마음껏 쓰라며 카드를 통채로 맡겼다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종이에 수다를 떠는 것이다. 사람과 만나 수다를 떨 때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그런 굴레에서 자유롭기에 좋다. 그녀의 글에는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고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삶의 향기가 묻어 있다. 수필집 제목을 '날아올 행복'이라고 붙였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녀 곁에는 행복이 이미 껌딱지처럼 요지부동 붙어 있다. “나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하듯 말이다.
꿈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다. 꿈을 꾸는 자 이룬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데면데면한 일상이 되고 삶의 의욕도 상실된다. 상암동에서 펼쳐진 월드컵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큰 꿈을 함께 꾸었고 끝내는 그 꿈을 이뤘다. “꿈은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새로 만들어낸 희망 메시지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 질문하였을 때 망설이지 않고 자기의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꿈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삼성의료원사회건강연구소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성인 중 꿈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었고 86%가 꿈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조사됐다. 하루하루를 대충 살아가고 있음이다. 꿈이 없기에 활력 또한 있을 수 없다. 수명은 장수시대로 가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도 머지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미래 학자 레즈 커즈와일은 2045년쯤이면 인간은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미래 예측을 하고 있다.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본인들의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의학과 의술의 발달로 그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노화된 인체구조의 교체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삶의 질 또한 좋아진다. 우리나라에서도 114살 된 할머니 아직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음이 방송되기도 했다. 특별한 경우로 넘길 수도 있으나 조문을 위해 장례식장에 들러보면 고인의 나이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은퇴 후에 살아가야 할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지 모른다. 40~60년 더 나아가 70년이 될 수도 있다. 엄청나게 긴긴 시간이다. 하루 중에서 먹고 자고 배설하는 등의 생리적 필수시간을 제외한 여가를 11시간으로 계산했을 때 60세 은퇴하여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여가가 16만 시간에 이른다. 120살로 계산하면 20만 시간이 된다. 짧아 보일 수도 있으나 참으로 긴 시간이다. 양치질 적정 시간을 3분이라 한다. 당신은 그 3분을 다 사용하고 있나요? 대체로 3분간 이를 닦는 사람은 극소수에 이른다고 한다. 3분이 길게 느껴진다. 그렇게 대비해보면 16만 시간은 엄청나게 길고 긴 시간이다. 길고 긴 여가를 보내야 하는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이 무료하게 보낸다면 고통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 자체가 고통이고 불행이다.
(어디로 굴러가야 할까? 변용도 동년 기자)
실제 꿈이 없는 것일까? 누구나 꿈을 가졌다. 생업에 매달리면서 그 꿈을 접어두었을 뿐이다. 오랫동안 끄집어내지 않고 있다 보니 잊고 살아간다. 이제 그 꿈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28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이서형(74세, 현재 서양화가) 씨도 마찬가지였다. 건설회사 CEO로 일선에 물러난 이 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앞에 놓고 부친과 친구분이 “그림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한 칭찬을 떠올리며 자기의 꿈이 화가였음을 되새겼다. 이 씨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은퇴를 하자마자 용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학사 편입하여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나 하고 싶은 일, 자기의 꿈이었기에 각고의 노력으로 서양화가가 되어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고 있다. 뒷전에 미뤄두었던 꿈을 끄집어낸 성공 사례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기 마련이다. 가족이나 회사를 위하여 접어두었던 꿈을 끄집어낼 차례다. 이제 당신에게 “당신의 꿈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은 거침없이 그 대답이 나오지 싶다. 그것만으로 당신은 후반생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은퇴는 隱退가 아니라 Retirement다. 꿈 학교 입학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