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서 다양한 피부 증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후기의 걸출한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戇憲 徐邁修, 1731~1818)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심한 여드름 자국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뒤 그동안 수많은 여드름 환자를 진료해온 필자가 보기에도 서매수 초상화에 묘사된 여드름 자국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서매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천연두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얽은 자국’이 코, 입 그리고 턱 주위에 퍼져 있었다. 요컨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얽은 자국’이 모여 있었고, 이마와 양 볼에는 상대적으로 증상 밀도가 낮았다. 이는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皮脂腺)이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사체인 선비가 청소년 시절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뇌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드름 때문에 겪는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라 고개를 갸웃하며 받았다. 그런데 첫마디가 “저는 ○○○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말을 이어왔다. “얼마 전 여드름을 치료해주신 ○○○의 아비입니다.” 그제야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학생인 그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필자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이런 상태가 되도록….’ 그 정도로 여드름 병변이 심각했던 것이다. 대학생인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방치한 부모의 무관심을 속으로 탓했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의 상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여드름이 치유되자 우울해 보였던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로서도 너무나 기쁜 일이라 자연스레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자의 부친은 필자에게 “요즘 아들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젊은 학생이 그동안 느꼈을 마음고생이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그 무렵 인천에 사는 한 여학생이 심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문득 필자가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하찮은 뾰루지 하나가 이마나 볼에 생겨도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는 그런 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 환자의 부친과 통화를 하면서 새삼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겼다.
앞서 언급한 초상화의 주인공도 젊은 시절 심한 여드름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여드름을 ‘청춘의 꽃’이라고 했던가. 이 그럴듯한 말에 숨겨진 심리학적 해석을 차치해도, 그동안 여드름 때문에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잔영이 기록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날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외레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 헬싱보리와 덴마크 헬싱괴르가 인접해 있다. 뱃길로 고작 7km.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에게서 선박 통행세를 거둬들이던 황금의 도시.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싸움을 벌이던 곳.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도시이지만 매력은 폴폴 넘친다.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북스테후데가 처음 오르간 연주를 했던 성모교회
스웨덴 남서부 말뫼후스 주 북부의 항구도시인 헬싱보리. 느릿느릿 여유롭게 쿨라가탄(Kullagatan) 쇼핑가를 배회한다. 골목은 넓지만 길지 않고 골목 숫자도 많지 않아 길 헷갈릴 일도 없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햇살도 따뜻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딕양식의 멋진 생마리 교회(St. Mary)에서 발길을 멈춘다. 100년(1350~1450년경)에 걸쳐 만들어진 이 교회는 단아하면서도 멋스럽다. 경내에는 아름다운 제단이 있고 바닥에는 16~17세기의 무덤 석판이 흩어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창문으로는 옅은 햇살이 스며든다. 2층 발코니에 걸친 듯한 두 개의 오르간 파이프가 시야에 들어온다. 17세기, 청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가 자유롭게 연주하는 모습이 아련히 스쳐간다.
청년 때는 헬싱보리(1657~1658), 그 후에는 헬싱괴르(1660~1668), 31세부터는 독일 뤼벡에서 40년 넘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북스테후데는 헨델, 바흐 등 후기 바로크 거장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05년, 20세 청년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곡에 매료당해 아른슈타인에서 뤼벡까지 400마일을 걸어 그를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3개월간 머무른다. 당시 북스테후데는 68세의 고령으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단, 자신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북스테후데의 딸을 본 바흐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북스테후데의 딸은 엄청난 박색이었다고 한다.
헬싱보리의 위대한 영웅 ‘망누스 스텐보크’
중앙광장으로 나가 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시 청사를 본다. 네오-고딕 형식으로 지은 시 청사 건물엔 63m의 탑이 있고 매일 차임벨이 연주된다. 196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건축물이다. 시 청사 앞에는 헬싱보리의 전쟁 영웅인 망누스 스텐보크(Magnus Stenbock, 1665~1717)의 말 탄 동상이 있다.
보기만 해도 위상이 느껴지는 스텐보크는 헬싱보리 전투(1710년 2월 28일~3월 5일)에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중앙거리를 벗어나 체르난(Ka˙˙rnan) 요새를 향해 오른다. 오르는 길목에 거인 골리앗의 목을 잘라 짓누르고 있는 다윗상이 있다. 헬싱괴르를 째려보면서 ‘넘보면 죽는다’고 위협하는 느낌의 모습이다. 성벽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짙은 가을색이 내린 요새에 탑 한 기(높이 35m, 폭 15m)가 우뚝 서 있다. 원래 14개였으나 전투 때 다 부서졌다고 한다. 체르난 요새는 덴마크령일 때인 1310년에 짓기 시작해 1320년에 완성된 감시탑, 방어탑이다. 19세기에 개·보수해 원형을 복원했고 1967년에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둔커 기업가, 웃손 건축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을 만나다
요새를 비껴나 외레순 해협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파제처럼 길게 이어지는 위티 다리의 이름이 재미있다. 세계적인 조각가 칼 밀레스(Carl MIlles, 1875~1955)가 만든 긴 석조물 꼭대기의 천사 조각상을 고개를 외로 꼬고, 눈을 치켜뜨고 쳐다본다.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둔커문화센터(Dunkerskulturhus, www.dunkerskulturhus.se)도 기웃거린다.
이 문화센터는 전시, 공연, 연주회 등이 열리는 종합예술센터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한 요른 웃손(Jorn Utzon, 1918~2008)의 아들인 킴 웃손(Kim Utzon, 1957~현재)의 작품. 웃손 집안은 3대가 유명한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둔커하우스는 헬싱보리의 기업가이자 사업가인 헨리 둔커(1870~1962) 가의 소유다. 둔커 일가는 고무공장을 1981년에 짓고 고무장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헬싱보리 대극장(1921년 개장) 앞에서 만난, 해학이 넘치는 햄릿 돌조각 표정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길 건너의 대극장을 바라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 1918~2007) 감독을 생각한다. 1944년, 26세의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이 극장의 전임 연출가가 된다. 그의 첫 직장이었다. 당시 말뫼후스에 새 극장이 생기면서 헬싱보리 극장은 존폐위기 상황. 그는 부임해서 시나리오 을 썼는데 영화화됐다. 다음해(1945년)는 라는 작품을 첫 연출했다. 2년간 머무르는 동안 그의 역량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보조금은 되돌아왔고 그는 본격 영화감독이 되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화인들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작품들. 그가 머물렀던 집, 담벼락 사진 속의 젊은 감독은 예리한 눈빛이었다.
◇ Travel Tip!
가는 방법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운항하는 직항이 없다. 핀란드 헬싱키와 서울 간 직항노선은 있다. 헬싱키를 경유해 페리 여객선을 타고 스톡홀름을 기점으로 헬싱보리까지 이동하면 된다. 헬싱보리에서 스칸드라인을 타면 5분 만에 덴마크 헬싱괴르에 도착한다. 스칸드라인은 매시간 20분 운항된다.
현지 교통 도시가 작아서 도보로 다니면 된다.
통화 정보: 스웨덴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지만, 유로화가 아닌 스웨덴 크로나(SEK)를 공식 통화로 사용한다. 현지 은행이나 ATM을 이용하면 된다.
맛집과 주류 헬싱괴르 마리 성당 주변이나 쿨라가탄 거리의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스웨덴은 주류 숍이 따로 있는 것도 특색. 코파르베리(Kopparberg, 사과맥주, 7%)가 맛있다.
언어 공용어는 스페인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잘한다.
헬싱괴르 여행 정보사이트 www.helsingborg.se
주변 연계 여행지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1882~1973) 6세와 첫 번째 왕비인 ‘코넛 공녀 마거릿(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1882~1920)’이 사랑한 여름 궁전인 소피에로 궁전이 있다. 소피에로 궁전은 오스카르(Oscar, 1829~1907) 2세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받았다. 아돌프 6세와 마거릿은 식물에 관심이 많아 궁전을 영국식 정원으로 가꿔 ‘스웨덴 정원 꾸미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소피에로 궁전은 현재 카페로 이용되고 있으며 헬싱보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이문재(李文宰·57) 시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2014년 을 펴내며 이런 말을 썼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지금 여기 맨 앞에 선 그는 를 통해 실천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평소 자본주의 시대의 생태계와 소비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일간지에 실린 짧은 서평을 보고 를 읽게 됐다. 책의 저자인 하랄트 벨처(독일 사회심리학자)라는 인물은 낯설었지만, 내용은 익숙하리만큼 그의 시집과 같은 맥락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미래에 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제가 갖고 있던 에콜로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자본주의를 소비사회의 틀로 분석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쓰는 칼럼들도 어떻게 소비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죠.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건드려 주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확대해줘서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하랄트 벨처는 미래를 되찾으려면 효율성과 소비, 성장에 기초한 삶에 대해 저항하고 삶의 기준을 행복과 지속가능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행동하기’를 통한 실천적 저항을 제안한다. 이 교수 역시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며, 무엇보다 우리 시대 중·장년의 각성과 의미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기성세대가 좋은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후손들의 미래는 없는 거잖아요.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후기 산업사회, 절정을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미래세대의 것을 일방적으로 수탈한 셈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의 자원은 미래세대와 공유하고, 남겨줘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함부로 소비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중·장년세대가 뼈아픈 각성을 해야 해요. 는 그런 이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물질과 풍요는 어디서 왔는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미래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행복
책에는 가치가 실천을 이끌어내는 시대를 지나, 실천이 가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실천해야 하는 것과 그들이 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한 리서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죠. 경희대학교 학생 1만4000명이 참여한 ‘미래대학리포트’를 살펴보면 ‘현재와 50년 후 미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1순위가 모두 ‘행복’이에요.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죠. 우리 아이들이 느끼고 있을 불행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흔히들 청년세대에게 "너희는 왜 꿈이 없느냐. 도전하지 않느냐"고 꾸짖지만, 이 교수는 그러한 행동은 가혹하다고 말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는 왜 비타민을 먹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굶어가는 사람에게는 물을 먼저 마시게 하고, 조금씩 먹여가며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저항 역시 청년 세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의 행동이 솔선수범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기성세대와 행복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청년세대의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청년들로 하여금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말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내가 안드로이드를 안 쓰고 애플을 쓰면 쟤들하고 다르다. 폭스바겐을 타지 않고 아우디를 타면 다르다. 어느 지역에 사는 것, 어떤 옷을 입는 것 모든 것이 소비를 통해서 신분, 계층, 삶의 질이 구분되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반성, 성찰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에서 덜 소비하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죠.”
에세이 쓰면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어
그는 생태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몇몇 사람의 운동이나 캠페인 정도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일 수는 없다. 중금속, 방사능, 초미세 먼지 등 이미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그는 결국 정치라고 말한다.
“이때의 정치는 여의도 정치, 청와대 정치 이런 게 아닙니다. 자기 정치를 의미하죠. 책의 서두에 실린 ‘성공적인 저항을 위한 12가지 지침’ 중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정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정치의 주체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법칙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정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지되, 그것을 표현해야 해요.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과 만날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죠.”
의 부제는 ‘스스로 생각하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다양한 사례들을 담았다. 이 교수가 실천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시를 쓰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또,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자주 걸어 다니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글쓰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서울시와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특히 은퇴 전후 중·장년층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되고요.”
‘자기 성찰과 재탄생’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10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게 된다. 5편은 과거 삶에 대해, 3편은 현재, 나머지 2편은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낸 10편의 에세이를 묶어 놓으면 한 권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특히 중년 남성분들의 경우 공통적인 반응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등을 쓰라고 하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 임원 은퇴자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살아오면서 그런 순간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며,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노라 말하죠. 글쓰기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인생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다 보면 삶의 의미가 만들어져요. 누구나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가 그것을 못 돌아보게 했던 거죠.”
중·장년 수강생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대부분이 미래에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환원하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쓴다는 것. 이 교수는 그런 이들이 같은 책을 읽으면 남다른 깨우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요. 이를 통해 그동안 의미 있게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미래 세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죠. 누구나 그럴 수 있을 텐데, 그걸 알게 해주는 촉매제나 불씨가 없이 살아왔을 뿐이에요. 책에는 3~5퍼센트 법칙이 나옵니다. 각 분야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면 사회가 변한다는 거죠. 저는 우리 기성세대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어요.”