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모델!
시니어들에게 차별화된 자부심을 심어주는 명칭이 아닐까?
'나 이렇게 멋지다!'
패션쇼를 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빛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모델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이다. 요즘은 남성들도 많은 관심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14%를 넘는 고령사회, 2026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은퇴 후 재정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를 강력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2012년 퇴직하면서 무엇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놀까 고민했다. 필자가 하고 싶은 것은 패션모델과 패션디자이너, 왈츠와 탱고 배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이었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은 서울이었다. 필자가 사는 평택은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울로 가자! 그래서 집을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는 곳은 강남시니어플라자와 서초문화원이었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영어회화, 수필 쓰기, 시 낭송하기, 문화해설사, 왈츠 과목을 수강했다. 모델 워킹 수업은 서초문화원에 없어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받기로 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 중에서 상한가를 친 것은 단연 '모델 워킹'이다. 이 과목은 늘 대기자들로 넘친다. 나는 초창기부터 수강해 벌써 3년이 지났다. 모델 워킹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바른 자세로 1시간 동안 워킹을 한다.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즐거워져 힐링도 된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지는 훌륭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2018년부터는 강남구민만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게 됐다. 소비자의 강력한 니즈가 있는 곳에서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자가 없다. 누가 과연 이 블루오션을 선점할 것인가? 결실은 재빨리 트렌드를 읽어내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상암에서 영등포 비콤 벗들과 송년 행사가 있던 날 언주역에 있는 삼정호텔로 갔다. 코리아시니어 모델 학원 김소영 원장님 초대로 패션쇼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모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기 때문에 세련됨이나 기품이 떨어지는 옷들이 간혹 눈에 띄어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모두 통과! 사진에 담지 않았다. 4기 수료식과 패션쇼를 마친 후에는 '시니어 롤 모델'에 관련한 짧은 강의도 있었다.
뷔페로 마련된 식사시간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성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먼저 바리톤의 우렁찬 목소리로 비제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소프라노 차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에 나오는 너무도 아름다운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곱게 흘러나왔다. 이어진 순서인 테너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이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화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아름다운 이중창 '투나잇 투나잇'을 테너와 소프라노 둘이서 불렀다.
"이번에 부를 곡은 뭘까요?"
테너가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축배의 노래요."
필자가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셨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즐거운 식사 자리에서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노래로 그 곡을 뛰어넘는 곡은 없으니까 말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는 젊음의 환희가 가득한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다.
바로 이거다!
품격 높은 현역 성악가들을 초빙한 것은 감각 있는 원장님의 '신의 한 수'였다. 참석자들의 즐거운 저녁 만찬 시간이 단번에 럭셔리한 분위기가 되었다. 레퍼토리가 너무도 잘 알려진 곡들이라서 신선함은 떨어졌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행사였다. 새삼 김소영 원장님의 기획력에 깊은 신뢰가 간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머지않아 멋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꿈이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exhibition
王이 사랑한 보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그가 수집한 예술품 중 130점을 총 3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제1부에선 아우구스투스의 군복과 태양 가면, 사냥 도구 등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를 소개하는 제2부에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동원해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각종 보물이 사용된 작품을 통해 화려한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선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수출 도자기와 초기 마이센 자기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전시장 내부를 확대사진 기술을 사용해 드레스덴 궁전 내부와 비슷하게 연출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 in 강남
일정 11월 19일까지 장소 강남미술관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이해 동양화작가 곽수연, 사진작가 김현욱, 입체작가 빅터조, 업사이클링작가 엄아롱, 일러스트레이터 이연경, 도예작가 틸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가 모였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회화, 설치, 사진, 조형 등으로 표현된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강남미술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애견기저귀를 착용할 경우 반려동물도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함께 관람해도 좋다. 다양한 작품 외에도 유기견을 입양한 견주들이 보내준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 또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등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시장 건물 옥상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반려동물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book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민음사)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 작품 속의 ‘오늘’인 그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다. 가족 간의 쉽지 않은 소통과 그럼에도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여정으로 그려내며 아스라한 동경과 영원한 그리움의 상대는 가족임을 들려준다.
향기 탐색 (셀리아 리틀런 저·뮤진트리)
고고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저자 셀리아 리틀턴의 향기 탐색서다. 냄새로 기억되는 곳들을 추억하며 향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회고한다. 각 나라 특유의 향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향의 기초적인 원료와 재배법, 향수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movie
유리정원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소재와 독창적인 스토리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속에 감춰진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10월 22일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상상력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며 초록 피가 흐르는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이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봉 10월 25일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신수원 출연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임정운 등
리빙보이 인 뉴욕
이후 , 시리즈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이 다시 한 번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도시 뉴욕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 웹 감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인 뉴욕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맨해튼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선 로 얼굴을 알린 칼럼 터너가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 역을 맡았다.
개봉 11월 9일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크 웹 출연 칼럼 터너, 케이트 베킨세일 등
◇stage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항상 사랑받기를 꿈꾸며 살았던 여인 마츠코의 기구한 삶을 감성적인 연출과 음악으로 그려내며 진정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운 삶이었는지 되묻는다.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일정 10월 27일~2018년 1월 7일 연출 김민정 출연 박혜나, 아이비, 강정우 등
도둑맞은 책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영화대상 시상식 날 납치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 그리고 그를 납치한 보조작가 조영락. 두 사람을 통해 연극 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일정 10월 13일~12월 3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현철, 이갑선 등
에어포트 베이비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가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입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백하고 재치 있는 대사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8년 동안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친 작품으로 현실적 소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일정 10월 17일~12월 31일 연출 박칼린 출연 최재림, 유제윤, 강윤석 등
오펀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공연계의 독보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김태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중년의 부유한 갱스터 해롤드.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을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9월 19일~11월 26일 연출 김태형 출연 박지일, 손병호, 장우진 등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올해 말까지 영국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인 누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누드 전시회라 하니 조각같이 아름답고 풍만한 여인의 몸이 상상됐다. 즐거운 기대를 하며 삼총사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했다. 일교차가 심해 아침저녁으론 서늘하지만 한낮에는 아직 햇볕이 강렬했다.
테이트 명작전 ‘누드’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인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중, 18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누드)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등 120여 점을 엄선해서 보여주는 전시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카소와 마티스, 르누아르, 드가 등 유명 거장들을 비롯해 초현실주의 및 현대미술 대표 작가인 만 레이, 막스 에른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루이스 부르주아, 데이비드 호크니 등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유럽 대륙을 떠나 전시한 적이 없었다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키스’는 대리석 원본 조각작품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시되었다는데 무게가 3톤이나 되어 1층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 삼총사는 입구부터 찬찬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작품 중엔 너무 사실적인 모습들도 있어 눈 두기가 부끄러운 그림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름답고 탄탄한 몸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같이 간 친구들은 풍만한 여성의 누드를 보며 동질성이 느껴진다며 웃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탄력적인 몸의 곡선을 자랑했으며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중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작품을 모범으로 한 고전주의 작품 ‘프시케의 목욕’이 특히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연미를 강조한 작품도 있었으며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인간 내면의 세계,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를 탐구한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꿈과 무의식 같은 주제를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상징주의의 작품인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는 한동안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탄력적인 근육을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활짝 펼쳐진 날개 위에 누워 있고 천사인 듯한 아가씨들이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은 채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이카루스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태양의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모습도 상상해봤다. 작가가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꿈과 욕심, 떠오름과 추락이라는 매혹적인 소재로 만들어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사실주의, 표현주의의 작품이 나뉘어 우리 삼총사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에게 사과를 권하는 이브를 그린 작품 ‘유혹’도 멋졌다. 이 작품의 한쪽 편에는 이브의 자리를 남겨두고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서면 누구든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된다. 매우 재미있는 팬서비스였다. 필자도 엉거주춤 앉아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되어봤다. 12월까지 전시하며 흥미로운 작품이 많으니 우리 시니어들도 햇볕 좋은 날 좋은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누드를 감상하러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우리의 미술품 시장은 화랑과 경매 회사로 양분되어 있다. 물론 작가가 직접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개인전 기간에도 작가는 화랑을 통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술품은 그리거나 만드는 예술인의 정신세계가 투영되기에, 각각의 개성이 다르고 장르가 다르므로 공산품이나 생필품처럼 쉽게 살 수가 없다. 제아무리 저명한 작가의 예술품도 내 보기에 탐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가 서명한 미술품에는 나름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집약돼 있으므로 오랜 시간 작품과 교감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의 침체 속에서도 미술품 경매시장은 나름 활기를 띠어 2017년 전반기 경매회사를 통한 미술품 거래액만도 989억원으로 2016년 상반기 964억4000만원보다 2.5%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국내 12개 경매회사를 잘 관찰하면 미술품 시장의 흐름뿐 아니라 거래된 장르별, 작가별 가격의 추이를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현장경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미술품 판매를 하므로 집에 앉아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경매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온라인으로 보는 작품 이미지와 짧은 설명이 미흡하면 경매사에 방문해 전시된 실물을 직접 살펴본 후 구매를 결정하면 된다.
집의 거실이나 서재, 침실 등에 그림 한 점 걸고 싶으면 우선 예산을 정하고 화랑이나 경매 회사를 찾아가 예산 범위에 맞는 미술품을 선별해본다. 작품 가격이 예산에 맞는다면 작가의 경력이나 전시 이력, 작품평 등을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한다. 또 그 작가의 최근 작품 가격 추이도 살펴본다.
천칠봉(千七峯, 1920~1984) 화가는 전북 전주에서 출생해 국전 특선 수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화가다. 남녘에서는 경매 시 언제나 인기를 누리는 작가다. 는 4호의 소품이지만 농염한 붉은 빛이 명품인 작품이다. 인사동 화랑끼리 모여서 하는 경매에서 35만원에 낙찰받았다. 천 화가는 중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화업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히 빨간색의 처리는 가히 초일류급이란 평을 듣는다. 석류 알이 곧 쏟아질 것 같은 긴장의 순간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실 빈 벽에 이 한 점만 걸어도 공간을 충분히 채운다.
공석순(孔錫洵, 1944~) 화가는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국전에 입선했으나 화장품 회사 등에 근무하다 50대에 전업 작가를 선언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격조 높은 작품을 표출하고 있다. 몇 해 전 인사동에서 함께 점심식사 후 골동품 가게에서 연꽃 모양의 소반을 사서 그곳에 꽃 그림을 부탁했더니, 보름 후 그림을 완성했다. 이 작품 또한 30만원 미만의 가격이 소요되었다.
철우(鐵友)란 아호를 쓰는 서각인(書刻人) 곽금원(郭錦元, 1955~)은 우리나라 각자장(刻字匠,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장인) 철재(鐵齋) 오옥진(吳玉鎭, 1935~2014)의 수제자로 30여 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명인이다.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그분의 작품을 하나둘 장만하게 되었다. 나의 캐리커처도, 서실의 현판도 그분의 작품이다. 오옥진 선생은 문하생들과 경복궁 흥례문 회랑에서 전시회를 가져왔는데, 곽금원 선생이 무늬 좋은 느티나무 판재로 짜 맞춘 를 출품했을 때 30만원을 주고 가져왔다. 표면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선생의 푸른 대나무 그림을 새겨 품위와 운치를 더하고 있는 작품이다.
원로 화가 김숙진(金叔鎭, 1931~)은 홍익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분으로 국전 문공부장관상, 예술원상을 수상한 관록의 화가다. 1호의 이 조그만 그림 속에는 ‘이상향(理想鄕)’이 꽉 차 있다. 바다 혹은 강가에 복숭아나무가 줄기를 늘어뜨리고, 사이사이에 분홍빛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파란 물 위 하늘은 오색 빛으로 휘황하고 꼬리에 초승달과 보름달을 매단 새 두 마리가 힘차게 날고 있다. 덧없는 세월의 여정이 물결 따라 느리게 지나간다. 이 작품은 온라인 경매 당시 작가를 잘 인지하지 못해 입찰자 없이 15만원에 낙찰받았다.
한 포기의 히아신스를 맑고 투명한 수채로 그린 홍종명(洪鍾鳴, 1922~2004)은 평양에서 출생,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제주도를 근거지로 활발한 미술활동을 한 분이다. 특히 문명세계를 초월하는 시원(始原)을 향한 그리움과 두고 온 고향, 평양에 대한 향수를 승화시킨 시리즈와 시리즈의 작품들은 이분의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2호 사이즈의 이 수채화는 8만원에 낙찰받았다.
이렇듯 예술성과 인생의 경륜이 조화된 원로 화가의 작품 석 점과 집 안 어느 공간에 두고 봐도 좋을 장미꽃 소반, 서각 명인의 공예품을 모두 118만원에 구입했다. 예술작품을 금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술품을 바라보고 애호하고 한두 점씩 수집하면서 겪게 되는 개개인의 눈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의 푸른 영혼이 깃들어 있어, 정서를 함양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미술품 수집은 30만원에서 시작하되 50만원, 100만원으로 상향한다. 그 안에서도 언제든 빼어난 명품을 만날 수 있다. 부지런히 화랑가와 미술품 경매 현장을 드나들고 꼼꼼히 살피어 예향(藝香)에 젖어볼 일이다.
도심 속 공원, 게다가 미술관까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으로 향하며 마음은 벌써 부자다. 그 푸르고 거대한 녹색 정원을 소유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음에 만족스럽다.
전시회 NUDE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중 18C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누드)”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등 총 12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하고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타스,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를 비롯해 테이트 모던이 자랑하는 초현실주의 및 현대미술 대표작가 만 레이, 막스 에론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루이즈 부르주아 등 영국 현대미술의 대표작가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총 8개의 테마로 나누어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수준 높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 누드’에는 주로 고대 신화, 성경 및 문학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사적인 누드’에서는 고전과 신화적 주제에서 벗어나 실제의 여성을 그리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누드’에서는 인체를 기하학적 요소로 간소화하며 추상적인 형태의 누드화를 선보이기 시작했고,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누드’에서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누드로 표현했다. ‘표현주의 누드’는 인간 신체의 물질성을 두터운 마티에르, 추상 페인팅 등의 방법을 통해 실제 살결처럼 나타내는 표현법을 탐구했다.
‘에로틱 누드’에서는 누드의 에로티시즘을 탐구했던 윌리암 터너(JMW Turner)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등의 드로잉이 전시되고 두 사람 이상의 이미지 속에서 누드의 에로티시즘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작품 중에는 공공전시를 위한 것도 있지만 개인의 은밀한 취미를 위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몸의 정치학’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누드는 점점 성性의 정치학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주로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는 성의 권력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페미니즘 예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연약한 몸’은 1980년대 들어 대형크기의 사진들이 등장하면서 누드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인간 자아의 정체성, 노화 등 변해가는 인체를 현대의 사진예술을 통해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아름답기만 한 누드에서 현실의 아프고 처지고 노화되어가는 자연스러운 누드로의 변천사를 보면서 비로소 본질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거장들이 예술로 담아낸 인간의 몸은 아름다웠다. 누드를 보고 허리 위가 즐거우면 예술이고 아래가 흥분하면 외설이라는 정의를 일찍이 내려준 분이 있다. 그러나 모호한 흥분의 경계도 있었다. 그림 속의 암시나 여백을 통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사진을 찍듯 정확하게 묘사하여 들이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무게 때문에 1층에 전시된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키스( The Kiss)의 대리석 원본 조각 작품은 인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느끼게 해서 금방이라도 손 하나를 빼어 악수라고 청할 듯했다. 연인들의 열정적인 포옹이 외설적이라 낙인찍혀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절제할 수 없도록 폭발해버린 열정이 부드럽게 작품전체에서 느껴졌다. 이 작품의 다음 목적지는 일본이라고 한다. 소마미술관에서는 12월 25일까지 전시가 계속될 예정이다.
미술관을 관람할 때마다 느끼지만 마음에 와 닿는 작품 앞에서 머물며 여유롭게 감상하는 것이 작품을 소유한 듯 느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좋다. 이런 걸작들을 내 것 인양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필자는 행복한 부르주아인 양 부유하다.
최근에 남편 친구 자녀의 청첩장을 받고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제 부모님들의 나이가 거의 고희를 넘어서 자녀들의 결혼도 거의 끝나 가나 했는데 아직도 시키지 못한 자녀들이 많은가 보다. 요즘은 하도 결혼 연령이 늦어지니까 작은 결혼이라고 해서 부모님 친구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신랑 신부 친구들만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 젊었을 때는 맞벌이가 흔하지 않아서 남자는 물론 돈 벌이를 원칙으로 하지만 여자는 결혼을 하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사표를 던지던 시절이라, 여직원의 청첩장이 곧 사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혹시 어느 여직원의 결혼설이 있으면 그 자리를 누가 메꾸나 하는 것이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외국인 회사는 예외였다. 결혼을 해도 여직원이 능력만 있다면 계속해서 직장에 다닐 수 있어서 그 때에도 외국 회사는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을 선두로 많은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여성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도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한마디로 교과서 영어라 외국인 지점장들은 맘에 드는 비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외국 언어 연수는 커녕 지금은 흔해진 외국 여행 한 번 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외국인은 학교 추천으로 비서를 구했는데 일을 시작해 보니 자기 말인 영어를 거의 못 알아 듣고 웃기만 해서 smile secretary 로 불렀다는 소리도 들었다.
당시엔 스마트 폰은 물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외국인 비서의 중요한 업무는 보스의 영문 편지를 타자로 치는 일이었다. 우선 보스가 자필로 쓴 편지를 타자로 쳐서 깨끗하게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데 보스들이 글씨들 흘려 쓰는 일이 많아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면 그건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 하나 없이 편지를 타자로 친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치다가 틀리면 다시 치기를 몇 번을 하는 적이 당연히 많았다.. 지금은 워드로 모든 문서를 편집 하니까 편지의 일부를 오리든지 복사하고 고치고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때는 하루 종일 타지를 치다 보면 어깨가 너무 아퍼서 진통제를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또 겨우 끝을 냈다고 하더라도 보스의 마음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꾸면 수정을 못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쳐야 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가끔 보스의 말을 잘 못 이해해서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다. 비서 초보자의 경우 보스가 two copy, please 했는데 two coffee 로 알아듣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는 실제로 발생하곤 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외국 생활을 잠깐이나마 하고 돌아온 필자는 그 때 원하는 대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워낙 자리는 많고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 여성 인력이 없어 대기업. 외국회사. 대사관 같은 곳 중에서 맘에 드는 조건을 골라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우리가 살았던 젊은 시절이 태평성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아기를 등원시키는 며느리가 손녀를 유아원에 들여보내고는 종종 또래 엄마들과 근처 커피숍에서 모닝커피 타임을 가진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의 엄마들이니 할 말도 많을 것이고 정보도 나누면서 즐거운가보다.
모닝커피 타임이라 하니 예전에 필자가 활동했던 SIWA(서울국제부인회)가 생각난다. ‘시와’는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 부인들의 모임인데 우리나라 부인들도 회원이 되면 같이 어울릴 수 있었다. 여행 클럽 등 다양한 모임이 있었는데 필자는 영어회화 클럽에 가입했었다. 홍은동의 스위스 그랜드호텔(지금의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정기적인 바자회도 열려 각 나라의 특산품을 판매하고 각국의 요리도 소개되었다. 여기서 얻은 이익금은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필자는 바자회에 낼 상품으로 크리스마스용품과 헝겊으로 리스 장식을 만들었다. 각국의 부인들과 모여 예쁜 장식품을 만들던 시간은 참으로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또 ‘시와’에서는 ‘모닝커피 오픈 하우스’ 행사가 있었는데 필자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오는 소식지에는 ‘모닝커피 타임’ 행사 관련 기사가 실렸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집에서 모닝커피 오픈 하우스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시와’ 회원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주로 열리는 장소는 성북동이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필자는 매번 참석했다. 당시 필자는 무척 당돌하고 얼굴도 두꺼운 용감한 여자였던 것 같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외국인 부인들뿐인데 유창한 영어 실력도 아니면서 찾아다녔으니 말이다.
소식지에 쓰여 있는 대로 구불구불한 성북동 언덕의 오픈 하우스 집을 찾아가면 골목 입구부터 화살표가 그려진 예쁜 팻말이 장소를 안내해줬고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렌트한 집이었는데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면 많은 외국 부인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오래 알아온 친구처럼 함박웃음으로 맞아줬다.
매우 어색할 것 같았지만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오히려 용감하게 인사를 건네며 어울릴 수 있었다. 거실 한쪽 테이블엔 향긋한 커피와 직접 구운 쿠키를 가지런히 담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접시에 쿠키 몇 개와 커피 한 잔을 들고 아무 데나 섞여서 이야기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서양인보다는 아시아계 부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필자보다 훨씬 나이가 어려 보이는 필리핀 아줌마 캐시는 필자를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그녀에게는 세 살짜리 예쁜 딸 ‘리아’가 있었고 한국에 온 것은 바나나 수입 일을 하는 남편의 사업 때문이라고 했다. 친정엄마는 필리핀에서 이름 좀 있는 배우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공지했던 시간이 되면 넓은 거실에 둥글게 모여앉아 자기소개도 하고 활동내용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기소개 이외의 내용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필자 소개를 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도 했지만,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몇 번의 ‘모닝커피 타임’을 가진 후 캐시와 친해져 근처에 있는 캐시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하기도 했다. 집안 분위기로 보아 필리핀 상류층인 듯했다. 캐시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하는데 같이하자고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캐시 집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공부를 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읽고 토론하는 형식이었다. 필자는 잘 모르는 것이 있어도 열심히 질문도 해가며 동참했다.
그 후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캐시를 외국인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했고 미사를 드리고 싶다 해서 성북동 성당에도 같이 가줬다. 또 아기 옷을 사러 유아복 전문점도 같이 다니면서 우리나라 아줌마의 친절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캐시가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까지 친하게 지냈으니 필자는 썩 훌륭한 민간외교를 한 셈이다.
몇 년 열심히 다니다가 그만둔 ‘시와’ 모임은 지금도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커피 한잔을 들고 젊었을 때의 잊지 못할 즐겁고 멋진 시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보았다.
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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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